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09.12 04:33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8(9월 15일-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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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8

9월 15일-21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915

또 다른 쌍둥이 한 쌍

 

조금은 지나친 적용일 수 있지만 그래도 다말의 자녀들의 출생기록( 38:27-30)에서 우리는 몇 가지 영적 적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산파(28) 성령님께서는 하늘의 산파로서 수많은 혼들의 영적 출생을 도우시며 이들을 죄와 어두움으로부터 안전하게 끄집어 내어 생명과 빛의 세상으로 보냅니다.

주홍색 실(28) 만약 우리가 이것을 라합의 주홍색 실( 2:18)과 비교해 본다면 이것은 믿음의 표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먼저 나왔다(28) 한편으로는 산파가 틀렸으나 또 한편으로 보자면 산파는 옳았습니다. 사실 믿음과 약속은 율법이전에 왔었습니다( 3:17).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기까지는 실현도지 못했습니다.

그가 손을 도로 넣으매(29)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그리고 출애굽 당시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을 행사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95:10). 이로써 범죄로 인하여 율법이 주어집니다( 5:20, 3:19).

그의 형제가 나오므로(29) 비록 믿음과 약속이 먼저 보였으나, 율법이 예상 밖으로 먼저 나왔습니다.

어찌 네가 튀어나왔느냐?”(29) 율법은 약속이 주어지는 과정에서 말하자면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베레스로부터 오셨으니( 1:3) 이는 그분께서 율법하에 오셨고 계명들을 먼저 성취하신 후 그리고 나서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916

요셉과 보디발1( 39)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요셉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놀라운 유사점을 계속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집트는 늘 내려가는 곳입니다(1). 이것은 땅의 중심이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인 점에서 볼 때 지리적으로도 맞는 말인 동시에 영적 진리의 관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도 주 예수 그리스도만큼 그렇게 멀리 내려가신 분은 없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과 왕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의 끝없는 찬양을 뒤로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사 자신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그와 같은 모순들울 견디셨습니다.

요셉은 자유인도, 거주자도, 전쟁포로도 아닌 노예로서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죄악 도 자들에 의해 보디발의 손에 팔립니다(1).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도 왕이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권력을 쥔 로마의 지배층 가정이 아닌 멸시 받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셨지요. 우리는 빌립보서 2:6-7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그분께서 모든 자의 종이 되신 것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노예였지만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2). 환경은 바뀌지만, 평안과 교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요셉이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도 하늘의 도시의 화려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셨으나 여전히 아버지의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3:2, 3:13).

과거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요셉으로부터 끊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와 함께 이집트로 여행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보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둘 때가 오나니그러나 내가 혼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 16:32) 라고 하셨습니다.

 

 

917

요셉과 보디발2

 

그의 주인(2) 이 말은 끔찍한 말입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못 가고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자유를 빼앗기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예 생활을 환영하거나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흑인들은 남부에서 자신들의 운명(노예생활)에 만족해하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자신들은 그런 생활을 결코 하려 하지 않습니다. 경험이 없기는 하나 노예로 태어난 것보다 요셉처럼 좋은 가정에서 사랑 받고 살다가 갑자기 노예로 팔려온 경우가 훨씬 더 비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요셉이 순응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궁극적으로 통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그분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잘해주시지 않았다고 화를 내거나 쓴 뿌리를 보일터이나 요셉은 그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그것이 그에게 최상의 것을 가져올 것이라는 충분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이런 신뢰야말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 이제 우리의 복되신 구속주에 대해 생각해 보시지요. 그분보다 더 사랑스러운 아버지를 모시고 더 좋은 곳에서 더 큰 안락과 찬송을 받았던 분이 이 우주에 누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인간의 육신 안으로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갑자기 피곤으로 인해 주무셔야만 하고, 배고픔으로 인해 잡수셔야만 하며, 목마름으로 인해 마시셔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속박하에 놓여계십니다. 율법의 창시자요 그것을 주신 분께서 그 모든 규정을 다 지키고 따라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셨습니다. 그 모든 율법을 어기는 자들과는 어울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는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시어 그 모든 것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견디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셨던 것입니다.

