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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과 문맥을 이해하기 위한 4가지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8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는 성경 해석의 원칙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잠언 30:5-6을 보세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라.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터인즉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하노라.” 단 하나라도 불순물이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 깨끗하고 올바르며 진리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기록된 말씀을 바꾸지 않고 거기에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서 해석함으로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해서는 않됩니다.

 

2. 저는 구원받은지 오래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느낌을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하도록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주님의 인도로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낌이나 감정이나 생각을 따르지 말고 기록된 말씀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에 순종하세요.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언제나 온전하게 지키고 순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다면 그때가서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의 모든 말씀에 항상 순종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말씀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거룩한 언약따위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언약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지키지 않는데 왜 또 다른 언약이 필요한 것일까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다 순종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말씀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결코 새로운 것을 주시지 않을 겁니다. 교회 헌법이나 규칙 따위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4. 우리는 이번 과에서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해석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경 교사들이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가끔 라디오 설교를 듣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곤혹스런 일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수의 라디오 설교자들은 성경에서 한 두 구절 인용하고 나서 자신들이 가르치고 싶은 것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 교수는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개요를 먼저 짜고 나서 거기에 맞는 본문을 찾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면서 가끔가다가 자기가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5. 성경은 단순히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좋은 말이나 문장을 엮어 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꼼꼼하게 연구하면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서로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한 구절만 끄집에 내다보면 처음 기록된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문맥을 벗어난 해석은 청중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항상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하다는 사실입니다.

 

6. 단어의 올바른 정의는 문장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고, 문장의 올바른 해석은 문단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문단의 바른 해석은 장(chapter)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장의 올바른 해석은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연이나 구원이나 육신 같은 단어들은 매우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상황마다 뜻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7. 문맥을 바르게 이해하는 4가지 원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문화적인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기록하거나 그 기록의 일차적인 대상이 된 사람들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7년에 미국 필라델피아 올랜도에 살고 있는 사람의 문화와 관점이 아닌 타락 전에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재를 나누면서 에덴 동산에서 살던 사람의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인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8. 또 다른 예를 들면, 사사기를 읽을 때 신약 교회의 관점으로 판단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전제가 된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 중에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겪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원수들을 죽이면서 얻는 기쁨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의 뼈를 꺾으시고 이빨을 부러뜨리시며 그들을 지옥의 구덩이로 던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내용을 담은 시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들은 신약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릴 때 부르는 찬송으로 적절하지 않은 가사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읽은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과 비행기 사고로 죽은 사람들, 총맞아 죽은 사람들, 화재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주님께서는 원수들의 이빨을 꺾으시고 그들을 지옥 구덩이로 던져 넣으심에 기뻐하며 이러한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찬양을 부르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문맥의 배경이 된 문화적인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9.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에 올라가 있던 어떤 사람에게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실재했던 역사 속에서 실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던 실재하는 국가에 소속되어 살던 실재했던 사람들의 실재적인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이러한 점들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0. 둘째는 성경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영감받은 한 권의 책으로서 성경에 포함된 모든 책들은 그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각 책들은 죄의 역사, 인간의 역사, 구속의 역사 등에 각각 참여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인간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생기는가에 관해서 나에게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11. 자유주의 목사는 구원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중독으로부터의 치유에 대해서 설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을 포괄하는 개념의 신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여신이나, 바람, 태양, 달 등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성경에서 한 단어를 인용해서 설교를 하면 그 단어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변질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12.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정의하는대로 가르쳐야지 이 세상이나 헐리우드에서 정의하는대로 가르쳐서는 않됩니다. 예전에 헐리우드에서 일하는 작가들이 파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배우들도 작가들의 파업에 동참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들이 계속해서 파업하고 복귀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줄 모릅니다. 파업이 계속되었다면 이 나라에 다시 부흥의 물결이 흘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들이 TV를 보거나 극장에 가도 영화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어서 볼 것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 까요. 사람들이 죄를 가장 쉽게 배우는 원천이 줄어드는 셈이니까요.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상이 죄를 정의하게 하지 마시고 성경이 정의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이 구원을 정의하게 하지 말고 성경이 정의하게 하세요. 세상이 선행을 정의하게 하지 말고 성경이 정의하게 하세요. 우리는 성경의 문맥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이며, 의는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4. 우리 교회에는 특별하게 정해진 드레스 코드가 없습니다(dress code, 드레스 코드란,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들에서 교회에 올 때에는 이런 옷차림으로 오라고 하는 복식 규정을 말한다.-역자주). 대부분의 교회들의 드레스 코드는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쇼핑센터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는 성경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교단의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대로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문맥에서 정의하는 대로 정의해야 합니다.

