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10.17 09:38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44(10월 27일-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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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44

10월 27일-11월 2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1027

요셉의 형제들에게 압박이 가해짐 4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이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입증되었음) 19-25절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성령님의 예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l  형들은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청지기를 만납니다(19).

l  그는 그들의 마음에 화평을 전합니다(23).

l  비록 그들이 주님과 확실한 관계가 아니긴 해도 그는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제시합니다(23).

l  그는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24).

l  그는 그들에게 씻을 물을 줍니다(24).

l  이로써 그들은 요셉 앞에 설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l  이 모든 것이 요셉이 와서 그들을 대변하기 전에 이루어집니다(25).

l  그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인들을 생명의 빵 앞으로 인도하십니다(23, 25).

 

26-28절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37:7-9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요셉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실 겁니다. 모든 심적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도 요셉은 그의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바로 그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자기 형들이 자기까지 자기까지 무릎 꿇은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베냐민을 바라봅니다(29-30). 얼마나 오랜만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열한개의 별이 절을 한다고 한 꿈대로 사랑하는 베냐민도 이들 중에 한 명으로 와 있군요.

베냐민의 모습을 보니 요셉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묘사하면서 베냐민을 자기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요셉은 30절에도 나와있습니다( 4:14-16).

옛 이집트 사람들은 분명 인종들의 차이를 인정했습니다(32). 그렇다면 형들은 왜 요셉이 이집트인들과 같이 앉지 않았는지를 의아해 했을까요? 세상은 자주 성도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반면 성도들은 세상과 어울리려고 너무도 애를 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나이 순서대로 앉게 합니다(33). 이렇게 해서 그는 그들의 닫힌 눈을 조금씩 열어주려고 합니다.

다섯 배(34) 이는 형들을 시험코자 하는 또 다른 시도입니다. 요셉에게 했듯이 베냐민에게도 앙심을 품을까요?

음식(mess)”(34) 군대음식임.

하나님, 곧 전능자(God Almighty)라는 칭호는 흥미로운 호칭입니다. 이 칭호는 성경에 11번 나오는데 창세기에서 4번 나오며 늘 야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출애굽기 6:3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브라함과 아삭과 야곱에게 하나님 곧 전능자의 이름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첫 번째 이름은 조상들에게 관련되고 두 번째 이름은 민족에게 연관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또한 계시록에서 6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는 매번 말씀하는 분이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1028

복으로 가득 찬 자루 1

 

이번 장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축복이 될 일과 동시에 형들로 하여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게 해줄 몇 가지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과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참새를 먹이시고 백합도 입히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들에게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자들 중 대다수는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해 뭔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복은 거저입니다. 구입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선하심을 보고 그분을 거부한 그 큰 죄를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과 살아있는 관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창세기 40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자루를 채우라.”(1) 형들이 과거에 그에게 한 짓을 감안한다면 요셉은 형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둘 모든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나쁜 마음은 요셉의 착한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들 모두에게 양식은 물론 돈도 채워주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너그럽게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1) 요셉의 종들은 이들에게 제공된 양식이 풍성하다는 것을 눈치했을 겁니다. 아마 모두 불룩 튀어나온 자루를 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들의 성에 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은 충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며 이들은 충분히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질시합니다. 또한 충분히 소유하고 있는 자들도 충분히보다 더 많이 소유한 자들을 시기심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유한 자들을 또 시기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주신 분께 감사하는 사람은 실로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땅을 바라보고 음식을 쳐다볼 뿐 얼굴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모든 선하고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자루에 있는 돈(1) 형들은 요셉이 그들의 죄의 결과로 겪은 모든 것에 대해 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수년간의 노예생활, 투옥, 마음의 고통, 멸시를 당함, 아버지로부터 떨어짐, 보디발의 아내에게 거짓으로 고소당함 등에 대해 얼마를 보상해주어야 할까요!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갚을 수 없을 겁니다. 요셉은 그가 준 선물을 돈으로 사려는 형들의 시도를 막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인간들이 그분께서 거저 주시는 생명의 선물에 값을 치르려는 어리석음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은잔(2) 그들의 자루에 은이 들어갑니다. 은은 구속의 예표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출애굽기에서 배울 것입니다.) 이들은 은을 받았으나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벧전 1:18).

이른 말대로(2) 우리의 복과 우리의 고난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추고 우리의 혼에 진리를 제시하고자 계획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내니라.”(3) 그들은 변화되지 않은 채 집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이득에 대해 기뻐했을 겁니다. 그들은 어째서 그토록 호의를 입게 되었는지 잠깐 의아해했을지 모르지만 곧 그런 생각은 사라져 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준 음식과 요셉이 준 돈과 요셉이 준 금잔을 가지고 떠났으나 요셉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자기 청지기에게 이르니그 사람들을 따라가서따라 잡으라.”(4) 그들은 얼마 못 가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역시 회개치 않은 자들을 따라가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29

복으로 가득 찬 자루 2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청지기가 전달한 요셉의 말입니다(6). 그러자 형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무죄를 주장합니다(7-8). 비록 이들이 많은 죄를 지었으나 이번 경우는 무죄라고 언뜻 생각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요셉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과연 은잔으로 점을 쳤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 외에 다른 방법으로 미래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요셉이 형제들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의 목숨을 빼앗았고 가족관계를 끊어버렸고 고향을 버리게 만들었으니 선을 악으로 갚은 것이 맞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심은 것을 거두기 시작할 때 과거에 심은 것 대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거세서 그 이유를 찾곤 하지요. 그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당황합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시는가?” “도대체 내가 무엇을 했길래 그러시는가?” 하면서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한 일을 되돌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이 하나님의 규범을 거부했던 바로 그 첫째 날의 일에 대해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 도둑질을 하리이까?”(8) 오 우리는 그런 짓을 안 했습니다. 우린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 그의 옷을 훔쳤었지요. 그의 청춘도 도둑질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도 그에게서 빼앗았으며 아버지의 기쁨도 앗아갔습니다. 심지어는 히위 족속의 생명도 빼앗았습니다. 그들은 분명코 도둑이 맞습니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에게서 죄를 지적 받으면 즉시로 큰 죄를 떠올리며 자신은 살인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응수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죄로 자신을 정죄한다며 화를 내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한 사람이 자기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옆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런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죄인들이여,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1030

