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36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GENESIS 1:1-3

A COMMENTARY ON THE FIRST THREE VERSES IN THE BIBLE

(The Gap Theory)

창세기 1:1-3 강해(간극이론)

Jeffrey A. Tibbetts 지음 용묵 옮김

 

3장 하나님은 빛이시다

 

필자가 창세기 1 2절과 3절을 논할 때 전제조건으로 삼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원성과, 그로부터 유도되는 속성을 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창세기 11절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뒤의 2절과 3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나니.”(요일 1:5) 창세기 1 2, 3절에 대한 필자의 깨달음은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과 이것이 의미하는 것들에 전적으로 근거한 것은 아니나 주로 그러함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글을 진행하기 전에 먼저, 필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님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가 본디 품었던 의도는 이것이 오히려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필자는 오히려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근본주의가 성경적인 기독교를 그럭저럭 대표하는 체계라고들 하나, 그 안에서도 불일치와 다툼은 발견된다. 우리가 믿음의 기준으로 삼는 것들이 모두 성경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것만은 아니며, 인간 생각을 한 번 거친 부산물인 경우도 잦다.

그래서 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목적은 언제나 단 하나이다. 그럴싸하게 포장되었으나 실은 부패해 있는 인간의 견해를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만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도 이 취지에 맞게 마음을 모아, 성경 기록만을 신실하게 따르기로 하자. 어떤 학자나 하나님의 사람의 견해라도 성경과 어긋난다면 과감하게 버리자.

그럼, 창세기 1 3절을 보기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여기서 우리는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와 비교했을 때 질문에 부딪힌다. 1절의 하늘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별들, 그리고 해와 달은 그때 창조되었는가?

스코필드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번역상의 문제라고 제언한다.[1] 해와 달과 별들은 1절에서 이미 모두 창조되었으며 14-19절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히브리 원어상으로 무에서 유로의 원천적인 창조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성경의 번역을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손에 쥐고 있는 킹제임스성경 자체가 이미 완벽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하나님께서 말씀들을 어느 부분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 게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며, 그럴 수도 없다.

신약성경이 최초로 기록될 때는 코이네(Koine)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때는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 언어를 썼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이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지금은 영어가 국제어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역시 영어로 주어졌다. 이것이 킹제임스성경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킹제임스성경에 기록된 14-19절 말씀의 표현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Lights)들이 있어…” 이때의 lights는 빛을 내는 물체로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빛보다는광체라는 표현을 썼다. “있어(let there be)”란 표현은 3절과 마찬가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원천적인 창조 행위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각각의 원천적인 창조 패턴과도 일관성을 형성한다.

다음으로 1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행위는 글자 그대로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창조일 수도 있다.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행위는 광체를 제 위치에다 배치를 했다는 것이다. 17절을 보자. 이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사 광체를 만드신 후 즉시 취하신 행동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광체들이 이미 만들어져서 제자리에 놓여 있었으며 3절에 등장하는은 태양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스코필드의 견해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백 보 양보해서 1절의 시점에서 태양이 이미 창조되었다고 가정하자. (필자는 그렇다고 믿지 않음) 그렇더라도 태양은 아직 하늘의 궁창에 놓이지도 않았는데 3절의 빛이 어떻게 태양으로부터 온 빛일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인해 필자는 스코필드의 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는 대목에서는 빛을 만들어 내는 광체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물리적인 빛 그 자체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한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신성한 명령 빛이 있으라에 의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없던 원소를 말씀으로, 명령 한 마디에 즉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전능함을 찬양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만 바르게 먹으면 그분께서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도 그와 같은 권능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 시편 33:6-9은 이 점에 대해서 필자보다 훨씬 더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들이 만들어지고 하늘들의 모든 군대가 그분의 입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도다. 그분께서 바닷물을 함께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음을 곳간들에 두시는도다. 온 땅은 주를 두려워하고 세상의 모든 거주민은 그분을 두려워하며 설지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매 그것이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그것이 굳게 섰도다.”( 33:6-9)

