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2.09.12 00:55

세대주의 재고찰-제8장 구약 시대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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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8장 구약 시대의 구원

 

이 주제의 목적

저자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편지나 전화문의를 받고 있다. 성경집회나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종종 질의 응답시간을 갖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구약시대의 구원에 대한 것이다.

왜일까?

잠시 생각해 보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00년 동안 한 사람만이 제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고 싶어 했던 그 어떤 사람도 지난 20세기 동안 쉬지 않고 이 문제를 고민했다. 왜 이 문제가 이토록 주목을 받아 왔을까?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자만 때문이다.

나에게 잠깐의 시간을 주면 이 문제의 퍼즐을 풀고자 한다.

오직 교만에 의해서 다툼이 생기나 좋은 충고를 받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13:10) 신약 교회에는 지식숭배와 건전한 교리를 혼동하고 형제들과 싸우는 것과 믿음을 위해 싸우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처녀탄생의 교리를 믿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간과하고 있다. 사탄이 가지고 있던 교만은 능력을 주신 하나님보다는 그 능력이 가지고 있는 높은 지위와 영광만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자만 때문에 자신의 성경지식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러한 착각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의 주장대로 누가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성경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피로 씻기고 거듭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는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른 성경을 보고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수많은 설교자와 교회들이 킹제임스성경이 영어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나 그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기준, 음악 그리고 종파를 가지고 있는 교회들도 보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올바른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만 옳다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러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구약 시대의 구원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이슈화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구약 시대에도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는다고 하면, 당신은 그들이 새국제번역본(NIV)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비난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구약 시대에는 구원받기 위해 선한 행위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하면 당신은 그 즉시 참되고 정직한 진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당신은 킹제임스성경을 믿는다 해도 성경이 두 가지 구원 방법(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과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다고 해야 믿음이 없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정직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구약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물어본다면 여기에는 세 가지 의도가 숨어있다.

1. 질문을 한 사람은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완벽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2. 질문을 한 사람은 이 주제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근거로 교제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당신이 지금 이 시대에는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알고 믿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다. 만일 당신이 구약 시대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행위도 필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형제라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3. 질문을 한 사람이 이 문제를 통해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경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자 한다.

 

어떤 두 사람이 성경의 중요한 문제들, 예를 들어 삼위일체, 처녀 탄생, 신약 구원, 킹제임스성경, 재림, 휴거 등의 문제에서는 정확히 일치하지만 나사로가 어떻게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서로 비난하는 엄청난 상황을 본 적이 있다.

다툼의 시작은 사람이 물을 엎지르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싸움에 말려들기 전에 그것을 그칠지니라.”( 17:14)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다툼 속으로 들어가고 그의 입은 매를 불러들이느니라.”( 18:6)

교회 구성원들이 설교자의 잘못된 인도를 통해 자신의 형제들을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사라져야만 한다. 비웃는 자를 쫓아내면 다툼도 나가리니 참으로 싸움과 모욕이 그치리로다.”( 22:10).

이 문제에 관해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받은 신자이며 복음을 전파하고 혼을 구원하는 진실된 사람임을 나는 명백히 하고 싶다.

빌립보서 1:16-17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저들은 내가 결박 당한 일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성실하지 않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워진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 어떤 일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는 다른 형제에게 피해를 주고자 하고 싸우기 좋아하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목사가 되어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 있다. 이 세상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

나는 구약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나의 삶에 충실하고자 한다. 당신이 이 주제에 대해 나와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며 선함과 존중함으로 대하고자 한다. 만일 당신이 이 문제를 통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자신을 높이지만 않는다면 이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구약시대의 구원에 대한 두 가지 관점

구약시대 구원에 대한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관점이 존재한다. 침례교회와 다른 근본주의 그룹에서 역사적으로 취해왔던 입장은 갈보리 십자가사건 이전의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앞으로 바라보고 구원받았고, 갈보리 이후 사람들은 십자가를 뒤로 바라보고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주장은 다소 변할 수 있으나 기본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이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으나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첫째,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미리 바라보셨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예수님의 증언은 대언의 영이니라.”( 19:10) 성경 전체 예언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이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이 그 첫째인데 그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셨다는 것과 그 분께서 권능과 영광의 모습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변형산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계획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복음 9:28-3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 이 말씀들을 하신 뒤 여드레쯤 되어 그분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더라. 그분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분의 옷이 희게 되어 눈부시게 빛나더라. 보라, 두 사람이 그분과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더라. 그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그분의 별세에 관하여 말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당신은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할 것이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시고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24:25-27)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창세기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는 어디서도 복음의 진리를 볼 수 있으셨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볼 수 있었음이 명백하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10-12를 보자.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자기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실 때에 그 영께서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는지 탐구하였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그것들을 수행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수행하였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었는데 그것들은 곧 복음을 선포한 자들이 하늘에서 보내신 성령님과 더불어 이제 너희에게 전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 이 두 가지 모두 예언서의 주제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5:39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성경 구절들은 다름 아닌 구약성경이다.

고린도전서 15:3-4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였는가?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바울이 인용한 성경기록은 다름 아닌 구약성경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디모데후서 3:15에서 볼 수 있다.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의 내용은 디모데가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이 복음의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십자가를 미리 내다본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언자들이 기록한 내용들을 그들 자신이 얼마나 이해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 인용한 구절은 명백하다. 이 사람들은 구원자의 고통을 통한 구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을 부여해 주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기록한 사람들이나 그 말씀을 듣고 본 사람들에게 설명되지 못했던 부분들이 존재했다.

만일 십자가를 미리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보낸 삼 년 반 동안 자주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고 예까지 들어 주셨으나 제자들은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럴 수 없다고 반응했다. 그들은 확실히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지 못했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였으나 베드로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꾸짖기 시작하여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 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거늘( 16:21-22) 이것을 보고 누가 베드로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가복음 9:43-45을 보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에 심히 놀라거늘 그들 각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놀랄 때에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셨으나 그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그것이 그들에게 숨겨졌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더라. 그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그분께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더라.” 제자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매우 명백하지 않은가?

