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0.04.25 04:57

성경연구방법-제4과 문자적 성경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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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문자적 성경 해석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4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는 지난 번에 성경이 세상의 책들과는 다른 점을 살펴봤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입니다. 고전을 읽기 위해서 영적으로 올바르던지 도덕적으로 정당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영적인 자격을 요구하는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독자로 하여금 영적인 자격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이고 영적인 요구조건을 갖춰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우리가 두번째로 살펴본 것은 성경은 초자연적인 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은 기적과 표적 등이 포함된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다른 역사적인 부분과 함께 기록되어 그 사실성을 입증받고 있습니다.

 

3. 성경은 또한 혁명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이전에 세상에서 정의했던 것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개념들, 즉 믿음, 사랑, 긍휼, 구속, 구원, 하늘, 심판 등의 개념들을 이전 시대가 사용하던 의미와는 다르게 새로운 정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자동차, 음식 등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 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4. 세상에서는 자동차 사고로부터 구출되던지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훨씬 깊고 위대한 의미로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혼은 지옥으로 가기로 정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베풀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단어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로 인도해 줍니다.

 

5. 성경은 다른 철학서적이나 심리학서적, 심지어 종교서적이 요구하는 않는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합니다. 성경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먼저 믿음과 신뢰와 거룩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책을 읽을 때 그 책의 저자에게 진리로 인도해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저자의 인도를 구하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서적이나 논문을 읽을 때 그들이 범한 음행, 간음, 도둑질, 술취함, 거짓말 등의 죄로 인해서 자신들이 읽은 것을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보게 김박사, 지구온난화에 대한 이 논을 읽어 본 적이 있나?” “아니, 읽어보게 이리 건네주게.” “자네 기도는 했나? 혹시 요즘 죄를 지은 것은 없는가?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지구온난화에 대한 진실을 결코 알 수 없을 걸세.” 이러한 대화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6. 이 세상에는 그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거룩함과 의로움을 갖출 필요가 있는 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책, 성경은 다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이 바르지 않고 우리의 행함이 바르지 않다면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이해할 것이고 잘못 해석할 것이고 결국 저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마음대로 해석해 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성경 같은 책은 없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믿지 않고 읽는다면 더 깊은 진리로 인도받을 수 없습니다. 신문은 믿는 마음으로 읽지 않아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면 단 두 장을 읽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고 읽으면 읽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야기해 줄 수도 없습니다.

 

7. 성경은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오류나 미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적인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어서 현대인들이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비판적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접근하는 방식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접근하는 방법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카톨릭 신자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나서도 계속해서 처녀로 지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비판적으로 성경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나서 대여섯명의 아이들을 더 나은 여자가 처녀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비평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 하나씩 생각해 보고 확인해 보지 않는 것입니다.

 

8.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는 자세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누군가 무엇을 가르치면 그것을 성경으로 확인합니다. 성경으로 확인한 후에 확증합니다. 우리는 목사들과 성경 교사들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보는 눈먼 추종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언들을 연구하고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찾아보고 비교해 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먼 추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자신이 하는 말을 다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탐구하라, 찾아보라( 5:3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자신들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펴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했습니다.

 

9. 누간가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거나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러한 말을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요구하고 찾아봐야 합니다. 누군가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에서 근거를 대고 보여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경 구절을 보여준다고 만족해서는 않됩니다. 문맥을 찾아보고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가 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비평적으로 본다는 것은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목사나 종교 지도자나 교회나 교단이 하는 말을 아무런 저항없이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고자 할 때에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성경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10. 세속 작가들의 책은 아무런 비평적인 태도없이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평하는 생각으로 읽어야 왜곡된 생각에 오염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사람들이 성경으로 그 교회를 비평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으로 비교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가 저에게 제 설교가 자신의 불면증을 치료했다면서 고맙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도 3명의 성도가 같은 목적으로 제 설교를 듣는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서 하는 말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면서 설교를 듣는다면 설교가 수면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11.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읽고 연구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설교의 본문을 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이 바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과 감정과 믿고 싶은 것과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만일 주님께서 제가 가진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임을 보여주신다면 저는 이것들을 더욱 굳게 붙잡을 것이고, 만일 일치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신다면 저는 이것들을 버리겠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서 올바르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사용해서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나 자신이 정당해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12. 성경 연구의 목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연구의 목적은 지식을 쌓는데 있지 않고 세워주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지식을 올바로 적용하기 위함입니다. 성경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도 않됩니다.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뭔가가 뒤바뀐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치 아버지와 말씀과 킹제임스성경이라고 대답할 기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이 구원자는 아닙니다.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이 인도자는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인도자이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13. 성경은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 119:11)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지식을 배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알고 암기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목적은 배우고 암송한 그 말씀을 적용해서 주님 앞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함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이것은 진리입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구절이 끝나지 않아요.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끼?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의 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14.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종교나 심리학책과는 다르게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적용하여 바로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지식을 쌓아가면서도 여러분으로부터 어떠한 성경적인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맥을 따라 한 절씩, 한 단어씩 설명하는 강해설교가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인 이유입니다.

