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0.05.29 04:06

성경연구방법-제9과 비문자적 본문의 해석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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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비문자적 본문의 해석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8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이번 과에서는 타입(type), 상징(symbol), 비유(parable), 풍유(allegory) 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기법으로 기록된 부분은 문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비문자적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비문자적 본문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9가지 원칙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연구할 때 가장 먼저 할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핵심사항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타입이나 상징이 가르치고자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2. 첫째 원칙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타입이나 상징의 기법으로 교훈을 줄 때에는 가르치고자 하는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입이나 상징의 기법이 사용된 문맥을 볼 때에는 이러한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그 한 가지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특정한 교훈은 대부분 문맥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상징적인 방법으로 서술된 본문의 모든 부분은 특정한 한 가지 진리나 교훈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문은 모두 드러내고자 하는 한 가지 진리나 교훈에 맞춰서 해석해야 합니다.

 

3. 예를 들면, 씨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가 뿌린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온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12개의 구절이 한 가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한 데 모인 것입니다. 2개의 구절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씨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나머지 10개의 구절은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본문이 한 가지 진리를 여러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둘째 원칙은, 분명하고 평이하게 말씀하시는 본문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반대되는 교리를 타입, 상징, 비유, 풍유 등의 기법으로 기록된 본문을 근거로 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사역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문자적으로 그대로 기록한 본문이 있다면 비유나 상징을 통해서 이것과 반대되는 교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에 있어서는 비유나 상징적으로 기록된 본문이 평이한 문자적인 본문보다 우세할 수 없습니다. 비유나 상징은 문자적인 본문의 부차적인 것입니다.

 

5. 예를 들면, 성막에서 지성소의 등잔불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등잔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문자적인 본문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은 부분을 지성소의 등잔불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성소의 등잔불은 꺼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은 성막과 지성소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예루살렘에서 친히 빛이 되실 것이며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6. 또 다른 예를 들면, 씨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릴 때, 어떤 씨가 땅에 떨어졌는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습니다. 여기서 공중의 새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의하면 그들은 마귀들이며 사탄을 따르는 더러운 영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을 확장해서 공중의 새가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먹는 것처럼 마귀가 성경을 먹었기 때문에 성경이 마귀의 위 속에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본문의 문맥과 상관없이 그 비유에서 한 부분만 떼어다가 거기서 어떤 사실을 끄집어 내어 성경 그 어디서도 가르치지 않는 특정한 교리를 만들어 가르쳐서는 않됩니다.

 

7. 이것과 관련하여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 많은 진리가 드러납니다. 이러한 비교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특징이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노아는 방주로 인해서 홍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홍수가 지나고 나자 그에게는 더 이상 방주가 필요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구원받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8. 이와 같이 상징과 모형만을 가지고 교리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상징과 모형은 문자적으로 기록된 분명한 본문의 범위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징과 모형은 이미 문자적으로 기록된 본문이 가르치는 진리를 지지하고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지 독단적으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상징과 모형에만 근거해서 교리를 세우면 추측에 근거한 불안정한 교리가 탄생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원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9. 셋째 원칙은, 어떤 특정한 교리에 있어서 모형과 상징이 유일한 성경적 근거일 때에는 그 교리는 바른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징이나 모형은 평이한 본문을 입증하는 하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이한 본문이 상징이나 모형의 예는 아닙니다. 상징이나 모형이 평이한 본문을 지지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평이한 본문에서 나온 교리를 먼저 공부하고 나서 모형과 상징으로 나아가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10.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마치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되어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평이한 구절을 근거로 교리를 세우고 구약 성경의 모형을 그 일례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구약 성경으로 가서 먼저 교리를 세우면 비성경적인 교리나 나올 수 있습니다.

