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08.12 23:44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3(8월 11일-17일)

조회 수 420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3

8월 11일-17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8 11

디나와 관련된 비극4: 반응

 

디나의 소식이 오빠들에게 들려오자 그들은 비탄에 잠겨 심히 노했습니다(7).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세겜의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냅니다. 야곱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7) 안에서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몰이 자기 민족의 기준으로는 정직하고 순전하게 행하고 있는 반면(8-12)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 가족의 역사에서 있었던 최악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속임수(13) 야곱의 아들들의 태도와 동기는 올바른 것이었는지 모르나 그들의 방법은 잘못된 방법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일과는 무관했던 것 같습니다(30, 49:5-7). 그들이 하고자 하는 취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잔인함과 속임수는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목적을 위해 잘못된 수단이 동원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때 숙고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의 언약의 표적(할례), 바로 그것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그 땅의 백성을 부정직하게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공평했고 정직했습니다. 올바른 동기로만 수행되었더라면 꼭 필요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계획임은 물론 그들의 여동생 문제를 최상의 방식으로 마무리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올바르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방 족속인 그들이 자신들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언약의 표적을 단지 인간적 합의의 수단으로만 사용코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 없이 할례를 한다는 것은 육신적이고 이 땅에 속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 신성한 의식을 복수의 도구로 써먹겠다는 것은 그저 속임수로 위장하려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살인할 의도가 밑에 깔려 있는 경건의 모양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이 더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짓을 계획하는 것을 보니 야곱의 가족 생활의 영적 상태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아들들이 이런 계획을 짜고 있는 내내 야곱은 어째서 침묵을 한 것일까요? 물론 계획초기에는 몰랐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내내 침묵을 지켰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딸의 생명이 달려있는 문제인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다니요? 아니면 자신이 신실치 못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져서 머뭇거리고 만 것인가요?

하몰과 그의 백성은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고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평화롭게 동거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제안을 수용했는데 이는 사형집행명령서에 사인을 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4:26-27너희는 화를 내도 죄는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진노하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화가 죄를 낳고 이로 인해 마귀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가르치는 대신 야곱의 아들들은 거짓말쟁이와 살인자가( 8:44) 되고 말았으니까요.

 

 

8 12

디나와 관련된 비극5

 

이는 그가 자기들의 누이 디나를 더렵혔기 때문이더라.”(13) 그들은 언약을 옹호하는 것 만큼이나 개인적 복수심에 기울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방법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동기 역시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 같이 암시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육신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같이 되면(15) 야곱의 아들들은 육신의 할례가 하몰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사람이 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고의로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어떤 사실을 인치는 것뿐임을 잊었거나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구약하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 되었고 이를 할례로 인증하였습니다( 4:11).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와 관련하여 하몰에게 제안하는 것과 동일한 제안을 오늘날 비성경적인 종교지도자들이 침례와 관련하여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아 때 침례를 받으면(일반적으로 유아세례로 알려져 있음) 구원받지 못한 자가 구원받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할례와 마찬가지로 침례도 중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생했음을 인증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고 안 되고는 새로운 영적 출생에 달려 있는 바 이는 믿음에 대해 성령님께서 마음 안에서 은밀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세겜 족속이 속았듯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도시 사람들과 대화하며(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사태가 점점 더 확대되어 감을 보고 있습니다. 디나의 세상과의 타협적 행동은 세겜의 욕망을 자극했고 이에 범죄가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야곱의 아들들이 속임수를 사용해서 전도시를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8 13

디나와 관련된 비극6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 것이 되지 아니하겠느냐?”(23) 하몰의 진짜 속셈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목적도 동일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차지하고 교회에 속해있는 것들을 수중에 넣고 싶어합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대신 침례나 몇 가지 종교의식을 행하는데 동의해 줍니다.

다만 우리가 그들에게 동의하자.”(23) 이 조건에만 동의해주면 당장은 좀 불편하겠지만 상당한 전리품을 얻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사람들에게 교회출석은 피곤한 일이지만 종교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이득을 얻게 됩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23) 교회 역사를 보면 몇 가지 외적인 종교의식에 동의해 주었다고 교회들이 세상과 함께 하는 데 동의해줄 뿐 아니라 세상적 열망을 달성하는데 교회의 역량을 쏟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야곱의 아들들 중 주모자들이 그 도시로 내려가(25) 자기 여동생의 더럽혀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시 안팎의 모든 동물과 모든 재물, 그리고 아내들, 아이들 및 집안에 있는 모든 것까지 전부 약탈했습니다(28-29). 당하는 자들은 이들이 어째서 그토록 격노했는지 이유도 모른 채 잔인한 복수를 당하고 만 셈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한 사람과 그의 아들을 속였고 뒤이어 자신들의 공동체에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함께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는 도시의 백성을 모조리 속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향후 이 민족의 미래에 있게 될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8 14

