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제3장 세대적 진리 재고찰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방법 가운데 가장 자주 쓰이는 것은 경륜(dispensations)이라 불리는 단어이다. 배급소(dispensary)라고 불리는 곳은 물건들을 분배하는 장소이다.
세대 혹은 경륜에 대한 오류와 극단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그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데 기인한다. 많은 성경교사와 학생들은 세대 혹은 경륜을 어느 한 시대로 해석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륜을 마치 시작점과 끝나는 시점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부정확한 이해는 더 나아가 세대적 체계(dispensational systems)에 대한 오해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을 앞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경륜이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주어진 어느 한 시점에서 개인이나 그룹을 다루고자 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표시해 준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가 아니며 더욱이 성경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우리는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경륜이라는 단어는 “나누어주다(dispense)”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경륜의 의미는 첫 번째로 “나누어 줌, 여러 개인들 혹은 장소에 나누어 주는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분배해 주는 배급소로 가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햇빛을 나누어주셨다.
경륜의 둘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다루시는 방법, 즉 신성한 통치 아래서 선과 악 그리고 육신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돌에서 물을, 선하고 완벽한 선물들을, 생명과 구원 등을 제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자비를 나누어 주셨다.
셋째 정의는 분배되는 혹은 부여되는 방법을 의미한다. 즉 규정되는 원칙과 규범의 체계를 말하고 있다. 레위 법과 규범을 포함하는 모세의 경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 경륜 등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경륜의 정의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시간의 한 시점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륜을 어느 시점의 시작과 끝을 연관시켜 생각한다. 분배하는 것은 나누어 주거나 어떤 사실을 공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4000년에 걸쳐 진리를 나누어 주셨다. 새로운 진리가 주어지면 그것은 분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인간에게 선물, 재능, 축복, 기회와 책임을 부여하셨다. 이런 것들은 분배(dispensation)의 행위들이며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구절을 주위 깊게 살펴보자. 에베소서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경륜이 시대의 한 시점이나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진리를 선포하도록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능력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고린도전서
이 구절에는 어느 특정한 시점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없다. 이 구절의 주제는 복음 자체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1. 나는 복음을 선포한다(I preach the gospel)
2.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if I preach not the gospel)
3. 이것을 행하라(do this thing)
4. 나는 복음을 선포한다(I preach the gospel)
5. 나는 복음을 값없이 선포한다(I make the gospel without charge)
우리가 이 구절을 편견 없이 읽는다면 경륜(dispensation)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선포했던 것은 교리 자체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형제들이 이 구절은 바울이 어떤 새로운 복음에 헌신되었거나 혹은 과거에 선포한 적이 없는 교리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구절과는 대치되는 것이다. 분배하고 있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권능이며, 이는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하는 책임을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경륜이라는 단어가 세 번째로 나오는 곳은 골로새서
경륜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다른 구절을 살펴보자.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자신의 크신 기쁨을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니 이것은 충만한 때의 경륜 안에서 친히 모든 것 즉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분 안에서 다 함께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또한 그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이라.”(엡
여기서 우리는 라킨이나 스코필드 같은 학자들이 경륜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인류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들의 최고점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보여주고자 했던 위대한 진리이며 계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모든 시대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분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순간 자신의 아들의 영광과 선하심을 계시하고자 모든 것을 제공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경륜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에 있어 중요한 변화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소위 세대적 진리라 불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대적 진리에 대한 교리가 불명확하며 오류를 가지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경륜이라고 하는 단어를 정확히 정의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둘째는, 디모데후서 2:15절을 잘못 사용한 데 기인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나누는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 여기서 이전 시대의 많은 성경 교사들이 “경륜은 나누는 것”이며 “나누는 것은 경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오해가 경륜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빛을 나누어 주셨고(창1:3) 그 후에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다(창1:4). 이 두 가지 행위들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들로부터 아브라함을 분리하셨고 염소로부터 양을, 가라지로부터 알곡을 분리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분배 행위(acts of dispensing)와는 다르다. 하나님은 율법을 제공해 주셨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교회에게는 성령님이 거주하도록 제공해 주셨다. 그러나 이런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나누는 일은 아니다.
경륜을 설명하는 고전적 방법의 도표와 그림들이 이 두 단어의 의미를 혼돈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했다. 그 결과, 그것들은 경륜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시작과 끝나는 시점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경륜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하면 분배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진리가 어느 시점에서 끝나고 새로운 다른 진리가 시작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분배해 주시는 경우(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을 선택하시며 그것들을 인간에게 알려주심) 시대적 구분은 분명히 시작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은 끝나는 시점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설명하기 쉬운 예를 한 두 가지 들고자 한다. 라킨과 스코필드의 고전적 경륜 모델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제공하셨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율법의 세대(Dispensation of Law)”의 시작을 보여주는 한 선이 그어진다. 그리고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함과 부활의 시대로 진행한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혹은 교회의 탄생(누구의 도표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에 대해 세대적 진리 모델은 교회시대 혹은 은혜시대의 시작점을 표시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율법의 시대가 끝나게 됨을 보게 된다. 여러분이 잠시 주의 깊은 생각을 하기 전에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1. 율법은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삶을 통치하는 것이고 그들의 미래는 율법 아래 그 땅에서 사는 것이다.
2. 천년왕국 시대에는 다시 율법이 유대인과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다.
