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06.17 02:54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6(6월 23일-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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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6

6월 23일-29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6 23

창세기 26:18에 관하여

 

다시 팠으니 이삭의 믿음과 끈기를 주목하십시오. 그는 원수들이 막아버린 생명의 물의 근원을 다시 열고자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리 또한 자주 이와 같은 결단과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교회생활과 가정생활 및 개인 생활에 있어 생명수가 흐르다가 이생의 염려와 육신의 간섭으로 인해 막혀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삭처럼 생명수의 강이 솟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21:25을 볼 것) 이 구절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 파괴적 비평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동일한 우물들을 팠고 똑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창세기 20장과 26장은 두 가지 다른 전통으로 동일한 원문에서 출처했을 것이라는 이론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팠었던 것을 다시 파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바 이들의 주장은 성경의 진리를 불신하는 추론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사라지자, 원수들은 축복의 통로를 막아버릴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이들은 이런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법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바울이 전한 경고를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 20:29-30) 교회를 설립하신 목사가 이전하는 경우 그 교회는 쉽게 휘청거릴 수 있습니다. 경건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가정은 세상적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이룩된 것들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 앞선 세대의 사역을 더 확장하고 생명수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동일한 원수들과 동일한 부담 하에 노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우물들의 이름을 자기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은 그 우물들이 특별히 무엇인 체 하지 않았고 젊은 세대를 끌어들일만한 새로운 이름을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옛 길로 돌아갔고 옛 방식으로 걸었습니다. 그는 옛 이름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음 오히려 자기 아버지의 일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로써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역의 연속성을 확보했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승화하여 자신이 합법적 상속자임을 표명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음악이나, 새로운 역본들이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옛 것으로 여전히 충분합니다.

인류역사 6000년 동안 그 누구도 물을 개선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과학적 업적도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물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물을 말씀과 성령으로 묘사하고자 택하신 이유입니다. 물은 개선시킬 수가 없으며 개선된 적도 없습니다.

첫 복음과 동일한 복음이 동일하게 오늘날 역사합니다. 동일한 성령과 보혈이 그 어떤 죄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상담자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도, 적극적 사고방식도, 건기대회도, 새로운 교리도, 새로운 계시도, 새로운 휴거날짜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옛 우물을 파서 그 생명수가 솟아나도록 하면 됩니다. 목마른 사람은 여전히 물을 사랑합니다.

 

 

6 24

우물을 위해 투쟁함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26:19) 사전에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생명수를 발견하거나 퍼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물은 있지만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뭔가 해야 합니다.

기도와 많은 수고 가운데 오랫동안 준비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일은 일상생활을 예표하는 골짜기에서 이루어지며 영적으로 높은 산꼭대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솟아나는 곳은 바로 이곳 즉 골짜기입니다.

솟아나는 우물(26:19) 우물가에서 죄악 된 여인에게 누구든지 내가 줄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줄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 4:14)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이끌리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며(26:20) 원수들은 우물을 판 종들을 대적하지 않고 그 우물을 사용한 목자들을 대적했습니다. 목자들은 목사들에 해당됩니다. 주님께 속해있지 않은 목자들의 주인들은 생명수를 갖고 있는 자들로부터 그것을 취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고 합니다. 복음 사역의 역사에 있어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성경 및 찬송가 인쇄를 진리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세속 출판사들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한때 복음 방송이었던 것이 지금은 구원받지 못한 브로커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교단들은 기업이 되어버렸고 기독교 서점 역시 그러합니다. 대다수의 기독교 라디오나 TV도 역시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인쇄하는 출판업자가 동시에 외설 잡지사도 경영하고 있는 것은 슬프지만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음반업자 역시 사탄적 음악을 보급하는 동시에 복음성가도 보급합니다. 이제는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TV를 보면 짙은 화장을 한 여자 설교자가 창녀스타일의 가발을 쓰고 으쓱대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볼 수 있습니다. 긴 머리를 한 백인 남성이 흑인여자처럼 노래하려고 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일말의 상식이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끔찍한 모습에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설교자들 중 웬만한 사람은 출연기회를 얻고 싶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에 대해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에섹(20)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대적자들이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복음의 능력과 특권을 써먹으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또 다른 우물을 파고(21) 동일한 과정이 반복됩니다. 다시 한번 수고가 요구되었으며 동일한 쓰라린 결과가 도래하였습니다.

