강해
2013.08.12 23:47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4(8월 18일-24일)

조회 수 408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4

8월 18일-24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818

앞을 내다봄

 

창세기 35:1-7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들에 있게 될 영광스러운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대환란이 끝나갈 무렵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상속자들 중 생존한 자들에게 일어나라(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는 구절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임) 벧엘로(하나님의 집이라는 뜻) 올라가라(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때 늘 올라간다는 표현을 사용함.) 그리고 제단을 쌓으라(이 말씀에 따르면 이들이 돌아가는 목적과 결과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이때가 되면 이스라엘 전체에서 우상으로부터 돌아서고 수세기 동안 그들을 더럽혀온 죄들로부터 돌아서서 주님 앞에 깨끗하고 거룩한 모습이 되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날 겁니다( 9:24, 36)”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은 것은 이스라엘이 사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됨을( 3) 예언적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제단을 쌓으려고 올라가는 모습은 고난의 날의 울부짖음에 대해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경배하려는 것으로 이것은 야곱의 고난의 때로부터 벗어 나게 될 남은자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드디어 모든 이상한 신들이 그들의 손에서 내던져 질 것이고 이로써 그들의 세상적 삶을 상징하던 것들(귀고리, 8:24-25)과는 결별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상수리 나무 밑에 숨기는 것은 매장을 상징하는 것으로 드디어 이 민족이 나무로 만든 형상들과 돌로 만든 형상들을 죽은 것들로 간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이와 같이 이르렀으며 이 표현에서는 그가 왔다는데 초점이 맞추어 있지 않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왔는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언젠가 주님 앞에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오게 될 것입니다. 엘벧엘이란 이름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더 그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8 19

잘못된 행실로 쓰임 받지 못함

 

이번 에피소드는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이라는 이상한 사건과 더불어 마무리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이전에 창세기 24: 59에 한번 언급되었을 뿐입니다(이름 없이). 오래 전 사건이고 보면 지금쯤은 상당히 나이가 들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벧엘로 왔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야곱이 벧엘로 돌아온 후 죽기 전에 야곱을 보고자 왔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그 밑에 묻은 그 나무를 애곡의 상수리라고 불렀으니까요.

리브가가 제외되고 어째서 드보라가 언급된 것일까요? 우리는 리브가가 야곱의 도주를 어떻게 계획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에서의 격노가 풀릴 때까지 몇 날 동안(27:44) 라반과 함께 머물도록 하려고 야곱에게 고향을 떠나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일이 어떻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결국 자식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야곱이 도주한 이후부터 리브가는 성경기록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가끔 가족과 유모와 연관되어 등장하다가 마지막으로 이삭과 함께 막벨라 동굴에 묻혔다고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리브가의 잘못(이삭을 속인 것)은 결국 성경기록에서부터 그녀를 제외시켜버린 셈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여인들도 자기 보다 영적으로 어리다고 생각되는 남편에게 불순종하거나, 남편을 조종하거나, 남편을 배제시키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불신과 불순종은 결국 손실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드보라에 대한 기록은 리브가처럼 겉보기에 유명하고 중요한 인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된 행실로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다윗의 용사들에 관한 기록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경우를 목격하게 됩니다. 영웅적인 요압이 당연이 그 명단에 들어 있을 것으로 우리 모두 예상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대신 그의 형제들 아비새와 아사헬과 그의 무기든 자들은 언급되고 있는 반면 요압 자신은 명단에 없습니다(삼하 23:18, 24, 37). 요압은 스스로 자격을 박탈한 셈입니다.

 

 

8 20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야곱은 아버지의 고향 마므레를 향해 남쪽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이동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가족들이 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또 다른 큰 슬픈 사건이 발생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녀는 고통과 고뇌 가운데서도 새로운 아들을 낳게 된 다른 좋은 소식에 위로를 얻었으나 그녀의 지상생애는 이미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으면서 새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나의 고통 혹은 슬픔의 아들)라고 지었습니다. 생명을 잃어 가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그 아들을 그렇게 불렀지요.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자신을 끝까지 격려코자 그 이름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아마 그가 태어남으로 그에게 오게 될 복과 번영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자녀를 낳다가 죽은 사건 기록입니다. 그 사건의 묘사는 단순한 연인과 고상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라헬의 생애도 슬펐고 그녀의 마지막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자기의 남편이 될 그 사람의 사랑을 빼앗긴 채 시작된 결혼 생활이었고 하난에서의 불행은 그녀가 질투의 희생자였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녀는 미신을 믿었고(30:14) 거짓 신들을 숭배했으니(31:19)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통한 위로도 받지 못했을 겁니다. 적어도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는 그랬을 겁니다. 이런 세상적인 모습들은 벧엘로 이주하고 나서야(35:2, 4) 완전히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요셉 말고 또 다른 아들을 원했습니다(30:24). 그러나 그녀의 지혜롭지 못하고 열정에 찬 소망은(30:1) 이주 기대치 못한 방식으로 응답되고 마는군요. 그녀는 그 아들을 얻었으되 그 선물을 받는 그 순간 죽고 맙니다.

 

 

8 21

창세기 35장 묵상.