 

15. 어떤 목사가 은퇴를 하면서 후임 목사를 선택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항상 성경의 한 절만 딱 떼어서 설교 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가 얼마나 능력있는 설교자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경우에 그의 강력함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회중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언변이 아닙니다. 회중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그것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16. 성경은 모든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은유적으로 기록된 유일한 부분은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성경에는 유형과 모형과 그림자가 나오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성경에서 비유라고 명백하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때에는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원칙입니다.

 

17. 문자적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자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번역할 때, 암소, , 막대기 등의 단어는 그대로 언어를 바꿔서 번역하지, 암소가 호수가 되거나 빵이 불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암소는 항상 암소이며 발은 항상 발이고 막대기는 항상 막대기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이고 무엇인가를 기록한다고 해도 전혀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단순한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18. 성경이 주님께서 흰 말을 타고 오신다고 하는데도 이것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흰 말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찬란한 태양 빛이 아침 이슬을 가르고 비추면 당신은 맑은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아직 살아 계심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귀여운 허풍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흰 말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말을 타고 오시는데 그 말의 색깔이 흰색이라는 것입니다.

 

19. 성경에서 걷고 일하고 먹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빠르고 느리고 작고 크고 아름답고 강하고 의롭고 불의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전제로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성경 뿐만 아니라 어떤 책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누구나 어떤 글을 가지고도 자신이 원하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20.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한 언어 이해 능력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읽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고 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감추어진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몇 군데에서 신비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 그 신비가 무엇인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8:1을 보겠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마리아 막달라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갔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이제 새로운 아침이 밝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슬픔에 가득찬 두 여인에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무덤 앞에 선 두 여인은 새로운 희망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아름답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바르게 해석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21.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한 단어 한 단어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1절을 보세요. 성경에서 안식일이라고 하면 항상 토요일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명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안식일이라고 하면서 다른 날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안식일이 끝날무렵 주의 첫날이 밝아올 때 두 유대인 여인이 무덤에 온 것입니다. 본문은 새로운 희망이나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같은 것은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안식일이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다는 시간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뿐입니다. 본문은 이것 외에 다른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들 두 유대인 여인은 무덤을 보려고 왔습니다. 여인들은 어떤 희망을 품고 오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22. 2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큰 지진이 났더라.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입구에서 돌을 뒤로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더라.” 성경은 지진이 났다고 말씀하고 있지 삶의 희망이 무너져 마음이 두 갈래로 찢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시 발생한 사건은 지진이고 이것을 바라보는 여인의 심리 상태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진이라는 단어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진은 언제나 지진을 의미할 뿐입니다. 말 할 줄 아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지진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모두 동일한 대답을 해 줄 겁니다. 지진은 항상 지진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다른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본문이 다르게 정의하고 있지 않는 이상 지진은 항상 보통 사회에서 의미하는 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입구에서 돌을 뒤로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더라.” 어떤 강한 남자가 와서 돌을 치워준 것이 아닙니다. 힘이 센 남자가 불쌍한 두 여인에게 너무나도 친절해서 그들을 천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죠? 그 이유를 아세요? 여러분이 성경을 믿는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천사를 천사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천사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놓은 것입니다. 지진이 나서 돌이 굴러간게 아니라 천사가 굴린겁니다. 천사가 돌을 굴린 이유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 놓은 이유는 사람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돌이나 나무나 상관없이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24. 3절도 보겠습니다. 그의 용모는 번개와 같고 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거늘 이것은 천사의 옷이 눈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덤 근처에 눈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천사의 옷은 무슨 색이었을까요? 흰색이었습니다. 얼마나 하얀 색이었나요? 본문은 눈과 같이 희다고 합니다. 천사의 옷의 색깔을 설명하는 부분에서야 비로서 비유법이 나옵니다. 이렇게 비유법이 나와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는 표현을 볼 때 모두 흰 색을 연상합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모두 똑 같은 것을 연상합니다. 왜냐하면 눈은 전세계적으로 밝게 빛나는 흰색이기 때문입니다.