아멘, 주 예수님. 예수님 자신이 이 어마어마한 창조 사역의 주역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하자( 1:1-3)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날마다 그분을 의지하며 살게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수시로 그분의 어마어마한 권능이 어떠한지 떠올릴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했을 때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을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상 자체가 그저 하나님께서 존재하라고 명령하셨으니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상상해 보라. 아니, 상상할 필요도 없다. 그게 진짜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물들은 하나님을 전혀 거리낌 없이 믿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마귀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2:19)

4절을 통해 우리는 이때부터 시간 측정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빛을 어둠에서 나누사

필자는 이 시점에서 어둠이 이미 존재해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2절부터 이때까지 말이다.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성경을 더 살펴보면, 이사야서 45:7에서 빛과 대조되는 어둠의 창조에 대해 알게 된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

물론 이 진술은 어둠의 창조에 대해 다소 일반적인 언급만 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점은 그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둠은 빛과 반대되는 존재라는 것. 둘째, 단순히 빛의 부재가 어둠이 아니라 어둠 역시 창조되어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 셋째, 빛이 평안과 관련이 있는 것과는 달리 어둠은 재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어둠의 시작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우리는 예레미야서 4장을 통해 얻는다. 이곳의 문맥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예레미야서 4:23내가 땅을 본즉, 보라,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하늘들을 본즉 거기에는 빛이 없고성경에서 이 구절과 정확히 같은 표현이 또 등장하는 유일한 곳은 창세기 1:2이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예레미야서 26절 하반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곳의 모든 도시들이 의 눈앞에서 그분의 맹렬한 분노에 무너졌으니 문맥이 심판이라는 것은 명백히 알 수 있다. 더구나 28절을 보면, 둘째 하늘을 지금까지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에 대한 언급도 보게 된다.

“이로 인하여 땅이 애곡하고 위에 있는 하늘들이 검게 되리라. 내가 그것을 말하였고 그것을 작정하였으니 후회하지 아니하며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저 말씀을 하셨던 당시에는(우리의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거), 위에 있는 하늘들이 지금처럼 검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은 일단, 어둠이란 누군가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까지만 알아 두자.

하나님께서 그저 자신 안에(in), 또 자신과 함께(with) 거하시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공간-물질 연속체의 밖에 계실 때에는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의 수단으로 어둠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말이다. 또한 창세기 1:4로부터 미뤄 보건대 그 빛이라는 물질도 3절에서 창조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은 빛을 보셨다. 우리가 아는 한, 이는 하나님께서 빛을 보았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빛을 최초로 창조하고 처음으로 보기도 하셨으므로 최초의 빛의 품질이 어떠했는지 하나님께서 판단해 볼 법도 하다. 그래서 그 빛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요한일서 1:5 말씀을 다시 떠올려 본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느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God is light)! 우리는 하나님이 빛이셨다는 사실을 알지만, 하나님은 빛이셨을(was)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줄곧 빛이신(is) 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불변하신다는 속성으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야고보서 1:17을 보자.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

여기서는 하나님이빛들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졌음이 흥미롭다. 만약 빛이위로부터 내려오는 좋고 완전한 선물과 같은 개념이라면, 빛이 창세기 1:3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나의 본디 가정은 틀리게 된다. 사실 빛은 빛이 실제로 창조된 때인 3절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그 빛은 물리적인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부였다. (부분과 전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본다면)

