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2013.10.08 02:10

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42(10월 13일-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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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함께 하는 일년 42

10월 13일-19일

 

James W. Knox 지음

영균 옮김

 

 

1013

창세기 41장에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요셉2: 왕좌

 

요셉은 파라오에 의해 높임을 받아 왕좌에 앉게 됩니다(40). 그는 스스로 자신을 드높인 것이 아니고 그리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자에 의해 그리 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음이 빌립보서 2:9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2:9)

요셉은 최고의 왕좌를 제외하고 모든 모든 것보다 위로 높임을 받았습니다(40).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모든 것이 그분 손에 놓여있고 통치 받고 있으며 그분의 지혜로운 눈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벧전 3:22). 주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다.” 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원수들이 파멸에 이를 때까지는 주님은 아버지의 권위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고전 15:25).

이렇게 해서 요셉은 파라오의 왕좌 옆에 앉게 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왕좌 옆에 앉아 계십니다( 3:21).

요셉은 본인의 가치로 인해 높여졌습니다. 그에게 그와 같은 지위가 이집트에서 주어진 것은 그 없이는 죽을 사람들을 구원시키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의 지위는 정치적 직분도 아니고 백성의 선출에 의해 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절대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그의 안에서 지혜와 민족을 구원코자 하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미덕 때문에 요셉은 그 땅의 총독이 된 것입니다. 우리 구속 주 되신 분에게서도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9:6-9)?

38: 하나님의 영이 요셉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10:38). 마찬가지로 주의 영이 그리스도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11:2).

39: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5:20).

40: 그는 그 집을 다스렸습니다( 3:6).

40: 그는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5:31).

42: 그는 자신의 새로운 지위에 맞는 증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5:31, 2:9).

 

 

1014

창세기 41장에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요셉3: 결혼

 

요셉은 이 민족으로 이끌려 와 종이 되었고( 39) 죄수로 간주되었으나(40) 이제는 승자로서 우뚝 서 있습니다. 그의 권위와 영광은 공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36). 사람들은 그가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절하라.”는 외침 소리가 놀랍지요? 이는 주 예수님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3:10).

이집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요셉을 사랑하지 않을지 모르나 어쨌든 모든 무릎이 무릎을 꿇고 그는 그들 모두를 다스립니다. (히브리 사람이 그런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싫어하는 자들도 있었겠지요.) 예수님도 그리 되실 겁니다.

다른 사람은 요셉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44, 15:5). 그에게는 새 이름이 주어졌고 그 이름의 의미는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마태복음 1:21과 사도행전 5:31을 읽고 기뻐하세요.

그가 높임을 받은 후 그는 이방인 신부를 얻게 됩니다(45). 그리스도의 몸 역시 세상의 민족들 중에서 취해지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에게 기쁨을 더 하기 위해 그분께 주어집니다( 15:14, 5:31-32).

이 혼인은 왕의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22:2).

이 혼인에 뒤이어 전세계적인 기근이 올 것입니다(54). 이 기간 중 살아남으려면 사람들은 그가 말한 것을 해야만 합니다(55, 2:5). 요셉은 7년 간만 백성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54-57). 모든 민족들이 빵을 얻기 위해 그에게 와야만 했습니다( 6:35). 이와 같이 그는 민족들의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1:11). 이 사실을 앞에서 성경은 성령님께서 쓰신 것임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49: 그가 공급할 수 있는 곡물은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1:7, 2:4).

 

 

1015

창세기 41장 마지막 묵상

 

바다의 모래같이(49) 이 표현은 성령님께서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숫자에 관해 말씀하실 때 자주 사용하고 계십니다. 다음 경우 이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씨( 22:17)

(2) 요셉의 곡식(이곳)

(3) 다윗의 씨( 33:22)

(4) 솔로몬의 마음의 넓이(왕상 4:29)

(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들( 139:18)

 

요셉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50) 그는 기근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자식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예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종말이 올 것이니 사고 팔고 결혼하고 등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모든 일들을 하되 하나님을 잊지는 말 것을 경고할 뿐입니다. 어느 시대에 살건 인간에게는 어두운 시절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희망을 지니고 바라보기를 중단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순종임을 자랑하는 민족으로 유대인을 지목하는지 모르나 실상은 열두 지파 중 두 지파는 이집트인과 섞인 혼혈입니다.

너와 같이 사려 깊고 지혜로운 자가 없도다.”(39)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숨겨져 있으며( 2:3), 그분은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십니다( 2:25).

므낫세는 잊어버림을 뜻합니다(51). 에브라임을 열매가 가득함이란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죄들은 잊어버리시고 우리로 그분의 이름을 위해 열매를 맺도록 해주십니다.

이 사람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3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만 명 중 최고요 온통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5:10, 16).

