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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1장  율법과 은혜

(1) 율법이 주어진 이유

 

진리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것은 율법과 은혜를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를 나타내 주는 이 위대한 두 개념을 혼동하는 것은 교리와 그 실천에 있어서 큰 오류를 가져다 준다.

율법은 간부(姦夫)에 대해 돌을 던진다. 그러나 은혜는 그녀를 용서한다. 율법 아래서 어린양은 목자를 위해 죽는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목자가 어린양을 위해서 죽는다. 율법 아래서는 수고를 한 뒤에야 휴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먼저 안식을 얻고 나서 수고를 한다.

진리의 말씀을 잘못 나누는 예를 들기 위해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요한복음 1:17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인간은 먼저 율법 아래 있었고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왔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은혜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히 보여주는 39권의 구약 성경이 존재한다. 둘째,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구절을 다른 성경 문맥을 통해 이해해야만 한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보다 앞서 있었으나 율법이 은혜와 진리보다 먼저 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창세기 2장에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것을 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동산에서 쫓겨나 930년을 살았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담의 죄를 덮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법적 판결이다.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 6:8). 따라서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정의를 찾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구축해야만 한다.

요한복음 1:17부터 시작해 보자.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율법에는 그 시작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언급하실 때마다 그것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즉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그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창세기 15:1을 보자.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아브람(Abram)은 그 어떤 보상 받을 일을 행하지 않았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이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또 아브람이 이르되, 보소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은즉, 보소서, 내 집에서 태어난 자가 내 상속자이니이다, 하매 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요, 오직 네 배 속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더라. 그분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 하시며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씨가 그와 같으리라, 하시니라.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 15:2-6). 아브람은 어떤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어떤 율법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어떤 규칙도 존중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아브람의 믿음에 근거해서 은혜로 의를 전가시켜 준 것이다.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상속해 주신 땅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상속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의 우르에서 데리고 나온 주니라, 하시매( 15:7).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문제이다.

이 진리는 갈라디아서 3:16-19에서 발견된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Abraham)과 언약을 체결하셨다. 이 언약 체결 이후 발생한 그 어떠한 일도 언약을 변경시키거나 무효화시킬 수 없다. 그 땅은 아브라함에게 속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수없이 많은 자손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취소하지 못하며 또 그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 못하리라( 3:17).

율법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어 상속하게 하고 수많은 자손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430년 뒤에 생겼다. 그의 자손들이 율법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조항들은 변하지 않는다. 은혜가 율법에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그 상속 유업이 율법에서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약속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통해 주셨느니라( 3:18). 따라서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19에 있는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더러운 죄악들로부터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다. 아담의 시대로부터 노아의 홍수와 출애굽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주님은 한 민족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제공하고 그것을 지키게 함으로서 이방인들에게도 빛을 주시고자 했다. 살인, 절도, 강간, 유괴, 간음, 폭력, 이단종교,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살면 어떤 축복을 세상에서 받는지를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율법이 존재하는 첫째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섬기고, 보호하고, 축복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주신 분께로 나아가도록 하시고자 율법을 만드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은 율법의 목적이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하늘나라(heaven)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임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뒤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율법을 주신 둘째 이유는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명기 4:1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법규와 법도를 듣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것을 소유하리라.” 다시 말하지만 율법의 목적은 각 개인에게 하늘나라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유업으로 받게 되는 땅을 소유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보자.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주께서 바알브올로 인해 행하신 것을 너희 눈이 보았나니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주 네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서 멸하셨으되 오직 주 너희 하나님을 굳게 붙든 너희는 이 날 모두 살아 있느니라.”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혼이 지옥에 가는 게 아니라 삶이 멸망 당하거나 약속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율법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은 약속한 땅에서 살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신명기 5:29에 나타나는 핵심이다. 다만 그들이 이 같은 마음을 품어 항상 나를 두려워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영원히 잘되기를 원하노라!” 자신의 민족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열망이었다.

