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제1장 율법과 은혜
(2)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현재까지의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율법이 인간을 구원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를 정죄한다고 배웠다. 그러면 율법에 어떤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인간의 실패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인가?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로마서
“그러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을 통해 내 안에서 사망을 이루었나니 이것은 죄가 명령을 통해 넘치도록 죄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는 마당에서 나오는 한 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밖에 나오자마자 비명을 지른다. 내가 발견한 것은 나의 머리가 상처를 입었고 땅 위에 누워있다는 것이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또 다른 소음을 듣고 나와서 다시 비명을 지르게 된다. 반대쪽 머리가 상처를 입었고 또 다시 마당에 쓰러지게 되었다.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불을 켜라고 소리쳤다. 아내는 조명등을 켰고 나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조명등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그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한 것이다. 단지 조명등은 그 불빛을 통해 나를 때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해줄 뿐이다.
이처럼 인간을 죽이는 것은 율법 그 자체가 아니다. 바로 죄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율법은 그 사실을 인간에게 폭로한다. 율법은 인간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은 영적이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그런즉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내가 행하면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율법에 동의하노니”(롬
여기서 잠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저주해야만 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옳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주 받을 존재가 다름 아닌 자신들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거듭나게 된다.
“그런즉 이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이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내가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롬
다시 우리는 문제의 본질이 하나님의 율법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주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완벽하고 꾸준히 순종하도록 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디모데전서
우리는 이 구절로부터 율법을 적법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올바른 사용을 통해 율법은 불의한 인간을 통제하고 정직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오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적절한 율법의 사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3) 예수님과 율법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분은 율법 아래에서 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딤전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었다. 갈라디아서
예수님은 율법의 창시자이시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셨으나 자기 자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위선자도 아니셨으며 자신의 권능을 남용하지도 않으셨다. 그분 자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포하신 그 율법에 복종하셨다.
그분은 율법을 지키셨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인생 전체에서 매 순간 율법을 한 조목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킨 첫 인간이셨다. 그분은 율법을 알고 가르쳤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내게 죄를 깨닫게 하겠느냐? 또한 내가 진리를 말할진대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죄 없는 자신의 완벽함에 대해 증언하도록 요청하실 수도 있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도다.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그것들을 행하므로 그분께서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시니라.”(요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완벽한 거룩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보라,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마
그분은 율법의 사역자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회복시켜주는 율법의 사역자였다. 수세기에 걸쳐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부패시키고 변개시켰다. 그들은 율법의 효력을 약화시켰고 심지어 율법에 수정을 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첨가시켰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월한 지위에 놓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의 지위를 원래 위치로 회복시키셨다.
누가복음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알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도는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고자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인용한 율법의 권위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그 권위를 거부하고자 했으며,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율법은 지켜져야만 한다.
성경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어겼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도 율법을 어기도록 인도했다고 말씀한다. 그들은 율법이 진리라는 점을 부인할 만큼 담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더 가치를 부여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고 계신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장 작은 이 명령들 가운데 하나를 어기고 또 그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리되 누구든지 그것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 곧 그는 하늘의 왕국에서 큰 자라 불리리라.”(마
율법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 권위를 호도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대처하셨는지를 상기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신다. “옛 사람들이 말한바, 너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아무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라가, 하고 말하는 자는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되거니와 누구든지, 너 어리석은 자여, 하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를 대적하는 일이 있음을 기억하거든 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율법의 절대성과 문자 그대로의 올바른 해석을 다시 확립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자구를 지키지 않는 모든 일반시민과 종교지도자들을 저주하셨다.
로마서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 안에는 메시야를 보내주겠다는 예언적 희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 안전과 평화를 향유 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율법을 어긴 상태에서는 언약의 약속들은 성취될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죄의 속박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방민족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전복시키고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눈에 보이는 왕국을 주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는 예수님을 향해 비난하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그들은 의로운 유대인이 되기보다는 불의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살기를 택했다. 빌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못하노라.”(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사역자셨다. 예수님께서는 할례의 표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여된 언약들을 성취하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그 언약들을 무효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지키려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그것에 순종하며 사셨다. 이런 내용들이 로마서
그분은 율법의 예표와 그림자를 성취하셨다
히브리서
제단 위에 뿌려진 염소와 송아지의 모든 피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하고 있다.
“황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히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 곧 참된 것의 모형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느니라.”(히
아론의 아들들이 그들의 사역을 끝마쳤을 때, 제사장과 그를 위해서 수고한 자들은 그들이 시작했던 장소에서 조금도 하늘나라에 가깝게 가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피를 통해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분의 희생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가장 천한 죄인조차도 가장 위대한 제사장보다 높임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율법은 인간을 이 세상으로부터 하늘나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희생제물을 바라보고 있다. 그 희생제물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이다.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이 있었으나 그녀의 애인이 전쟁에 나가고 애인의 사진 하나만을 간직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수많은 시간을 그녀는 자신의 애인이 돌아와서 결혼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사진을 매일 밤 본다고 가정하자.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그녀의 애인이 돌아왔다. 모든 영광을 가지고, 떠날 때보다 더 멋있고 남자다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애인의 과거 사진 속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결혼하기를 거절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율법의 예표와 그림자를 불들려고 했던 바로 그 모습은 이 예화는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보다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선택한 것이다.