복음의 역사에 있어 이런 과정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사건은 콘스탄틴 대제 시절 복음의 대적들이 초대교회를 삼켜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 당시 교회는 완전히 부패해 버렸고 극소수의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professing)” 기독교만 남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새로운 우물을 팠고 롬 가톨릭 체제 속에서 기갈에 시달리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 샘물에서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동일한 대적들이 개혁교회들을 다시 체포해 부패시켜 버리게 됩니다. 이들 개신교는 가톨릭에서 도주하던 그 당시 그 모습 그대로 파산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독립침례교회들은 남침례교회가 세속화에 함몰되는 속에서 빠져 나왔으나 동일한 오류를 다시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파야 합니다. 청년들이여!

또 다른 우물을!

물은 여전히 좋습니다. 파내기만 하면 됩니다.

 

 

6 25

싯나

 

싯나(21) 이것은 증오를 의미합니다. 다툼은 늘어났고 쓴 뿌리는 배가 됩니다.

그가 거기서 옮겨가서(22) 이것은 이삭의 성공의 비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원수들이 빼앗아간 우물을 놓고 싸우지 않았고 자기 거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지난번에 빼앗겼던 그곳에다 다시 우물을 파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대적들로부터 분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저는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교회들에 속아서 만약 내가 이곳에 남아 있으면 뭔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거야.” 라는 근거 없고 헛된 소망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헛된 소망입니다. 일단 교회가 자유주의로 물들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교단이 일단 정치화되고 상업화되면 결코 회복되지 못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대단히 위대했으나 로마 교회가 개혁되리라는 그들의 오판도 대단히 위대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웨슬리보다 더 뛰어난 그 어떤 사람도 죽어버린 영국 교회를 그 어떤 부흥으로도 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열정과 성경과 신실함을 매일 주일 아침 사회 활동 동호회(social club)”로 가져간다고 해서 그 회중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 운동 경기와 파티가 도입되면 기도회와 거리설교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NIV가 일단 강대상으로 진입하면 벌거벗음(옷차림)과 부도덕을 질책하는 설교는 사라집니다. 그런 곳에 머물러 있는 결과는 그저 싯다- , 다툼과 쓴 뿌리일 뿐입니다.

친구여! 여러분의 시간과 돈을 무덤에다 던지지 마세요. 옛 우물이 원수의 손에 떨어지게 됐다면, 옮겨가십시오. 새 우물을 파는 사람들과 함께 하세요.

 

 

6 26

르호봇에서 용기를 얻음

 

르호봇은 방(자리)이라는 뜻입니다. 블레셋인들로부터 분리한 결과 야곱은 두 가지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1)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은즉( 26:22) 이제 이삭은 대적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주님을 섬기고 경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땅에서 우리가 다산하리라.(fruitful)” 이제 이삭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가 거기서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매(23) 그는 언약이 체결되었던 그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란 뜻으로 우리는 이삭이 분리된 삶이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자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고자 다짐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밤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24) 어쩌면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을 향해 언약에 따른 의무를 수행코자 마음먹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이르시되 주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그분이 약속이 기초하고 있는 근거에 관한 진술 (2) 격려 (3) 자신이 약속하시는 이유와 함께 격려하시는 세 가지 이유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여기서 우리는 이삭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근거를 보게 됩니다. 이삭이 복을 받는 이유는 다른 사람(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시대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믿는 자는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아버지께서 하신 약속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믿는 자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명령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율법 하에 놓인 자들이건 복음 하에 사는 자들이건 가네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현재의 악과 위험으로부터 아버지의 완전한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아버지께서 그를(믿는 자를) 이끄시어 오는 세상에서 받을 축복으로 데려가실 은혜를 베푸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증가하면 할수록 두려움은 줄어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이것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세 가지 이유 중 첫 번째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은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범위는 무한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의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모든 권능과 지혜가 우리에게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대적의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낼 수 있으며 영원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바 이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네게 복을 주어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그분의 임재를 동반합니다. 이는 미래를 위한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의 목적을 제공해 주는 약속인 것입니다.

네 씨를 번성하게 하리라.” 복과 번성은 너무도 밀착되어 있어 거의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시는 곳에는 늘 성장과 증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 종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삭이 복을 받는 것은 그 약속이 주어졌던 그 어떤 사람 때문이지 이삭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1:3).

 

 

6 27

네 가지 행동

 

창세기 26:25에서는 이삭이 취한 네 가지 행동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루신 그것으로부터 결코 시야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에로의 부르심이요(고전 11), 매일의 헌신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 마음 안에 거룩하게 구별해야만 하며(벧전 3:15), 우리의 몸을 산 희생물로 드려야 합니다( 12:1). 동시에 찬양의 희생을 계속 바쳐야 합니다( 13:15). 동일한 제단 위에 바칠 다른 희생들도 있는 바 예를 들면, 재정적 헌신이 그것입니다( 4:18). 이와 같은 희생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십니다( 13:16).

