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2012.05.21 18:27

예수님의 죽음부터 부활까지의 활동들

조회 수 6329 추천 수 0 댓글 0
Atachment
첨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Jesus Activities From Death To Rising

예수님의 죽음부터 부활까지의 활동들

 

James W. Knox 지음 / 김영균 옮김

 

 1.JPG

 

1. 낙원(지금은 비어있음)  2. 지옥  3. 땅 아래  4. 지표면

5. 첫째 하늘(지구의 대기권)  6. 둘째 하늘(해와 달과 별들)  7. 셋째 하늘(하나님의 거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에 대해서 한번 좀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구절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성경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주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단면도 하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사격장의 과녁(target) 같은 여섯 개의 원 모양의 그림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여섯 개의 원 사이에 일곱 개의 공간이 있습니다. 여섯째 원의 바깥쪽에서부터 시작하면 일곱째의 가장 넓은 공간은 셋째 하늘을 나타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거처입니다. 다음 여섯째 공간은 둘째 하늘이며 여기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거처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우주입니다. 다섯째 공간은 첫째 하늘이며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입니다. 그 다음에는 땅의 표면이 됩니다. 사람과 동식물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 뒤를 이은 셋째 공간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땅 아래입니다. 그리고 둘째 공간은 땅의 더 깊은 곳으로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낙원이 있는 땅의 심장 부분에 해당됩니다. 어쩌면 그곳에 낙원이 있었다고 과거시제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낙원은 셋째 하늘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 시제를 쓰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도표를 보며 이해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단면도가 바로 옆에 있는 도표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키나 몸무게나 머리나 피부 색깔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단수로 되어있는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했고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신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1:26).

한 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복수의 존재로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일서 5:7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하나님은 세 부분으로(tri-part) 된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세 부분으로 계신 존재입니다. 그분은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십니다.

삼각형을 만드려면 세 면이 있어야 합니다. 신격의 충만함을 구성하려면 세 분의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을 때 역시 몸과 혼과 영으로 만드셨습니다(살전5:23).

성경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 때, 그분의 머리 색깔이 무슨 색깔인지나 혹은 그분의 키나 크고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분의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과 혼과 몸을 지니셨으며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되고 만들어 졌습니다(2:5-8).

육신(영과 혼과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 분은 다름 아닌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단지 영에 불과하셨더라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실 수 없었고 인간이 되실 수 없었다면 죽으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단순하게 육체뿐이었다면 인간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고 인간으로서 죽으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이나 몸이 없는 혼에 불과하셨더라면 인간이 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되기 위해서는 외형적으로도 인간의 형상을 입어야 하며 내적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영과 혼과 몸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성경 세 군데를 찾겠습니다. 이사야서 53장과 로마서 6장과 베드로전서 2장입니다. 먼저 이사야서 53:4-6을 보겠습니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죄가 그분 위에 있었습니다. 죄가 그분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지 않고 그분 위에 놓여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로마서 6:23을 보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이 구절에 따르면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 만약 죄가 그분 위에 놓여있다면 당연히 그분은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베드로전서 2:24을 봅시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만약 죄가 그분 위에 있다면, 죄가 그분의 혼과 영을 포함하는 영역에까지 침투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24에서는 분명하게 우리의 죄가 그의 몸에 있었다고 말하지 혼과 영에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몸은 십자가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죄와 저의 죄는 그분의 몸 안에 놓여 졌고 그 몸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의 육체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분은 죽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6:23).

그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이제 저녁이 되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요셉이 와서 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몸을 간절히 구하니라.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역시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리는 자더라.”(15:42-43) (성경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하늘의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을 기다리는 사람이 종종 나오는데 아리마대 요셉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요구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그분께서 벌써 죽으셨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그분께서 죽은 지 오래되었느냐고 그에게 묻고 백부장에게 그것을 알아본 뒤에 몸을 요셉에게 주매”(15:44-45) 빌라도가 요셉에게 준 것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몸’을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고운 아마포를 사서 그분을 내려다가 아마포로 싸고 바위 속에 판 돌무덤 속에 그분을 두고 돌을 굴려 돌무덤 입구에 놓으니라.(15:46)