심지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도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만일 그들이 진리를 인식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믿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분의 무덤 앞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그들은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복음 24:1-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제 주의 첫날 매우 이른 아침에 그들이 자기들이 이미 예비해 둔 향품을 가지고 다른 어떤 자들과 함께 돌무덤에 가서 돌이 돌무덤에서부터 굴려진 것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주 예수님의 몸을 찾지 못하였더라. 이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매우 당황해 할 때에, 보라, 빛나는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그들 곁에 서 있으므로 그들이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저들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일어나셨느니라. 그분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셋째 날 다시 일어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그들이 그분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돌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고하니라.”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사건 이전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받았다는 오래된 이론을 거부해야만 한다. 가장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런 예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구약시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단순한 교리를 받아들였다.

30초만 합리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이 주장의 허구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주장을 견지하고 있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다음의 두 가지 주장들도 또한 사실일 것이다.

1. 모세 이전에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역사상 최소 1,500년 동안 구원 받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2. 율법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인간 역사상 최소 4,000년 동안 유대인 외에는 그 누구도 구원 받지 못했을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엄격하게 규정된 하나의 민족적 언약인 것이 분명하다. 신명기 4:6-8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것들을 지키고 행하라. 이것이 민족들의 눈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명철이니라. 그 민족들이 이 모든 법규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민족은 참으로 지혜와 명철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부르며 구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것 같이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가까이 모신 그런 큰 민족이 어디 있느냐? 이 날 내가 너희 앞에 두는 이 모든 율법과 같이 의로운 법규와 법도를 가진 큰 민족이 어디 있느냐?” 로마서 9:3-5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육체에 따른 내 형제, 내 친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으리니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니라. 그들에게는 양자 삼으심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속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통해 합리적인 생각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십자가 이전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선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논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구약시대 구원을 결정하는 두 가지 특징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존재했던 시대의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 구원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간단한 방법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우리는 구약시대 율법에 대한 신약성경의 해석을 살펴 볼 수 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율법을 지켰던 사람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이 죽어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율법의 효율성에 대해 매우 확실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첫째, 율법은 죄로부터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고 확실히 단언하고 있다. 로마서 3:20-28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 (, 율법과 대언자 모두 율법을 통해서는 의롭게 됨이 불가능함을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어느 누구도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은 반드시 믿음을 행사해야만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여기서 우리는 나중에 명백해질 것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접근하게 된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참으심을 통해 다루셨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과거의 죄들은 사면될 수 없었다)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따라서 하늘나라에서 율법을 지키고 선한 행위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과 예수님을 믿어 그분의 공로로 구원에 이른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얼마나 이상한 생각인가! 예수님 외에 그 어떤 자랑도 할 수 없다. 예수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게 된다( 5:12))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

우리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데 성령님과 사도들과 일치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사도행전 13:38-39은 동일한 구절이다. 바울은 과거 시대를 고찰하면서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을 설명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아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곧 이 사람을 통해 죄들의 용서가 너희에게 선포되었다는 것과 또 모세의 율법으로는 너희가 의롭게 되지 못하던 모든 일에서도 믿는 모든 자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라.”( 13:17-25)

구원의 방법이 시대마다 다양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경우를 인용하고 있으나 이는 성경과는 대치되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현재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이 그 시대에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연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선조들(17), 이집트 속박 시절(17), 광야에서 떠돌던 사람들(18), 여호수아의 날들(18) 그리고 재판관 시절(20), 사울(21), 다윗(22) 그리고 침례인 요한(25)까지 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역사를 언급하였으며 그들은 결코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다

율법은 죄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대상이나 사람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 히브리서 7:18-1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그리스도 앞서 있던 율법)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 (만일 율법이 수천 년 동안 구원의 수단이 되었다면 어떻게 그것을 무익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으므로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것은 교회시대 혹은 유대민족에서 교회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를 의미하는 현재 시제가 아니다. 이것은 과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그 어떤 것도 율법 아래서 완전하지 못했다는 과거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진리가 히브리서 10:1-4에서 인상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율법은(명백하게 기술하고 있음)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는 가지고 있으나 그 일들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므로 (결코 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린 그런 희생물들로는 거기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랬더라면 경배하는 자들이 한 번에 깨끗하게 되어 더 이상 죄들을 의식하지 아니하였을 터이므로 그것들을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그러나 그 희생물들에는 해마다 죄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니라.”

성경 교사들이 어떻게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이 레위 지파의 희생제물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학생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위로는 어떤 사람의 죄도 제거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가? 만일 구약시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심각한 농담을 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는 방법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다!

셋째, 성경은 율법 전체를 지키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2:16-21은 주님의 말씀가운데 핵심교리가 되는 구절이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의 간증은 확고하다. 그것은 물릴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성령님의 영감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된다면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헛된 수고였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잠시 생각해 보자. 만일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 죽게 하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21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필요했었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 2:16)

넷째, 율법은 결코 죄를 제거할 수 없었으며 인간을 의롭게 하거나 그에게 의를 전가해 줄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율법은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 갈라디아서 3:21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

