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제2장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
오늘날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교회는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교회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사람을 이와 같이 세 분류로 나누는 데 있어 그 차이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이 세 그룹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피를 물려받은 자손들이다.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피를 물려받아야 한다.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방인들도 이방인의 피를 물려받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유대인이 아니라면 이방인인 것이다. 교회는 영적인 탄생 즉 둘째 탄생을 통해 거듭난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거듭난 유대인들은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거듭난 이방인들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원래 가지고 태어났던 육신적 혈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꾸어 새로운 신분(identity)을 얻게 되었다. 인간은 2차적 영적 출생보다 자신들의 육체적 1차 출생에 보다 집착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수많은 논쟁과 잘못된 교리들이 발생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민족대로 나눌 때 유대인들은 그 민족들 가운데 속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나온 유대인들은 다른 모든 민족들과는 구별되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 가운데 한 민족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완전히 구별된 민족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동화되어 살려고 시도할 때마다 큰 재앙이 발생했음을 우리는 성경의 역사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마태복음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교회가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교회가 존재한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는 교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교회가 아니었다. 또한 교회는 침례인 요한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요한이 죽었고 교회의 건물은 아직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부르기에 앞서 이교도, 민족들 혹은 섬들이라 불리는 이방인들이 존재했다. 이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고 그 위에 한 민족을 세우셨다. 후에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다.
유대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방인들만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존재했지만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일시적인 역할을 위해 존재했던 가교가 아니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에베소서는 1-5장에 걸쳐 이 주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에베소서
따라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공동 상속자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노아, 다윗 혹은 모세 시대에 만들어졌던 언약 아래서는 그렇지 않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율법에서 발견되는 사실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같은 몸 안에 있다.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존재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요구들과는 대치된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현재, 같은 약속을 상속받는 참여자가 되었다. 구약과 신약 어디를 보더라도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으로부터는 배제된 민족이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교회라 불리는 한 몸 안에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비되는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구절을 통해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며 유대인 또한 이방인이 아니고 교회는 유대인이 아니며 유대인 또한 교회가 아님을 그리고 이방인도 교회가 아님을 우리는 명백히 발견하게 된다. 이 세 그룹은 분리된 존재인 것이다.
로마서
다음은 에베소서 2;11-12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기억하라. 너희는 지나간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받아 할례자들이라 불리는 자들로부터 무할례자들이라 불리던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연방 국가 밖에 있던 외인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서 분리된 낯선 자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육체를 따라서 오직 한 민족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하고 그분과 교제를 할 수 있다. 바로 유대민족인 것이다. 이방 민족은 언약과 약속도 없었고 하나님과 교제도 할 수 없었다.
유대 민족과 이방 민족은 같지 않다. 인류가 하나의 큰 가족이라는 주장은 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에베소서
구원받은 남자가 “나는 미국시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후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여자가 “나는 메시아적 유대인(Messianic Jew)” 라고 말하는 것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 혹은 이방인들이 이제껏 자기를 정의했던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 것이다.
신약 교회는 세상 민족에게 주어진 그 어떤 언약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동상속자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제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은 교회 안에 거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은혜의 왕좌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민족적이고 인종적 공감대는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 안에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없애려고 한다. 육신적 탄생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우리의 모든 정체성을 버리고 거듭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전적으로 영광을 돌리자.
요한복음
이 점을 놓치지 말라. 주님 자신께서 그 여인과 그 여인이 속한 민족은 유대민족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두 민족을 구별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분(HE)이야 말로 모든 종교적이며 민족적인 구분들의 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요한복음 4장은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교회 사이의 구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모두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들이 경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고(요4장),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행17장) 무지의 상태로(엡4장) 경배하였다. 그들은 토템들과, 우상 그리고 형상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바람, 나무 그리고 돌들을 우상화하였다. 그들은 부처, 공자 그리고 조로아스터 등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연, 에너지, 카르마(karma) 그리고 부두(voodoo)와 교제를 시도하였다. 그들은 종교적이었으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에게는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산에서 경배해야 할지, 제물을 바치기 위해 어떤 제단을 만들어야 할지, 어떤 날에 어떤 동물을 바쳐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유대인들의 우상을 매우 가증스럽게 여긴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과 교회 사이의 위대한 관계를 깊이 있게 살펴보자. 에베소서
여기서 주님은 모든 인간의 교제 가운데 가장 가깝고 친밀한 예를 주님과 신자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고 계신다. 제단이나 율법 혹은 그 어떤 경계도 필요치 않으며 불확실한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과 영원히 하나가 된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내버려 두거나 버리지 않으신다(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누셨음을 살펴보았다. 이 세 부류의 인류는 모두 누군가를 경배한다. 이방인들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유대인들은 그들이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러나 셋째 부류인 교회는 그들 안에 거하며 교제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
이 셋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로마서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마가복음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 사사들, 왕들과 사역자들을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모든 것은 유대인들이 먹다가 남은 부스러기들이다.