따라서 3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부분이 아닌 뭔가 새로이 구분되는 빛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된다. 창세기 말씀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가 이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하나님 자체의 일부분이던 빛이든가, 아니면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지만 자신으로부터 원래 방출되던 빛을 물리적인 원천으로 떼어서 하나님과 별개인 빛으로 창조해 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절차야 어떠했든 3절에서 중요한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빛을 자신과 별개인 요소로도 분리되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우리에게는 하나님도 계시고, 빛도 있다. 따라서 이 둘은 최소한 3절에 비추어 봤을 때 별개인 요소라고 결론짓는 것이 가장 좋겠다. 물론 이런 추론이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를 예로 들어 보면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10:30)란 진술을 볼 수 있다. 별개의 두 인격이라고 여겨지는아버지가 실은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빛은 인격이 아니다. 물질이며 영존하는 물질이다. 빛은 시공간에 대해 함수적인 관계로 매여 있는 파동일 뿐인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빛의 관계는 단순히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넘어서 훨씬 더 근본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다란 문장에는 하나님과 빛이 연합해 있는 두 존재라는 어떤 암시도 찾을 수 없다. 예수님과 아버지와 성령님이 하나로 교제하고 연합해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빛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빛은 인격체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라고만 할 뿐 빛이 하나님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빛을 선함,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킨다고 비유적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고린도후서 4:6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창세기 1:3에서 창조된 그 빛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 구절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요한일서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빛이란 하나님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요소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하나님의 신격을 이루는 구성원까지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은 빛으로 가득 차서 원천적으로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을지칭하는빛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빛이 있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9:3을 보자.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이르니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추더라.” 이 빛이 사도행전 22:6, 9, 11, 13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이 빛은 하늘에서 내려와 바울을 비춘 문자적인 빛이다. 태양이 비춘 자연적인 빛도 아닌데, 왜냐하면 대낮의 태양보다도 더 밝은 빛이었다고 성경이 증언하기 때문이다( 26:13).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이 빛이라고 성경이 말하지만, 요한일서 1:7에서는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다고도 말한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그리고 요한일서 2:8에서는 하나님이 참된 빛이라고 언급되며, 디모데전서 6:16에서는 하나님이 빛 안에 거하신다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럼 잠깐, 요한일서 1:5를 비유적으로뿐만 아니라 문자적으로도 적용해 보자. 하나님은 지식으로 가득하시지 않은가? 하나님은 선함과 참됨으로 가득하시지 않은가? 대답할 나위도 없는 질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이 오로지 비유적으로만 접근 가능하고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 빛이시며 그냥 빛인 게 아니라 빛은 하나님의 일부라고 가정해 보자.

절묘하게도 빛에는 특성이 있다. 빛이 있으면 우리는 사물을 볼 수 있고, 반대로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빛은 지식과 정확히 대응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어둠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빛 가운데에서 걷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보인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다. 이것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고 그 과정과 존재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그 반면, 지식이 없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걷는 것과 같으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인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을 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5:13을 보자. 내가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고.”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럼 이제 물리적인 특성을 살펴보자. 빛은 유한한 속도로 이동한다. 빛은 물리적인 원소 이상의 존재이다. 아인슈타인은 물체의 운동 속도가 광속에 근접하면 할수록 그 안에서의 시간은 느려진다는 설을 확립했다. 광속에 다다른 순간 시간은 정지하게 된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시간에 대해 종속적인 분일까? 물론 아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지배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옹기장이는 진흙을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이지 않는가?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지으신 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겠느냐?”( 9:20)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영원하지 못하다. 시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소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태어났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I am).” 예수님께서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필자는 이를 생각만 해도 전율이 느껴진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without time) 계신 분이다. 우리의 운동 속도가 광속에 근접해 가면 시간은 느려지고 결국은 멈춘다. 광속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영존을 경험하게 되며 시간을 벗어난 경지에 도달한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느니라.”

이렇듯 빛은 물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영원의 문제인 것이다. 시간-공간-물질의 연속체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던가? 빛이 영원의 영역에 존재한다는 발상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를 보면 명확해진다( 21:23-24).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light)이시기 때문이라.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light) 가운데서 다니겠고 땅의 왕들이 자기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여기서는 영광과 빛이 서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또한 하나님 자신(하나님의 영광)이 빛을 방출하는 주체, 즉 광체로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해나 달로부터 나오는 빛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차이가 있음이 명백해졌다. 본서에서 지금까지 거론한 빛은 모두 영원한 빛이다. 내 책상의 스탠드에서 나오는 빛은 영원한 빛이라 할 수 있는가? 대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빛은 진짜 빛의 대용품이다. 그것도 유한하고 일시적인 대용품이다.

