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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28 강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제임스 낙스 목사님이 가르친 내용입니다. 저에게 많은 도전이 되었기에 여러분과 이 내용을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구절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꼽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를 제대로 알게되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바꿀 사람도 많이 있을 겁니다. 이 구절은 꼭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많이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구절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알거니와”라는 부분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믿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분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1. 알거니와

다시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을 사랑하고 모토로 삼는 많은 사람들이 문맥과 상관없이 이 구절만 띄어다가 멋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위안을 삼는 것은 슬픈일입니다.

 

먼저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봄으로 이 구절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더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창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썩음의 속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2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전체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제는 “전체 창조물이…신음하며 고통 중에”있고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23절도 보시겠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답니다.

 

26절도 보세요.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문맥의 분위기를 보시면 뭔가 이 세상에서 번창하고 잘되어 가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로마서 8장의 본문은 구원받은 형제와 구원받은 자매가 이 세상에서 어떤 상태로 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땅은 저주 아래있고, 우리가 속한 사회도 저주 아래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가 입고 있는 우리의 몸도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성경은 온 세상이 악함 속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미혹이 더욱 많아 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확실한 뉴스를 한가지 전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누가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선을 이루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도 선을 이루고 있지 않아요.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도 선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의 기록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도 잘못되었고 저기도 잘못되었고 여기도 문제고 저기도 문제고 모든 것이 선을 이루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두통과 아픔과 모든 종류의 고통이 산재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음이 있고 저기에는 산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로마서의 기록자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로마서의 기자는 신음과 고통과 산고와 썩음을 이야기 하다가 왜 우리가 알고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헛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헛된 욕망에 차서 신기루를 쫓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르기 때문에 쾌락을 찾고 있는 겁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이 생에서의 삶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죄짓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몸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몸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일까요? 아무런 차이도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도 나이들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나이들어요. 구원받은 사람의 몸도 연약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몸도 연약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직장 생활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직장 생황에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사람도 직장 상사에게 깨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직장 상사에게 깨집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불쾌한 날을 보낼 때가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불쾌한 날을 보낼 때가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도 직장에서 짤릴 수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직장에서 짤릴 수 있어요. 도대체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차이점은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아무리 직장에서 짤리고 병들고 나쁜 일이 닦쳐와도 이 모든 일들이 지나면 선을 이루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남편과 아내가 죽은 아기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받은 남편과 아내가 죽은 아기의 장례식을 치른다고 생각해 보구요. 둘 다 신음하고 있고 마음이 무겁고 상처를 입었어요.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한쪽 가정은 소망이 있고 다른 쪽 가정은 소망이 없습니다. 한쪽 가정에는 위로가 있고 다른 쪽 가정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둘 다 신음하고 있고 마음이 무겁고 상처를 입었어요. 이들의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한쪽은 소망이 있고 다른 쪽은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차이점입니다.

 

로마서 8:28은 “이제 모든 일이 다 잘될거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서 8:28은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이 변할 새로운 때가 올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칠흙같이 어둡지만 새벽이 되면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27-30 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내가 가서 너희를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에 속한 믿음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함께 싸우며 어떤 일에서도 너희의 대적들로 인해 무서워하지 아니한다 하는 것을 내가 들을 수 있으리라. 그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명백한 증표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표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증표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분을 대신해서 너희에게 주셨나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보았고 또 지금도 내 안에 있다고 듣고 있는 그 동일한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 봅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빌립보 성도들, 여러분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고난이 닦치고 어려움이 몰려오고 실패하게 되면 옅은 미소를 띄며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하, 너 하나님을 믿는다며? 걸핏하면 주님 어쩌고 하면서 기도하는거 같더니 뭐 제대로 안되나 보네? 난 네가 하나님을 잘 믿는 줄 알았지. 항상 성경이 어쩌고 하더니 꼴이 말이 아니구나. 나는 네가 전능자를 믿는다고 해서 뭐 좀 잘 될 줄 알았는데 별거 없구나.’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여러분을 조롱할 겁니다.”

 

이러한 때에 “대적들로 인해서 무서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들 앞에서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실패와 고난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어떠한 고난도 없을 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어떠한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보는 대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어려움을 확신을 가지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처럼 낙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모든 고난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내는 모습을 통해서 보다는 고난을 이겨내는 간증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가고 있을 때에는 누구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눈부시게 비출 때에는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길이 형통할 때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간증도 없습니다.