앞의 구절에 나온 그 여인이 예수님께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너는 개(이방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그녀의 간청에 응답하셔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며 그 당시 교회는 시작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그녀에게 줄 것이 없었다. 그녀(이방인)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예수님이 위대한 한 사람 이였다면 그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하나님이시므로 이방인들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었다.
다음은 베드로전서
우리는 여기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 민족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유대인에게 주셨다. 그분의 말씀을 이방인에게는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말씀은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세 개의 다른 사람들의 그룹이 존재하며 여러분은 이 세 가지를 성경적으로 구별해야만 한다.
이제 이스라엘과 교회를 비교해 보자.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
이 두 그룹은 소명을 받았다. 유대인에게 주어진 소명은 땅에 있는 것이었고 교회에게 주어진 소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는 땅이 약속되었고 교회에게는 하늘이라 불리는 한 장소가 약속되었다. 나는 유대인에게 약속된 것보다 교회에게 약속된 소명을 더 선호한다.
“주 네 하나님께서 좋은 땅으로 너를 데려가시나니 그곳은 물 시내가 있고 골짜기와 산에서 흘러나오는 샘과 깊은 곳이 있는 땅이요, 밀과 보리와 포도와 무화과나무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기름 올리브와 꿀이 나는 땅이라. 또 그곳은 네가 먹을 빵이 부족하지 않은 땅이요, 네게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을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쇠요, 네가 그곳의 산에서 놋을 캐리라.”(신
하나님이 자신의 민족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매우 위대하다. 오늘날 그 땅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으로 저주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으나, 약속의 땅은 매우 아름답고 비옥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런 약속된 땅도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에 약속하신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빌립보서
지상에서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그분에 대한 내용이 마태복음 8: 20에 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니라.” 그리고 이분과 하나님의 가장 낮은 자녀와 비교해 보자.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고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상속 유업을 받게 하셨나니”(벧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풍성한 땅이 약속되었으나 그 약속에는 어떤 조건들이 있었다. 그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 약속의 땅은 쓸모 없어지고 사람들도 쫓겨나게 되었다.
교회에게는 한 평의 땅도 약속된 것이 없다. 교회는 지상에서 그 어떤 권한도 통치 영역도 가지지 못했다. 교회는 세상 혹은 권력에 영향을 주는 그 어떤 정부형태도 받지 못했다. 또한 군대, 호위병, 감옥 혹은 경찰도 교회는 가지지 못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유대인에게 속했다. 이런 것들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약속이며 유대인들의 정신체계이다.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지구를 통치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우리의 소유물들은 하늘에 있다.
창세기
마가복음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받는 물질적 복에 대한 말씀과 야고보서
신약 성도들에게는 그 어떤 물질적인 부요함이 약속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함은 하나님을 믿는 데 오히려 커다란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베드로가 말하였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행
다음 경고를 살펴보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이런 관점에서
이것과는 반대로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경고되는 내용을 우리는 요한복음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소망은 이 지상에서 매우 큰 것이었다. 이에 반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은 겸손하고 낮은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했어야 했고,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불리었으나 결국 위대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명백히 이 구절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규정된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인류를 세 가지 분류로 명백히 나누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백인 성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슬퍼진다. 또한 미국인 성도 혹은 흑인 성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즉 인간 자신이 육체적으로 물려받은 유산 혹은 사는 지역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자는 딱한 마음이 든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에게서 출생한 여러분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위대한 것을 주셨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분이 백인이거나 흑인 혹은 황인종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더 좋은 상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라고 해서 더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여러분이 남성이라서 혹은 여성이라서 상대방보다 더 우월하지도 않다. 이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여러분의 첫째 출생은 결국 여러분을 지옥으로 인도할 것이다. 여러분의 종착역이 정해져 있다면 어떤 차를 타고 거기에 가는 것이 과연 중요한 것일까?
