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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1:1-3

A COMMENTARY ON THE FIRST THREE VERSES IN THE BIBLE

(The Gap Theory)

창세기 1:1-3 강해(간극이론)

Jeffrey A. Tibbetts 지음 용묵 옮김

 

5장 그때의 세상

 

최초의 피조물보다 전에 있었던 피조물?

이 말은 창세기 1 3절 이전에 시간이라는 게 없었다는 말도 아니며, 시간을 분할하는 단위가 없었다는 말도 아니다. 이런 결론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다음은 욥기 38:4, 7이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소위 말하는 (아담의 아들)의 경건한 혈통이 명백히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는 첫 순간부터 존재하면서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의 기초를 놓고 있는 순간에 하나님은 홀로 계신 게 아니었다. 그때 이미 피조물로 분류할 수 있는 존재가 최소한 두 종류가 있었다. 바로 새벽별하나님의 아들들’(셋의 경건한 혈통이 아님)이다. 이 중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처음의 완벽한 상태로부터 타락해 버린 천사임을 욥기 1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처음부터 살인자인 마귀( 8:44)와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벽별들,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마귀(살인자의 성품을 띤 상태)는 최초의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다. 바로 시간-공간-물질의 연속체가 시작되기 전부터 말이다.

 

첫째 날 이전의 날들

위에서 언급된 특별한 존재들에 대해 좀더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덮는 그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루시퍼의 창조와 타락이다.

에스겔서 28장을 보자. 12절에서 사람의 아들은 두로의 왕을 위해 애가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에스겔이 살던 시절에는 두로라는 도시가 지구상에 실제로 존재했다. 하지만, 그 애가가 전적으로 역사상의 두로만을 언급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도시란, 루시퍼가 타락하기 전에 다스렸던 영적인 도시이다. 13절을 보면 두로의 왕이 에덴 동산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피조물이지 영원한 존재는 아니라고 성경이 말한다. 그리고 14절을 보자.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이요, 덮는 그룹 15절은 네가 창조된 날부터 네 길들에서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 안에서 불법이 발견되었도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부터 여러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이 창조되었다는 것 자체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두로의 왕이라고 일컬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두로는 항구 도시였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일컫는 제 2의 두로는 아마 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논점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그가 어떤 에 창조되었다는 것. 네가 창조된 날부터…” 만약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자였다면(창세기 1:1의 표현을 기억하라. 처음에), 그는 창세기 1:1의 시점에서부터 이미 살인자였다.

이를 다시 종합하면 이렇다. 마귀는 어떤 날에 창조되었는데, 지금 있는 하늘과 땅 아래에 날이라는 개념은 창세기 1:3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1:3보다 두 절 앞). 그렇다면 창세기 1:1의 하늘과 땅이 창조되기 전에 이 존재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처음에보다도 더 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영원하나 마귀는 그렇지 않다. 마귀는 피조물이며, 영원하고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있다가 나온 잔류자일 뿐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게 반역하던 때부터 마귀는 하늘에서의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보다 지위가 낮지만, 창세기 1:3 이전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었다. 이 세계를 클라렌스 라킨은 영적인 세계라고 일컬었다.

 

영원의 본성

미래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과거인 창세기 1:1과 그 전의 상태에 대해 이해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성경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영원한 세계는 과거에 존재한 영원한 세계와도 상당 부분 일치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지런히 비교해 보면 영원의 본성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과거에도 시간이 존재했다. 왜냐하면 미래에도 달(month)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22:2). 그리고 빛이 있었다는 것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므로( 1:10-11, 1:17) 하나님 그 자체를 이루는 빛 역시 영원하고 불변하다.