 

15. 셋째는 성경의 책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책이라는 것은 성경에 포함된 66권의 책 중에 하나를 가르키는 것입니다.-역자주) 우리가 연구하는 책이 구약에 속한 것인지 신약에 속한 것인지 또 문맥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이사야서 34장과 로마서 3-4장을 연구할 때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전도서 3장과 골로새서 3장은 서로 다른 전제와 배경 아래서 기록되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고 나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사복음서를 통해서 드러난 계시가 역사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에는 그 책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 책이 구체적으로 가르치려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6. 이제 넷째 원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다시 유대주의로 돌아갈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특정한 책에서 어렵고 혼란스러운 부분을 보면 그 책의 기록 목적에 근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특정한 문맥을 해석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 문맥이 속한 책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7. 로마서는 구속과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로마서는 이스라엘 국가를 어떻게 통치하는지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주의 날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책에는 주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주제의 빛에 비춰서 문맥을 해석해야 합니다.

 

18.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로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구절들을 떼어다가 그리스도인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주님을 위해서 어떠한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서는 않됩니다. 그러한 것은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문맥은 책의 주제의 빛으로 비춰서 해석해야 합니다.

 

19. 이 주제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문맥을 연구할 때 그 문맥에 선행하는 문맥은 무엇이었으며 뒤따르는 문맥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에서는 (law)”이라는 단어를 60번 이상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자연법을 의미하기도 하고 육신적인 법이나 영적인 법을 의미할 때도 있고 모세의 율법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또 이 세상 정부의 법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law)”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 성경을 문화적인 배경에 근거해서 해석할 때에도 전후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러한 비유가 나오는 문맥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부분으로 시작합니다. 문맥의 시작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행위를 하신다고 정죄하는 부분으로 시작합니다.

 

21. 여러분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문맥의 앞 부분이 없이 비유 자체만 있다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잃어버린 재산을 끝까지 찾아내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리들 및 죄인들과 식사를 하고 계시고 바리세인들은 주님의 그러한 행위를 문제시하는 문맥임 감안할 때 이것은 주님께서 양이나 동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삼중적으로(세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으므로-역자주) 제시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맥을 보면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2. 이번 과가 시작되고 오랫동안 성경을 찾아 않아서 불만인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마태복음 16:28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23.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7:1-3을 보면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사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광 중에 계신 모습으로 변모하시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 땅 위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습을 직접 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8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맥의 전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8의 말씀은 17:1-3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24. 또 다른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51-52을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자기들끼리 다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살을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빵을 만들고 사제들이 그것을 떼어주면 그것이 내 살이 되리라.” 물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 6:53-56)

 

25. 이 말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55절까지는 여기서 의미하는 주님의 살과 피를 문자적인 것으로 이해해도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이 본문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문제는 56절에서 생깁니다. 만일 본문이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냐는 것입니다. 벌써 주님을 먹고 마셨는데 어떻게 자신이 먹고 마신 주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생기는 문제입니다.

 

26. 요한복음 5:51-55까지는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6절에 와서는 대부분의 해석이 불가능해집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살을 먹고 나서 내가 먹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56절에 이르면 이 본문이 문자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 집니다.

 

27. 57절을 보면 본문이 의미하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이 구절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57절에서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는 단어가 바로 같이(As)”입니다. “as”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28.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를 맺고 계신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살을 씹어 먹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믿음과 신뢰에 기반한 관계이기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51-57의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와 같은 관계를 우리가 주님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9.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빵이니라. 너희 조상들이 만나를 먹고도 죽은 것과 달리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시니라.” 문맥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58절에서는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빵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51절에서는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살아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자신의 살이 실제적인 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58절에서는 이것은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고 있는 자신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58절에서 말씀하시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57절의 내용 중에 있습니다.

 

30. 요한복음 6:51-57의 문맥은 무엇인가를 먹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와 같은 관계를 우리가 주님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들은 그분께서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에 회당에서 말씀하신 것이더라.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들 중의 여럿이 이것을 듣고 이르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 하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이 그것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스스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그러면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려느냐?”( 6:59-62)

 

31. 본문의 문맥 자체가 우리를 올바른 해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주님의말씀을 듣고 실족했을까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실족하자 주님께서는 적절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자적인 내 살을 먹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너희가 이해하고 있는데 만일 그러하다면 내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너희가 나의 살을 먹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려느냐?”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작은 빵을 만들어 그것을 주님의 살이라고 우기는 방법을 개발해 내기도 했습니다.