 

 

1016

이집트에 있는 곡식(42) 1

 

이번 장에서 우리는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더 충격적인 유사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이집트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1) 본문을 보니 듣고라고 되어 있지 않고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은 이미 들은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동을 취하려면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이집트에서 곡식을 얻어 돌아온 자들이 가져온 곡식을 야곱은 직접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뒤는 죄인은 그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공급될 수 있는 것인지 증거를 욕합니다. 그 증거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산다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거할 곳을 믿음으로 이미 확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거룩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힘이 거룩한 삶에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권능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쳐다 만 보느냐?”(1) 모두가 다 굶어 죽게 생겼는데 어째서 서로 쳐다 만 보고 있는 것인가요?

마찬가지로 아담의 자녀들도 서로를 쳐다보며 구원을 찾습니다. 소용없는 짓이지요. 사제, 랍비, 목사를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살려면 곡식이 필요한 자들일 뿐입니다. 마호메트, 간디, 마리아,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자든 작은 자든 다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직 요셉만이 이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영생도 주님 만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로 와서 생명의 빵을 거저 받기 전에는 귀한 자든 천한 자든, 지혜로운 자든, 어리석은 자든 다 죄 가운데서 죽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2) 이 진리는 칼빈이 놓쳐버린 것으로 실로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곡식을 원하는 자는 누구나 갖을 수 있습니다. 그저 요셉에게로 가면 됩니다. 그 가능성은 모두에게 주어져있습니다. 가기만 하면 그 누구도 거절 당하지 않습니다. 가면(그러면) 살고 죽지 않습니다.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고자 하는 자는 올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거절당할 염려는 없습니다.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1:18-22).

요셉의 형() 열 사람이(3) 형들은 기근으로 인해 한 때 거부당했던 한 사람의 발 앞에서 간청을 드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좋은 처지에 있을 때에는 그를 찾을 생각이 없었으나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자 전혀 갈 계획이 없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풍요로운 시절에는 구원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많은 사람들이 괴로운 처지가 되니까 그분께로 향하고 있는 자신들을 보게 됩니다. 열 형이 그가 요셉인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사람들도 진정한 구원자가 예수님이심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그분께로 돌이키고 나서야 그분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 전까지는 여기 저기서 도움을 얻어보려고 시도합니다.

야곱이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4)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모든 것이 다 요셉에게 달려있음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 뭔가 매력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신들의 운명이 살아계시고 사랑이 많으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에 전적으로 달려있음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베냐민을 붙들어 놓고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이 가면 요셉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주저함은 오늘날의 유대인이 자신들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10 17

이집트에 있는 곡식 2

 

창세기 42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하고도 교훈적인 예표를 계속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대 민족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빵도 없이 거하고 있었습니다(5, 6:48).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고 모든 민족들은 그 복을 나누어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유대 민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때만 제대로 수행 할 수 있습니다. 굶주리고 있는 이스라엘 땅의 모습은 한때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 사망의 땅이 되어버린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에 대한 심판인 셈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니(6) 이 또한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이러하지 않으리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지요. 결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되었네요. 지금은 메시아를 계속 거부하고 있으나 그분 앞에 민족 전체가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 보았으나,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더라.”(8) 주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을 알고 어떻게든 그들을 구원하고 회복시키려 하십니다(11). 그러나 그분을 오래 전 내던져 버린(1:11) 자들은 오늘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고후 3:14-15). 요셉은 그들의 이름, 얼굴, 행실, 및 과거를 다 알고서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반면 그들은 그를 바라보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요. 오늘날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관계도 똑 같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알지만(5:3, 16:17, 5:3)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거칠게 말하고(7)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 이들은 이렇게 대접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7년 환란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대적할 말들은 실로 거칠 것입니다. 둘째,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바뀌었는지를 시험코자 그리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회환, 죄책감, 회개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완악하고 무관심한지를 보시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용서를 기뻐하시고 용서를 허락하시고자 갈망하시나 이런 긍휼은 마음이 부서지고 상할 때까지는 주어질 수 없지요( 51).

요셉은 꿈들을 기억하고(9) 7-17절에서 요셉은 형들을 매우 거칠게 다루었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지요. 그들의 삶에 관해 진실을 토해내도록 하였고 마음의 의도를 드러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에 관해 주어진 예언 때문에 행해졌습니다. 앙심을 품고서나 그저 변덕스러운 마음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이 약속에 반대했으나 결국은 그대로 되고 맙니다.

환란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는 마찬가지 이유로, 마찬가지 방식으로 야곱의 아들들을 벌하실 겁니다( 9:17, 23:35-38).

추신: 여러분이 창세기 41-50장을 읽으실 때 반드시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야곱이 믿음으로 행할 때는 성령님께서 그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장들이 미래적, 예언적 관점을 지니고 있기에 특별히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2:1에서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만으로는 굶주림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 곡식을 사러 갔습니다. 이는 그 소식을 믿고 행동이 취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믿음을 보일 경우 야곱은 이스라엘이라고 호칭됩니다. 창세기 45:25-28에도 이 진리는 충격적인 모습으로 예시됩니다. 아들들이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와서(25). 요셉이 살아있다고 전했으나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25). 그러나 27절에서 제시된 증거를 받아들이자 28절에서는 즉시로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28).