사사기 2:19-23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에서 벗어났을 때 발생했던 일을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그 재판관이 죽은 뒤에는 그들이 돌이켜 자기 조상들보다 더욱 부패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절하며 자기들의 행위와 완고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더라.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맹렬히 타올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내 언약을 어기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은즉 이제부터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내가 그 민족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자기 조상들처럼 주의 길을 지키고 그 길로 걷나 걷지 아니하나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그 민족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남겨 두셨으며 그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을 놓치고 만 것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얻게 되는 축복은 약속된 땅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율법을 어김으로 받게 되는 벌로 그들은 죽기도 하였으며, 약속된 땅에서 쫓겨나 포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율법은 언약에 더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꼭 기억하시길 바란다. 여러분은 율법과 언약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나눌 수 없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인간이 율법을 섬기는 게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면했던 문제들(안식일에 어떤 사람들을 고치거나 양식을 제공해 주었던 사건)을 상기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으며 안식일을 위해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나니( 2:27).

로마서 5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만드신 셋째 이유를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율법을 제정하셨다. 율법 없이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가 부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무언가가 인간을 지배해야만 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인간을 통치하는 은혜이거나 혹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지배하는 율법이 될 수 있다. 인간은 통치되어야만 한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부여될 수 없다.

로마서 5:1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가인이 아벨을 죽임)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이제 19-20절로 가보자.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따라서 율법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율법이 오기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죽음과 죄, 그리고 타락의 결과들이 존재했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여기에 율법이 주어진 넷째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 이후 4백 년에 걸쳐 하나님은 죄(sin)와 범법(transgression)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보여주셨다. 어떤 의견이나, 감정 그리고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돌판에 이것은 하지 말지니라.” “이것을 지키라.”고 기록하셨다. 이런 명령들을 제정하신 목적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인간이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인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은혜를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이 10가지의 잘못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100가지의 계명을 주셨다면, 타락한 인간은 100가지의 잘못을 할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47장에 걸쳐 율법을 제정하셨기 때문에 하루라도 인간이 죄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인들을 구원하거나 의롭게 하기 위해 율법이 주어진 게 아니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지는지와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은 죄를 극대화시킨다.

로마서 7:7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 5장에서 은혜가 율법보다 먼저 있었다고 주장했던 우리의 입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다니.”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그로 인해 보상을 받았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에서 그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패하고 상당히 심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을 통해서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술 취한 노아, 거짓말 했던 아브라함, 비웃었던 사라, 교활했던 야곱, 간음했던 다윗 등등. 율법이 있기 전과 후에 그것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분이 정하신 방법으로 그들을 징계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는 율법에 어떤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는 문제가 없다. 타락한 인간과 거룩한 율법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율법의 영광을 발견하게 된다.

디모데전서 1:8-11을 살펴보자.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줄 우리가 아노라. 이것을 알라. 율법이 만들어진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오직 법을 무시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에 역행하는 것 때문이니라. 이 교리는 내게 맡기신 복음 곧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에 따른 것이니라.” 따라서 율법은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명백히 정의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인간도 모든 율법을 지킨다고 우리는 기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야고보서 1:22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너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자기 자신을 비교할 기준을 알기 때문에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진리를 거부하거나,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거나 혹은 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율법이 이스라엘 한 민족에게만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율법은 다른 이방민족 혹은 개인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 또한 신약시대 교회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시편 147:19-20을 보자.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분께서 어느 민족도 이렇게 대우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분의 판단들로 말하건대 그들이 그것들을 알지 못하였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신명기 4:5-8에서 모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주 내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법규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것은 너희가 들어가 소유할 땅에서 너희가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것들을 지키고 행하라. 이것이 민족들의 눈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명철이니라. 그 민족들이 이 모든 법규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민족은 참으로 지혜와 명철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부르며 구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것 같이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가까이 모신 그런 큰 민족이 어디 있느냐? 이 날 내가 너희 앞에 두는 이 모든 율법과 같이 의로운 법규와 법도를 가진 큰 민족이 어디 있느냐?”