그러나 명백히 지키는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다. 나는 어떤 비판적인 태도나 영으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수많은 율법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며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 율법에 대한 앞의 네 가지 진리에서 본다면 이 다섯째 내용은 그 자체가 매우 명확하다. 율법은 인간의 마음에 화평을 줄 수 없다. 히브리서 9:6-10은 참으로 위대한 구절이다. 이제 주께서 이것들을 이와 같이 제정하시매(율법아래 희생제물) 제사장들이(율법으로 기름부음 받은) 항상 첫째 성막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하였거니와(율법에 규정된) 둘째 성막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해마다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잘못으로 인해 자기가 드리는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니(여기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대제사장이 하나님께서 정한 거룩한 날과 장소에 하나님께서 규정한 제물을 헌물로 드리고 있다) 이로써 성령님께서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은 첫째 성막이 아직 서 있는 동안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경배를 보이시며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을 행하라 그러나 여전히 너는 주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므로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섬기는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며(과거시제) 이 성막은 단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육신에 속한 규례들로만 유지되어 개혁의 때까지 그들에게 부과되었느니라.”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전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이 어떤 근거가 있다고 잠시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성경 구절을 통해 구원의 조건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발견해야만 한다. 우리가 모든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가? 혹은 항상 율법의 일정부분을 지켜야만 하는가? 혹은 주어진 율법 가운데 85%를 지켜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야고보서 2:10-11은 명확하게 답변하고 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께서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이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이것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은 없을 것이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의 복된 교리를 믿는 한 사람이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인다면 그 사람은 단 하나의 죄를 짓는 결과로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논리를 강요 받게 된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살인이나 유괴와 같은 큰 범죄만이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죄라도 그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많은 사람들이 이 기본적인 교리를 망각하고 예수님 죽음 이전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 일은 참으로 불가능하다.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당신은 율법을 반드시 어기게 되며 단 하나의 율법을 어기더라도 율법 전체를 어기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모임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바리새파에 속한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이르되,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일을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함께 오니라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15:5-6,10)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이해했던 내용을 우리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으로부터 우리가 구약 율법에 대해 배운 것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없다.

2. 율법은 죄를 제거 할 수 없고 순종하는 자를 온전하게 할 수 없다.

3. 율법은 의로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4. 율법은 생명을 주지 않는다.

5.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는 두 가지 목적이 존재한다. 첫째 목적은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데 있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규정한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에 대한 형벌이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개인적으로) 혹은 땅의 손실(민족적으로)을 의미하게 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는 보상은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이 아니라 건강과 번영을 소유한 현 세상에서의 축복된 삶(개인적으로)이며 약속의 땅에서 평안을 취하는 것이다(민족적으로).

구약시대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이 죄 사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성경구절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약속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원받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주님께로부터 왜 등을 돌렸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스라엘 민족이 소망하던 메시야는 자신들의 죄를 제거하는 분이 아니라 자신들의 적을 물리치고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그 율법을 완성해줄 분이었으며 그들은 그러한 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논점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19장부터 누가복음에 이르는 모든 구절들을 인용해야만 한다.

여기서는 누가복음 24장을 살펴보자. 당신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침에 무덤을 찾아온 제자들의 얘기를 기억할 것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에 우리는 제자들 가운데 두 명이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의 죽으심과 그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했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이 믿음 없음에 대한 이유를 살펴보자. 누가복음 24:15-2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의논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오사 그들과 동행하셨으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것들이 무슨 대화이기에 너희가 슬퍼하느냐? 하시니 그 중의 한 사람 곧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대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단지 나그네로 있기에 요즘 거기서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하느냐? 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무슨 일들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니 그분은 하나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에 능력 있는 대언자였는데 수제사장들과 우리의 치리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죽도록 정죄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그들이 믿었던 내용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들은 개인이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민족적으로 적으로부터 구속 받는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

따라서 율법을 이해하고 메시야가 오기를 소망했던 사람들은 개인의 구원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보존을 가르쳤다.

율법의 둘째 목적은 죄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율법은 어느 누구도 구원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율법의 기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구원의 올바른 방법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양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무수히 많은 인간 정부의 법령을 통해서 이를 명백히 하였다. 율법은 구체적으로 죄를 규정하였고 그것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항상 희미하게나마 자신이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명령을 통해 기회를 타서 내 안에 온갖 욕정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기 때문이라. 전에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살아 있었으나 명령이 오매 죄가 되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정하신 명령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인 줄 내가 알았나니( 7:7-10)

따라서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명들은 현재 인간의 마음 상태를 계시해 주고 있다. 이 계시는 죽음을 선포하고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부여해 주고 있다. 우리는 왜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는가? 앞의 구절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나는 죽었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노라.” 그러나 그 구절은 걷고, 말하며 숨 쉬는 한 인간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통해 이루어진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했으나, 율법의 모든 계명들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율법을 따르고, 희생제물을 통해 특정한 죄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서 7장과 10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용서를 받은 다음날 인간은 다시 죄를 짓는다. 결국 인간은 수없이 많은 제물을 바친다 해도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인간을 다시 죽이는것이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죄인이었으나 율법은 죄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율법은 장갑 안에 있는 주먹과 같은, 그리고 활에 꽂혀 있는 화살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5:5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수백 년 동안 인간은 자신들이 의로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주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모세가 산에서 가지고 내려오자 죄는 더욱 넘치고, 강해졌으며 더욱 명확해졌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은 인간에게 생명과 구원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인임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붙잡혀서 나중에 계시될 믿음에 이르기까지 갇혀 있었느니라.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3:21-24)

모든 희생제물과 헌물과 계명과 스스로를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뿐이다. 바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3:20)

따라서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다.

만일 천주교인이나 안식교인이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율법이 구원과는 상관없음을 보여주는 앞의 인용 구절들을 보여주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구약시대 구원의 주제를 통해서 교회를 분열하고자 시도하는 경우, 독자 가운데 몇 사람은 앞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망각할지도 모른다. 현재의 진리는 과거에도 진리이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써 이루어질 수 없다.