 

11. 예를 들어 출애굽 때에는 각 가정마다 양을 잡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한 마리의 특정한 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가정 마다 서로 다른 양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도 저 마다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모두 동일한 한 분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것이지 각 가정마다, 개인마다 서로 다른 구원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평이한 구절을 통해서 교리를 세우고 모형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12. 구원에 관한 바른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다양한 예수와 다양한 구원자가 존재하여 그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가 유일하다는 교리는 성경의 평이 본문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모형이나 상징도 이것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평이한 본문에서 나온 교리가 지지하지 않는이상 모형이나 싱징만을 통해서 교리를 세우면 거짓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13. 성경의 교리는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된 본문 위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나서 상징이나 모형을 통해 그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징이나 모형은 평이한 문장에 근거해서 세운 교리의 예화일 뿐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는 모두 평이한 문장에 근거하여 확정된 것이지 모형이나 상징에 근거하여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14. 비문자적 본문을 해석하는 넷째 원칙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것 이상의 상징이나 모형을 확대 해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0:25-37).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신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진리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반쯤 죽게 된 어떤 사람이 나옵니다(30). 이러한 사실을 보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는 조화를 이루는 해석입니다.

 

15. 레위인과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두고 그들이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면에서는 율법과 종교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해석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둘 다 성경의 다른 부분과 충돌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16. 그런데 이런 식의 해석을 계속 해 가다보면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던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즙을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10:33-34) 본문에서 언급된 기름과 포도주를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이 죄사함과 성화라고 합니다. 또 다른 주석가는 이것이 구원과 성령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17.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 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10:35) 어떤 주석가는 본문에서 말하는 이 데나리온이 두 가지 예식, 즉 침례와 주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침례와 주의 만찬이 무엇에 대한 지출인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저의 모든 죗값은 치러졌습니다. 저의 죗값을 치르기 위헤서 무엇인가를 더 지불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나 주의 만찬이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18. 어떤 사람은 선한 사라미아인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여관 주인이 성령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관 주인이 성령님이라는 주장은 성령님의 보호아래 있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측면만 빼고고 얼추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해석은 말도 않되는 것이라는 의미임-역자주).

 

19. 이런 식으로 비유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비유를 통해 많은 새로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면 이 비유 하나만 가지고 새로운 진리발굴해 내어서는 안됩니다. 비유를 통해서 성경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독특한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20. 다섯째 원칙을 살펴보면서 동시에 넷째 원칙에도 해당되는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섯째 원칙은 비유이든 상징이든 평이한 구절이든 간에 단 한 번 언급된 것을 근거로 해서 교리를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1을 보세요. 그때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으리라.” 마치(be likened)”라는 표현에 주목하세요. 이것은 유일하게 이 본문에서만 증거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말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라는 표현은 다른 무엇과 연관해서 설명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21. 계속해서 나머지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들 중의 다섯은 지혜롭고 다섯은 어리석더니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등불을 가져가되 기름을 함께 가져가지 아니하였고 지혜로운 자들은 자기 등불과 함께 자기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더라. 신랑이 더디 오므로 그들이 다 졸다가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오는도다. 너희는 그를 맞으러 나오라, 하니라.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자기 등불을 손질할 때에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졌으니 우리에게 너희 기름을 나누어 주라, 하거늘 지혜로운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그리할 수 없노라. 우리와 너희가 함께 쓰기에 부족할까 염려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된 자들은 그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니라.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나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느니라.( 25:2-13)

 

22. 주님께서 이 비유 전체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실지 알 수 없으니 깨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며 이 비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 나오는 다른 모든 설명들은 깨어 준비하라는 한 가지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설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위반한다면 이 해석을 통해 새로운 교리를 창작하게 됩니다.

 

23.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해석 원칙을 위반해서 각 구절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그들 중의 다섯은 지혜롭고 다섯은 어리석더니(2) 이것은 구원받는 전체 사람들 중의 50%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고 나머지 50%는 준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해석이 맞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역자주). 그런데 이런 식의 해석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 중 절반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절반은 준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구절은 없다는 것입니다.

