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0.05.15 21:30

성경연구방법-제7과 단어 연구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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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과 단어 연구 방법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7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이번과에서는 두가지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단어 연구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는 약속에 대한 말씀의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다른 저자들의 책을 참고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신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얘기하려고 합니다.

 

2. 제가 다녔던 성경학교에서 사용하던 교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단어를 연구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단어는 생각의 단위이다. 개념의 구조를 채우는 벽돌이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에 있어서 단어를 먼저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첫째 단어는 반드시 성구사전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어떻게 단어가 파생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원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단어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하데스(Hades)에 대한 개념없이 지옥(Hell)을 연구하는데…” 이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신학교에서 원어를 배워야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 교회의 회중도 원어가 없이는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이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원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결국 당신이 있어야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이것은 매우 단순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면서 그것을 읽고 연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역사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고 필사본들도 같은 것을 증언합니다. 성경 연구를 위해서 원어를 찾아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 연구를 위해서 스페인어나 독일어를 공부하지 않는 것처럼 원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어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4. 원어의 의미를 풀어놓은 성구사전 자체가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신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유주의화 된 대형 신학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지지할 영어 성경을 만들고 그 영어 성경을 가지고 다시 그리스어 성구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즉 그리스어 자체로 성구 사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영어 성경을 가지고 성구 사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리스어 성구 사전도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어 성경을 지지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구 사전을 자신들의 성경에 맞게 뜯어 고친 다음 그 성구 사전을 다시 증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짓을 하고도 밤에 잠은 편히 자겠지요.

 

5. 제가 예를 좀 들어 보겠습니다. “환란(tribulat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고통(distress)”, “괴로움(vexation)”, “재해(affiction)” 등을 의미합니다. 영어  tribulation은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온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라틴어 단어인 trivulum에서 온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채를 쳐서 곡식과 껍질을 분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가치있는 것과 가치없는 것을 분리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묘사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단어입니다.

 

6. 이 단어의 그리스어 단어를 안다고 할지라도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 단어를 때로는 개개인의 인생에게, 또 때로는 자신이 선택하신 한 민족에게 적용시키며 다양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실 때 그분의 목적은 개인이나 민족을 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좋지 않은 것들을 걸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유익하고 좋은 것들만이 개인의 인생과 민족 가운데 남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복된 진리입니까?

 

7. 단어의 의미가 여러가지일 경우에는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4:1을 보세요.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법규와 법도를 듣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것을 소유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은 구원받은 신약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혼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사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가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매우 분명합니다.

 

8. 계속해서 2절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14절도 보겠습니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법규와 법도를 가르치게 하셨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건너가 소유할 땅에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31절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네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곧 마지막 날들에 네가 주 네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면 (주 네 하나님은 긍휼이 많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께서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그들에 대한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9. 이제 다시 환난이라는 단어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단어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인생에서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통과 고난을 통과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민족 전체가 고통과 고난을 통과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문맥에 의하면 이 모든 경우가 다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30절에서 네가(thou) 환난 중에 있을 때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네가(thou)”라는 대명사는 단수를 의미합니다. 킹제임스성경에서 thee, thou, thy라고 하면 단수이고 ye, you, your는 복수입니다. 현대 영어 역본들에는 이러한 구분이 없습니다.

 

10.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한 국가를 의미할 수도 있고(도시나 국가는 그 안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 지라도 단수로 받음-역자주), 한 개인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언약대로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환난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 마지막 날들에라는 말씀을 넣으신 것은 이러한 일들은 계속 일어날 것인데 특히 마지막 때에 더욱 그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1. 이 말씀의 개인적인 적용을 예로 들면, 삼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 중에 있을 때 눈먼채로 맷돌을 돌릴때에 그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한 번 만 더 강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자식이 죽었을 때 그의 마음은 찢기고 상했습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그가 다시 주님께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새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그가 믿는 마음으로 주님을 불렀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12. 죄로 인해서 고난당하다가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자비롭게 대해 주시는 것은 민족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죄로 인해서 40년 간 노예생활을 ㅎ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또 다시 죄를 짓고 30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식의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주님의 말씀도 전혀 지키지 않자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70년간 포ㅏ다가 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느혜미야, 예레미야,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가 나와서 주님께 돌아가자고 선포합니다. 백성의 마음이 주님께로 돌아오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회복시켜 주십니다. 대환란도 이러한 역사와 큰 틀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 환란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습니까? 고통, 고난, 재앙 등으로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역사도 같은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란을 통해서 멸하거나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하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키질을 해서 곡식과 껍질을 나누는 것처럼 그렇게 나누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에서 사용한 환란이라는 단어는 문맥을 보면 한 국가나 개인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또 다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4을 보세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긍휼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위로 받을 때 얻는 위로를 힘입어 우리가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자들도 능히 위로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절이 스스로 단어를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보세요.