창세기 1:1에 나오는 그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지구에서 천사들과 함께 거하셨다. 그런데 죄가 발생하면서(사탄의 타락) 2절에 가서는 어둠이 등장했다. 그러나 어둠이 등장하기 전에는 분명히 요한계시록 21:23-24와 같은 종류의 빛, 다시 말해 영원한 빛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라.”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의 빛이 되시지는 않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죄를 가진 존재(사탄과 그의 천사들)들과 같이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비출 빛이 필요해졌고, 2절 이후부터 하나님은 약 한 주 동안 죄가 야기한 무질서를 차근차근 수습하고 문제를 해결하신다. 우리에게 다시 질서가 갖춰진 세상을 제공하신 것이다. 이제는 빛과 어둠이 낮과 밤의 형태로 반복되고, 둘 중 하나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자유 의지도 생겨 났다. 빛과 어둠이 각각 선과 악을 상징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사실 실제로 그러하기도 하다).

이쯤에서 구원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첫째 날이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던 창세기 1:1-3에는, 실은 앞으로 도래할 우리의 구원 계획까지 계시되어 있다. 베드로후서 1:19를 보면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구원(죄인이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라는 개념이 언급된다. 그리고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되는 지식)이라는 빛은 바로참된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비견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2:20, 3:5). 이러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 바로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인 것이다. 동일한 예표가 고린도후서 4:4, 6에도 등장한다.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이는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기 때문이니라.”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구원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이미 제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날이 시작하기도 전에 예표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은 언제나, 즉 영원 전부터 6일 창조의 첫째 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빛이셨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라는 표현을 쓰신 때는 창조의 첫째 날이 최초이다. 그 빛은 하나님께서 늘 갖고 계시고 알고 계셨던 빛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3의 빛은 창조된 빛이며, 영원한 빛은 아닌 것이다.

그럼, 영원한 빛은 일시적인 빛과는 다르다는 주장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한 예이다. 내가 땅의 일(thing)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3:12) 이로부터 우리는하늘의 것땅의 것이 서로 명확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두 개념의 본질적인 차이는 이사야서 55:9에서 더욱 강렬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성경은 하늘이 땅보다 높다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고도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양뿐만 아니라 질도 포함된다. 하늘이 더 좋기도 하고 더 깨끗하고, 빛도 더 많이 있다.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 자체가 물리적인 고도 차이를 말하고 있는데도 구태여더 높다란 표현이 들어간 것은 고도 차이 이상의 차이가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하늘들이 땅보다 더 높다는 관계가 성립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하늘의 것땅의 것에 대해서도 같은 관계를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늘의 빛(영원한 빛,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나오는 빛)은 땅의 빛(일시적인 빛)보다 더높다.” 여기서 더 높다는 말은 더 밝음, 더 맑음, 더 차가움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고린도후서 4:17-18에서 이 두 개념의 차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기 때문이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보이는 것은 잠깐 있을 뿐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니라.”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영원한 빛은 일시적인 빛을 훨씬 능가하는 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훨씬 더 영광스럽다. 그런데 이 빛은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들에 대해서만 강론해도 책 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성경은 못을 박는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나니 그러므로 어느 때고 하나님의 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진리가 디모데전서 6:16에 나와 있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최초의 인간인 아담 역시 일시적인 빛만 보았으며,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창세기 1:2의 이전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빛이 지구를 직접 뒤덮었었다.

2절에는 하늘에나 땅에나 빛이 없다. 하나님께서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라고 말씀하신다. ‘어둠이라는 단어가 거론되었다. 3절이 되기까지 빛은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에 대해 예레미야서 4:23이 더 명확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내가 땅을 본즉,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하늘들을 본즉 거기에는 빛이 없고.”

그 후 3절에서 일시적인 빛이 창조되자 어둠은 세력을 잃었다. 빛이 창조된 이후로는 빛도 있으면서 어둠도 여전히 존재했다. 하나님께서 4절에서 빛과 어둠을 명확하게 나누시기 전에는 이 둘은 잠시 뒤섞여 공존했을 것이다. 그 후 하나님은 빛을 어둠으로부터 나누고, 선을 악으로부터 나누고, 질서를 무질서로부터 나누고, 참을 거짓으로부터 나누셨다.

