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2.09.12 00:52

세대주의 재고찰-제7장 지위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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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7장 지위와 상태

 

그리스도인의 이중성(옛사람과 새사람)은 또 다른 흥미로운 주제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지위와 상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지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법적으로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리의 상태는 우리가 행한 행위에 의해서 보여지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주 예수님의 의로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나(고전 1:30, 고후 5:21 ), 육신을 따라 살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6). 전자를 나의 지위라 하고 후자를 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 20장을 통해 그랄에서 아브라함의 실패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쪽 지방으로 이동하여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 거하며 그랄에 머물렀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녀는 내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가니라.”( 20:1-2) 이것은 오래된 죄의 한 예이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파라오에게 거짓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가셔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데려온 여인으로 인해 너는 죽은 자가 되었으니 그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이니라, 하시니라.”(3)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것은 간음이었다. 이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며 이것은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되는 죄인 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적 시각에서 혹은 많은 교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동을 통해 그 말씀에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비멜렉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민족도 죽이려 하시나이까? 그가 내게 이르기를, 그녀는 내 누이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또한 그녀도 스스로 이르기를,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순전한 마음과 무죄한 손으로 이 일을 행하였나이다, 하매(4-5)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방인에 대해 우리가 전에 배웠던 것을 상기해 보자. 그러나 아비멜렉의 상태는 온전했다. 그가 빛을 보았을 때 그것에 반응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올바른 행동을 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꿈에 그에게 이르시되, 참으로 네가 순전한 마음으로 이 일을 행한 줄을 내가 아노라. 나 역시 너를 막아 내게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이런 까닭에 네가 그녀에게 손대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노라.”(6)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속고 있는 경우에라도 죄를 짓지 못하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당신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구체적인 사실과 율법의 계명들을 알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스스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 앞에 순수한 모습으로 나온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 순수한 마음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습득한 성경 지식은 당신을 의로움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적은 지식일지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기본적인 성경지식을 가지고 마음을 순수하게 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한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에게 경고를 주시기 전에는 그 도시를 파멸시키지 않으셨다. 또한 노아의 시대에 있던 홍수 때에도 사전에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 아비멜렉은 잘못된 행동을 하려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먼저 경고를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대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기의 모든 종을 불러 그들의 귀에 이 모든 일을 말하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더라.”(7-8)

성경 지식이 전혀 없던 이 이방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얼마나 빨리 복종했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에 결코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행하였느냐? 내가 무슨 일로 네게 죄를 지었기에 네가 나와 내 왕국 위에 큰 죄를 가져왔느냐? 네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9) 믿음의 조상이고 모든 민족의 조상이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 사람은 한 이방인에게 책망 받고 있다.

요나는 거짓 신을 섬기는 뱃사람들에게 책망 받았다. 베드로도 불을 쬐고 있던 어린 소녀에게 책망 받았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나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당신과 같은 신자가 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경우에 직면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그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망 받는 것을 금지하고 계신다.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 일을 하였느냐? 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 까닭은 분명히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므로 내 아내로 인해 그들이 나를 죽일 줄로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이라.”(10-11) 여기서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아니라 보는 대로 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현명하게 행동했다. 이방인은 신실했고 선택 받은 사람은 거짓말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간교한 선택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알리바이를 만들었으나 이것이 자신의 범죄를 용인해 주지는 못했다.

또 그녀는 참으로 내 누이라. 그녀는 내 어머니의 딸은 아니나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내 아내가 되었노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가는 곳마다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은 매우 신중한 거짓말이었다) 이것이 당신이 내게 베풀 친절이라, 하였노라.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남종과 여종들을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또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며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보라,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기뻐하는 곳에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네 오라비에게 은 천 개를 주었은즉, 보라, 그가 너와 함께한 모든 사람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너를 위한 눈가리개가 되리라, 하였더라. 이같이 사라가 비난을 받았더라.”(12-16)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조롱했다. 그는 사라에게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간음과 거짓말에 대한 교훈뿐만 아니라 진리를 계시하고 의로운 사람을 보호하는 주님과 우리를 정죄케 하는 죄의 문제는 바로 지위와 상태의 문제이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그들이 자녀들을 낳게 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로 인하여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속히 닫으셨기 때문이더라.”(17-18) 이 구절 다음에 7절에 있는 다음 말을 붙여보자. 그는 대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머리를 흔들며 아비멜렉과 연합해야만 한다.

