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12.16 23:07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52(12월 22일-31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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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52

12월 22일-31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1222

베냐민

 

베냐민은 이리같이 먹이를 강탈하리니 그가 아침에는 탈취한 것을 먹고 저녁에는 노략한 것을 나누리로다.( 49:27)

이 예언은 아마 다음 4가지에 적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1. 우선 사사기 20-21장에 기록된 베냐민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이들은 분명 이리처럼 먹이를 강탈하였습니다. (잔인한 전쟁을 주목하세요.) 이 두 번의 전투에서 베냐민은 승리했고 먹이를 먹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야베스 길르앗 여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을 때 노획물을 나눈 셈입니다.

2. 이 예언은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첫째 왕인 베냐민 출신 사울에게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투사였던 왕은 여러 번의 전투에서 먹이를 먹고 승리의 노획물을 나눈바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양떼를 삼킴으로써 자신이 항상 이리임을 입증한바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양떼의 재산과 자녀와 기쁨을 강탈하여 모두 자기 것으로 취했습니다.

3. 이 예언은 때로 베냐민 최대의 영웅인 사도 바울에게 적용됩니다. 바울은 회심이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강탈하여 먹이처럼 먹어버렸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남녀노소를 박해했고 투옥시켰습니다( 9:1-2, 26:9-11). 그러나 그는 회심 후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노획물을 획득했습니다.

4. 우리는 또한 이 예언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처럼 성도들을 박해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본성으로는 이리였습니다. 그리하여 이기심과 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복음을 대적하고 삼켜버렸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께로 돌이킴으로 새 인생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예수님의 모든 자녀와 함께 노획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1223

창세기 48, 49장 묵상

 

48:1 “병들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이 표현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48:2 당신은 나이 들고 병든 분을 찾아가시는지요? 당신의 교회는 요양원과 교회에서 사역하시나요? 이 구절을 보면 죽어가는 한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와 준 것을 보고 힘을 얻고 있습니다.

48:10 성경에 기록된 첫 입맞춤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한 것이었습니다( 27:26). 이 시력을 잃은 사람은 그가 손자에게 입맞추면서 그 옛날을 기억했을까요?

49:1 “너희는 함께 모이라.” 이 표현은 2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첫 번째 것은 이스라엘이 환란 전에 모이는 것으로 처벌받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환란 후에 모이는 것으로 남은 자들이 축복받기 위한 것이지요. 이 두 번의 모임 가운데에 마지막 날들에 너희에게 임할 일들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49:2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귀를 기울일지어다.” 우리 역시 우리의 하늘 아버지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실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며 그리한다면 그들은 행복을 갖게 될 것입니다.

49:33 아브라함(25:8)과 이삭(35:29)은 숨을 거둔 반면에(gave up the ghost) 야곱은 숨을 내어주었다(yield) 라고 기록되어 있군요. 첫 번째 것은 버리다 거두어진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만족한 가운데 숨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49:33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 지니라.” 이 표현은 성경에 6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겠지요.

 

 

1224

창세기 50장 요약

 

1: 찡한 장면이군요.

2: 의사들이 염하는 장면입니다.

3: “이스라엘 야곱은 믿음으로 죽었음이 분명합니다.

3: 염하는 기간이 4일 걸렸습니다. 40일이라는 표현이 창세기에 다섯 번째로 등장합니다.

3: 요셉은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매우 존경 받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두 달이 넘었다고 합니다.

4-9: 야곱과 요셉의 집안이 이집트의 지도자들과 함께 야곱의 장례를 위해 가나안으로 갑니다.

10-14: 일주일간의 애곡이 끝나고 마므레 앞 막벨라 밭의 굴에 그의 시신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로의 귀환이 이어집니다.

15: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아버지가 떠났으니 그가 자신들의 과거의 죄로 인해 그들을 벌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16-17: 아마 이들이 한 말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말을 한 기록이 없으니까요. 요셉은 그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아파합니다.

18: 이삭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할 것이라는 예언이 다시 한번 성취되고 있습니다.

19: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은 그들을 향한 요셉의 계획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아마 자신을 만드신 그분 앞에서의 자신들의 모습을 냉철히 숙고하게 되었을 겁니다.

20: 놀라운 간증이군요. 요셉이 모든 시련들 가운데서도 잘 버티어 낼 수 있었던 근거가 이것이지요. 많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로마서 8:28과 빌립보서 1:6을 보세요.

21: 요셉은 형들을 계속 돌보아 줄 것을 약속합니다.

22-23: 창세기의 이 마지막 문단은 앞선 구절보다 무려 54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삶은 틀림없이 일상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면서 평범한 생을 이어갔을 겁니다. 그는 틀림없이 중요한 직책에 따른 업무가 과중했을 텐데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아버지의 믿음에 충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요셉은 하루 하루의 일상 생활을 성실하게 살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삶으로 인해 아버지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24: 그에 앞선 아버지처럼 요셉도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목적을 종식시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 땅에 대한 약속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24-25: 요셉은 다음의 세 가지를 믿고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 속해 있다.

