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제7장 지위와 상태
그리스도인의 이중성(옛사람과 새사람)은 또 다른 흥미로운 주제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지위와 상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지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법적으로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리의 상태는 우리가 행한 행위에 의해서 보여지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주 예수님의 의로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나(고전
우리는 창세기 20장을 통해 그랄에서 아브라함의 실패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쪽 지방으로 이동하여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 거하며 그랄에 머물렀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녀는 내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가니라.”(창
“그러나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가셔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데려온 여인으로 인해 너는 죽은 자가 되었으니 그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이니라, 하시니라.”(3절)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것은 간음이었다. 이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며 이것은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되는 죄인 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적 시각에서 혹은 많은 교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동을 통해 그 말씀에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비멜렉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민족도 죽이려 하시나이까? 그가 내게 이르기를, 그녀는 내 누이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또한 그녀도 스스로 이르기를,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순전한 마음과 무죄한 손으로 이 일을 행하였나이다, 하매”(4-5절)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방인에 대해 우리가 전에 배웠던 것을 상기해 보자. 그러나 아비멜렉의 상태는 온전했다. 그가 빛을 보았을 때 그것에 반응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올바른 행동을 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꿈에 그에게 이르시되, 참으로 네가 순전한 마음으로 이 일을 행한 줄을 내가 아노라. 나 역시 너를 막아 내게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이런 까닭에 네가 그녀에게 손대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노라.”(6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속고 있는 경우에라도 죄를 짓지 못하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당신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구체적인 사실과 율법의 계명들을 알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스스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 앞에 순수한 모습으로 나온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 순수한 마음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습득한 성경 지식은 당신을 의로움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적은 지식일지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기본적인 성경지식을 가지고 마음을 순수하게 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한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에게 경고를 주시기 전에는 그 도시를 파멸시키지 않으셨다. 또한 노아의 시대에 있던 홍수 때에도 사전에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 아비멜렉은 잘못된 행동을 하려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먼저 경고를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대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기의 모든 종을 불러 그들의 귀에 이 모든 일을 말하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더라.”(7-8절)
성경 지식이 전혀 없던 이 이방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얼마나 빨리 복종했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에 결코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행하였느냐? 내가 무슨 일로 네게 죄를 지었기에 네가 나와 내 왕국 위에 큰 죄를 가져왔느냐? 네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9절) 믿음의 조상이고 모든 민족의 조상이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 사람은 한 이방인에게 책망 받고 있다.
요나는 거짓 신을 섬기는 뱃사람들에게 책망 받았다. 베드로도 불을 쬐고 있던 어린 소녀에게 책망 받았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나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당신과 같은 신자가 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경우에 직면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그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망 받는 것을 금지하고 계신다.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 일을 하였느냐? 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 까닭은 분명히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므로 내 아내로 인해 그들이 나를 죽일 줄로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이라.”(10-11절) 여기서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아니라 보는 대로 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현명하게 행동했다. 이방인은 신실했고 선택 받은 사람은 거짓말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간교한 선택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알리바이를 만들었으나 이것이 자신의 범죄를 용인해 주지는 못했다.
“또 그녀는 참으로 내 누이라. 그녀는 내 어머니의 딸은 아니나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내 아내가 되었노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가는 곳마다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은 매우 신중한 거짓말이었다) 이것이 당신이 내게 베풀 친절이라, 하였노라.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남종과 여종들을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또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며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보라,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기뻐하는 곳에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네 오라비에게 은 천 개를 주었은즉, 보라, 그가 너와 함께한 모든 사람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너를 위한 눈가리개가 되리라, 하였더라. 이같이 사라가 비난을 받았더라.”(12-16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조롱했다. 그는 사라에게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간음과 거짓말에 대한 교훈뿐만 아니라 진리를 계시하고 의로운 사람을 보호하는 주님과 우리를 정죄케 하는 죄의 문제는 바로 지위와 상태의 문제이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그들이 자녀들을 낳게 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로 인하여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속히 닫으셨기 때문이더라.”(17-18절) 이 구절 다음에 7절에 있는 다음 말을 붙여보자. “그는 대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머리를 흔들며 아비멜렉과 연합해야만 한다.