복으로 가득 찬 자루 3

 

형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붙잡혀 요셉의 물건을 도둑질했다고 추궁당하자 그들은 모든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들과 똑같이 답변합니다. 그들은 단호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맹세합니다(9). 자신들이 유죄인 것을 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맹세입니다. 이에 그 청지기는 10절에서 그 합의문을 수정합니다. 그는 그들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낮추고 있습니다.

그 청지기가 자신들의 나이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11-12)? 처음 몇 개의 자루를 검사할 때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계속해서 가장 나이 많은 자에서부터 가장 어린 자에게까지 검사가 이루어졌을 때 이집트에서 식사할 때처럼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요한복음 8:9에서도 이 방식이 적용됩니다.

그들이 자기 옷을 찢고돌아 오니라.”(13) 드디어 반전의 날이 왔습니다. 형들은 베냐민을 비난하거나 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지겠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동생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깊은 슬픔의 표현이며, 살을 베고 마음을 열어 보이는 행위입니다. 이 슬픔은 회개의 시작입니다(고후 7:9-10).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는 그들이 진정으로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붙잡힌 것을 염려하기도 했고 혹시 있을 결과에 마음 졸이기도 했으나 잘못했다고 생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갑니다. 그 통치자를 만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겪어야 할 회개인 것입니다. 청지기에게 붙잡혀 자신의 죄책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돌이켜 왕좌 앞으로 가서 그들의 사정을 아뢰어야만 합니다.

 

 

1031

복으로 가득 찬 자루 4

 

우리는 창세기 44:14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하신 그 약속이 다시 성취되고 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미워하고 부인했던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시련 동안 그를 버티게 해준 그 약속이 다시 한번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매드디어 모두가 요셉 앞에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있군요. 15절에서 요셉은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도록 꾸짖으며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함을 선언합니다.

유다의 질문들은 실로 놀랍습니다.

1.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리이까?” 이 답변은 요셉의 두 질문에 대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신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어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이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순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없으면 그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왜 그런 어려움에 처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2. 무어라고 하리이까?” 고백해야 합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사고해야 하나요? 맹세나 약속을 행 되는 건지요?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죄인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지 혹은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입니다. 중생을 얻고자 무슨 공식을 고배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주님의 발 밑에 엎드린 죄인은 질서 있는 기도를 암송하려 하지 않습니다.

3. 혹은 어떻게 우리를 해명하리이까?” 놀라운 고백이군요. 유다, 그대는 요셉 앞에서 해명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어떻게 돌이킬 수 있단 말입니까? 잘못을 바로 잡고 범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분만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은 결코 자신의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111

창세기 44장 묵상

 

유다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불법을 찾아내셨다고 고백합니다(16, 20:42-43, 5:15도 보세요).

무죄한 자에게 선언이 내려집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죄를 직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17).

동생을 위한 유다의 중보는 위대합니다(18-34). 성경에서 이보다 더 고귀한 인간의 행동은 없습니다. 유다의 행위는 유다 지파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게 해 줍니다( 33:7, 49:10, 78:67-68). 이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유다는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7:14, 5:5, 8:34).

유다는 요셉을 파는데 주모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의 마음이 변화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로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드디어 유다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마음에 변화가 왔습니다. 어린 요셉의 울부짖는 모습이 오랫동안 그를 쫒아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드리우던 슬픔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자기 죄가 자시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부터 숨겨지지 않은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어쩌면 여러 번에 걸쳐 그 죽은 자에게 보상할 기회를 얻고자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드디어 오랜 세월이 지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여 드디어 회개의 열매를 맺을 기회가 유다에게도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한 때 팔아 넘겼던 그 동생 앞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스스로 종이 되고자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대신해 목숨을 내 놓으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도 더 큰 슬픔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명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사람이 변화될 때까지 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감사를 드립니다.

 

 

112

회개 이후

 

창세기 45장에서 우리는 요셉이 형들을 다루는 그 일년의 과정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번 장은 아름답고 감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세기 45:37-46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문학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번 장은 그 깊은 감동을 제대로 맛보려면 한번에 다 읽어야만 합니다.

요셉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 이야기는 절정에 달합니다(1-2). 물러난 모든 사람은 이집트인들이었습니다. 형들만 남아있게 되었지요. 드디어 그는 자신을 알립니다. 그는 크게 울고 나서(2) 아버지 소식을 묻습니다(3). 이에 형들은 당연히 두려워합니다. 그가 그들을 가까이 부를 때 우리는 실로 사랑으로 그의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에게 잘못한 자를 진정으로 용서하며 결코 주님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는 그런 사람의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요셉은 두 가지 너무도 멋진 선언을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이다(5). 요셉은 모든 실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노예로 한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시려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2. 나를 여기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8) 요셉은 자신이 처한 모든 여건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셨음을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돌리면서도 그분께 쓴 뿌리를 갖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격랑보다도 깊은 격랑을 겪었지만 요셉은 자신을 그처럼 해친 형들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잃지 않았고 그런 어려움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결코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어려움이 크고 깊고가 아니라 우리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 대신 그 여건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그분의 뜻 안에서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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