3. 현 시대에는 율법이 인간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공해 주신 후에 그것이 그 이후에도 계속 유효함을 보여주는 충분한 예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정부에도 시작점이 있다. 그러나 끝나는 시점은 없다.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도 정부에 통치를 받는 인간은 계속 존재한다. 그분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인다는 말씀이 예수님에게 주어졌다.
교회시대의 시작점은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끝나는 시점을 알 수 없다. 왕국의 시작점은 주어졌고 그 왕국은 영원히 존재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의 끝나는 시점이나 혹은 그것을 다시 철회한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경륜을 앞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가르쳐 온 것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서 나누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나 경륜은 나누는 것과는 다르다.
둘째 예는 율법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많은 지식을 소유한 학자가 여기저기 선을 그으면서 율법에 의해 인간을 다루는 방법과 율법 아래 있는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면 이는 우리의 머리를 혼돈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대인 외에 그 어떤 민족에게도 율법은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율법의 조건과 기준으로 유대인 외에 다른 민족들을 다루지 않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인간을 다루시는 그 어떤 시점도 필요하지 않다. 그분은 율법을 통해 인류의 아주 작은 한 부류(유대인)를 다루셨던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율법 이전에 배분된 법칙에 따라 하나님이 다루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시대에 다른 경륜을 통해 다루셨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구분은 있으나 경륜의 구분과는 다른 점이다.
출애굽기 19장으로부터 마태복음 26장까지를 통해 성경의 주된 관심이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과 하나님 그리고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율법을 기초로 예수님의 초림 전 1500년 동안 교제를 해왔다는 설명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우리는 경륜이 정의하지 않는 것을 살펴보았다. 앞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진리의 말씀 가운데 무엇이 진정한 구분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두 개의 구분
하나님의 성육신 이전의 인류 하나님의 성육신 이후의 인류
세대적 체계의 문제점은 그것이 수없이 많은 추측에 의존하는 반면 올바른 증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륜에 따라 나누는 방법은 성경에서 충분히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것은 어떤 조사에서도 입증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눌 수 있다. 구약은 주로 유대인과 관련이 있고 신약은 주로 교회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규약을 규정하며 나누어 주셨고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을 통해 규약을 규정하고 나누어 주셨다.
그러나 이 두 성경은 명백히 구분됨에도 전체 성경을 하나씩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의 첫 12장까지는 아마도 인류역사의 1500년부터 2000년 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들은 구약의 탄생을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주심은 단 하루 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
비슷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에서 죽으심,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과 교회의 확립과 완성, 이중 그 어떤 것도 구약시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무효화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따라서 말라기
마태복음 1장 이전에, 혹은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는 신약이 배분되지 않았다. 실제로는 갈보리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신약의 확립을 예표하고 있다. 26장의 마태복음, 13장의 마가복음, 21장의 누가복음과 19장의 요한복음은 모두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데 구약과 신약 사이에 구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분이 성경의 39번째 장과 40번째 장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여러분은 이 점에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은 그분이 육신으로 오시면서 매우 극적으로 바뀌었다. 보이지 않았고, 멀리 있었으며 접근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과 같이 생활하셨다. 이것이 열쇠이다. 위대한 구분은 율법과 은혜 혹은 정부와 왕국의 구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이것이야말로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가 아닌가! 아담으로부터 베들레헴 그 밤에 하나님은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딤전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영원한 그 분의 생명!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셨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성(人性)을 말씀으로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다. 신약에서는 자신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며 그를 보고 그로부터 들었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들 가운데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해주고 계신다.
정리하면, 성경을 가장 확실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나누는 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시기 전과 육신으로 오신 이후로 나누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세 개의 구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사탄과 죽음에 속박되었던 인간
영적으로는 자유롭게 되었으나 육신적으로는 사탄과 죽음에 매여 있는 인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사탄과 죽음에서 자유롭게 된 인간
세상(the World)의 끝 세상(The World)의 끝
갈보리 다시 오심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다른 방법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다. 이 방법에 의하면 성령님이 마태복음
우리는 세상(the world)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지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권력체계를 의미함을 알고 있다(삼상 2장).[2] 세상 제도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 질서를 가져온 두 가지 사건이 존재한다.
히브리서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갈보리 십자가에까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했던 세상, 즉 한 체계가 존재했다. 그 세상에 사탄이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히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을 24절부터 주의 깊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 그러나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자기 길로 가매 잎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이에 그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나이까? 하매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하니 종들이 그에게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모으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가라지를 모으다가 그것들과 함께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수확 때까지 같이 자라게 두어라. 수확하는 때에 내가 거두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먼저 가라지를 함께 모아 불태우게 단으로 묶되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들이라, 하리라, 하시니라. 또 그분께서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라. 그것은 참으로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로되 자란 뒤에는 채소 가운데 가장 커서 나무가 되므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의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하시니라. 또 그분께서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여자가 가져다가 굵은 가루 서 말 속에 숨겨 넣어 마침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창세로부터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무리를 멀리 보내고 집으로 들어가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밭의 가라지 비유를 밝히 말씀해 주옵소서,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왕국의 자손들이로되 가라지는 저 사악한 자의 자손들이니라.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수확하는 때는 세상 끝이요, 거두는 자들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모아 불에 태우는 것 같이 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
주 예수님께서 “세상 끝”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신 하나의 사건이 존재한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끝이 온다고 두 번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두 번이나 그 사건의 시점을 규정하셨다. 지상 파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지상에서의 통치가 어떻게 바뀔지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서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마태복음 13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시고 그 분의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분의 죽으심, 장사 그리고 부활을 통해 각 개인들을 죄의 속박과 형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는 점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위대한 희생은 세상의 경로를 바꾸지는 않았다. 가라지는 계속해서 알곡과 함께 자라고 악한 물고기는 선한 물고기와 계속 헤엄칠 것이다.