디모데전서 1:5-11을 통해 우리는 율법의 특성과 기능에 대해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이제 명령의 목적은 (명령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여기서 고려하는 것은 명령들의 종착역, 즉 그것들이 여러분을 데리고 가는 장소이다)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따라서 목적은 순수함과 믿음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것에서 벗어나 헛된 말다툼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성경은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진 이유나 혹은 그것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줄 우리가 아노라. (로마서에서 인용하는 것처럼 그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을 알라. 율법이 만들어진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오직 법을 무시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에 역행하는 것 때문이니라. (따라서 율법은 죄를 규정하고 그것의 결과를 다루기 위해서 제공된 것이다) 이 교리는 내게 맡기신 복음 곧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에 따른 것이니라.” 친구여, 이 구절들을 보라. 율법과 복음은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반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는 은혜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고 다른 하나는 선한 행위를 통한 보상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과 율법은 모두 인간이 가련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죽은 구약시대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갖고 죽었으므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죽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으로 돌아가서 주님과 올바른 교제를 하다 죽은 가장 최선의 사람들을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살펴 보자.

히브리서 11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행사해야만 한다(6).

2.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죽었다(13). 여기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죽었다고 요약하고 있다.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율법 이전에 살다 죽었던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그리고 요셉

(2) 율법 아래서 살았던 모세,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그리고 다윗

(3) 율법 밖에서 살았던 라합

이 사람들은 다좋은 평판을 얻었다.”(39)

4.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삶을 살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6).

(1) 노아          술 취한 자

(2) 아브라함      거짓말쟁이

(3) 이삭          거짓말쟁이

(4) 모세          살인자

(5) 라합          창녀

(6) 삼손          간음한 자

(7) 다윗       간음한 자이며 살인자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사람들 가운데 율법을 지킴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죽었고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주셨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죽었으나 죽은 후 하늘나라나 주님의 임재 앞으로 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살펴보자.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받아들였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 11:13)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세상에 있는 것들과 상관이 있으며 그 약속들의 성취는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39-40절을 보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었으되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번에는 약속이 단수로, 즉 하나의 약속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들이 비록 믿음 안에서 죽었으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완전한 때가 오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완벽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완벽함은 율법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포함한 더 좋은 소망이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야만 했다.

누가복음 16장의 나사로는 믿음 안에서 죽었다. 우리는 그가 부자처럼 지옥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믿음 안에서 죽었음을 안다. 그러나 나사로는 죽은 후에 바로 셋째 하늘에 계신 주님의 임재 앞으로 가지는 못했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16:22) 그는 안식을 취했으나(25) 주님의 품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가 자기 친척에게 위대한 왕 다윗과 위대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구약시대 믿음 안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사건을 기초로 해서 다윗이 죽은 후 하늘나라에 가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사도행전 2:33-35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의해 높여지시고 아버지에게서 성령님을 약속으로 받아서 너희가 지금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들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으나 친히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느니라.”

이러한 선언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확실한 약속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13:34).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이전에 죽었던 신실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는가? 주님과 같이 있게 되었다고 진술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의 품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구절은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 11번이나 나온다.

그러면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거듭난 신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 믿는 사람들은 이와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욥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내가 아노니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 콩팥이 내 속에서 소멸될지라도 내가 직접 그분을 보리니 다른 것이 아니요, 내 눈이 바라보리로다.”( 19:25-27) 성경의 가장 오래된 책에서 욥은 자신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구속자

2. 그때도 살아 계셨음

3.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분

4. 자신()은 죽고

5. 벌레가 살을 파먹지만

6. 죽은 자로부터 일으켜져서

7. 육체 안에서(육체를 입고)

8.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로마서 8장에 말씀하시는 소망을 갖고 살다가 죽은 한 사람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하늘에 이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 9:8)

따라서 욥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믿음 가운데 죽었으나( 11), 그는 소망의 완벽한 성취를 받을 수는 없었다. 나사로처럼 그들은 소망 중에 갇힌 자들이라 불렸고( 9: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낙원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품에 갇힌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그들은 하늘에 계신 주님의 임재 앞으로 인도 받게 된 것이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며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을 위하여 선물들을 받으시되 참으로 거역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받으셨사오니 이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려 하심이니이다.”( 68:18)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4:8)

이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갈보리 이전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피흘림의 사역과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았다고 어떤 사람들이 주장한다면, 그들은 부활한 예수님이 그들을 데리러 오기 전까지 왜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지 못했는지에 대해 반드시 답변해야만 한다. 율법을 지키거나 다른 선한 행위를 통해 인간이 하늘나라에 갈 수 없음은 매우 명백하다.

 

구약시대 구원의 특징을 보여주는 세 가지 예

이제까지 우리는 십자가 사건 이전의 사람들이 왜 구원받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살펴 봤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과 부활 이전에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경우를 자세히 고찰해 볼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바울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세심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세 사람 가운데 첫째 사람인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둘째 사람인 다윗은 율법 아래서 그리고 셋째 사람인 바울은 율법 시대에서 교회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살았던 사람을 예표하고 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육체에 관한 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1-2)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명백하다. 그 의로움은 구원의 증거가 아님을 우리는 아래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4:3)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전가된 의를 말하고 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4:4-5) (이것을 통해 아브라함이 예로 제시되었다.)

그러면 이 복됨이 할례자에게만 임하느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 임하느냐? 이는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이라.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그분의 의로움 때문이다) 그런즉 그것을 어떻게 의로 간주하셨느냐? 그가 할례 받은 때였느냐,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위) 할례 받지 않은 때였느냐? 할례 받은 때가 아니요, 할례 받지 않은 때니라. 그가 할례의 표적 곧 아직 할례 받지 않은 때에 그가 소유한 믿음의 의를 봉인한 표적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는 아니하였으나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어 의가 그들에게도 인정되게 하려 함이요,”( 4:9-11) 따라서 아브라함의 예는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행함이 없어도 그들에게 의가 인정되었다.

또 할례자들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할례 받지 않은 때에 소유한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자들에게 할례의 조상이 되려 함이라. 그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씨에게나 율법을 통해 주어지지 아니하고 믿음의 의를 통해 주어졌느니라.”( 4:12-16) 따라서 그가 나중에 받은 약속들은 선한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은 한 사람에게 부여된 복인 것이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가 되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그 약속은 효력을 잃게 되느니라.”(14)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과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이는 율법이 진노를 이루기 때문이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죄도 없느니라.”(15)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정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이(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로움) 은혜로 되게 하려고 믿음에서(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나나니 그 목적은 그 약속을 모든 씨에게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은 곧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에게 그 약속을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16)

율법 이전에 혹은 율법 아래서 한 인간이 거듭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그 의를 보장받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이다.