누가 그 죄인(아브라함)이 대언자였으며 그 고상한 사람이 어둠 속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 거짓말쟁이의 기도가 정직한 사람의 삶을 구하는 데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주위 깊게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아브라함의 상태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형편없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가족을 속여 자신이 간증해야 할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전가하려고 시도했다.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의 위치는 주님의 말씀의 믿음을 빚진 대언자이며 의를 전가 받은 족장이었다. 아브라함은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었고 그 도시에서 아비멜렉을 위해 중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1]
육신적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영광스러운 지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악용하여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옹호하는 데 이 진리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예와 가족과 직장에서 자신의 간증에 손상을 입히지 않을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사실이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것이다. 한 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사람의 지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하나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목적은 우리의 현재 위치를 그 지위에 맞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미래에 우리를 보시고자 하시는 수준까지 이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향하는 영원한 최종 목적지를 결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를 향하는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됨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롯의 엄청난 예를 생각해 보라. 베드로후서 2장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불렸고 동시에 “의로운 혼”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분류됐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좋은 예로서 제시되고 있다.
창세기 19장의 롯의 삶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면 이 유명한 구절은 단순히 기쁨을 주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우리가 베드로후서에 있는 성령님의 말씀을 통해 롯의 과거를 읽어보면 우리는 뒤로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천사가 소돔에 방문했을 때, 롯은 사악한 자들을 “형제”라 부르며 그들에게 자신의 딸을 취하도록 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얘기했으나 “그의 사위들은 그를 농담하는 자”로 여겼다. 그는 파멸의 시간이 다가오자 사악한 사람들과 어울렸던 그곳에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주의 천사가 롯의 손을 붙들고 도시 밖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곳에서 구원받은 후 롯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 술에 취하여 자신의 딸들과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롯을 의로운 혼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롯의 지위이다. 롯의 이웃들은 소돔의 사악함에 취해있던 한 인간으로 롯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롯의 상태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독자는 어떤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모든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동일하게 놓으면서도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는 삶을 우리는 선택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행동이 아내, 자녀들, 이웃과 후손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무시하는 삶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민수기 23장에 가서 고용된 예언자인 발람을 살펴보자. 그는 충분한 급여만 제공된다면 그 어떤 곳에서도 설교할 것이다. 세상적인 왕인 발락은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희생된 양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속되었다. 그들은 홍해의 기적적인 갈라짐을 통해 죽음의 장소로부터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생활에서 우상을 섬겼으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반역하였다. 이집트에서 나온 그들 가운데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림으로써 그 광야에서 죽었다. 그들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사악했다.
발람은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그 회중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매일 아침 이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주님이 보내주신 음식을 줍고 있었다. 매일 오후 그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 죄의 대가로 죽어간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 거짓 대언자는 아래에서 펼쳐지는 신기한 모습을 살펴보고 자신의 입을 열어 그 백성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그분의 말씀이 발람의 입에서 나오게 하였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안에서 잘못을 보지 아니하셨도다.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의 외치는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그의 힘이 유니콘의 힘과 같도다. 참으로 야곱을 대적할 요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대적할 점술이 없도다. 이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하여 말할진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이루셨느냐! 하리로다.”(민
놀랍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불의함과 타락함이 없는 민족이라고 하지 않으시는가?
이것은 지위에 대한 또 다른 좋은 예이다. 이스라엘의 지위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들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민족이며 주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다. 이 민족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복과 저주가 갈리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지위인 것이다. 동시에 죄는 어떤 민족이든 파멸시키며 그 죄로 인해 주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된다. 이것은 상태에 관한 것이다.
독자들은 구약을 통해 이 진리들을 보여주는 많은 사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 삼손, 엘리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 놀라운 지위에 오르게 되지만 동시에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도 보게 된다.
구약성경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타락하고 더러운 제사장과 다루기 힘든 민족을 상징한다. 스가랴
우리는 다시 그 죄악이 제거된 여호수아가 주님 앞에서 불 속에서 나온 한 나뭇가지로 서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탄은 더러움과 죄악에 속한 그를 보면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사탄을 책망하신다. 여호수아의 상태는 더러웠으나 그의 지위는 깨끗했다. 그의 상태는 사탄의 고소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벽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슬픈 소식을 보냈다. “데마는 현재의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우리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데마와 같은 길을 따라갔는가! 수많은 주님의 자녀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서 성령님의 인도함이 아닌 육신에 따라 살고 있다. 히브리서
나의 상태는 주님께 복종하지 않고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상태는 나에게 큰 피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방황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에베소서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30절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나의 상태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만 나의 지위는 이미 성령님께서 봉인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역할에 매번 실패할지 모르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임무에 있어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로마서 6장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 기록한 책이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
같은 로마서 6장에서 같은 독자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에베소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 미래의 확실성은 요한일서
거듭난 성도들이 기다리는 부활의 영광을 우리 모두가 명백히 볼 수 있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각 개인의 현재 상태이다. 이것은 매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바뀌고 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그분과 함께 하게 되며 그분처럼 될 것은 확실하다.