 

 

918

요셉과 보디발3: 인간의 환경

 

우리는 2절과 3절에서 요셉이 형통한 자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노예 신분인 그에게 형통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지요. 그가 하는 일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남을 위해서도 r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존중해 주십니다. 요셉의 수고로부터 이득을 얻은 것은 요셉이 아니라 보디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열심히 일했고 그것이 올바른 일이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사장이 되면 열심히 일하겠다든가, 목사가 되면 더 말씀을 전파하겠다든가, 아니면 자기가 책임자가 되면 더 많이 일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둘째, 그는 자신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형통했습니다. 따라서 나쁜 환경은 실패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4:11-12).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패를 여건 탓으로 돌립니다. 우리 때는 에어컨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습니다. 땀방울이 노트 위에 떨어지기가 일수였지요. 그래도 아무 탈없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많은 똑똑한 학생들은 가난했고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신의 출신이나 환경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는 안전하게 지냈지만, 새 땅에서는 넘어졌습니다. 다윗도 동굴에 있는 때는 안전했으나, 궁궐에서는 넘어졌습니다. 엘리야는 전쟁 때에는 안전했지만 승리 후에 넘어졌습니다. 사울도 작은 자였을 때는 안전했으나, 왕이 된 후 넘어졌습니다.

 

 

919

요셉과 보디발4

 

그가 그의 주인의 집에 있더라.” 요셉의 환경을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기 위해 특별한 환경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거룩한 장소도, 종교 공동체도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일상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명백한, 하찮은 일들을 하면서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리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나 동시에 빌립보에도 있습니다( 1:1). 우리는 시저의 집에서도 여전히 성도입니다(4:22). 형통하는 종으로서 수고하는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1:3, 53:10).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와 접촉하는 불신자들에게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와 가정은 잃었지만 하나님은 잃지 않았습니다(3).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인 것이 아니고 요셉의 열심이 그 이집트 사람을 감동시켜 그를 높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뒤따릅니다(14: 23).

모든 것이 그의 손에 놓였으니 이는 그의 손이 부지런한 손이었기 때문입니다( 9:10, 3:22-23, 16:10).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초림하신 주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3:35).

요셉의 주인은 요셉을 매우 기뻐하였으며(4),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드님에 대해 증언 하시는 그것입니다(3:17 ).

 

 

9 20

요셉과 보디발5

 

5절은 세상적인 사람은 경견한 사람이 있으므로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교회의 휴거 이후 계시록 6-18장에 묘사된 이 세상의 상태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믿는 배우자로 하여금 가정에 남도록 명하고 계십니다(고전 7:12-16).

요셉의 임재는 보디발의 집에 복을 가져 왔습니다(5). 마찬가지로 모든 집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때 복을 누립니다.

보디발은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6). 우리도 이 정도로 신뢰받을 행동을 해야지요. 요한복음 3:3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으니

이 여인의 행동에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7). 이런 류의 여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세가지 교훈을 간단히 살펴 봅시다. 첫째, 선한 남자는 드뭅니다. 많은 여자들이 그런 남자를 찾고자 합니다. 그는 잘 생겼으며(6)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눈을 고정했습니다(7). 이런 것이 인생입니다. 둘째, 선한 남자는 드뭅니다. 사탄은 이들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셋째, 좋은 평판이 있는 남자는 자기 아내가 아닌 여자와 홀로 있는 상황은 절대적으로 피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선의라 하더라도 오해는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순간에 명예도, 명성도 부당하게망가집니다.

 

 

9 21

요셉과 보디발6: 시험, 유혹을 거부하며

 

요셉은 유혹을 받았습니다(7). 이것은 요셉이 죄를 짖고자 한 것이 아니고 죄를 지을 기회가 그의 앞에 놓여졌다는 뜻입니다( 1:12-17). 예수님도 우리와 똑 같이 모든 점에서( 4:15)시험을 받으셨습니다(4, 4).

그가 거절하며(8). 예수님께서도 그리하셨습니다. 거절(refuse)이란 단어와 쓰레기라는 단어(refuse)는 철자가 같습니다. 이 특정한 죄를 거부해야만 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22:14, 2:12-19, 5:3-8, 6:23-29, 7:1-27, 살전 4:3-5, 딤후 2:22).

한창때의 외로운 청년이었던 요셉이 이 유혹에 넘어 갔더라도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내와 눕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9). 요셉은 이것을 큰 사악함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는 보디발은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여호와께서는 지켜보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오직 주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오늘날 간음을 큰 사악한 짓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그녀의 유혹을 무시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남자들이 직장에서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충성이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는 함께 눕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10). 그는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많은 남자가 나이가 들었든 젊든 간에 조금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가 망가집니다. (데이트만 좀 하고 거기서 멈추면 되지 뭐…?) 실패가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입니다. 죄가 다가설 수 있는 상황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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