그러니까 돌로 막은 그 무덤 속에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몸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어휘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사용합니다. 죄가 그분 위에 놓여 있었다고 말씀하는데 그의 위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몸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몸이 요셉에게 주어졌지요. 그리고 그 몸은 무덤에 놓여 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니시고 그분의 몸이었습니다.[1]

이제 누가복음23장과 전도서 3장을 보겠습니다. “그 때는 여섯 시쯤이며 어둠이 아홉 시까지 온 땅을 덮었더라. 또 해가 어두워지고 성전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니라.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23:44-46)[2] 전도서 3:21도 보겠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누가 알리요?(3:21)

사람이 죽을 때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영을 아버지의 보호하심에 맡기셨고 그 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는 육체의 몸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위대한 증거 하나를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8:8을 보겠습니다. 영을 다스리는 권능이 있어 영을 머무르게 할 사람이 없고 죽는 날에 권능을 가진 사람도 없으며 그 전쟁에서는 면제받는 것도 없나니 사악함도 자기에게 넘겨진 자들을 건져 내지 못하리로다.

저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여 제 영을 아버지께 맡깁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영을 내어드리고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만약 죽음이 찾아와서 제 문을 두드리며, “가자라고 이야기할 때 제 영을 가지 못하게 막을 수 없습니다. 저는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계셨던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자신의 권능에 의해 자신의 영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죽인 사람이 유대인이었냐, 로마인이었냐, 바리새인들이었냐, 논쟁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도 그분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봅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죄는 몸 위에, 주 예수님의 몸 안에 있었습니다. 만약 주님의 영이 죄에 의해 오염되었더라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운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몸을 드리셨습니다(10:1-14). 십자가에서 희생물로 아버지께 바쳤습니다. 그분의 영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 영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겼을 뿐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9장을 보겠습니다. 이번 과에서 제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 중에서 유일하게 추측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습니다. 제가 보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런즉 진실로 첫 언약에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규례들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었느니라.”(9:1) 이것은 성막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사물들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6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제 주께서 이것들을 이와 같이 제정하시매 제사장들이 항상 첫째 성막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하였거니와 둘째 성막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해마다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잘못으로 인해 자기가 드리는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령님께서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은 첫째 성막이 아직 서 있는 동안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므로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섬긴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이 성막은 단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육신에 속한 규례들로만 유지되어 개혁의 때까지 그들에게 부과되었느니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6-11) 여기에서 말한 손으로 짓지 않은 더 좋은 성막은 제 생각에는 주님의 몸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새로 건설한 새로운 건물에 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분은 그 어떠한 건물도 지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뒤에 이어진 그분의 피가 헌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과정이 어떤 순서를 따랐는지를 여러분들에게 제시해 보겠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설명하는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하고 후에 제가 보는 것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보통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

2. 주님은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에 가셔서 3일 낮 3일 밤을 계셨다.

3. 주님은 아버지께 피를 바치기 위해 승천하셨다.

4. 주님은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오셔서 그곳에 있었던 포로들을 해방시키셨다. (포로로 사로잡혀있었던 구약의 혼들은 처음에는 주님과 함께 승천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주님께서 아버지께 아직 피를 바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가 드려지기 전까지는 포로로 잡혀있던 구약 성도들은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포로들을 하늘로 데려가셨다.

 

저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

2. 주님은 성전의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로 찢으시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셔서 자신의 피를 바치셨고 구약을 마감하시고 신약을 시작하셨다.

3. 주님은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셔서 3일 밤 3일 낮을 계시다가

4. 포로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제는 그 어떠한 제사장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헌물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떤 희생물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헌물이 단번에 드려짐으로써 다른 모든 희생물은 다 옛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있게 되고 그의 영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시편16:1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무덤에 있던 몸은 부패의 장소에 놓여 있었습니다. 혼은 지옥으로 갔습니다. 여기는 죄인들이 죽을 때 가는 곳입니다. 어떤 분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글쎄요, 이 시편16:10이 예수님에 관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렇다면 사도행전 2:22-27에서 성령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봅시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들을 들으라. 너희 자신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을 통하여 기적들과 이적들과 표적들을 너희 한가운데서 행하사 그분을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정받은 사람으로 삼으셨느니라.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지매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일으키셨으니 이는 사망이 그분을 붙들 수 없었기 때문이라. 다윗이 그분에 관하여 말하되, 내가 항상 내 얼굴 앞에 계신 주를 미리 보았나니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더욱이 내 육체도 소망 중에 안식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계속해서 30-31절도 보겠습니다. 그런즉 그는 대언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에게 서약으로 맹세하사 육체에 따라 자기 허리의 열매에서 그리스도를 일으켜서 자기 왕좌에 앉히실 것을 알았고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느니라.”

