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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4장 하늘의 왕국와 하나님의 왕국

 

이스라엘과 교회를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제쳐놓더라도, 신실하게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하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을 동일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큰 오류이다. 그 같은 가르침은 교리적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과 대치되는 수많은 난제를 양산하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하늘의 왕국은 이 지구상에 세워질 물리적인 왕국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인간이 이 왕국을 통치하도록 허용하셨다. 하나님의 왕국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는 영적인 왕국이다. 하나님께서 이 왕국을 통치하신 적은 없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언급한 하늘의 왕국의 역사와 더불어 이 주제를 시작하고자 한다. 창세기 1장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의도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왕국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시고 그에게 6일 동안 창조된 모든 것들을 지배하도록 권한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청지기직을 주신 게 아니라 지배권과 통치권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1:26-28)

인간은 이 땅을 통치하도록 지음받았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그 통치권을 몰수당해, 이 세상의 신이 된(고후 4:4) 사탄이 그것을 차지하고 하늘의 왕국의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4:8-10, 4:5-6). 그리고 마귀가 말하기를...이 모든 권능을...네게 주리라.” 주님께서 자신의 위대한 권능을 행사해서 왕을 제거할 수 있으나( 2:21), 에덴동산에서 발생했던 그 권능의 이전(移專)은 여전히 유효하다.

요한복음 14:30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와 많이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기 때문이니라. 그는 내 안에서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사탄이 이 현 세상 제도를 통치하는 권력임을 인정하셨다.

이것은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모든 것에 두 가지 수준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통치자이시며 그 권한을 아담에게 주셨고 사탄이 그 권한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셨다( 1). 이는 아담의 자발적인 권력이양의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이 명령은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은 다니엘의 예언에서 나타난 그 시기의 끝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11:15).

아담을 부르심으로 하나님은 이 지구 위에 그분의 왕국을 영원히 건설하시겠다는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다음의 몇 가지 일들을 행하셨다.

l       하나님은 인간을 통치할 한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

l       모세를 통해서 그 왕국을 통치할 율법을 전해주셨다.

l       여호수아와 재판관들을 사용하여 그분의 왕국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 땅의 지배자들을 감독하도록 하셨다.

l       그리고 다윗을 통해 그분의 왕국에서 통치할 시온산 위에 왕좌를 만드셨다.

l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그 왕좌 위에 앉을 사람으로 임명하셨다. 그 사람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가르친 것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성경의 역사는 그 왕국을 가져오려고 했던 히브리 민족의 시도를 실패로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해서 예수님이 영원히 지배하고 통치할 그 왕국의 기초를 놓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은 실패하셨고 그 왕국을 통치할 두 번째 시도로서 교회를 예비로 준비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은 잠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데 실패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변경하신 것이 아니다.

사무엘의 지도 아래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한 반역이 존재했다. 그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같이 인간 왕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울을 선택했다(삼상8). 사람들의 선택이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셨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와 그의 후손들은 실정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우상숭배와 반역을 점점 더하여 갔다. 이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의 통치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에스겔 10:18-20에서 우리는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세우신 집으로부터 떠나심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에 주의 영광이 그 집의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에 서니 그룹들이 자기 날개들을 들어 올리고 내 눈앞에서 땅을 떠나 올라가더라. 그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들 곁에 있었으며 그들이 각각 주의 집의 동쪽 문 입구에 서 있더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위에서 그들을 덮었더라. 이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서 본 살아 있는 창조물이라. 그들이 그룹인 줄 내가 알았노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좌에서 내려오시고, 이스라엘 민족 위에 거니시고 언약궤 위로부터 그분의 영광을 재현하셨다. 이는 성전을 남겨두고(이 구절과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서 언약궤 자체는 들려 올라간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 곳으로 다시 언약궤가 올 것이다.

에스겔서 11:22-23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때에 그룹들이 자기 날개들을 들어 올렸는데 바퀴들도 그들 곁에 있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위에서 그들을 덮었더라. 주의 영광이 그 도시의 한가운데를 떠나 위로 올라가서 도시의 동쪽 편에 있는 산 위에 서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그 영광은 성전을 남겨두고 기드론 계곡에서 올리브산에 이르기까지 이동한 것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세기가 지나서 하나님께서는 돌아오셨고, 그분의 영광은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났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 그분은 마지막으로 성전을 떠나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집이 버림받아 너희에게 황폐하게 되었느니라.”( 23:38).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에스겔서 11장에서 보여준 동일한 방법으로 40일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하늘로 다시 올라가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복수의 불을 가지고 다시 나타날 때까지 그분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에스겔서 21:25-27을 살펴보자. 너 더럽고 사악한 이스라엘의 통치자야, 네 날이 이르렀나니 그때에 불법이 끝나리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관을 제거하고 왕관을 벗기라. 이것이 예전과 같지 아니하리니 낮은 자는 높이고 높은 자는 낮출지니라. 내가 그것을 거꾸러뜨리고 거꾸러뜨리며 거꾸러뜨리리니 그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그것의 권리를 가진 자가 이르면 내가 그에게 그것을 주리라.”

왕관은 이스라엘 왕들에게서 제거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그 왕관을 놓기 전에는 다른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그 왕관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왕관이 취해진 지 600년이 지나서( 21),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작은 도시에 한 생명이 태어났다. 누가복음 1:26-33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에 의해 나사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도시로 보내어져서 다윗의 집에 속한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렀는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더라. 그 천사가 들어가 그녀에게 이르러 말하되, 크게 은총을 입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니 네가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 하매 그녀가 그를 보고 그가 하는 말에 불안해하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인사인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니 그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하니라.”

이것이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앞으로 오실 왕이시다.

l       영원한 왕국을 확립하시며

l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에 앉으시며

l       시온 산 위에서

l       약속의 땅 가운데서

l       모세에게 주신 율법으로

l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민족을 통치하실 것이다.

30년이 지나서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와서 유대의 광야에서 선포하여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이 사람은 곧 주께서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자니라. 이르시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분의 행로들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3:1-3) 본문에서 서로 교환적으로 사용된 단어에 주의해 보자. 2절에 의하면 무엇이 가까이 왔는가? 하늘의 왕국이다. 3절에서 누구의 행로들이 곧게 되었는가? 주님의 행로이다. 왕이 없는 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이 말한 것은 왕국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요한이 선포한 것은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님께서 왕좌 위에 앉으실 때 여러분은 왕국 언약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는 볼 수 없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다음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4:17). 그리고 마태복음 10:1,5,7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분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너희는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 요한,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이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왕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전쟁, 정치적 협상, 유엔과 사회 운동이 모두 실패한 이유이다. 매 전쟁 이후, 선거, 죽은 교황들, 금메달, 대학졸업, 평화 운동과 교회 예배 이후 사탄이 이 세상의 왕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 페르시아를 통치한 다리오 왕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를 통치한 사람들 그 누구도 사탄으로부터 한 뼘의 땅도 취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왔다 갔을 뿐이며 사탄이 권능을 행사했다.

아담 이후로 잃어버렸던 왕국을 되찾을 수 있는 권능을 소유한 한 사람이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언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담이 잃어버린 지배권을 올바른 장소로 되돌리는 위대한 권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권능을 한 인간에게 부여하셨고 그는 그것을 선포해야만 했다. 아담의 후손은 타락 이후 모두 파멸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아담의 씨로부터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친히 마지막 아담이 되신다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열에도 소망이 존재하게 된다. 처녀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한 한 사람을 통해서 미래가 밝아졌다.

이 일들 후에 또 주께서 다른 칠십 명도 세우사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 도시와 지역으로 둘씩 둘씩 자기 얼굴 앞에 보내시니라. 그 안에 있는 병든자를 고치며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이것을 확실히 알지니 곧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 10:1,9,11)

두 왕국 모두가 제공되었다. 같은 사람이 이 두 왕국을 통치할 왕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영적인 왕국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7:20-21을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하나님의 왕국이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다그쳐 묻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임하지 아니하며 또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왕국은 보이지 않는 내적인 왕국이다. 그곳에는 왕관도, 도시도, 영역도, 눈에 보이는 어떤 민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통치하고 교제하는 내적인 왕국이다.