 

15. 제가 4절을 다시 읽어볼 테니 잘 들어 보세요.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위로 받을 때 얻는 위로를 힘입어 우리가 어떤 환난 중에 있는 자들도 능히 위로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원래의 구절에서 한 단어를 바꿨지만 뜻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난이라는 단어를 환난이라고 읽었지만 구절의 의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어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같은 구절 내에 동의어를 넣어두신 것입니다.

 

16. “환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파멸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환난은 망치는 것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시는 대환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1에서는 큰 환난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을 예레미야 30:7에서는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환난은 고난이고 고난은 환난입니다.

 

17. 그러면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고린도후서 1:3을 보세요. 긍휼위로라는 단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환난은 끝이 아닙니다. 형벌은 끝입니다. 사람이 큰 흰 왕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죄로 인해서 유죄 선고를 받고 불 호수로 던져지게 됩니다. 불 호수로 던져지는 것이 바로 형벌입니다. 성경적 의미로 본다면 이것은 고난은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 중 고난을 격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 호수에 있는 사람들 중 고난을 격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8. 제가 환난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벌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고난 중에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제 인생 가운데 어려움을 주셔서 제 인생의 결과가 껍질이 아닌 알곡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환난은 고난이며 고통이고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형벌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련(refindment)입니다. 곡식을 추수했다고 해서 바로 식탁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추수한 곡식은 키질을 해서 알곡과 껍질을 분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환난입니다. 환난의 끝은 불속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는 우리가 특정한 목적이 있는 일시적인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9. 이렇게 성경에서는 단어를 스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게 아닌 것처럼 환난 가운데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4:21을 보세요.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여기서 환난을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이 세상의 끝은 결코 아닙니다. 29-31절을 보세요. 그 날들의 환난 뒤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자기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선택 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함께 모으리라.”

 

20. 대환난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열매맺지 못하는 상태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환난이 끝나면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모든 이방 국가들의 머리 국가가 되며 메시야께서 친히 왕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은 환난을 통하여 모든 더러운 죄를 씻어버리고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할때에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환난의 목적은 파멸이나 망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와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견뎌내고 정금같이 나오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도 같은 결과를 위한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21. 내가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벌주시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어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달콤한 향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과 환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곡식을 구매하실 때 껍질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하늘 나라로 불러올리실 때 우리의 인생에 좋지 않은 것이 가득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고난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22. 곡식이 들판에서 자라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 자란 곡식을 추수해서 창고에 들이는 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 좋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 그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삶 가운데 더러운 죄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삶 가운데 짓는 죄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고난과 환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23. 하나님께서는 화가 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는 모두 용서받았고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느니라.”( 8:12)

 

24.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 그것이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여러분의 과거로 인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징계가 아니라 정련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이 악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도 고난 중에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간에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25. 로마서 5:1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과의 화평은 우리의 것입니다.

 

26. 계속해서 2절을 보겠습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믿는 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7. 3절을 보세요.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안에 서 있으면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삶에서 환난이나 고난이나 고통이 없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징계하시고 괴롭하기 위해서 내 삶 가운데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소유를 환난과 고난 가운데 통과하게 하심으로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28.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우리는 주님께 인내를 달라고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라는 것은 언제나 환난과 짝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인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참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내가 있으려면 무엇인가를 참아내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 무엇인가는 언제나 고난과 환난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제가 뉴 스머나 지역의 어떤 교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인데 한 젊은 형제가 자신의 기도제목이라면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인내를 주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70세인 형제가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God Forbid)”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이 많은 형제는 젊은 형제가 자신이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9. 로마서 5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를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인내는 좋은 것일까요? 인내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인내의 뒤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30. 더욱 영적이고, 더욱 사랑이 풍성해 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풍성한 사랑과 영적 성숙함은 체험을 통해서 옵니다. 어떤 체험일까요? 그것은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을 통과한 체험입니다. 그러한 체험으로 인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운 고난과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주님의 방법으로 이겨내고 나면 인내와 체험과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갖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 중에 있는 다른 형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시는게 아닌가 의심하면서 주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 형제를 미워해서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해서 주신 것임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형제를 미워해서 환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시려고 환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그런식의 주님의 도움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꼭 필요한 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십니다.