갈라디아서 3:6-10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너희는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이교도들을(율법이 없던 이방인들) 의롭게 하려 하심을 성경 기록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되…” 자신을 속이려 하지 말라. 바울은 복음을 알았고 복음 외에 그 어떤 것도 인간을 복음화시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네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에 속한 자들은 믿음이 충만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8-10)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저주만 할 뿐이다. 주님도 이 사실을 거듭 말씀하시기에 나도 거듭 말하는 것이다.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10) 도덕률(moral law)과 민법(civil law) 그리고 의식법(ceremonial law)에 대한 생각들은 매우 비성경적인 제안들이다. 모든 인간은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해야만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저주받는 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다. 왜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1) 이 한 문장이 구원에 대한 율법의 역할을 명백히 규명해 준다.

또 율법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나니 오직,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령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관례대로 말하노니 그것이 단지 사람의 언약이라도 일단 확정되면 아무도 취소하거나 거기에 더하지 못하느니라.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취소하지 못하며 또 그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 못하리라.”( 3:12-17)

당신은 이것을 이해하겠는가? 성령님은 당신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사람에게 의를 전가해 주신다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 둘째,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언약은 예수님 안에서 확정되었다. 만일 그 상속 유업이 율법에서 나면(율법에서 나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약속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통해 주셨느니라.”( 3:18)

따라서 의를 전가해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었다. 의를 받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 언약의 일부였고 그분 안에서 확정된 것이었다. 율법은 그 이후에 나타났으며 그 언약을 다른 식으로 바꿀 수 없었다.

갈라디아서 4:21-31을 통해 구원과 관련된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너희가 율법을 듣지 아니하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노예 여종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노예 여자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났고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들은 풍유니라. (성경에 있는 유일한 풍유다)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인데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 종이 되게 하는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요,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곳으로 자기 아이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느니라.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 따라서 율법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속박한다.

기록된바, 수태하지 못하는 자여, 너는 기뻐할지어다. 산고를 치르지 못하는 자여, 너는 소리 지르고 외칠지어다. 황폐한 자가 남편 있는 여자보다 더 많은 아이를 두느니라,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이제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아이들이니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하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노예 여자와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라. 노예 여자의 아들이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이처럼 우리는 노예 여자의 아이가 아니요 자유로운 자의 아이니라.”( 4:21-31)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그 언약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통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다윗

이제 다윗왕의 흥미로운 스토리를 살펴 보자.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사자, 곰 그리고 거인과 싸웠던 다윗의 무용담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사울의 위협을 어떻게 견뎠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싸운 내용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밧세바와 마주치는 참담한 사건에 이른다. 우리는 여기서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할 시간이 없으므로 요약해서 말하면,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했고 그 남편을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데, 하나님의 손으로 돌 판에 새긴 율법에는 다윗이 저지른 이 두 가지 죄를 용서해 줄 어떤 제물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간음과 살인에 대한 형벌은 오직 죽음뿐이다. 율법 아래서는 이 죄들을 용서해 줄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편 51편에 기록된 다윗의 유명한 회개 기도를 살펴보자.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에(명령이나 율법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랑과 인자하심에 따라서) 따라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십자가 이전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가능했다면 다윗의 기도는 헛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를 통해 용서를 해 주시기 때문에 이런 인간의 울부짖음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주의 크신 친절한 긍휼에 따라 내 범죄들을 지워 주소서.”(1) 다윗은 하나님께 오로지 은혜를 통해 자신의 죄를 제거해 주시도록 요청하고 있다.

내 불법에서 나를 철저히 씻기시며 내 죄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2) 다윗은 어떤 희생제물도 바치지 않았으며 속죄하기 위해 율법의 어떤 조항도 실행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씻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어떤 선행과는 관계없이 자신을 정결케 해주시도록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범죄들을 시인하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짓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로써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판단하실 때에 깨끗하시리이다.”(3) 다윗은 마음의 통한을 가지고 죄에 대해 자백하고 시인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또한 의로움의 문제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 문맥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되신 것이다.

보소서, 내가 불법 가운데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가운데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속 부분에 있는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나로 하여금 은밀한 부분에 있는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5-6) 다윗의 죄는 그를 압박했고 율법은 그 역할을 했다. 다윗왕은 자신이 출생하기 훨씬 이전에 죄로 가득한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죄만 바라보게 되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깨끗하게 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7)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도움 없이 자신을 온전히 정결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담대히 율법에 기록된 어떤 희생제물의 도움 없이 정결케 됨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이 기뻐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들에서 가리시고 내 모든 불법을 지워 주소서.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떠받쳐 주소서.”(8-12) 시작부터 끝까지, 이것은 하나님께 모든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선언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시면 내가 범죄자들에게 주의 길들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로 회심하리이다.”(13) 율법 아래 있던 한 인간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구원을 구하고 있으며, 그런 구원은 율법을 어긴 자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어떻게 회심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수단이 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그리하시면 내 혀가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14) 진실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파악했을 것이다. 다윗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구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롭게 해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한 것이었다.