로마서 14:17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하나님의 왕국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곳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그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그분은 찬송 받으실 유일한 권능자시오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시니라.”(딤전 6:15) 이제 영원하신 왕 곧 죽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 1:17) 예수님은 결코 교회의 왕으로 오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하나님의 왕국의 왕이시며 교회는 그 왕국의 일부이다.

이제 마태복음 21:42-43로 가보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한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너희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1]

그 시절에는 이 말씀들이 유대인에게 속한 영적인 왕국에 대한 것이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물리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유대인을 통치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언약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민족과는 유대인들을 통해서만 교제하셨다. 로마서 9:3-5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육체에 따른 내 형제, 내 친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으리니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니라. 그들에게는 양자 삼으심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속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리고 에베소서 2:11-12에서도 다음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너희는 지나간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받아 할례자들이라 불리는 자들로부터 무할례자들이라 불리던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연방 국가 밖에 있던 외인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서 분리된 낯선 자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이스라엘은 물리적인 측면에서와 영적인 영역에서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졌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경우에는 유대인들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왕국을 취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교회에 넘겨주셨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21:42) 이 구절과 베드로전서 2:4-10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비교해 보자. 참으로 사람들(이스라엘)에게는 거부당하였으나 하나님께는 선정 받은 돌 곧 보배로운 산 돌이신그러므로 그분께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로우시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거부한 그 돌이 되셨느니라.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가 세워진 기초가 되는 돌은 이스라엘에 의해 거부되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셨고 그들에게 보배로운 모퉁이 돌을 주신 것이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유대인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전파된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떠난 이후 하늘의 왕국을 통치한 이방인의 권능에 대해 살펴보자. 다니엘서 2장부터 시작해 보자.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어떤 꿈을 꾸었으나 그 내용을 기억할 수 없었다. 바빌론에 포로로 살고 있는 한 유대인 대언자가 그곳에서 좋은 평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왕의 관리에게 말하여 자신이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말하였다. 다니엘서 2:25-2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에 아리옥이 급히 다니엘을 왕 앞으로 데려가고 왕에게 이같이 이르되, 내가 유대의 포로들 중에서 한 사람을 찾았사오니…” 왕은 그의 이름을 바빌론 언어로 불러 말하였다. 왕이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니엘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본 꿈과 그것의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려 줄 수 있겠느냐? 하니 다니엘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다그쳐 물으신 그 은밀한 일은 지혜자들이나 별을 살피는 자들이나 마술사들이나 점쟁이들이 능히 왕께 보여 드릴 수 없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은밀한 일들을 계시하시며 마지막 날들에 있을 일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알려 주시는 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나이다. 왕의 침상에서 본 왕의 꿈 곧 왕의 머리 속의 환상들은 이러하니이다.”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일들은 항상 대환란이 끝나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다루시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왕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은 그 날로부터 주의 날까지 연속되는 것이다.

오 왕이여, 왕으로 말하건대 왕의 침상에서 왕의 마음에 일어난 생각들은 이후에 일어날 일이오며 은밀한 일들을 계시하시는 이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왕에게 알려 주시나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건대 그분께서 이 은밀한 일을 내게 계시하신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어떤 지혜 때문이 아니니이다. 다만 이 일은 왕께 그 해석을 알리어 왕으로 하여금 왕의 마음의 생각들을 알게 할 자들을 위한 것이니이다. 오 왕이여, 왕이 보셨사온대, 보소서, 큰 형상이니이다.”(29-31) 모든 저자들은 이 형상이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이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다. 이 생각은 로마서 1장의 구절들을 생각나게 한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고( 1:23)

다니엘은 계속해서 이 빛나는 형상을 묘사한다. 이 큰 형상이 왕 앞에 섰는데 그것의 광채가 뛰어나며 그것의 형태가 두려웠고 이 형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그의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그의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의 두 다리는 쇠요, 그의 두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31-33) 우리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서 금속의 가치가 쇠잔해짐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을 통해서 그 형상이 계속 진행할수록 약해지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나감을 알게 된다. 여러분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쇠퇴해지는 것이다. 가치는 줄고 덜 순수해진다. 처음의 것은 매우 큰 가치를 가지나 맨 마지막 것은 가치가 거의 없다.

왕이 보셨는데 마침내 손을 대지 아니하고 깎아 낸 돌이 그 형상을 치되 쇠와 진흙으로 된 그의 두 발을 쳐서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매(34)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함을 즉각 알 수 있다. 어떤 해석이 주어지기 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형상의 모든 부분을 부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어도 주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신다.

그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산산조각 나서…”(35) ‘(together)’ 라는 단어가 여기서 중요하다. 금으로 이루어진 머리로부터 모든 것이 진흙의 발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은으로 이루어진 몸통의 모든 것이 진흙의 발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놋으로 이루어진 배와 다리도 같이 발로 내려갔다. 마지막 상황은 그것의 앞서 내려온 모든 것의 저장소였다. 연합되고 결합된 그리고 파괴된 왕국의 잔존한 결합체는 점점 더 약해졌고 과거보다 더 쇠퇴하였다. 하나님은 이것 모두를 지켜보시고 그의 아들을 보내서 그것을 파멸하도록 하셨다.

게속해서 다니엘서 2:35-37을 보자. 그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산산조각 나서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쓸려갔으며 그것들의 자리가 없어졌고…” 이 구절과 비교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흰 왕좌 심판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20:11)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형상을 친 돌은 큰 산이 되어 온 땅을 채웠나이다. 그 꿈은 이러한즉 우리가 왕 앞에서 그것의 해석을 고하리이다. 오 왕이여, 왕은 왕들의 왕이시오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왕에게 왕국과 권능과 세력과 영광을 주셨나이다. 우리는 이 꿈에 대해 추측할 필요나 근거가 없다. 금으로 된 머리는 바빌론의 통치자를 의미하고 그의 권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자녀들과 들의 짐승들과 하늘의 날짐승들이 어느 곳에 거하든지 그분께서 그것들을 왕의 손에 주시고 왕을 그 모든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셨나니 왕은 이 금 머리이니이다.”(38) 하나님은 이 왕국을 이방인들이 통치하는 현 세상으로 정의하고 계신다.

다니엘서 2:39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왕 이후에 왕의 왕국보다 못한 다른 왕국이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다른 놋 왕국이 온 땅을 다스릴 것이 며따라서 하나님은 다음에 올 왕국들도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통치자들이 다스릴 것으로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왕국들은 이 왕국보다는 못할 것이다. 어떤 이방 권세가 이 예언을 성취할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니엘 2:40에서 자동적으로 이어진다. 넷째 왕국은 쇠같이 강하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산산조각 내며 정복하나이다. 이 모든 것을 부수는 쇠같이 그 왕국이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고 상하게 하리이다.” 여기서 선포된 것은 넷째 왕국이 이 세상의 민족들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 왕국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 끊임없이 복종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전의 다른 왕국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로마제국을 이 넷째 왕국으로 간주하고 철과 놋의 결합체를 넷째 왕국의 연속선상이나 부활로 논의하는 다양한 접근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확실히 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왕께서 그 두 발과 발가락들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신 것 같이 그 왕국이 나누일 것이로되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신 것 같이 그 왕국에 쇠의 강함이 있으리이다.”(41)

이것이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왕국은 이전 왕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결합한 것이나 그 권능이나 가치는 앞의 왕국보다 약해질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지식과 기술로 인해 과거의 조상이 누리지 못했던 물질적 부유함과 편리함 속에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세대를 거쳐 계속 세습되어 죄와 사악한 행위들과 악한 고안물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이 세상의 타락은 모든 면에서 인간이 이룬 업적만큼 매우 놀랍다. 인간은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했다.

억압으로 상징되는 놋과 아담 이후로 육신을 가진 인간을 상징하는 진흙과의 혼합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진흙보다 더 나빠져서 더러운 진흙, 즉 가치가 없고 성가신 흙이 된 것이다.