날들이 있었다는 것도 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 한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룹 외의 다른 피조물이 있었다는 것도 알며(마귀는 원래 다섯째 그룹이었다) 그 중 두 종류가 욥기 38:1-8에 언급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셋째 하늘인 하나님의 왕좌와 첫째 하늘인 대기권 사이를 가르는 궁창이 없었다는 것도 안다. 궁창은 창세기 1:6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물이 있었다는 것도 아는데, 2절에 이미 물이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2:1을 보면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이 있고 4:6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도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둠이 없었다는 것도 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21-22에도 어둠이 없다는 진술이 따로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루시퍼가 창조된 때의 은 어둠과 빛의 순환으로 정의되는 지금의 과는 다른 종류의 날일 것이다. 게다가 요한계시록 22:2’(month)도 지금의 달과는 다른 개념일 것이다. 단어의 정의가 다르므로 본성도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은 저녁과 아침이 모두 있지만, 그 날에는 저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지금과 그토록 다를진대, 공간과 물질이라는 개념도 지금과 다르다고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으며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만물이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하고 퇴화한다. 그리고 무질서로 치닫는다. 열역학 제2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이 무질서함을 우리는 엔트로피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런 법칙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2 이전에도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의 세상은 엄격한 의미에서 완벽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하늘과 땅

그렇다면 창세기 1:1의 동사 창조하셨느니라의 목적어인 하늘과 땅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주의할 사항은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 하늘들과는 달리(가령, 창세기 2:1) 1:1의 하늘은 단수라는 것이다. 창세기 1:1의 시점에서는 두 하늘과 한 땅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지금의 하늘들과 땅과는 달랐다. 하늘이 최소한 두 종류가 있어야 하는 까닭은, 같은 문맥을 다루는 성경들이 모두 하늘을 복수로 다루기 때문이다( 4, 벧후 3, 28) 그리고 오늘날은 하늘이 세 종류가 존재하는데,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간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고후 12:1-4).

자랑하는 것이 물론 내게 유익하지 아니하나 내가 의 환상들과 계시들로 나아가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어 올림을 받은 자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러한 사람을 아노니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채어 올림을 받아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으니 사람이 이 말들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기서 말하는 셋째 하늘이란 낙원이며,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66:1-2, 11:4).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나는 대기권을 가리킨다. 창세기 1:28을 보자. 공중의 날짐승 30절에도 공중의 모든 날짐승이 등장하고, 20절에도 하늘의 열린 궁창에 나는 날짐승을 볼 수 있다.

둘째 하늘은 궁창으로( 1:6-8),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우주 공간이다. 6절을 보자.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6절과 7절을 보면 궁창이 궁창 아래의 물들과 궁창 위의 물들을 나눔을 알 수 있다. 궁창은 우주 공간이며, 궁창 아래에 물이 있고 궁창 위에도 물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궁창 아래의 물은 지구의 바다이다.[1] 그리고 궁창 위의 물은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놓인 물층으로, 스코필드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구 대기권을 에워싸는 수증기층이 아니다.[2]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궁창 아래의 물이나 궁창 위의 물이나 동일한 물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전자(바다)가 실질적인 물이라면, 후자도 실질적인 물이어야 한다. 지구 대기권을 의미하는 첫째 하늘과 우주 공간을 의미하는 둘째 하늘 사이에는 실질적인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물들은 궁창 위에 있고 셋째 하늘 바로 아래에 있어서 세 하늘의 사이에 존재한다. 이 물층은 요한계시록 4:6에서 수정 같은 유리 바다라고 묘사되었으며, 욥기 38:29-30에서 깊음이라고 표현되었다.

둘째, 하늘과 하늘 사이의 물을 언급하는 표현이 시편 148:4에 있기 때문이다. 하늘들의 하늘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아, 너희도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이때의 하늘은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 물들은 최소한 두 종류의 하늘 위에 있는 바, 세 하늘이 존재함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물들이 있는 곳은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인 것이다.

