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06.10 09:23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4(6월 9일-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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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4

6월 9일-15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69

짝을 선택함2( 24)

 

어떤 분들은 이번 장에서 구혼과 사전에 준비된 혼인에 관한 독특한 이론을 이끌어 내시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녀들의 혼인 계획을 세우면서 그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자고 하는 그 어떤 분과도 논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개인적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억지로 갖다 붙이는 시도를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은 사전에 미리 준비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창세기 24장을 그 근거로 사용하나 이는 다음 사항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1. 이것은 부모들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제3자와 한 처녀 사이의 합의입니다.

 

2. 그 소녀는 자유의지에 입각해서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선택해 준 것이 아닙니다. 처녀는 선택권이 없으며 아버지가 짝을 정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이론(특히 그녀의 나이와 그녀의 아버지의 도덕상태와 아무런 상관없는 무조건적 선택)은 창세기 24장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3. 보호자가 동반하는 데이트 같은 것은 이 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감독자와함께 시범기간을 갖는 것이나 가족간의 교제와 함께 하는 것 등은 좋은 일이고 추천할 만한 것이기는 하나 창세기 24장이 그것과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4. 약혼기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만난 당일 결혼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창세기 24장을 그대로 따라 그 방식으로 결혼하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성경을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할 일임을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잘못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제 평생의 사역의 일부입니다.

 

 

6 10

낙타들에 관하여( 24:10-11)

 

10마리 낙타는 이번 임무수행에 있어 그 어떤 능동적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이번 여행의 참 의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의 몫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낙타는 성경에서 때로 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낙타는 세상 사람들을 예표하며 이들은 하나님의 통제 하에 그들이 그 일에 연루되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복음 전파사역에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차, , 비행기 등을 통해 선교사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실어 나릅니다. 그들의 인쇄기는 복음관련 책자들을 찍어냅니다. 상업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사기도 하고 세상이 더 풍요롭게 될수록 복음 운동 역시 더 쉽게 전개될 수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자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손에 놓아 주신 것이요 이들은 그들이 원할 때 이런 것들을 뭐든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낙타들을 무릎을 꿇고 앉게 하니라.”(11) 이것은 복음선교의 가치 있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낙타들은 이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냥 했고 이것은 그들의 일상적 행동일 뿐입니다. 그들은 짐을 부리고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무릎을 꿇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전파된 복음의 영향력 때문에 무릎을 꿇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곳에서 과거에 자주 있었습니다. 그 어떤 국가도 기독교 국가일 수는 없으나 복음이 많은 정부로 하여금 의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일시적이나마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도시밖 세상 사람들이 복음 운동에 있어 줄 수 있는 도움은 초기에만 가능할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종만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 진실된 의미의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우물 곁에서 이곳은 기다려야 할 장소이며 모든 복음 운동이 그 위에 세워져야 할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영원히 흐르는 생명수 샘 곁에서 기다리는 것이 잘하는 것이며 자신 앞에 놓인 그 사역을 위해 힘을 얻고 소생하기 위해 성령님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급을 받아야만 합니다.

저녁때에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나갈 것이고(요일 2:17, 고전 7:31) 그들의 사업도, 활동도,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또한 정죄의 밤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인식할 때 바로 그 때가 주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그 때입니다. 실제로도 저녁때가 복음 전파에 있어 하루 중 최상의 시간입니다. 사람은 저녁때에 더 깊게 생각합니다. 하루의 염려가 지나가고 그들의 생각이 더 집중되기에 적절한 때가 저녁이지요.

창세기 22:16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라.” 라고 하시며 약속들을 다시 확인하신바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서 매우 드물게 나오는 것으로 매우 엄숙한 맹세임을 뜻합니다( 45:23, 22:5, 49:13, 4:13-14). 이 약속들은 앞서 주어진 약속들( 12:2-3, 13:16, 15:5, 17:4-8)과 비교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6 11

그두라와 하갈의 자녀들

 

이들 자녀들은 땅의 축복이 그 안에 보이고 있는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이들 여인의 아들들은 미래에 있을 이방인들의 복종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예표인 리브가의 뒤에 나타나는 그두라의 아들들은 천년왕국 때의 민족들을 예표합니다. 불순종하는 (그러나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이스라엘(앞선 과들을 보십시오)의 분명한 예표인 이스마엘의 씨와 더불어 이들은 아브라함의 나머지 가족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자녀들을 낳은 첩들(6)과 사라의 여종(12)을 상고해봅시다. 첫째, 구약 때에는 첩을 두는 실행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왕들은 아내들을 늘리지 못하도록 했을 뿐입니다.

둘째, 어떤 사역자들은 성관계가 곧 결혼이라는 주장을 하는바 이는 이혼과 재혼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어쩌면 본인들의 결혼 실패의 원인이 이런 교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적 답변을 찾아보십시다. 과연 성관계로 결혼이 성립되는가?