 

31. , 이제 다른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3:15을 베드로전서 4:16, 시편 50:2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스스로 정의하고 있는지 보세요. 먼저 히브리서 13:15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여러분은 찬양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세요? 성경에 의하면 찬양은 주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입니다. 히브리서 13:15은 찬양의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찬양이란, 성경에 의하면 춤을 추거나 팔을 흔들거나 방방 뛰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사용해서 주님께 감사함을 표할 때 여러분은 찬양의 희생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2.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50:23을 보겠습니다. 찬양을 드리는 자는 다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자기 행실을 바르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로다.” 히브리서 13:15에 의하면 찬양은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50:23에 의하면 우리가 주님께 감사를 드릴 때 그것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에 의하면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33. 여러분은 동성연애와 성도착과 도둑질과 거짓말과 살인 등의 죄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마서 1장에 의하면 사람을 이러한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죄가 사람을 다른 모든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1:21).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4.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 제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여러분의 눈이 죄를 지는 것에서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제가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여러분의 귀가 범죄치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릴때 자신이 향유하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망각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한다면 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35. 이제 베드로전서 4:16을 보세요.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그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만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다른 구절이 없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이 구절을 살펴본다 할지라도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는대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3장과 시편 50편에 의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6.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번 과에서 배운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이번 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셨나요?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단어를 공부한다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혼의 양식은 성구 사전이나 원어 사전에 나온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어의 정의를 아는 것은 원어 사전과 관련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정의하고 있으며 우리는 성경에 나온 그런 정의를 찾으므로 단어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정의하는 책입니다. 성경에 나온 단어를 성경에 나온 다른 단어와 비교해 봄으로 우리의 눈은 열리게 되고 진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스트롱 성구 사전의 단어 번호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스트롱 성구 사전에서는 성경에 나온 모든 단어에 고유 번호를 부여하고 있으면 사전의 뒷부분에서 그 고유 번호에 따라 해당 원어를 제시하며 단어를 정의하고 있다-역자주).

 

37. 제가 다니던 교회 중에는 성경을 연구하기는 하지만 믿지 않던 교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떠나서 독립 침례교회로 갔습니다. 거기서는 성경을 믿기는 했지만 성경을 연구하거나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오늘날 많은 독릭 침례교회의 목사들이 성경을 가르치기 보다는 성경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데 전력하고 있다.-역자주). 저에게 이런 식으로 성경을 가르쳤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이렇게 하세요. 먼저 구절을 읽고 그 다음에는 그 구절에 나온 모든 단어를 종이에 쓰세요. 그리고 스트롱 성구 사전을 펴서 그 단어의 원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잘못 번역된 단어들을 찾아서 표시하세요.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고친 후에 당신이 수정한 구절을 토대로 성경을 연구하세요.” 그들은 저에게 세대주의와 처녀탄생, 구속, 휴거, 재림 등 건전한 교리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에게 성경을 믿는 법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그곳으로부터 나오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38. 이제 남은 한 가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51:10을 보세요.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깨끗한 마음올바른 영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1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a broken spirit)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올바른 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상한 영입니다. 이것은 모든 자존심과 자아가 사라진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꺾으셨기(broken)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39.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깨끗한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더러운 영화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더러운 말을 한 번도 안한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바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을 비교해 보면 성경이 스스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0. 다윗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권위와 선하심과 율법과 주님이 백성이 누구인지와 주님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모든 제사와 희생물과 절기와 명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위대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꺽으셔서 상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시자 그의 마음은 깨끗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상하게 하시자 그의 영은 올바른 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성경을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41. 이제 성경의 약속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온 몇 개의 약속만이 전 세계적인 적용이 가능합니다. 성경의 약속들에 대해서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 약속의 규모는 전 세계적인 적인가, 아니면 제한되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2:17). 이 약속은 전 세계적인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42. 둘째는, “이 약속이 개인적인 것인가와 기한이 설정되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8:9-10을 보세요. 그때에 주께서 밤에 환상으로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공격하여 해치지 못하리니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라, 하시더라.” 이것은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지고는 감옥에 있는 수많은 선교사들과 순교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약속은 누구에게나 주신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전생애에 걸쳐서 주어진 약속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여러 번 매를 맞았습니다. 그는 돌팔매를 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 단 하나의 도시에서 단 한 번 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다른 도시와 다른 때에는 적용되지 않는 약속이었습니다.