 

베드로의 증언: 물에 의한 멸망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둘째 하늘을 의미하는 궁창은 창세기 1:6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1절까지는 아직 하늘은 두 종류밖에 없었으며, 1절부터 6절 사이에도 하늘이 두 종류뿐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최소한두 종류의 하늘이란 뜻이다.) 그때부터 요한계시록 19장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세 종류의 하늘이 있게 되고, 그 후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

이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성경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늘들과 땅도 세 묶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5-6이 언급하는 그 때의 세상하늘들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지칭하는 과거이다. 그리고 7절의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현재이다. 끝으로 13절은 미래의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베드로후서의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다음은 3-4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된다, 하니

이 구절 다음에는 무슨 내용이 나오든지 문맥이 창조의 시작에 속해야 한다. 창조의 시작(beginning)이란 창세기 1:1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 처음이요, 마귀가 애초부터 살인자였음을 나타내는 그 처음을 가리킨다. 필자는 그 처음혹은 시작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따지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창조의 시작이란 것이 있음을 단순히 인정했을 뿐이다. 창세기 1:1에서 이 개념이 최초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4가 가리키는 때는 창세기 1:1의 시점이며 창세기 1:1 1:2이 일어나기 전의 사건이다. 따라서 베드로후서 3:4의 시점도 창세기 1:2보다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베드로후서의 문맥은 창세기 1:1임이 분명해짐을 알 수 있다. 그럼 다음 5절을 보기로 한다.

이는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그들이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이 구절에서 언급된 하늘들과 땅은 창세기 1:1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바로 그 하늘과 땅이다. 그때의 세상이란 지금의 세상을 지칭하는 게 아님이 명백하다. 세상은 상태가 변했다. 6절이 그 변화를 말해 준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그 과거 세상은 홍수에 휩쓸려 멸망했다. 그런데 이 홍수는 노아 시대의 홍수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문맥이 이 홍수가 노아의 홍수가 아님을 말해 준다. 4절이 말하는 창조의 시작이란 창세기 1:1처음에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8:44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와 같은 문맥이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는 창세기 6-9에서야 등장하며, 6일간의 천지 창조 후 약 1700[3]이나 지나서 일어난 일이다.

둘째, 베드로후서의 홍수는 하늘들과 땅을 모두 멸했다. 6절의 세상이란 이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는 하늘과 땅 어느 것도 멸하지 않았다. 그저 지표면의 육체만을 멸했을 뿐(창세기 6:7) 땅 자체를 멸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덧붙여 창세기 9장을 보면, 하나님 역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면서 예전에 있었던 두 종류의 홍수를 언급하신다. 하나는 모든 육체들을 멸한 홍수요, 다른 하나는 땅 자체를 멸한 홍수이다. 다음은 11절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내가 모든 육체를 홍수의 물들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이 문장의 세미콜론(영어의 경우)’(neither)라는 접속사로 미루어 볼 때, 지표면의 육체를 멸하는 홍수와 땅 자체를 멸하는 홍수가 별개로 있으며, 위의 말씀은 이들 중 어느 것도 앞으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베드로후서 3:6에 언급된 홍수는 창세기 1:1의 옛 세상을 종식시킨 격변의 심판으로, 하늘들(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거하는 존재들이 심판의 대상이었다. 성경을 전반적으로 보면서 조명을 받지 않은 채 창세기 1:1만 떼어서 생각해 본다면, 이 구절만 가지고서 옛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절이 심판 후의 상황에 대해서 명확한 정보를 주며, 덕분에 이 구절과 옛 세상을 다루는 성경의 다른 구절과 비교가 가능해진다. 그럼 관련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 1:1

옛 세상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성구는 창세기 1:1이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우리가 아는 바로는 마귀 또한 바로 그 처음이라는 때부터 살인자였으며, 창세기 1장에서 최초로 이라고 불리는 때는 3절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살인자 마귀는 어떤 에 창조되었으며( 28:14), 그 날은 3절에 등장하는 첫째 날보다 이전이다. 마귀는 창세기 1:1의 시점에서부터 이미 살인자였기 때문에 요한복음도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성경을 믿으며 근본주의자 특유의 편견에 빠져 있지 않다면, ‘날들(days) 이전에 날들이 있었음을 평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창세기 1:1 이전에 날들은 존재했다. 그 때의 옛 세상에도 날이란 존재했다.

