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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1장  율법과 은혜

(4) 신자와 율법

 

신약교회 시대에서 거듭난 신자와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를 다루는 주제는 매우 논쟁이 심한 뜨거운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다시 말해 구약과 신약을 혼동하는 자유주의적 교회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들은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율법에 기초해서 행위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정확한 시대구분과 세대주의를 신봉한다는 근본주의자들도 율법을 이용해서 열심을 내지 않는 성도를 위협하고 심지어 그 율법을 지역 교회를 통치하는 지침서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기적이며 불완전한 사역자들의 가르침 속에서 교리적 문제점이 발견된다. 구원받은 성도가 천년왕국 기간에 지옥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하며, 교회가 대환난을 통과한다고 가르치거나, 갈보리 십자가에서 해결된 인간의 죄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철장으로 심판 받는다거나,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거나 혹은 율법의 일부가 교회시대에도 적용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교리에 깔려있는 기본구조는 모두 같다. 이런 잘못된 교리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려고 했던 자신들의 노력이 실패함으로써 나온 일종의 좌절감의 표출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헌신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성경을 변개하거나,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섬기도록 강요하거나 위협하는 잘못된 교리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시도이다.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결코 유익이 없다. 진리가 영적인 열매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교리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아무리 협박해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그 사람이 죄를 짓기를 원하면 죄를 지을 것이다. 만일 그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대로 행할 것이다. 만일 그가 간증을 지키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장 좋은 모범을 계속해서 보여준다면,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분을 섬기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성도들로 올바른 일을 하도록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잘못된 교리와 저주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까닭 없는 저주는 떠도는 새와 날아가는 제비처럼 임하지 아니하리로다.”( 26:2)

여러분은 내가 지옥에 갈지 모른다고 위협할 수 있으나, 결코 나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 여러분이 나를 예수님의 심판석으로 위협할 수 있으나, 나의 모든 죄는 그 대가가 지불되었고 그리고 하늘에 있는 왕좌에는 나를 위한 변호인이 있다. 여러분이 내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위협할 수 있으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여러분이 내가 율법의 어떤 부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예수님의 몸속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율법아래 있지 않았고 하물며 지금 구원받은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물론 세상에는 잘못된 교리의 반복학습으로 인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에게 열정은 있으나 그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도시대에 논쟁이 발생한 경우, 어떤 사람이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자기 주장을 펴는 경우 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단어들이나 구절들을 인용함으로써 성경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최종권위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사도행전 15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것은 성경에 쓰인 내용들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 사람들 사이에 작지 않은 분쟁과 논쟁이 일어나니라. 이에 그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자기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니라. 교회가 그들을 그들의 길로 내보내매 그들이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지나며 이방인들의 회심을 밝히 알려 모든 형제들에게 큰 기쁨을 끼치니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밝히 말하니라.”( 15:1-4)

예루살렘에 있던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만일 율법이 이방인들을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의 우월적 지위는 끝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교리가 계시되는 것을 방해했던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 속한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이르되,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일을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함께 오니라.”( 15:5-6)

독자 여러분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모두 인식할 것이다.

많은 논쟁이 있은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이방인들이 내 입을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매우 오래 전에 우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주사 그들에게 증언하시며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사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 차별도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15:7-9)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구원받았을 때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구원받을 당시 모두 베드로는 그 현장에 있었다. 베드로가 이 문제에 대한 최종권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베드로부터 시작된 교리가 아님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오직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줄을 믿노라, 하니라.”( 15:10-11)

믿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해 오래 전에 확고한 결론이 내려졌던 이 문제가 20세기가 지난 현재에서도 논쟁거리가 된다는 사실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라는 구절은 정말 강력하다. 고린도전서 10장에 하나님을 시험한 사례가 나와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속박을 교회에 부가하려는 시도는, 예수님께로부터 권위를 위탁 받은 사람들이 거부해야만 한다.