따라서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민족들은 그와 같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런 율법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것이다.

로마서 3:1-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냐? 혹은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모든 면에서 많으니 주된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다는 것이라.”

에베소서 2:1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너희는 지나간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받아 할례자들이라 불리는 자들로부터 무할례자들이라 불리던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연방 국가 밖에 있던 외인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서 분리된 낯선 자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속한 것을 다른 이방민족에게 주지 않으셨다. 한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2:13-14).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분리시켜 놓는 장벽이 되었다.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을 이루려 하심이요,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죽이사 친히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 2:15-16).

유대인만이 율법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민족이 한 몸으로 연합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기를 원했던 민족도 다름 아닌 유대민족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로마법을 교묘히 이용해야만 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유대인들이 이방민족 건물에 들어가는 게 잘못된 것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빌라도의 법정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음을 여러분은 기억하는가? 빌라도와 바리새인들은 그들 사이에 장벽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공조할 수 없었다. 한쪽(이방인)은 인간의 법을 소유하고 다른 한쪽(유대인)은 하나님의 법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누구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 연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를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연합될 수 있었다.

에베소서 2:17-2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또 그분께서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에게 또 가까이 있던 그들에게 화평을 선포하셨느니라. 그분을 통하여 우리 둘이 한 성령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나니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낯선 자도 아니요 외국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이요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며 또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으뜸 모퉁잇돌이 되시나니.” 유대인과 이방인은 꼭 맞게 하나로 이루어지고(21) 함께 세워지게(22) 된다. 이는 율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이 있었고 현재도 변함이 없다는 진리를 로마서 9:3-5에서도 볼 수 있다. 육체에 따른 내 형제, 내 친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으리니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니라. 그들에게는 양자 삼으심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속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누가 율법을 받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이다. 누가 율법을 받지 못했는가? 이스라엘 민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민족이다. 누가 이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누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가? 다른 민족들이다.

이런 문제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A.D 45년에 결말을 보았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신약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한 구약 율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려고 모였다. 사도행전 15: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물론 할례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증표였으며 모세의 법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도행전 15:8-10을 살펴보자.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주사 그들에게 증언하시며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사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 차별도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인간이 율법의 멍에를 짊어지기는 너무 힘겹다는 사실을 그때 모인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11:30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는 말씀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성령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도록 인도하고 계신다.오직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줄을 믿노라, 하니라.”( 15:11)

이 결론은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 모든 교회에 전달됐다.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그 어떤 성도도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들은 혼의 구원과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치한다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율법은 인간을 섬기고 인간 자신이 죄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다섯째 목적에 이르게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불결하거나 사악한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청결한 상태로 유지되었다는 의미이다. 명기 5:22-2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이 말씀들을 산에서 불 가운데서, 구름 가운데서,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의 온 집회에 말씀하신 뒤에 더 이상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들을 두 돌 판에 써서 내게 넘겨주셨느니라. (산이 불에 타므로) 너희가 어둠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 너희 지파들의 모든 우두머리와 너희 장로들이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주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분의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살아 있음을 이 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죽어야 할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키리니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더 들으면 죽으리이다. 모든 육체 가운데 누가 우리처럼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남았나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 주 우리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다 듣고 주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르실 것을 다 우리에게 말하소서. 우리가 그것을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주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셨으므로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한 말들 곧 그들의 말소리를 내가 들었는데 그들이 말한 바가 다 옳도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영광이 산을 흔들었고 사람들은 율법이 하나님의 높은 영광으로부터 주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늘들과 땅을 뒤흔들 수 있는 창조주께서 말씀하셨고 인간들은 그분을 두려워했다. 여러분은 성경의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라는 문구를 되새겨 본다. 인간들은 완벽한 두려움 가운데 율법을 체험하였다.

현대 미국인들이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모든 조건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율법에 동의하기에 앞서 자세히 읽어보고 공부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율법에 따라 사는 데 동의하였다.