여러분이 만일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성도가 된 것이다. 왜 여러분은 과거의 모습에 집착하려고 하는가? 그러기보다는 예수님이 여러분을 변화시킨 그 사실을 찬양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은 유대인 신분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다. 현재 몇몇 어리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육신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자신들을 보다 나은 성도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옥으로 가는 도중에 자신들이 겪었던 많은 일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몸 안에서 보너스 점수를 받을 것이라 상상했다. 갈라디아서
만일 여러분이 이 정체성을 빼앗긴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해 보자. 나는 성도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장로교회에 시무장로, 혹은 율법을 지키려는 엄격한 안식교 교인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소위 상위 0.0001%에 속하는 올바른 성도라고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나머지 99.9999%의 기쁨과 교제의 특권을 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자랑하기 위해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복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지옥에서 건져내는 데 전혀 무가치한 것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교제의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편없는 거래가 아닌가!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자.
내가 <성경과 인종(The Bible and Race)>이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 그 책이 백인과 흑인 간 인종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매우 좁은 독자층에게 호소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 세계 사역현장에서 이 책을 본 많은 설교자들과 목사들이 더 많은 책을 보내달라고 요구해 왔다. 이는 많은 지역에서 인종간 교제가 잘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종과 민족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이다.
“내가 속한 그룹이 당신의 그룹보다 좋다는” 그 어리석음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끝내야만 한다. 유대인이 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훨씬 좋다. 물론 이방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에 가서 결국 버릴 것들을 얻으려는 노력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
같은 종류의 진실을 에베소서
한때 하나님은 유대인과 밀접했으나 이방인과는 멀리 떨어져 계셨다. 그러나 현재 구원받은 이방인과 유대인은 하나님 안에 같이 거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한때 하나님과 더 가까웠었고 이방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더욱 하나님께로 멀어졌으며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게 되었다.
이제 14절과 15절을 살펴보자.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을 이루려 하심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가르친다. 현재는 없어진 유대인과 하나님을 가로막는 한 벽이 과거에 존재했다. 하나님과 이방인들 사이에도 과거에 벽이 존재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벽을 허물었다. 이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니다. 문맥상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지칭함이 명백하다.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죽이사 친히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나는 동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 많은 편지와 전화를 받는다. 서로 다른 두 민족 혹은 서로 다른 종족에서 구원받은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교제하기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이 지상의 아버지 즉 자신들의 육신적 선조에 대한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유대인인가, 아니면 이방인인가? 여러분이 이것에 집착한다면 육신적인 여러분의 선조, 그 하나에만 여러분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이것에 관심이 있으면 여러분은 성령을 쫓아 영원한 진리 되며 참된 가치가 있는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고전
이스라엘 자손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어떤 사람에게 고집이 세고 반항하는 아들이 있는데 그가 자기 아버지의 음성이나 자기 어머니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징계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거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붙잡아서 자기 고장의 성문에 이르러 자기 도시의 장로들에게 나아가 자기 도시의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아들은 고집이 세고 반항하며 우리의 음성에 순종하려 하지 아니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요 술주정뱅이라, 하거든 그의 도시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일지니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할지니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이 구절을 자신의 교회를 통치할 하나님 왕국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내용과 비교해 보자.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유대인들의 율법 아래서는 반역한 아들은 죽음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체계에서는 반역한 아들이 회개하면 환영 받고 복까지 받는다. 얼마나 큰 차이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직 정해진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하셨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집 사람이나 너희 가운데 머무는 타국인 중에 누구든지 번제 헌물이나 희생물을 드리고 회중의 성막 문으로 그것을 가져다가 주께 드리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리라.”(레
이것과 신약시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 가운데 있느니라.”(마
이 내용과 동일한 방향에서 누가복음
이 내용을 히브리서
이런 독점적인 지위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민수기
그러나 믿는 성도들에게는, 베드로전서
또한 미래에 관해서는 유대 민족과 교회시대의 성도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요한복음
우리의 교통수단이 데살로니가전서
우리의 육신에 생길 변화에 대해서는 빌립보서
우리는 하늘로 채여서 올라간다. 우리는 하늘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육신을 자신의 것처럼 변화시킬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장소에서 우리가 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
요한일서
이런 복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는 이와는 매우 다르다. 누가복음
메시야의 탄생을 선포와 관련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소망이 지상 위에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통치했고 주님은 그 기초 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통치할 것이다.