이에 온 무리가 조용히 하고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어떤 기적들과 이적들을 행하셨는지 밝히 말하는 것을 들으니라. 그들이 잠잠하매 야고보가 응답하여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12-13). 그러므로 내 판결은 이러하니 곧 우리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15:19)

야고보도 동의했고 베드로도 동의했다. 그들은 땅 위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내려진 결론에 동의하였고 이것이 신약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즉 율법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 글을 써서 그들이 우상들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게 하자는 것이라. 옛적부터 모세에게는 각 도시에서 그를 선포하는 자들이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들에서 모세의 글을 읽느니라, 하더라.”( 15:20-21)

초대 교회는 율법의 문제보다 더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연약한 양심을 소유한 교회 구성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높은 수준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였다.

이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의 동료 중에서 택한 사람들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는 것을 기쁘게 여기니라. 그들은 곧 형제들 가운데 주요 인물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들이 그들 편에 이같이 편지하니라. 사도들과 장로들과 형제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들에 속한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우리에게서 나간 어떤 자들이 말로 너희를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 혼을 뒤엎으며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였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으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 한마음으로 모여서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택한 사람들을 너희에게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느니라.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었으니 그들도 너희에게 같은 것들을 입으로 전하리라. 성령님과 우리는 이 필요한 것들 외에 다른 큰 짐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을 좋게 여겼나니 곧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너희가 멀리할지니라. 너희가 이것들을 스스로 삼가면 잘하리로다. 평안할지어다, 하였더라.”( 15:22-29)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첫째, 성령님께서는 교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다. 사도들은 이런 하나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둘째, 신자들을 율법 아래 놓고자 했던 그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혼을 파멸시키는 행위로 고소당했다.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교리의 기초이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그 어떤 시도도 구원 교리의 기초를 훼손하는 것이다.[1]

디모데전서 1:4-6의 경고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꾸며 낸 이야기와 끝없는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느니라. 이런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바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 주는 일보다 오히려 논쟁을 일으키나니 그렇게 할지니라. 이제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어떤 사람들이 이것에서 벗어나 헛된 말다툼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의 목적은 우리에게 사랑(charity)으로 가득한 삶을 제공하는 데 있다. 율법의 가장 중요한 훈계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명령들을 하나씩 조사하다 보면 이것들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율법 자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게 바로 율법의 목적이다.

우리가 사랑에 기초하기보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치중한다면 그것은 헛된 결과만을 초래한다.

디모데전서 1:7은 개인들과 모임들로부터 사랑을 뺏으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율법을 잘못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또한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지 않으며 율법의 난해한 부분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문제의 근원은 신약 교회의 거듭난 성도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 아래 있지 않은데 교회 안에서 율법을 가르치고자 했던 사람들이 왜 존재했을까? 그들의 의도는 분명 잘못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고 그들을 위해 존재했던 율법 아래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인도하려고 하는 바로 그 의도가 건전한 신약 교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성령님은 매우 선명하게 이 문제를 지적하신다. 구약시대 율법의 전부 혹은 일부를 신약시대 성도에게 접목하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구절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왜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인들의 명절들을 지키려고 하는가?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레위기에서 규정하는 음식에 관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책들을 저술하고 그런 내용의 전도지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왜 안식일을 주장하며 그날에 모이려고 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왜 그들은 구약시대 율법의 전부 혹은 일부가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주님의 몸 된 교회 지체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1:4-7에서 말씀하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8-9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줄 우리가 아노라. 이것을 알라. 율법이 만들어진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이것을 통해 우리는 율법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30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 고린도후서 5:21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자신들에게 전가된 주 예수님의 의에 대한 진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 오늘날 수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실수를 하고 있다. 로마서 10:3-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주어졌다. 율법과 나의 관계는 끝이 났다.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인간들은 교회에 율법을 전하려고 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구원받은 선한 신자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를 죽이거나 혹은 다른 재앙을 내릴 것이라는 설교를 듣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목사님께 의문을 제기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고라처럼 죽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새우를 먹으면 젊을 때 죽을 것이다.” 이것 또한 율법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셨고 나를 의롭게 하셨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을 자유롭게 하셨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여전히 속박으로 이끄는 사람의 말에 나는 현혹되거나 영향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율법은 훈육선생(schoolmaster)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을 가르치는 성경구절은 학교에서 졸업하고 떠날 시점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23-25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는…” 아직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붙잡혀서…” 이 문장은 과거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나중에 계시될 믿음에 이르기까지 갇혀 있었다.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누구도 더 이상 학교 건물에 갇혀있지 않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었으니(was)” 과거시제이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믿음이 온 뒤에는(after),” 예수 그리스도께로 온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더 이상 훈육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이런 명백한 설명을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물론 성경에는 종종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그런 난해한 부분이 아니다.