그럼 다시 1절로 돌아가자. 이 당시 만물들의 상태를 잘 상상해 보라.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왕좌로 삼으려고 창조하셨다( 66:1).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을 집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에 있느냐?”( 66:1) 주는 자신의 성전에 계시며 의 왕좌는 하늘에 있도다. 주의 눈은 사람들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주의 눈꺼풀은 그들을 단련하시는도다.”(11:4)

하나님은 지구를 누군가가 거주하도록 창조하셨다( 45:18) 그때 지구에 대기가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는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사실, 소거 과정(수학 법칙)을 따라 생각해 봐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도 있다. 예를 들면 이 구절을 보라.

“그런즉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밝히 드러내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이라.”(요일 1: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빛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라고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한다. 반면 창세기 13절의 빛은 창조된 빛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74:16)에서 보듯이 둘 다 같은 범주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된 분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할 때의 빛은 창조된 빛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느니라.” 이 빛은 앞에서 다루었던 대로 영원한 빛이다(요일 1:5, 시편 36:9, 시편 37:6) 그러나 창세기 1:3의 빛은 창조된 빛이며 일시적인 빛이다( 74:16) 이 둘은 다른 종류의 빛이다.

1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로부터 우리는 두 하늘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왕좌이며, 또 하나는 대기권이다. 그리고 땅은 있으되, 두 하늘 사이에 아직 궁창이 있지는 않다(궁창은 6절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음). 빛이신 하나님께서 해나 달이 따로 필요 없이 친히 하늘과 땅을 영원한 빛으로 비추고 계시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장면이 말라기 4:2에서는 의의 태양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요컨대 1절 시절의 빛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빛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요한일서 1:5의 빛은지식과 같은 의미로 통상 비유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이 구절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되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둘 모두가 가능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문자적인 빛 비춤을 의미하는 장면도 얼마든지 있다. 요한계시록 21:23은 빛을 비유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

그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22:5에 나오는 빛도 문자적인 빛이지 비유적 의미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등잔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로다.”

이사야서 60:19-20에서 언급되는 빛도 마찬가지이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광체가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밝은 광채의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주가 네게 영존하는 광체가 되고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가 네 영존하는 광체가 되며 네 애곡하는 날들이 끝날 것임이라.”

이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문자적인 빛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문맥이 영원 세계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빛으로 직접 천지를 비추시는 장면은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에 모두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강조를 위해 전혀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 증언한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다. “주는 동일하시고.”( 1:12)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 1:17)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논하면서 숱하게 언급한 구절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느니라.”를 꼭 기억하기 바란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하나님은 사랑이다. 이런 하나님께서 영원불변이라는 사실에 필자 자신부터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그분 안에 어둠이란 전혀 없다면, 그리고 그 빛이 요한계시록 21-22장의 영원한 빛이라면, 그 빛은 창세기 1:1(죄로 인해 2절에서 어둠이 생기기 전)의 빛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4장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그리고 창세기 1:1이 내포하는 중심 생각이 무엇인지도 살펴봤다. 그럼 이제, 그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로 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록은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는 창세기 1:1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살아 움직이는 모든 피조물과, 날개 있는 모든 날짐승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27절에서는 남녀를 모두 포함한 사람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은우리를 창조하셨으며(말라기 2:10), 창조 세계(creation) 자체도 창조하셨다(마가복음 13:19). 이들은 모두 시작된 때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창조, 무언가를 최초로 설계해서 존재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단어에는 사실 그보다 더 큰 의미가 들어있다.

건축학의 이론과 실재에 따르면, 건축가란 자신이 설계하고 감독한 어떤 건축물이 설계대로 정밀하고도 정확하게 잘 되도록 책임지는 창조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단어에 대한 오용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아테네 언덕의 아크로폴리스를 건축할 때에는 없던 물질이 새롭게 생겨나지는 않았다. 이미 있던 재료들을 깎고 다듬고 쌓아서 그리스 우상 문화의 원산지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훨씬 더 막강하고 원초적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으로 만물이 존재하게 하셨다. 이미 있던 물질을 원자재로 쓴(창세기 2:7에 나오는 사람의 창조처럼) 것이 아니다. 시편 33:6-9를 보자.