주의 이름을 부르며이삭은 주님의 이름이 보호해주실 것을 확신했고 또한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이삭은 자신의 의무를 그분께 행할 것을 보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섬길 것을 절대적으로 표명한 셈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해야 합니다.

거기에 장막을 치니 이 땅에서의 우리의 여정 동안 우리는 경배의 장소근처에 장막을 쳐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여기로부터 이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자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풍성한 삶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의 종들이 거기서 우물을 팠더라.” 생명의 물의 샘이 우리를 온전히 상쾌하게 하는 것은 주님과 교제 가운데 있을 때요,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겸손한 영을 지니고 있을 때입니다.

종들이 우물을 팠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주님의 백성과 함께 걷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지체들에 의해 섬김을 받고 용기를 얻고, 도움을 받고 지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들의 종이요, 우리 또한 그들의 종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주님의 몸 전체가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4:11-16).

 

 

6 28

조약1

 

우리는 창세기 26:26-33에서 아비멜렉과 이삭 사이에 우정의 조약이 체결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이그에게로 가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과 복이 이삭의 삶에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위대한 진술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오는 것은 거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서 살았더라면 어쩌면 그들이 우리에게 좀 더 자주 오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답변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벧전 3:15). 문제는 이런 일이 매우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랄에서 그는 상당한 거리를 여행했는데 이는 그가 매우 열심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자기 친구 중 하나인 아후삿과 이 또한 이삭의 경건한 삶을 더욱 입증해 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는 아비멜렉의 갈망이 실재로 매우 컸음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적어도 친구들 중 한 명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찾아왔으며 그분의 종과 언약을 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부흥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매우 바람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는 우리 주인께서 그리하셨듯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이 우리를 찾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경우 그 시대는 실로 대단한 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군대의 총대장 비골과 함께아비멜렉은 이 조약을 아주 성대하게 체결하고 싶었고 그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공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매우 심각한 일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자신의 측근 중 한 사람을 대동했습니다. 그는 작가 원하는 그것을 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므로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이것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책망에 가깝습니다. 이삭은 그들의 증오심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임을 암시하면서 그들이 어찌해서 오는지 그 이유를 묻는 중에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세상은 구원자이신 분을 먼저 미워했습니다( 15:18). 그와 같은 미움은 사악할 뿐 아니라 어리석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주님과 그분의 백성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갖게 될 최고의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내보내어 너희를 떠나게 하셨거늘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떠나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임재에 안달이 나며 가능하면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 하고 우리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임재는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니까요. 세상은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여 멀리 보내려 했고 주님의 가장 핵심적인 종인 사람을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그가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런 놈은 이 땅에서 없애 버리라. 그를 살려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하며( 22:22)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이비멜렉과 그의 일행은 과거에 그들이 이삭을 미워해서 내보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축복은 때로 이러한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권능 있고 평화로운 모습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블레셋인들은 이삭에 대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시며 이삭과 동행하시며 매일의 삶에서 돕고 계시고 지원하고 계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많은 경우 새로운 회심자의 가족과 친한 친구들은 그의 간증을 강력히 거부하며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서 그를 지켜보며 새로운 성도의 기쁨에 찬 안정된 모습과 그의 삶에서 지속되는 주님의 축복을 몇 년간 지켜보게 되는 경우 꽤 많은 사람들이 한때 멸시했던 그 성도를 찾아오게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6 29

조약2: 항의에 이르게 된 이유

 

맹세를 맺자블레셋인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하신 자가 분명한 사람과 대적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우리와 너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든 간에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확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복음에 대해 보여주는 것 같은 결단과 결심을 하였고 이로써 회심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언약을 맺자 마찬가지로 많은 이방인들이 죄들의 사함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흐리신 피로 맺은 하나님의 새 언약에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6:28).

너는 우리를 해치지 말라.” 이번 아비멜렉은 그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을 대할 때 하던 것과는 달리( 21:22-32를 볼 것) 그처럼 관대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요구사항을 보면 그가 영적인 축복을 받고 싶은 갈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내적인 두려움 때문에 이삭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해쳐서는 안 됩니다. 아비멜렉은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두 가지 이유로 기독교를 두려워합니다. 첫째,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만행에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은 민족들은 이들이 자기 교회를 기독교라 하니까 기독교를 두려워합니다. 둘째, 언론과 오락산업이 합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악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모습을 알리고자 한다면 개개인 그리스도인과 교회와 선교사들이 장기적으로 신실한 간증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의지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야 하고 그들과 십자가 사이에 놓여진(사탄에 의해) 장애물들을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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