누가 그 죄인(아브라함)이 대언자였으며 그 고상한 사람이 어둠 속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 거짓말쟁이의 기도가 정직한 사람의 삶을 구하는 데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주위 깊게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아브라함의 상태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형편없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가족을 속여 자신이 간증해야 할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전가하려고 시도했다.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의 위치는 주님의 말씀의 믿음을 빚진 대언자이며 의를 전가 받은 족장이었다. 아브라함은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었고 그 도시에서 아비멜렉을 위해 중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1]

육신적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영광스러운 지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악용하여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옹호하는 데 이 진리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예와 가족과 직장에서 자신의 간증에 손상을 입히지 않을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사실이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것이다. 한 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사람의 지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하나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목적은 우리의 현재 위치를 그 지위에 맞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미래에 우리를 보시고자 하시는 수준까지 이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향하는 영원한 최종 목적지를 결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를 향하는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됨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롯의 엄청난 예를 생각해 보라. 베드로후서 2장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불렸고 동시에 의로운 혼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분류됐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좋은 예로서 제시되고 있다.

창세기 19장의 롯의 삶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면 이 유명한 구절은 단순히 기쁨을 주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우리가 베드로후서에 있는 성령님의 말씀을 통해 롯의 과거를 읽어보면 우리는 뒤로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천사가 소돔에 방문했을 때, 롯은 사악한 자들을 형제라 부르며 그들에게 자신의 딸을 취하도록 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얘기했으나 그의 사위들은 그를 농담하는 자로 여겼다. 그는 파멸의 시간이 다가오자 사악한 사람들과 어울렸던 그곳에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주의 천사가 롯의 손을 붙들고 도시 밖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곳에서 구원받은 후 롯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 술에 취하여 자신의 딸들과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롯을 의로운 혼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롯의 지위이다. 롯의 이웃들은 소돔의 사악함에 취해있던 한 인간으로 롯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롯의 상태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독자는 어떤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모든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동일하게 놓으면서도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는 삶을 우리는 선택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행동이 아내, 자녀들, 이웃과 후손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무시하는 삶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민수기 23장에 가서 고용된 예언자인 발람을 살펴보자. 그는 충분한 급여만 제공된다면 그 어떤 곳에서도 설교할 것이다. 세상적인 왕인 발락은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희생된 양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속되었다. 그들은 홍해의 기적적인 갈라짐을 통해 죽음의 장소로부터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생활에서 우상을 섬겼으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반역하였다. 이집트에서 나온 그들 가운데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림으로써 그 광야에서 죽었다. 그들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사악했다.

발람은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그 회중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매일 아침 이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주님이 보내주신 음식을 줍고 있었다. 매일 오후 그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 죄의 대가로 죽어간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 거짓 대언자는 아래에서 펼쳐지는 신기한 모습을 살펴보고 자신의 입을 열어 그 백성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그분의 말씀이 발람의 입에서 나오게 하였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안에서 잘못을 보지 아니하셨도다.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의 외치는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그의 힘이 유니콘의 힘과 같도다. 참으로 야곱을 대적할 요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대적할 점술이 없도다. 이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하여 말할진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이루셨느냐! 하리로다.”( 23:21-23)

놀랍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불의함과 타락함이 없는 민족이라고 하지 않으시는가?

