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점진적 계시의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5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경 해석의 원칙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은, 본문이 다른 특정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을 스스로 제안하고 있지 않은 이상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항상 바른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언제나 문자적인 해석을 해야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성경의 본문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문화적 해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무덤이나 발을 씻어주는 등의 행위가 문화적 해석의 대상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2. 이번 과에서는 성경을 바로 읽고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원칙은 성경의 진리는 “점진적 계시(Prograssive Revelation)”라는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점진적 계시의 원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점진적 계시란 무엇인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담에게 성경의 66권을 모두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말씀을 여러 사람들에게 주셨으며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계시해 주신 진리를 알 수 있었고 자신들의 시대에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진리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계시를 받은 사람은 처음에 계시를 받은 사람에 비해서 훨씬 많은 양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3.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전에 기록된 본문은 항상 최근에 기록된 본문의 빛을 비춰서 해석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성경에서 레위기를 읽을 때, 저는 죄를 지으면 어린양을 잡아다가 제사장에게로 가서 제물로 드려 저의 죄를 대속하게 해야함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메시야가 와서 죄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함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읽게되면, 그 메시야가 이미 오셨으며 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최근에 기록된 신약성경의 빛으로 예전에 기록된 구약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5. 갈라디아서
6. 제가 성경을 읽는데 율법에 대한 말씀과 은혜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종에 대한 말씀과 입양에 대한 말씀이 나오며, 속박에 대한 말씀과 자유에 대한 말씀이 나오면, 저는 이전의 계시를 최근의 계시의 빛으로 해석하겠습니다. 그 반대로 해석해서는 않됩니다. 설마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까 싶으신가요? 교황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나 안식교인들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켜야만이 구원이 유지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 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기본적인 해석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며 점진적인 계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는 계시록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고 모든 계시를 마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계시를 점진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점진적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약성경의 유아적인 신학에서 신약성경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인도하신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끼? 구원자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처녀탄생과 고난받는 메시야와 죗값의 지불에 대해서 잘못 이해했습니다. 구약성경만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복음서의 내용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누구시며, 왜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무엇을 하실 것이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8.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첫번째 유월절 밤에 문기둥과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던 부분을 읽을 때, 여러분은 그 부분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피로 인해 죄의 속받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는 것의 모형이 되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출애굽기만 있다면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신약의 진리가 계시되지 않았다면 출애굽기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만으로는 결코 출애굽 때의 어린양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신약의 진리가 있어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이 가지고 있지 않은 계시를 우리는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온 어린양의 피를 해석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9. 이러한 점진적 계시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어떤 물질이 실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말하면서 그 피를 여러분 집의 문에 바른다면, 여러분은 신약의 진리에 맞춰 구약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진리에 맞춰 신약을 해석한 것이 됩니다.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황소와 염소의 피나 구약성경의 제사나 희생, 그리고 축제나 명절은 모두 그림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림자가 있다면 실체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구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모든 모형의 실제가 되시는 겁니다.
10. 한 번 가정해 보겠습니다. BC 1200년 어느날, 여러분이 어린양을 가지고 성전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와서 “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겠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여러분은 그 이웃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의미는 말이야, 처녀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모형으로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 그러나 2천년 전에는 이렇게 알고 있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우리처럼 알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았고 주어지지 않았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만한 때가 오기까지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1. 우리는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린양의 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죄 헌물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신 것임을 알고, 태우는 헌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2천년 전에는 그 누구도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2. 요한복음 3:14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이후 광야에서 유대인들이 불뱀에 물렸던 사실을 기억하실 겁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자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요한복음에서 모세가 그렇게 뱀을 든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우리를 대속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구원받아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렸다가 놋뱀을 보고 치유받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나중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나도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리가 아직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계시가 점진적으로 주어짐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들에 관해 주신 정보들을 가지고 있고 이것에 비추어 지나간 시대를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주제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계시에 비추어 이전의 것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13. 제가 여러분에게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라는 말씀을 인용한다면,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왜 이 말씀을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세요? 바로 사도행전 8장에서 이사야 53장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구체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믿고 유대교로 개종하여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두려워했던 내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도 그것이 누구에 대한 말씀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왜 내시가 이사야 53장이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는지 아세요? 그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수백년 전에 받은 예언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추가적인 예언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14. 그렇다면 우리는 이사야 53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단지 추측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아서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추가적인 성경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성경의 진리가 온전히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향상된 계시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계시의 패턴은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15.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범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더 깊고 높고 분명한 의미를 밝혀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에서는 “너는 살인하지 말라.”(출
16.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훈육 선생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준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러 그리스도께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대한 교리를 온전한 계시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철자(알파벳)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그 철자로 이루어진 단어와 문장을 가르쳐 주고 있고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7. 히브리서
