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09.07.14 09:18

성령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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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성령침례

James W. Knox 지음 / 김수광 옮김

 

다음은 제임스 낙스 형제의 설교로, 플로리다의 디랜드 교회에서 선포한 내용입니다.

 

성경을 펴서 에베소서 2장, 히브리서 11장, 요한복음 6장을 보실까요. 자, 저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견해가 있습니다. 세상에 견해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같이 살펴봤으면 합니다.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절대, 성경에서 단 한 구절도 바꾸거나 대체하거나 ‘바로잡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수정하시고, 대체하시고, 바꾸며, 바로잡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이 종교’와 ‘성경적 기독교’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 너머 판단하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성경이 우리를 판단하시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3개 장에 걸쳐 기초를 놓고자 합니다. 그리고 대여섯 군데에서 멈춰 설 것입니다. 그것을 정거장이라고 칩시다. 성경 안에서, 그 정거장들은 우리가 진리 위에 서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침례를 다루는 부분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침례를 배웠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침례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물속에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물침례는 선한 행위이지만 그 선한 행위가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침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며 또 될 수도 없습니다. 침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행해진 것입니다. 그러한 예들이, 초기 교회 시대를 잘 보여주는 사도행전에서 자주 나옵니다.

 

침례는 의식이 아니며 성사도 아닙니다. 또, 침례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해진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침례가 무엇이며 무슨 의미로 받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침례를 받은 경우가 없습니다. 대리인이 다른 사람을 위해 침례를 받는 등의 일도 벌어진 예가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물침례는 물속에 잠기는 것을 말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분과 함께 우리가 죽은 것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우리가 일으켜져서 그분과 함께 생명의 새로움 속에 걷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흔히 물침례를 일컬어 ‘내적 계약의 보이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번 과에서 그 내적 계약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신약에서 우리는 성령침례라는 교리를 배웁니다.

 

먼저 한 손엔 종교를, 다른 한 손엔 성경을  놓고 몇 가지 비교를 한번 해 봅시다. 종교는 보이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영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종교가 성상, 상징, 침례, 헌물, 예복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강조한다면 성경은 언제나 믿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가본 적이 없는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본적도 없고 빈 무덤을 본 적도 없는데 그분을 믿습니다. 

 

종교는 건물을 강조하고 그 건물을 교회라 부릅니다. 성경은 믿는 이들을 교회라 부릅니다.

종교는 물침례를 강조하고 성경은 성령침례를 강조합니다.

종교는 벽이나 목걸이에 새겨진 그리스도를 강조하지만 성경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를 강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일을 베푸셨는지를 강조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셨는가를 신뢰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고 확신합니다.

저는 제가 해 놓은 일이 하나님의 눈앞에 그다지 가치 있는 일이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여러분의 눈에도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가끔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임스 형제는 참 사람 괜찮아. 부지런한 사역자인데다가 성실한 남편, 성실한 아버지라고….” 그런데 이렇게 제가 행한 일은 여러분에게 의미 있을 수 있어도, 거룩한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한 일보다 그분께서 저를 위해 해주신 일을 신뢰하기로 했습니다.

 

, 에베소서 2:1-3를 순서에 유의해 살펴봅시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은 어디죠? 나는 불법과 죄들 가운데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은 어디입니까? 그분께서 나를 살리셨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라.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죄의 삶, 반역과 불순종과 불법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살리신 그 사람들을 위해 그 삶들을 과거 시제로 바꿔버리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들이 죄악 된 삶, 반역과 불순종의 삶 을 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이런 걸 한번 가정해 봅시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써서 종이에 써서 자신의 목에 걸어놓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 대통령이다.’ 그 사람이 이것은 그냥 혼자 농담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게 공표를 한다고 해서  자신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4절을 봅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할렐루야! 2절에는 나의 불순종이 나옵니다. 3절에는 나의 욕심들과 나옵니다. 3절에는 또한 진노의 자녀라는 명칭이 붙습니다. 그러나 4절과 5절은 영광스러운 소식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종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 당신은 못된 삶을 살았던 나쁜 인간이었으나 모든 것이 깨끗해졌고, 바르게 고쳐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분께서 하늘에 당신의 거처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 가운데 있었고, 불순종으로 가득한 사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 죄인일 때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성경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셨으며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우리가 행한 어떠한 의로운 행위가 아닌)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

 