이것은 지위에 대한 또 다른 좋은 예이다. 이스라엘의 지위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들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민족이며 주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다. 이 민족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복과 저주가 갈리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지위인 것이다. 동시에 죄는 어떤 민족이든 파멸시키며 그 죄로 인해 주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된다. 이것은 상태에 관한 것이다.

독자들은 구약을 통해 이 진리들을 보여주는 많은 사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 삼손, 엘리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 놀라운 지위에 오르게 되지만 동시에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도 보게 된다.

구약성경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타락하고 더러운 제사장과 다루기 힘든 민족을 상징한다. 스가랴 3:1-4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오 사탄아,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곧 예루살렘을 택하신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이것은 불 속에서 잡아챈 그슬린 나무 조각이 아니냐? (이것은 명백히 지위에 관한 것이다) 하시더라. 이제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그 천사 앞에 서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상태이다) 그분께서 자기 앞에 서 있던 자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그에게서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네 불법을 네게서 떠나게 하였으니 (과거시제) 이제 의복을 바꾸어 네게 입히리라, 하시기에

우리는 다시 그 죄악이 제거된 여호수아가 주님 앞에서 불 속에서 나온 한 나뭇가지로 서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탄은 더러움과 죄악에 속한 그를 보면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사탄을 책망하신다. 여호수아의 상태는 더러웠으나 그의 지위는 깨끗했다. 그의 상태는 사탄의 고소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벽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슬픈 소식을 보냈다. 데마는 현재의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우리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데마와 같은 길을 따라갔는가! 수많은 주님의 자녀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서 성령님의 인도함이 아닌 육신에 따라 살고 있다. 히브리서 13:5은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너희의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나의 상태는 주님께 복종하지 않고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상태는 나에게 큰 피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방황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5-6을 보자. 첫날부터 지금까지 너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하였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 나는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 있는 나의 지위는 결코 변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내가 하늘의 집으로 가는 순간까지 내 안에서 선한 일을 계속해서 행하실 것이다.

에베소서 4:29-3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부패한 대화는 결코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쓸 좋은 것만을 말하여 그것이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나의 상태는 심하게 변할 수 있다. 나의 입술을 통해서 주님을 찬양할 수도 있고 혹은 그 입술을 통해서 내 자신을 타락하게 할 수도 있다. 내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우고 은혜를 전달 할 수도 있고 남에게 해가 되는 증오의 말과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성령님에게 근심을 끼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30절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나의 상태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만 나의 지위는 이미 성령님께서 봉인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역할에 매번 실패할지 모르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임무에 있어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로마서 6장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 기록한 책이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6:2-6)

같은 로마서 6장에서 같은 독자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6:23) 이 구절은 종종 불신자들을 다루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는데 사실 그들은 로마서 6장의 수신자가 아니다. 이것은 육신을 따라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상태에 대한 경고이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 개인의 지위에 대한 위대한 구절이 이어서 나온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6:23) 여기서 하나님의 선물은 과거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표기되어 있다. 이 선물은 현재 시제로 영원하다.

에베소서 2:5-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위를 하늘의 영광 중에 있는 자신의 처소에 앉히셨다고 성경은 확실히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미래의 확실성은 요한일서 3:1-2에 제시되어 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지금 계시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거듭난 성도들이 기다리는 부활의 영광을 우리 모두가 명백히 볼 수 있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각 개인의 현재 상태이다. 이것은 매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바뀌고 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그분과 함께 하게 되며 그분처럼 될 것은 확실하다.