18. 계속해서 2절을 보세요.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금씩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자신이 직접 무대에 등장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것을 보거라.”고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아느냐? 이것을 보거라.” “긍휼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것을 보거라.” 주님께서는 그렇게 3년 반 동안 아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와 가르침과 기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서신서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19. 점진적 계시의 시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 만으로 모든 진리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성경으로 구약 성경에 계시된 진리들을 풀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과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었다고 해서 그를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중에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고 있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500페이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계시해 주신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성경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받은 계시 내에서만 온전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20. 우리는 지금까지 “문자적 해석의 원칙”, “문화적 해석의 원칙”, 그리고 “점진적 계시의 원칙”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잠시 성경의 마지막 장인 계시록 22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계시록
21. 성령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17절에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 성령님께서 신부와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세요. 성령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거나, 성령 안에서 걷고 있거나,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거나,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하게되는지 아세요? 성령님께서 여러분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값없는 생명수를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루 종일 집에서 춤을 췄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22.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18-19절입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자신의 말씀에 추가하거나 삭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경이나 몰몬경이나 그 밖의 신흥 종교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말씀”이나 “예수님의 또 다른 언약” 등을 쓰거나 믿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재앙을 받거나 거기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23. 미국의 남부지역에는 독립침례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는 10분 거리에 다섯개의 독립침례교회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지역에 사는 어떤 형제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설교자로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라고 어젯밤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장소가 없으니 우리집 거실에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집 맞은 편에는 독립침례교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그렇게 말을 해야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대부분의 이단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큭별하게 하신 말씀이 있다고 주장합니다.몰몬교를 만든 죠셉 스미스는 자신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몰몬경을 주고 갔다고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리가 없으므로 우리는 죠셉 스미스에게 나타났던 천사는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1장의 천사이거나 빛의 천사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5.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원칙은 “역사적 해석의 원칙”입니다. 성경의 독자들은 계시를 처음 받은 그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반드시 그것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 계시가 주어질 때, 그 계시가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뛰어넘어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6. 여러분은 요한복음 6장을 읽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다락방에서의 최후의 만찬의 빛을 비춰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의 빛으로 비춰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아직 이러한 진리들이 계시로 주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무도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 빵과 잔을 나누기도 전이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기도 전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요한복음 6장의 관점에서 봤을때는 이후에 주어질 계시가 됩니다. 이후에 드러난 계시로 인해 제자들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진리를 그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말씀인 것처럼 해석해서는 않됩니다.
27. 예수님께서 회당에 서서 “교통신호를 어김으로 간증을 잃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요한복음 6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언제 하신 말씀인지 살펴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미사나 주의 만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미사나 주의 만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28. 침례인 요한이 요단 강가에 서서 자신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침례를 해 주었을 때, 침례를 받으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침례인 요한을 인용하면서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침례에 대한 그러한 의미를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29.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하신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0.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사람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문 기둥에 피를 바를 당시에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상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들어올리면서 보고 치유를 받으라고 했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서 죄들을 용서받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신약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구약 성경을 적용할 수는 있지만 구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 자체를 신약의 진리로 해석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은 처음에 말한 그대로의 일미가 일차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어떤 것을 처음 말씀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상의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일차적으로는 표면적으로 기록된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31. 주석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계시록 9장에서 말씀하시는 메뚜기가 헬리콥터라고 해석합니다. 주님께서 계시록 9장에서 처음 말씀하실 때 헬리콥터를 의미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헬리콥터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대부분의 경우 말씀하신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혜나 전지 하심을 제한하려는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은 주님께서 그 예언을 처음 하시는 그 당시에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나 단어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사
32.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말을 처음 했을 당시에 듣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만한 것을(예를 들면, 2천년 전에 헬리콥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역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말을 하는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낙타 열마리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성령님의 열가지 은사를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때까지 이 열가지 은사를 사용해서 상급을 쌓게 된다.” 이것은 흥미있는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전혀 진리가 아닙니다. 리브가는 낙타 열 마리를 보고 “이것은 성령의 열가지 은사를 상징하는 거구나!”하면서 감탄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나온 엘리에셀의 낙타 열 마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낙타 열 마리는 낙타 열 마리를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을 신약 성경의 진리를 근거로 여러분 마음대로 의미부여하여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여리고 성은 일곱번 그 주위를 돌고나서 무너졌을지 몰라도 우리가 어떤 건물을 일곱번 돈다고 헤서 그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33.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는 회의한 결과를 요약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4. 야고보는 여기서 아모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암
35. 우리가 다음으로 살펴볼 원칙은 “해석과 적용의 구별의 원칙”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서
36. 문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도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사랑과 목숨과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없고 오히려 주님을 악하게 대하던 사람들을 위해 주셨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 한 것은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적용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 읽을 때, 그것을 보고 “이것은 나에 대한 것이구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온 고난받는 메시야는 저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적용은 저에게 할 수 있지만 해석은 저에게 할 수는 없습니다.
