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01.26 17:51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5(1월 29일-2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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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5

1 29일-2월 4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1 29일

예수님과 아벨의 비교

 

아벨과 예수님에게 동시에 해당되는 14가지 사실을 상고해 보십시다. 창세기 4장을 잘 읽고 아래 주어진 관련 구절을 확인해 보세요.

1.     두 사람 다 목동이었습니다( 10:1-10).

2.     그들의 헌물이 드려진 것은 목동의 자격으로서였습니다( 10:11).

3.     적대감을 야기시킬 그 어떤 짓도 안 했는데도 형제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15:25).

4.     그 이유는 시기였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27:18).

5.     자연적인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고( 2:23) 친족의 손에 폭력적으로 죽었습니다( 2:36).

6.     이들을 죽인 자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12:9).

7.     이 헌물은 하나님께서 바쳐졌습니다( 11:4, 5:2).

8.     그 헌물은 어린양이었습니다(벧전 1:19).

9.     그 희생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었습니다( 10:7-9).

10.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희생물을 뛰어나다고 하셨습니다( 11:4, 5:2).

11.  하나님께서는 이 헌물을 받으셨습니다( 10:12).

12. 이로써 아벨과 예수님께서는 의롭다는 증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으셨습니다( 23:47).

13. 두 경우 모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 헌물을 받으셨음을 공개적으로 살인자들에게 증언 하셨습니다( 2:32).

14.  아벨과 예수님의 헌물은 둘 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12:24).

 

가인은 자기형제를 지키는 것이 자기의무라고 생각지도 않았고 아벨을 죽이는 것이 자기의무를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1 30일

가인과 아벨의 헌물

 

아벨의 헌물은 믿음에 의해 드려졌습니다( 11:4).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옵니다( 10:1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받으실 만한 헌물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인과 아벨에게 직접 계시하셨을 수도 있고(가능성이 낮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모님을 동산에서 가죽으로 옷 입혀 주신 것을 아버지로부터 전해 듣고(가능성이 많음) 주님께서 무엇을 헌물로 요구하시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에 대해 다음 사실을 이해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둘 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2.     둘 다 하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3.     둘 다 하나님께 희생물을 바쳤습니다.

한 마디로, 두 사람 모두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을 보여주는 장(3)에 뒤이어 그 타락의 첫째 결과가 나타납니다(4). 가인은 술꾼도, 마약 중독자도, 간음하는 사람도, 도둑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와 자기 의로 가득 찼을 뿐입니다. 이로써 가인은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의 조상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땅 위에 태어난 첫 두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변치 않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1.     진지함도, 신앙도, 경배도, 희생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지 않는 다면 다 헛됩니다.

2.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거부하실 수도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존중하지 않으신다는 말의 의미는 그 누구든 올바른 헌물을 가져오면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 누구든 잘못된 헌물을 가져오면 거부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떻게 다가오든 상관없이 누구든 동일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4.     주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어린양의 흘려진 피를 통하는 것입니다.

 

 

1 31일

회개

 

가인이 자기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 4:8)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 가인이 보여준 반응은 뒤이어 태어난 모든 불신자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패턴이 되었습니다.

1.     가인은 자신의 길을 바꾸어 다시 하나님의 길로 나아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의 말씀보다 자신의 종교를 택했습니다.

3.     가인은 자신의 길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대신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4.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버림받은 상태를 상기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거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마음을 살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명령에 의해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길을 택할 수 있었으나 죄가 그의 마음의 문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죄를 넘어가서 자시의 길을 여시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먼저 회개하고(그 장애물인 죄를 제거하고) 주님을 들어 오시도록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7절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지적하시면서 어떻게 하면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는지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지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속죄와 무조건적인 정죄의 교리는 창세기 4장에서 이미 무너져 버립니다.