 

25. 4절도 보겠습니다. 지키던 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었더라.” 다시 비유가 등장합니다. 지키던 자들이 떨었습니까? 떨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떨었다는 것입니다. 숨어있는 다른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같이(as)”라는 표현을 보시면 이것은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오는 길에 죽은 사람을 봤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실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가만히 있게 됩니다. 본문의 비유가 문자적이기 때문에 해석도 문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26. 계속해서 5-6절을 보겠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분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셨으므로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 제가 성경을 비평적으로 읽는다고 한 말을 기억해 보세요. 무덤에 찾아간 여인은 두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은 돌 무덤이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도 굴러갔습니다. 또 지진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한 말이 모두 문자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표현그대로 사실이라면 부활도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본문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27. 사람들은 성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신문이나 책이나 뉴스나 연설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오직 성경을 읽을 때는 기록된 의미 뒤에 무엇인가 비밀스런 것이 있을 것이고 비유적으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신뢰합니다. 저는 예전에 저의 사역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형제님의 설교와 성경공부에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왜 형제님은 천사가 날개가 없다고 가르치시나요? 저는 날개가 있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 말이예요.”

 

28. 자신의 경험을 성경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제가 경험한 것과 성경이 말씀하시는게 서로 다르면 저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겠습니다. 제가 날개가 달린 천사를 실제로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천사는 날개가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천사는 날개가 없다고 믿겠습니다. 제가 본 것과 성경이 말씀하시는게 서로 다르면 저는 항상 성경을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본 것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29. 본문의 모든 2차적인 의미는 모두 선행한 구절의 문자적인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상징, 은유, 모형 등은 모두 비유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문자적 해석을 떠나서는 비유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8:5에서 씨 뿌리는 자가 자기 씨를 뿌리러 나가서라고 말할 때, 씨뿌리는 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해석에 의하면 씨뿌리는 자는 인간의 아들인 예수님 본인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30. 100마리 중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사람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양은 무엇의 비유입니까? 선한 목자는 누구를 비유로 보여주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는 비유적인 문맥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이 정의하고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 성경의 해석은 비유라 할지라도 이미 다른 부분에서 해석한 문자적인 해석에 기초해서 풀어간다는 것이지 비유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31.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경에서 상상(imagination)”을 찾아보면 44번 나오는데 모두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10:5에서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상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32. 어떤 여자분이 저에게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이 정말 바람을 폈는지 어떻게 확실히 알게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거나 걱정하거나 공상하거나 혹은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작은 목소리가 네 남편이 바람피고 있어라고 속삭여 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같으면 바로 성경으로 달려가서 나에게 말하는 자가 누군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33. 제가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목사의 자격에 대해서 상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부부에 대한 것이었는데 부부가 모두 저희 교회에 다녔었는데 남편이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아내가 바람을 피고 다른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이혼을 하고 목회를 그만두고 그냥 교회 생활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새로운 자매를 만나서 결혼을 했고 교회는 다시 그에게 목사의 직분을 맡겼습니다. 저와 상담하던 사람은 이 얘기를 하면서 목사는 일평생 단 한명의 아내하고만 살아야 하는데 아내가 죽을 경우는 예외가 발생하고 이 부부의 경우 자매가 바람을 피우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서 남자는 아내가 죽었으므로 재혼을 해도 살아있는 아내는 한 사람이므로 괞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상상대로라면 동네에서 전부인을 만나면 유령을 본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겠지요.