로마서 11장은 다음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니라…네가 본래 야생 올리브나무에서 잘려 본성에 역행하며 좋은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졌을진대 하물며 본래의 가지인 이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자신의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지겠느냐?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1, 24-26절).
대환난이 끝날 무렵, 야곱의 고난의 때로부터 남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주님을 바라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보고 슬피 울고 회개하며 그들의 구원자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길에서 회심한 바울의 모습은 이 위대한 날에 발생하게 될 장면의 예고편이 되는 것이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끝까지 견딘 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믿고 그분이 세울 지상 왕국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
대환난을 통과하고 남은 이스라엘 자손은 구원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두 번째로 자신의 손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완수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와 파라오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것은 아니다. 많은 아이들은 이미 파라오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의 통치 아래서 죽어갔다. 심지어 요셉도 죽었고 그의 뼈만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이는 어린양의 피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마찬가지로, 환난시대에 끝까지 살아 남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구원받을 것이다. 그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경험은 못 하게 되나 이 지상 위에서 예수님의 왕국을 향유할 권리는 갖게 된다.
“주께서 야곱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여전히 이스라엘을 택하사 그들을 그들의 본토에 두시리니 타국인들이 그들과 연합하여 야곱의 집에 붙으리라.”(사 14;1) 그들은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될 것이며 그 어떤 이방인들도 그 땅에 거할 수 없다. 모든 전쟁과 갈등이 끝나고 이방인들도 그들과 연합할 것이다. 증오는 모두 사라지고 이방인들이 야곱의 집과 연합할 것이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속한 것이다.
예레미야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궁극적으로 약속하신 것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시는 지상 왕국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대한 약속이지만 신약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요, 한 왕이 통치하고 형통하여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집행하리라. 그의 날들에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안전히 거하리라. 그의 이름 곧 그를 일컬을 이름은 이것이니 곧 주 우리의 의라.”(렘
히브리 민족에게 약속된 소망은 그들의 왕이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자신들에게 약속한 땅에서 그들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 소망은 왕으로 오실 예수님이 왕좌에 앉으시면 성취된다.
“보라, 내가 내 분노와 격노와 큰 진노 중에 그들을 쫓아내어 머물게 한 모든 나라에서 내가 그들을 모으고 이곳으로 다시 데려와 안전히 거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32:37-38)
스바냐
사도행전
“대언자들의 말씀들이 이것과 일치하는도다. 기록된바, 이 일 후에 내가 돌아와 쓰러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건축하고 내가 그것의 허물어진 것을 다시 건축하며 내가 그것을 세우리니.” 교회가 휴거 되고 나면 하나님은 유대인을 다시 다루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주가 말하노라, 하셨은즉”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신약시대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주님과 교제를 할 수 있다. 천년왕국시대에는 과거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유대인만이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접근이 가능하다.
이 문제는 히브리서
하나님은 한 그룹(유대인)에게 다른 그룹(이방인)에 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해 주셨기 때문에 이 두 그룹은 서로 같지 않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서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구분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교리와 실제 신앙생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오류를 피할 수 있게 된다.
[1] 몇몇 사람들이 마태복음, 야고보서 그리고 히브리서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인 성경이며, 그 세 장의 성경을 믿는 신자들에게 약속된 복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복과는 반대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또한 오늘날 대중매체를 통해 설교자들에 의해 전파되는 소망의 대부분은 신약교회에 약속된 영적인 복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물질적 복임을 발견하게 된다.
[2] 베드로전서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을 향해 기록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베드로전서에서 경배를 드리는 사람들과 율법 아래서 경배를 드리던 사람들을 서로 다른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베드로전서가 교회가 아닌 유대인들을 향해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