하늘나라에서는 자신이 출석했던 교회를 자랑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자신이 행한 선행을 떠벌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찬양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할 것입니다. 거기 있는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거기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선한 일을 행하시며 모든 찬양을 받으십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 2:8-9) 그러면 여러분은 “음, 그러면 인생을 우리는 원하는 대로 막 살아도 되겠군요.” 또는 “그럼, 우리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다는 얘기군요.”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원받지 못한 각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죄 가운데 살고자 합니다. 진정으로 중생하여 다시 태어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합니다.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돌리고자 합니다. 구원을 받는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손에 떨어져 처벌을 받는 게 두려우니까’ 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또는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꼭 해야 하는 의무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를 들어, 물침례는 신자들이 행하는 선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믿음을 통해 은혜로) 있기 전의 상태라면 당신이 선한 일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선한 일은 당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일단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선한 일은 그 뒤를 따라서 올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선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재창조하신 이유입니다.

 

종교는 먼저 선행 행위를 해야 구원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순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활동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선한 행위가 따르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히브리서 11:1을 보겠습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에베소서 2:8-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느니라.” 믿음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물침례는 구원의 증거가 아닙니다. 당신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일원이 되는 것은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제하는 행위도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당신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방금 제시한 것들이 선한 행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요한복음 6:63로 가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만큼 괜찮은 사람도 없을 것 같아. 저 친구는 하늘나라에 갈 거야.” 틀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저를 하늘나라에 이끌어 가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선 하늘나라에 가는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곳에 절대 가지 못할 존재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은 6:63은 성령 침례에 관해 성령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무대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살리심, 생명을 주시는 것, 중생의 권능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육신이 아닙니다. 내가 육체 안에서 어떤 행위, 어떤 일을 했든지 하나님의 눈앞에서 무익합니다. 살리심, 즉 중생이야말로 내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줍니다. 불법과 죄들 가운데 죽었고 어릴 때부터 불순종해 온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립니다. 살리는 권능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해, 성령을 통하여, 성령에게서 옵니다.

 

성경에는 성령침례를 말하는 4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교회 예배시간에 이상한 말로 중얼대는 것과 관련한 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성령침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관계없이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이 성령침례를 무엇이라 하는가’입니다. 그 4개의 구절 중 첫 번째는 누가복음 3장에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사야서 40장에 예언된 바와 같이 침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이 그들 모두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시나니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누가복음 3:16)

 

요한은 경계를 분명히 갈라놓습니다. 그는 구분해서 말합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지만, 다른 누군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령님을 줄 거라고 합니다. 요한은 그분이 오셔서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이며, 또 불로도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급하고 주의깊지 못한 사역자가 급증하고 있으며, 흥분과 열정에 휩싸여 방방 뛰면서 예배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로 난입하고 있습니다. 흥분과 열정 자체에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만 그것들은 건전한 교리로 세운 토대 위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역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제 이 사람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받았습니다.”하고  외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다루고 있습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같은 맥락의 침례와 관련해 요한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 불로 침례를 받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 침례 중 하나만을 받을 것입니다. 이후로도 두 가지 침례를 다 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3:16을 다시 자세히 봅시다. 그 구절이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 것이 눈에 띕니다. 콜론으로 끝이 나지요(영어의 경우). 그것은 17절에 추가적인 내용이 담겨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첫째, “알곡은 모아 자신의 곳간에 들이시되둘째, “껍질은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 하고

 

요한은 첫째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 둘째로, 불로 침례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침례를 같은 것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한 조처입니다. 그는 17절에서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갑니다. “알곡은 좋은 곡식이므로 거둬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껍질은  좋지 않은 것이어서 불태워질 것이다.” 요한은 성령의 침례가 있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침례로써 주님께서 좋은 곡식을 받고 그분께로 모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침례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무가치한 껍질은 태워진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침례가 있지만 침례를 주시는 분은 한 분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2장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침례를 주고자 하십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거두실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린도전서 12:13)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성령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주는 침례로 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감이 오질 않는 군요.” 그 누구도 영원하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람의 아들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그분의 일들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대해 믿기를 거부할 만한 이유는 못됩니다.

