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2.09.12 00:50

세대주의 재고찰-제6장 인간의 종류

조회 수 6763 추천 수 0 댓글 0
Atachment
첨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세대주의재고찰(앞작은).JPG

 

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6장 인간의 종류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를 세 가지 그룹(유대인-이방인-교회)으로 나눌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세 부류로 나눈다. 그리고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두 가지 부류의 인간

성경은 거듭난 사람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때로는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칭한다.

고린도후서 4:16에서 이 진리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찾아보자.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 이 구절에서 한 사람이 겉 사람과 속사람의 두 가지 다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겉사람은 구속되지 않은 상태이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속사람은 새롭게 변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새로운 상태로 보존된다. 옛사람은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으며 새 사람은 이미 영원한 삶을 소유했다.

갈라디아서 2:20은 믿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십자가 처형은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육신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한 인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승리해 영원히 모든 것을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한 인간이 존재한다.

로마서 7:22-25은 이 문제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내가 속사람을(육신 안에 거하는 거듭난 인간을 의미한다)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들(거듭난 사람의 육신을 의미한다)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 도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두 성품이 존재하며 이 둘은 서로 반목하고 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옛 사람)에서 누가 나(새 사람)를 건져 내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새 사람)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옛 사람)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서 대립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만드셨고 만들어 가시는 새사람이 옛 사람과 싸우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우리의 태생적 습성과 경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확고해졌다. 그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정욕과 육신 그리고 생각의 욕구로부터 나온 우리의 습관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태어났다. 이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고 이끌고 계신 것이다. 이 두 사람 가운데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로마서 7장에서 이 전투에 대한 내용이 계속된다. 그런즉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내 안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행하면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율법에 동의하노니 그런즉 이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7:16-18)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람, 존재, 출생, 믿음, 욕구 그리고 두 주인들 가운데 계속되는 전투에 한 사람이 속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계속 진행되는 투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는 완성된 작품이라고 하며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완벽함에 도달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한다( 3).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요일 3:8)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마귀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요일 3:9) 우리가 만일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죄를 짓지 않으며 만일 그가 죄를 짓는다면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다.

(2) 당신 안에는 두 사람이 있다.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채로 죄의 속박에 있는 옛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성경은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새사람이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두 가지 출생은 모두 사실이다.

로마서 8:23을 살펴보자.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으며 새로운 창조물이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고 성령님이 그 안에 거주하고 계신다.

이 사람은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그리스도께로 사로잡아 와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성령을 따라 걷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걷지 말아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고린도전서 2:11에 따르면 사람은 인간의 영에 영향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구원받았으나(벧전 1:18-19) 자신이 살고 있는 육신은 구원받지 못했다( 8:21-24). 그는 육신 안에서 신음하며 육신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고후 4:16-5:8).

구원받은 사람의 일생은 계속되는 대립의 연속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 존재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썩어질 육체 안에 살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겉사람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마음속에 거하는 사람을 속사람이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의 성향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는 전쟁이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그 날을 소망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사역자들이 신자의 이중적인 모습을 한 사람은 아담 안에 있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한 사람이 동시에 아담과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설명이다. 육신은 육신으로부터 태어났고(3:6) 아담으로 말미암은 타락의 결과로 이 모든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혹은 성령님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로서 이 모든 승리를 향유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3:5, 요일3:9). “아담 안에 있다는 말은 육신적 출생과 관련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새로운 출생으로 얻게 된 새로운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가지 부류의 인간

성경적으로 우리가 인간을 두 부류, 즉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으나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을 또한 두 가지 부류로 더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재까지 우리는 신격이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님으로 계시되었다고 배웠다. 우리는 또한 인류를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로 분류했다. 따라서 성경이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본성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육신에 속한 사람(The Carnal Man)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으로 나누는 것을 배우게 된다.

 

본성에 속한 사람

본성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우리의 육신적 출생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즉 죄를 향해 나아가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기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을 포함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3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전적으로 육신에 의해서 통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을 억제할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육신적이다. 여러분은 율법을 통해서 혹은 힘을 통해서 이를 억제할지도 모른다. 혹은 죄로 인한 처벌과 보복의 두려움을 통해서 억제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에게는 올바른 것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 본성에 속한 사람의 모든 욕구는 육신의 갈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유다서 19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를 분리시키는 자들이며 육체적 감각대로 살고 성령이 없는 자들이니라.” 본성에 속한 사람을 특징짓고 있는 둘째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의 감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을 느꼈어. 너는 어떻게 느끼고 있니?” 라고 질문한다. 또한 네가 그것을 들었을 때 어떻게 느꼈어?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는 것 같아.”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본성에 속한 사람을 움직인다. 심지어 자신을 영적이거나 종교적이라고 착각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기도 한다.

