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09.12.06 00:53

칼빈주의-제4장 저항할 수 없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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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W. 낙스의 칼빈주의 강의

4장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이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강의 Calvinism Part 4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한 것입니다. 음성 파일을 듣고 번역한 것이라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Kjv74@hanmail.net

 

1. 우리는 칼빈주의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TULIP”의 “I”에 해당하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라는 칼빈이 주장한 교리를 공부할 차례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는 복음의 말씀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으로,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상을 반대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는 않겠지요.

 

2. 우리는 그동안 에드윈 팔머의 “갈빈주의 5대 강령”이라는 책을 인용했습니다. 66면에1) 보면 팔머는 다음의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성적인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성령님께 달려 있으므로 ‘구원받기 위해서 믿을 필요가 없다.’든지 혹은 ‘성령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든지 하는 논의는 하지 말자.” 팔머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할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팔머가 왜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지 아세요?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팔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에 대해서 아무런 주저함 없이 진실을 말하자면, 성경은 우리가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이성적인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믿을 때까지 성령님께서 움직여 주시도록 기다리자’라고 논의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60쪽에 걸쳐서 성령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이제 와서는 성령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실 때까지 믿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4. 계속 팔머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기다리지 말고 믿으라. 그러면 그 믿음은 당신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을 필요조차 없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진짜 이렇게 믿는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 봐야 합니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교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은혜로 구원하실지 창세 전에 선택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당신은 결코 그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당신은 반드시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구원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은혜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를 인간이 수 세기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 왔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비교해 볼 것입니다.

 

6. 사도행전 7장을 보세요.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51절부터 보세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 스데반이 지적하는 사실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비춰보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유대인들은 항상 성령님의 뜻에 저항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시대에도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나 혹은 수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설교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령님의 뜻에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7. 마태복음 23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거역합니다. 34절부터 보세요.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대언자들과 지혜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리니 너희가 그들 중의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들 중의 더러는 너희 회당들에서 채찍질하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며 그들을 핍박하리라.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기까지 하시며 보여주신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모으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4-37)

 

8.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뜻은 너희를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모이지 않았다. 너희는 내가 부를 때 응답하여 오지 않았다. 너희는 내 뜻에 반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한 것입니다. 37절을 다시 보세요.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죠?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려는 안전과 보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38절을 보세요. “보라, 너희 집이 버림받아 너희에게 황폐하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을 모아서 보호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의 인생에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했습니다.

 

9. 요한복음 6장과 12장을 보시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여러분과 논쟁할 때 인용하기 가장 좋하하는 구절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믿을 것도 미리 정해져 있으니 따라서 어떻게 되든 구원받게 되고 반대로 버림받게 되어 있으면 무엇을 해도 결과적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러한 논쟁도 필요없을 것입니다. 이것도 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고 따라서 어떤 강력한 논증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논증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10. 요한복음 6:44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 이 구절은 아마 칼빈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일 겁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 구절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와서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 선택된 사람들이다.” 정말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생각과 같을까요?

 

11. 요한복음 12:32을 보세요.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나 곧 내가 땅에서 들리면 (주님께서 땅에서 들리셨나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아버지의 이끌림을 받지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몇 명의 사람이나 자신에게로 이끌것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모든 사람” 입니다.

 

12.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6:44의 논리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과 구원받은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이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이끌림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면,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이끌림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누군가는 그 부르심에 저항해서 오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를 생각해보세요. 주님께서는 잔치를 마련하시고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탁자마다 풍성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자리가 지정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잔치의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 오지 않자 손님 명단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기입하여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초청하셨습니다.

 

13. 칼빈주의자들은 항상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기 전에는 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가서 1:4을 보세요. “나를 이끄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리이다. 왕께서 나를 자신의 방들로 데려가셨으니 우리가 당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즙보다 더 많이 기억하리니 곧바른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버지의 이끄심이 필요하다면 왜 아가서에서처럼 이끌어 달라고 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이끄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이끌어 달라고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할 겁니다. “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이끌어 주실 때까지 이끌어 달라고 구할 수 없어요.”

 

14.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분명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백화점에 갑니다. 백화점에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 가면 됩니다. 백화점에는 갈 수 있으면서 하나님께는 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1에서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지만 그 다음 절에서는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걷고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억지로 따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락한 마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서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세상으로는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끄심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 이끌어 달라고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해 주실지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그리고 주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보세요.

 

15. 히브리서 12:25을 보세요. 우리는 지금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말라.” 여기서 먼저 질문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할 기회조차 없다면 왜 말씀에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계속해서 히브리서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땅에서 말한 자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분에게서 돌아선다면 더더욱 피하지 못하리로다.” 본문은 누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24절에 의하면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16.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게로 오라”(마 11:28)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계 22:17)고 하시지만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와서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던 것처럼 이제 복음의 말씀을 거절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구원자를 거절했던 것처럼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서 거절할 수 없다면 이러한 구절이 성경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타락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 왔습니다.