만약 성경이 말씀하는바 그대로를 의미한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을 포기하는 순간 주님의 혼은 지옥으로 간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죄들을 등에 짊어지고 광야로 떠나갔던 그 속죄 염소를 기억하십니까? 그 속죄 염소는 무엇을 예표한 것입니까? 저는 그 속죄 염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지옥의 구덩이 속으로 가져가 버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믿습니다(16:8-10, 20-22참조).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혹은 내가 주의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시편139:7-8) 이 우주의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을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제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 죄 값을 치르신 것뿐 아니라 제 죄를 가지고 지옥에 가서 불에다 내려놓음으로 영원히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예수님의 혼이 지옥에서 3일 밤 3일 낮을 계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하신 그 다음 일은 무엇일까요? 계시록 1장과 히브리서 2장을 보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되면 그들이 결코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규칙에 유일한 예외라고 한다면 대언자 요나였습니다(2:2,6). 대언자 요나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되심과 부활의 위대한 표적이었습니다(12:38-40). (저자의 <요나서 주석>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죄인은 죽으면 지옥으로 가며,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의 죄가 있었다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합니까? 그분의 혼에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몸에 있었다는 사실이 왜 그리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주님의 혼이 주님의 몸을 떠나게 되었던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더 이상 죄와 관련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를 자신의 몸에다 남겨 놓으셨기에 이때부터 우리는 정복자이신 구원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옥에 가셨을 때 죄가 주님의 혼에 있었더라면 주님은 지옥에서 나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 지니라”는 에스겔서 18:4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22: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라고 했지 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빵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사역이 완성된 후에 예수님의 혼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취하셨습니다.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내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1:17-18)

이 위대한 역사가 사람과 사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히브리서 2:14-15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육체를 입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2:15).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 지옥에 갑니다. 일단 지옥에 가게 되면 더 이상 못 나옵니다. 왜냐하면 나는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묶여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와서 죗값을 치르고 나면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마귀의 감옥에 묶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열쇠가 필요하신가?” 마태복음 16장과 요나서 2장을 보십시오. 제가 정말 안타까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제가 여행을 하면서 말씀을 전파할 때마다 요나가 지옥에 갔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란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요나가 지옥에 간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확한 사실이라고 이야기 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이 성경에 써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비유적인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라는 식의 반응이 나오지만 저는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요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정확한 예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 아마 요나가 니느웨로 갈 때 꼴이 사나왔을 겁니다. 고래 배 속에 있었으니까 오물이나 위산들로 그의 얼굴 모습이 다 망가지지 않았을까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할 때 1700년 동안 죽어 있었다고 해서 이상한 모습으로 부활하겠습니까? 난센스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요나나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난 후 부패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관련 구절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부활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망에 대한 승리요, 부패와 무덤을 이긴 승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지옥의 열쇠들을 가졌습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16:18).

요나서 2:2에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르되,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내가 지옥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2:2)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 요나야 고래 배 속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너무 자신 있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6절에 따르면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보십시오. “내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으며 땅이 자기 빗장들과 함께 영원히 내 곁에 있었사오나,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 생명을 썩음에서 끌어올리셨나이다.(2:6)

그러면 성경을 의심하는 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거야 그 막대기(빗장)라는 것이 고래의 갈비뼈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말은 성경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요나는 산들의 밑바닥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땅 아래로 갔었습니다.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 생명을 썩음에서 끌어올리셨나이다.그렇다면 지옥에는 문들이 있고 그 문들에는 빗장이 가로질러 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현대의 감옥은 성경에 나와 있는 지옥의 묘사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지옥엔 불이 있는데 오늘날의 감옥엔 불이 없습니다.[3]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내려 가셔서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고 그 빗장들을 제거해서 걸어 나오셨는데 그분 자신의 권능에 따라 그리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그를 끌어내고자 할 때에 바로 그 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사슬에 묶인 채 잠을 자는데 간수들은 문 앞에서 감옥을 지키더라. 보라, 주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매 감옥 안에 한 광체가 빛나더라. 그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이르되, 빨리 일어나라, 하니 그의 사슬이 그의 손에서 풀려 떨어지더라.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띠를 띠고 네 신을 동여매라, 하거늘 그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 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라, 하매 그가 나와서 그를 따라가며 천사가 하는 것이 사실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가 환상을 본 줄로 생각하더라. 그들이 첫째와 둘째 감방을 지나 도시로 인도하는 쇠문에 이르렀는데 그 문이 그들을 향해 저절로 열리므로 그들이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그를 떠나더라.(12:5-10)