 

 

2 1일

자아를 낮추기

 

우리는 성경의 첫 부분에서 어떻게 교만이 인간을 정죄하고, 어떻게 회개가 필수적인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이 처한 상태를 확인해 보면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잔인함, 교만, 자기의지, 주님의 권위를 거부함 등은 점차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며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닙니다. 이런 증상은 타락한 부부의 첫 태생에게서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아벨에게는 양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자기 동생이 올바른 길을 택했음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어 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었습니다. 이처럼 간단한 일인데 어째서 이 간단한 구원의 길을 놔두고 혼을 잃어버리려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교만하고 거만한 영인 것입니다. 인간이 지옥의 불 가운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거짓말과 같은 죄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에게 저지른 그런 죄들에 대한 용서의 길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전도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이것이 신약성경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길은 너무도, 너무도 간단합니다. 하지만 자기 의로 가득 찬 죄인이 다른 사람의 증언(53:1)과 구원자의 완성하신 사역()을 믿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잃어버린바 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잃어버린바 된 자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자주 조롱하고, 해코지하고, 놀려 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루고 난 후 직장이나, 예배당, 혹은 다는 곳에서 그 구원받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나야 하는바 비로소 그 믿는 자가 회개하는 그 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물론 이 좋은 길을 찾는 자는 매우 드뭅니다. 대다수는 가인의 길을 걷다가 지옥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들어 올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2 2일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 ( 4:8)

 

아벨의 살해 사건은 향후 인류역사에 걸쳐 주님의 증인들이 당하게 될 박해의 본을 보여줍니다. 사탄은 살인자로, 신약성경은 그의 자녀들 역시 그와 같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 하고 있습니다(8:44, 요일 3:12, 10:36).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으킨 전쟁들 때문에 종교를 비난하거든 논쟁하지 마시고 그들의 말에 동의 하십시오. 수세기에 걸쳐 로마 천주교가 저지른 피 비린내 나는 학살을 누가 부인 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교회의 신실한 자녀들이 저지른 십자군 전쟁, 숙청, 대량학살 등을 통해 수많은 조상들을 수 천년 동안 잃어온 유대인들이 그 교회를 경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의 편에서 싸운다고 하는 파당들이 유럽대륙의 영적인 파산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킴으로 인해 전 대륙이 대학살을 겪은 사실을 누가 부인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개신교와 천주교 그리고 기독교와 회교와의 전쟁들로 역사책이 꽉 차 있다는 현실 앞에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한 일입니까?

그들이 뭐라 하거든 동의 하십시오. 종교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 동조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창세기 4장을 보여 주면서 그 모든 악행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위대한 아벨이시요, 선한 목자이시며, 베드로에게 칼을 치우라고 말씀하신 평화의 통치자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이분은 온 세상의 죄들의 값을 치르고자 십자가로 가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으신 분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2 3일

가인이 한 도시를 세우고( 4:17)

 

창세기 4장은 어쩌면 창세기 1장보다도 더 다윈주의(진화론)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논리를 전개해 가기 위해 다윈의 종교를 믿고 있는 자들이 옳으며, 창세기 1장의 날들이 알 수 없는 긴 시대라고 가정하고 또한 이 모든 시대의 말미에 드디어 인간이(남자와 여자가) 기적적으로 등장했다고 칩시다. 셀 수 없이 긴 영겁의 시대의 끝 무렵에 남성이라는 존재가 등장했던 그 순간 여성도 같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1,000,345,882년 동안 인간이 없다가 첫 번째 침팬지가 저녁 뭐 먹을까?” 라고 말한 지 두 달 만에 두 번째 침팬지가 내가 금방 차릴께요.” 라고 했다니 참으로 편리한 상상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사상에 동조한다면 당신은 저보다 믿음이 훨씬 좋은 사람입니다. “원숭이-사람사람-원숭이가 되었다가 사람-사람이 되려면 더 많은 긴 세월이 필요합니다. 네안데르탈 크로마뇽인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벽화를 그리고, 불을 발견하고, 바퀴를 발명하고 철기와 궁극적으로 농구까지 배우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까요?

