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07.04 01:10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9(7월 14일-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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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9

7월 14일-20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7 14

서원( 28:20-21)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운 뒤 성경에서는 처음으로 서원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서원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빵과 입을 옷을 내게 주사 내가 평안히 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오게 하시면 주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28:20-21) 야곱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어떤 마음 상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조건(if)으로 보는 대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므로(since)” “그리고 나를 지켜 보실 것이고주실 것이고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므로”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드리겠나이다.” 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반면 다른 분들은 야곱은 이 서원에서 거의 장사치 같은 거래를 하려고 했다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지나치게 해석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해석 없이 그저 읽기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면은 야곱이 회심하는 순간이기에 은혜의 삶의 첫 단추를 끼우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아직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까지는 아니고 영적인 수준 역시 초보단계임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15) 라고 하셨지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수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나이니라(It is I).” 라고 하셨을 때 만약 주시거든(If it be than)” 라고 답변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야곱이 자신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떤 마음으로 했던 간에이와 같은 결의를 다지면서 하나님은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다짐한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야곱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려는 분들께서는 야곱이 하나님께 드린 약속과 십 분의 일을 바치겠노라는 서원만이라도 따라 하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국내와 해외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는 얻게 될는지요!

 

 

7 15

들에 있는 우물

 

창세기를 비롯해 성경 그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우물은 주님께서 구원을 제공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로 보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10개의 우물들은 중생과 그 결과를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염두에 두고 다음 사항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l  우물은 생명의 물의 원천을 의미합니다( 4:14).

l  물은 자주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7:38, 39).

l  그 안에 성령님께서 포함되어 있는 그 우물은 다름아닌 성경기록입니다( 6:63).

l  우물은 들판, 즉 세상에 있었으며( 13:38), 따라서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l  그 곁에 양떼 세 무리가 누워 있더라.” 이 모습은 이 세상에서 목마르고 지친 자들이 생명의 물 주위에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l  3이라는 숫자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셈, , 그리고 야벳의 자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l  사람들은 다양한 반면, 주님께서는 오직 한 우리( 10:16) 만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혀끝에 댈 물 한 방울도 없는 곳에서 영원을 보내게 돌 것입니다.

 

 

7 16

참된 사랑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섬겼으나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29:20) 모든 연애소설, 모든 연극 및 영화를 다 동원해도 이와 같은 위대한 사랑이야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로맨스를 이끌고 가는 첫 말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야곱이 라헬은 사랑하므로(29:18) 뒤따르는 그 다음 말들은 이를 확증해 줍니다.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리이다.”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오늘날 노래로, 책으로 사랑에 관해 얼마나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지요. 그러나 그 말을 뒷받침할 만한 행동이 없다면,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감정은 헛될 뿐입니다.

사랑은 감정이상의 것입니다. 사랑은 진정으로 자신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눈을 들어 그 아름다운 라헬을 보고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17). 그날 이후 그는 오직 그녀를 향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잔인한 주인 밑에서 7년 동안 일하는 수고가 그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 상급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던 동안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사랑이 또 나와 있는 바 그것은 다름아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미래의 신부에게 시선을 고정하신 채 완전하고 흔들림 없는 사랑을 그녀를 향해 품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구속하사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기 위해 견디지 못할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12:2)

많은 사람이 야곱에 관해 읽을 때 나도 누군가 나를 그처럼 사랑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실 그 누군가가 그리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7 17

창세기 29장 묵상

 

20: 실로 야곱은 7년을 며 칠처럼 느꼈습니다. 사실 리브가도 야곱에게 네 형의 격노가 풀릴 때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라고 하면서 라반에게로 야곱을 보낸바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7년이 몇 날 같았으나 리브가에게는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지요.

21-25: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인간이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런 비열한 속임수를 스스럼 없이 저지르는 가족이라니!

26-27: 이것은 어쩌면 자매들이 남편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라헬이 언니였더라면 아마도 둘은 벌써 결혼했을지도 모릅니다. 언니에 대한 이와 같은 배려는 야곱의 마음 깊이 박히게 되었을 겁니다.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이 장자권을 차지하고자 형을 속인 바로 그 사건을 상기시켜주었을 겁니다. 야곱은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셈입니다.

27: 그녀를 위해 이레를 채우라.” 이 말은 일주일 간의 신혼 여행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또 다른 7년을 라반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라반은 속임수를 써서 야곱으로 하여금 임금을 받지 못한 채 14년을 봉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레(week) 라는 단어가 날들(days)이 아닌 해들(years)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다니엘서 9:24-27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니엘서에서도 이례는 날들이 아닌 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역주) 이와 같은 원칙은 신명기 14:33, 34, 그리고 에스겔서 4:6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31: “미움(hated)”이란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우선시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사실 레아를 좋아했습니다(49:31). 다만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했을 뿐입니다(30). 이 표현은 신명기 21:15과 누가복음 14:26에도 나오는바 이 구절들 역시 마태복음 10:37과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진다고 하겠습니다.

 

 

7 18

열 두 아들 중 맏아들

 

레아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주께서 분명히 나의 고통을 보셨으므로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29:32)

야곱과 레아는 맏아들 르우벤의 출생을 큰 기쁨으로 맞이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르우벤(고통)이라고 지었는데 아마 나머지 세 아들의 이름도 그녀가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레위의 경우 그녀가 이름을 지었다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33).