 

17. 디모데후서 3장을 보세요. 이것은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6절부터 보세요.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이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니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딤후 3:6-8) 요한복음 14:6에 의하면 진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디모데후서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모세를 대적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택한 단어를 보세요. 바로 “resist”2)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resist)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왜 하필 “저항할 수 없는(irresistible) 은혜”라고 부르는 걸까요? “거절할 수 없는”이나 “대체할 수 없는”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요? 왜 하필 진리에 저항(resist)하고 있다는 말씀이 명백하게 존재하는데 불구하고 “저항할 수 없는(irresistible) 은혜”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참으로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네요.

 

18. 어떤 사람들은 “칼빈주의자들이 이러한 것을 모른다고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되묻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산 지 얼마나 되셨나요?” 자신들의 입장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성경을 다섯 구절 이상 인용하는 것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나요?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제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갈빈주의자와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요한복음 6장의 구절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저는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다시 그와 만나서 그의 주장이 잘못된 것을 입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25년 전에는 서로 다른 교리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성경을 펴 가며 그런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누구도 성경을 가지고 그런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흥미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마음은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흥미 없는 주제라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맥도날드에서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성경을 펴고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과 성경을 가지고 논쟁을 하면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25년 동안 이 나라가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19. 예전에 우리가 뉴서머나 지역에서 집집마다 방문하며 복음을 전할 때, 다른 교파나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저를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오게 해서 30~40분 동안 논쟁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밝혔고 제가 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 봤으며 성경을 가지고 한 시간 가까이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일을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20. 이사야 63:10을 보세요.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셔서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 만일 아무도 성령님께 저항하지 않았다면 왜 성령님께서는 괴로워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성령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성령님께서 괴로우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행한다면 성령님께서 근심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이시나요? 성령님께서는 인격을3) 가지고 계시므로 괴로워하고 계신 겁니다.

 

21. 창세기 6:3을 보세요.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그의 날들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자신의 뜻을 완전히 굽히고 들어오는 상대방과 다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뜻에 거역해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사람과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는 “옳게 행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싫은데요.”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명령하는 대로 하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우리도 우리 계획이 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싸우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겁니다.

 

22. 아마 여러분은 성경을 믿기 때문에 이곳에 왔을 겁니다. 아마 제가 하는 말에 동의를 하시기 때문에 이곳에 앉아 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이 정말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도 분명하지 않나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지요.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에 비춰보면 매우 명백합니다.

 

23. 잠언 1장을 보세요. 22절부터 보세요. “단순한 자들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단순함을 사랑하겠느냐? 비웃는 자들이 어느 때까지 자기들의 비웃는 것을 기뻐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지식을 미워하겠느냐?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도다. 내가 내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도 중시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권고를 무시하고 내 책망을 전혀 원치 아니하였은즉(잠 1:22-25) 이 말씀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교리가 양립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귀를 막고 듣기 싫다고 외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항할 수 있는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24. 이제 마지막으로 로마서 10장에서 한 구절 찾아보고 웨슬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웨슬리가 알미니안주의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그의 글을 대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의 글과 설교를 읽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웨슬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웨슬리의 글들을 읽어보면서 웨슬리가 그런 말을 했는지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웨슬리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한 게 아니라 “당신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당신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칼빈주의의 다섯째 강령과 일치하는 가르침입니다.

 

25. 로마서 10:21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가 종일토록 내 손을 내밀어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하게 하였노라, 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가? 주님께서는 아침 8시에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전 11시에도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오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오후 5시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저녁 9시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밤 11시 반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팔을 활짝 벌리셨고 손을 땅끝까지 뻗으셨습니다. 말씀을 전파하셨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26. 존 웨슬리는 수백만 킬로미터를 말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말의 등 위에서 책을 읽었고 글을 썼습니다. 그의 형제인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 중에 “Oh Horrorble Decree”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15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 끔찍한 교리여4)

(찰스 웨슬리)

 

! 친절하고 은혜로운 비둘기여,

죄인들이 주님의 사랑을 거절함이

저에게는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거절하면서 말합니다.

“그것은 공짜가 아니야.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게 아니야.

주께서 버리기로 하신 사람들에게는

열매 맺을 수 없는 부르심일 뿐이야.”

 

그들은 주께서 신실하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하여 말합니다.

“주께서는 죄인의 근처에만 오셨을 뿐,

죄인들의 죄악과 그들이 받은 저주를 옮겨 주시려 하며

하늘나라를 보이시고 ‘들어가라’ 하시지만

여지없이 그들을 지옥으로 던지시네.”

 

오 끔찍한 교리여!

그것이 어디서 왔건 간에

그들의 지옥 같은 모독을 용서하소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늘에 있는 자신의 왕좌를 떠나

인간의 친구요 구원자가 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신

어린 양께 누가 책임을 돌릴 수 있으랴!

 

오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

저는 주님의 마음을 느낌니다.

복음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느끼시는 그 감정을 저도 공유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죄를 대속하신 벌레가 되신 것을,

주님의 피를 짓밟는 그들을 보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는지!