37. 성경의 본문에는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있는데 영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본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8.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적용입니다. 이 부분을 가지고 문자적인 해석의 원칙과 점진적인 계시의 원칙을 한꺼번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로 돌아가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오고 나서 모두 홍해를 건넜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후에 침례를 받는 본보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적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출애굽기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실제로 홍해를 마른땅 같이 건넜습니다. 그 일은 실제로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39. 3절에서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광야를 방황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반석이 되시어 언제나 우리에게 물을 주시어 갈증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적용입니다. 그런데 이제 실제 출애굽기의 광야로 돌아가 봅시다. 물을 쏟아낸 바위가 실제로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 바위는 실제로 바위였습니다. 모세가 막대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실제로 입을 벌려 물을 쏟아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을 쏟아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실제 바위였습니다. 적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수이시며 목마른 모든 자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적용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신약 성경이라는 향상된 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향상된 계시와 적용으로 본문의 실제 그대로의 문자적인 해석을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40. 이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해석만 있고 적용이 없어서도 안되고 적용만 있고 해석이 없어서도 안됩니다. 요한복음
41. 그러나 이 구절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선두주자인 침례인 요한을 많은 백성들이 따랐습니다. 그에게는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독자적인 사역을 했고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자 요한을 따르던 백성들과 그의 제자들마저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제는 모든의 이의 관심이 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요한이 이러한 일들을 보고 한 말이 바로 요한복음
42. 이 구절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다이어트 클럽에서 이 구절의 일부를 벽에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I must decrease).” (이 구절을 이 부분만 떼어놓는다면 “나는 반드시 살이 빠져야 하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역자주) 요한복음 3장에서 침례인 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이 구절을 다이어트에 적용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런식으로 영적 적용을 해서는 안됩니다. 요한복음 3:30의 의미는 당시 청중이 들었던 그 의미 이상의 것을 뜻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는 감추어진 어떤 신비로운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나는 퇴장해야 한다.” “예수님의 날이 밝았으니 나의 날은 저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자신의 목적이 바로 이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역할을 주신 것을 보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로 영적 적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적용은 모두 해석한 것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은 아닙니다. 적용은 항상 해석의 범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43. 다른 예를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4. 물론 주님께서는 소아시아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다녀오신 후에 갈릴리로 가실 수도 있었겠지요. 주님께서는 여리고로 갔다가 아라비아 광야를 한바퀴 돌아보신 후에 갈릴리로 가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시간 낭비였을 것입니다. 만일 사마리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면 그것이 더 특이한 일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길로 가로질러 가는 것에서 무슨 굉장한 의미를 찾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코스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5. 주님은 그렇게 가장 빠른 길로 질러가시다가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어떤 칼빈주의의 가르침이나 예정이나 특별한 감추어진 의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6개월간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시다가 이 여인과 대화하시며 말문이 튼 것도 아닙니다.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어떤 교훈을 찾고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청중에게 그 구절의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 정확히 알려주고 나서 영적인 적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은 적용을 해석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적용은 경우에 따라서 수 백 가지가 될 수도 있지만 올바른 해석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46.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
47. 여러분은 50가지의 적용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적용으로 해석을 대체하거나 가려서는 않됩니다. 바른 성경 읽기와 바른 성경 연구와 바른 성경 강해는 항상 이 구절이 실제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바른 해석을 찾고 나서 영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적용은 항상 해석의 의미를 바꾸거나 변질시키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자적 해석, 문화적 해석, 점진적 계시의 원칙, 역사적 해석, 그리고 해석과 적용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