어떤 박물관 안내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뼈들은 60 4년 된 것들입니다.” 그러자 관광객 중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아세요?” 라고 묻자, “, 그건 말입니다 부인, 제가 이 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4년 전에는 이 뼈들이 60억 년 된 것이었으니까요.” 라고 답했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에 보니 동굴도 없고, 진흙집도 없고, 유목민도 없습니다. 도시를 세웠다고 합니다. 토착 원주민들이 뼈들을 목에 걸고 불 주위를 돌며 노래한다고 아니하고 오히려 하프와 오르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독특하게 생긴 큰 돌로 뭔가를 갈거나, 찍거나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가죽 조각을 댄 막대기에 돌을 묶어 괭이를 만들려면 10억 년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는 이런 기록대신 놋과 철을 다루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따르면 이 모든 일들이 아담과 그의 자녀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성경은 물론 동굴에 살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만 이들은 항상 문명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도망자들이 남긴 것들은 아마도 자연에 노출되었던 다른 물건들보다는 더 오래 남아있었겠지요. (예를 들면, 암석 벽화, 질그릇 조각, 그리고 기타 현대인들이 그렇게도 관심을 보이는 쓸데없는 물건들 말입니다.)

롯과 다윗과 엘리야는 모두 동굴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대환란 때 믿는 남은 자들 또한 바위 굴 속에 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처음 시작은 강하고, 빠르고, 매우 지적으로 우월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조심스럽게 읽지 않는다면 혹시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몇 가지 점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저를 늘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니라 오늘날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작자들과 도둑들(잭슨, 샤프론 등등)이 함족(주로 아프리카 흑인)에 조금이라도 모욕이 될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도 연방학교의 교과서와 내셔날 지오그래픽 선전물에 너무도 탁월하게 전개되어 있는 진화모델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을 안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자료에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원숭이인 자가 흑인의 용모를 갖춘 채 등장하고 있는데, 이 자는 결국 진화해서 백인 풍모를 지닌 현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함의 후손들)에게 이 어찌 끔찍하고 분노가 치밀게 하는 모욕이 아닌지요? 저는 이런 사실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흑인이라면 저는 택시 잡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흑인을 안 태우려는 택시 운전사들 때문에) 그 따위 잘못된 진화모델에 대해 더 크게 외쳐 항의할 것입니다.

 

 

2 4일

가인이 주 앞을 떠나 나가서 에덴의 동쪽에

있는 놋 땅에 거하더라.( 4:16)

 

이 순간부터 우리는 두 노선을 따라 인류가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 추적해야 합니다. 즉 가인의 길과 셋의 길이 그것입니다. 이 두 노선은, 우선 가족 안에서, 그리고 뒤이어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됩니다.

창세기의 새로운 부분이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비록 앞선 역사는 뒤따르는 역사와 무관하지는 않으나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16-24 가인의 노선

창세기 4:25-5:32 셋의 노선

창세기 6:1-8 홍수의 물 아래 두 노선이 끝나버림.

 

창세기 2:4-4:24까지의 내용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l      우리의 최초의 부모님들의 죄.

l      이들이 낙원에서 추방당함.

l      아벨이 살해당함.

l      가인의 후손이 라맥까지 이르러 뻐기면서 통제 받지 않는 폭력이 절정에 달함.

 

이 부분이 끝나는 시점에서 암울한 분위기 속으로 한줄기 빛이 비추고 있는바 다름아닌 다음 부분인 6:1-8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셋은 가인이 살해한 아벨을 대신했으며 이로써 살해당한 아벨과 함께 경건의 자취가 사라져 버리는 대신 에녹의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패턴은 향후 성경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한 종족이 멸망하나 그 가운데서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의 의로움으로 그 민족을 보존해 나가는 현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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