 

, 빌립보서 4:8에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런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이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실하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의롭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더러운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사랑스런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미움으로 가득찬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세요. 선한 것들을 곰곰히 생각하세요.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 이제 다시 로마서 8:28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뒤에는 선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의롭고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평판이 좋은 것들을 따라가면 결국 선한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각 단계를 지날 때에는 그러한 약속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각 단계를 지날 때에는 고통과 어려움과 낙심과 조롱당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창세기 3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몰랐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선과 악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창 2:17)는 말씀은 들었지만 아직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바른 것과 잘못된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악은 잘못 행하는 것의 결과입니다. 악과 잘못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은 잘못된 행위의 결과입니다. 선은 바른 행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28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바르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행위의 결과와 열매로 선한 것이 올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바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르게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들이 아주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에도,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바른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상태로 남아 있다면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에도 결과와 열매는 선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또 어떤 사람이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5:40). 다른 사람들은 잘못 행하고 세상은 잘못 행해도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되는지 아십니까? 결과는 6:33에 있어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5:39도 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사람들이 당신을 악하게 대하고 이 세상이 당신을 악하게 대해도 여러분은 바르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가 바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반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신사답게 대해주고 선의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의 앞에 펼쳐진 인생길이 장미빛일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인생길은 결코 장미빛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고 어떤 어려움이 닦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바르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바른 행위의 결과는 반드시 선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이제 두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3구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가사를 담은 찬양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40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40은 첫번째 체크 포인트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존귀를 받지 아니하노라. 다만 내가 너희를 알거니와 너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희 속에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계속해서 보세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그를 받아들이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거절하거나 부인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신 것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들의 결과는 지옥인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선이 아닙니다.

 

이제 두번째 체크 포인트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일서 4:19-21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나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우리가 그분께 받았느니라.”

 

복음서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주님께 첫째가는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마 22:37-38) 그리고 그 사람이 돌아서서 가기 전에 주님께서 덧붙이셨죠.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마 22:39)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장면을 자세히 보시면 이 사람은 주님께 큰 명령이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 하나만 했습니다(마 22:36).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 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의 문맥은 바로 마태복음 22장의 문맥과 정확히 같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나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교회에도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와도 교제를 나누지 않고 예배가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쁜 사람도 있어요. 다른 형제와 아무런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교회에도 가지 않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지도 않는다면 그게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만일 혼자만 신앙 생활을 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로마서 8:28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다른 구원받은 사람과 형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형제와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다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교제를 나누지 않고 그 형제를 향해 쓴 뿌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22장과 요한일서 4장을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이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 하기는 너무나도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과 아무런 교제도 나누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입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리가 거짓말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겁니다.

 

다른 형제가 나에게 상처를 줘서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형제가 너무 육신적이어서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너무 따분해서 교회에 오기 싫은게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어서 교회에 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제는 성령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주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교회에 오기 싫은 것이고 다른 형제와 교제를 나누기 싫은 것이고 다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번째 부분인 사랑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혀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가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다른 형제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가 사랑이 없고, 예배가 지루해도 성령님께서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면 그러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다 나쁜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들이고, 다른 형제들이 다 나쁜 사람들이라도, 성령님께서 나를 주관하신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주위의 환경이 아무리 악하고 열악하고 나빠도 성령 충만하여 바르게 행한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다른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제 세번째 체크 포인트를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5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해야할 것이 많이 있나요? 어휴 그런 것들을 힘들어서 어떻게 하나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맞보지 못한 사람은 “어휴 저것도 해야 하나요?”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맞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주님을 위해서 저것을 해도 됩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맞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늘 교회에 가야하나?”하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고 하나님의 사람들고 교제를 나누고 싶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싶어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요한일서 5:1-3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도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 아나니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뿐만 아니라 기쁨과 자원함으로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게 됩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서 주님을 위해서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명령들이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강제로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분의 아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며, 자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이제 다시 로마서 8:28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앞으로 가야할 인생의 길은 항상 좋지 만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이 엉망일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엉망 진창이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고난과 고통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요? 본문에는 “그분의 목적에 따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의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계신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처한 이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갖고 계신지 전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현재 직면한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도대체 내 삶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성경에서 그 목적을 찾아 보겠습니다.