다니엘서 2:42-43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 두 발의 발가락들이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인 것 같이 그 왕국도 얼마는 강하되 얼마는 부서질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신 것 같이 그들이 자신을 사람들의 씨와 섞을 터이나 쇠와 진흙이 섞이지 아니함같이 그들이 서로에게 달라붙지 못하리이다.” 우리는 종종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우리는 마지막 세상 제국의 마지막 기간에 통치 권력은 인간의 씨가 아닐 것이라고 들어왔다. “어떤 그들은(a they)”은 아담의 후손과 섞인 또 다른 존재일 것이다. 이것은 노아의 날들 이전에도 발생했고(6) 예수님에 따르면(24) 이 마지막 날들에도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니엘서 2:44-45에서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 왕들의 시대에(이 두 개의 발 위에 몇 개의 발톱이 있는가? 열 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끝 날에 왕들의 개수는? 열 개)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하며 이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열 개와 네 개) 영원히 서리이다. 손을 대지 아니하고 산에서 깎아 낸 돌이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산산조각 낸 것을 왕께서 보셨사온즉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후에 있을 일을 왕에게 알리셨나이다. 그 꿈은 확실하며 그것의 해석은 분명하나이다, 하니라.”

이것이 다니엘의 시대로부터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 이방 왕들의 과정이다. 네 개의 위대한 왕국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이전 시대를 통해 다음 시대로 전해졌으며 선과 악을 포함하는 하나의 왕국으로 전개되었다. 이 각 세대는 이방인의 시대로 불린다.

다니엘서 9:19-27로 이동해서 포로로 잡혀간 대언자가 바빌론에 있는 자신의 민족을 대표해서 그들은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주 내 하나님 앞에서 간구를 드릴 때에 곧 참으로 내가 기도를 드리며 말할 때에 내가 처음에 환상 속에서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신속히 날아가도록 명령을 받고 저녁 봉헌물을 드릴 즈음에 내게 손을 대더라.”

오후 3( 38)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다니엘을 가브리엘이 방문하였다. 그가 내게 알리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오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능숙함과 깨달음을 주려고 나아왔느니라, 하니라. 네 간구가 시작될 때에 명령이 나왔으므로 내가 네게 알리려고 왔노라. 너는 크게 사랑받는 자니 그런즉 그 일을 깨닫고 그 환상을 깊이 생각할지니라. 주께서 네 백성(교회가 아닌 이스라엘)과 네 거룩한 도시(워싱턴 D.C 혹은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다음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루살렘을 정하시고 70주를 정하신 6가지 목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때에 자신의 택하신 민족에 대한 목적이기도 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정직한 사람에게 이 다니엘의 70는 교회시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다니엘 9장에서 예언된 마지막 주에 대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l       범법을 끝내기 위해서이다. 나의 범죄에 대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값을 완전히 지불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l       죄들의 끝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나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되었다.

l       사악함에 대해 화해를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

l       영원한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영원한 소유물로 나에게 주어졌다.

l       환상과 예언을 봉인하기 위해서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니엘서 2장을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l       성령님께 기름을 붓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지상 왕좌로 임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는 상관이 없음이 명백하다. 이방인의 박해와 통치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들의 성취를 가로막을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으리니 심지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9:25). 이것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기록된 역사이며 바빌론 포로 이후 시대에 성취되었다.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26) 이것은 다니엘서 2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A.D. 70년 로마시대에 발생했던 것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도시와 성전은 폐허 가운데 지속되었으며 하나님은 이를 오래 끈 전쟁이라고 명명하였다. 어느 누구도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이 성전을 재건축하지 않을 것이다( 15:16).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27)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에 앉으시기 이전에 발생하는 이방인과 여러 혼합된 권력들의 작품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부터 사울에 이르는 민족의 왕이시다. 사울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은 인간 왕들에 의해 통치를 받았다. 이 왕국은 나누어졌다. 북왕국은 타락했으며 배교의 길로 접어들어 결국 갈데아 민족에 복속되었다. 남왕국은 몇몇 선한 왕들로 인해 한 동안 명목적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였으나 결국은 그들도 배교하여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떠났다(9-11). 왕권은 옮겨졌고 유대인들은 70년 동안 바빌론 포로생활을 겪게 되었다. 포로기간 하나님은 이방인의 권능의 미래에 대해 다니엘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계시해 주셨다.

다니엘서 9장에서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에게 발생한 모든 언약에 있어 중요한 점들을 계시해 주셨다.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은 유대인에 대한 예언을 계시해 주셨다.

예언의 첫 분리가 끝나는 시점에서(483) 메시아는 끊어져 나갔다. 그리고 요한은 왕국을 선포했다.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도 선포하셨다.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리고 12제자와 70사도들도 선포했다.

이 왕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10:5-6)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에게 가서 그들에게 왕국이 도래했음을 말하라.

그러나 그 왕은 거부당했으며 결국 처형되었다. 고레스 왕이 바빌론 포로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칙령을 선포한 지 69주가 지나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 다니엘서 9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리라. 백성이.”( 9:26) 그리고 복음 선포자는 그분이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지셨다고 말하고 있다( 2:23).

이 예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한 주가 남게 된다. 구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사건들과 연대기를 자세히 공부해 보면 하나님은 이 시간(다니엘의 70)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통치하기 전에는 간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다니엘의 70주의 성취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멈춘 것이다.[2] 그러는 동안 이 세상의 왕국은 철과 놋쇠의 이방권력에 의해 통치된다. 이 왕국은 신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비싼 진주인 것이며 이스라엘은 들판에 감추어진 보물인 것이다( 13).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을 되찾게 되면 하나님의 예언의 시계는 다시 움직일 것이다. 남아있는 7년의 시간은 평화와 번영으로 시작될 것이며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고 세상을 속이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마침내 잘 될 것이라고 믿게 할 것이다. 그 주의 중간에 짐승이 나올 것인데 이 짐승은 성경에서 죄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목적은 아브라함 자손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만이 구원받고 산속으로 대피하여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남은 자들은 야곱의 고난의 때의 끝까지 견딜 것이다.

7년이란 기간을 통해 이 세상의 왕국들은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7).[3] 7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왕은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모든 적들을 진멸하고 자신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

다니엘서 7장부터 읽어보자. 그 왕좌들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내가 보매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왕좌는 맹렬한 불꽃 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더라.”(9) 이것은 에스겔서 1장과 10장에서 묘사한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과 동일하다.

불 같은 시내가 그분 앞에서 흘러나오고 천천이 그분을 섬기며 만만이 그분 앞에 서 있더라. 그분께서 심판을 베푸시는데 책들이 펴져 있더라. 그때에 내가 그 뿔이 내는 엄청난 말들의 소리로 인하여 보았으니.”( 7:10-12) 다니엘서 7장에서 우리는 이 뿔이 짐승임을 발견하였다.곧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몸이 파멸을 당하여 타오르는 불꽃에 넘겨질 때에 내가 바라보니라. 그 나머지 짐승들로 말하건대 그들이 자기들의 통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들의 생명은 한 시기와 때 동안 연장되었더라.”(10-12) 이 장면이 정사와 권능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6:10-18). 그것들은 이 세상의 신의 지도 아래(고후 4:4) 이 세상 왕국들을 통치하였다( 4).

내가 밤의 환상들 속에서 보는데, 보라,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들과 함께 와서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니 그들이 그를 그분 앞에 가까이 데려가니라.”( 7:13-14)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분께서 그에게 통치와 영광과 왕국을 주시니 이것은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 그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의 통치는 영존하는 통치요, 없어지지 아니할 통치며 그의 왕국은 멸망하지 아니할 왕국이라.”(14) 이것은 올리브산 위로 다시 오실 주님에 앞서 둘째 하늘에서 행해지는 모습이며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지상 왕국의 통치권을 받는 장면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의 보상을 주시면서 선언을 하신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니( 11:15)

7년간의 야곱의 고난의 때( 30:7)가 지나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그를 경배하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찬양하며, 외칠 것이다. 주께서 친히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기 때문이니이다.”( 11:17) 주님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느니라.”( 28:18) 주님께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신 것은 당연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통해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 6:12)의 통치를 끝내실 것이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왕국은 그분의 소유가 될 것이다( 11).

아담이 타락함으로 사탄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사탄은 그 통치권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그것을 사탄으로부터 빼앗아 그분의 아들에게 주실 것이다.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이제 미가 5:2절을 통해 시간 여행을 해보자.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이 구절에 표시된 세 가지 시제들(tenses)에 주의하라. 하나님이 베들레헴에 육신으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을 통치할 그 날에 대한 예언이 있었다. 또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은 자신의 영원하신 존재에 대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마태복음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러 온 왕의 모습으로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만 우리는 하늘의 왕국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 혹은 요한복음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 성령님은 이 표현을 마태복음으로 제한하셨을까?