빌립보서
베드로전서
나의 상태는 가난하며 남겨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의 지위는 유업을 가지고 있다. 나의 상태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영원한 것을 소유하고 있다. 나의 상태는 생각과 행위가 타락해 있으나 나의 지위는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인해 정결하게 된다. 현재 이 모습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으나 그것은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되었느니라.”(벧전
갈라디아서
고린도후서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에 도달해서 “나를 찬양하라. 내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약속을 하셨기에 우리는 현재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
로마서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영적 전쟁에서는 휴전이 없다) 주를 위해 죽임을(육신) 당하며 도살당할(육신적 죽음)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내적인 사람의 삶은 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다).”(롬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롬
갈라디아서
이 구절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성령을 쫓아 살 것인지? 내가 본성을 따라 살지 혹은 새로운 생명에 따라 살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런 선택의 문제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평생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육신적인 사람은 오로지 순간만을 생각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수확의 때를 미리 바라보고 결정한다.
마태복음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예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꾸짖기 시작하여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 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돌이키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내게 실족거리니라.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는도다, 하시니라.” 같은 사람이 같은 날 행한 사건이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17절)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23절)
예수님은 그를 붙잡고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의 지위는 복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매우 참혹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진리로 충만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던 적이 수없이 많지 않았던가?
골로새서
동일한 대상에게 골로새서
이런 대조는 로마서
마태복음
동일한 진리를 데살로니가전서
디모데후서
히브리서
빌립보서
만일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믿는 사람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위와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상태에 대해 성경이 모순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실적으로 여러분이 처한 이런 모순에 대한 진리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요한일서
“백성이 불평하니 주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니라.”(민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에 빠지매”(민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빨 사이에 있어 그들이 씹기도 전에 주의 진노가 백성을 향해 타올라 주께서 매우 큰 재앙으로 백성을 치셨으므로”(민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민
“주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르며 그분께서 떠나시매 구름이 성막에서 떠나갔고, 보라,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같이 희게 되었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보니, 보라, 그녀가 나병에 걸렸더라.”(민
정탐꾼은 돌아가서 약속의 땅에 있던 큰 거인에 대해서 악한 보고를 했다. “이에 온 회중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그 밤에 울었더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민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격노하게 하려 하느냐? 내가 역병으로 그들을 쳐서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하고…”(민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돌에 맞아 죽었다(민 15장).
고라는 반역을 일으켰고 하나님은 땅을 여시고 그들 모두는 지옥으로 삼켜졌다(민 16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대제사장 선택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다(민 17장).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다(민 19장).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며 말하되…주께서 불 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으니라.”(민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인간의 역사인가!
“발람이 비유를 지어 이르되, 모압 왕 발락이 나를 아람으로부터 동쪽 산지에서 데려와 말하기를, 와서 나를 위해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아니하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주께서 꾸짖지 아니하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리요? 내가 바위들 꼭대기에서 그를 보며 작은 산들에서 그를 바라보나니, 보라, 이 백성은 홀로 거할 것이요, 민족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지 아니하리로다.누가 능히 야곱의 티끌을 셀 수 있으며 이스라엘의 사분의 일을 셀 수 있으리요? 나는 의로운 자의 죽음으로 죽기를 원하며 나의 마지막이 그의 마지막과 같기를 바라는도다! 하매.”(민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발람은 다른 모략을 시도한다. “발람이 비유를 지어 이르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너 십볼의 아들이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보라, 축복하라는 명령을 내가 받았고 그분께서 복을 주셨은즉 내가 그것을 돌이킬 수 없도다.”(민
지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것이지 인간의 변덕스러운 행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안에서 잘못을 보지 아니하셨도다.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의 외치는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도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태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매우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이스라엘의 지위를 선포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우리의 혼은 주님의 의 안에서 안전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 안에서 이루신 것은 영원하고 그 어떤 다른 것도 이 복된 선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성령님의 권능 안에서 역사하는 성도들의 삶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그래서 성령님의 통제에 복종한 사람들의 육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실 수 있는가를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1] 지위와 상태의 문제는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하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지위가 나온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의 상태가 온전하고 사람의 관점에서 의롭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