 

이사야서 45:18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창조하셨는가? 이사야서 45:18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 피조물이 살도록 하려고 그런 것들을 창조하셨다.

“이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고 견고하게 하였으되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천지를 처소가 되게끔 창조하셨다. 그런데 누구의 처소일까? 영적 세계에 대해 제한된 지식밖에 없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답은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답이 있다. 원래 땅은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피조물이 거하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1:1은 여전히 영원 세계 즉, 하나님이 존재하셨고 영원 미래에 우리가 존재하게 될 그 세계를 다루고 있다.

베드로후서는 그때의 땅에 대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상태라고 묘사한다. 이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건대 필자는 수면에 반쯤 떠 있는 농구공의 모습이 떠오른다. 상반구는 떠 있고 하반구는 물 속에 있다. 당시 지구는 지표면이 깊음의 표면에 수직으로 닿아 있는 섬과 같은 상태였다.

 

 

6장 심판과 파멸

 

에스겔서 26

성경에서 6일 창조 이전의 세상이 어땠는지를 훨씬 더 자세히 알려주는 부분은 에스겔서 26-28장이다.

여기서 성경은, 사탄이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노릇을 하면서 다스린 옛날의 영적 도시를 인류 역사에 실존했던 두로라는 도시에다 빗대어 소개한다. 영적 도시라는 개념 자체는 요한계시록 11:8에도 등장하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에스겔서 본문이 영적 도시와도 관련이 있는 이유는, 그 도시의 통치자가 에덴 동산에 있던 그룹이라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실제 두로의 통치자는 에덴 동산에 있지 않았다.) 그럼, 성경 본문을 보기로 하자. 에스겔서 26:2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두로가 예루살렘을 치며 말하기를, 아하, 만백성의 문이던 그녀가 부서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즉 내가 충만하게(replenished) 되리로다, 하였도다.”

여기에 언급된 영적인 두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실 곳(영적 예루살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다. 그리고 두로는 그녀(예루살렘)가 피폐하게 되었으니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두로는 지금 피폐해져 있는 상태로 다시 충만해지길 원하고 있다. 다시 채워지길 원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주목할 만한 발상이다. 하나님도 아담에게 땅을 다시 채우라고 명령하셨고( 1:28), 노아에게도 땅을 다시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9:1). 따라서 위의 구절은 사탄의 의도를 설명해 주고 있다. 바로, 땅을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로 다시 채우고 싶어하는 속셈이다. 자신의 왕국을 재건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물에 의한 멸망으로 비유된다. 3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오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바다가 그 파도를 일으키는 것같이 내가 많은 민족들로 하여금 올라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이 구절만 보면 물에 의한 심판이 아직 비유적으로만 느껴지지만, 4-6절을 보면 두로라는 도시를 뒤엎은 실질적인 홍수가 묘사된다.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두로에서 그 티끌을 벗겨 내어 바위의 꼭대기같이 되게 하리라.”

4절 뒷부분을 보면 하나님은 두로와 이 도시가 지어진 땅을 완전히 파괴하고 땅껍데기까지 벗겨서 땅의 내부까지 드러나 보이게 하신다. 땅이 이런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면, 그 후의 땅의 상태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고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사무엘하 22:8-16은 이 심판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8) 이에 땅이 흔들리고 떨었으며 하늘의 기초들도 요동하고 흔들렸나니 이것은 그분의 진노 때문이로다. (9) 그분의 코에서 연기가 나와 위로 올라가고 그분의 입에서 불이 나와 삼켰나니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10) 그분께서 또한 하늘들을 활처럼 휘시고 내려오시니 그분의 발 밑에 어둠이 있었도다. (11) 그분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셨으니 바람의 날개들 위에서 보이셨도다. (12) 그분께서 어두운 물들과 창공의 짙은 구름들로 주변에 어둠의 장막을 삼으셨으니 (13) 그분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 (14) 께서 하늘에서부터 천둥소리를 내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 자신의 음성을 내시며 (15) 화살을 보내사 그들을 흩으셨고 번개로 그들을 무찌르셨도다. (16) 그때에 주의 꾸짖으심 곧 그분의 거센 콧김으로 말미암아 바다의 바닥들이 나타나고 세상의 기초들이 드러났도다.”