모세시대 이방인들의 예법과 생활방식을 율법에서 요구하는 매우 높은 삶의 기준과 비교해 본다면, 이 율법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율법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랑, 의로움, 긍휼, 지혜와 예언 등 모든 세부적인 사항을 살펴보면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기준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더러운 죄악들을 매우 선명한 방법으로 단지 몇 개의 단어들을 사용해서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규정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법적인 규정보다 훨씬 뛰어난 삶의 기준들이 돌판 안에 새겨져 있다.

율법을 주신 여섯째 이유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3:24)

율법이 가르치는 것에 유의하라. 율법은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첫째 날 명령을 지키려 시작하지만 이내 실패한다. 다음날 하나님을 모든 혼과 정성 그리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려고 하지만 또 실패하게 된다. 셋째 날에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려고 시도해 보지만 역시 실패하게 된다. 이런 시도와 실패의 과정을 계속 겪게 된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이 실패했던 인생의 모든 기록들을 던져 버리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합격의 점수를 부여하실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율법이 요구했으나 실패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용서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다. 따라서 율법의 역할은 인간이 구원자 없이는 얼마나 무능력하고 비참한지를 예수님 앞에서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율법을 소유하고 약속의 땅에 이르는데 만족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한 구원자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었기 때문에 매우 교만했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이 된다고 상상하였다. 성령님께서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셨다. 형제들아, 이스라엘을 위한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곧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니라.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10:1-2)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했으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0:3)

훈육 교사가 그들을 가르친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여러분은 의롭지 않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지키셨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신뢰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노라.” 그러나 그들은 대답했다. “싫다.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키도록 노력하겠다. 이번에는 정말로 열심히 해서 지키도록 하겠다.”

여러분 대부분이 전도할 때 만나는 사람들의 태도는 이와 같이 않은가? 그들은 자신이 장로교인, 감리교인, 은사주의자, 혹은 침례교인이라고 자랑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자신들의 신념이 너무 신실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가? 이런 답변들은 모두 동일한 맥락에 있다. 그들은 율법이 인간들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결론은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갈 만큼 충분히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이 주어진 일곱째 이유는 인간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다. 히브리서 10:1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율법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는 가지고 있으나 그 일들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므로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린 그런 희생물들로는 거기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하늘 위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땅에서는 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림자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그 어떤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왕좌와 땅 위에 있는 인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하늘 영광의 빛이 그분에게 비추이어 그분의 그림자가 율법이 존재하는 땅 위에 내려오게 된다.

구약에서 묘사되는 그리스도의 모든 예표와 모형들을 살펴 보자. 선한 목자로서의 아벨, 어두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인 방주, 이삭의 기적적 탄생과 아브라함이 그를 제물로 바치는 것들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유월절 양, 놋뱀,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와 반석으로부터 나온 물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성막의 기구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명절들(feast days), 민수기에 나오는 붉은 암송아지와 두 마리의 새들, 속죄양과 대제사장 이 모든 것들은 오실 구세주에 대한 어렴풋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8:12). 그러나 슬프게도 유대인들은 예수님보다는 그 그림자에 안주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 상징에 집착했고 진리를 거부했다. 그들은 예표에 집착하여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흥미롭게도 신약성경은 율법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예표와 비유를 사용한다. 우리는 아래 6가지 비유를 서신서에서 발견하게 된다.

첫째, 율법은 거울에 비유된다. 야고보서 1:23-25에서 말씀한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거울로 자기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으니라. 그는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길로 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곧 잊어버리거니와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 만일 여러분이 율법의 내용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게 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성경을 회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적인 사람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배제한 교회를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은 우리의 상태가 어떤지를 정확히 가르쳐 준다. 성경은 일종의 거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거울이 언급됨을 출애굽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출애굽기 38:1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그가 번제 헌물 제단을 만들되…” 그리고 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것의 받침도 놋으로 만들었으니 곧 회중의 성막 문에 모인 여인들의 거울들로 그것을 만들었더라.” 인간들은 물두멍에 와서 씻고 정결케 한 후에 제단 앞에 나와 번제 헌물을 드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밖에 나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이 거울을 사용하여 놋대야를 만들도록 하셨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정결한지를 점검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겪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이처럼 적용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만나 교제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봐야 한다. 우리는 깨끗한가?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우리는 되어야 할 모습대로 되었는가?