 

24. 이렇게 2절을 잘못 해석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첫째는 비유가 가르치는 것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13).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 중 절반이 깨어 있다고 해석해 버리면 비유의 목적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된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있는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 중 절반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과 관련해서 %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2절을 잘못 해석함으로 두 가지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5. 이 비유의 해석과 관련한 일반적인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구원받기 이전에 이 비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비유를 가르치던 사람은 이 비유에 나오는 기름이 성령님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이런 식의 해석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성령님으로 비유하시지 않고 항상 생수를 성령님으로 비유하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순수한 물, 살아 있는 물, 흐르는 물이 항상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26. 이제 기름이 성령님의 상징이라고 가정하고 본문을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자기 등불과 함께 자기 그릇에 성령을 가져갔더라. 신랑이 더디 오므로 그들이 다 졸다가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오는도다. 너희는 그를 맞으러 나오라, 하니라.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자기 등불을 손질할 때에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졌으니 우리에게 너희 성령을 나누어 주라, 하거늘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그릇은 우리의 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몸(그릇) 안에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다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즉 잘못된 해석은 시작부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27. 계속해서 잘못된 해석방식으로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오는도다.”(6) 신랑이 언제 온다고 하고 있습니까? “한밤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밤중은 몇 시일까요? 확실한 사실은 주님의 재림은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임하게 되는데 그러면 전세계가 동시에 한밤중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주님이 오실때를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밤중에 오신다고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 이 비유를 통한 가르침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밤중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주님께서 오실 때 플로리다가 한밤중이라면 호주는 대낮이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밤중에 오신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 해석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28. 계속해서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졌으니 우리에게 너희 성령을 나누어 주라, 하거늘만일 이 비유에서 기름이 성령님이라면 다섯 처녀는 성령님을 다 써버린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성령님을 구해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현명한 다섯 처녀도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나눠 쓰기에는 부족한 것이 됩니다.

 

29. 지혜로운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그리할 수 없노라. 우리와 너희가 함께 쓰기에 부족할까 염려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매(9) 만일 여러분이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고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누군가가 자신들도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비하고 싶으니 성령님을 소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럴 수 없노라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구원받았나요?” “” “저도 구원받고 싶어요. 그래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싶어요. 제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겠어요?” “아니요, 그럴 수 없는데요. 저의 구원자를 당신에게 나눠주면 저와 당신 모두 구원자가 모자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구원자를 나눠줄 수 없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함께 쓰기에 부족할까 염려하노니…”(9b)

 

30.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매(9c) 기름을 성령님으로 해석하면 성령님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시몬이 이러한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31. 열 처녀의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오실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르치고 있는 한 가지 진리 외의 모든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 나온 것들은 모두 한 가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보충 설명은 여러 가지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32. 누가복음 15:1-2을 보세요. 그때에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그분께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 하더라.” 2절은 “And”로 시작합니다(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생략되어 1절과 2절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두 구절이 별도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2절이 “And”로 시작합니다.-역자주). 2절은 1절과 관련한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죄인들을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33. 이제 3절도 “And”로 시작하면서 비유를 말씀합니다. 3절에서 말씀하시는 비유는 1,2절과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신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 전체를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가 그 중의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가 그것을 찾은즉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 15:3-7)

 

34. 이 비유는 백명 중에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보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99명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몇 명입니까? 한 명입니다. 그러나 성겨 어디에서도 단 1%의 사람만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전체 인류중 몇 %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면 기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 매우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이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35. 이 비유와 관련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아흔아홉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7).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아서 의인이 된 사람들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죄인들은 1절과 2절에서 나온 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비유에 나온 회개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일까요?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비유의 해석은 대꾸를 이루지 않습니다. 이 해석에 나온 하나 하나의 부분들을 해석하다보면 이상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36. 계속해서 이어지는 비유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개가 있는데 그녀가 한 개를 잃어버리면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녀가 그것을 찾은즉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불러 이르되,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한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15:8-10)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기쁨으로 받아주시며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37. 이 비유에는 열 개의 동전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한 개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인류 중 90%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일 이렇게 해석을 하면 첫째 비유와 맞지 않게됩니다. 첫째 비유에서는 단 1%만일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이번 비유에서는 10%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몇 %의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혹은 구원받지 못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러한 부분을 해석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38.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동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처음에는 동전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죄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찾지 못하시는 것일까요? 첫째 비유의 목자는 자신의 양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아 헤맸습니다. 둘째 비유의 여인도 자신의 동전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았 헤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즉 해석과 사실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39. 비유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에서 어느 한 부분만 끌어다가 그것을 확장하여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식으로 교리를 만들면 그 교리가 나온 비유와도 맞지 않고 나머지 성경 전체와도 맞지 않는 교리가 나올 뿐입니다.