왕국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왕국은 직접적으로 그 민족과 관련이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해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이 말라기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 마태복음은 역사를 메시아의 끊어짐까지 이어가기 때문에 본질에 있어서는 구약의 맨 마지막 책이라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6장에 이르러서야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새로운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전까지는 구약을 모아놓은 것이다.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계보로 시작한다. 누가복음은 아담의 계보까지 거슬러 갔으나 마태복음은 왕좌로부터 그 출발을 한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에게 제공된 왕국을 선포하며 침례인 요한과 주님 자신이 회개에 필요한 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규범들이 나온다( 5-7). 요한은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하였으며 예수님도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산상설교에서 왕은 자신의 왕국이 어떻게 통치될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결국 왕은 거부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영광으로 통치할 그 날을 다루고 있다. 예수님은 로마가 통치하고 있던, 즉 넷째 짐승의 시대에 처음으로 오셨다. 다니엘서에서 우리는 첫째 오심과 둘째 오심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점에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중국인들이 서양문명을 파멸시키지 않을 것이다. 회교도들이 그 역할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온전한 교리를 대신해서 두려움과 감정을 동요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팔기는 힘들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하다. 첫 번째 오실 때 그 권능의 왕국과 두 번째 오실 때 권능의 왕국은 동일하다. 시작과 끝을 아는 것은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리에게는 가이사(Caesar) 외에는 왕이 없다( 19:15)고 말함으로써 이 지상에서 하늘의 왕국의 통치권은 거부당했다. 그들의 선조들도 다른 이방 민족처럼 왕을 요구했다.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왕을 원했다. 그들은 약한 인간 군주를 원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질타했다. 예수님과 요한 그리고 사도들도 같은 행동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 왕국을 개선하기 위해서 오지 않으셨다. 주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타락의 군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 지상 위에 전능한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하고, 죄를 멸하고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통치를 이루러 오셨다. 예언자의 선포를 살펴보자. 침례인 요한은 마태복음 3:2에서 외치고 있다.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하늘의 왕국이라고 하는 단어는 마태복음에서만 32번 사용되었으며 다른 신약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왕국과 그 왕좌는 유대인의 것이며 그 왕국의 왕은 유대인들의 왕이기 때문이다.[4]

마태복음 10:1, 6-7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분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너희는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제약 없이 제자들을 파송하셨고 마가복음 끝에도 예수님은 이 제약 없이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이 제약은 유대인들에게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제약은 유대인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하늘의 왕국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로지 이스라엘 집에 가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 이 제약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제약은 하늘의 왕국은 이스라엘 민족의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이 하늘의 왕국을 제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가복음에서는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제공되었다. 하늘의 왕국이 어느 시점에 제공되어 그 계획이 거부되고 실패로 돌아가서 다른 계획으로 하나님의 왕국이 제공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세대주의 해석이다. 주님과 제자들이 하늘의 왕국하나님의 왕국을 동시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하늘의 왕국을 받을 자격은 유대인들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하늘의 왕국을 전파하지 않았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분의 발을 위한 길을 곧게 하였다. 그 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그 민족의 죄였기 때문에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하도록 요구했다. 몇 사람들은 이 설교를 받아들여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으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위선자 혹은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였다.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다( 3:8). 단순히 회개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라고 말한 것이다.

마태복음 9-11장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 왕에 대해 증오심이 증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마태복음 11:20-24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부한 그들을 책망하셨다.

마태복음 12장은 주님이 제공하신 그 왕국에 대한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은 없으며 요나의 죽음, 장사와 부활을 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여성이며 이방인 군주인 시바의 여왕의 예를 따르고 주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그들에게는 모욕적인 것이었다. 요한의 설교에 따라 그들이 변한 모습은 진정한 회심이 아니라고 선포하시며 부정한 영은 돌아가고 그들의 상태는 과거보다 더 나쁘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화를 내며 너희들은 나의 형제가 아니며 더 이상 나의 민족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께서 아직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보라,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이 그분과 말하기를 바라며 밖에 서 있더라. 그때에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선생님의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기를 바라며 밖에 서 있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 12:46-50).

이 시점부터 우리는 하늘의 왕국에 관한 비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늘의 왕국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제공되지 않고 신비에 감추어진 형태로 바뀌었다.

수많은 세대주의자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는 마태복음 13장의 경우,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에게 왕관을 씌우거나 혹은 그분의 부활 이후 두 번째로 왕국을 부여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 비유들은 과거에 발생했던 것들, 즉 오랫동안 왕의 부재와 이방인 찬탈자에 의한 왕국의 타락을 예언하고 있다.

사복음서에서 우리가 혼동하는 부분은 마태복음에서 명백히 보여주는 하늘의 왕국의 메시지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째 복음서는 넷째 복음서와는 구별된다. 마태복음 3장에서 12장에 이르도록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분은 거부당했고 하늘의 왕국의 비유에서 주님은 앞으로 올 교회시대에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구약을 통해 우리가 이스라엘에 대해 아는 것은 그들의 왕으로서 그들을 이 지상에서 통치하는 메시아와 그 왕국이다. 이것이 이제껏 보인 전부이다. 교회는 언급되지 않았고 신약성경의 조명을 통해 구약을 살펴보는 경우에 한해 우리는 어떤 암시를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다시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답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 하매( 1:6) 교회는 구약에서 계시되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님이 전파하던 주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결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잘못된 생각을 승인하거나 혹은 유대인의 왕국 거부를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이후 왕국 제안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잘못된 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분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처형할 것임을 알고 계셨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수많은 예언들이 존재한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지매.”( 2:23) 그러나 마태복음과 다른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왕으로 제시하셨고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바꾸지 않으셨다. 여기에는 모순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안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제안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제공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동일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이다. 왕국 제안은 유대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foreknowledge)이 그 제안이 유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우리는 교회시대에서 하늘의 왕국의 상태에 대한 개괄을 보여주는 7개의 비유를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그것들을 신비(11)로 지칭하고 계신다. 신비라고 하는 용어는 성경에서 알려지긴 했으나 하나님이 계시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어떤 사실을 지칭하고 있다. 주님께서 과거에 명백히 사람들에게 말씀해주신 것과는 달리, 주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듣는데 어리석고 그분의 말씀을 보고 듣는 것에 대해 의도적으로 눈과 귀를 가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듣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형태의 비유를 통해 진실로 알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그분께 진리를 구하도록 하셨다. 그의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그들에게 그 신비에 대한 해답을 주셨다. 빛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둠에 남겨졌다. 큰 무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여들므로이 구절과 다음 16-17절을 비교해 보자. 그러나 너희 눈은 보므로, 너희 귀는 들으므로 복이 있도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대언자들과 의로운 자들이 너희가 보는 그것들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그것들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느니라.”

어느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 왕국을 소유할 수 있었다. 유대인은 이 비유들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적용되는 한 원칙을 발견한다. 구하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의 7개의 비유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그분의 재림 사이의 기간(이 기간이 다니엘 9장에서는 69번째 주와 70번째 주 사이로 묘사됨)에 발생한 일들에 대한 대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일한 기간을 묘사하는 다른 두 개의 일곱이 성경에 존재한다. 이것들은 일곱 명절들(레위기 23)과 일곱 교회( 2-3)들에 대한 메시지다.[5]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만 전파한 하늘의 왕국은 눈에 보이며 이스라엘에게 글자 그대로 제공되는 왕국, 즉 언젠가 예수님께서 통치하는 때에 그들이 누릴 왕국이다. 누가복음과 다른 성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통치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이다. 이 두 왕국은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에 한 왕국에 대한 진리는(마태복음에서 설명된) 다른 왕국(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에서 나타난 진리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두 왕국을 같게 만들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9:14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하시고.” 누가복음 18:16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은 이 두 왕국에 들어가고 거기서 향유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또 다른 예가 마태복음 19:23-24에 나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리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매 누가복음 18:24-25에서도 동일한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그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려우리라!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어떤 원리가 두 왕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이 두 왕국이 동일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옳지 않다. 만일 여러분이 세 개의 원을 하나는 다른 원 안에 그리고자 한다면, 가장 안에 있는 원은 모든 신자들로 구성되고 성령님에 의해 한 몸으로 침례 받은 교회일 것이다. 둘째 원은 모든 신자들, 즉 이 세대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영원까지를 포함하는 신자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왕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밖에 있는 원은 하늘의 왕국이 될 것이다. 하늘의 왕국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묘사된 것처럼, 거짓으로 혹은 진심이 없이 고백한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들은 이 지상 왕국에 들어오기 위해 많은 선한 일들을 행했거나 혹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처벌을 피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원받지는 못했다.