본성에 속한 사람은 전적으로 자신의 감각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으며 주님의 인도는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14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느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는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들은 교육받아야 하며, 법은 집행되어야 하고, 범죄는 처벌받고, 국가는 군대를 소유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떠한 교회, 모임, 기업도 정해진 질서와 그것을 집행하는 수단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에 속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육신의 정욕이 그를 통제한다.

(2) 육신적 감각들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3) 영적인 분별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도 다수가 이런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거리설교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것은 나에게 매우 큰 부담을 주고 있어요.”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느끼는 방법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왜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교회에 출석하기를 꺼려할까?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임을 알고 있으나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하여 그 진리의 가치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은사주의 스타일의 광적인 예배나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우상들을 가지고 예배하려는 자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선한 양심이 아닌 그들의 감각에만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설교자와 기독교 작가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인간 지도자의 의견에 기록된 성경말씀 보다 더 권위를 두고, 자신들의 내적 느낌과 인상이 성령님의 인도라고 생각하며,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의미도 없는 중얼거림이 주님의 권능이라고 믿고 있는 성도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정확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면 성경은 구원받았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육신에 속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육신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육신을 위한 것들과 육신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생명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는 로마서 8:5-6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들 이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들에 대한 열의를 갖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 지옥보다는 하늘나라에 가려고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이상으로는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나니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5-6)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고( 2:14-15), 새로운 삶으로 일으켜졌고( 6),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벗어났으나(벧후 1:13-14),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죽었을 때 생각했던 것들을 현재도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죽었을 때 관심이 있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육신적인 사람은 성경보다 TV를 좋아하고 예배보다 운동 경기를 좋아하며 단정한 옷보다는 이 세상의 패션을 추구하고 겸손하지 않고 자만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남을 헐뜯는 것을 좋아한다. 혼은 구원받았으나 마음은 여전히 무덤 주변을 서성이면서 방황하고 있다.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8:7) 육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삶이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죄와 세상에 대한 동경과 욕구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적대시한다.

만일 이러한 것이 의심스럽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이혼을 싫어하신다고 말해보라. 천명 가운데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스포츠에 빠져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일에 운동 경기를 즐기는 게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것이라고 말해보라. 천 명 가운데 단 한 명도 하나님을 위해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커졌지만 인간을 높이며 죄에 대한 책망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나 성경의 살아계신 하나님과 반목하는 목사와 신도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을 때도 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다른 것은 최종 목적지(하늘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우리 교회를 병들게 하는가? 본성에 속한 사람(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가득 차서가 아니라 육신적인 사람, 즉 성경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TV 프로그램을 증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술집종사자, 마약거래자, 매춘부 혹은 간음하는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푼다. 이들은 그런 사람들 안에서 쾌락을 찾으며 그들을 변론하고 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증오하고 참지 못하며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고린도전서 3:1-3에서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고린도전서 1장을 살펴보면 편지를 수신한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적인 사람들이었으며 영적인 아이들이기 때문에 단단한 음식에 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지 못했다. 그러면 이 거듭난 사람들이 다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처럼 행동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주님과 교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았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 밤새 노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놀러 다니거나 운동 경기를 시청하며 토요일 전부를 보낸다. 그들은 이단들이나 천주교 신자들과 섞여 어울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형제 자매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은 설교를 하는 사람, 찬양을 부르는 사람, 혹은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사람을 질투하고 부러워한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싫어한다. 만일 그들이 부유한 사람이라면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그들은 마치 구원받지 않은 사람처럼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하는 봉사를 자랑하고자 한다. 만일 다른 사람 혹은 그 사람들의 자녀가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것을 질투한다.

육신적인 사람은 끊임없는 투쟁의 원인이 된다. 주일학교에서 어떤 마찰이 존재하는가? 형제들끼리 분쟁이나 교제의 문제가 있는가? 당신이 대화하기 꺼리는 지체가 교회에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 순간 분명히 육신적인 사람인 것이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축구경기에서 상대방 선수에 대해 참을 수 있는 부분을 청소년 그룹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참지 못한다. 자신의 직장에서 다른 동료들에 대해 참을 수는 있지만 교회에서 옆자리에 앉은 지체에 대해서는 참지 못한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은밀한 삶 속에서는 허용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교회에서는 교제를 끊는 이유로 삼기도 한다.

육신적인 사람은 화를 잘 내며 질투를 한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으며 자기중심적이다. 자신과 교회 지체들 사이에 구분되는 이런 점들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만이 자신이 하는 일이 육신의 일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자신이 매우 영적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친구가 없는 이유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세상적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를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육신적인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초래한 행동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데 있다. 갈라디아서 6:7-8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뿌린 것을 자신이 거둔다는 것이다.

