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제1장 율법과 은혜
(5)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이번 장에서 우리는 구약시대 구원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신중히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성경적 분석의 초점은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다. 더욱이 율법의 계명을 지킴으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결코 아니었다.
갈라디아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만이 인간의 마음속의 의도와 동기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 어떤 사람도 믿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규정된 요건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끊임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외에 이 기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표적에 맞추지 못한 결과로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그 어느 인간도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없다고 성경은 규정하고 있다.
이와는 대비로 에베소서
한 남성이 천 가지 율법 가운데 다섯 개를 지켰으면 그는 정죄를 받는다. 한 여성이 천 가지 율법 가운데 오백 개를 지켰으면 그 여자도 정죄를 받는다. 다른 한 남성이 천 가지 율법 가운데 987개를 지켰어도 그는 정죄를 받는다. 성경은 여러분이 율법 전체를 지키지 못하면 저주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 정죄로부터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키신 분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면 그분은 자신의 의를 여러분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율법은 당신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
히브리서
“…다시 아론의 계통에 따라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다른 제사장이 일어날 필요가 또 있었겠느냐?” 인간에게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전 제사장이 봉헌한 희생제물과 그들이 가르쳤던 진리가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사장 체계가 변하였은즉 율법도 변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 이 일들이 말하는 분은 다른 지파에 속하셨는데 그 지파에서는 아무도 제단에서 섬기는 일을 맡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따라서 구원은 명백히 율법을 통해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레위 족보에 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로부터 오셨다.
“이 지파에 대하여는 모세가 제사장 직분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고 멜기세덱의 모습을 따르는 다른 제사장이 일어나신 것을 보니 그 일이 더욱 분명하도다. 이분은 육신에 속한 명령의 율법에 따라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시고 무궁한 생명의 권능에 따라 되셨으니” 이 구절이 우리가 이제껏 배운 모든 내용들을 입증해주고 있다. 율법은 육신적 계명과 관련이 있다. 율법은 혼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육신을 지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차이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신적인 인간(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을 의미함)을 지배하는 계명이 한 편에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통한 영원한 생명이 존재한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분께서 증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시느니라.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으므로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레위계통, 율법 그리고 계명들은 육신의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모두 육신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 이것이 율법의 약점이며 이런 점에서 유익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THE WAY)이다. 예수님은 현재 혹은 잠시 동안만 존재하는 길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길이다. 예수님 전에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았다거나 교회 휴거 후에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성경이 율법에 관해 말하는 바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나” 이 구절은 과거시제로 되어있다. 또한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 결코 어떤 한 인간도 하나님의 수준에서 의롭게 혹은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더 좋은 소망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신다는 언약을 살펴보았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율법은 언약에 더하여졌으며 그것을 무효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약속의 땅이 아닌 혼에 대해서 논의함을 발견한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가 율법을 무효로 함을 발견하게 된다.
율법이 주어졌을 때에 유대인들은 언약 아래 있었다. 은혜가 주어진 시대에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이 점이 바로 이중의 축복인 것이다.
율법은 당신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
히브리서
율법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율법 아래서 드린 희생물들이 이것들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가르쳐 왔던 사람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앞 성경구절에 대해 반박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이 구절이 주장하는 요지를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구약시대 희생물들을 통해서 죄들을 제거하는 것은 현재, 과거는 물론 미래에서도 불가능하다.
희생물들이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있었다면 매년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희생물로 바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바친 희생물들이 인간 혼의 필요를 충족시켰다면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께 그분의 긍휼과 은혜를 부르짖으며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희생물이 죄를 제거할 것이라 믿고 동물을 바친 모든 인간들은 죄인으로 와서 죄인의 신분으로 떠났다. 주님을 경배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희생물을 바친 인간도 소망을 가지고 왔으나 소망이 없는 상태로 떠났다. 다른 어떤 결과도 발생하지 않았다.