 

32.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의미는 더욱 분명해 집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63)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온 실제적인 빵을 가지고 자신도 그와 같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예화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적인 빵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것 자체만 이야기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까 실제적인 빵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적인 빵을 먹고 실제적인 생명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결국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빵을 먹으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그 영적인 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3. 다시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부터 계속해서 거듭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살을 먹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거듭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정한 진리를 믿으면 영적인 출생을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34. 요한복음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17). 사도행전에서는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역시 그것은 주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5:20). 성경에 의하면 가나안의 이교도들은 피를 마시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의 문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짓인 실제적인 사람의 피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35. 예수님의 실제적인 살을 먹고 구원을 받는 다고 하는 거짓된 해석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를 가진 것을 봐도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문화와 성경의 문맥 모두 올바른 해석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 억의 천주교 신자들은 왜 거짓된 해석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종교에서 성경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종교에 있어서는 충실한 추종자가 되기 위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36. 성경을 읽지 않으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로마 카톨릭 신자만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침례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침례교인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카톨릭이나 침례교회나 차이가 없게 됩니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같은 시스템이 됩니다. 물론 교회를 꾸민 장식도 다르겠지만 그런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지요.

 

36. 골로새서 2:18-20을 보세요.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보지 아니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우쭐대며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머리로부터 온 몸이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 이것은 매우 이상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37.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질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2:21-22) 이것은 문맥을 잘 살펴보지 않는다면 오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런 원칙도 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경고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정죄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38.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더 이상 그런 육신적인 것들을 규제하는 원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육신을 제어할 수 있는 윈칙이 필요합니다. 문맥을 보지 못하면 성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39.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2:23) 육체를 제어하고 육신을 만족시키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참된 생명 없이 그러한 규칙들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육신적인 일들을 제어하고 육신을 만족시키지 않는 규칙과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참된 생명도 없고,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입니다.

 

40. 두 가지 극단을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없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가르침이나, 교회에 올 때에는 정장을 입고 와야 되고 셔츠도 요란한 것을 입으면 않되고 머리 모양은 어떠해야 하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않되고 하는 가르침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두 가지 극단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41. 문맥의 앞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2:13-17) 한 쪽 편에서는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어떤 규칙이나 원칙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42. 이제 다른 쪽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3:1-4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느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나의 생명과 기쁨과 실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43. 이제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그것들은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음행 이것은 규칙에 대한 것입니다. 여자에게 손을 대지 마십시오. 남자에게도 손을 대지 마십시오. 서로에게 손대지 말고 입술도 대지 마십시오. 눈도 조심하십시오. 만일 결혼하지 않았다면 결혼하기 전까지 혼자 사십시오. 부정함 깨끗하지 않은 것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읽지도 말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5절의 말씀은 하지 말라는 금지의 말씀입니다. 무절제한 애정 이것은 자신의 아내나 남편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대부분의 경우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여러분의 능력을 돈을 버는데에만 사용하십니까? 여러분의 능력을 왜 영적인 일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영적인 것보다는 돈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며, 왜 성경보다는 은행잔고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까?

 

44.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골로새서의 문맥에 의하면 저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어떤 규칙이나 원칙을 지킬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저의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인해서 저는 만지지 않고 맛보지 않고 손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원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문맥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지 않는다면 그곳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엄마나 목사님이 가지 말라고 해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45. 골로새서 3:5에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간증을 파멸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고 거듭나고 나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규칙도 필요없게 됩니다. 성경에서 아무런 경고의 말씀도 없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자리는 가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이라면 결코 하지 않게 됩니다.

 

46. 골로새서에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아무런 규칙이나 원칙도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떠한 규칙에도 억매일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골로새서는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남편을 사랑한다면 기쁨으로 남편을 섬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내를 사랑한다면 기쁨으로 섬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국가를 사랑한다면 기쁨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쁨과 자원함으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각 책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아도 기쁨가운데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47. 성경을 연구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는 방법은 문맥의 전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섬기는 입장에 있으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섬김을 받는 입장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쁨으로 받게 되고 그 어떤 것도 어렵거나 힘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짐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성경의 지침들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들입니다.

