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10.10 00:59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43(10월 20일-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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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43

10월 20일-26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1020

르우벤과 그의 형제들 간의 대조적 모습

 

르우벤이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그 아이에게 죄를 짓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보라, 우리에게 그의 피도 요구하는도다, 하니라.( 42:22)

이 시점에서 르우벤은 자기 형제들을 꾸짖으면서 자신이 한 말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는 잘못된 점을 꾸짖기는 하나 도덕적인 가치는 별로 없는 나약한 모습입니다. 르우벤은 불안정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사람이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문제는 그 불의한 행동을 막지도 않았고 잘못을 바로 잡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이 다 끝난 후에 그런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형제들이 요셉을 팔려고 했을 때 그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막을 만큼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가 그 일을 두고 얼마나 후회하고 애통해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실을 아버지께 고백할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감정이 북바치자 물처럼 불안정한 영을 지닌 르우벤은 비난의 화살을 형제들에게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도 공범인데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하긴 했지. 그러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말고 말하는 식입니다. “그 자들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한 것뿐이라고!” 이렇게 둘러대는 사람이지요. 이것이 인간 속에 들어있는 보기 흉한 나약함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형제들은 20년 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요셉에 대해 분명히 생각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옛날에는 그 꿈쟁이라고 낙인을 찍었으나 이제는 우리 형제”, “그 아이라고 부르고 있군요. 조롱하던 태도가 적어도 일말의 관심과 동정으로 바뀌었군요.

 

 

1021

이집트에 있는 곡식 4

 

요셉과 예수님의 비교는 42장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형제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요셉은 그들의 은밀한 대화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23). 주님께서도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지요.

요셉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우신 것처럼( 19:41) 울었습니다(24). 이 눈물은 사람들이 그에게 한 그 어떤 짓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거부나 증오를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보다 뛰어난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학대한 자들을 사랑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세상이 주님을 멸시하고 거부하였는데 말입니다.

형들이 자신을 거부했음에도, 요셉은 그들이 타국 땅에 머무는 동안 필요를 공급해주었습니다(25).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수많은 세월 동안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시고, 먹이시고, 보존해오셨습니다( 30:11, 1116).

그의 형제들은 일시적으로 한숨 돌리는가 싶었지만 곧바로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26-28). 그들은 요셉이 그들을 다루고 있는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루 하나에서 돈이 발견되자 여관에 머물던 아홉 사람에게 큰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들이 집어 넣지도 않은 돈을 보자 그들의 양심은 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울부짖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어떤 죄가 자신들을 찾아내었음을 알게 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과거의 죄가 그들을 붙든 셈이지요.

그들의 마음은 기진하였습니다(28). 그들은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고했는데 그때 보니 모든 자루에 다 돈이 들어있었으며 이에 그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35).

이 사건으로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주는 것 말고도 요셉은 그들을 궁지로 몰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또한 이들에게 곡식을 거져 준 것입니다. 그 어떤 형태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그들의 사랑과 애정을 기대할 뿐입니다.

죄책감에 젖은 형들에게 과거의 행적이 놓여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만이 그와 같은 일을 일어나게 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두려워하는 바로 이것이 모든 선한 일들의 시작인바 그들에게는 유익한 사건인 셈이지요. 생명이 거저 주어지는 것을 계시 받게 될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당혹해 합니다.

뭔가 잘못했으니 반드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나는 고통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주머니를 털든지 잘못을 시정하든지 해야 합니다. 요셉의 곡식과 내 돈을 갖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거져 주어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가능한 요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자 합니다. 이 곡식을 다 먹으면서 기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다시 돌아가서 그 이상한 통치지와 대면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것이 양심이 깨어난 대부분의 죄인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 그들의 고난으로부터 일시적인 안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다루어왔습니다. 죄책은 심히 꾸짖으면서도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축복은 거져 주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이상한 분을 다시 만나는 그 공포는 가능하면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죄에 대해 인식했던 과거를 기억할 겁니다. 죄인인줄은 알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도 알았는데, 지옥에 갈 두려움에 떨었는데, 무조건적인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거져 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얼떨떨 했었는지요? 그래서 그 결단을 자꾸 뒤로 미루었던기억이 나시는지요?