디나와 관련된 비극7

 

드디어 야곱이 오랜 침묵 끝에(5) 입을 열고 있습니다(30). 그는 자녀들의 행동을 꾸짖고 있으나 그 꾸짖임의 내용은 우리가 예상함 것과는 다릅니다.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여 나로 하여금 이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악취를 내게 하였도다나는 수가 적은즉그들이 나를 치려 함께 모여 나를 죽이리니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자식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전혀 책망이 없고 자기가 처한 위험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대로 된 책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저 자기 목숨, 자기 가정, 자기가 돈 주고 산 땅, 그가 소유한 것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야곱은 자기 딸의 심정이나 아들들의 잘못이나 자기 하나님의 명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신실치 못해서 발생했는데 비난은 주어진 여건에 돌려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일으키는 문제는 실상은 거의 원래는 부모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입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사건의 주동자로 파악했는데(30), 이는 그 살상을 그들이 주도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들이 앞장선 것은 이들 또한 디나처럼 레아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들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우리는 주관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야곱이 보인 첫 반응이 나와 있고 후일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이번 사건에 대해 야곱이 평가를 내리고 있으니까요(49:5-7).

그의 첫 반응은 자신의 아들들이 저지른 폭력과 살상으로 인해 이웃들로부터 폭력적 대응이 온 집안으로 내리 덮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에 가면 그들의 행동을 폭력과 분노와 자기의와 진노로 규정하고 흩어짐과 분열이 그 두 부족에게 있을 것을 선포합니다.

야곱이 자녀들의 악행을 꾸짖지 않고 그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해서 가족의 안전을 위협당하게 한 것만 지적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것은 야만적이고 지나친 반응으로 신구약 모두에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신약의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창녀를 대하듯 우리 누이를 대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오빠들은 아버지께 항변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행동을 강간으로 비난한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다만 지참금과 선물을 주고 여동생을 데려가겠다는 제안이 디나를 물건 취급하는 것처럼 여겨졌기에 그리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상적인 혼인절차의 첫 단계인 지참금과 선물의 제의가 디나를 먼저 유혹하여 일을 저지른 후에 이루어졌기에 이에 대한 항변일수도 있습니다. 그녀를 창녀처럼 취급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아웃사이더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폭력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반응과 치밀하게 계획된 살상행위로 인해 야곱은 크고 영원히 지속될 상처를 입게 됩니다(49장에서 확인해 보세요).

 

 

8 15

창세기 34장 재고

 

창세기 34장을 재고해보면 이 사건은 실상은 야곱이 주 앞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새 출발한 후 마귀가 해온 두 번째 공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는데(1) 죄는 바라봄으로 시작됩니다( 3). 디나는 지금 경건치 않은 자들과 교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공격과 더럽힘(2). 우리는 세상에 의해 상해를 입지 않고서는 세상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와 그들과 함께 한다고 그들이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신들을 위해 얻고자 합니다(3-4). 그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고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행동을 통제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는 타락하고 더럽혀진 자들에 대해 비탄해 해야 합니다(7).

우리는 그들을 더럽힌 자들에게 분노해야 합니다(7).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7) 어떤 것들은 실로 마땅히 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때로는 어떤 행실이 악하다고 조용히 인정하는 것으로만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목소리를 높여 그런 행실을 큰소리로 대적해야 합니다(5:11).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연합하기를 원합니다(8).

이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잘못도 안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상황을 용납하면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9).

어린아이의 실수가 어른의 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을 정당화 할 수도 없습니다. 죄에 빠졌다고 해도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함께 하자(10) 경건치 않은 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함께만 하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세상은 제안합니다(11-12).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13-14). 우리는 세상이 제시하는 조건대로 그들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너희가 우리 방식으로 행하라 아니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겠다(15-17).

그들은 양보를 하려고 합니다(18-22).

그러나 실상은 취하고 가져갈 목적으로 그리하는 것입니다(24).

칼을 취해 살해하다(25-26). 우리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취해야 하고 우리를 세상과 연합시키려는 그 어떤 세력도 다 이 칼로 물리쳐야 합니다.

명분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31).

이번 사건은 히브리 민족을 잡혼을 통해 더럽히려는 사탄의 여러 번의 시도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타협을 통해 평화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호하시고자 합니다. 야곱은 동맹이 필요 없었습니다.