따라서 이와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눈 여겨 보시면서 창세기 그 부분을 읽어 가십시오. 무려 20번이 넘게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10 18

한명은 없어졌나이다(있지 않습니다)

 

이 표현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죄를 숨기려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명은 우리가 구덩이에 던졌나이다.” 이렇게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더 정직하게 한 명은 우리가 노예로 팔았나이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 하자면 한 명은 우리가 미워해서 없앴습니다.”가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얘기를 할 때 최대한 미화시켜 우리는 악하고, 못됐고, 지옥가야 마땅한 자들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이 봐 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실수는 크게 부풀리지만 (얘기를 극적으로 만들려고 양념도 치지요.) 자신들의 잘못은 결코 실패가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애쓰지요.

한 명은 있지 않습니다.”(13) (이 표현은 영어로 And one is not 이며  이때…“가 아니다로 해석이 가능합니다.역주). 무엇이 아니란 말입니까?  죽었는지 그가 살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가 노예인지 아니면 지금 그들 앞에 통치자로 서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를 기억에서 지워 버렸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동생은 상인들에게 팔려 끌려간 순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대다수의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으로 완전히 잊혀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없애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분은 일으켜지지도 않았고 살아있지도 않으며 주님도 아닙니다. 그분은 다시 오시기도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있지 않을 뿐(is not)”입니다.

자유주의 설교자들과 학자들은 예수란 이름을 갖고 있었던 한 사람이 이 땅을 한때 걸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인정하려 할 것이고 어쩌다 한 두 사람은 그 분이 주님일지도 모른다고 고백도 할 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고백을 언제 어디서 하느냐에 대단히 신중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생과 구원에 관해서는 그들에게 그분은 단지 있지 않는 분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창세기 42장에서 열 형제가 그리했듯이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 판단했는지를 알게 될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10 19

이집트에 있는 곡식 3

 

15-16절에서 요셉은 그들이 자신에게 했던 짓을 동생에게도 하려 하는지를 보려고 시험을 합니다.

삼일 후 그들은 이집트의 총독과 두 번째 면담을 하게 되며(17) 그때 요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임을 알게 되자 일말의 희망이 엿보입니다. 창세기 스토리 중 하나님께서 요셉의 생애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요셉의 간증을 통해 듣는 것만큼 은혜로운 장면은 없습니다. 앞서 몇 번을 살펴 보았으나 앞으로도 몇 번 더 나올 것입니다.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 아니니이까?”(40:8)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화평의 답을 주시리이다(41:16) 하나님께서 곧 그 일을 행하실 터이니(41:32)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잊게 하셨다.”(41:51) 이처럼 요셉의 생애에 있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 인도받고 통제되었습니다.

이 사실만이 요셉이 아무런 불평 없이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으며, 두려운 여건하에서도 소망을 유지 할 수 있었고, 그에게 해롭게 행하는 자들에게 은혜롭게 대해 줄 수 있었음을 설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20절에서 요셉은 구출은 대리인을 통해 가능함을 계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와 요셉의 형제들의 삶에서의 양심의 역할, 그리고 이 또한 환란 기간 중 남은 자들의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일을 보여주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의 양심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21). 연상의 법칙이 작동 중입니다.  그들은 요셉의 고난을 회상했고 자신들이 그의 요청을 어떻게 거부했는지도 떠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현재의 고난은 자신들이 그 옛날 지은 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심판임을 직감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이 또한 그들의 동생을 산 미디안 상인들이 이집트를 향해 떠났음을 연상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옛날 요셉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실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그들 중 몇 사람의 충고를 무시한 채 죄를 지었고 요셉의 피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형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 속에는 참된 회개의 요소가 놀랄만치 선명하게 들어 있음을 주목하세요.

(1) 양심: 우리가 참으로 죄를 지었도다.

(2) 기억: 우리가 고통을 보고도

(3) 이성: 그러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는 도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에 나오는 환란 때의 21번의 심판들은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를 다시 떠올리게 해 줄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나 그들은 거부했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혼의 괴로움을 보았으나 조롱했을 뿐이었습니다. 유다와 빌라도 같은 자들 마저 도 (자기들 편인데도) 그들의 잘못을 언급했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었습니다. 결국 대 환란이 닥치면 우리가 참으로 죄를 지었도다.” 하는 고백을 하게 되겠지요. 이와 같은 죄에 대한 인정과 고백이 있고 나서야 그들의 구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추신: 21, 우리가 성경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다 읽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명백히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전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함부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곳에서 주어지지 않은 사실(정보)이 다른 곳에서 주어지니까요. 요셉이 겪은 고뇌와 간청은 창세기 37장에서는 언급되지 않음을 기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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