오 주여, 주께서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의 찬양을 전하리이다. 주께서는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 헌물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5-16) 여러분은 명백하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던 이 사람은 그 어떤 희생제물도 의로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재산이나 헌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하실지도 모른다는 소망에 자신의 혼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그 어떤 희생제물도 기꺼이 드리고자 했으나 그 어떤 희생제물도 자신의 죄를 제거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단순한 믿음에 두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께서 받으시는 유일한 한 가지 희생제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볼 수 있다. 그것이 유일하게 죄를 제거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통회하고 애통해하는 마음이며, 자비로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주께서 주의 선하신 즐거움으로 시온에게 선을 베푸시고 예루살렘의 성벽들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의 희생물과 번제 헌물과 전체로 드리는 번제 헌물을 기뻐하시리니 그때에 그들이 주의 제단 위에 수소들을 드리리이다.”(18-19)

사랑하는 독자여, 이 중요한 진리를 놓치지 말라. 율법에서 규정한 희생제물은 이미(already) 죄사함을 위해 주님을 신뢰했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바친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이 올바르게 된 후에라야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따른 그 헌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주일날 아침에 교회에 나오는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 한 사람은 헌금도 하고, 성가대와 기타 교회봉사에도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 사람은 이 모든 행위가 자신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미래는 어둡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헌금도 하고 성가대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전자와 후자 중 후자의 사람과 그의 헌물만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안식일에 성전으로 오는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 한 사람은 양과 음식헌물에 쓸 재료를 가지고 왔다. 그는 양과 자신이 제공하는 음식헌물이 자신의 마음에 다소의 평안함을 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복종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의 미래는 어둡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양과 음식헌물에 쓸 재료를 가지고 왔다. 그는 값없이 주신 주님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가져온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과 그의 헌물만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러면 시편 51편의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한 구원을 약속하셨는가, 아니면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에 용서를 해 주셨는가?

다윗은 시편 32:1-5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자기 범죄를 용서받고 자기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영 안에 간사함이 없고 주께서 불법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였으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니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으로 변하였나이다. 셀라. 내가 주께 내 죄를 시인하고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며 또 이르기를, 내 범죄들을 주께 자백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

그리고 다윗의 간음에 대한 성령님의 반응이 로마서 4:5-8에서 발견된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이것은 또한 다윗이 행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하시는 사람의 복됨에 관해 묘사하여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구약과 신약 모두 십자가 사건 이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전가한 의의 문제이며, 주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즉 행위의 결과가 아닌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죽어서 곧 바로 하늘에 가지는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인가? 그 이유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14:6) 문을 통해 양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가는 자 바로 그자는 도둑이며 강도이나( 10:1)

따라서 이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죽었고 그런 이유로 영원한 저주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 주님의 임재 앞으로 인도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시편 51편의 기도가 히브리서 10장에서 인용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히브리서 10:1-1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율법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는 가지고 있으나 그 일들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므로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린 그런 희생물들로는 거기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랬더라면 경배하는 자들이 한 번에 깨끗하게 되어 더 이상 죄들을 의식하지 아니하였을 터이므로 그것들을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그러나 그 희생물들에는 해마다 죄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니라. 그러므로 그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이르시되,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 죄로 인한 번제 헌물과 희생물들은 주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에 대해 기록된 바와 같이)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였나이다, 하시느니라. 위에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희생물과 헌물과 번제 헌물과 죄로 인한 헌물은 주께서 원치도 아니하시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시나이다, 하셨는데 그것들은 율법에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뒤에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셨으니 그분께서 첫째 것을 제거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전가된 의가 예수님 안에서 드려지는 것을 요구했던 것처럼, 다윗에게 주어진 위대한 용서도 예수님의 몸이 희생물로 드려지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그런 축복이 충만하게 향유되기 이전에 발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점은 이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문제가 은혜와 긍휼의 문제이며 죄가 완전히 제거되기까지는 미래에 있을 한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증언이다.

출애굽기 34:4-7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모세가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돌 판 두 개를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 올라가니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시니라.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당신은 여기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발견하는가?)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이것은 율법과 계명이 주어지기 전에 나온 말씀이다)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기초해서 죄가 용서된다는 약속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이것이 아브라함과 다윗과 나사로가 무덤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지하세계에서 기다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는 있었으나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기 전에는 죄인들의 기록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지불은 모세의 율법에 따른 희생제물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단 한 하나의 가능한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용서받은 죄인들은 그들이 소망했던 도시로 주님과 함께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기 전에,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영원한 생명을 받았던 다른 두 사람의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이름은 알지 못하나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고자 한다.

첫째 경우는 누가복음 18:10-14에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집으로 올라갔던 이 사람은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했던 사람이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이 복은 율법 아래서 살았던 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 사람은 명백히 율법의 행위 없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모든 거짓된 방법에 맞선 한 사람이 있다. 어떤 종교의식이나 선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하나라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것은 결국 거짓말임이 드러나고 만다. 이 사람은 어떤 희생제물도 바치지 않았고, 속죄를 위해 돈을 지불하지도,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하지도 않았으며, 침례를 받지도 않았고, 교회 구성원이 되지도 않았고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죄를 지어 죽어가고 있었으며 해가 지기 전에 죽을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23:42-43)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밖에는 부르지 않았던 이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값없이 주어졌다. 우리가 공부했던 세대적 진리와 정확히 일치하며, 예수님 부활이전에 죽었던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는 아니지만 낙원에 이르는 약속이 부여된 것이다. 성경은 정말 위대한 책이 아닌가!

 

다소사람 사울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 구체적으로 다소 사람 사울의 매우 특이한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구원 간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사도행전 9장에서 그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구의 목적을 위해 그가 회심하기 전 상태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빌립보서 3:4-5에서 우리는 그의 상태를 볼 수 있다.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성령님께서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하여 그 거짓말을 성경에 기록하도록 역사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 율법을 신뢰하고 지켰던 바울을 선택해서 사용하셨다.