 

40. 셋째 비유도 살펴보겠습니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작은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소서, 하니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매 그 뒤 며칠이 안 되어 작은아들이 전부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더니 그가 다 탕진한 뒤에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니라. 그가 가서 그 나라의 국민 중 하나에게 연합하니 그 사람이 그를 자기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니라.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자기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이제 그의 큰아들은 들에 있더라. 그가 오면서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들 중의 하나를 불러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니 종이 그에게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당신의 아버지가 그를 무사히 건강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매 그가 노하여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간청하매 그가 응답하여 자기 아버지께 이르되, 보소서, 이 여러 해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기며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거늘 아버지께서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 즉시 아버지께서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하니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네 것이니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15:11-32)

 

41. 다시 누가복음 15장의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슈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셔서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러한 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슈였습니다. 이 셋째 비유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데 누군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42. 수많은 주석가들이 이 비유가 첫째 아들은 유대인이며 둘째 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비유는 분명히 유대인들의 구원과 관련하여 많은 부분이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해야 할 점은 이 비유는 그대로 비유로 나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확장해서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확대 해석을 하는 것이며 자칫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다 창녀와 더불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이 생에서 모든 재산을 다 잃게 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는 재산 관리를 잘 했던 사람도 있고 방탕하지 않고 건전하게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확대 해석하여 둘째 아들의 상태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으로 해석한다면 문제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43. 보통 주석가들은 첫째 아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해석합니다. 29절을 보면 첫째 아들이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어느 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는 첫째 아들에 대해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이 실제 이스라엘 민족이나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구절은 없습니다.

 

44. 저도 타입, 모형, 그림자, 비유, 상징 등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예화로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분명한 구절을 통해서 제시된 진리를 넘어서는 것을 상징이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교사들이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자칫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상상과 추측에 기반한 것을 가르칠 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45. 마지막으로 한 가지 비유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6:1-12을 보세요. 또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는데 바로 그가 자기의 재산을 허비했다는 비난의 말이 부자에게 들리니라. 부자가 그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에 대해 이 말을 듣는 것이 어찌된 일이냐? 네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라. 네가 더 이상 청지기가 되지 못하리라, 하매 이에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내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지도 못하겠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이것은 꼭 목회직을 그만둔 목사들의 말 같기도 합니다.

 

46.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지 결심하였으니 그러면 내가 청지기 직분을 빼앗길 때에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리라, 하고 이에 그가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다 불러 첫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하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증서를 가져다가 빨리 앉아 오십이라 적으라, 하고 그 뒤에 그가 다른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을 졌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하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증서를 가져다가 팔십이라 적으라, 하였더라. 주인이 (여기서 주인은 영어로는 lord임에 유의할 하세요.) 그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으므로 그를 칭찬하였으니 이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세대에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신데 이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47. 불의한 맘몬으로 너희를 위해 친구들을 사귀라. 그리하면 너희가 숨이 멎을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존하는 거처로 받아들이리라. 가장 적은 것에 신실한 자는 또한 많은 것에 신실하고 가장 적은 것에 불의한 자는 또한 많은 것에 불의하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불의한 맘몬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한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9절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48.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 가능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언젠가는 그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장부를 위조해서 주인에게 빚진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불의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과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결코 복음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49. 그렇다면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는 직장 상사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회사의 채무자들의 부채를 50% 삭감해 주자는 의견을 제출하면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말 것입니다. 직장 상사를 속여서 회사에 손해를 입히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한 짓을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배가 없다면 다리를 불태우지 마십시오. 다시 강을 건너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50. 여러분 중에는 처음 믿고 나서, 혹은 진리를 알고 나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가 나중에 그들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느라 몇 배의 노력을 들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성경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면서 심지어 그들을 저주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 일주일 내로 휴거가 일어난다면 그렇게 모든 관계를 정리해 버려도 상관없을 겁니다. 일주일 안에 휴거가 있어난다면 다른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살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주일 내로 오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관계를 끊었던 그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혹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으라는 것입니다.