 

일단 바로 다음 절인 29절을 보세요.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의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친히 고난 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히 5:8)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 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주님은 사람들에게 쫓겨나셨고 오해를 받으셨으며 거절당하셨고 비평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바르게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바르게 사셨지만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에 직면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통과하시고 이겨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도 주님과 같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33년 반 동안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주님은 피곤함과 배고픔을 느끼셨고 사람들에게 얼굴도 맞으셨고 친족들로부터 조롱도 당하셨으며 결국 죽음의 고통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고난을 온전히 담당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으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주님을 닮기 원하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위한 대사가 되기 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바람은 바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바람대로 우리도 주님과 같이 되게 해 주실 겁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처럼 온전해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행위와 갈망을 포함한 우리의 전 인격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과 같아지길 원하시며 그렇게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세요? 예수님께서 걸었던 그 길을 우리도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그런 거친 사람들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경험하셨던 그런 고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세요. 이 모든 것들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시면 7절에서 우리는 그분의 피를 통해 죄들의 용서를 받습니다. 9절에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신비를 우리가 알도록 하셨습니다.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자신의 크신 기쁨을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뜻과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때(이것은 영원을 의미합니다)의 경륜 안에서 친히 모든 것 즉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분 안에서 다 함께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세요. 하나님은 오늘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지금 이 순간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큰 그림입니다.

 

우리는 “오 지금 나에게는 너무 큰 문제가 있어.”라고 할지 모르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하니까요.

 

“이것은 충만한 때의 경륜 안에서 친히 모든 것 즉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분 안에서 다 함께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또한 그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이라.”(엡 1:10-12)

 

저에게는 앞으로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되겠지요. 주님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 간다면 상급과 왕관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천사들과 그룹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구원으로 인해서 주님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감사드리는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의 어느날 제가 천년왕국의 백성들 앞에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천년왕국의 백성들에게 저를 소개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마 저의 어깨를 끌어안으시며 천년왕국의 백성들에게 이런식으로 소개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리 오너라 아들아, 내 백성들에게 너를 소개 시켜주마. 백성들이여 들으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인데, 한때는 잃어버린 바 된 자였으나 구원을 받았고 죄가운데 있었으나 구속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저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주님 이번에는 제가 주님을 소개 하겠습니다. 천년왕국 백성들이여 들으라. 여기 계신 이분께서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고 나를 구원해 주신 분이며 모든 위험과 고난과 인생의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내신 분이시다.” 그러면 그곳에 모인 천년왕국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숙여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며 저의 인생에 주님이 해주신 일로 인하여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은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성경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영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영원이 시작된지 수십만년이 지난 어느날 여전히 은혜로 저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영원에서의 그 놀라운 주님의 계획으로 인해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생에서 어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시계를 보시는 것도 아니고 달력을 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보시고 계십니다. 나의 시간표에 의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엄청나게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계산하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면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볼 수 있는 안목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세번째 목적을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을 보세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만약 제가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요한일서 3:5-8을 보세요.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로우며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8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저의 간증을 망치려고 일을 벌일 때마다 제가 주님께 저 자신을 내어드려 마귀를 물리친다면 그것은 마귀의 일들을 멸한 것입니다. 마귀가 저를 죄에 빠지게 하려고 일을 벌일때마다 제가 주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면서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간에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려 나는 바르게 행할것이고 주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한다면 마귀의 일들을 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제 다시 로마서 8:28로 돌아가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단순히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모든 것들이 이 생에서의 안락과 편안함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이 합력하여 선(이것은 결과이고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을 이루느니라.”

 

이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면 내 인생에 닦칠 일들로 인해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큰 고난이 닦치던지 간에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으며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바로잡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느라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네가 처한 상황과 어려움을 바로잡으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여기 내 앞으로 와서 무릎꿇고 성경을 펴라. 그리고 너의 마음을 바로 잡아 온전히 나를 향하게 하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혹시 로마서 8:28을 아직도 가장 좋아하시는 분 있나요? 좋아하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적용은 정확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바르게 적용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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