 

1. 이런 이상한 교리는 한 남자와 창녀가 결합하면(고전 6:15-18) 한 몸이 된다는 한 구절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 구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십시오. 이들의 연합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육체와 육체의 결합을 넘어서는 것으로 떠남과 결합을 포함합니다( 2:23-24). 이것은 항구적인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는 것은 한 남자가 창녀와 연합하면 한 육체이다. (“is”라는 현재 시제는 일시적으로를 뜻합니다.) 반면 창세기 구절은 인간이 자기 아내와 연합하리라(“shall”은 미래시제로 항구적 연합을 말합니다)고 합니다.

 

2.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영원한 연합( 5:21 이하)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성적 연합은 관련이 없습니다.

 

3. 만약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yes”라고 한다면, 간음을 저지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간음은 곧 결혼이 될테니까).

 

4. 우물가의 여인에게는 남자는 있었으나 남편은 업었습니다( 4:18).

 

5. 마약 남자가 소녀를 강간하면 그는 그를 아내로 맞아들여야만 했습니다( 22:28-29). 만약 결혼이 성관계로 이루어진다면, 이 소녀는 이미 그의 아내인 셈인데 뭐 하러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했겠습니까?

 

6. 요셉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까지는 처녀로 그대로 있었지만 그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1:18-25). 성적 연합이 없었으나 아내를 갖고 있었던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7. 창세기 34:1-5에 보면 한 남자가 한 여인과 관계를 갖고서 그녀를 아내로 삼기 원했지만 그녀는 그가 그녀와 잤는데도 그의 아내가 되지 못했습니다.

 

8. 밧세바는 다윗과 관계를 갖었으나 여전히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육체와 육체의 결합의 결과로서 다윗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닙니다.

 

9. 이 장에 언급된 여자들은 아브라함에게서 직접적 관계를 통해 아이들을 낳았지만 오직 사라만이 그의 아내라고 불립니다.

 

성경과 씨름하면서 자기 죄들을 정당화하기보다는 차라리 회개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합니다.

 

 

6 12

창세기 25장 묵상

 

1: 아브라함의 아내 그두라는 역대기상 1:32에 언급되어 있는바 여기에는 그녀가 첩으로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라가 아직 살아있던 동아에는 그녀가 2등급 아내로 분류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 기술은 항상 연대기 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앞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4: 이 세상을 계획하는 자들은 주목하십시오. 중동정치를 해결하고자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십시오. 아브라함은 단 한 조각의 땅도 이스마엘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모든 아브라함의 소유는 이삭에게로 갔습니다.

5: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다시 한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내게서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하였노라.( 16:15)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갈 것을 아시고( 13:3)

 

8: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습니다. 다시 한번 성경기록은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당시 아브라함은 100살이었습니다(21:5). 그리고 이삭은 40살 때 리브가와 결혼하였습니다(25:20). 이삭이 60살 때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습니다(25:26). 이는 아브라함은 에서와 야곱이 십대가 되었을 때까지 살아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 후 성경 기술에서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삭이기 때문입니다.

9: 비록 두 아들(에서와 야곱)은 서로를 보지 않았을지라도 각자 아버지와는 접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6 13

신실한 자들의 아비1

 

이삭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전개되어가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과 성품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구약에 기록된 그 어떤 사람들의 삶보다도 아브라함의 인생이야말로 후세에 있어 깊은 인상과 탁월한 본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창설자로서의 위치와 모든 시대의 믿는 자들의 본과 예표로서 그의 성품은 실로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성경 어느 곳에서 언급되든 간에 그는 항상 실존하는 역사적 인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신화적 영웅으로 여겨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실존한 인물이요, 창세기에 기록된 삶을 살았으며 유대민족을 직접 확고하게 세운 역사적 인물임에는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로운 언약( 2:2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후일에도 자주 언급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 기초가 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신성한 칭호( 3:6)

나는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라.” 이 호칭은 영적인 실재와 복으로 충만한 호칭으로 성경 안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11:16에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볼 때 특별히 귀중한 호칭이 나일 수 없습니다.

 

특별한 호소( 51:2)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보라. 이는 내가 네게 그 몫을 주었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을 향후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기초로 상기시키고 계시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듯이 포로로 잡혀간 그의 백성 또한 복을 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은 성경의 진리들의 초석입니다.

 

명확한 청원(왕상 18:36)

주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엘리야는 자신의 기도의 근거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붙듭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상숭배자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을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모세 또한 비슷한 청원을 합니다. 주께서 맹세하시고말씀하신 그 아브라함을 기억하소서(32:13, 9:27)  믿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신실하셨음을 근거로 굳게 붙들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복되고 거룩한 권리입니다.