 

 

8 16

창세기 34장에 대한 마지막 묵상

 

나는 수가 적은즉(30) 야곱은 ’(I) 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가족 전체를 대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야곱은 팔레스타인 전체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구입한 약간의 땅만 소유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나 후일 그들의 후손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도 세겜의 땅 일부를 아브라함이 구입한 것을 언급합니다(7:16).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자신의 구속 받은 백성과 동일시 하고 계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지요. 이와 같은 동일시함은 심판의 날에도 그대로 유지됩니다(25:40, 45).

야곱은 그 땅의 거주민들과 비교해 볼 때 자기는 수가 적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백성과의 관계에서는 어느 세대이든 간에 늘 이와 같은 현상이 목격됩니다. 주님의 백성은 적은 양무리”(12:32)일 뿐이었습니다.

어째서 디나의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되었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째서 요셉과 야곱의 이야기가 이 시점에서 중단되어야 했을까요? 이 사건은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해야 할 그 시점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집트로의 이주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되 기근이 원인으로 제공되고 그 집행 책임자는 요셉이 되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장을 보면 이 백성의 영적 상태가 이주를 정당화 시켜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가나안에 머물러 있다가는 선민의 도적적 상태가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 자명했으니까요. 그처럼 오염된 지역으로부터 다른 쉼터로 이동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순결을 보존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은 어째서 디나의 이름이 창세기 30:21에 레아가 야곱에게 낳아준 자녀들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번 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과 연루되어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머릿속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 사건 속의 여러 상황들이 처리되고 있는 부끄러운 방식들을 감안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번 사건기록에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디나의 오빠들의 행실로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이 우리에게는 큰 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종종 이스라엘 역사기록에서 벗어난 더럽혀진 여인의 이야기를 삽입하시고는 그들로 은혜의 수혜자가 되도록 하시는데 이번 사건 역시 그렇습니다. 라합(2), , 유출병 걸렸던 여인(4),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8) 및 기타 여러 경우가 신부가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되고 있는 도중 이스라엘이 한쪽으로 제쳐지고 있음을 예시하고자 사용된 바 있습니다.

 

 

8 17

시급한 부르심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에게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시니( 35:1)

벧엘은 세겜으로 부터 단지 30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 온지 벌서 만 10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만약 화평가운데 돌아 오게 된다면 벧엘로 되돌아 와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겠노라고 서원한지가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이미 몇 년 전에 그가 돌아올 만반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그 서원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르시는바 이는 그분께서는 자기 종이 불순종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을 내버려 두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그로 신실한 복종의 지점으로 돌이키셔야만 합니다.

타락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주 익숙한 구식 방법, 즉 회개와 믿음 입니다. 야곱이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야곱이 에서로부터 도망쳤을 때 나타나셨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방황하는 신자는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버리시고 다른 분이 되어버리셨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실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동일하신 그분(그가 버리고 떠난 그분)이 다른 모습과 성품으로 계신 것을 보고는 무서워서 다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이유로 방황을 하고 있던 간에 탕자가 그리 했듯이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의 방탕한 삶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은 꺼지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거처나 삶의 코스를 바꾸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은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버리고 떠난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돌아 오기를 사랑을 가지고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11 읽어보세요 하나님도 상처를 받으신다 김수광 03.11 303
410 교리 이름을 알면 깊게 체험할 수 있다 김수광 03.04 572
409 교리 메시아  김수광 12.24 456
408 양육 내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김수광 07.30 4027
407 양육 올바른 성경공부 김수광 07.16 475
406 읽어보세요 자유엔 순종이 포함된다 김수광 05.21 414
405 교리 성경과 지질학-21 다니엘서 해설 이우진 03.12 4985
404 교리 성경과 지질학-20 에덴의 강들을 찾아서 이우진 02.27 6592
403 교리 성경과 지질학-19 지질학과 예언: 사해 균열 이우진 02.27 3705
402 교리 성경과 지질학-18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 이우진 11.18 4350
401 교리 성경과 지질학-17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 이우진 11.18 3344
400 교리 성경과 지질학-16 시간과 자연에서 발견되는... 이우진 11.18 4659
399 교리 성경과 지질학-15 빙하기 말기의 생물계와 ... 이우진 11.18 3422
398 교리 성경과 지질학-14 지질학적 증거와 고대 세... 이우진 11.18 4167
397 교리 성경과 지질학-13 넷째 날: 해와 달의 패러독스 이우진 11.18 3284
396 교리 성경과 지질학-12 궁창 이우진 11.18 6063
395 교리 성경과 지질학-11 아담 이전의 세상 이우진 11.18 3577
394 교리 성경과 지질학-10 육체와 영의 관계 이우진 11.18 2955
393 교리 성경과 지질학-9 벨렉의 날들과 해수면의 변... 이우진 11.12 4251
392 교리 성경과 지질학-8 하늘의 창들 이우진 11.12 3645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30 Next
/ 30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