어떤 한 사람이 잠자고 있다는 사실, 일어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묶여있던 그가 문들을 통과하고 인도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주목하셨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지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는 아무도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탈출은 천사의 도움이 필요 없는 탈출 작전이었습니다. 그분은 열쇠를 직접 가지고 스스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에 단지 몇 시간밖에는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23장에 따르면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제9, 즉 오늘날의 오후3에 숨을 거두셨는데 히브리 시각은 12(저녁 6)에 해가 지면 하루가 끝납니다.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고 나서 낙원에 도착하실 때까지는 서 너 시간 이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23:39-43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39-43)

위 본문에는 쉼표가 찍혀 있는데 이 쉼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 성서나 다른 여러 성서 판본들이 쉼표를 “today” 즉 오늘이라고 하는 그 단어 다음에다가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성서들은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진실로 내가 오늘 너에게 말하노라.” 쉼표의 위치를 옮김으로써 그 의미가 “오늘 내가 선언하노라.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바뀌었습니다. “나는 네가 언제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인지는 모른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네가 연옥(purgatory)으로부터 건짐을 받게 될지 나는 모른다. 계속해서 거기에 매달려 있어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너도 낙원에 이르지 않겠느냐?이런 뉘앙스를 갖도록 고쳐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늘 너와 내가 만날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그 쉼표를 만난다가 아닌 “말한다”에 집어 넣어가지고 “오늘 내가 너에게 말한다.”라는 식으로 가톨릭 성서들이 뜯어 고쳤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정확하지 않은 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하고 쉼표가 있습니다. 여기에 쉼표가 있어야 정확한 성경이 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3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저녁 6 이전에 회개한 강도와 만날 것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오늘이라고 하셨으므로 저녁해가 지는 6 지나 내일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시려면 몇 가지 일들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지옥으로부터 낙원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믿음 안에서 죽은 이 강도가(그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지, 물침례를 받거나 혹은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땅으로부터 해가 지기 전에 낙원에 도착해야 합니다.

여기에 십자가 사건을 영광스럽게 조명해볼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 사건을 주관하셔서 예수님과 강도들이 특별히 ‘큰 날(high day) 안식일’에 죽도록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매주 돌아오는 보통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나, 유대인들에게 주신 세 명절이 시작되는 날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 당시에는 일주일에 안식일이 두 번 있었는데 이 날은 큰 안식이라고 해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큰 명절의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예수님께서 죽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해가 지기 전에 죽은 시체들을 십자가에서 치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시체가 있으면 더렵혀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다른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혔더라면 그들은 하루 이상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큰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날에 죽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날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죽지 않고 있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일찍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을 죽이기 위해 뼈를 꺾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도들은 주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빨리 죽여 치워야 하였으므로 그들의 뼈를 꺾어가지고 죽여서 치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적 손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메시아보다는 그들의 큰 명절이 의미하는 바가 더 컸기 때문에 병사들이 와서 그 두 사람의 다리를 꺾어서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이 죽도록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 답변은 옳은 답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즉 그 믿은 강도가 예수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해지기 전)에 죽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 강도가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있다가 자연사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고문일지라도 자연적인 죽음까지 기다리자면 보통 의학적으로 열두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까지 혹은 스물 네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져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능력이 있으시니까 낙원에 가 계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날 강도가 낙원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 강도와 만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 한 단어라도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온 우주를 하나님께서 직접 운영하고 계신다는 예가 바로 이 사건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 병사들이 강도의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오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순간 병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그 도둑은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왜 여기에 오는 것입니까? (아이고, 도대체 저들은 왜 여기에 오는 거야?) 병사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겁니다. “우리는 너의 다리를 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이고, 나는 죽을 때까지 여기에 매달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나는 모르겠다. 높은 사람들이 너와 네 동료의 다리를 부러뜨리라고 말했을 뿐이라고, 지옥에서 보자고” 아마 그 강도는 이렇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지옥이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글쎄 옆에 있는 자는 그곳에서 만날지 모르지만, 당신은 나를 지옥에서 보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거든요.

