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08.30 07:19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7(9월 8일-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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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37

9월 8일-14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98

창세기 37장 묵상1

 

그에게 평안하게 말도 할 수 없었더라.”(37:4) 요셉의 형제들은 할 수 없었다라고 표현된 부분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죄인들의 도덕적 무력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평안하게 말을 하기 원치 않았다고 하지 않고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죄악 된 성품이 그들을 무력화시켰음을 보여줍니다( 8:8).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그리스도께 평안하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죄인들이 그에게 대적하는(모순된) 행동을 견뎌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났는데(37:15) 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누구를 예표하는지를 찾아보면 우리는 그가 단지 성령님만을 예표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주님 위에 강림하사 모든 지혜와 명철, 조언, 능력 및 지식을 제공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완전한 삶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11:2).

그가 들에서 헤메고 있으므로(37:15) 들은 세상입니다( 13:38).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목표 없이 이 세상에서 결코 방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의 방황을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강림과 더불어 침례를 받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까지의 그분의 오랜 인생기간과 어쩌면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내 형들(형제들, brethren)을 찾으오니(37:16) 맞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께서도 잃어버린바 된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19:10). 그분은 에덴에서도 아담을 찾으셨습니다(3:9). 오늘날도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복음을 통해 잃어버린바 된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분 자신이 인간이시므로 그분이 찾고 있는 자들 역시 그분의 형제들 즉 인간인 것입니다.

 

 

99

창세기 37장 묵상2

 

원하건데 어디인지 말해주소서.”(37:16)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성령님께 자신의 삶과 사역의 방향을 보여주시도록 요청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분을 갈보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여기에서 떠났느니라.”(37:17)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있으라고 말한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들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시고 나서 있으라고 놓아두신 그 명예로운 장소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가자.”(37:17)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죄에 빠졌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들의 뒤를 따라가그들을 만나니라.”(37:17) 이처럼 구원자께서도 잃어버린 자를 찾을 때까지 그들을 따라 다닙니다(15:4).

8-20절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제들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4:12-13). 그들은 요셉에게 손을 대기도 전에 이미 살인자들이었습니다(요일 3:15). 그들보다 앞섰던 가인처럼, 그리고 그 이후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사탄의 도구가 (스스로) 되고 말았습니다(요일 3:12, 8:44). 이 증오심과 사악함의 뿌리는 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자 형제들은 그를 축복하여 함께 기뻐하는 대신( 12:15)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자신들이 복 받는 것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복 받는 꼴을 못 볼 자들입니다.

이들 뿌루퉁하고 무뚝뚝한 비판자들은 우리 교회들에도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기쁨과 열정으로 충만한 형제들에게 비난을 해댑니다. 그들 외에는 그 누구도 행복한 꼴을 안 보려고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목사들을 좌절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키며 간증을 망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음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910

이스마엘의 무리

 

이들 상인들은 이스마엘인들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37:27, 39:1) 미디안 사람들이라고도 불립니다( 37:28, 36).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나은 아들이었으며( 16:11-12) 미디안은 그가 그두라( 25:2)를 통해 나은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들의 칭호가 교차되는 이유는 이 두 부족이 혼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를 통해 우리는 모든 미디아닌들은 이스마엘 사람이나 모든 이스마엘 사람이 다 미디안인은 아닌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들은 그들의 코에 단 고리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8:22-24). 이들 무리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다섯 가지 측면을 주목하십시오.

1.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이스마엘 사람들입니다(16:15). 이들은 존경할만한 종교적 혹은 소위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유산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밖에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약속의 자녀가 아닌 육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21:10).

 

2. 이들은 어디 출신인가?: 이들은 요단의 동쪽에 있는 길르앗 출신이니 잘못된 곳에서 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약속된 축복의 범위를 넘어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도 그 땅의 안식 안으로 들어가 그 풍성함에 참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3. 이들이 낙타를 몰고 다녔다는 사실: 낙타는 성경에서 이 세상의 부자를 의미합니다. 이들 무리는 불의한 맘몬과 더불어 사는 자들입니다. 낙타를 소유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소유를 악한 목적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코 잘못된 일입니다.

 

4. 이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향료와 유향과 몰약이었다는 사실: 이것들은 길르앗에서 생산되는 사치품들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소유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12:15).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엇을 거래하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5. 이들은 성경에서 항상 세상을 예표하고 있는 이집트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들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대적해 저지른 범죄에 동조한 자들로 어쩌면 요셉과 형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나 그들이 처해있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존경 받는 인물들 중에도 자주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그분의 말씀에 반대하는 일에 협조하는 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악한 자들이 악한 일들을 도모할라치면 늘 이스마엘 무리들이 나타나 이 사악한 행동을 돕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철장으로 다스리실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는 죄악 된 자들은 죄를 짖거나 죄에 동조할 기회가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이스마엘의 철자는 Ishmael이며 창세기에서는 이들의 후손을 이스마엘인들(Ishmeelites)라고 했으며 나중에는 Ishmaelites로 불렀습니다(영어 철자에 주목하세요.-역주).