 

35:9 하나님께서 나타나자 이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니라.”고 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시기 이전에도 여러 번에 걸쳐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이때는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35:11 “나는 곧 전능 자니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이 칭호를 사용하셨던 과거의 두 경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칭호를 17:1에서 할례의 언약을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28:3에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그에게 전능자 하나님의 복을 내려 달라고 했을 때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것처럼 동일한 칭호를 사용하심으로 야곱에게 신선한 확신을 주고 계십니다. 이로써 이 칭호는 조상들의 씨에게 하신 그 땅에 대한 약속과 연관 됩니다. 그 땅의 축복과 언약의 수립은 9-13절에서 영원히 확립되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이 야곱에게로 전수된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35:11 “다산하고 번성하라.” 창세기에는 이 명령이 다섯 번 나오는데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두 번은 창조물에게 하신 것이고(1:22, 8:17), 두 번은 사람에게 하셨는데 땅을 다시 채우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1:28, 9:1).

35:14 우리는 헌물과 기름이 연관된 것을 이미 본적이 있습니다(28:18). 그러나 이번에는 음료 헌물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22:14, 53:12).

35:16 “에브랏에 조금 못 미친 곳 에브랏은 베들레헴입니다(19). 야곱의 이번 아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주목하십시오. 그의 모든 다른 아들들은 외국에서 태어났으나 이번 아들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아들들은 아담 안에서 잃어버려진 채로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나, 단 한 아들은 예외입니다. 그는 영원 과거에서 태어났습니다(1:15). 아버지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외국에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태어났고 그 길은 베들레헴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갈보리로 가는 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과거( 1:1전 이전)에 시작된 겁니다.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5:2) 그러나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나오셨습니다. 이것은 베냐민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러 방면 중 첫 번째 것입니다.

35: 18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너무도 사랑스러운 문장이군요.

35:20 라헬을 향한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한 애정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이스라엘을 여행 했을 때 우리는 선물가게에서 빠져 나와 라헬의 무덤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 곳은 아주 경계가 엄했습니다. 그 어떤 이방인나 관광객도 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그들의 성경책과 민족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설명했고 그들은 결국 우리를 안으로 인도해서 라헬의 시신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요새처럼 경비가 엄한 동굴 안으로 데려 갔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무덤보다 더 중요시 되고 있는 곳은 다윗 왕의 무덤뿐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곳입니다.

35:23 이번 구절과 다음 세 구절에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들의 명단들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에 발견된 명단은 출생 순서로 작성된 것도 아니고 에서와 만나게 될 때 배치했던 순서(이때는 자기 아내들에 대한 그의 선호도에 따라 자녀들을 배치 했었습니다)도 아닙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확인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명단이 작성되었습니다.

35:32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 이들은 라헬의 아들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았고 잇사갈과 스불론보다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다만 빌하는 레아와 라헬보다는 뒷자리에 그리고 실바보다는 앞자리에 놓였는데 이는 두 몸종 중 먼저 야곱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8 22

두 번의 범죄

 

야곱의 인생에 있어 또 다른 끔찍하고 너무도 슬픈 사건을 맏아들 르우벤이 저지릅니다(35:22). 이 두려운 죄로 인해( 18:8, 고전 5:1) 그는 장자권을 상실하였고( 49:4) 끝없는 수치와 오명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묘한 우연인지 아니면 무언가 속 뜻이 숨겨있는지 모르겠으나 야곱의 막내아들의 출생은 맏아들의 죄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베냐민과 르우벤 지파의 향후 역사를 감안해보면 처음 난 자들 중 많은 자들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인 자들이 처음이 되리라.”는 원칙이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는 셈입니다.

라헬의 아들들은 적절한 과정을 거쳐 전면에 부상합니다. 라헬은 처음에는 사랑 받은 본 부인으로 자녀가 없었으며(30:1)이로써 야곱을 속임수로 압박했던 언니 레아보다는 늘 불리한 여건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라헬에게 기회가 왔고 그녀는 단지 두 아들만 얻는 것이 아니고 이 두 아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좋은 때에 태어난 것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과 베냐민은 땅을 유업으로 받았고 에브라임은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 왕국 열 지파를 대표했으며 반면 르우벤은 장자로서 자신의 것일 수도 있었던 장자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 속에서 섭리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며 결국은 그분의 의가 서고 잘못은 바로 잡히도록 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볼 때 그 과정이 느리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요.

35:22 이 구절에서는 야곱이라는 이름이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이번 사건은 이 가족의 언약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고 언약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세 아들이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잔인함은 3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르우벤의 정욕을 다루고 있는 바 그는 근친상간을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아들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49:3-7)

35:22 이스라엘이 그것을 들었더라.” 당연히 빌하도 르우벤도 이 사실을 야곱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악의를 품은 다른 형제들이나 여인들의 수근거림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부인을 여럿 둔 그의 가족에서 일어난이 사건은 그에게 큰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언약을 더럽힌 것으로 간주해서 이스라엘 안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일로 규정했습니다.