그들은 그의 다리를 부러뜨렸고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은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그 나무 위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혼은 낙원에 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소를 지으시면서 손을 내 미시며 그를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강도가 낙원에 가게 된 것이 침례를 받아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당신이 옛날로 되돌아가서 당신이 저질렀던 악한 행위들을 모두 회복시키지 않고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행위가 필요했다면, 그 강도는 아무런 소망 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저 그가 한 것이라고는 오직 주 예수님을 믿은 것뿐이었으니 기쁘지 않습니까?

이로써 예수님과 강도는 행복한 재결합(reunion)을 가졌습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이야기는 당신이 거짓 종교를 다루게 될 때 성경에서 곧바로 찾아보아야 할 구절입니다. 그 강도가 한 일이라고는 주님께 자기를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하는 믿음의 표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행복한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어났어야만 했던 두 가지 일 중의 첫째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것은 이미 말씀 드렸는데 첫째 것은 제가 아직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시고, 우리의 죄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지옥으로부터 이제 낙원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도 다 치루셨고 우리가 가야 할 지옥에도 대신 가 주셔서 다 해결되었으며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므로 지옥의 문들과 빗장 문제도 모두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강도 사이에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19-2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또 나사로라 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더라. 또한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

가난한 자는 부자의 저택 문 바깥에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그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대문 바깥의 쓰레기통을 뒤져 먹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쓰레기들을 다 뒤지면서 그 찌꺼기들을 개와 경쟁하면서 서로 먹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고 그는 가난하게 죽었습니다.

온 몸에 종기가 난 그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건강복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가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아 준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골치 아픈 문제가 이 세상에서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는 부유하게 살다가 부유하게 죽었습니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나사로는 가난하게 살고 가난하게 죽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부자로 사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가난하든 부자로 살든 누구에게나 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겠습니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16:22).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부자일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설교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당신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데 왜 그런 비성경적인 설교를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가난한 거지로 죽었지만, 그는 즉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이것은 부자의 몸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이것은 부자의 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의 혼은 지금 깨어 완전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16:22-24)

이 말씀에 따르면 당신은 하나님의 선민의 후손이면서 올바른 종교의 회원은 될 수 있지만, 주님을 모르면 여전히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16:23-24).

잘 보십시오.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설교자였습니다. 내 아버지도 목사였거든요, 나의 할아버지는 선교사였습니다. 나는 평생을 교회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내 모든 친척도 다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시지 않으면 당신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 누구의 좋은 아들이 되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들아기억하라. 부자는 과거를 회상하며 고통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고통 없이 즐기던 시절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과거에 구원받을 수 있었던 기회들을 기억하면서, 그가 나사로를 조롱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그가 자기의 부를 자랑하며 떵떵거리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들아, 너는 너의 생전에 너의 좋은 것들을 받았고 그와 같이 나사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16:25)

당신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위로를 다 얻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이 죽는 날은 당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고통을 체험하는 날이 될 것이요, 만약 당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당신의 죽는 날이 당신이 마지막으로 인생의 쾌락을 체험하는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드디어 이 구절에 도달했습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하는 자들이 갈 수 없고 거기서 오려 하는 자들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느니라, 하니”(16:26)

처음에 제가 그려보라고 한 과녁 기억하십니까? 앞으로 가서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땅이 있습니다. 그 땅 밑에는 불이 있는 지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낙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과 낙원을 분리시키는 것이 큰 구덩이인데 그것을 그 누구도 건너간 적이 없습니다. (많은 작가들과 공상가들과 만화가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 아름다운 낙원은 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신화는 진리에 매우 가깝게 접근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흉내 내어 만들어 낸 것이 신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조금 왜곡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게 만들어 놓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있고 나사로는 낙원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에서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었는데 앞에 놓인 큰 구렁텅이 때문에 갇혀 계실까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낙원으로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6:16-20을 보겠습니다. “이제 저녁이 되매 그분의 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가서 배에 올라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제 날이 어두웠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더라. 큰 바람이 불어 바다가 출렁이더라. 이에 그들이 노를 저어 이십오 내지 삼십 스타디온쯤 가다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라.(6:16-20).