혼들은 구원받게 되었다. 삶도 변했다. 교회는 세워졌다. 진리는 선포된 것이다. 복음이 전파된 2,000년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는 이 점을 미리 예견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다시 오시면 왕국을 취하시고(계11:15), 이 지상 위에 확고한 통치를 이룩하시며(사9:6-7), 모든 반대 세력을 파멸시키고(단2장)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질서를 완전히 뒤엎을 것이다. 이 과정은 매우 완벽할 것이며 권력의 변화는 전 우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성령님은 이를 “세상 끝”이라고 표현하셨다.
사무엘상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이 지구는 광활한 땅으로 이루어졌다. 이 지구는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신 경이로운 작품이다. 이 땅에는 폭포도 있고, 새, 숲, 산, 바다 그리고 동물들이 가득하다. 이 지구에는 애초에 문제가 없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지구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
그러나 지상에 어떤 자(사탄)가 어떤 것(죄)을 들여와서 이 세상을 조작하였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요일2:15-16)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 부분이 아님이 명백하며 창세기 1장에서는 이를 신(god)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이 강력한 영향력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라고 요약한다.
타락한 인간은 어느 누군가가 그를 자유롭게 해 줄 때까지 이 세상에 갇혀 있게 된다.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구원사역은 갈보리에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쳐부수고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사탄을 제거하고 그의 정사와 권세를 탈취하심으로 세상의 끝이 온 것이다.
예수님의 갈보리 사건 이전에 우리는 사람들이 마귀들에게 사로잡히고 마귀가 사람들을 불 속으로 집어넣고 자해하게 하는 사건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 후에는 모든 전쟁은 그 양상이 바뀌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라지를 뿌리는 숨은 자를 발견하게 되고, 마귀의 사역자, 거짓 사도들, 빛의 천사 그리고 사탄의 교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사탄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탄은 더 이상 인류에 대해 승리할 수 없게 되었다.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사탄은 그리스도인을 가장해서 움직여야만 한다. 사탄은 종교적으로 변하였고 그의 권능이 무너졌기 때문에 사기와 도둑질을 통해서만 역사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갈보리 십자가 이후에는 새로운 세상 체계가 생긴 것이다. 이제 사탄은 힘이 아닌 속임수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쉽게 루시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세상 질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 하실 때까지 유지될 것이며 사탄은 그때 이 지구로부터 쫓겨나 갇히게 되고 이 세상 체계는 그 종말에 이르게 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사탄의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실 것이다. 많은 성도들은 소수의 권력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체계를 변화시켜 짐승의 왕국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해 두려워하곤 한다. 성경적으로 새로운 세상 명령체계는 A.D. 33년에 시작되었고 이방인의 시대가 짐승의 통치를 통해 절정을 이루고 왕이 다시 오실 때까지 유지될 것이다.
이 진리는 베드로후서
이 홍수를 통해 세상은 파멸되었으나 하늘과 땅은 유지되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물질적 존재를 의미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이 물리적 구조 위에 존재하는 하나의 제도 혹은 시스템이다. 이 세상은 영적인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 홍수 이전의 시대에도 이 제도는 주님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그분의 재림 때까지, 이 제도는 항상 주님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어떤 사람을 세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관심이 세상의 길이나 유형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왕들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 제도는 주님의 뜻에 따라 파멸될 것이다.
성경은 세상 제도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 이전에 존재했던 세상이 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홍수로 파괴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이 루시퍼의 반역에 기인한 것이라고 가정하나 100% 확실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확립된 세상이 존재한다. 이것은 죄로부터 발생하였고 예수님의 희생을 지불하기 까지 존재한다. 이것이 모든 죄가 아담을 통해 세상으로 들어왔다고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유이다(롬5장). 그러나 사탄의 죄는 아담의 타락이전에 존재했다. 한 죄가 그 이전시대에 들어와서 다음 시대들에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물로써 심판을 받았으며(벧후3:6) 세상의 기초는 아담이 타락했을 때 확립되었고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 도래하면서 세상의 끝이 왔으며(히9:26)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 도래하면서 세상의 끝이 왔고(마13장) 예수님께서 영원히 통치하는 세상은 끝이 없다(엡3:21, 사45:17).
고전적 모델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7 개의 구분
무죄(Innocence)
양심(Conscience)
인간정부(Human Government)
약속(Promise)
율법(Law)
교회(Church)
왕국(Kingdom)
앞으로 살펴볼 세대적 구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7개 혹은 8개의 구분으로 나누고자 한다. 이 시대들은 일반적으로 무죄, 양심, 인간정부, 율법, 교회, 왕국으로 표현된다. 어떤 연구자들은 교회 대신에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여 8개로 구분을 한다면 이는 영원(Eternity) 혹은 그와 비슷한 이름이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이런 논리라면 과거의 영원(eternity past) 시대를 포함해야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있으나, 이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7 혹은 8이라는 숫자의 독특한 의미를 훼손하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세대주의 학자들은 아담의 시대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물론 기원전4,000년 이전에 하나님이 어둠 속에서 앉아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행했다는 유쾌하지 않은 생각을 피하도록 해준다.)