로마서 2:12-14를 살펴보자. 율법 밖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또한 율법 밖에서 멸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으리니 (이는 율법을 듣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아니하고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 문맥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이방인들에 대한 것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이방인들이 결코 율법 아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문명과 사회에 진리에 기초한 법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셨고 그 법의 원칙들이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과 일치한다고 해서 이방인들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코 율법 아래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이기에 믿는 성도가 되어서도 율법 아래 있을 수 없는데도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처럼 율법의 전부 혹은 일부를 지키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다음으로 로마서 3:19을 살펴보자.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율법이 말하는 것들은 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 구절은 율법을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다(아래를 참조하라). 성령님께서는 율법은 분리할 수 없는 한 체계라고 확실히 말씀하고 계신다. 이 구절을 통해서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고 하겠다.

율법의 그 어떤 부분도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그 어떤 희생제물도 바치지 않는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어야 하며 내 소득의 얼마를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지를 규정하는 그 어떤 법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하나님을 (Jah)” 라고 경배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율법을 공부한다. 율법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고 주님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나 나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어떤 잘못된 교리라 하더라도 나로 율법을 지키게 할 수 없다.

로마서 6:14-15을 보자.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대부분의 율법 교사들은 만일 사람들을 율법의 통제 아래 두지 않는다면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짓는다.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지 못한다. 로마서 6장에서 죄를 짓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성령님의 통제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은혜가 율법보다 더 능력이 있다.

이런 진리의 내용이 로마서 7:7-13에서 계속 나타난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사전과 같은 기능을 한다. 죄를 설명하고 규정한다.

그러나 죄가 명령을 통해 기회를 타서 내 안에 온갖 욕정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기 때문이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주신 바울의 증거는 내가 율법을 더 알면 알수록 내 자신이 더욱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율법은 사람을 더 좋은 상태로 만들 수 없다. 율법은 자신이 얼마나 나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율법을 배우고, 연구하고 읽는 행위들은 당신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지 못한다. 율법은 당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분명히 보여줄 뿐이다.

전에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살아 있었으나 명령이 오매 죄가 되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정하신 명령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인 줄 내가 알았나니 죄가 명령을 이용해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그러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을 통해 내 안에서 사망을 이루었나니 이것은 죄가 명령을 통해 넘치도록 죄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율법이 주어진 목적을 이미 앞에서 공부했다. 이 내용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다. 이 성경구절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데 율법이 적절한 규범을 제공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 성경구절의 전체적인 목적은 죄를 통해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현실을 깨닫고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되는 부활의 삶을 믿도록 하는 데 있다.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을 두고 다시 저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그분과 같이 동행하자.

고린도전서 15:56-57을 살펴보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율법을 어기는 죄가 당신을 죽일 만큼 큰 죄인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은 자로부터 일으켜 세우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실 만큼 강력하신 분이신가? 그렇다. 율법에 의해 죽고 예수님에 의해 일으켜진 내가 왜 율법과의 교제를 갈망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격하시키고 자신의 노력을 높이려는 인간의 갈망을 추구하는 그 어떤 거짓 교리에서도 벗어나야만 한다.