물론 구렁텅이가 있습니다. 낙원을 향해 가고 있던 주님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론 그러실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뜨거우셨을 텐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분은 이미 더 뜨거운 지옥을 통과하셨고 그 뜨거움도 그분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뜨거운 불 정도가 그분께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다니엘3장을 참조할 것)

예수님께서는 그 구렁텅이를 건너서 낙원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상당한 기간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옆으로 돌아가서 세대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 중의 하나를 설명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 안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 전에는 하늘나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진리로부터 조금 더 나아가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의 구원은 서로 다르다고 가르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구약성도들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구원받았으니 하늘나라로 당연히 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하늘에 가는 것을 기다렸다면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그 누구도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신 셈입니다.

구약 성도들의 경우는 히브리서11:13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들은 행위 안에서 죽지 아니하였고, 율법 안에서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그들을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39에서는 그들이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1:40) 구약 성도들보다 우리가 좀 더 나은 것 중의 하나는 지금 이 세대 사람들은 육신에서 떠나는 순간 즉시로 주님과 함께 있게 되며 낙원에서 주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 성도들이 우리 없이 완전하게 될 수 없었다고 히브리서 11:40에서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완전하게 되기 전에는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야 우리가 완전해지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야 그들도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완전하게 되었습니까? 히브리서 10:10-14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헌물로 드림으로써 우리가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일까요? 그 답변은 출애굽기 34:6-7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의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과의 기록은 정결하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하세계로 다시 한 번 가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낙원에 가시기 전에 지옥에서 잠시 머무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레함 스크로기(W. Graham Scroggie)는 베드로전서 3:18이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다른 어떤 구절보다도 더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그렇다면 한번 고난을 당하셨다고 했으므로 매주 미사 때마다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혼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도 죽지 않았습니다. 육체가 죽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 가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문들+빗장들+자물쇠=감옥. 그러데 놀랍게도 감옥에는 보통 사람들이 갇혀있는 것인데 여기서는 영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혼들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디에서 온 존재들일까요?)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벧전 3:18-20).

이 구절들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구절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홍수가 있기 전에 거인 족이라는 족속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다 쓸어버리셔야만 했습니다. 이들 영적인 존재들이 혼을 지니고 있었다는 언급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이들 영적 존재들은 홍수 때에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것은 제 추측입니다.

이 영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내가 말한 것이 맞든지 틀리든지, 이들은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6)

예수님께서 지하에 있는 감옥에 계셨을 때 그들에게 설교하셨습니다(벧후2:4). 무엇을 설교하셨을까요? 두 구절을 합쳐보니 복음도 설교메시지의 일부분이라고 인용되어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노아가 그들에게 설교했던 것을 반복해서 설교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희는 사악하고 너희는 불경건하다.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 너희는 그럴만한 자들이다.” 그런데 노아가 그들을 아무리 정죄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영적인 존재들에게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주님께서는 땅의 심장부에 계셨을 때에 그들에게 선포를 하셨습니다.

낙원에서의 삼일 밤 삼일 낮의 위대한 재결합이 있은 후 이제는 더 나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계에 따르면 삼일 밤 삼일 낮 후에는 부활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에스겔서 28장과 마태복음 27,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먼저 에스겔서 28:14-15절부터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너는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오르내리며 다녔도다. 네가 창조된 날부터 네가 네 길들에서 완전하였는데 마침내 네 안에서 불법이 발견되었도다.(28:14-15).