 

34. 우리는 모두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의 생각과 상상이 성경 해석에 침범할 수 없게 됩니다. 문자적 성경 해석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상상과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지켜줍니다. 성경은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17: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어떠한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마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거짓되고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마음과 머리에서 떠오르는 모든 상상과 생각을 잡아서 성경에서 실제로 하시는 말씀과 비교해 보고 그것에 복종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5. 저는 다른 사람의 설교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자가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성경을 찾아보니 그것이 사실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을 성경과 비교해 봄으로 성경을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얘기하지만 전혀 엉뚱하게 인용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우가 가장 심한 경우일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상상을 더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6. 저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를 담고 있는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바르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사실이지 비유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실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을 비유라고 가정 하고 다시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성경은 항상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여 이르시되( 12:16)라는 식으로 기록합니다.

 

37. 누가복음 16:19을 보세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말한 그대로예요. 이 사람은 부자였고 좋은 옷을 입었고 매일 호화롭게 지냈습니다. 계속해서 2-3절도 보겠습니다. 또 나사로라 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더라. 또한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도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어떤 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는게 아니라 실존했던 사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거지였고 몸에 상처가 있었고 받은 의료 혜택이라고는 개한테서 받은게 전부이고 유일한 희망은 부자가 먹다 남기고 버리는 것이 많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풍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빈곤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록된 그대로 실제로 살았던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8. 22절도 계속 보겠습니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둘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었다고 해석해야지 다른 무엇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시기 위해서 죽지 않은 것을 죽었다고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면 묻히게 되었다는 기록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39. 계속해서 23절도 보겠습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여기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남자였고 부자였으며 좋은 옷을 입었었고 좋은 집에 살았었고 좋은 음식을 먹었었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제 그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서는 이것이 비유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에서는 선행한 구절이 문자적으로 사실일때에는 뒤에오는 구절도 문자적으로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고통 중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안식하고 있습니다.

 

40. 여호와의 증인 주석가들은 부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 아닌 비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해 보세요.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7:23)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모두 지워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5, 13:8, 17:8, 20:15 참조-역주). 성령님께서 누가복음 16장을 기록하실 때 부자의 이름을 기록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을 이미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셨기 때문에 생명책을 들춰봐도 그의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왜 생명책에 없는지는 참조 구절들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만이 항상 안전하고 확실한 해석방법입니다.

 

41. 문자적 해석을 할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문화적 측면입니다. 문화적 측면을 보기 위해서는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측면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 시대에 중동의 문화는 사람들이 넓은 다락방에서 모여 교제를 나눴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생각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 오늘날 우리가 사는 곳처럼 수도시설이 잘 건설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많은 단지(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굉장히 지저분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시대의 환경을 경험하게 된다면 2천년 전에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음에 감사할 것입니다.

 

42. 동물의 배설물이나 풀로 아궁이에 불을 때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 12:28)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덤가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무덤과 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덤은 많이 다릅니다. 당시의 무덤은 주로 한적한 살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덤 근처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발을 씻겨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도 문화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 우리교회에서는 발을 씻어 주지 않는 건가요? 우리는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발은 대체로 깨끗합니다. 그러나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흙먼지가 일어나는 곳에서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발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43. 성경은 거룩한 입맞춤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16:16, 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우리는 비누가 있고 손을 자주 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지저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시대에 살았다면 사람을 만났을 때 결코 악수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을 잡고 악수하지 않고 입맞춤으로 대신했던 것입니다. ( 2:9에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은 교제의 의미이지 악수를 의미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역주) 이런 식으로 성경에 나오는 많은 것들이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44.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면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훈을 주는 좋은 설교일 수 있지만 관련 구절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주셨고 계속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과 헤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설교이지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설교는 아닙니다. 성령님은 결코 성경과 모순되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순적인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어떠한 사실을 기록해 놓으시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45.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바른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바른 상태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경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된 삶을 산다고 해서 저절로 성경을 알게 되는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고 경건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모두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도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거짓을 가르치게 됩니다.

 

46. 우리는 모두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매우 제한적이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의 목사라면 그리고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청중의 절반이 여러분을 쫒아내려고 모의하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의 타락한 본성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반역에 대한 본문을 찾아서 여러분의 대적을 정죄하는 설교를 준비하게 잘못 인도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특정한 때에 특정한 본문을 읽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인도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본문을 성경에서 찾아서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47. 문자적 성경 해석은 우리를 우리의 부패한 마음과 상상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적절하지 못한 방법으로 성경을 이용해서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지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설교자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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