마태복음 13:41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잠시 동안 하늘의 왕국에 거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의 왕국에서 모아다가.” 이 사람들은 하늘의 왕국에 있었으나 하늘의 왕국 밖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하늘의 왕국 비유는 하늘의 왕국에 가라지와 날짐승 등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없다.

이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일곱 비유들은 최소한 2,000년의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분류된다. 앞의 4개 비유에서 사탄은 매우 활동적이다. 첫째 비유에서 사탄은 올바른 씨를 취해 간다. 둘째 비유에서 사탄은 자신이 소유한 거짓 씨를 뿌린다. 셋째 비유에서 사탄은 그룹 안에서 거하고 있다. 넷째 비유에서 사탄은 누룩을 섞는다. 처음 두 비유들에서 우리는 왕국이 개인들로 구성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두 비유들에서는 한 그룹이나 모임으로 왕국을 보게 된다.

이 네 개의 비유들은 주님께서 대중 앞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것은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구원받은 것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의 진리와 허상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조건을 알게 된 것이다.

뒤의 세 개의 비유들은 예수님이 무리를 보낸 후에 한 집(36)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들은 왕국의 내적 상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비유들에서 사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비유들은 하늘의 왕국을 다루고 있으나 동시에 교회에도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

첫째 비유는 씨뿌리는 자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3:3-9에서 보이고 18-23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 비유에서는 씨뿌린 것에 대한 네 가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결과는 단 한 가지만이 성공적이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열매의 양에 대한 정도를 발견하게 된다. 명백한 교훈은 이 세상은 복음을 통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뿌리는 세 번의 실패를 통해 우리는 첫째는 사탄에 의해서 둘째는 육신에 의해서 그리고 셋째는 세상에 의해서 방해 받았음을 볼 수 있다.

둘째 비유(24-30)는 교회시대에서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행위를 통해 믿는 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가르치고 있다(37-43). 불신자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과 믿는 자가 세상과의 분리 없이 사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눈에 보이는 왕국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혼합되어 있으며 이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당연히 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즉 명백하게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것이다. 교회나 하나님의 왕국에는 가라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는 불신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어떤 사람도 버려져서 불타지 않는다. 신약성경의 서신서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가라지를 참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간증을 훼손하는 사람들을 밖으로 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비유를 개신교, 천주교 그리고 그리스정교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 종교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웃을 서로 사랑해야 하며 낙태는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지상 왕국의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세 종교는 또한 유아세례를 구원의 방법으로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의 최종권위를 부인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들을 내버려 두자. 하나님이 이 세상 끝 날에 그들을 불태울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데만도 매우 바쁘다. 이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왕국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모든 주요 종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우리는 각 개인에게 복음을 전파해야만 한다.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으며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불태우거나 고문하지 않는다. 그들을 내버려 두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가리지를 이 지상에서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종교를 버리고 성경적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한, 그들의 대표들이 신자들을 모아서 교제를 추구하는 행위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하늘의 왕국이 보이는 장소에 머무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첫째 비유처럼 이 비유도 교회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왕국시대를 도래케 할 것이라는 잘못된 교리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 비유는 겨자씨 비유로, 한 겨자씨가 공중의 새들이 머무는 큰 나무로 변한다는 것이다( 13:31-32). 이 작은 씨는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이상하게 성장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현상을 복음이 점진적으로 전파되어 모든 세상이 바뀐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해석은 처음 두 개의 비유들의 가르침과 바로 모순이 된다.

겨자씨는 세상으로 퍼지는 확장을 의미하지만 신자들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왕국은 세워지는 것이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공중의 새가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대개 사탄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첫 비유에서 이 논리를 주장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왕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간을 통해 계속 확장되고 영향력을 끼치지만 이스라엘은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선교사들이 가르친 이 왕국 교리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이름만 신자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프리카, 미국 그리고 극동지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인간의 삶은 나아진다. 식량원조, 난민수용소, 병원, 적십자, 무상원조와 다른 수천 가지의 선한 행위들이 타인을 위해서 행해진다. 그러나 이런 선한 행위들을 통해서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천주교, 몰몬교 혹은 다른 수천의 이교도들은 이 나무 가지 위에 거한다.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복종 없이 그들은 선한 일을 베풀기 위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다. 그들은 왕을 거부하면서도 왕국을 도래케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고상한 행위들은 짐승이 통치할 때에 절정을 이룰 것이다.

겨자씨 비유에서 나무는 자신들이 회교도나 불교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 가르침을 수용하기 때문에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겨자씨 비유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겨자씨가 밭에 뿌려졌다고 말씀한다. 마가복음에서는 그것이 세상에 뿌려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정원에 뿌려졌다고 묘사한다. 밭은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13:38), 이를 통해 우리는 광범위한 시야를 얻게 된다. 이것은 세상 전반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기독교적 철학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마가복음에서 세상은 종종 이스라엘과의 관계로 설명된다. 누가복음에서는 정원(garden)은 보다 작은 계시인(a smaller revelation) 성도들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누룩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 그분께서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여자가 가져다가 굵은 가루 서 말 속에 숨겨 넣어 마침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시니라.”( 13:33) 주석가들은 이것이 모든 사람이 신자가 될 때까지 기독교가 점진적으로 전파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비유들에서 가르치는 것과 모순이 된다. 나무는 왕국에 대한 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누룩에서 우리는 내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나무에서 우리는 양(quantity)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질(quality)을 보게 된다.

여기서 넷째 비유의 누룩과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넷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 경고하신 어떤 여인의 더러운 행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들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계시록에서 나오는 여인은 가르치고 유혹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여인은 음식에 누룩을 섞고 있다. 이 두 사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리의 부패이다. 누룩은 음식을 부패케 하는 요소이다 (누룩이 없는 빵, 즉 무교병은 유월절 기간에 필요하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을 통해 우리는 잘못된 교리가 건전한 교리 안으로 들어와서 전체를 부패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교사들이 마태복음 13장의 여인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가르치지만, 이에 상응하는 계시록 2장에서는 그것이 이세벨이라고 말씀한다. 이 여인은 이교도 문화에서 나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잘못된 교리를 가져온 장본인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그들의 신전을 파괴하지는 않았으나 곧 이스라엘 민족은 그녀의 우상과 거짓 신들을 경배했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그 여인은 예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와 전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회 안으로 성경과는 모순되는 교리들을 가져왔다. 결국 그 교리들은 퍼져서 전체 교파가 속고 타락하게 되었다. 이 결과 소수의 진리를 아는 신자들이 분리해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견뎠고 이 과정은 반복되고 있다. 이런 과정이 2,000년 동안 반복해서 행해지고 있다.

거의 모든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교리를 부정한다. 처녀 탄생의 예수님이 아닌 아기 예수님을 섬기라고 한다.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다. 새로운 출생이 유아 세례와 관련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왕국의 언약이 환경운동인 것처럼 가르친다. 낙태 반대가 복음 전파인 것처럼 가르치고 성적 타락을 경고하지 않는다. 성경을 읽으나 그 성경은 변개된 성경이다. 음식이 존재하나 그것은 누룩으로 가득 차있다.

갈보리 이후 사탄은 지하로 들어갔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사탄의 소유물이라는 단어나 그것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서 아무런 내용이 없다. 이 시대에 사탄의 전략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왕국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이 일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고후 4:4)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속임수는 없다(WWJD, Promise Keeping, 목적이 이끄는 누룩, 설교자가 아닌 정신과 의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다음 비유는 마태복음 13:44에서 보인다.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밭(밭은 세상을 의미한다.)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라.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숨겨 두고 그 기쁨으로 인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다니엘의 예언의 마지막 두 주 사이에 이스라엘이 흩어진다. 자신의 귀한 생명을 주심으로 주님은 세상의 죄를 대속 하셨다. 사탄은 우리 주님에게 만일 자신에게 절하고 경배하면 이 세상의 왕국을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내려놓음으로써 세상을 산 것이다. 이 비유에 따르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밭을 사서 언젠가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모으고 그들 선조에게 약속했던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죽으셨다.