사탄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지구로부터 여행하여 하나님의 왕좌 앞에 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욥기 1장과 2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셋째 하늘뿐만 아니라 땅으로부터 여행하여 지옥에 갔다 올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28장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 땅에서 지하에 있는 지옥으로 가는 통로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1970년대에 한참 유행했던 지구에 있는 어떤 기이한 장소들을 설명해 줄지도 모릅니다.[4] 그런 물리적인 지리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하 세계로부터 지상으로 올라오는 어떤 통로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이런 주제에 대해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확인하려는 것은 낙원에 있는 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혼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돌이나 흙 같은 것들은 혼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지하에서 올라오실 때 혼자 오신 것이 아니라 어떤 자들을 데리고 함께 오셨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27:50-52)

아마 여러분은 이런 구절들을 보면 공포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덤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면 혼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혼은 낙원에 있었습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덤에는 많은 몸들이 있었는데 그 몸들이 살아났습니다. (그 몸들이 살아났다는 것은 영이 다시 되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혼은 아직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금 단지 영이 들어가서 일어나 있기만 한 상태인데 여기서 머뭇거리지 말고 53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분의 부활 후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27:53) 무덤에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주님의 영과 몸과 혼이 합쳐져서 부활하신 것처럼 이들도 몸과 영이 합쳐진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들의 혼이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시 안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죽었던 모든 자들의 혼들이 낙원으로부터 나와 자신들의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숨이 어디로 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정복에 관한 것이며 죽음을 취소하고 오히려 그 죽음이 가져왔던 영향 즉 몸이 썩었던 것을 모두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겨 나갔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몸의 생명이 되돌아왔습니다. 주님은 일어나셨습니다. 생각나십니까? 나사로 역시 아브라함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힐 때까지 죽은 자들이 다 잠자러 갔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 잠잔다는 표현이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은 죽는 즉시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죽은 사람들은 시간감각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보는 순간 죽은 이후에 즉시 보는 것처럼 지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을 때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분의 부활 후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지금 성경이 무엇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까? 혼들이 낙원으로부터 나와 자신들의 몸들과 재결합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셔서 동산에 서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부으러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무덤 안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지 못해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요한복음 20:16-17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야, 하시거늘 그녀가 돌이켜 그분께, 랍보니여, 하니 이것은, 선생님이여, 라는 말이라.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다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 올라오신 다음에 그의 혼이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가고 동시에 그의 영이 되돌아와서 그 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또한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도 하나님께로 갔다가 되돌아와서 그들의 몸 안으로 들어갔고 이 모든 자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두렵고 겁나고 흥분되는 전례 없는 사건이었겠습니까? 죽은 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행진을 했다니 말입니다.

이 살아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길에서 바리새인 몇 사람과 만납니다. “자, 여길 좀 보시오. 그분께서 살아계시오. 그분은 구원자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이때 바리새인들이 답변합니다.“당신은 누구요?” “나는 스가랴인데, 내가 스가랴서에 기록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저 길모퉁이를 돌아서 오다가 말합니다.“이봐, 그 시체가 없어졌다며, 그런 소리를 들었어.” 그런데 그 때 이름표를 단 어떤 사람이 길모퉁이에서 말을 걸어 옵니다. “여보시오, 내 이름이 바로 예레미아요.” 그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내가 예레미아서에서 당신들에게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깜짝 놀라서 뒤로 돌아 다른 곳으로 갔더니 또 다른 한 사람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보시오, 나는 이사야요,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메시아께서 오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믿지 못합니까?(10)

성경은 이들 모든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을 다녔다고 말씀합니다. 기록된 그대로 믿으십시오.

영과 혼과 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혼과 영이 몸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즉 영과 혼과 몸, 이 세 가지를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께서 그대로 셋째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에베소서4:9을 보겠습니다.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왜 주님께서는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셨을까요? 성경은 지옥이 땅의 더 낮은 부분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땅의 더 낮은 부분에는 낙원도 있었는데 그 주위는 큰 구덩이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낙원에서 안전하게 있기는 했으나 그곳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혀있는 포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오실 분께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불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으며 낙원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죽으면 즉시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구약 성도들은 몸을 떠나 아브라함과 함께 잠을 자다가 그들의 죗값을 예수님께서 치르시기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을 때 비로서 그들도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2000년 동안이나 죽어 있었는데 다시 땅에 나타났다면 하루 하루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당신이 낙원에서 안식하다가 이 쓰레기 더미 같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이 세상이 끔찍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구약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한 바퀴 돌며 부활을 선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4:8)