세대적 진리를 살펴보는 모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계시해 주신 시대들을 통해 역사를 나누고자 한다. 그 추가적인 계시를 통해 창조주와 피조물이 완벽하고 보다 즐거운 교제를 누리게 된 것이다.
무죄
이 시대는 하나님이 아담의 콧구멍에 호흡을 불어넣고 이 생명의 호흡을 통해 인류가 시작된 시점부터 시작한다. 이 살아있는 혼과 그를 돕는 자로서 여자가 함께 완벽한 무죄의 상태로 에덴동산에 거했다. 우리가 이 단어의 정의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인류의 첫 상태를 묘사하는 데 이 단어가 선택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죄하다는 의미는 남을 해치고자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있으며 죄로부터 자유롭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어떤 법률도 어기지 않고 잘못된 일도 하지 않으며,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으며, 순결하고 바르며, 어떤 범죄나 악한 행위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거닐고 있었던 그 상태를 이 단어는 정말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오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무죄의 상태라고 정의할 수 없다.
첫째 경륜에서는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하나의 간단한 명령만을 제시하셨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를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가꾸고 지키게 하셨더라.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첫째 부부가 지켜야 했던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지키지 못했고 그들의 무죄는 즉시로 사라졌다. 창세기
어느 누구도 인류의 타락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흘렀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이것을 어떤 한 연대나 시대로 지칭하는 것도 쉽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첫 부부가 하나님과 2-3백 년 동안 완벽한 교제를 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많은 계절이 지나기 전에 이 명령에 복종했더라면 많은 자손을 가졌을 수 있을 것을 고려한다면 이 관점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들이 이 명령에 불복종했기 때문에 그 실패가 첫 번째 죄로 발생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의 기간을 제시하고 있으나 비슷한 이유로 우리는 이 관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저자는 인간의 타락은 이브의 출현과 동시에 발생하였다고 생각하며 이런 관점을 입증하는 몇 가지 성경구절이 제시하겠다.
첫째, 성경은 “사탄이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증언하고 있다(요
사탄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것인가? 그는 파괴하고 거짓말을 했다. 에덴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무죄한 두 사람이 있었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사탄)”가 목표물에 달려들기 전에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바로 타락했다고 추측하는 둘째 이유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님과 더 오랜 시간 교제를 했다면 그들이 창조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로 인해 유혹에 저항하는 힘이 컸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사탄이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런 강력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확립하도록 시간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십계명과 인류의 첫 범죄를 비교해 보자.
1.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아담은 이 세상의 신을 선택함으로써 이 명령을 어기게 되었다.
2.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아담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본 것을 세웠다.
3.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으나 그런 위대한 지위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였다.
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아담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5. 살인 하지 말라: 그는 전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6. 간음 하지 말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종종 성경에서는 간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마음의 문제이다.
7. 도둑질 하지 말라: 아담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과일을 취했다.
8. 이웃에게 거짓 증언하지 말라: 아담은 여자를 비난했고 여자는 하나님을 비난했다.
9.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들은 선과 악의 과실을 탐했다.
아담이 타락했던 그 날, 십계명 가운데 9가지를 범한 것이다. 만일 이런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 다음날 즉 7일째 날인 안식일에 발생했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과 명령을 주신 지 24시간도 채 못되어 이 10계명 모두를 위반한 것이 된다.
무죄의 시대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시대 보다 좋은 점이 있었다. 이 때는 인간이 평생 싸워야 되는 죄의 본성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죄의 본성이 없다고 해서 유혹에 대해 항상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완벽했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이 환경의 문제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에덴동산은 평화롭고 모든 것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가난, 전쟁, 교육의 부재 등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이 삶의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다면 그는 결코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무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직접 대화하셨다. 그 당시엔 어떤 책이나 예언자, 중재자 혹은 천사의 방문도 없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할 수가 없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위대했으므로 이를 오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죄의 본성이 이 명령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아담은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이다(딤전
세대적 진리 모델에서는 무죄의 시대가 에덴동산에서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 언제 발생했고 무죄 시대의 끝이 언제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로마서 5장에 따르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죄로 여기시는 일정 기간을 보내게 된다. 그들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롬5:12)로 인해 고통을 받으나, 율법이 존재하기 이전에는(롬
따라서 하나님이 그 시점 동안 무죄를 제공해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 하나님이 결코 다시 그것을 물리지 않았음에 우리는 주님을 찬양한다.
창세기
1. 무죄시대의 인간: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2. 기간: (1) 인류와 관련해서-아담의 창조로부터 그의 타락까지 지속됨.
(2)개인과 관련해서-출생으로부터 알려진 진리를 의지적으로 거부할 때가지 지속됨.
