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0.07.28 14:38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경과 어긋난 방언

조회 수 500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오늘날의 은사주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소위 “방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경과 어긋납니다.


1. 표적으로서의 방언

방언이 성령님에 의해 오늘날 또다시 재연된 사도의 표적이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막 16:17-18처럼 마귀 들린 정신병자도 고치고, 땅꾼 뺨치는 실력으로 뱀 잡고,
그러다 독사에 물려도 안 죽고 청산가리나 농약을 마셔도 안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환자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환부가 눈에 보이는 병이든 그렇지 않든 불문하고,
안수만 해도 병이 “즉시”, 완치되어야 합니다.
요즘 은사주의자들이 100%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방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알아듣는 사람이 존재하는 외국어입니다.
요즘 누가 방언을 하면 갑자기 알아듣지 못할 말이 솰라솰라 나와서 놀라죠? 그런데
오순절날의 첫 방언은 외국인이 자기네들이 “알아듣는” 말을 듣고서 놀란 것입니다.(행 2:8)
비유를 들자면,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는 미국인이 갑자기 우리말을 아주 유창하게 한 셈이죠.
요즘 방언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질서와 무질서의 차이입니다.

사도행전은 구약과 신약의 과도기적인 책입니다.
사도행전에서 2장 외에 또 방언이 등장한 사례는 행 10:46, 행 19:6이 전부이며,
이것은 선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경륜이 바뀌었음을 입증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증표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유대인에게 알리는 증표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초자연적인 표적을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고전 1:22)

이렇듯 표적은 유대인 불신자를 위한 것인 반면, 요즘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요,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도 아닙니다.
이 방언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방언입니까?

끝으로, 하나님이 방언이라는 걸 그때 왜 주셨겠는지 근본적인 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언어와 민족을 불문하고 이방인들을 써서 교회를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예전 바벨 탑 시대에 사람을 흩어 버리기 위해 만들었던
언어 장벽을 하나님께서 친히 일시적으로 극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외국에 나가 복음을 전할 사도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비로운 능력을 확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표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딱딱 맞아 떨어지고 명확하지요. 하나님의 배려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경 66권이 완성되었고 전세계가 언어 장벽도 영어의 주도하에 통합되고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께서 지금 또다시 방언 같은 걸 주셔야 할 이유가 도통 어디 있단 말입니까?


2. 은사로서의 방언

고린도전서 14장을 보십시오.
명백하게 대언(하나님 말씀을 가르침)이 방언(외국어 구사)보다 좋다고 말합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육신의 병을 싹 고치는 것보다, 우리가 평범한 능력과 평이한 말로
복음 전해서 불신자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시키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더 큰 능력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배워서 하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하든, 타 언어를 구사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대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타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나 자신을 세우지만(자랑),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웁니다. (고전 14:4)
외국어 일만 마디보다 알곡 같은 자국어 다섯 마디가 낫다고 합니다. (고전 14:19)
성경에 계속 나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중요하다!”

교회 회중 앞에서 타 언어로 말을 할 때는 지극히 제한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해야 하고
반드시 통역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교회에서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솰라솰라 말을 하지도 못합니다. (고전 14:27-28, 34)

그 반면 오늘날은 엉터리 통역은 둘째치고라도, 여자가 남자보다 방언 더 많이 합니다.
고린도 교인의 은사로서 거론된 방언도 명백하게 불신자를 위한 표적입니다. (고전 14:22)
하지만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들이 내세우는 방언은 복음 선포의 목적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불신자들이 그런 무질서하고 정신나간 듯한 방언들을 보면
고전 14:23과 같은 반응을 보이겠죠!


3. 기도 수단으로서의 방언

요즘은 또 방언이라고 하면, 다른 거보다도 기도할 때 내는 이상한 소리를 많이 가리킵니다.

기도! 어린애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며,
거듭난 크리스천만이 할 수 있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기도의 힘은 그야말로 엄청나지만
많은 성도들이 그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고는,
하나님께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 낙담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원수인 마귀는 기도의 능력을 압니다.
마귀는 성경에 명시된 근거대로 하나님께 끈기 있게 구하는 성도의 기도를 너무나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성품을 지닌 우리 육신도 기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거부 반응을 보입니까?

어지간히 교회 생활 오래 했고 영적으로 자란 성도라고 해도 기도만 할려고 하면 졸리고,
기도제목 대신 잡생각만 자꾸 떠오르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고,
‘백 날 이래 봐야 소용있겠나’란 회의감이 들고, 주의가 산만해집니다.

기도 생활은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며, 그가 평소에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자주 생각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얼마나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지내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본인 역시 저 말에 찔리는 게 많긴 하지만, 그건 제가 덜 성숙한 것이고,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저래야 한다는 것만은 압니다.