육신적인 사람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이 착륙할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 착륙한 뒤에 후회한다.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이 곤란에 처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하나님, 이 상황으로부터 저를 구해주십시오.” 육신적인 사람은 육신에 씨를 뿌리고 수확의 실패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그에 대한 대가를 내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를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도록 키운다면 그 대가를 언젠가는 지불해야만 한다. 여러분이 간음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아무리 회개를 해도 아이라는 그 결과는 피할 수 없다. 죄의 대가는 몇 년이 지나도 우리 육신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는 우리의 영적 생활에 수년에 걸쳐 큰 피해를 준다.

구원받은 남편이 아내를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은 참으로 불행할 것이다. 구원받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육신적인 생각은 죄의 결과를 고려하지 못한다. 오늘 행동한 결과가 내일 어떻게 나타날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현재의 이 길이 일 년 혹은 십 년이 지나서 어디로 갈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다.

육신적인 사람을 특징짓는 넷째는 그 사람이 일시적인 전투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혼에 영향을 주는 것보다는 자신의 육신에 영향을 주는 것들에 더 큰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육신적인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서는 무척 창피해하지만 세상적인 문제와 관련된 갈등에 대해서는 거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10:3-5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걸으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에베소서 6:12은 그리스도인이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며 살과 피와는 맞붙어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육신적인 사람은 낙태를 금지하는 탄원서에 동의할 수 있으나 자신의 동료들에게 거듭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의 삶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어떤 정치인을 지지할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오고자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의 아들이 속한 야구팀이 대회에서 이기도록 응원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웃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육신적인 사람은 만일 자신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 설교자와 사역자들(그들의 면전에서는 아닐지라도)이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면 그들과 싸울 것이다. 그러나 죄의 속박에 빠져있는 다른 사람들의 혼을 위해서 사탄과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적은 국세청, 시장, 정당, 학교, UN, 음식에 있는 중금속, 물속에 떠다니는 해로운 물질들이 아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며 이 세상 삶을 보다 편리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적은 사탄의 속임수이며 우리의 가정, 아이들과 교회를 파괴하는 사탄의 세상 제도이다. 우리의 적은 거짓 종교이다.

육신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과 하늘의 왕국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잃어버린 혼을 영적인 왕국으로 인도해야 되는 신약시대 교리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것들(물질적인 복들)을 얻으려고 싸우고 있다.

 

영에 속한 사람

성령님의 통제 아래 걷는 사람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사실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이나 육신에 속한 사람의 경우 발생했던 문제점들을 앞선 성경 구절들을 통해서 살펴봤으며 우리는 또한 영에 속한 사람들의 특성도 발견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2:13, 15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한 가지 기준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기준은 바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이다.

내가 이 직장을 다녀야만 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이 사람을 친구로 사귀어야 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어떤 교회에 출석해야 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누구와 결혼해야 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배우자를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소유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영적인 사람은 사람을 사귀는 문제나 투자하는 문제 등을 포함한 모든 의사결정과 모든 행동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결정한다. 하나님은 가장 나를 잘 알고 계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답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혜가 있으시다. 따라서 육신을 내려놓고 옛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지혜를 구하고 그것에 복종해야 된다.

성경이 답을 해주지 못하는 그 어떤 상황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 답은 구체적인 구절을 통해서 제시되는 경우도 있으며 일반적인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영적 진리를 통해 제시되기도 한다.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인생의 방향을 성경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영에 속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다른 뚜렷한 특징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영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무관심하지 않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그냥 지나쳤던 것처럼 그들은 다른 사람의 위험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자신의 문제와 동일하게 고민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자신도 동일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족한 다른 형제를 비난하지 않는다. 영에 속한 사람은 자신도 수없이 낙담했었기 때문에 낙담한 형제를 거칠게 대하지 않는다. 영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저주하기보다는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혼을 위로하려고 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성격이나 부끄럽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교회 모임이나 전도하는 일에 빠지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인간의 행위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한다.

영에 속한 사람의 셋째 특징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평화를 향유하는 것이다.

로마서 8:6을 다시 살펴보자.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한때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나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과 복된 교제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의 조화로운 교제도 누리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았으며 하늘나라로 가는 그 여정을 즐기고 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기쁨이며 기도를 하는 것은 노동이 아닌 위로가 되는 것이다. 믿는 사람과의 모임을 늘 고대하며 설교에 늘 관심을 가진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은 그에게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무엇을 섬기거나 나누어 주는 데 특별한 동기부여가 필요하지 않다.

구원받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 구원이 주님께서 주는 기쁨과 동행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예수님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신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제에 복종한 삶을 통해 성령님께서 생산하신 열매를 생각해 보자.