“주의 말씀으로 하늘들이 만들어지고 하늘들의 모든 무리가 그분의 입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도다. 그분께서 바닷물을 함께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음을 곳간들에 두시는도다. 온 땅은 주를 두려워하고 세상의 모든 거주민은 서서 그분을 두려워할지어다. 이는 그분께서 말씀하시매 그것이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그것이 굳게 섰음이라.”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완전히 무에서 이뤄 낸 창조였음을 명심하자. 라틴어 ex ni hilo라는 표현이무에서부터라는 뜻으로, 정확하게 이와 같은 뜻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 때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만든다. 그것을 모양을 내고 다듬어서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물체로 조성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17-18을 보자.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기 때문이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보이는 것은 잠깐 있을 뿐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니라.”

 

영원의 세계

그리고 다음은 히브리서 11:1-3이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장로들이 이것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

이 구절을 자세히 눈여겨보라. 하나님은 이미 존재는 하되 형체만 없던 물질로부터 땅을 만들어 내신 게 아니다. 그저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게 아니다. 이 사실에 대해 논하려면 영원의 본성, 다시 말해 끝없는 과거라 부르는 영역에 대해 거론하게 된다. 그때는 나타난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4장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바라보라는 권면을 받았다. 보이는 것은 잠깐 있는 일시적인 존재인 반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이 성경의 판결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과, 가시적이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나뉜다. 이를 히브리서 11장과 대조해 보면, “믿음이란 바로 보이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영원한 것에 대한 증거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거기에다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일시적인 것)들은 나타나 있는 것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말한다. (, 영원한 것을 지칭함)

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일시적인 것들은 다른 일시적인 것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1보이지 않는 것(be not seen)”(영원한 것) 3절의 나타나 있지 않은 것(do not appear)”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문장도 결국은 보이는 것(일시적인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영원한 것)들로부터 만들어졌다는 논리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으로 우리가 앞으로 체험하게 될 것들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의 본성과 실재가 완전한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을 아직 체험할 수는 없다. 그 형태가 무엇인지는 히브리서 11:10하나님께서 건축하고 만드신 도시 곧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라고 나와 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본성과 실재는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이 많다고 말씀하시고서 말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아브라함이 살아 있던 그 시절부터 아브라함이 소망했던 도시는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비하러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도시는 아직 미완성이었을 것이다. , 그 새로운 도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과는 달리 변화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비록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있는 도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원한 것에 속한다고 해서 반드시 불변성도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하늘에 속한 것들조차도 시초가 있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셨느니라.”고 하시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이 있기 전부터 계셨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속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엄밀히 말하면,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님만치 영원하지는 않은 것이다.

로마서 6:23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물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시작이 존재하는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나 하는 모순에 부딪힌다. 이 모순은 요한일서 5:11에서 간단히 풀린다.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는 말씀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공동으로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로움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속성까지 나눠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성품이나 노력 덕택에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영원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소유하고 그분과 함께 영원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아멘. 이 생명은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나처럼 일시적인 존재요, 범죄하고 타락한 경건치 못한 피조물조차도 이런 식으로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다면, 하물며 그 본성이 무기물인 변할 수 있는 빌딩(혹은 도시 전체)이 실은 영원하다는 명제를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은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는가? (하나님께서 건축하시고 만드신 도시. 히브리서 11:10)

이 모든 이야기의 초점은 일시적인 것들은 영원한 것들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실 때와 동일한 방식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시는 변할 수 있는 피조물인 사람이 거하도록 설계되고 준비되었지만 영원한 도시인 것이다. 시초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야 못하지만 우리는 영원이라고 하는 그 영원을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같은 근본주의자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문자적인 24시간을 하루로 친 6일만에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창세기 1장이 그렇게 증언하고 출애굽기 20:11도 이를 지지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성경은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라는 식으로 ”(day)이라는 단어를 정의한다. 저녁 다음에 아침이 바로 시간의 순환이라는 것이다. 어둠 다음에 빛이다. 태양이 14절까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다. 3절이 태양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일시적인 빛의 창조에 대해 이미 말씀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5가 말하는 의 정의, 그리고 이것과 14절의 낮과의 연관성을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창세기 1:1-2가 첫째 날보다 에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에 부딪힌다. 성경에는 어둠의 창조에 대해 언급하는 이사야서 45:7와 예레미야서 4:23-24이 있고 이들은 전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한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들은 6일 창조 이전에 일어난 일이며, 지금과 같은 세상이 있기까지는 결국 엿새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0:11에서는 6일 창조를 인정하신 것일까?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자면, 6일 창조 이전에 있었던 일은 무엇이며, 그 세상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창세기 1:3-31이 다루는 6일 창조는 관심 밖의 영역이 된다. 창세기 1:1에서 존재했다가 1:2 이전에 끝나 버린 옛 세상, 즉 영원의 영역에 있었던 그 세상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럼 창세기 1:1-3에 등장하는 동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각각 창조했다, 있었다, 있었다이다. ‘창조했다란 시제는 과거이며, 목적어를 받는 타동사이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보다시피 하늘과 땅이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가? ‘처음에이다. 따라서 창세기 1:1-31 사이의 기간이 정확히 엿새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성경에서 이라고 정의하는 첫째 날이 3절이 될 때까지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시간-공간-물질 연속체