이렇게 해서 이번 장이 마무리 됩니다. 상황은 풀리지 않습니다. 죄인들이 가능하면 버텨보려고 하지요.

 

 

1022

진지한 거짓

 

이 모든 일이 나를 대적하는도다.”(42:36)

사람은 때로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사실을 말하나 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정보가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야곱은 모든 사실을 다 수집했으나 하나님을 배제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미리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고 있는 중입니다.

36절에서 우리는 앞서 여러 번 경험했던 야곱의 옛 모습을 다시 한번 보게 됩니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아들들을 대적하는구나.” 라는 고백대신 나를대적한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군요. 물론 이간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처한 딱한 상황이고 보면 누군들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본성에 속한 반응대신 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야곱의 믿음 없는 반응에 우리 모두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도 여러 번 그리했던 것처럼 야곱은 이번에도 전적으로 인간적 관점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그 어떤 목적이 들어있을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이 모든 일이 나를 대적하는도다.” 라는 고백은 슬프고 안타까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모든 일은 후일 결정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옛 사람은 4가지 실수를 범했습니다.

1. 그는 요셉이 죽었다고 했으나 실상은 죽지 않았습니다.

2. 그는 시므온도 이집트에서 살아남아있다고 생각만 한 것 같은데 그는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3. 그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이 그에게는 영원한 손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이 모든 것을 놓고 결국은 모든 일이 자신을 대적한다고 푸념을 합니다.

참된 신자라도 이처럼 시야가 안 좋을 수 있다니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의 조상들의 시대에도 항상 그리하셨듯이 하나님의 전혀 실패 없는 섭리가 여전히 이 순간에도 역사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낙담하거나 절망적인 푸념을 쏟아놓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직 여러분에게 계시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1023

창세기 42장 묵상

 

Corn(곡식, 1). 이 단어는 원래 옥수수를 가리키나 성경에서는 모든 종류의 곡식을 지칭합니다. 고기를 뜻하는 meat가 모든 종류의 음식을 지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24절에서 인질로 잡힌 사람은 시므온입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35:23)이나 그는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를 보호하려고 했었으며 그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시므온은 서열로도 둘째이며 이미 그 잔인함을 보인바 있습니다(34:25-30). 따라서 요셉을 제거하는 음모를 주도한 자로 간주될 수 있을 겁니다.

37절은 르우벤이 불안정한 감정을 노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안 자체는 잘못돈 것이 없으나 그가 이집트에서 베냐민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권한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일이 잘 안되었을 경우 자기 두 아들을 죽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이 제안에 설득되지 않습니다. 결국 그의 거부로 자신과 가족 전체의 유익이 될 일이 지연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진행되는 것 또한 지연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만 홀로 남았도다.”(38) 다른 아들들이 다 있는데 어찌 그가 혼자 일 수 있습니까? 이것은 라헬에 대한 그의 편애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편애로 가족이 겪은 비극을 생각해 보십시오!) 라헬의 자식 중 하나만 남았다는 말을 했으나 나머지 자식들은 얼마나 모욕을 느꼈을까요?

그럼에도 그들은 이 상황을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이 모든 불행의 뿌리가 바로 그 편애와 이에 대한 그들의 원한 때문이었으니까요.

 

 

1024

요셉의 형제들에게 압박이 가해짐 1(43)

 

결국 모든 곡식이 소진될 때 까지는 이집트로의 여정이 결정되지 못합니다. 이는 형들에 의해 팔려 노예 생활을 겪었던 요셉처럼 시므온도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음을 의미 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자기 아들들의 요구사항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3-5).

이스라엘은 자기 아들들의 말을 믿기는 하지만 그의 육신에는 거짓말을 하고 속이려 하는 성향이 여전이 남아 있습니다(6). (동생이 없다고 하지 왜 말했느냐는 뜻-역주). 아들들은 너무도 분명히 물어보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답변합니다. 이에 야곱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그는 이삭이 자기에게 했던 그 질문이 떠올랐을 겁니다. “네가 에서냐? 어떻게 사슴을 그리 빨리 잡았느냐?”