 

51. 이제 여섯째 원칙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자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앞선 과에서 일반적인 원칙들을 살펴보면서 이 부분을 다룬바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어떤 말을 했다면 반드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 중 의도 없이 행해진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하면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며 우리도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말(기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발설된 말은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고 말한 사람의 의도를 의미합니다.

 

52. 예언서에 나온 하늘을 나는 메뚜기 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헬리콥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기록한 기록자는 헬리콥터라고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헬리콥터라고 기록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50년을 제외하면 누구도 헬리콥터가 무엇인지 개념자체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3. 병거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캐딜락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창은 창이지 바추카포가 아닙니다. 예언적 문장을 비유나 풍유로 만들어 놓고 해석해서는 않됩니다. 주님께서 곡과 마곡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곡과 마곡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마세요. 예언에 대해서 책을 쓰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려고 합니다. 예언을 그 시대와 맞춰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시대를 해석해야지 시대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곡은 곡이고 마곡은 마곡입니다. 어떤 사람은 곡과 마곡 중에 하나가 나찌라고 했지만 나찌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소련이라고 했지만 소련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듯 역사에 성경을 맞추려고 하면 틀린 해석을 하게 됩니다.

 

54. 리비아는 성경에 그대로 리비아입니다. 성경에 나온 이집트는 그대로 이집트입니다. 레바논도 그대로 레바논입니다. 그리스와 로마도 그대로 그리스와 로마입니다. 투발도 그대로 투발입니다. 바빌론도 그대로 바빌론입니다. 유엔이 바빌론은 아닙니다. 유럽연합이나 로마가 바빌론도 아닙니다. 바빌론은 바빌론입니다. 때가 되면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을 해석하기 위해서 억지로 다른 것을 가져다 붙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55. 일곱째 원칙은, 성경의 기록자들이나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때로는 사람들과 논쟁하시면서 진실이 아닌 것을 말씀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8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너희는 이제 배부르고 이제 부유하며 우리 없이 왕처럼 군림하였도다. 너희가 군림하는 것을 내가 하나님께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도 너희와 함께 군림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들이 진짜로 왕처럼 통치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실이 아닌 것을 고린도 성도들의 입장에서 사실인 것처럼 가정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한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일 수 있습니다.

 

56.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야기 할 때,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경우를 가정하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 사람의 이해를 위해서 그러한 가정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를 할 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가정하는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이러한 경우가 나올 때 그 구절을 가지고 교리를 만들면 안된다는 점입니다.

 

57. 여덞째 원칙은, 비유를 말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8:9) 이것은 바리새인과 새리의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이며 비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유를 듣는 사람들의 상태는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는 재림이나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이나 그 어떤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58.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1) 꼭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래도 자기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지요.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2) 바리새인은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이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59.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8:13-14) 이것은 비유였습니다. 실제로 세리나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는 소리내서 말하면서 기도하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기도에 다른 사람을 언급하면 않된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죄하거나 의롭다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마음의 상태와 그것을 평가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0. 아홉째 원칙은, 주님의 비유중 어떤 것은들은 예언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겨자씨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것이 큰 나무가 된 것은 복음이 많이 전해져서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 위에 있게 되는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공중의 새들은 더러운 영들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한 것이라면 거기에 더러운 영들이 함께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예언적이기는 하지만 그 비유 하나만으로는 어떤 교리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 비유는 다른 평이한 문장에 근거해서 세운 교리의 지지를 받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61. 예언적 성격을 갖는 비유라 할지라도 그 비유 하나만으로 특정한 교리를 만들 수는 없으며 반드시 다른 평이한 구절에 근거한 교리와 일치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들은 더러운 영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과는 관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의와 관련된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왕국과는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왕국은 폭력과 관련이 있는 물질적인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유를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온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긍정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서는 않되고 반대로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비유를 해석하게 해야지 비유가 성경을 해석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62. 귀를 기울이라. 보라,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에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공중의 날짐승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즉시 싹을 내나 해가 돋은 뒤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시들어 버렸고 더러는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지매 가시나무가 자라서 그것을 숨 막히게 하므로 열매를 내지 못하였고 다른 것은 좋은 땅에 떨어지매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 얼마는 삼십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백 배를 내었느니라, 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그분께서 홀로 계실 때에 그분 주위에 있던 자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에 대하여 그분께 여쭈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비유로 행하여졌나니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사 언제라도 그들이 회심하여 자기 죄들을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하느냐? 그러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느니라. 길가에 있는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이 뿌려질 때에 듣지만 즉시 다가오는 사탄에게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겨 버리는 자들이니라.”( 4:3-15)