 

 

911

채색옷

 

바닥에 놓여있는 옷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돼지 위에 왕의 옷이 놓여있는 모습은 경외감이 아닌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채색옷은 아버지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을 향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부모의 편애가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삶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 앞에 바로 이 채색옷, 즉 형들이 증오하던 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 형들은 우선 그 옷부터 벗겼습니다. 형들은 르우벤의 제안을 따라 요셉을 근처에 있는 구덩이에 내던졌습니다. “그 구덩이는 비어있고 그 속에는 물이 없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곳은 아마도 저수지였던 것 같습니다(24).

이 사건은 너무도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어 젊은 소년이 나이든 형들의 손에 잡혀 옷이 벗기고 빠져 나오지 못할 구덩이에 내던져졌다는 심각한 현실을 읽는 사람이 실감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울부짖음도 거부되었으나 후일 이들 형들의 귓가에 양심의 목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게 됩니다(42:21). 그들이 서로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에 관하여 참으로 죄를 지었도다. 그가 우리에게 간청할 때에 우리가 그의 혼의 고통을 보고도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는도다, 하매(42;21)

그들이 염소 새끼를 죽여 그 옷을 피로 적시고는(37:31) 그들은 염소 새끼의 피로 옷을 적시면 자신들의 죄를 가리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주님을 거부하며 죽이고 자신들의 성전 희생제사가 죄를 제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 다른 피가 죄를 속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해웅입니다. 1차세계대전 때 유명한 영국 교회의 감독 하나는 유럽은 다시 보배로운 피로 구속되고 있다고 발언한바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이라고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불경스러운 발언에 치를 떨 것입니다. 소위 기억해야 할 일요일로 알려진 11월의 그날에 대해서도 일부 복음주의 교회는 이런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미혹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은 병사는 하늘나라로 갈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전혀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고 방식은 기독교보다는 오히려 십자군이나 이슬람 냄새가 난다고 하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전혀 속죄의 효능이 없는 피로 죄를 가려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래로 여전히 많은 자들이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옷(37:31) 이것은 인간의 양심을 들여다 보게 해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들은 우리 동생의 옷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항상 죄책감을 최대한 죽이려는 그런 단어를 취합니다.

거짓 위에 거짓이 놓여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발견했으니(37:31)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옷 맞나요?” 라고 질문하고 있군요. 완전한 속임수 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누구의 옷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37:33 잠시 생각해 봅시다. 형들이 늘 아버지를 속여온 사실이 그들의 죄책감을 입증해 주는 명백한 증거인데도 야곱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처럼 충격적인 슬픔 앞에서 어떤 사람이 논리적으로 생각을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이 순간 야곱이라는 이름(본성에 따른 이름)을 사용하면서 이스라엘(영적인 사람의 이름)은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그는 무엇을 놓쳤을까요? 무엇이 단서입니까?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알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었다면 그의 죄로 물든 그 옷이 그들의 손에 들릴 수 있을까요? 짐승이 그를 갈기갈기 찢기 전에 옷을 벗겼을 까요? 요셉이 사자에게 옷을 벗을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을까요? 그에 대한 답변은 전혀 아니다.” 입니다. 이처럼 분명한 사실을 어째서 놓쳐 버렸을까요?

여러분, 오래 전 한 청년이(야곱이라고 불렸지요) 자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 속임수를 성공시키는데 무엇이 쓰였지요? 염소의 죽음이었습니다(27). 우리가 심은 것은 우리가 거두어 들인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9 12

시기(envy)

 

창세기 37장에서 기록된 모든 문제들은 그 뿌리가 다 시기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7:9에서 스데반의 입을 빌어 성령님께서 주해하신 겁니다.

인류역사 내내 인간의 본성을 특징지어 온 것은 죄입니다. 너는 초조해 하지 말며(envious)” 라고 시편기자는 충고합니다(37:1). “보고 부러워하였다(envious)”고 자신의 시험 받는 상황에서의 체험을 고백한 사람도 있습니다(73:3).

시기심 가운데 최고의 것은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향해 갖고 있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27:18). 그분의 인격을 향한 증오심과 그분의 기적에 대한 거부감 뒤에는 이 강력한 시기심이 놓여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대적하도록 유대인들을 몰고 간 것 역시 유대인 지도자들 마음속에 있던 시기심이었다고 성경은 알려 줍니다(13:45, 17:5).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해 신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듣습니다.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13:13)

시기와 탐심의 차이는, 시기란 사람을 향한 것이고, 탐심은 사물을 향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짜증을 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에 화를 냅니다. 시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빛(1:29)을 거부한 자들(3:23)의 특징이며 그 옛 사람의 영은 여전히 그 추한 머리를 들어올리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4:5).