레아가 자기가 낳은 아들들에게 이름을 주면서 내린 평들은 어원적인 깊은 의미까지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맏아들을 르우벤(고통)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녀가 주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셨다는 것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갈이 아이를 가졌을 때 천사가 그녀에게 주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느니라.” 라고 했고 이에 그녀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16:11, 13).  레아가 이 사건을 기억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그녀는 남편이 더욱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시므온(미움)이라고 지었는데 이때 그녀는 주께서 내가 미움 받는 것을 들으셨으므로라고 하면서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아들 레위는 그녀의 남편이 사랑 안에서 자기와 연합(레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점점 커져갔고 결국 넷째 아들 유다는 자신이 사랑 받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극대화 되도록 해 주었습니다. 아들을 넷이나 낳아주었는데 어찌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행복한 일로인해 주님께서는 마땅히 찬양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 받는 자 라헬의 이야기를 읽으며 복을 받는 만큼 레아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 이야기가 너무도 비극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이후로 살아온 수많은 여인네들처럼 그녀도 남편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소망으로 남편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입니다. 이외에는 그녀의 갈망을 만족시켜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7 19

창세기 30장 묵상

 

3: 내 하녀 빌하 라헬은 사라가 취했던 것과 동일한 조치를 취했습니다(16:1-3). 그녀가 내 무릎 위에 자식을 낳아 주리니 이 말은 빌하가 라헬을 대신해서 그녀를 위한 대변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라헬의 아이로 간주될 것입니다( 3:12을 보세요).

4-16: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창설하셨을 때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으로 지정 받았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왕들에게 그리고 신약성경에 있어서는 직분자들에게는 일부다처제에 대한 명확한 금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같은 상황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애정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여인들간에 경쟁과 질투와 다툼이 있었음을 볼 때 이와 같은 상황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자녀들은 어머니의 사랑 받는 자들이라기 보다는 야곱이 나를 가장 좋아한다라는 소리를 듣기 위한 경쟁 도구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혜로운 분이시기에 단 하나(몸 된 교회)의 신부만을 원하십니다.

14: 합환채는 땅바닥에 넓게 퍼져있는 식물로 보라색 꽃을 피우고 노란색의 토마토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뿌리는 한 쌍의 사람 다리 모양을 하고 있어 아마도 옛적에 다산을 촉진하는 식물 그리고 최음제로 명성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이상한 장면에서 이 식물이 왜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27: 주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체험으로 알았나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간증을 지닌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요? 우리가 근무하는 공장, 사무실 및 기타 일터에서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면 복음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요.

 

 

7 20

줄무늬 있고, 얼룩지고 그리고 점 있는 것들

 

가축 가운데서 얼룩지고 점 있는 것들(30:32) 영적인 의미에서는 이런 가축들은 죄에 오염된 자들을 예표하고 이로써 섬김이나 희생을 위해서는 적절치 못한 자들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늘 오직 네 불법을 인정하라”( 3:13)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온 세상을 통해 그런 자들을 찾아가시는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얼룩진 자나 점 있는 자나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선한 목자의 소유가 되기까지는 그들을 변화시킬 그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하는 것 자체가 실은 불가능합니다.

양들 가운데 갈색 가축 이것은 땅에 속한 자들의 땅의 색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늘에 속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을 향해 나아갑니다.

염소들 가운데서 얼룩지고 점 있는 것들 이는 죄로 물들고, 따라서 희생물로는 적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삶에 찌든, 그리고 죄로 물든 세상적인 자가 구원자의 깊은 사랑을 받아 그분의 것이 됩니다. 이는 그 분께서 겪으신 고통이라는 대가 덕분입니다.

이 후에 나의 의가 나를 위해 답변하리이다.” 가축은 야곱의 의를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목자의 양 무리들도 자신들의 목자의 의를 입증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분의 의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겁니다( 98:2).

외삼촌의 얼굴에서 내 품삯에 관하여 말하게 될 때에 이때 야곱은 자신이 권리를 갖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피 값을 치르고 사신바 된 자들만을 소유하고 계신 것으로 드러나실 것입니다.

얼룩지지 않는 것이나 점 없는 것은 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9:13). 조금이라도 흰 것이 있는 모든 것 라반과 야곱의 관점의 차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32). 그에게는 전부가 희지 않으면 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라반은 약간의 흰색을 지닌 양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세상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대부분의 죄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하얗지 아니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나?”라며 점잖게그래도 자신들에게는 약간의 흰 것이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나는 착하게 살았다구. 난 착한 사람이라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람 속에 있는 빛이 어두워지면(6:23) 오직 성령님께서 만이 인간의 마음속의 큰 어두움을 지적해 내실 수 있습니다.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8:8). 이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대로 자신들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자기 아들들의 손에 넘겨주고이것이 바로 세상과 마귀가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거짓 종교인들이나 공산주의자, 악한 책들과 언론 그리고 다른 여러 매력적인것들을 동원해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말씀의 사역자들, 지역교회의 형제자매들과 교제토록 하셔서 양육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10:28,29).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체들의 돌봄과 보호 하에 이들을 놓아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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