양심
고전적 모델의 둘째 경륜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나 대체적으로 양심의 시대로 규정된다. 이 시대는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노아의 홍수 시대까지를 이루고 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공개적인 계시를 주지 않으셨다. 우리는 잠시 후에 세 가지 예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은 사전에 주시는 경고를 인지하는 능력이다. 창세기 3장 이후로부터 아담, 이브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은 그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롬1:18-20). 성경 교사들은 인간의 죄의 본성을 많이 열거했으나 로마서 5장과 7장을 통해서 이후에 율법을 구성하게 될 기본적 원칙과 이방인들의 인지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롬
모든 아담의 자손은 본능적으로 분노의 자녀이고(엡
추가적으로,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롬
이 기간에 하나님의 위대한 간섭이 세 번 있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가인에게 말씀하셨고 그것을 통해 인류는 하나님에 이르는 길이 좁으며 경배와 종교에 대한 올바른 길과 선택도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주님의 계시된 말씀에 대한 겸손한 복종만이 받아들여진다.
둘째, 주님께서는 에녹을 통해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 에녹은 주님과 동행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진리를 알려주며 인류의 사악한 상태와 그것을 심판하러 오실 주님에 대해 선포하도록 명령하셨다(유 14-15).
셋째,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가 도래할 것임을 그리고 방주를 준비해서 그것을 피할 방법도 알려주셨다.
이 둘째 시대도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타락한 부부로부터 태어난 첫 두 아들의 역사로부터 큰 홍수로 인류를 잠기게 한 시대까지, 인류는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를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주게 된다. “아벨도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 중에서 가져왔는데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므로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빛이 변하니라. 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분을 내느냐? 어찌하여 네 얼굴빛이 변하였느냐? 네가 잘 행하면 너를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네가 잘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그의 열망이 네게 있으리니 너는 그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하되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까지 다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으로 인해 슬퍼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창
세대적 진리 책에 묘사된 그림에서 창세기 3장과 4장 사이에 그리고 9장과 10장 사이에 한 선을 긋는다. 이는 양심의 시대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공부해 보면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부여(제공)하셨다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는 이 양심이 에덴 밖에 있는 곳을 향한 중요한 지침이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에덴에서 홍수시대까지 그 방법으로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말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성경은 앞에서도 설명했던 것처럼 이와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어떤 것에 대하여 끝나는 시점을 긋는 것은 올바르지 못함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자 한다. 모든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양심을 지녀왔고 인간의 지식이 부족한 경우에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깨닫고 지키도록 하나님께서는 양심을 사용하셨다.
양심은 두려움이나 후회를 불러낼지 모르나 인간으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양심에는 권능이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받은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고(요
거듭난 신자는 선한 양심(딤전
따라서 인간이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양심을 제공해 주셨으나 이것을 거두어 가는 시점이 없는 것이 명확하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모두 그들의 양심에 따라서 대하고 계신다.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창세기 3장까지,
1. 양심을 소유한 인간: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진리의 기쁨을 제공해 주셨다. 이것은 전에 아담에게 보여주신 계시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인류에 대해 어떤 개인들에게(가인, 에녹, 노아) 직접적인 계시를 주셨다.
2. 기간: 영원함
인간정부
일반적으로 세대적 진리 모델에서는 대홍수 이후에 인간정부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신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홍수 이전에 국가, 왕, 군대 혹은 대다수의 인구를 통치하는 개인들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방법, 즉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방법대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대홍수 이후에 우리는 민족의 기원에 대해 발견하게 되고 인간의 자손들이 아닌 부족과 민족들이 등장하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창 9-10장). 그리고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발견하게 된다(창 11장).
인간들이 갑자기 그룹별로 흩어지고 개인들이 인구의 대표로서 권력을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을 통치하는 형태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한 인간의 역할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다. 이스마엘은 인류의 또 다른 계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많은 민족들의 시조인 것이다. 성경은 인류 전체를 설명하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아비멜렉, 이삭, 파라오, 요셉, 아므라벨, 이드로와 야곱 등이 그 예이며 이는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현상이다.
이 기간에 주님은 한 개인이나 인류 전체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한 민족의 대표에게 말씀하시고 그 대표를 통해서 그들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고 대표를 통해 주민의 질문에 응답하셨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들 왕의 통치행위에 따라 흥망성쇠를 반복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시민이 아닌 지도자인 벨드사살과 논쟁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고레스나 느브갓네살 왕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왕국아래서 인생을 산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이는 모든 인류 역사에 있어서 계속 진행되는 현상이다.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들의 민족에 따라 구분되었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진리는 이전에 주신 양심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정부의 개념은 새로운 경륜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하신 것의 연장인 것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한 민족에게 또 다른 하나의 빛이 제공되었고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간접적으로 받게 됨을 살펴 볼 것이다. 모세-파라오, 느부갓네살-다니엘 그리고 니느웨-요나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들이다.
인류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시민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고 잘한 것을 격려하고 잘못한 것을 책망한다(롬 13장). 하늘의 왕국은 이처럼 강한 힘으로 통치된다(마
이 시대의 실패는 명백히 발견할 수 있다. 노아에게 부여된 간단한 원칙에서 벗어나 인류는 자신들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세로서 위에 있는 것을 구하고자 했다. 주님을 배제한 채로 영광을 구하고자 했던 그들의 시도는 그들로 하여금 시날 평야에 멈추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내가 그것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었노라.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 그러나 너희는 고기를 그것의 생명과 함께 곧 그것의 피와 함께 먹지 말지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생명의 너희 피를 요구하리니 모든 짐승의 손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이요, 사람의 손에서 곧 각 사람의 형제의 손에서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리라.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니라.”(창
창세기
우리는 모든 시대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민족들을 분열시키셨다. 우리는 이 시대에 대해서도 어떤 선을 그어 그 시대의 끝을 표시할 수 없다. 인간정부는 영원히 지속된다.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의 왕국을 취하시고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다.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그 왕좌를 다윗에게 주실 것이다.[3]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1. 인간 정부 아래 있는 인간: 무죄와 양심의 시대의 실패에 이어서 하나님은 소수의 인간에게 통치 권력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혹은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닌 대리인에 불과했다.