(2)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이 가능치 않다.

(3)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될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5: 요셉은 죽음에 있어서도 자기 형제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는 자신을 멀리 떠나 보낸 것에 대해 용서했으나 그들의 사랑과 임재를 잃어버렸던 것을 결코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야곱처럼 약속의 땅에 묻어주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야곱과는 달리 이 일이 자기가 죽는 순간 성취되기보다는 이 민족이 함께 이집트를 떠나게 될 때까지는 자기 가족과 함께 머물고 싶어 합니다.

 

1225

예수님에 관하여 좀 더 알아 봅시다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으리라, 하고( 50:15)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요셉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고 평강과 죄사함의 기쁨을 누린 사람도 신앙생활도중 자신의 옛 죄들을 떠올리게 되는 상황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께서는 다 잊으신 것을 기억해내고 이로 인해 두려움 사로 잡힐 때가 있지요.

얼마나 오래 구원을 받았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 어라나 많은 방식으로 사랑의 돌보심을 입증해 주셨는지 간에, 하나님의 자녀는 때로는 의심과 근거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한 일을 오인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잘 영위해 나가던 훌륭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 어느 날 갑자기 과거에 저질렀던 죄가 떠올라 나 같은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 죄로 인해 나를 대적하실 꺼야.’ 라고 억측하는 것이지요.

이에 더하여 육신적이고 자의적인 잘못된 설교로 인해 구속 받은 주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리실 것이라든가, 자녀를 죽이심으로 학대하실 것이라든가, 직장을 빼앗아버릴 것이라든가(주로 십일조를 안 하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저지른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때리실 것이라든가, 천년왕국 때 잠시 동안 불 가운데서 있게 하실 것이라든가, 혹은 그들의 생애를 비참하게 만드실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악한 억측은 허황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억측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도 요셉의 형들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결코 우리의 과거의 죄들로 인해 우리를 벌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거짓말을 하신 것이라고 이 시간 걱정하고 계신가요? 그런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분이 거짓말을 하실 수 있을까요?

 

 

1226

두려움은 거짓을 낳는다

 

거짓말들과 거짓 교리들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선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진실로 자신들을 사랑하시는지, 혹은 진실로 모든 것을 용서하셨는지를 두려워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사실이 아닌 것들을 말합니다. 다른 자들은 거듭난 자들이 세상적으로 살거나 신실하게 섬기지 않을 경우에도 결코 정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봐(3:16-29, 8:28-38)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위협하거나 조작된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야곱이 했다는 발언을 들고 그에게로 왔습니다. “…이제 원하건데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이 발언을 야곱이 했든 안했든 간에 (개인적으로는 안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책은 가려졌으니까요. 요셉의 마음은 형들이 전혀 그런 짓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형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를 구원하는 그 믿음이 우리 죄들을 다 치우지 못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다시 회개하고 자백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의 보응을 하실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갈보리에서 흘려진 그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책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용서해 줄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데 주님께서는 얼마나 자주 매일같이 그런 기도를 들으셔야 하나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셨습니다(9:26). 그분은 더 이상 그것들을 기억 하시지 않으십니다(8:12, 10:17). 죄들은 피에 의해 가려져 버렸습니다(2:4). 다 끝난 겁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형들이 자기를 아직도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요셉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가 그들에게 말한 것 모두와 그의 사랑을 입증코자 한 모든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그를 두려워 하고 완전히 신뢰치 못하다니…. 이처럼 우리 주님의 마음도, 그분의 모든 말씀과 축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도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할 때, 몹시 상하시는 것이지요.

 

 

1227

바람직한 섬김

 

창세기 50:17,18에서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약간 역겨워 보입니다. 그들은 목숨이 두려워 요셉 앞에서 굽실거리고 있으니까요. 요셉은 이 모습을 보고 울었습니다. 이것은 그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불신의 모습이니까요. 그들은 요셉 앞에서 엎드리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두려워 말라고 명하고는 자기는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을 것이고 그분께서 용서하신 자들을 벌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그분의 발 앞에 두려워하며 부복하지 않으면 그들을 상하게 하고, 때리고 멸하실 거라는 설교를 듣고서 제단앞으로 헌신하러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우십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고 불신의 표현이니까요. 그분께서 그리도 잔인하신가요? 두려움에 떠는 자녀를 원하실까요? 요한은 계시록 1:17에서 영광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 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 그분께서 오른 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내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성경을 통해 믿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는다고 말씀하신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께서는 모순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50:21에서도 요셉은 두려워하지 마소서라고 또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부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그들을 위로했고 친절히 말했습니다.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한 구원자께서 계신데 우리의 의심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이며 우리의 두려움은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몸과 혼을 위해 필요한 것들로 채워 주심으로서 무한한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또 다른 위로자를 보내사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게 하셨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늘 우리와 함께 사실 것을 확신 시켜 주셨지요. 주님은 친절과 은혜와 긍휼로 말씀해 주시는데 그분이 거칠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기뻐하십시오!