율법은 인간을 죄로부터 의롭게 할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을 죄로부터 의롭게 할 수 없다. 의롭게 한다는 것은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어떤 한 사람을 의롭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저주는 하나님이 한 인간을 의롭다고 판단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의롭다고 판단하지 않으셨고 그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사도행전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이 가능하다는 점은 매우 명백하다. 율법에는 그 어떤 의로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성경구절의 문맥을 주의해야 한다.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16절) 그들의 역사를(17절) 말하였고 사울에서 다윗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23절)를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24절) 선포하였다. 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이 의롭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하나님만이 이렇게 명백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은 칭의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의로움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행
율법은 당신에게 공의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구원의 핵심적 교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제시되어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없었으므로 진리에 대한 이해의 폭이 제한되어 있었다. 사도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어려운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가 존재하는 현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구약의 전도서나 레위기 혹은 이사야서를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 조명해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면 구약시대나 혹은 신약시대에 있어서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로마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나니” 너무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분의 눈앞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율법을 지킴으로써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눈으로는 의롭다고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완벽할 수가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느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소유할 수 있으며 이때 율법의 역할은 아무 소용이 없다.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율법은 당신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율법은 인간의 죄된 상태를 보여주나 그 죄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다. 대언자들은 율법을 거스른 인간들을 향해 울부짖었으나 그들에게 율법이 아닌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도록 요청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주님의 영광은 그분의 계명의 순수함에 있다. 그분의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 이 구절은 성경을 2000년 동안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갈라디아서
율법은 당신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모든 계명들을 여러분이 읽는다면 삶의 방식, 사랑하는 법, 죽음, 임금, 전쟁, 평화를 지키는 법, 사업, 거래, 안전, 배수, 농업 등에 대한 엄청난 법규를 발견하게 된다. 몇 페이지 속에 이 세상에서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께서 올바로 인도해 주시는 방법을 계시해 주신 것을 보면 여러분은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모세의 율법을 읽으면서 “어떤 것을 행하면 모든 죄들이 용서받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계명을 찾거나 혹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고 언급한 계명을 찾고자 한다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계명들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인간이 한 가지 법규나 수천 가지의 법규를 지킴으로써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 곳이 없다.
율법은 삶을 지배하나 생명을 주지는 않는다.
율법은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히브리서
화려한 의상을 갖추고 있는 대제사장을 보자.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안수한 희생물을 바치고 있다. 그는 지성소에 일 년에 한번 들어간다. 사람들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다 그가 주님의 임재로부터 다시 나오면 환호한다. 햇빛에 반짝이는 대제사장 의복 위에 있는 보석을 바라보자. 정말 장관이 아닌가! 그러나 그날 밤 여러분이 깨어서 낮에 목격했던 모든 것을 생각해 보면, 그날 당신의 죄를 제거해준 그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율법 아래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가장 높은 장소에서 봉헌한 희생제물은 죄인의 마음에 평화를 나누어 주지 못한다.
왜 평화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상대평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갈3:10). 저주 아래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해야만 한다. 그 누구도 이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율법 아래서는 그 어떤 사람도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야고보서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용서와 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었거나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이런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한 성경구절이 있을 것이다.[1] 구약의 율법을 올바르게 살펴보지 못하면 죄를 위한 희생물을 통해서 대제사장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인간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죄 헌물을 통해서 특정한 죄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지하여 인간이 받게 되는 구원과는 다른 것이다.