1절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라는 진술로부터 우리는 처음에 대해 여러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과 물질 연속체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문헌으로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의 피터 S. 럭크만 박사가 뉴스레터 Bible Believers Bulletin에 발표한 내용을 소개한다.

우주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로 구성된다. 공간은 길이, , 높이로 구성된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된다. 물질은 원천, 생성, 진행으로 구성되며, 진행은 에너지, 운동, 현상으로 구성된다. 어느 분야를 보나 삼위일체라는 속성은 언제나 드러난다.”[2]

, 하나님은 땅을 연속체의 일부인 물질로써 창조하시고, 하늘을 그 연속체에 속한 공간으로써 창조하시고, 이 물질과 공간이 일련의 사건으로 변화를 겪을 수 있게끔 시간도 일관되게 창조하신 것이다. 이 연속체가 이라고 불리는 개념으로 분할되었다. 성경이 정의하는 이란 저녁과 아침이다. 어둠이 되었다 빛이 다시 비치는 사이클이다. 창세기 1장에서 최초로 하루라고 불리는 날은 3절에서 등장한다.

 

 


[1] Scofield, C.I. Scofield Reference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Inc. New York. 1909, 1917, copyright renewed 1937, and 1945. (3) 스코필드의 주석은 근본주의와 전천년주의에 입각한 성경 해석의 좋은 초석이다. 하지만 그 주석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인 것처럼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실제로 그렇지도 않다. 성경의 입장과 대립하는 견해도 이따금씩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가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에 대해 설명한 주석이 대표적인 예이다. “(마가복음 16장의) 9절부터 마지막 절은 가장 오래 된 사본인 시내사본과 바티칸사본에는 빠져 있다. 다른 사본에도 이들 구절은 내용이 부분적으로 생략되었거나 바뀌어 있기도 하다.” 이는 명백하게 진실을 오도한 것이다.

[2] Ruckman, Peter S., The Bible Believers Bulletin, Bible Baptist Church, Pensacola, Fl. Bible Believers Press, 1997 “Quantums in time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33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6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 이우진 07.18 3942
232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5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 이우진 07.18 4021
231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4과 직장 생활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8 5663
230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3과 하나님의 뜻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8 4409
229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2과 가정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8 4214
228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1과 하나님의 가족에 관한... 이우진 07.18 4095
227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0과 돈과 헌금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8 4367
226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9과 복음 전도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8 5743
225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8과 죄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7 3741
224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7과 교회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7 4005
223 양육 결혼과 가정-제9장 남편이 빠지는 함정 이우진 07.15 5284
222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6과 기도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4 4012
221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5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 이우진 07.14 3958
220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4과 성령님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4 3766
219 강해 로마서 12:1-2 강해 - 합당한 섬김 이우진 07.10 5577
218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3과 침례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0 3789
217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2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 이우진 07.10 3838
216 교리 성경의 기초들-제1과 구원에 관한 교리 이우진 07.10 3806
215 교리 성경의 기초들-서문 이우진 07.10 3926
214 양육 결혼과 가정-제8장 아내가 빠지는 함정 이우진 07.01 3690
Board Pagination Prev 1 ...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 30 Next
/ 30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