빌립보서 3:12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말하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가노라.”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구원받은 한 사람의 간증이다. 자신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 구절을 히브리서 10:10, 14에서 예수님의 피로 씻긴 사람들의 지위와 비교해 보자.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역설이다. 온전하지 못하지만 온전한 사람이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1:3-5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고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상속 유업을 받게 하셨나니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나의 상태는 가난하며 남겨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의 지위는 유업을 가지고 있다. 나의 상태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영원한 것을 소유하고 있다. 나의 상태는 생각과 행위가 타락해 있으나 나의 지위는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인해 정결하게 된다. 현재 이 모습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으나 그것은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되었느니라.”(벧전 1:5)

갈라디아서 2:20을 살펴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지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지위).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지위).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상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지위)의 믿음으로 사노라.” 나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 예수님의 믿음은 나의 마음과 생활 가운데서 구원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고린도후서 4:13-15을 살펴보자.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또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도 일으키사 너희와 함께 드러내 보이실 줄 우리가 아노라.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하여 있나니 이것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넘쳐 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라.”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에 도달해서 나를 찬양하라. 내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약속을 하셨기에 우리는 현재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 4:16) 이 구절을 통해 우리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를 확실히 볼 수 있다. 죄로 망가진 몸을 입은 채로 수년간을 헤매며 구원을 위해 주님께 다가간 한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은혜롭게 구원을 제공해 주신다. 육신은 계속해서 죽음의 문으로 향하고 있으나 혼은 영원한 생명을 제공받았다. 모든 사람이 죄가 육신을 통해 이룬 결과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행한 사역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로마서 8:31-35을 살펴보자.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무슨 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에 열거된 모든 것은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한 사람의 상태와 관련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육신에서 일어난다.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혼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의 혼은 결코 벌거벗게 되거나 칼로 찔리지 않는다. 밖에서 일어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영적 전쟁에서는 휴전이 없다) 주를 위해 죽임을(육신) 당하며 도살당할(육신적 죽음)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내적인 사람의 삶은 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다).”( 8:36-37) 핍박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은 정복자다. 그의 상태는 고문을 받고 있으나 그의 지위는 영광스럽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8:38-39) 육신에 영향을 주는 그 어떤 것도 혼을 파멸시키지 못한다.

갈라디아서 6:7-8은 경고이자 약속이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이 구절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성령을 쫓아 살 것인지? 내가 본성을 따라 살지 혹은 새로운 생명에 따라 살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런 선택의 문제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평생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육신적인 사람은 오로지 순간만을 생각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수확의 때를 미리 바라보고 결정한다.

마태복음 16:13-23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들어오사 자기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 곧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르되, 어떤 이들은 침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며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나 대언자들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이것은 베드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주님을 정확히 정의했다.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는 자신의 삶에서 이보다 더 나은 적이 없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예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꾸짖기 시작하여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 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돌이키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내게 실족거리니라.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는도다, 하시니라.” 같은 사람이 같은 날 행한 사건이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17)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23)

예수님은 그를 붙잡고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의 지위는 복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매우 참혹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진리로 충만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던 적이 수없이 많지 않았던가?

골로새서 1:12-13을 보자. 우리를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상속 유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원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상속유업을 받기에 합당한 신분으로 만드셨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나는 이미 주님의 왕국 안에 있다. 이것이 나의 지위이다.

동일한 대상에게 골로새서 3:8-10은 말씀하고 있다. 이제는(현재시제)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내버리라. 곧 분노와 진노와 악의와 신성모독과(그분은 이미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자녀에게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금하도록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라.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는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나니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 골로새서 1:12-13 3:8-10을 비교해 보면, 같은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성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우리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이런 대조는 로마서 6:6과 골로새서 3:5을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나의 지위에 관해서 나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그것들은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나의 상태에 관해서는 내 자신을 죽여야 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내 지체들을 죽여야만 한다. 이것은 엄청난 충돌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5:14을 보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이 진리를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내용을 덧붙이셨다.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빛이다. 이것이 우리의 지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빛을 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상태이다. 이 구절은 에베소서 5:8과 일치한다. 바울과 마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너희가 한 때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걸으라.”