구약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셋째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던 그날 아침에는 주님께서 아직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마귀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감옥에 갇혔던 그들을 주님께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포로가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빼앗으셔서 지구로부터 데려다가, 무덤에서 꺼내서 이 세상을 떠나 자신과 함께 있도록 하늘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나의 죄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과 혼과 몸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죽으면 사람들이 제 몸을 무덤에다 눕힐 겁니다. 그리고 제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제 혼은 구원받았습니다. 제 혼은 제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는 그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그들의 몸들은 땅에서 나와 영과 혼과 몸이 완전히 재결합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부활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될 것이며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한 가지를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가운데 매일 기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주님께서 지금 살아있든 앞서 세상을 떠났든 간에, 우리의 혼이 영광을 받으러 가든지 우리의 몸이 무덤에 있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오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사도행전1:11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8절도 보십시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저는 그분의 오심을 소망합니다. 저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이 사람들처럼 저의 인생을, 그저 게으르게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예루살렘을 바라볼 것이고, 유대를 바라볼 것이고, 사마리아를 바라볼 것이며 땅의 맨 끝까지 바라보면서 제가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동안, 저는 그분께서 저에게 하라고 하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음의 사실을 안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사망은 이미 다 처리되었습니다.

2. 지옥 문제도 다 처리 되었습니다.

3. 죄 문제도 다 해결되었습니다.

4. 마귀 문제도 다 해결되었습니다.

5. 부활 문제도 다 해결되었습니다.

6. 하늘나라로 가는 여행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좋은 날들만 남았다는 것을 알면서 하루하루를 전진해 나간다면 신앙 생활은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1] 히브리서 10:5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몸은 각각 다른 것입니다. 또한 그 몸을 마리아의 배 속에다 예비하셨기 때문에 누가복음 1:35에서 마리아가 자기 배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거룩한 것(Holy thing)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이것을 거룩한 이, 또는 거룩한 분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예수님을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성경의 교리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배 속에는 그분의 몸만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용한 것입니다. 오직 킹제임스성경에서만 ‘Holy thing’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에게 준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역주

[2] 당신의 6는 오늘날 12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6부터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다 6을 더하여야 오늘날 현재의 시간이 됩니다.-역주

[3] 그 빗장은 우리나라 전통 대문에 가로지르는 막대기와 같은 것입니다.-역주

[4] 버뮤다 삼각지대 등. 민수기의 고라 자손들이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매장된 그 예를 들기도 합니다. 북위 23도 부근에서 동일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설, 비행기가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이것이 지하에 있는 지옥으로 통하는 통로가 아닌지 저자도 추정할 뿐입니다.-역주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2 복음 성경에 기록된 과학적 사실들 이우진 09.04 11217
41 복음 성경의 구원-7 구원의 증거 이우진 01.05 8308
40 복음 기독교의 본질 1 이우진 08.23 8227
39 복음 하늘나라와 지옥-14 하늘나라와 지옥 정리 이우진 03.22 7868
38 복음 성경의 구원-1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우진 11.18 7559
37 복음 성경의 구원-4 놋 뱀 이우진 12.08 6843
36 복음 (한영)하나님의 구원 계획 이우진 03.28 6499
35 복음 성경의 구원-9 에티오피아 내시 이우진 01.21 6484
» 복음 예수님의 죽음부터 부활까지의 활동들 이우진 05.21 6329
33 복음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영석 01.15 6192
32 복음 하늘나라와 지옥-6영원한 혼과 영원한 몸 이우진 01.22 6096
31 복음 영원에 대한 확신 이우진 04.24 5974
30 복음 성경의 구원-2 문 앞에서 두드리시는 예수님 이우진 11.25 5903
29 복음 성경의 구원-10 예수님의 찢긴 몸 이우진 02.03 5806
28 복음 하늘나라와 지옥-1몸에 관해서 이우진 12.18 5611
27 복음 하늘나라와 지옥-11하나님의 평안 이우진 02.26 5566
26 복음 하늘나라와 지옥-13재창조와 하늘나라의 위치II 이우진 03.14 5532
25 복음 성경의 구원-8 단순한 복음 이우진 01.13 5375
24 복음 하늘나라와 지옥-12재창조와 하늘나라의 위치I 이우진 03.10 5316
23 복음 하늘나라와 지옥-3혼에 관해서 이우진 01.03 5298
Board Pagination Prev 1 2 ... 3 Next
/ 3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