고린도후서 3장 전체는 신약과 율법을 비교하고 있다. 9절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정죄의 직무도 영광이 될진대 의의 직무는 영광이 더욱 뛰어나니라.”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다. 율법은 의로움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온다. 신약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내주하는 성령님이 진정한 의를 성취하심을 알 수 있다.

11절을 보자.없어진 것에도 영광이 있었을진대(율법, 사라짐) 남아 있는 것에는(하나님의 전가된 의) 더욱 영광이 있느니라.”

14절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졌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신이 율법만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을 볼 수 없다. 당신이 율법의 계명들을 바라보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

나는 모세의 율법이나 인간이 만든 규범에 초점을 맞추는 교회에 있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자 한다. 그분만이 영원한 삶에 필요한 의를 전가시킬 수 있으며 그분만이 이 지상의 삶에 필요한 의를 가져오실 수 있다.

골로새서 2:13-17에서 핵심을 찌르고 있다.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이방인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당신은 죽었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죽은 자로부터 일으켜지고 더 이상 죽지 않으며)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분께서 율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주셨고 그분께서 율법의 모든 길을 제거하심으로 나와 구원자 사이에 율법이 방해가 되지 못하게 하셨다. 16절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음식법) 또 거룩한 날(유대인의 법적인 금식일)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일주일 마다 있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매년 그리고 7년에 한번 있는 안식년)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을 통해 그 누구도 우리를 판단할 수 없다.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우리가 앞에서 배운 내용과 같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몸의 한 지체인가? 여러분은 예수님께 속해 있는가? 여러분은 음식법(dietary laws)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은 거룩한 날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은 명절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율법은 모든 길에서 제거되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우리는 죄 사면을 얻었네.

율법에 저주받고 상처받은 우리를

은혜로 단번에 구속하셨네.

 

우리는 그 어떤 저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을 주셨네.

나에게 오라, 그분의 달콤한 부르심을 들어보세.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구원하셨네.

하나님의 자녀, 얼마나 영광스런 위치인가!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타락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영원한 생명으로

축복된 구원을 얻게 되었네. 단번에 영원히.

 

우리는 이번 장을 히브리서 7:19로 마치려고 한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으므로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전하라. 모세의 속박과 규범이 아닌 은혜의 자유를 전하라.

 

* 주의(Note): 율법에 집착하려는 간절한 시도의 일환으로 많은 사역자들과 교회에서 율법을 여러 분야(sections) 혹은 부분(divisions)으로 나누려고 시도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예들을 나열할 수 없으나, 아래 한 가지 예를 보면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판단한다.

주님의 율법은 십계명이고 모세의 율법은 안수의식, 희생제물, 금식일과 음식법 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이 십계명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만이 십자가에서 성취됐다고 가르친다.

이런 오류를 잠재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용어들(모세의 율법과 주님의 율법)을 성령님께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가복음 2:22-24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또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날들을 채우매 그들이 아이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니 이것은 (주의 율법에 기록된바, 태를 여는 모든 남자는 주께 거룩한 자라 불리리라, 한 대로) 아이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서 이르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희생물을 드리려 함이더라. 또 주의 율법에서 이르신 대로…”

이 성경구절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려갔고 주님의 율법에 따라 희생물을 바치려 했다. 그런데 이런 요구조건은 십계명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소위 말하는) 모세의 율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주의 율법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2:39)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규례적 율법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나 우리는 여전히 도덕적 율법 아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한 성경구절들은 그런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배치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신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6:14).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았고( 7:6)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됐으며( 8:2) 그리고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2:19). 주님을 찬양한다.

 



[1] 율법이 없기 때문에 믿는 성도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주장은 로마서 6:14-15를 통해서 그 잘못이 밝혀진다. 율법이 결코 어떤 인간을 죄로부터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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