히브리서 12: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기쁨의 한 부분은 밭(세상)에 숨겨진 보물(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며 약속된 왕국을 이룩하는 것이다.

45-47절에서 발견되는 진주의 비유도 이와 흡사하다.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으니라. 그가 매우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진주는 바다에서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캐내어져 주인이 그것을 전시하게 된다. 계시록 17장에 의하면 바다는 사람, 민족 그리고 국가를 의미한다. 교회가 이제 보이기 시작한다. 이 진주(모든 성도의 연합체, 고전 12, 4)는 민족들 가운데서 취해져( 15), 그 주인( 1)이 전시를 할 것이다. 그 진주는 주 예수님 자신의 소중한 피로써 산 것이다(벧전 1:18-19).

비유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바다에 던져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라. 그물이 가득 차매 그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렸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가운데서 사악한 자들을 갈라내어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3:47-50)

우리는 바다가 이방 민족을 의미함을 알고 있다. 바다에 던진 그물은 개인들을 민족에서 건져내어 모으고자 했던 시도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비유는 교회시대를 넘어서 우리를 다니엘의 마지막 주로 인도한다. 이것이 우리가 본 것이다.

l       모은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가 아니라 하늘의 왕국으로 이어졌다.

l       인간이 아닌 천사들이 모았다.

l       이 사건은 이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끝에만 적용된다.

l       모인 몇 사람들은 구원받았으나 다른 몇 사람들은 파멸되었다.

 

이것은 대환난을 통과하였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왕국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거하기 위한 어떤 역사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결혼식에는 초대되었으나 올바른 복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비유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22:11).

이 구절은 이사야 66:19-20과 동일 선상에 있다. 또 내가 그들 가운데 표적을 세우고 그들로부터 도피한 자들을 민족들에게 곧 다시스와 불과 활을 당기는 룻과 두발과 야완과 또 멀리 떨어진 섬들 즉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섬들에게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이방인들 가운데서 밝히 보이리라. 주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헌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주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들을 모든 민족들에게서 취하여 말과 수레와 가마와 노새와 빠른 짐승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주에게 헌물로 드릴 것이요.”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과 거듭나지 않는 것이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22, 24:13)는 구절은 몇 사람들이 잘못 가르치는 것처럼 환난시대 혼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육신의 구원을 의미한다( 24:22). 그런 생존자들은 왕국에 들어갈 수 있으나 과연 그들이 그곳에 거주하며 향유할 수 있는가? 그물로부터 건져진 몇 생선들은 하늘의 왕국 원칙에 따라 계속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물로부터 건져진 다른 몇 생선들은 불에 던져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왕국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주의한 성경 학도들이 빠지게 되는 혼란이다.

l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람들은 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구성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하기 전에 휴거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국을 통치하실 때, 그분과 같이 통치하러 올 것이다.

l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고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지 모른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죽는다면 그들은 과거 하나님의 왕국의 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하늘의 왕국에 대한 공부에서 다음으로 나오는 중요한 항목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에게 매우 혼란을 주는 구절이다. 마태복음 16:18-1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하늘의 왕국의 열쇠들을 네게 주리니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 하시고.”

하늘의 왕국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왕국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거듭남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베드로는 처음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주님을 포기하고 거부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책망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때 회개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지했고 그분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 이것이 하늘의 왕국의 열쇠가 된다.

유대인들은 요한의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포기하고 거부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이니이다,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있느리라.”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후로 그들이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면, 그들은 하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시대 끝에 남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문을 열지 않고 사람들을 하늘의 왕국으로 인도하였다. 베드로는 회개한 유대인들을 지상 왕국으로 인도할 그 열쇠를 자신의 손으로 붙잡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마태복음의 말씀은 왕국을(24) 취하시는 주님에 앞서 나오는 표적들과 그 왕국이(25) 나오는 시점에서 민족들에 대한 심판으로 잘 알려진 구절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들을 여기서 다루지 않고 <성경적 종말론>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 두 책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하나님의 역사의 이동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4장과 12장에서는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형태가 마태복음 13장에서 발견된다.

마가복음 3장은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인간의 나머지 육신은 정상이며 그의 마비된 손이 그를 불구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을 대표한다. 율법에 비추어 보면 바리새인에게는 문제가 없다. 성전도 그리고 희생 제물도 문제가 없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고자 했던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켰으며, 결국 그들의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배제되어 버렸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마가복음 3장에서 충돌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사람은 치유를 받고 그때 예수님의 가족이 그 모습에 등장했다. 마가복음 3:31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때에 그분의 형제들과 그분의 어머니가 와서 밖에 서서 그분께 사람을 보내어 그분을 부르니.”

이 장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고 계셨다. 육신적으로는 그분의 가족이 되는 사람들이 와서 말했다. “우리가 여기 있으니 어서 나오시오.” 예수님은 안에서 말씀하셨다. “아니오. 내가 여기 있으니 당신들이 이리로 들어오시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여기서 마가복음 4장을 통해 그 길이 분리됨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국과 이스라엘 민족을 옮기기로 결정하시고 영적인 진리들을 비공개적 영역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마가복음 3:32-35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무리가 그분 주위에 앉았다가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선생님의 형제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자기 주위에 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영적인 관계를 위해 육신적 관계를 끊으셨다.

그리고 마가복음 4장이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분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니 큰 무리가 그분께로 모여들므로 이에 그분께서는 배에 올라가 바다에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땅에 있더라.” 예수님께서 땅 위에 앉으셔서 유대인 무리로부터 분리되신 모습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자.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계시록 17 1절과 15절을 생각나게 한다. 또 일곱 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나와 이야기하며 내게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들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내가 네게 보여 주리라. 또 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본 물들 곧 음녀가 앉아 있는 물들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니라.”

따라서 마가복음 3장의 끝과 4장의 시작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분리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가복음 4:2에서 계속 이어진다. 분께서 비유로 많은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시며.” 이 시점까지는 어떤 비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에 공개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비밀(private)이 되었다.

마가복음 4:10-1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분께서 홀로 계실 때에 그분 주위에 있던 자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에 대하여 그분께 여쭈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그분의 가족과 민족이 아니고 믿는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밖에 있는(이 지상에 존재하는 그분의 가족과 민족)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비유로 행하여졌나니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육신적으로) 알지 못하고(영적으로) 듣기는 들어도(육신적으로) 깨닫지(영적으로) 못하게 하사 언제라도 그들이 회심하여 자기 죄들을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따라서 우리는 마가복음 초반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계시한 사실을 거부한 그 민족에 속한 사람들에게 선을 그으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다면 그 어떤 이스라엘 자손도 병들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셨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올바로 지켰다면 그 어느 누구도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은혜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육신으로 오신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다. 따라서 과거에 계시된 진리는 그들로부터 철회되었다. 빛이 거부된 이후 어두움이 찾아왔다.

비슷한 내용을 마태복음 12:46-50에서 볼 수 있다. 그분께서 아직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보라,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이 그분과 말하기를 바라며 밖에 서 있더라. 그때에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선생님의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기를 바라며 밖에 서 있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

비슷하게 보이는 이 구절들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가복음 3:35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2:50에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하늘의 왕국을 다루는 유대인의 책이며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와 그 민족과의 관계를 보게 된다. 이에 반해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왕국을 다루는 이방인의 책이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늘에 결코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 있을 뿐이었다.