처음 8절에서 하늘들은 베드로후서 3장의 진술처럼 심판 받았다. 그 결과 10절과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어둠이 등장했다. 특히나 12절은 물도 깜깜하다고 표현했음을 주의하라. 이는 창세기 1:2과도 연결된다.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14절에서는 천둥이, 15절에서는 번개가 나오며 16절에는 홍수가 등장한다. 바다의 바닥들이 나타났을 때 세상의 기초들이 드러났다. 영적인 말씀을 영적인 말씀으로 비교해 보건대(고전 2), 위의 성경 구절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영적 도시인 두로가 물로써 심판 받는 장면임이 틀림없다.

그럼 에스겔서 26:5를 계속 보기로 하자. 두로가 바다 한가운데서 그물을 치는 곳이 되리니 이는 내가 이것을 말하였음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또 두로가 민족들에게 노략물이 되며.”

두로는 완전히 물에 잠겨서 선박들이 그 잔해 위를 떠 다니고 거기서 그물을 치게 되었다. 독자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창세기 1:2에서 묘사된, 심판 받은 후의 이 땅의 상태이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셨느니라.”

다음 6절을 보면 두로(침수되지 않고 들판에 있는)의 딸들은 칼로 죽임을 당한다고 나온다.

이들의 영적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단서를 거의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시편 45편에서는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되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왕의 귀한 여인들 가운데는 여러 왕의 딸들이 있으며 왕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오 딸이여, 잘 듣고 깊이 생각하며 귀를 기울일지어다. 또한 네 친백성과 네 아버지 집을 잊을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심히 사모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네 주시기 때문이라. 너는 그분을 경배할지어다. 또 두로의 딸도 예물을 가지고 거기에 있으리니 심지어 백성 가운데 부자들도 네 호의를 간청하리로다.”( 45:9-12)

두로의 딸(단수)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혹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존재는 에스겔서 2장의 두로의 딸들 중에 속해 있다가 시편 45편에서는 천년왕국 때의 왕이신 예수님께 홀로 예물을 바치게 된다.

다음 7절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두로를 심판하러 온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 구절에서 느부갓네살은 왕들의 왕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왕들의 왕이요, 주들의 주라고 불린다. 느부갓네살 왕은 북쪽에서 왔는데, 예수님도 북쪽에서 오실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오는데, 예수님도 재림하실 때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이렇듯, 느부갓네살 왕이 예표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 둘은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에 성경 구절에다가 이름만 바꿔 놓으면 이것이 누구의 장면인지 서로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영적으로 느부갓네살 왕이 실존했던 도시인 두로를 파괴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창세기 1:2에 앞서 영적 두로라는 도시를 홍수로 멸망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앞으로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위엄이 있는( 6:4) 자신의 신부와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참고로 영적 세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 다른 이름으로 일컬어졌음을 알 필요가 있는데, 그 예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이다. 성경에서는 이 이름이 일관되게 언급되었으며 심지어 인간이 아닌 영적 존재들도 이 호칭을 썼음을 확인하라. 창세기 14:18-22, 시편 82:6, 마가복음 5:7, 누가복음 8:28, 히브리서 7:1, 사무엘하 22:14, 시편 7:17 .

8-11절은 심판으로 파괴되는 도시의 광경을 묘사한다. 12절은 또 홍수를 연상케 한다. 그들이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물 한가운데 넣으리라.”