 

63.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마귀의 방해가 없어도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씨는 좋지 않은 땅에도 뿌져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좋은 땅에만 전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낭비하지 않고 우리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자는 좋은 땅이건 나쁜 땅이건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64. 계속해서 이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그와 같이 돌밭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나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만 견디다가 후에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즉시 실족하는 자들이요,”(4:16-17)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거짓으로 믿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들었고 관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가 싫어하거나 직장 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끝내 구원받기를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복음에 잠깐 관심을 갖고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금방 시들해 지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65.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좋은 땅뿐만 아니라 나쁜 땅에도 씨를 뿌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주말 내내 2천부의 전도지를 사람들에게 건내주었는데, 그들이 모두 전도지를 읽지도 않고 쓰레기 통에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가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전도지를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해서 우리가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이 잘못된 일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땅에만 골라서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땅이든 나쁜 땅이든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66.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정욕이 들어와 말씀을 숨 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니라.”( 4:18-19)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주님을 섬기기 보다는 돈을 버는 것이 시간을 제대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오락을 하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 보다는 다른 취미 생활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주님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고 더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숨 막히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67. 구원받고 신앙 생활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부류의 신자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투쟁과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직장이나 가족의 문제, 혹은 그 무슨 형태로 나타나든지 간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면 세상이냐를 놓고 갈등을 하고 마음 속에서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 중에도 결국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일부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면 항상 모든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처럼 좋은 결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한 사람들이 세상으로 가버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섬기고 주님의 농장에서 수고해야 합니다.

 

68. 좋은 땅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얼마는 삼십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백 배의 열매를 내는 자들이니라, 하시니라.”(4:20)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수고는 언젠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결국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씨를 뿌리면 그 중에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씨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면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주님을 위해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69. 이제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 것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25%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지면 일어나는 4가지 반응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항상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70. 우리는 좋은 땅이든 나쁜 땅이든 가리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뿌리는 씨가 좋은 씨이기 때문입니다. 이 씨는 싹이 나고 자라서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씨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의 씨가 바람에 날려갈 수도 있고 시멘트 바닦에 떨어질 수도 있고 밟에 밟히고 자동차 바퀴에 짖눌리고 비에 젖을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영원을 바꾸는 놀라운 결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71. 우리가 뿌리는 모든 씨가 열매를 맺지는 못할 것이지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꾸준히 말씀의 씨를 뿌린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순종으로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7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한 가지 방법을 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예화도 성경에 나온 것을 사용한다면 두 배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메시지가 있고 예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비유가 바로 예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전할 때 필요한 예화를 성경 스스로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진리와 성경의 예화를 사용하면 청중은 진리를 두 배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73.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청중의 믿음이 여러분의 언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서게 하십시오.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말씀이 말씀을 증거하게 하십시오. 말씀에서 예화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청중의 삶이 말씀 위에 서게 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비유는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가르친 진리를 보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이러한 목적을 알고 그 목적대로 설교 중에 비유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가르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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