 

 

1228

임종 앞의 두 모습

 

야곱은 죽어가는 순간 막벨라 굴에 묻힐 것을 바라면서 주로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이에 그가 죽을 때 그곳으로 돌아가고픈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반면 요셉은 죽는 순간 미래를 내다 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사실 이 민족은 이미 오랫동안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요셉은 이집트에서 자랐고 그에게는 가나안은 단지 추억에 불과 했지요. (적어도 개인적 경험에 관한 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야곱에게뿐 아니라 요셉에게도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야곱은 과거를 바라보며 네가 나온 그 가나안 땅을 잊지 말라며 스스로 믿음을 지켰고 요셉은 네가 가야 할 가나안 땅을 잊지 말라고 하면서 미래를 내다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풍요와 화평과 행복을 누리고 있던 때에 아들들로부터 맹세를 받았습니다. 반면 요셉은 곧 속박의 때가 다가오고 있을 무렵 형제들로부터 맹세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맹세는 이집트의 풍요 안에 머물지 말라인 반면 두 번째 맹세는 이집트의 역경 안에서 기진 하지 말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집트에 영원히 묻혀서는 안될 것이라는 엄숙한 약속은 요셉의 확고한 믿음을 증언해줍니다. 신성한 매장지에서 안식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뛰어넘는 승리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최고의 대접과 존중을 받은 화려한 장례와 추앙을 뛰어넘는 믿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찾아오신다는 놀라운 확신을 갖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믿음이었지요. 요셉은 이 확신을 형제들에게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말로 할 수 있지만 죽은 후에도 묻히지 않고 남아있는 몸이 침묵의 호소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 시신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언으로 남아 있을 것이요, 형제들로 출애굽의 해방 일이 다가오리라는 불멸의 소망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1229

결론

 

창세기가 마지막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지금 우리는 주님의 길들을 주목해 봅니다. 주님은 모세로 하여금 성경의 첫 다섯 권을 기록하도록 하셨고 다섯 권의 책을 구분해 놓으셨습니다. 첫 번째 책은 아담이 수치와 두려움 속에서 동산을 떠나는 것으로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인이 핏기 있는 동생의 시신 곁에 서 있는 모습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홍수로 덥힌 땅과 더불어 창세기가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조상들의 생애에는 이처럼 엄청난 책이 대단원을 막을 내릴 만큼의 극적인 사건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가나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라면 요셉의 승리와 더불어 우리 모두로 하여금 행복감에 젖어있도록 마무리를 지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마지막 장은 요셉이 자기 아버지의 시신 위에서 울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이집트에서 관에 라는 표현으로 끝나버립니다.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시작, 즉 서문에 해당됩니다. 이 책은 계속된 실패와 끔찍한 죄, 믿음 없는 사람, 그리고 죽음 가운데서 눈에 띌 만한 멋진 장면과 승리의 장면은 아주 드문 모습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냉정하고, 정확하고, 정직한 진리의 기록입니다. 창세기는 뒤이어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 예비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날수가 적고 괴로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14:17). 창세기는 차갑고 어둡고 우울한 책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야기가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기쁨도, 행복도, 만족도 누릴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작된 계획과 일이 아니면 그 결과는 멸망뿐입니다.

창세기는 종교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는 어둠과 빛, 생명과 사망, 주님, 혹은 허망함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1230, 31

후기

 

창세기 공부를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 주위에 모여 요셉의 종이 되겠노라고 맹세하면서 요셉 앞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50:18).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일이 이리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얼굴을 땅을 대고 엎드려 있는 이 열한 명의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요셉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화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셨고, 가족은 생이별을 하였으며 요셉은 시련을 겪었고 계속해서 고통들이 뒤를 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을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어머니의 임재로부터,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찢어낸 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팔아 넘긴 자들의 목을 발로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지낸 감옥에 그들을 집어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백배로 되돌려 갚아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요셉의 놀라운 믿음과 사랑이 반짝입니다. 그는 신약의 로마서 8:28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내용의 말씀을 구약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선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두게 하셨나니(50:20)

!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 또한 이와 같은 확고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요셉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새로운 시련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원수로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약속들을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도구로서 여겼던 겁니다. 그를 왕좌에 앉히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의 구원을 가져오게 한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가 화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또한 순간의 시련 너머를 바라봅시다. 그 시련을 가져다 주는 자들을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복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바라봅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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