2. 기간: 영원함
언약
고전적 모델의 넷째 경륜에 속하는 것은 언약의 경륜이다. 이 세대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로부터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준 기간을 포함한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한 인간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그 자손에게는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고 특별한 언약을 제공해 주셨다.
이 시기는 하나님께서 매우 제한적인 방법을 통해 처음으로 제공해 주신 매우 특별한 세대이다. 무죄, 양심 그리고 인간정부 시대는 그것들이 시작된 시점 이후로 모든 혼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에게만 유일하게 언약을 주신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여호와는 모든 흩어진 민족들 가운데 한 민족을 선택하여 불러 내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을 떠나서 두 언약 - 그가 광대하고 수없이 넓은 땅을 유업으로 받고 무수히 많은 후손들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 에 의지해서 미지의 땅으로 가도록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이 축복이 더하여졌고 그를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더하여졌다.
이 경륜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자손이 아닌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나, 성격, 대언자 그리고 목자들을 받지 못했다(롬 9장). 그러나 주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언약을 재확인시키고 확장시키셨다.
세대적 진리 도표에서 보여주는, 우리에게 친숙한 문제점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한다. 언약이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분명한 시점이 존재하지만 율법은 영원하기 때문에 시내산에서 한 선을 긋고 “언약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율법은 시작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약속의 땅은 항상 히브리 민족에게 속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민족들 가운데 영원히 머리가 될 것이다. 사실은 율법의 시대, 교회시대 그리고 환난시대가 끝나기 전에 히브리 민족의 아비들에게 주어진 언약의 실제적 성취를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언약들을 제공하셨고 그것들을 다시 되돌리거나 끝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이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롬
여러분은 어쩌면 아브람을 특별히 부르시고 그에게 위대한 선물을 부여하심을 통해 보다 더 나은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경륜도 앞선 시대와 동일하게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은 믿고 복종하기만 하면 됐다. 모든 시작은 좋았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인간은 그 목표에 정확히 도달하지 못했다. 율법을 주심에 앞서 족장시대는 여전히 민족의 시대를 잉태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의 전체 회중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고기 솥 옆에 앉았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전체 집회 무리를 굶주려 죽게 하는도다, 하니라.”(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배반하게 됨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로부터 창세기 12장까지
1. 언약을 소유한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의 자손만이 이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조들을 통해 그 민족에게 말씀하신다.
2. 기간: 영원함
율법
다음으로 우리는 율법의 경륜에 들어간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율법시대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의 전체적인 변화를 의미하지 않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사실 율법을 제공해 주심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것 가운데 하나이지만, 율법은 새로운 그 어떤 것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자. 율법의 어느 조항도 이방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율법은 이방인들의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지위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자. 약속의 땅은 영원하다. 율법이 언약에 추가된 것이지 그것을 폐기할 수 없다. 율법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율법은 그들의 현재 상태에 영향을 주는데 그들이 율법에 복종하면 약속의 땅에서 거하며 향유 할 수 있으나 만일 율법에 불복종 한다면 그곳에 거하는 기쁨을 뺏길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행위의 결과가 아닌 약속의 문제이다. 갈라디아서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새로운 경륜이다. 시내산 광야로부터 예루살렘 밖에 있는 갈보리 산에 이르는 이 기간 성경의 초점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이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돌에 새긴 율법을 통해서 한 민족(유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 모른다. “제사장은 어떤 역할인가?” 그들의 임무는 돌 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명령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언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 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일이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양심의 명령에 따라 통치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었으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세부적으로 경이롭게 쓰인 말씀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율법시대를 종결 짓는 한 선을 긋고자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제공한 후에는 그것들을 결코 되돌리는 경우가 없다. 우리는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떻게 성취하시고 거듭난 신자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는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을 반드시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며 또한 한 삶이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왕좌에 앉을 것이다. 따라서 그 정부는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과 정확히 일치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결과는 다니엘이 기도했던 말들로 요약된다. “우리가 주의 훈계와 주의 법도를 버리고 떠남으로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며 사악하게 행하고 반역하였나이다. 또 우리가 주의 종 대언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통치자들과 우리의 조상들과 그 땅의 모든 백성에게 말한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나이다. 오 주여, 의는 주께 속하고 이 날과 같이 당황한 얼굴은 우리에게 속하되 곧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과 가까운 데나 먼 데 있는 모든 나라의 온 이스라엘에게 속하나이다. 그들이 주를 대적하며 범법한 그들의 범법으로 인해 주께서 그들을 두루 그 나라들로 쫓아내셨나이다.”(단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건 간에 그 결과는 항상 같다.
시내산으로부터 출애굽기 19장까지,
1. 율법에 의해 통치되는 언약을 소유한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만이 의로운 삶에 대한 이 기준을 향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돌 판에 새겨진 말씀을 통해서 그 민족에게 말씀하신다.