사랑. 아내의 사랑을 받는 남자들 가운데 자신의 죄와 방황하는 마음으로 인해 그 사랑을 향유하고 공유할 수 없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진실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으나 그 사랑을 감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받기조차 거부하는 자녀가 수없이 많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에서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나 성령 안에서 동행하는 사람들만이 그 순수하고 완벽한 사랑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기쁨. 우리 구원자께서는 거듭난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의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기를 원하신다. 성령님의 통제에 자신을 맡긴 하나님의 자녀는 인생의 모든 고난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

화평.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구속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화를 내고, 이 세상의 왕국들이 전쟁을 하고, 아담의 후손들이 우리를 위협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오래 참음. 신자의 삶도 고난과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주님의 많은 자녀들이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 본성에 속한 사람들은 시험을 당할 경우 대부분 실패한다. 거듭났지만 육신적인 사람들은 어려움을 주는 근원에 대해 불평하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어려움들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게 된다. 성령님의 인도를 통해 우리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부드러움. 우리 주님께서는 확신을 가지고 행하셨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셨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수준은 매우 높으나 어느 누구도 파멸시키지 않는다. 주님은 멍에를 가지고 계시지만 그것은 매우 가볍다. 주님께서는 부담을 주시지만 그것을 가볍게 해 주신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도 설교를 하고, 간증을 하며, 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교회를 세우지만, 성령님께 지배 받는 그리스도인은 은혜와 온유로 그 일들을 감당한다.

선함. <창세기 3장 성경 공부 개요>를 통해 우리는 선한 것은 의로움의 결과이며 악한 것은 불순종의 결과임을 배웠다. 본성에 속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은 때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으나 결국 육신에서 난 것은 육신의 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최선의 행위의 결과가 결국에는 부정적이고 나쁜 결과를 초래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는 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이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

이 개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만과 자랑으로 설교하는 사람의 경우를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 사람은 복음의 내용을 설교한다. 사람들이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명예와 헛된 명성을 추구한다. 성경을 가르치고 때로는 혼을 구원하지만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된 방법으로 헌금을 모으고 그런 행위를 정당화한다. 겉으로 보기에 거룩한 이 사역의 뒤에 감추어진 동기가 알려지면 그 끝은 결국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성령께서 인도하는 개인은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옳은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

믿음. 인생이 불확실한 경우에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육신은 갑작스런 고난에 절망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영적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진행되며 모든 것이 맞추어져 주님의 자녀의 선을 위해서 존재할 것임을 안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은 믿음의 길을 지키며 승리하게 된다.

온유함. 이 능력은 잘못된 것을 가려내고 사랑이 넘치는 상태로 유지하게 해주며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자비로움이다.

절제. 본성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인도하는 길로 향한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통제되어야 함을 알고 있으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약점을 억제한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보장된다. 그러나 그 사실이 지상에 있는 동안 매일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늘로 향하는 인생여정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영적이냐에 달려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0 컬럼 킹제임스성경신학원 2012년 봄학기 과목 안내 이우진 03.03 6872
569 복음 성경의 구원-4 놋 뱀 이우진 12.08 6843
568 양육 거룩한사람-제1과 요한복음1:1-18 이우진 03.18 6778
567 컬럼 신학원에서 공부하는 이유 이우진 07.31 6778
» 교리 세대주의 재고찰-제6장 인간의 종류 이우진 09.12 6763
565 성경 우리는 왜 킹제임스성경을 믿는가? 2 1 이우진 07.13 6758
564 성경 예수님과 성경-제6장 예수님과 성경의 6가지... 이우진 11.19 6697
563 컬럼 제4회 킹제임스성경신학원 성경강연회: 천년... 이우진 05.08 6683
562 강해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2(1월8일-14일) 이우진 01.05 6682
561 컬럼 조지 가(街)의 복음 전도자 1 이우진 06.09 6645
560 교리 성경과 지질학-20 에덴의 강들을 찾아서 이우진 02.27 6586
559 복음 (한영)하나님의 구원 계획 이우진 03.28 6499
558 양육 영적 성장-6 겸손하라 이우진 08.19 6489
557 복음 성경의 구원-9 에티오피아 내시 이우진 01.21 6484
556 양육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1 이우진 10.02 6426
555 컬럼 킹제임스성경신학원 2012년 가을학기 안내 이우진 08.03 6384
554 강해 마가복음 12:28-31 강해 - 가장 큰 명령 이우진 05.11 6359
553 성경 우리는 왜 킹제임스성경을 믿는가? 1 1 이우진 07.06 6359
552 복음 예수님의 죽음부터 부활까지의 활동들 이우진 05.21 6331
551 교리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우진 09.23 627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0 Next
/ 30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