나는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사도행전26:4-5를 통해서 그의 삶을 더 살펴 볼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내 민족 가운데서 지냈으며 그때부터 내가 살아온 방식은 모든 유대인들이 아나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나를 알았으니 만일 그들이 증언하고자 한다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종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다 하리이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고…”( 3:6) 이런 행위는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13장 참고)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반드시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곧 그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겼으며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3:6-9)

젊은 시절부터 율법에 따라 살았던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가장 엄격한 종파에 속하여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해서는 자신이 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 그의 주장은 세 가지 종류의 의로움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그가 집착하고 있는 율법의 관점에서 의로운 것이다. 둘째, 그가 속했던 율법의 의로움(, 한 인간을 표면적으로 그렇게 만드는)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공로로, 혹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다소 사람 사울의 경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요구했던 의로움의 처음 두 가지 형태를 평가할 때, 전자를 배설물로 여기고 그것 모두를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러한 논리는 로마서 10:1-4에서 정확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형제들아, 이스라엘을 위한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곧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니라.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자신의 경우와 일치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의 경우처럼 여기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의로움이 서로 존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율법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고 한 인간을 자신의 끝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여 결국 주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지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됨을 알게 된다.[2]

이제 이 문제의 결론을 정리해 보자.

1. 율법이 주어지기 수세기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것이었다.

2. 율법 이후 인간은 자신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 성경에서 희생제물 없이 용서받은 사람과 제물을 바쳤으나 저주받은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명백하다.

3. 신약시대 서신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율법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는데, 율법은 인간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전에 믿음을 가지고 죽었던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지는 않았으나 하늘나라로 직접 가지는 못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평안하게 거하며 주님의 임재 앞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줄 소중한 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가적인 고려사항

희생제물을 드리고도 하나님께 거부당한 사람들

여기서는 율법에서 규정한 제물을 가지고 왔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그분 앞에서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헌물과 사람을 거부한 사건에 대한 성경 구절을 살펴보자.

이사야 1:10-15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너희 소돔의 치리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부르며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에 누가 너희 손에서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단지 내 뜰을 밟을 뿐이니라.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 너희가 손을 내밀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 숨기겠으며 참으로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너희 손에는 피가 가득하니라.”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린 바로 그 첫째 헌물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벨은 피의 헌물을 드렸고 가인은 채소를 가져왔으나,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이것이 중요한 이슈였다고 언급한 곳을 찾아볼 수 없다. 창세기와 히브리서에서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중요한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다음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아벨도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 중에서 가져왔는데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므로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빛이 변하니라.”(4:4-5) 아벨의 마음이 올바르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헌물을 받아 들이셨으나 가인의 마음은 올바르지 못했고 이것으로 인해 주님께서는 그의 헌물을 받지 않으셨다.

이 문제에 관한 주님의 생각을 우리는 히브리서 11:4에서 볼 수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으니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두 번째로)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

다음의 말씀들도 비교해 보자.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 6:6)

오 땅아, 들으라. 보라, 이 백성이 내 말들과 내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그것을 거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위에 재앙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를 가져오리라. 무슨 목적으로 세바에서 내게로 향을 가져오며 먼 나라에서 향품을 가져오느냐? 너희의 번제 헌물들은 내가 받을 수 없으며 너희의 희생물들은 내게 향기롭지 아니하니라.”( 6:19-20)

벧엘에 가서 죄를 짓고 길갈에서 범죄를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감사의 희생물을 누룩과 함께 드리며 자원하는 헌물을 드리도록 포고하고 널리 알리라. 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이것을 좋아하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또한 너희의 모든 도시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빵이 부족하게 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4:4-6)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의 위대한 것들을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그것들을 낯선 것으로 여겼도다. 그들이 내 헌물의 희생물로 고기를 드리고 그것을 먹을지라도 주는 그것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불법을 기억하며 그들의 죄들을 벌하리니 그들이 이집트로 돌아가리라. 이스라엘이 자기를 만드신 이를 잊어버리고 신전들을 지으며 유다가 성벽을 두른 도시들을 많이 늘렸으나 내가 그의 도시들에 불을 보내어 거기의 궁궐들을 삼키게 하리라.”( 8:12-14)

우리는 통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없는 헌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접하게 된다.

다윗이 알았던 진리를 대언자 미가도 알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죄인이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겸손한 마음으로 긍휼을 구하는 자세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절을 할까? 내가 번제 헌물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갈까? 주께서 수천의 숫양이나 수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가 내 범죄로 인하여 내 맏아들을, 내 혼의 죄로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오 사람아, 그분께서 선한 것을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6:6-8)

이러한 진리를 알았던 십자가 사건 이전의 한 사람을 살펴보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빛에 대한 믿음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했던 진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마가복음 12:28-34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서기관들 중에서 한 사람이 그들이 함께 논쟁하는 것을 듣고는 그분께서 그들에게 잘 대답하신 줄 알고 나아와 그분께 여쭙되, 모든 명령 중에서 첫째 명령은 무엇이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모든 명령 중에서 첫째 명령은,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니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니라. 이것이 첫째 명령이니라. 둘째 명령은 곧 이것과 같으니,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이것들보다 더 큰 다른 명령은 없느니라, 하시매 그 서기관이 그분께 이르되, 옳소이다. 선생님이여, 한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으므로 선생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나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각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를 드리는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다 합친 것보다 나으니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가 사려 깊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멀리 있지 아니하도다, 하시니 그 뒤에는 감히 아무도 그분께 질문하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 구원받은 사람들

특별한 설명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 이전에 구원받았거나 자신들의 죄가 사함 받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에 관한 몇 개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느니라. 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적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시고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들을 용서받았느니라, 하시니 그분과 함께 음식 앞에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들도 용서하는가? 하더라. 그분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7:47-50)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시력을 받으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하시니 그가 즉시 시력을 받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그분을 따르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니라.”( 18:42-43)

보라, 그들이 마비 병으로 자리에 누운 사람을 그분께 데려오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비 병 환자에게 이르시되, 아들아, 기운을 내고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시니라. 보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모독하는도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악을 생각하느냐?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우냐?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진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그때에 마비 병 환자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매( 9:2-6)

이스라엘 민족에게 발생했던 모든 병과 질병들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생긴 결과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이 성경 구절들을 대한다면 정말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모든 계명들에 순종한다면, 어떠한 질병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15:26, 7:15). 동일한 논리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육체적인 질병에 걸린다는 경고를 그들은 받았던 것이다( 28:58-60). 앞의 두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으나 주님을 믿음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은 개인들을 볼 수 있다.