둘째, 율법은 속박을 가져오는 멍에와 매우 흡사하다. 사도행전 15:10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한 사람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다고 가정하자. 첫째 소는 한길로 가고 둘째 소는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두 마리의 소를 멍에로 묶어서 두 마리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도록 할 수 있다.

율법은 멍에였다. 율법은 인간을 죄의 본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율법은 정부의 권위나 혹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사용해서 인간이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디모데전서 1:8-10에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줄 우리가 아노라. 이것을 알라. 율법이 만들어진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오직 법을 무시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에 역행하는 것 때문이니라.”

선한 율법은 악한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 준다. 율법이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지라도 그들을 억제할 수는 있다. 이런 진리가 로마서 7:1-25에 언급되어 있다. 율법은 인간의 삶을 보다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 율법은 인간의 삶이 보다 의로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쪽에는 경찰, 판사 그리고 교도관이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훔치고자 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러분은 훔치고자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을 지라도 멍에를 사용해서 훔치려고 시도하는 행위 자체를 통제할 수는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의 많은 인간들을 율법을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만일 권력이라고 하는 멍에가 없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모든 율법을 미친 듯이 위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멍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인간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있다고 하자. 그들의 행동은 보이지는 않지만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그들을 통제하는 멍에를 통해서 더 질서 있고 품위 있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5:1에서 말씀하고 계신다.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다. 그것은 속박의 멍에이다. 율법을 통해서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통해서 도덕적인 삶을 유지할 수는 있다.

셋째, 율법은 가정교사나 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4:1에서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내가 말하노니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아이일 때에는 전혀 종과 다르지 아니하고.” 당신은 모든 삶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주장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어린 아이 시절에는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여러분은 종(servants)처럼 땅을 파고 수확해야만 한다.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4:2를 보자.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가정교사들과 감독하는 자들 밑에 있느니라.” 따라서 율법은 가정교사이며 그 목적은 학생을 통제하는 데 있다. ,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인간에게 가르치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잘못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율법의 존재 목적이 있다.

미국의 학교와 가정이 통제와 규율을 포기하면서부터 미국사회는 혼돈과 파멸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었다. 부모들이 너무 규범적일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 우리 어린아이들은 규칙, 규제 그리고 법규 없이 자신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도록 그리고 입고 싶은 것을 입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을 통제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또한 잘못한 것에 대해 야단치거나 규제하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생각하지 않고 진화된 동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며 지성이다.

현재 이런 철학이 미국 내 거의 모든 교회에 만연해 있다.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사랑이 없다고 비판하는 그런 행태는 마치 4살 된 어린아이가 엄마를 대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슬프게도 이런 현상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흔하게 발생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과 생각은 통제되어야만 한다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사무엘상 3:13에서 우리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알고 있는 불법으로 인하여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리라고 그에게 말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들들이 스스로를 더럽혔으나 그가 그들을 억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자녀들이 올바른 자녀로 성장할지, 혹은 자신이 양육하고 있는 사람이 성숙한 신자로 성장할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죄로부터 멀리 할 수 있도록 억제하고 통제해야만 한다. 엘리는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그것으로 큰 심판을 받게 된다.