이제 그 여자의 집이 불타 애인의 사진도 재로 사라졌다고 가정하자.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실제 애인이 아닌 사진 속의 애인을 간직하였고 그 애인은 사진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전, 제사장직분, 도시와 제단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호세아
성막과 성전 그리고 희생 제물로 예표되는 예수님의 모습들에 관한 유용한 많은 책들이 서점에 있다. 이것들을 읽고 음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표하신 모든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은 정말 위대하지 않은가?
그분은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다
우리가 날마다 생활 속에서 율법의 모든 부분을 지킬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이 저주 아래 놓인다는 사실을 배웠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임할 모든 저주를 짊어지시고 모든 죗값을 완벽히 지불해 주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우리는 용서받았고 구속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받을 수 없던 모든 복을 받게 되었다.
첫째, 어떤 죄인도 완전한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나 예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오셔서 그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다. 이로 인해 마치 우리가 모든 의로움의 조건들을 충족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한없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그분을 믿는 이방인들도 미래에 회복된 왕국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향유할 모든 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율법을 지킬 수 없었지만 성령님이라는 선물을 통해,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 내주함으로써 성도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율법 아래 있던 종들을 구원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으셨다
율법을 성취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죗값을 지불해 주시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구원시켜 주신 예수님은 율법 아래 종들이었던 사람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이런 새로운 지위와 교제는 정말 놀랍지 않은가?
노예라고 하는 단어는 구속, 가혹함 그리고 속박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탈출하기를 바라는 종의 신분을 생각하게 된다. 반면에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는 사랑, 교제 그리고 인간이 오랫동안 그 마음속에 갈망했던 가장 친근한 교제를 생각나게 한다. 갈라디아서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종노릇 하였느니라.” (갈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갈
그분은 율법을 더 나은 새 언약으로 대체하셨다
옛 언약은 항상 효력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 땅에 거주할 것이다. 그들이 회복되면 옛 언약의 율법에 따라 살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옛 언약보다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다. 예수님의 몸 안으로 침례 받은 성도들에게는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더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고(로마서 2장), 그분의 권능을 이해하는 지각과(로마서 1장) 빛을 주셨다(요한복음 1장). 이스라엘 민족은 보다 좋은 무엇인가를 소유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축복받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율법을 통해 매우 자세히 인도해 주셨다. 이것보다 더욱 위대한 것은 예수님이 교회와 직접 교제하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주하도록 하셨다.
이런 두 가지 진리 외에도 하나님은 우리 죄로 인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역으로 여호와(Jehovah)와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우리는 이 엄청난 구절을 깊이 묵상해야만 한다.
이 언약은 전의 것보다 뛰어나다. 또한 예전 언약은 부패하고 사라질 시점에 와 있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위 성경구절에서 언급된 이 새 언약은 예수님과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율법에 관해 배운 것들을 기억해 보자. 율법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다스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불복종의 결과로 인해 고통 받았다.
왕국시대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믿는 자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누리지 못한 몇 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에서 통치할 뿐만 아니라 베일은 벗겨지고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위의 구절은 엄청난 약속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신약시대 교회를 포함한 어떤 인간도 누려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새길 것이다. 과거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어느 시대에도 누려보지 못했던 완벽한 복을 이스라엘 민족이 누리게 될 것이다.
그분은 더 위대한 법을 제정하셨다
갈라디아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나 율법이 타락한 인간의 복종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시편 119편을 읽어보면 율법이 얼마나 완벽하고 능력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성령님께서는 성경에서 가장 지면이 넓은 장을 할애해서 율법의 계명과 법규를 찬양하고 계신다.
첫째, 예수님은 십계명에 대해 동의하셨다. 다음의 예들을 자세히 살펴 보자.
마태복음
요한복음
마태복음
마태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
마태복음 19장 9절과 18절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하시니라.” 그리고 “그가 그분께 이르기를, 어느 명령이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율법의 저자께서 자신의 법규를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보다 더 위대한 법을 주 예수님께서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외적인 규범의 영역에서 사람의 마음의 문제로 율법의 본질을 옮기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되 그 안에 있는 헌신이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마태복음
이런 점은 누가복음
일곱째 날에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을지는 모르나 그들은 그 날에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율법은 단순히 안식일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거룩히 지키도록 하기 위함임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의 예를 기억해 보자. 각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옛 사람들이 말한바.”
우선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고 아무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화내지 말라고 하셨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범주를 맹세하는 것까지 포함시키셨다. “또 옛 사람들이 말한바, 너는 거짓 맹세하지 말고 네가 맹세한 것을 주께 이행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코 맹세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이요, 땅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땅이 그분의 발받침이기 때문이요, 예루살렘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예루살렘이 위대한 왕의 도시이기 때문이라.”(마
셋째, 예수님께서는 간음의 행위와 그 의도도 죄임을 명백히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마
넷째,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미워하지 않거나 잘못된 행위를 조심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율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된다. “그들이 말한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마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이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성경구절을 기억해 보라.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은혜와 진리를 놓치고 있다면 여러분은 율법만을 소유한 것이다. 은혜와 진리가 없는 율법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하신 게 아니라 율법의 본질과 의도를 명백히 하고자 하셨다.
신약시대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