 

자 이번엔 고린도전서 12:3를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깨닫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 오늘날 매우 대중적이고 종교적인 문구 중에 ‘예수님은 주님(Jesus is Lord)’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우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구호를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라는 고백은 실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그분은 많은 주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고백은 ‘예수님은 그 주님(Jesus is THE Lord)’이어야 합니다.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자 이제 4절에서부터 6절까지를 읽어봅시다. 이제 선물은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무는 다르나 주는 같으며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되 (이 구절들에서 삼위일체가 보이십니까? 성령(4절), 주(5절), 하나님(6절). 이것은 글쓴이의 속임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지적해,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동일한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십시오. 한분 성령님이 믿는 자들에게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2:7-11)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 믿는 자는 성령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성령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조금 전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을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십니다. 당신은 새 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복 주셔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하십니다.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진실로 거듭난 신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은사를 받은 거듭난 신자는 삶 속에서 그 은사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은사를 받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은사를 가진 경우라 할지라도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나타내는 데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매우 다양합니다. 다른 실행이 있고 다른 직무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설교자가 같은 방식으로 설교해야 한다든가 강조점도 같고 품행도 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거듭한 신자라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삶 속에서 나타냅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6장을 봅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습니다. 이것이 성령침례입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잠긴바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서 6:1에, 우리는 이렇게 쓰인 것을 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생각이 깊지 못하고 하나님께 반역의 뜻을 품는 부류는 이렇게 말들 할지도 모릅니다. “원 이거 참, 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면, 밖으로 나돌면서 죄짓고 살아도 별반 차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런 방종한 태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면 될까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2절) 자 그럼 이것에 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에베소서 2:2-3 참고)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느니라.(로마서 3절-7절)

 

에베소서 2장은 내가 진노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 불순종하는 죄인의 본성이 바로 내 본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알콜중독에서 벗어나 보려고 ‘회복 12단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재활치료를 하고, 인근의 교회에 다녀봐도, 여전히 내 안에는 잘못된 곳으로 향하고 마는 무언가가 숨어있습니다. 나는 한 시간에 정신분석치료사 몇 명에게 시간 당 40달러씩 지불하여 잘못을 할머니 탓이나 아버지 탓으로 돌리는 말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명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나는 정당에 가입해, 문제는 경제 체제 탓이라고 떠들어 댈 수도 있습니다. 내 행위를 정당화 시킬 물품이나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매번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모두에게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맞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전쟁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통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본성 안에는 당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진정코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집어넣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신 죽음이 여러분의 죽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물침례가 그려줍니다. 나의 옛 삶은 죽었습니다. 끝냈습니다. 나는 묻혔습니다. 그렇게 완료됐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작곡해 놓으신 노래를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같이 노래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삶은 끝났고, 더는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확한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어 저의 예전 죄로 가득한 삶을 끝내시고 마무리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으음, 내 마음대로 하면서 재미있는 것을 하고 살 수 없게 되는 거라면 별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은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 외에 우리를 죽은 채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례를 줄 때 침례를 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 아래 집어 넣어 푹 잠길 때까지 손을 놓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을 다시 꺼내는데, 그것도 역시 하나의 그림을 묘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일낮 삼일밤을 무덤에 계셨으나 나중엔 무덤 속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그분은 따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비참한 심경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끌게 됐다는 사실에 즐거워하시며 하늘의 주인이신 분께 찬양과 경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을 그저 죽은 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려고 오시는 날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그런 죽은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으면, 또한 일으켜져 생명의 새로움 속에 걸을 것입니다. 더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열망의 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코가 꿰뚫리고 고리가 달려 죄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자유롭습니다. 품위 있고 깨끗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거기엔 평화와 만족이 있습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령께서 일해주신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 것이 아니었고, 스스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장사되셨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게 있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한구절도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다음 정류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그것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또 너희는 모든 정사와 권능의 머리이신 그분 안에서 완벽하며(골로새서 2:8-10)

 

종교로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없습니다. 종교에 의지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지켜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

 

고린도전서 12장을 떠올려 봅시다. 성령께서 나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셨습니다. 자, 골로새서 2장에 다음과 같이 쓰였습니다.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또 너희(믿는 자들)는 모든 정사와 권능의 머리이신 그분 안에서 완벽하며

 

성령께서는 나를 그리스도께로 옮기신 데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옛 삶을 묻어 버리시고, 다시 일으켜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나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할례를 받았느니라.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활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골로새서 2:11-14)

 

내 모든 불법와 모든 위반 속에서, 나의 모든 범죄가 거룩하신 성령을 대적합니다. 범죄자였으나, 하나님께로 나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했을 때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 치러지는 의식이나 예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때 이뤄지는 활동은 인간의 손길과 무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활동을 수행하십니다. 그분께서 내 과거의 죄에서 나를 단절시키십니다. 나는 자유롭습니다. 더는 죄의 삶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내가 행한 것으로 말미암은 구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해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활동으로 된 것이며,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찬양합니다.

 

 논쟁도 필요 없고

 변명도 의미 없네

 그분께서 날 위해 죽으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정리하면 성령 침례란 성령께서, 믿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집어넣는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믿는 사람이 죽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자의 부활이 됩니다. 구원받은 자는 새로운 생명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자유롭게 걷습니다.