동일한 진리를 데살로니가전서 5:5-6에서 볼 수 있다. 너희는 다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니라.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니 (우리의 지위에 대한 위대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자.” 나의 지위가 5절에 나타나 있지만 나의 실제 삶은 이 본질과 동일하게 살 수 있고 혹은 나의 지위와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 나는 빛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눈을 가리고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처럼 잠자러 갈 수 있다.

디모데후서 1:9과 빌립보서 2:12을 비교해 보자.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이라. 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주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이 구원을 우리는 일하여 드러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속사람을 통해서 이루신 결과를 보도록 해야 한다.

히브리서 10:10과 데살로니가전서 5:22-23을 비교해 보자.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이것은 위대한 소식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거룩히 구별되었고 이것은 영원히 지속한다. 이것이 우리의 지위이다. 악의 모든 모양을 삼가라.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성령님께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거룩히 보존되도록 기도해 주신다. 성도들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삶 속에서 이 거룩함이 필요하다.

빌립보서 3:15과 히브리서 6:1-2을 비교해 보자.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지위)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서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침례들에 관한 교리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니라.” 성령님께서는 완전한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완전함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만일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믿는 사람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위와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상태에 대해 성경이 모순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실적으로 여러분이 처한 이런 모순에 대한 진리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요한일서 2:6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자기가 그분 안에 거한다고 (지위)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은 것 같이 자기도 그렇게 걸어야 (상태) 할지니라.”

백성이 불평하니 주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니라.”( 11:1)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에 빠지매( 11:4)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빨 사이에 있어 그들이 씹기도 전에 주의 진노가 백성을 향해 타올라 주께서 매우 큰 재앙으로 백성을 치셨으므로( 11:33)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 12:1)

주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르며 그분께서 떠나시매 구름이 성막에서 떠나갔고, 보라,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같이 희게 되었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보니, 보라, 그녀가 나병에 걸렸더라.”( 12:9-10)

정탐꾼은 돌아가서 약속의 땅에 있던 큰 거인에 대해서 악한 보고를 했다. 이에 온 회중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그 밤에 울었더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14:1-2)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격노하게 하려 하느냐? 내가 역병으로 그들을 쳐서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하고…”( 14:10-12)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돌에 맞아 죽었다( 15).

고라는 반역을 일으켰고 하나님은 땅을 여시고 그들 모두는 지옥으로 삼켜졌다( 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대제사장 선택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다( 17).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다( 19).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며 말하되주께서 불 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으니라.”( 21:5-6)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인간의 역사인가!

발람이 비유를 지어 이르되, 모압 왕 발락이 나를 아람으로부터 동쪽 산지에서 데려와 말하기를, 와서 나를 위해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아니하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주께서 꾸짖지 아니하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리요? 내가 바위들 꼭대기에서 그를 보며 작은 산들에서 그를 바라보나니, 보라, 이 백성은 홀로 거할 것이요, 민족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지 아니하리로다.누가 능히 야곱의 티끌을 셀 수 있으며 이스라엘의 사분의 일을 셀 수 있으리요? 나는 의로운 자의 죽음으로 죽기를 원하며 나의 마지막이 그의 마지막과 같기를 바라는도다! 하매.”( 23:7-10)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발람은 다른 모략을 시도한다. 발람이 비유를 지어 이르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너 십볼의 아들이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보라, 축복하라는 명령을 내가 받았고 그분께서 복을 주셨은즉 내가 그것을 돌이킬 수 없도다.”( 23:18-21)

지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것이지 인간의 변덕스러운 행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안에서 잘못을 보지 아니하셨도다.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의 외치는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도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태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매우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이스라엘의 지위를 선포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우리의 혼은 주님의 의 안에서 안전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 안에서 이루신 것은 영원하고 그 어떤 다른 것도 이 복된 선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성령님의 권능 안에서 역사하는 성도들의 삶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그래서 성령님의 통제에 복종한 사람들의 육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실 수 있는가를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1] 지위와 상태의 문제는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하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지위가 나온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의 상태가 온전하고 사람의 관점에서 의롭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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