제정신(?)으로는 5분도 집중해서 기도하기 어려운데
방언으로는 몇 시간씩 기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제정신으로는 터놓고 얘기를 하기가 어려우니까
술 마시고 털어놓는 거랑 같은 이치로 보입니다. 남도 모르고, 자기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못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귀담아 들어 주실까요?
그게 진짜로 아담의 성품을 극복하고서 마귀의 방해 안 받고 직통으로
하나님과 대화 나누는 걸까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령님은 절대로 성령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사람의 자유 의지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사람을 결코 멋대로 조종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제정신으로 맑은 정신으로 있을 때
자연스럽고 질서 있게 개입해서 사람의 언행을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바꿔 주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늘 예수님을 높이고 드러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인간이 자기 말로 직접 올리는 기도에 대해
아버지께 따로 중재· 중보만을 하지, 절대로 사람 입을 강제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사람의 영으로 하는 겁니다.
질서라는 하나님의 성품과 오늘날의 방언은 서로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4. 미혹의 수단으로서의 방언

세상 종교들을 보십시오.
직업적인 종교인이 평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나 염불을 중얼거리면서
평신도들을 기죽이고, 뭔가 자기네만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처럼 꾸미는 모습을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천주교 사제는 미사 하면서 빵을 예수님의 실제 몸으로 바꾼다는 사악한 화체 “마술”을
행할 때 라틴어 주문을 외웁니다.
불교 승려들의 염불은 또 무슨 말로 중얼거리는 건지 일반인이 알 길이 없죠.

심지어는 무아지경에 빠져서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만치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감을 조성하고 종교에 더욱 빠져들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게
어디 있을까요? 방언을 사모하는 분들은 혹시 저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육신적인 한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누구나 은사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다 사람의 그런 특성을 이용해서 존속해 왔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귀는 여러분의 입을 움직여 줄 수 있고,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고,
음성을 들려 줄 수도 있습니다 --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보다 체험을 더 믿게 만들 수만 있다면!
성경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흔들고 파괴할 수만 있다면!

성경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초자연적인 현상조차도 성경으로 진위를 판단하고 영을 시험해야 합니다.
오늘날 바른 기도 없이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이적은 거의가 사기극 아니면
마귀의 영이 개입한 것입니다.

사람의 언어가 걸린 ‘방언 은사’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은사인 반면,
사람을 걷잡을 수 없이 미혹하고 교회 질서를 어지럽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성경은 교회 성도들이 타 언어를 이용한 말장난에 속을 일이 없게 만반의 대비를
다 해 놓았습니다. 알아듣질 못하는 말은 어차피 하나도 소용없다고 몇 번이고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도 헛된 반복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말로 할 말만 또박또박 간결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천주교의 라틴어 염불과는 180도 정반대이죠. 얼마나 질서 있고, 고맙고 건전합니까?

기독교를 굳이 종교로 분류하자면 “말과 글”의 종교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우상 형상, 성물 없이는 자신의 신에게 경배를 할 수 없지만
기독교는 책 한 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권능을 두셨습니다.
당장이라도 마귀를 새장의 새 갖고 놀듯이 골탕먹이다가(욥 41:5)
불못에 던져 버릴 수 있는 예수님조차 본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마귀를 이긴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여기에 대해 마귀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맞받아치지 못하고 꽁무니를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외경이나 탈무드에 기록된 문구가 아니라 성경을 인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조차도 히브리어, 그리스어 학자의 말장난에 속을 일이 없게끔,
완벽한 영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단어 그대로 보존하시는 한편으로,
이상한 언어로 사람의 영적 접근성을 제한하지도, 사람을 미혹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만을 믿읍시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91 교리 성경연구방법-제7과 단어 연구 방법 이우진 05.15 4014
490 교리 성경연구방법-제8과 문맥을 이해하가 위한 4... 이우진 05.22 4436
489 교리 성경연구방법-제9과 비문자적 본문의 해석 원칙 이우진 05.29 3406
488 양육 설교의 준비와 전달-제1과 설교란 무엇인가? 이우진 06.05 4709
487 양육 설교의 준비와 전달-제2과 설교와 성경연구 이우진 06.11 4095
486 양육 설교의 준비와 전달-제3과 청중과 설교의 주제 이우진 06.18 5734
485 양육 설교의 준비와 전달-제4과 여러 종류의 설교 이우진 06.24 5122
484 양육 설교의 준비와 전달-제5과 설교자의 태도 이우진 07.03 4106
483 양육 하나님의 뜻1 이우진 07.09 4330
482 양육 하나님의 뜻2 이우진 07.17 4458
481 복음 큰 흰 왕좌 심판 이우진 07.23 4296
» 교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경과 어긋난 방언 김용묵 07.28 5007
479 컬럼 신학원에서 공부하는 이유 이우진 07.31 6779
478 양육 성경과 술 이우진 09.23 4378
477 양육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1 이우진 10.02 6426
476 양육 복음증거1-일어나 가라 이우진 10.13 3246
475 복음 죽음에서 부활까지 이우진 11.09 4190
474 양육 복음증거2-씨뿌리는 자의 비유 이우진 11.20 4253
473 양육 복음증거3-빌립과 내시 이우진 11.27 4255
472 양육 복음증거4-베드로와 고넬료 이우진 12.04 3628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0 Next
/ 30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