요한복음 3:1-5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바리새인들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의 치리자더라.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하매.” 그 기적들은 유대인을 납득시켰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들을 거부하였다. 그들에게 지식은 있었으나 믿음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영적인)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육신적으로) 하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영적인).” 어떻게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왕이 다시 올 때까지 여러분은 기다려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여러분은 영적인 출생인 두 번째 출생이 필요하다. 그 어떤 육신적 출생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가복음 17:20-21을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하나님의 왕국이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다그쳐 묻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임하지 아니하며 또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시니라.” 구약성경의 수백 군데에서 여러분은 하늘의 왕국에 관해 관측할 수 있다는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보이지 않는다. 영적으로 거듭난 인간이 그곳에 들어가며 믿는 자 안에 그 왕국이 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마가복음 4:11과 다음의 마태복음 13:11을 비교해 보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한 곳에서는 하나의 신비라고 되어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복수의 신비들이라고 되어 있음이 보이는가? 하늘의 왕국은 신비가 아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장들은 하늘의 왕국에 대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 다니엘서 9장의 마지막 두 주 사이(68째 주와 70째 주)에 존재하는 교회시대의 기간에 대해 구약에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매우 생소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하늘의 왕국은 전혀 신비가 아니나 그 왕국에 대한 어떤 특이한 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왕국은 구약에서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모든 것이 신비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공관복음서가 아니다.[6] 그들은 어떤 사건에 대해 동일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들은 매우 다른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마가복음 4:14-20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영적인 왕국으로 연관시키고 있다.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느니라. 길가에 있는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이 뿌려질 때에 듣지만 즉시 다가오는 사탄에게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겨 버리는 자들이니라. 또 그와 같이 돌밭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나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만 견디다가 후에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즉시 실족하는 자들이요,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정욕이 들어와 말씀을 숨 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니라. 좋은 땅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얼마는 삼십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백 배의 열매를 내는 자들이니라, 하시니라.”

이 왕국에 대해 우리가 배우는 첫째 진리는 그 왕국에는 칼이나, , 무기, 경계, 수도, , 통치자, , 부자 혹은 조직 같은 것은 없고 인간이 말씀만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본부나 정부조직 혹은 어떤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혹은 군사적 모습이 없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어떤 근거도 성경에는 없다. 단지 사람들이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믿고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으며 믿는 모든 사람들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이 신비라고 생각하면 구약으로 돌아가서 하늘의 왕국에 대한 모든 것들을 읽어보라. 그 왕국은 경계들과, , 율법, 왕들, 계명, 축제일과 제물에 대한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은 물리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교회시대의 모든 날은 같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한 축제가 있는데 이는 주님의 만찬이다. 다른 거룩한 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이다. 신약교회에는 어떤 왕이나, 왕자, 통치자 혹은 군대대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형제이다. 이 왕국은 과거에 존재했던 그 어떤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비인 것이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업) 밑에나 침상(가정) 밑에 두려고 등잔불을 가져오느냐? 등잔대 위에 두려고 가져오지 아니하느냐?”( 4:21) 계시록 1장에 의하면 등잔대는 교회를 의미한다. 주님은 그분의 백성을 보내서 따로 분리되어 살도록 보내지 않으셨다. 그분의 의도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고 섬기도록 하는 것이다.

감추어 둔 것 중에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은밀히 간직한 것 중에서 널리 퍼지지 아니할 것이 없느니라.”(22) 마태복음에서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간 것처럼 여기서도 등잔대의 불빛이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밝히 비추는 것이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듣는 것에 주의하라. 너희가 무슨 척도로 재든 그것대로 평가를 받으리니 듣는 너희가 더 많은 것을 받으리라.”(23-24) 여기에 경이로운 약속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수록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는 그들이 성경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39권의 성경을 주셨으나 그들은 그 모든 빛을 거부했다. 로마서 11장은 우리에게 주님은 만일 원래 가지가 원하지 않는다면 새롭게 접붙인 가지에게 영양소를 공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진리는 원하는 자가 소유하게 될 것이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과 같으니 그가 밤낮으로 자고 깨고 할 때에 그 씨가 돋아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니 처음에는 잎사귀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뒤에는 이삭 안의 알찬 곡식이라. 그러나 열매가 맺히면 그가 즉시 낫을 대나니 이는 수확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26-29)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관찰하고 걱정을 기울이는 것은 그 씨의 성장과 발육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발견한다. 만일 그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다면 잘 자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시들어 죽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다. 여러분은 혼을 구원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한 인간을 믿도록 할 수 없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씨를 뿌리게 되면 그것은 경이롭게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주님이 그 일을 행할 것이다. 인간은 어떤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가짜 결과를 만들고자 할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과와 진정한 회심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말씀의 권능으로 가능하다. 인간이 씨를 뿌리고 물을 줄 수 있으나 성장을 시키는 분은 하나님인 것이다(고전 3:6-7).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어디에 비유할까? 혹은 그것을 무엇과 비교할까? 그것은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라. 땅에 뿌릴 때에는 그것이 땅에 있는 모든 씨보다 작되 뿌린 뒤에는 그것이 자라서 모든 채소보다 크게 되며 큰 가지들을 내므로 공중의 날짐승들이 그것의 그늘 밑에 깃들이느니라, 하시니라.”( 4:30-32) 이것은 매우 산뜻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차이는 매우 현저하고 영광스럽다. 여기서 퍼지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가지이다. 마태복음 13:32에서 본 것처럼 겨자씨 그 자체는 나무로 성장할 수 없다. 자연 상태로는 그대로 있지만 땅을 통해서 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나뭇가지들은 예루살렘의 높은 곳으로부터 퍼져서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남미 그리고 호주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작할 때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정치적 운동으로 변형시키지 않으며, 복음을 군대로, 주고받는 것을 통해 부를 축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작한 그 모습대로 유지된다.

그 신비는 2,000년 전 한 조그만 도시에서 어부, 세리, 배우지 못한 사람, 여자와 목수들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원자에 대해 듣게 된 것에서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믿었고 그 말씀은 계속 전파됐다. 그 말씀은 도시에서 도시로, 대륙에서 섬으로, 대륙에서 대륙으로 전파됐다. 위로는 북극지방으로, 아래로는 아르헨티나 맨 끝까지, 아프리카 정글로부터 런던에 이르기까지, 몽골리아 정상에서부터 아라비아 사막까지, 보통 남자 여자는 겨자씨가 좋은 토양으로부터 나타난 그 첫 날부터 행해진 것들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동일하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또 다른 차이를 인지해야만 한다. 마태복음의 비유에서는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의 가지에(IN) 깃들인다( 13:21) 말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에서는 공중의 날짐승들이 그것의 그늘 밑(UNDER THE SHADOW)에 깃들인다( 4:32)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성경은 경이롭지 않은가! 하늘의 왕국에는 새들이 있다. 하나님의 왕국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새들이 나무 밑에 올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안에는 결코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열매가 맺히면 그가 즉시 낫을 대나니 이는 수확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4:29)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의 왕국의 신비의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라지의 비유는 마가복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 세상 끝 날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보면 수확만이 있다. 모아서 불태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분노를 만들거나 던져져 버리거나 가짜인 것이 없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거짓 회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왕국에서는 거짓 고백이 존재할 수 있으나 영적인 왕국에서는 불가능하다. 영적인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거듭났고 따라서 어떤 사람도 불태울 필요가 없다.

마태복음 13:24-25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다른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 그러나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자기 길로 가매.” 마가복음 4:26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과 같으니

하늘의 왕국 비유에서 밭을 돌보는 것은 인간들(복수) 이다. 그들은 명백히 자신의 임무에 실패했다. 하나님의 왕국 비유에서 땅을 돌보는 것은 한 사람(예수님)이다. 그래서 그것은 순수하다.

이 해석을 지지하는 다른 차이점은 돌밭에 뿌려진 말씀을 듣는 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고난에서 발견된다. 마가복음에서 그들은 고난이나 핍박에 직면하게 되는 반면에(4:17) 마태복음 13:21에서 그들은 환난이나 핍박을 받게 된다.

이 차이점들은 그리 놀란 만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첫째 비유를 해석해 주심으로 우리는 각 비유에 적용할 수 있는 힌트를 얻게 되었다. 마태복음 13:19에서 씨 뿌리는 자는 왕국의 말씀을 뿌리나 마가복음 4:14에서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린다고 적혀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비유에 대한 주된 주제는 실패임을 고려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와 관련이 있는 모든 비유는 씨 뿌리는 것으로부터 성공을 약속 받는다. 이 비유 가운데 어떤 것도 결과가 모자를 것이라는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이 기대한 것 이상의 성장을 보장하고 있다.