죄 헌물에 대한 율법은 레위기
“죄 헌물의 수소에게 한 것 같이 그 수소에게 할지니 곧 이 소에게 그리할지니라. 제사장이 그들을 위하여 속죄할 터인즉 그들이(it) 용서받으리라.”(레
“그것의 모든 기름은 화평 헌물의 희생물의 기름같이 제단 위에서 태울지니 제사장이 그의 죄에 대해 그를 위하여 속죄할 터인즉 그가(it) 용서받으리라.”(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할 터인즉 그가(it) 용서받으리라.”(레
“…그가 범한 죄로 인하여 제사장이 속죄할 터인즉 그가(it) 용서받으리라.”(레
명백히 용서받은 것은 희생물이 제공된 한 구체적인 죄에 대한 것이다. 희생헌물을 드린 사람은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행위로부터 발생한 일시적 결과를 용서받기 위해서 헌물을 드린 것이다. 레위기 5: 10, 13, 16, 18,
레위기
죄 헌물이 봉헌된 레위기 4장과 5장에 나타난 모든 경우에서 그 사람은 죄를 무의식적으로 저질렀거나 혹은 그의 범법이 초기에는 인지되지 못했었다. 자기 자신이 죄를 깨닫고 자신이 유죄임을 알고 나서 희생제물이 요구되었다.
레위기 6장에서 남의 재산을 잘못 취한 사람의 경우 원래 주인에게 20%의 추가 부담금을 지불하고 그것을 되돌려 주도록 하고 있으며 자신의 희생제물을 제사장에게 바쳐야 했다. “제사장이 주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할 터인즉 그가 무슨 일에서 범법하였든지 다 용서받으리라.”(레
물론 죄 헌물로 용서 받지 못하는 죄의 경우도 매우 많은 것이 사실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로 죄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다면(히10:4), 이런 희생물들은 위에서 열거한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인간이 저지른 대부분의 죄에 대해서 속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희생 제물로 인해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는데 과연 죄 헌물로 규정된 속죄(atonement)와 용서(forgiveness)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민법(civil code)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주어졌으며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국가나 통치자 혹은 하나님 자신이 명령한 것들에 대해 범죄했을 경우 그에 대한 벌칙을 규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약 율법에서 용서받았을 경우에는 그는 심판으로부터 면죄를 받게 된다. 국가의 체계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죄가 무의식으로 저질러졌을 경우에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레위기
따라서 하나님은 한 인간이 그가 속한 사회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두셨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없다. 그 사람은 자신의 희생제물을 통해서 의롭다고 선포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교제가 회복되고 어떤 형벌도 그에게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용서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버려지지 않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이것은 모세가 민수기
의롭게 하다 혹은 이 단어의 동의어가 구약에서 23번 등장하고 있다. 이 단어는 죄인이 용서받았다고 그로 인해 의롭다고 선언됐다는 의미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신약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구약에서 규정한 희생제물이나 할례가 아닌 믿음으로(로마서 3장, 갈라디아서 3장)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의 회개와 믿음의 기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제공 할 수 있는 그 어떤 희생제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한 것이다. “주께서는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 헌물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구약시대에도 죄인에게 구원은 가능하였으나 그것은 율법의 역사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가능했다.
그럼 속죄일(Day of Atonement)에는 어떤가? 그날에 제사장은 “자기와 자기 집을 위하여 속죄하고자”(레
24절에서 아론은 그의 민족을 위해서 번제 헌물을 드렸다. 이것은 “번제 헌물로 숫양 한 마리를”(5절) 드린 것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죄 헌물의 기름을 제단 위에 태울 것이요.”(레
이런 희생 제물들과 피 뿌림으로 인한 속죄는 정결케함과 화해를 위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죄와 사악함이 그들과 그들이 경배하는 장소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사는 동안 그들 자신이 경배를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그들 혼들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축복을 위해서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이미 의롭게 된 거듭난 신자들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용서와 칭의를 다루는 수백 가지의 성경 구절들을 나열하는 것이 이번 공부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공부해 가면서 이 진리에 대해 아래 두 가지 점을 고려해 보도록 권고한다.
1.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경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죄들이 용서받았음을 의미한다.
2.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 할 수 있고 용서하도록 교회에서 종종 가르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특정한 죄에 대한 보복을 피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 이번 장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준 Richard Jackson 형제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2] 영어 King James Bible에서는 그의 죄를 의미하는 단어로 지시대명사 it 을 사용하였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