 

48. 우리는 잘 모르는 길을 찾아갈때 네비게이션을 이용합니다. 네비게이션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가야할 길을 안내해 줍니다. 아무도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속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지침들도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속박하려는 것들이 아닙니다. 네비게이션의 목적이 사용자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안내하는 것인 것처럼 성경의 목적도 그리스도인을 주님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로 안내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을 속박하려는게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도와주는 책이지 짐을 지우는 책이 아닙니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은 운전자가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지 불편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온 경고의 말씀들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49. 이제 참조 구절(cross reference)”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한 부분과 비교함으로서 두 부분 모두 더욱 의미가 분명해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조 구절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적인(verbal)” 참조 구절입니다. 이것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구절에 나온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포함한 구절을 참조 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단어나 표현이 사용된 구절을 참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희생, 하나님의 왕국, 하늘의 왕국, 사십 일, 심판 등의 단어를 연구할 때 같은 단어나 표현이 사용된 성경의 다른 구절을 찾아서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50. 문자적인 참고 구절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명백한 문자적인 참조 구절(apparent verbal cross reference)”이 있고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real verbal cross reference)”이 있습니다. “명백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이라는 것은, 두 구절이 정확히 같은 형태의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구절의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희생이라는 단어를 보면, 신약 성경에서는 입술의 열매를 의미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구약 성경에서는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에 있는 두 구절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heart”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심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51. 반면에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같은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두 구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Ark”라는 단어는 방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언약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구 사전에서 Ark라는 단어를 찾으면 명백한 문자적인 참조 구절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이 뒤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막의 경우 출애굽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히브리서에서 언급하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두 곳에서 구절을 뽑아서 비교하면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을 찾아본 것입니다. 성막을 공부할 때 출애굽기에서 시작해서 히브리서의 관련 구절을 찾아보고 다시 레위기로 갔다가 히브리서로 돌아와서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막의 영적 의미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고 구절은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52. 둘째는, “개념적인 참조 구절(conceptual cross reference)”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개의 본문이 서로 같은 개념과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입니다. 히브리서 2장과 빌립보서 2장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계시록 20장은 모두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개념적인 참조 구절입니다. 개념적인 참조 구절의 가장 큰 예가 바로 4복음서입니다.

 

53. 셋째는, “평행적인 참조 구절(parallel cross reference)”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의 생애는 사도행전에 많은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에서도 그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 살펴볼 때 사도행전과 빌립보서를 모두 살펴봐야 합니다(빌립보서의 경우 아마도 3장 앞부분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임-역자주). 이렇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연구할 때도 여러 본문을 살펴봐야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기와 역대기, 그리고 시편을 동시에 연구해야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정확히 같은 단어나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본문을 평행적인 참조 구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54. 만일 어떤 구절이 참조 구절인지 확신할 수 없다면 보다 더 확실한 참조 구절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참조 구절로 빛을 비춰봤을 때 처음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구절이 연구하는 부분의 참조 구절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가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공부할 때 참조구절이 많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을 단 하나의 구절로만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55.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아이가 특이한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1:23) 여기서 말하는 왕은 누구이며 또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왜 모세를 숨겨야 했습니까? 히브리서 11:23은 출애굽기 2장이 있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 같이 하면서 견디어 냈느니라. 믿음을 통해 그는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으니 이것은 처음 난 것들을 파멸시킨 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27-28)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11:27-28이 전부라면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구절들에는 반드시 참조 구절이 필요합니다. 왜 모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 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해서 그는 왕과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려면 참조 구절을 찾아야 합니다.

 

5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 같이 하면서 견디어 냈느니라.” 이것은 흥미있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10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까요?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이지 아니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왜 피를 뿌렸으며 파멸시키는 자는 누구였는지 출애굽기가 없다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관련 구절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57.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11:32) 만일 주님께서 히브리서 기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면 그는 기드온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등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려고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서를 연구하면서 구약 성경에서 관련 구절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58. 히브리서 11장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구약 성경으로 돌아가서 삼손이나 입다의 생애를 찾아 본다면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삼손이나 입다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을까요? 다윗의 경우는 어떤가요? 그가 밧세바와 간음을 할 때 율법의 무슨 조항을 지킨 것인가요? 또 밧세바의 남편을 죽였을 때는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킨 것일까요? 저는 다윗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와 시편을 비교해 보면 다윗이 죄를 짓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그를 용서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59. 그들이 믿음을 통해 왕국들을 정복하기도 하며 의를 이루기도 하며 약속하신 것들을 얻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11:33) 우리는 사자들의 입을 막은 것이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것이 누구에 대한 말씀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따라서 참조 구절들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구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고 유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조 구절을 찾는 것은 성경의 한 부분으로 다른 부분을 비추는 것이며 서로 다른 두 부분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60. 성경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찾아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명령에 순종하면 성경의 기록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한 구절을 통해서 전체 그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찾아보고 비교해 봐야 비로서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은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연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한다면 모든 것이 더욱 분명하고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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