 

사람 앞에서의 의로움에 대해서

우리가 설명한 내용과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행위에 의한 의로움이다. 이 간단한 성경구절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골칫거리로 존재해 왔다. 인간이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해온 수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하나의 증거로서 제시할 뿐만 아니라 만일 당신이 이 구절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면, 그들은 당신의 지성과 명성을 공격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한 지체가 된 나를 그들은 강단에서 내쫓고, 나를 멀리하라고 회중들에게 선포하고, 심지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행위 구원을 모른다는 이유로 나로 하여금 내가 어리석었고 성경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어리석을지도 모르고 성경에 대해 대단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으나, 나는 어떤 결론에 이르기 전에 성경과 성경을 비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몇 가지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야고보서 2:17-24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18) 이에 대해서 성경 기록자는 말하지 말고 그것을 네게 보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19-2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2-15장에서 의로움을 선포하셨다. 그러면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여주는 문제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은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네가 보거니와 (나에게 보여 달라)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완벽하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믿음으로 전가된 의로움, 행함으로 인한 친구) 그런즉 너희가 보거니와 (나에게 보여 달라)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고 단지 믿음만으로 되지 아니하느니라.”(22-24)

나는 여기서 사적인 해석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나 다른 성경 구절들이 이 관점을 어떻게 증명하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죄를 짓지 않으셨고 구원받을 필요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3:16에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의롭게 되셨다. , 그분의 선한 사역을 살펴본 사람들에 의해서 의롭다고 선포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남들이 인식할 수 있는 의로운 행위를 통해 온전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완전하게 되셨으므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 5:9)

추가적으로, 시편 51편의 다윗의 위대한 기도로 잠시 돌아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감동시킨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짓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로써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판단하실 때에 깨끗하시리이다.”( 51:4)

이와 같은 방법으로 누가복음 7:29의 말씀을 숙고해 보자. 그분의 말씀을 들은 온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침례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되

다음에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와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구원받았다는 주장을 야고보서 2장을 통해 전개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이신 예수님도 행함으로 구원받았는지를 물어보길 바란다. 눈에 보이는 의로움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미 의로운 상태셨으나 밖으로 드러난 그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엄밀히 말하면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

연구를 마치면서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한 가지 개인적인 추측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추측임을 미리 밝혀둔다. 나는 이것을 교리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치리자는 다소의 사울이었을까?

젊은 치리자에 대한 기록과 성경에 나온 사도 바울에 대한 기록을 비교하고 검토해 보자. 누가복음 18:18-24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어떤 치리자가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스라엘의 치리자였다( 3:1, 4:8). 바울은 바리새인이었다( 23:6, 26:5).

선한 선생님이여 좋은 매너는 바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24:3, 26:25). 그가 좋은 매너를 보이지 않은 적이 한번 있었지만 그는 즉시 사과했다( 23:5).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었으며 그것을 얻고자 했다. 바울은 하나님을 밤낮으로 섬겨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26:6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치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네가명령들을 아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셨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가말리엘의 발밑에서 자라며 조상들의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바울의 스승은 율법 박사였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들의 종교의 가장 엄한 분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다.”( 22:3, 5:34, 26:5) 그러므로 바울은 명령을 알고 있었다.

네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하는 명령들을 아느니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 하거늘 이제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예수님께서는 이 젊은 치리자를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간증을 받아들이신 듯 하다.

바울은 사도행전 26: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내 민족 가운데서 지냈는데 그때부터 내가 살아온 방식은 모든 유대인들이 아나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나를 알았으니 만일 그들이 증언하고자 한다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분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다 하리이다.

빌립보서 3:4-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다른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나는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에 관한 한 교회를 핍박하였고 율법에 있는 의에 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명령대로 살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청년기부터 아는 사람들도 자신에 대해 증언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바울을 신실한 자로 여기셨다. 심지어 그가 구원받기 전에도 그를 신실한 자로 여기셔서 사역자로 삼으셨다. 디모데전서 1:12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구원받지 전)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구원받은 후).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 사람은 십계명 중에 하나님께 대한 네 가지 계명은 모두 지켰다. 이 젊은 치리자가 자신이 다른 계명들, 즉 인간에 대한 계명들도 다 지켰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입증해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입증방법은 바로 재산을 모두 팔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재산을 모두 팔아 주고 나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그가 큰 부자였으므로 이것을 듣고 심히 근심하니라.” 이 사람은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근심하면서 갔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원했지만 그런 식으로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다.

바울에 대한 사실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 다마스커스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It is hard).”( 9:5) 그는 무엇인가와 투쟁하고 있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젊은 치리자에 대해 하신 말씀과 비교해 보자. 예수님께서 그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How hardly)”

바울이 회심했을 때, 그는 자신이 율법을 모두 지켰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한가지를 위해 모든 것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던 것들을 곧 그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겼으며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3:7-10)

젊은 치리자가 바울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만일 그 젊은 치리자가 나중에 구원받게 되었다면 빌립보서 3:7-10과 같은 간증을 했을 것이다.

젊은 치리자가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대답하셨다.

후에 어떤 사람이 바울에게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 라고 대답했다( 16:30-31).

만일 바울이 그 젊은 치리자였다면 그는 예수님께 확실히 배운 셈이다.

 



[1] 흠이 없다는 것과 죄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흠이 없다는 말은 표면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의로움과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이 밖으로 관측할 수 있는 수준에서 당신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인 요한의 부모도 이런 높은 수준의 도달한 사람이었다(1:6).

[2] 여기서 독자들은 히스기야, 아합 그리고 롯의 경우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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