오래 전 제가 10대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던 적이 있는데 마침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의 생애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을 가로 막더니 대뜸 제임스 형제님,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런 끔찍한 사람들을 선민으로 택하신 건가요?” 라고 매우 당혹해 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당한 질문이지요. 사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저지른 죄와 행실과 수치스런 모습은 충격적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단다.” 제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족을 택하여 그들의 행실과 그 행실 뒤에 있는 동기 등을 다 밝히 드러내시면 이 세상 그 어떤 종족도 동일한 죄악 된 모습일 거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아담으로부터 유래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민족들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민족을 택하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친히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 다만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셨으므로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시므로 주께서 강한 손으로 너희를 데리고 나오시고 너희를 노예들의 집에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구속하셨나니( 7:7-8)

은혜, 바로 이것이 정답입니다. 창세기 35장에서는 4번의 장사지냄이 나옵니다. 야곱의 우상들을 묻은 사건(4), 유모를 매장함(8), 아내의 매장(19),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매장(29)이 그것입니다.

 

 

8 23

이삭의 죽음1

 

이삭의 생애가 마무리된 기록이 여기에 나와 있으나 실은 이삭은 요셉이 30세 되던 해 그러니까 이집트로 팔려간 지 13년이 지나서 죽었습니다. 앞서도 이런 비슷한 방식의 기록이 있었는바(11:32, 25:8) 이는 야곱의 가족의 머리로서의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함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27:1-2) 40년이 넘게 살았는데 아마도 야곱이 귀향한 후 몇 년 간은 아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주목할 만 합니다. 그가 숨을 거두어 죽고 이 기록은 두 개의 별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동시에 일어나긴 했지요. 그가 그 영을 주신 하나님께 그 영을 돌려드린 것(숨을 거두고)과 죽은 적이 그것입니다.

라헬에 관해 묘사된 것과 비교해 보십시다(18).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이 두 묘사의 차이는 그 둘의 나이의 차이 그리고 죽음을 맞게 된 여건의 차이 때문입니다. 둘 다 죽은 것은 같으나 이삭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기꺼이 죽을 마음이 있었던 반면 라헬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혼이 떠나는 것이나 숨을 거두는 것이나 존재의 멸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됨을 뜻합니다. 옛 믿음의 조상들은 실로 일시적 약속 그 이상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대했고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도시를 바라보았습니다( 11).

이삭 역시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졌으니 이는 다가올 새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암시를 제공해 줍니다. 즉 사랑했던 사람들이 먼저 가서 잠시 떨어지게 되었으나 다시 재결합을 하게 되니까요.

이들 표현들로 볼 때 죽음은 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분명하며 결코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도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8 24

이삭의 죽음2

 

이삭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들(야곱과 에서)의 삶과는 너무도 큰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의 생애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는 반면, 이삭의 생애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두 번의 죄(26, 27)를 제외하고는 이삭은 목가적이고, 조용하고, 평안한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같이 음미하며 살았습니다(26:24).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통해 그분의 목적을 어떻게 진행하고 발전시키고 계시는지를 평화롭고 조용히 (별 사건 없이) 지켜보며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사용한 한 단어가 이삭의 성품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의 두려워하는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31:42, 53).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상례적인 표현과 너무도 대조되는 충격적인 용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보다는 하나님을 조금은 먼 곳에 계신, 그리고 강력하신 분, 복종해야 하는 분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야곱의 성품의 뿌리는 아버지 이삭의 것과 동일했으며 야곱은 아버지의 그런 성품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깊은 경외감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매우 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23부터 몇 구절에 걸쳐 족보가 삽입된 이유는 이삭의 세대들(25:19)에 관한 긴 기록들이 이번 장에서 마무리되고 에서와 야곱의 세대들(36:1, 37:2)에 관한 새로운 부분이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가문은 이로써 종결되었고 야곱은 아버지 밑에 있던 지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야곱 가문의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행사하게 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3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7(9월 8일-14일) 이우진 08.30 4225
42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6(9월 1일-7일) 이우진 08.26 3993
41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5(8월 25일-31일) 이우진 08.15 4175
»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4(8월 18일-24일) 이우진 08.12 4084
39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3(8월 11일-17일) 이우진 08.12 4204
38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2(8월 3일-10일) 이우진 07.25 3591
37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1(7월 28일-8월 3일) 이우진 07.19 3378
36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0(7월 21일-27일) 이우진 07.11 3486
35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9(7월 14일-20일) 이우진 07.04 3905
34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8(7월 7일-13일) 이우진 06.27 3789
33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7(6월 30일-7월 6일) 이우진 06.20 3443
32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6(6월 23일-29일) 이우진 06.17 3398
31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5(6월 16일-22일) 이우진 06.10 3478
30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4(6월 9일-15일) 이우진 06.10 3537
29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3(6월 2일-8일) 이우진 05.27 3952
28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2(5월 27일-6월 1일) 이우진 05.27 3841
27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1(5월 20일-26일) 이우진 05.13 3430
26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0(5월 13일-19일) 이우진 05.13 3506
25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19(5월 6일-12일) 이우진 04.26 3281
24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18(4월 29일-5월 5일) 이우진 04.26 333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 4 Next
/ 4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