 

그들은 감히 주님을 제한하려 하고,

주님의 얼굴을 모독하여,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부인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모두 자신들만 취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주님의 의를 빼앗아

효과 없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죄인들은 복음 듣기를 싫어하여 말합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말씀하신 그대로 의도하신 것은 아니었어.

주님은 모두에게 은혜를 제공하시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지.”

 

죄인들은 주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조롱하며 주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의로운신 하나님께서는

태로부터 저주받은 그들을 위해,

타락해 버린 그들을 위해,

말씀을 믿지 않는 그들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

대부분을 그냥 지나치시고,

그들 중 몇 명의 불쌍한 사람들을 죽이시어

지옥으로 가도록 강요하셨네.

주님께서 그들을 죽게 하시어

결코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네.”

죄인들의 죽음의 책임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돌리는

악마의 궤변이여!

 

그들은 소리지르고 울며

만군의 주께 간청하며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수백만의 죽은 혼을 

희생 제물로 드리며 말합니다.

“이러한 것이 주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주님의 위대한 뜻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오 하나님이여, 얼마나 오랫동안

사탄이 분노하게 하십니까!

주께서 잘못 행한 자에게 복수하지 않으십니까!

뱀의 머리를 박살내지 않으시렵니까?

확실히 주님께서 그를 우리의 발밑에 두시리니

마귀와 그의 교리가

불타는 구덩이로 던져지리이다.

 

일어나소서, 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죽임 당할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주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유지하시고

피의 희생 제물을 굳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인해서,

주님의 은혜는 값없는 것이니,

주의 십자가를 높이 드시어

모든 사람을 주께로 이끄소서.

 

오 주님의 은혜의 정당함이여,

우리가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의 팔에 안겨 있음을

모든 혼들이 입증합니다.

순수한 복음의 말씀을 주시어

주의 설교자들이 넘쳐나게 하시고

모두 함께 동일한 주님을 고백하게 하시어

주를 위해 죽게 하소서.

 

나의 생명을 주께 바칩니다.

내 심장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도 주께 바찹니다.

이것들을 모두 바쳐서

죄악을 용서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께서 선하심을 입증하게 하소서.

주께서는 죄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 나의 말을 들어주시고

나를 주의 능력의 팔로 안으사,

주여, 저로 고난을 당하도록 부르시어

고통의 시간을 맡게 하소서.

죽음에서도 제가 선포할 것은,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라.

주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음이라.

 

찰스 웨슬리는 이 시에 자신의 서명을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 시를 설교했습니다. 오늘날 감리교회나 웨슬리안 교회는 어떻게 설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거친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27. 칼빈주의는 사람이 만든 신학체계일 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 칼빈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면 무조건 알미니안주의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칼빈주의를 반대한다고해서 알미니안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믿으면 되니까요. 칼빈주의에 대해서 논쟁 하다 보면 있어서 교부들(church fathers)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는 상황입니다. 29절부터 보세요.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사도행전 20:29-30) 갈라디아서 3:1도 보세요.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28. 계시록 2장과 3장을 보시면 여러 교회들이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에서 돌아서 진리로부터 떠나게 하였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의 상황이라면 왜 교부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저작들을 성경보다 더 신뢰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완성되기도 전에 성경에서는 교회가 건전한 교리와 순수한 진리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글에는 신뢰를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쓴 글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배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쓴 글이 성경과 다르다면 우리는 간단하게 “성경이 맞고 이 사람이 틀린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증오가 가득 찼다던가, 아니면 우리가 자아 중심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도 같은 방식으로 대합니다. 제가 쓴 글이나 하는 말이라도 성경과 다른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맞고 제임스 낙스는 틀리다.”고 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할 때 교부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바른 것이 무엇인지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과 사람들의 글이 서로 다르다면 성경이 항상 옳고 사람들이 항상 틀립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29. 칼빈주의 체계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도 못할 만큼 타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피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흘려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으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을 강제적으로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이 은혜를 선택된 사람은 저항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교리는 칼빈주의 체계 내에서는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일지는 몰라도 성경적으로는 잘못된 이단 교리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1) 이것은 원서의 면입니다. 원서의 제목은 “Five Points of Calvinism”입니다.-역주

2) “resist”라는 단어가 우리말 성경에서는 “거역”이라고 되어 있지만 칼빈주의자들은 보통 이 단어를 “저항”이라고 부릅니다.-역주

3) 인격은 영어로 “personality”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과 의지가 있고 감정을 느끼는 독립된 객체라는 것입니다.-역주

4) 이것은 찰스 웨슬리의 시 “Oh Horrorble Dcree”를 의역한 것입니다. 그대로 번역하기에는 고어체로 인한 어려움이 있어서 약간 요약하여 의역했습니다. 웨슬리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그대로 전해지게 하였습니다. 이 시의 좀 더 나은 번역을 알고 계신 분은 역자에게 연락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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