2. 기간: 영원함
교회
하나님의 다음 계획을 은혜의 시대로 설명하는 데는 수많은 오류와 폐해가 존재해 왔다. 이것은 이 시대가 오기 이전에 사람들이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한다. 아담이 생명을 유지한 것은 은혜였다. 홍수 이전에 방주를 예비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롯을 소돔에서 구한 것도 은혜였다. 유월절 밤에 어린양의 피만을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도 은혜였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 인간들을 전부 멸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흩어 놓으신 것도 은혜였다. 금송아지 우상 사건 이후에 모세를 다시 산으로 부르신 것도 주님의 은혜였다. 다윗, 삼손, 엘리야, 기드온, 아사, 룻, 라합 그리고 에녹 등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을 통해 수천 번 이상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선하심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은혜의 시대라기보다는 교회시대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사람들을 택하여 예수님께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주셨다. 예수님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변했다. 구원자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고(요 3장, 롬 7장) 예수님 안으로 들어갔으며(고전 12장),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게 되었고(롬8:9)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골 1장) 한 몸의 지체가 되었다(엡 2장).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발생한 단순한 발전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루시는 방법의 연속이나 확장이 아니다. 이전에는 한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교회이다(벧전 2장).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에 제공해 주신 것의 수정된 모습이 아니다.
이 경륜이 도래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이라 불리는 자신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 시대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말씀이나 계시를 제공해 주시지 않았다(계22:18-19). 설교자, 복음전도자 그리고 교사들이 존재하나 그들이 만일 사도를 통해 교회에게 주신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그 무엇을 증언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거부 할 수 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유대인들을 권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시대 지도자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꿈을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환상, 감정 그리고 느낌과 같은 저급한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한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다(벧전 1장).
우리는 다시 한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주신 시점, 즉 명백한 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들림 받는 시점에 한 선을 긋고 그것을 교회시대의 끝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지 않다. 휴거라 불리는 현상이 지구에 대한 하나님의 중요한 사역의 방향을 바꾸는 시점은 되지만 그것이 교회시대의 끝은 확실히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받고, 어린 양과 혼인하고, 다시 통치를 하며 신랑과 상속을 영원히 누리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아담 이후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살 수 있는 소망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완성된 성경과 구원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를 통해서 우리는 마침내 그분의 백성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공급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분의 피로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조차도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에베소서
그러나 이 시대의 실패는 성공에 대한 기회가 매우 컸기 때문에 매우 실망스럽다.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딤후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계
성령님을 주심으로부터 요한복음 20장까지,
1. 교회: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육체적 출생으로부터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개인들이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2. 기간: 영원함
왕국
하나님의 말씀을 수십 년간 공부해 본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은 성경 자체보다 그것을 가르치는 자를 더 존중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대적 진리 모델을 예로 들어 보자. 일곱이라고 하는 숫자는 완벽하고 신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말씀을 일곱 시기나 세대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좋아 보인다. 세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일곱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또한 일곱이라는 숫자를 증명하기 위해 세대적 진리 모델을 사용한다. 이것은 마치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탄소 연대측정법을 사용하고 탄소 연대측정법을 입증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사용하는 논리와 비슷하다.[4]
우리는 교회가 휴거 되고 일곱 번째 경륜이 시작된다고 가르치는 교리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다니엘의 70주라고도 불리는 7년간의 대환난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에 있어 급격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환난기간에 있을 21번에 걸친 심판과 유대인 남은 자들의 구원 그리고 지상왕국의 전복 등은 교회 시대의 목적과 사역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야곱의 고난의 때를 새로운 경륜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전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오래 전 시작된 시대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세대적 진리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연구가 대환난을 유대인에 대한 것으로 정확히 정의하고, 그 7년간의 시간이 다니엘 9장의 예언을 완벽히 성취하고 그 환난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해 반역했던 지상에 있는 백성을 고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이런 대부분의 연구는 대환난을 새로운 경륜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대환난은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 것도 아니며 인간에게 새로운 계시를 하신 것도 아니다.
그 칠 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사실 대환난의 증거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니엘에게 주신 말씀과 예수님의 경고를 주목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 8개월 동안 새롭게 제시된 언약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말씀은 “끝까지 견디고 모든 것은 더 나아질 것이다.” 라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휴거와 주님의 다시 오심 사이에 유대인, 이방인 혹은 교회에게 새롭게 주어진 진리는 없다.
교회는 일종의 괄호(parenthesis)로서 전체 큰 흐름 가운데 조그맣게 삽입된 시기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라합과 룻의 얘기와 비슷하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전체 관계 스토리 가운데 한 여자의 얘기가 중간에 들어왔으나 그 여인은 곧 사라지고 전체 이야기는 계속 진행된다. 대환난을 가장 명확히 설명하는 구절은 그것을 새롭고 다른 세대가 아니라 전 세대의 끝으로 보게끔 인도한다.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법을 그치고 죄들을 끝내며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단
다음으로 우리는 왕국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재림이 새로운 세대를 도래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왕들의 왕(King of Kings) 그리고 주들의 주(Lord of Lords)로 이 세상에 통치하러 오시는 구원자의 재림은 노아의 홍수 이후로 이 지상에서 발생할 가장 획기적인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경륜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어께에는 정권이 놓인다.”(사
그분은 다윗의 왕좌 위에 앉을 것이다(눅
“법이 시온으로부터 나간다.”(미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서 (이 유일한 기준에 따라서) 왕국으로 들어올 양과 심판될 염소로 구분될 것이다(마 25장).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먼저 주어졌던 언약의 궁극적인 완성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길 바란다. 약속의 땅, 평화, 안전, 오는 왕국의 번영은 새롭게 주어질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제공된 것들이 영광스럽게 완성되는 것이다.