요셉의 형제들이 보인 모든 모습들-, 악의, 음모, 잔인함, 냉담함, 속임수 등,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시기심입니다. 늘 그렇습니다(딤전 6:4, 5:21). 우리가 형제들에게 짖는 죄의 거의 대부분이 시기심에서 비롯됩니다. 시기심을 품게 되면 평강도, 안식도, 만족도 사라집니다. 시기는 뼈를 썩게 합니다.”(14:30) 또한 그 누구도 시기 앞에 설 수 없지요(27:4).  시기가 있는 곳에는, 거기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습니다.”( 3:16)

 

 

9 13

유다와 다말

 

그때에(38:1) 요셉이 배신을 당하며 팔려갔을 때를 말합니다. 동생에게 사악한 짓을 한 바로 그때에 유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사업에 열중합니다. 이점에서 보면 그는 실로 세상에 속한 사람이지요. 세상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나 그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양심은 뜨거운 인두로 지져져 있지요(딤전 4:2). 세상은 구원자께서 세상을 위해 죽으셨음을 전혀 무시한 채 자기 일에 몰두합니다.

이 이름은 이런 뜻이다라는 식의 주석에 대해 저는 별로 주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이름에 주어진 의미가 사람들 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이름 붙이기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머를 덧붙여 주고 싶군요. 유다는 악덕 상인(또는 소개업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한 가나한 여인과 결합하였습니다. 그는 라는 뜻을 갖고 있는 수아의 딸과 결혼합니다. 예수님의 예표인 요셉을 거부한 이후 그의 형제들(이스라엘 민족의 예표)은 예수님을 거부한 이래로 유대민족이 보여준 모습과 똑 같습니다.  즉 그들의 손에 무죄한 피를 묻힌 채로 장사를 하는 것 말입니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엘은 적대감을 뜻하고 오난은 사악함, 그리고 셀라는 을 뜻합니다. 첫 번째 아들은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이래 하나님의 의 관계에서 보이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는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며 세 번째는 어쩌면 미래에 있을 경건한 남은 자들에 대한 언급인지도 모릅니다.

엘의 죽음은(7)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죽이신 첫 번째 기록입니다. 이제까지의 창세기 기록을 고려해 보면 성경이 이 자의 범죄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끔찍한 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9 14

창세기 38장 묵상

 

38:8-10 이 구절들은 인간이 시도하는 산아제한 혹은 피임 수단 모두 하나님의 정죄의 대상이라고 가르칠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가르치는 바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그 어디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자가 쓴 <당신은 무엇에 대해 싸우고 계신가요?(What Are You Fighting about?)>에 나와 있습니다.

37:7,10 오난이 다말에 의해 자녀를 생산하지 않은 것으로 죽임을 당했으며 유다는 그 역시 다말에 대해 자녀를 생산하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엘의 죄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엘 역시 다말에게서 자녀를 생산치 못해서 죽은 것이 분명한 바 엘은 고모라에서 발견되는 그 죄(동성애)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추측해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8:14-15,19 이 구절들로 미루어 볼 때 베일을 모든 여인이 착용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여인이 자기를 위장하거나 가리기 위해 베일을 사용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리브가는 베일을 쓰고 있지 않다가 이삭의 눈으로부터 자신을 가리려고 (부끄러워 그랬겠지요) 베일을 썼습니다(24). 레이스로 된 수건을 머리에 두르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머리 덮개를 베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성경에 대한 무지를 모여주는 것뿐입니다. 베일은 머리가 아니라 얼굴을 덮는 것입니다.

38:16 여자는 물질 때문에 지신을 비하시키고 남자는 순간의 쾌락을 위해 자신의 등급을 하향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슬프고도 역겨운 일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결혼과 관련해 몇 가지 교훈이 고린도전서 7:1-5에 나와 있군요.

유다와 다말 사이에 벌어진 사건은 역겹기가 그지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나오는 마음속의 동기, 행동, 그리고 대화 모두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속 모습을 너무도 잘 계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 다소 위안이 되는군요. 이런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사고나 재앙이 일어났을 때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한 시각에서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38:23 타락한 남자의 마음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창녀와 눕는 것을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창녀를 만날 수 있는지 그 지방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의 친구도 유다가 창녀에게 빚을 졌다고 말할 때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부끄러워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창녀와 자고 나서 그 대가를 주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할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인간을 드높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그 사람 앞에 굽실거리는 인본주의자들이여(You Humanists!) 그대들이 가엽구나! 동시에 그대들을 경멸하노라!

38:24 유다의 발언. 믿을 수 없습니다!

38:24-26 이 구절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붙들고 살아 가고자 하는 의의 기준보다 더 높은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는 긍휼과 은혜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징계와 비난을 일삼고 있지는 않는지요?  24절에서 유다는 그녀를 불태우라고 했으니 25절이 드러난 지금 당연히 나도 불태우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 그 짓을 했으니 끔찍하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가 그 짓을 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용서 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인간의 뻔뻔함 아닌가요?

아마 유다와 같이 공정치 못한 편향된 판단을 한 두 번이라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친한 친구의 잘못은 변명해주고 친하지 않는 자들은 비난합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로 판단하지 않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38:26 죄의 마지막 모습 또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 같습니다. 유다는 자백했고 자기의 실패를 인정했으나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그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삶 속에서 하루에도 수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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