이 비유들에서 마지막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잃는가에 대한 것이다. 마태복음 13:15에 나온 하늘의 왕국의 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말씀에 무디어지면 복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묘사하고 있다. 내가 그것들을 고치려 함이라.” 그러나 마가복음 4:12에서는 그들의 죄들이 용서받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현저한 생각의 차이는 우리가 각 왕국에 대해 알고 있는 진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른 두 개의 예를 통해 이 차이를 명백히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1:17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56:7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가르치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모든 민족들에게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예수님이 마태복음 21:13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하였거늘여기서는 민족들이 삭제되었다. 마태복음은 여기서 유대인의 하늘의 왕국과 관련이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변화산에서 영광 가운데 계시되는 예수님의 모습을 고찰해 보자. 마태복음 16:27-2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영광 중에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이요, 그때에 그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아들의 왕국이며 그분이 다시 오신 후에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 받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마가복음 8:3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러워하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러워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는 주님이 어떤 사람들을 부끄러워하나 거기에는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는 말씀은 있으나 왕국에 대한 언급은 없다.

누가복음 9:26-27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러워하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자기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 중에 올 때에 그를 부끄러워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아버지와 천사와 더불어 아들도 영광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우리는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반면에 하늘의 왕국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통치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또한 마태복음의 계시는 하늘의 왕국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변화산 사건 이후 엘리야가 오는 것에 대한, 즉 구약의 마지막 언약과 연결되는 한 가지 질문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논의는 나오지 않았다.

마가복음 4:1로 돌아가 보자. 그분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니 큰 무리가 그분께로 모여들므로 이에 그분께서는 배에 올라가 바다에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땅에 있더라.”

여기서 주님은 가족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왕국, 민족들, 친척들, 외국인과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은 은혜의 시대에 민족들 가운데 교회의 모습으로 끝나게 된다. 바로 그 날 저녁이 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 그들이 무리를 보내고 그분을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작은 배들도 그분과 함께하더라. 큰 폭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서 이제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으되.”( 4:35-37)

그들이 예수님과 항해하자마자 다른 편에서는 폭풍이 발생했다. 모든 것이 편안한 항해가 아닌 고난과 역경 그리고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께서 마가를 통해 이 진리를 기록하도록 하셨다. 그 작은 배는 폭풍에 견뎠지만 힘든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분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라. (인간이 씨를 뿌리고 그가 잠든 비유를 기억해 보라)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매 그분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즉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이르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분께 순종하는가? 하더라.”( 4:38-41)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돌보고 계심을 의심하며 생존할 수 있는가를 두려워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폭풍들을 알고 있었고 교회 구성원들은 배가 항해를 시작한 후에 그 안과 밖에서 이와 같은 고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바다에 빠져 죽지 않았다. 그 배는 계속 항해를 했다. 그분의 시간에 예수님은 배와 선원 모두를 잠잠하게 하였다. 필요한 경우에 주님께서는 자신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으나 그 지위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의심을 할지 모르나 여전히 그들이 주님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항해한 모든 사람들은 안전하게 다른 편으로 옮겨졌다.

마가복음 5장에서 주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다루시는 엄청난 방법을 볼 수 있다. 22절에서 회당의 한 치리자가 나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다. 그에게는 죽음 직전에 있는 한 딸이 있었고(23) 예수님은 그녀를 도와주셨다(24).

그런데 또 다른 여자가 나오는데 그 여자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25). 그녀는 의사들을 통해 치유를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고통만 당하였다(26).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다. 믿음으로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고 마침내 치유를 얻게 되었다(27-28). 그녀는 치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으로부터 효력이 나아가 그녀에게 전가되었다(29-30). 그 여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했으며 주님을 통해 위로 받고 평화를 얻게 되었다(34). 그리고 그녀는 그 현장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다시 주님이 유대인을 다루시는 사건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 소녀는 이제 죽었고(35) 많은 사람들은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35).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를 불러 믿음을 가지도록 명령하셨다(36). 그분이 집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는 큰 슬픔과 소란이 있었다(38). 그분은 그 무리를 잠잠케 하시고 그들에게 이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39). 죽음이 주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다고 단언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비웃었고 심지어 그분의 말씀을 조롱했다(39). 예수님은 그들을 그 현장에서 내쫓으셨다(39).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과 함께 주님은 거하시며 그 소녀의 생명을 회복하시는 현장에 동행하셨다(40-41). 권능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죽은 자로부터 그녀를 일으키시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세상을 걷게 되었다(42).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고려해 보자. 그들의 민족적 죄와 율법에 대한 반역으로 인해 그들은 죽음 직전에 있었다. 그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구한 몇 몇의 신실한 자들이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택함받은 민족을 도와주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이 이야기 중간에 온전하지 않은 한 여인(교회의 모습을 예표함)이 끼어들게 된다. 아담의 아들들은 매우 고통 받았다. 그들은 잇따라 어떤 종교와 철학에 빠져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거부당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그들은 가로막는 대중을 뿌리치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온전케 만들었다. 주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모든 치유의 기적 가운데 어떤 것도 그분에게서 나온 효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구약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으나 오직 교회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제공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고 아버지와 같이 그들 안에 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 기뻐하며 그분으로 인해 위로 받고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 그녀는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여인에 의해 중단되었던 유대인과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시작된다. 그 민족은 이제 죽은 자로 여겨지며(잘려져 나감-로마서 11) 많은 사람들은 다시 살 수 있다는 소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요구하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세상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큰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될 것이다. 주님은 회중의 무리에게 들어가 이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초림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조롱하고 거절했다. 복음서의 예언과 계시록에서 말한 것과 같이 주님은 그들을 무대에서 쫓아낼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주님과 거하며 주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남은 사람들을 약속의 땅으로 회복하실 때 그들과 같이할 것이다. 주님의 권능의 말씀을 통해서 죽은 자로부터 신실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37) 그들은 다시 한 번 지상에서 걷게 될 것이다.

그 여인은 자신이 살아있는 12년 동안 아팠던(25) 사실을 기억하라. 따라서 유대인이 한 민족을 이루고 있었던 기간에 이방인들은 소망 없이 그리고 주님과의 언약 없이 살아왔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행위나 율법이 아닌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사이에는 다섯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왕국은 우주적이다. 이 왕국 안에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복종하고자 하는 모든 창조물이 존재한다. 그것은 천사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누가복음 13:2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있고 너희 자신은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따라서 하나님의 왕국에는 믿음으로 들어온 구약시대 성도들도 존재한다.

히브리서 12:22-23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총회와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와 모든 것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따라서, 천사들과 교회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온전하게 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있는 것이다.

하늘의 왕국은 이 세상적 왕관과 민족들로 제약되어 있다. 결국 그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실 예수님께 속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왕국은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3:3-7). 그러나 하늘의 왕국은 겉으로 보기에 의로운 사람이지만 주님을 믿은 적이 결코 없는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7-8은 하늘의 왕국에 자리를 잡고 있으나 그들의 마음은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그 천 년이 다 차매 사탄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고 나가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이며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이 사람들은 하늘의 왕국에서 살았으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던 사람들이었다.

셋째, 하늘의 왕국은 지상에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왕국을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 두 왕국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결코 이 두 왕국은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국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그런 왕국이 아니다.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11:12)

넷째, 하나님의 왕국은 외부적으로 보이는 증거를 동반하지 않는다( 17:20). 그것은 내적이며 영적인 왕국이다( 14:17). 그러나 하늘의 왕국은 볼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통치하러 왕이 오시면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이다.”

다섯째, 하늘의 왕국은 결국 하나님의 왕국과 합쳐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4-26을 살펴보자. 그때에 끝이 오리니 곧 그분께서 모든 치리와 모든 권세와 권능을 물리치시고 왕국을 하나님 곧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때라. 그분께서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 그분께서 반드시 통치해야 하나니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

믿지 않는 모든 민족이 사라지면 이 두 왕국을 따로 유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것에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여기 마태복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2] 이것이 어느 누구도 휴거나 주님의 재림시점을 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시계는 멈추어져 있다. , , 월 그리고 연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유대인과 관련해서 시간을 정하신다. 왜 하나님은 교회와 관련해서 시간을 정하지 않으셨는가? 우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저자의 <Fascinating Truths>를 참조하기 바란다.

[4] 이 구절은 자유주의 교회들을 비난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회심하면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언약을 오해함으로 유대인들의 회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5]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2-3장의 내용을 저자의 <성경적 종말론>에서 상세히 비교 설명하고 있다.

[6] 통상적으로 사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을 제외한 나머지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서라 지칭한다. 그 이유는 이 세 복음서의 내용이 상호의존적으로 서로 일치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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