율법의 넷째와 다섯째 모형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율법은 돌판 위에 쓰인 작은 편지이자 베일에 감춰진 영광과 같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자구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율법 자구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 그러나 돌에 써서 새긴 사망의 직무에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영광 곧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6-8)

우리는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돌판들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돌판 자체는 생명이 없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율법을 읽고 공부하고 그 기준에 맞추어 살려고 시도할 수 있으나 새로운 탄생 없이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 돌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 돌판을 기초로 건물을 세울 수도 있다. 돌판 위에 설 수도 있고 그 뒤에 숨을 수도 있다. 그 돌판을 가지고 여러분이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생명을 만드는 일이다. 진화론에 속은 사람들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돌판에 기록된 율법은 신약성경과 대비를 이룬다. 그것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이 이어진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 같이 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졌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고후 3:13-14)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의 말씀을 읽었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림자를 보았으나 그림자 뒤에 있는 예수님을 못 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눈에서 이 베일을 벗기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기적을 통해 입증하셨다. 예수님은 바다를 잠잠케 하셨고 시편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deity)을 증명하려고 하셨다. 또한 맹인을 고치셨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계신다는 또 다른 증거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오류 없이 그분이 나이신 분(I AM)”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설명하셨다.

이에 대한 반응은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같았다. “우리는 율법이 있는데…” “모세가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는데…” 그들은 율법에 얽매였고 그들의 구원자인 메시야를 바라보지 못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이디오피아 내시를 생각해 보자. 그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는 율법에 따라 금식을 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읽었다. 이를 이사야 53장에 근거해서 보면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고 자신의 눈을 가리는 베일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가 빌립의 설교를 듣고 믿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었더라면 예수님의 영광은 가려졌을 것이다. 그가 믿기로 한 그 순간에 베일이 제거된 것이다.

다소 사람 사울은 율법에 따라 예수님을 적으로 보았으나 그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그 베일이 벗겨졌던 수많은 증거가 있다. 즉시로 회당들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거늘( 9:20) 성경 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과 토론하며( 17:2)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볼 수 없었던 율법만을 지키는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구약의 말씀들을 통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율법은 이미 죽은 옛 남편에 비유된다. 한 설교자가 로마서 7:1-3을 인용하면서, 첫째 남편이 죽은 날 둘째 남편과 결혼한 한 여인의 예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율법의 여섯째 묘사이다.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를 지배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에 의해 그에게 매여 있으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자기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라 불릴 터이나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그 법에서 해방되나니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간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 구절에서는 남편의 죽음과 아내의 재혼 사이의 기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현실세계에서 남편의 죽음 직후 재혼은 매우 이상할지 모르지만 성경에 의하면 여인이 과부가 된 순간, 그녀는 첫째 남편인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법률적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 담긴 생각이 신자와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 사이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나니 이것은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분과 결혼하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7:4)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과거의 관계가 끝나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됐다는 것과 이 두 관계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율법 아래에 있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 즉시로 시내 산에서 율법과 혼인하였다. 율법이라는 첫째 남편의 특징을 살펴보자. 그 남편은 혹독했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주인이었다. 남편의 규칙은 완벽했다. 그러나 불쌍한 아내는 그의 모든 요구사항을 지킬 수 없었다. 만일 아내가 한 가지 점에서 실패하면 그녀는 모든 것에 대해 유죄인 것이다. 이 남편은 완벽한 복종을 요구했다. 아내가 실패하면 즉시로 저주를 받게 되었다. 아무리 그녀가 노력해도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없었다. 로마서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그 아내는 이 모든 조건들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남편에 복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아내는 불복종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교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관계에서 아이가 없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열매도 없었다. 율법은 죄인을 통해서 의로움의 열매를 생산할 수 없다. 불쌍하고 힘없는 아내는 자신이 결코 남편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수고해야만 했다. 아비가일과 마찬가지로 아내는 더 좋은 남자가 오기를 소망하며 복종과 정조를 지키며 살아야만 했다.

이 예화는 성경의 나머지 구절들을 통해 입증된다. 두 명의 남편과 사는 여자는 간부이다. 그녀가 예수님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는 반드시 그녀의 첫째 남편인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행복한 소식이 전해온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나니…”( 7:4)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전 관계는 끝이 나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관계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자가 율법에 대해서 묶여 있다고 (일부라 할지라도) 가르치면 그는 이런 확실하고 선명한 성경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묘사되고 있다.

 

거울

멍에

교사

돌판에 새긴 글자

베일

죽은 옛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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