 

당신은 혹시 이런 사람들 중 한 부류일 수 있습니다. “교회 활동 같은 것 관심 없어요. 종교는 여자나 노인들한테나 필요하지. 내가 죽을 준비를 할 때 즈음이나 한번 믿어 볼지 모르겠네. 그렇지만 지금은 안 믿어요.”

 

그러나 또 하나의 침례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그분께서 불로도 침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두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계시록 19장과 에스겔 20장입니다. 계시록 19:20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됩니다. 짐승이 잡히고 또 그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대언자도 그와 함께 잡혔는데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기적들로 속이던 자더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으로 불타는 불 호수에 던져지고

 

, 그럼 물 침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 침례를 기록하고 있는 어떤 경우에도 침례를 받는 이는 물 아래로 들어갑니다.

 

성령침례는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믿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잠기게 하는 절차입니다.

 

짐승과 대언자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은 불로 타는 못에 잠겨 들어갈 것입니다.

 

계시록 20:9-15를 봅시다. 그들이 땅의 넓은 곳으로 올라가 성도들의 진영과 그 사랑받는 도시를 에워싸매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켰고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계시록 21:8도 상고해 봅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잠시 계시록 20장으로 돌아가 보죠. 지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장소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고 그래서 하늘나라에 갈 사람 중에 불못의 온도가 어느 정도일까를 걱정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다. 슬쩍 의혹을 품고 있는 이들 즉 멸망으로 가고 있는 이들이 언제나 그 장소를 없애고자 합니다. 없애려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곳을 향상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흠, 여기 쓰인 지옥을 문자적으로 보면 안 돼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7절의 왕좌가 정말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절에 있는 사람도 실제 사람이며 12절의 하나님도 실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의 책도, 심판도 진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13절의 지옥은 도시쓰레기 소각장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는 아마도 환각 내지 마음이 안 좋은 상태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큼 실제존재를 지칭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말한 것을 현대적인 사고 혹은 이른바 ‘새시대’의 산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문명화된’ 현 세대에서 사람들은 오래된, 원시적인 지옥불을 믿지 않으며, 저주와 같은 것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좀더 세련되어져 보라고 핀잔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B.C. 800-700 때의 바빌론 포로시대 사람들의 삶에 비해 하나도 문명화된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 20:45-49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있기 몇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대적이고, 최신식의, 문명화되었다는 관점으로 지옥을 바라보아 봅시다.

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남쪽을 향해 네 얼굴을 세우고 남쪽을 향해 네 말을 떨어뜨리며 남쪽 들의 숲을 대적하여 대언하라.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주의 말씀을 들으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네 속에 불을 붙이리니 그것이 네 속에 있는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삼킬 것이요, 그 타오르는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며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기까지 모든 얼굴이 그 안에서 불태워지리라. 주가 그 불을 붙인 줄을 모든 육체가 알게 되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시기에 그때에 내가 이르되, 아, 주 하나님이여! 그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비유들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나이다, 하니라.

 

지옥이 단지 비유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현대적이지 않습니다. 지옥을 말하는 구절을 문자적인 아니라 바유적이라고 말한다면 전혀 최신식이지도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몇 백년 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렇게들 말했습니다.

 

에스겔이 “주께서 불을 보낼 것이다. 의를 붙들지 않으면 그분께서 너희들을 불사르실 것”이라고 선포했을 때 청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그냥 비유구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불태우시겠다는 뜻이 아니야. 내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거라든지, 석유값이 폭등할 거라는 식과 같은 류의 얘기야.”

 

사람들은 성경 속에 하늘이 문자적인 하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지옥은 같은 구절에서  보고도 문자적인 지옥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문자적인 하나님이시길 바라면서, 마귀는 몸에 꽉붙는 옷을 입고 꼬리에는 화살표가 달린 우스꽝스런 존재이길 바랍니다. 빛을 믿고 싶어하지만 어둠은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은 믿고 싶어 하지만 나쁜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꺼라고 애써 부인합니다.

 

이 문제들에 관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불로도 침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그분께서 완성해주신 일을 신뢰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잠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을 거절하고 자신이 행한 일을 신뢰하면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즉, 선하든지 악하든지 혹은 그 중간이든지 간에 불침례를 받게될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라서 불침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길 거부했기 때문에 불침례를 받게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두 가지 침례가 있습니다. 성령침례와 불침례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두 가지 침례 중 어느 것을 택할지 여러분의 선택에 맡겨 놓으셨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 하며(사도행전 16:31)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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