 

독특한 관계(대하 20:7)

주의 친구 아브라함(41:8 참조) 아브라함만이 이와 같은 위대하고도 독특한 칭호를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아라비아에서는 엘칼릴(El Khalil,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가 아브라함에 대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과 다른 구절들(특히 시편)을 주의 깊게 공부해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관련된 풍성한 영적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에 있어서

그의 인생기록

우리는 다시 한번 신약 성경 기록자들이 아브라함을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이든, 로마서 4장이든, 히브리서 11장이든, 그 외의 성경기록 그 어디에서든,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한 구약의 증언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을 대하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들이 있는 그대로 사실이요 그 의미 그대로를 뜻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메시아와의 관계

마태복음에 주어진 주님의 족보는( 1:1 이하)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로써 메시아께서는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인 첫째 복음서에 나와있는 이 같은 사실은 메시아의 역사적 뿌리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메시아와 아브라함과의 관계에 있어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아브라함이 메시아를 영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8:56). 이 날이 과연 언제인지 또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지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사건을 두고 보자면 아브라함은 모든 약속들이 그 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바로 그 분에 대한 영적 환상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라함과 유대인과의 관계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에 대해 갖고 있는 민족적, 그리고 개인적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3:9, 8:39). 불쌍한 여인 하나는 주님에 의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린바 있었습니다( 13:16). 그리고 유대인들의 최상의, 그리고 최고의 미래는 아브라함의 품(16:22)이 될 것 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유대민족이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에 대해 얼마나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부심을 어떤 면에서 보자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법적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것은 그들에게 걸림 돌이 되었고 위험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와 같은 족보에 대한 집착으로 영적인 면을 배우고 닮는 것을 소홀이 했기 때문입니다.

 

 

6 14

신실한 자들의 아비2

 

앞서 언급한 구절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바 다음에 살펴 볼 구절들은 특별한 영적 가르침을 전달할 목적으로 아브라함이 언급된 것들로 한 구절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핵심사항을 담고 있음에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의한 의로움(4)

이 장은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장 입니다. 로마서에서의 의로움은 창세기 15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칭의 이상을 의미하는바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부토 끝까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3, 4:22-31)

갈라디아서의 핵심 사상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모신 믿는 자들로 된 위대한 영적 씨와의 관계입니다. 성령께서는 여기서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아브라함과의 영적 친족관계를 강조하고 계시며 이 믿음이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고 자유를 얻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삶( 11:8-19)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2:4)는 구절이 신약 성경에서 세 번 인용 되었는데(이때 자기는 성령께서 빼고 인용하신바 자기 믿음과 그리스도의 믿음과의 차이 즉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시고자 합니다.-역주). 매번 특별한 강조점이 달라 집니다. 로마서 1:17에서는 의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살리라를 강조하는 반면,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를 강조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삶이 예시되어 있는바 이는 성도의 삶의 능력과 원칙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 곳에서 믿음의 태도가 지닌 다양한 특징들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인내(9), 믿음의 기대(10), 믿음의 헌신(17)등 입니다. 전 구절이 아브라함이 매일의 삶의 기본적인 능력으로서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들( 2:21-24)

잘 아시다시피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상이한 견해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바울은 창세기 15장에 나온 사건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제시합니다. 반면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사건으로 (25년이 지난 후)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게 되었음을 입증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25년 동안 믿음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면 창세기 22장 당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최고조에 있었을 때로 이는 그가 이삭을 바친 것으로 입증됩니다.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 하였느냐?”( 2:22) 그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한 것 같습니다.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 혼자뿐이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결코 혼자있지 않는다.”

 

 

6 15

신실한 자들의 아비 3

 

, 이제 아브라함의 생애를 총괄 정리해 보고 하나님의 관점과 그의 관점으로부터 그의 인생을 확인해 보시지요. 우리는 참 인생이 무엇인지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인생 최상의 특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분과의 연합 안에서 드높여 지고 그분의 세상을 향한 계획(축복)을 함께 수행하는 교제 가운데 있었으니까요.

만약 이 특권이 없었더라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을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었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20:37)이라고 불리십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믿는 자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죄의 구덩이에서 꺼내 드높이시고 높은 특권의 지위까지 일으키사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시기까지 그의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옛 생활로부터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2. 인생의 강력한 기초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또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뻐하였습니다.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사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셨으니(삼하 23:5)

이것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의 인생의 기초이며 모든 참된 소망의 원천입니다. 다름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언약입니다( 8:10-12). 하나님 아버지와 믿는 자를 대신하여 아들 하나님과 맺었으며 성령에 의해 그에게 인치신바 된 그 영원한 언약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강하고,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보다 더 실재로 다가올 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은 받았으나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이여 여러분의 발 밑을 잘 보십시오. 그것은 가라앉는 모래가 아니고 단단한 반석입니다.

 

3. 인생의 가장 큰 영광

하나님께 신실한 것보다 더 우리를 만족시키고 보상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영광이 아니라 선함입니다. 연예가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겸손하고 지속적이고 열심인 인생,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이 땅에서 살아볼 수 있는 최고의 삶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삶이 아브라함이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가 실재함을 증언했습니다.

 

4. 인생의 단순한 열쇠

모든 복을 가져오는 열쇠는 믿음입니다. 참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받으며, 하나님께 반응하고, 하나님을 안에서 인식하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의 생명과 성품을 재생산해 냅니다. 우리의 믿음에 비례해서 모든 나머지 것들이 따라옵니다. “믿음으로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순한 인생 비결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늘 그래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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