8절은 욥기 2:4에서 사탄이 한 발언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

우리는 유다가 열두 지파의 선두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9) 자기가 자기 동생을 대신해서 죽겠노라고 합니다. (7:22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 아버지께 호소하며 핵심을 지적합니다. 그는 자신이 베냐민을 위해 목숨을 담보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하면 영원히 비난을 받겠다고 합니다. 결국 야곱은 통치자에게 예물을 가지고 갈 것을 지시합니다. 과거 자신이 형 에서에게 선물 공세를 했었는데 그 전략을 다시 채택한 셈입니다. 지난번 되돌려 받은 돈을 다시 가져 갈 것도 말했습니다(11-12). 이제 야곱은 그들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시므온과 베냐민을 되돌려 주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을 간구 합니다. 늙은 야곱의 마지막 발언은 주님의 뜻을 받아 들이겠다는 올바른 영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운명론적 굴복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내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4)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이 쓰인 것을 보면 긍정적 해석이 맞을 것 같군요-역주)

 

 

10 25

요셉의 형제들에게 압박이 가해짐 2

 

지체하다(lingered)라는 표현은 오직 이곳(10)과 창세기 19:16에서 롯에 대해 쓰일 때, 이렇게 딱 두 번 쓰였습니다(19:16). “다른 장소가 더 나쁜 장소가 될까 봐 바람직하지 않은 장소에 머물러 있는다는 의미입니다.

11절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됩니다. 사실 그들은 굶어 죽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유향, , 향로, 몰약, 견과 및 아몬드가 있었습니다. 즉 간식 거리는 있었으나 주식인 곡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이런저런 상품들이 있기는 하나 생명을 유지하고 만족시키는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절망에 빠지자 이들은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들과 꼭 필요한 것을 교환하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내놓고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빵을 얻게 되는 그 날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인지요.

12: 두려움에서든지 빵을 얻고자 하는 갈망 때문이든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이럴 때는 정직하게 행동합니다. 다른 경우라면 거짓말을 하거나 속임수를 쓸 텐데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올바른 동기를 지녔더라면 그 돈을 발견하자마자 되돌려 주었을 겁니다.

11,13,14: 그 사람(The man) 형제들에게는 요셉이 그저 그 사람에 불과한 존재 입니다.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후 요셉이 예표하던 그 분 역시 자기 형제들에게 그저 그렇게 보였을 따름입니다. “그 사람을 보라( 19:5, 6:12).

그 누군가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분 앞에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 뿐입니다(14).

14절에서는 야곱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이 다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는 굶어 죽는 것보다 베냐민에게 더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좋은 면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르우벤에게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나쁜 모습이지요.

 

 

10 26

요셉의 형들에게 압박이 가해짐 3

 

18: 이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군요. 요셉은 자루 속의 돈보다 훨씬 더 위중한 죄를 다룰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명예로운 손님으로 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합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 남아 있지만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비교적 작은 실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반면 실상은 그들이 그를 거부하고 그들을 다스리기를 원치 않는 중죄야 말로 적대감의 참된 원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에 대해 얼마든 추궁거리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인간들을 즉시로 처형하셔도 너무도 정당한 행위입니다. 그저 작은 죄들 백만 개 때문이 아니고 그분을 거부한 바로 그 죄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이고자 하기보다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삶의 여러 상황을 통해 역사하셔서 죄인들의 마음에 찔림과 회개를 가져 오십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죄책을 알기에 두려워하나 하나님의 긍휼은 알지 못합니다(18).

인간은 작은 자들에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에게는 하지 않습니다(19-22)

친구에게 당신이 다른 친구에게 해를 입혀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그 말이 전달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당사자를 직접대면 하는 것 보다 쉽습니다. 고해성사를 위해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광의 주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선하신 주님과 화평케 될 필요가 있다고그 누군가에게 말 할 것이나 그 분 앞에 직접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24절에서 우리는 요셉과 예수님 사이의 또 다른 유사점을 보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선은 인간 안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성정인 반면 주님의 길은 항상 그러하니 오!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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