 

43. 셋째는, “이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약속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31).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44. 성경의 약속에는 대부분의 경우 조건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5의 경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가 조건이고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가 약속입니다.  야고보서 4:8의 경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가 조건이고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가 약속입니다. 모두 위대한 약속이지만 조건적입니다.

 

45.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성경의 약속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7을 보세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것은 정말 위대한 약속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구절에서 읽지 않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구절의 가장 앞에 있는 그리하면(And)”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하면은 접속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구절과 문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6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기도로 주님께 요청해야 7절의 약속이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6절의 조건없이 7절의 약속만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46. 19절을 보세요.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이러한 약속의 말씀도 조건이 있습니다.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나눈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 본문에 의하면 나누는 것(communication)”주고 받는 일(giving and receiving)”입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그리고 또 다시 내 필요를 위해 보내었느니라.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를 바라노라.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

 

47. 바울이 하고 있는 말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희생적이고 지속적으로 교회의 선교사역을 돕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9절의 약속은 14-18절의 조건이 있었기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선교 사역에 대한 희생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지원을 한 자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19절의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있는 약속이며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48. 넷째는, “이 약속을 나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 이상한 일들을 합니다. 그들은 동물의 뼈나 곡식을 가지고 점을 치기도 합니다. 또 추수감사절에 동물의 뼈를 부러뜨리면서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에 이러한 것을 하며 소원을 빈다.-역자주). 이 밖에도 이상한 행위를 하며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펴고는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서 그 구절이 약속하는 것이 자신에게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이상한 행위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49. 하나님의 뜻과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 저 구름을 통해서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오랫동안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어느날 구름의 모양이 마치 영어 알파벳 P S의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아내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전하라(Preach Salvation)’고 말씀하셨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남자는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아무도 그의 교회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남자는 죽어서 하늘에 갔고 거기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설교자로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라고 하시고서는 아무도 보내주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내가 너에게 PS라고 한 것은 ‘Plow Straight(곧게 파라)’라는 의미였느니라.”

 

50. 일차대전 당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성경을 통해서 알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도하고나서 바로 성경을 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6:19이었는데 거기에는 바다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해군에 입대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미해군에 입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5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자신과 상관없는 구절을 가지고 자기에게 적용시키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찾은 구절이 좋은 약속을 하고 있는 경우에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약속들은 모두 그것이 누구에게 해당하는 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52. 마지막으로 두 구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창세기13장과 골로새서 3장입니다. 먼저 창세기 13:14-15를 보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나 갈라선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제 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주리라.” 이것은 위대한 약속입니다. 이제 골로새서 3:1-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53. 우리가 방금 살펴본 창세기 13장과 골로새서 3장은 모두 위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두 약속은 서로 다른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이고 이 땅에 속한 약속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약속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둘 중에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한 영적인 약속이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모든 삼박자 축복같은 것들입니다.

 

54.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약속된 승리는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이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오 주여, 일어나소서.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광대뼈를 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이를 부러뜨리셨나이다.”( 3:7) 네가 모든 백성들보다 더 많이 복을 받아 너희 가운데 남자와 여자와 너희 가축의 수컷과 암컷 중에 수태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또 주께서 모든 병을 네게서 제거하사 네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어떤 악한 질병도 네게 두지 아니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그것들을 두시리라.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넘겨줄 모든 백성들을 소멸시키되 네 눈이 그들을 불쌍히 보지 말라. 너는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7:14-16) 가끔 이러한 말씀이 신약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기를 바랄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말씀은 분명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55. 고린도후서 10:4을 보세요.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여기서는 구약 성경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물질적인 것이고 우리의 전쟁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은 문맥을 살펴보고 그것이 전 세계적인 것인지, 기한이 있는 것인지, 조건이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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