교회의 휴거로부터 데살로니가전서 4장까지,
1. 새로운 경륜이 아님: 그러나 이전 많은 세대들을 성취함, 인간정부가 완성됨,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언약들이 성취됨, 적절하게 율법을 가르치고 그것에 복종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가 통치함, 그러나 인간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는 없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왕좌에 계신다.
2. 기간: 영원함
따라서 우리는 인류역사상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방법을 이 기간에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진리들은 끝나는 시점이나 혹은 다시 철회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각 세대에 있어 이것을 믿고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각 세대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실패하게 된다. 인간의 실패로 인해 심판으로 각 세대가 끝나게 된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왕좌에서 통치하시는 순간에도 인간은 이 죄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천 년의 평화의 시기는 결국 반역으로 끝나게 된다. 왕국이 어떻게 시작해서 끝나는지를 살펴보자.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오 주여, 내가 주를 찬양하리이다. 비록 주께서 내게 노하셨사오나 주의 분노를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나를 위로하셨나이다, 하리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노래이시며 그분께서 또한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뻐하며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또 그 날에 너희가 말하기를,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이름을 부르라.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백성 가운데 밝히 알리라. 그분의 이름이 높여졌음을 언급하라. 주께서 뛰어난 일들을 행하셨으므로 그분께 노래하라. 이것이 온 땅에 알려졌느니라. 시온의 거주민아, 너는 소리 높여 외치라. 네 한가운데 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위대하시도다, 하리로다.”(사
“그 천 년이 다 차매 사탄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고 나가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이며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곳으로 올라가 성도들의 진영과 그 사랑 받는 도시를 에워싸매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켰고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
하나님이 어떤 진리를 제공하든, 어떻게 인간을 다루시든 상관없이 인간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무죄의 시대는 인간이 죄로 타락함으로써 끝났다. 양심의 시대는 노아의 홍수로 끝났다. 인간정부의 시대는 바벨탑 사건에 이르렀고 이는 언어와 민족을 하나님께서 흩으신 계기가 되었다. 언약의 시대는 이집트에서의 열 개의 재앙과 홍해의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다. 율법의 시대는 갈보리 산에서 메시야의 피 흘리심으로 끝났다. 교회시대 끝에서 이 세상은 대환난에 직면하며 아마겟돈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왕국 시대의 하늘들과 땅은 불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다.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이며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해 주시는 세대적 진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1. 무죄: 한 아이가 자신의 형에게 장난을 치며 때리거나 혹은 누나에게 공격적으로 대드는 행위를 한다고 가정하자. 무죄의 상태에서는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또한 그로 인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 방법이 전혀 없다.
2. 양심: 얼마 안 있어 양심이 삶에 들어왔다. 동일한 공격이 행해지나 이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용납되지 못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3. 정부: 아이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이 그 아이를 통치한다. 양심이 작동할 수 있으나 대부분 이런 행위는 억제되지 않는다.
4. 언약: 아이가 무죄의 시대를 지나 외부적 압력을 통해 지배되는 양심을 가지게 됨에 따라서 우리는 선한 행위를 격려하고 소망을 불어넣고 언약을 부여하여 사랑으로 양육하려 한다. 선한 부모는 정부를 통해서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보상의 기대를 제공한다. 살아있는 부모를 공경하라.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 좋은 직장을 얻어라. 네가 뿌린 씨앗은 네가 거두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라.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신 것과 동일하게 우리도 몇 가지만을 고려하게 된다. 어떤 경계선이 세워졌으나 이 경계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의 소망이 존재하게 된다.
5. 율법: 사람이 인간정부를 무시하고 언약의 약속들을 현재의 삶에서 지키기에는 멀어져 감에 따라서 규제하고 처벌하는, 두려움을 정의하는 율법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율법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반역을 처리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인간의 마음이 올바로 유지될 뿐이다.
6. 은혜/교회: 경륜을 한 개인의 삶과 연결시키는 생각을 계속해 보자. 무죄로부터 양심으로 넘어온 그 아이를 생각해 보자. 인간정부와 율법은 그를 유죄로 만들어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약속이 성취되기를 원했으나 율법을 통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로 와서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 이전의 경험들은 그가 죄인이고, 실패만 거듭한 무가치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며 결국 회개하게 만든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받게 된다.
제공된 용서와 새로운 삶은 양심, 정부, 언약 혹은 율법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대신 하나님의 은혜는 거듭난 인간을 주님께서 과거에 그에게 제공하신 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도록 인도하신다.
왕국: 신자는 주 예수와 같이 영원히 지배하고 통치할 것이다.
[1] 벌린저(Bullinger)와 스템(Stam)과 같은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문제는 하나님 말씀에 자신들의 생각과 개념들을 추가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잘못 정의한 개념은 자신들의 생각을 반박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도록 인도한다.
[2] 저자의 <창세기 3장 성경 공부 개요>를 참고하라.
[3]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참조하라.
[4] 탄소 연대측정법(carbon dating)은 물질이 가지고 있는 방사선 탄소의 양을 이용하여 오래된 물질의 시대를 측정하는 방법이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