13절은 노랫소리와 하프라는 음악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루시퍼와 음악과의 연관성은 에스겔서 28장에서 또 찾을 수 있다.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네 안에서 작은 북과 피리의 작품이 예비되었도다.”

14절은 5절 내용의 되풀이이다. 너를 바위의 꼭대기같이 되게 할 것인즉 네가 그물을 펴는 장소가 되고.” 이 구절의 의미는 이미 완전히 밝혀졌다. 두로라는 도시는 완전히 물 속에 잠기게 된다.

15절은 두로의 인근에 있는 섬에 대한 언급이다. 16절에 따르면, 이 때에 바다의 모든 통치자들이 두로로 인해 애곡하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배타는 자들이 거주하던 유명한 도시여, 그녀와 그녀의 거주민들이 바다에서 강하여 거기를 드나드는 모든 자에게 두려움이 되었더니 어찌 네가 그리 멸망하였는가!”

이 통치자들이란 아마도 시편 82:7에 언급되는 같은 존재로 보인다. 너희는 사람들같이 죽을 것이요, 통치자들 중의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 또한 16절은 다음과 같다.

“그때에 바다의 모든 통치자들이 자기 왕좌에서 내려와 자기 예복을 버리며 수놓은 옷을 벗고 떨림으로 옷을 입으며 땅에 앉아서 너로 인하여 순간 순간마다 떨고 놀랄 것이며.”

우리는 이 구절과 관련된 성구들을 대조할 때 전율이 느껴질 정도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예레미야서 4:30, 이사야서 14:9-10, 12, 16-17을 볼 것. 특히 수놓은 옷을 벗는다는 표현과 비견되는 예레미야 4:30은 이렇다. 네가 진홍색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그림을 그려 네 얼굴을 꾸밀지라도 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꾼 것이 헛된 일이 되리라.” 더구나 금장식은 바알 숭배에 기원을 둔 크리스마스 트리와도 연관성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서 10[4]의 앞부분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이 통치자들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차차 더 살펴볼 것이다. 일단은 이 피조물이 악한 마귀들이며, 이스라엘이 끈질기게도 버리지 못하고푸른 나무 아래에서우상으로서 숭배했던 존재였다는 것만 알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렇듯 두로가 몰락할 때는 주위에 놀라고 경악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비슷한 장면이 루시퍼가 타락하던 때에도 연출된다. 이사야서 14:16을 보자.

“너를 보는 자들이 너를 자세히 살펴보고 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이르기를, 이 자는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흔들던자가 아닌가?”

이것은, 이사야서의 구절과 에스겔서의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는 점을 암시한다. 에스겔서 28장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타락하는 장면과, 이사야서 14장의 아침의 아들 루시퍼가 타락하는 장면을 대조해 보노라면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19절은 창세기 1:2깊음에 대한 언급이다. 베드로후서 3장 말씀에 따르면 땅은 물에서 나와 물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 때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이 구절은 바로 영적 도시 두로의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너를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도시들같이 황폐한 도시가 되게 하고 깊음을 가져다가 네 위에 오르게 하며 큰 물들이 너를 덮게 할 때에…”

독자여, 큰 물들이 덮는 것물의 넘침으로 멸망하는 것은 전적으로 동일한 사건이다. 아무 차이도 없으며 이것은 같은 홍수이다. 베드로후서 3장의 홍수가 노아의 홍수가 아님은 이미 명백해져 있다. 따라서 에스겔서 26:19의 홍수 역시 노아의 홍수가 절대로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경의 두 단락은 서로 같은 홍수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 홍수는 노아의 홍수가 아니다.

성경에는 그 때의 세상(창세기 1:1에 나오는 하늘과 땅을 모두 포함)의 파멸을 다루는 곳을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에스겔서 26:18은 파멸을 다룰 뿐만 아니라 파멸 전에 그때의 세상이 어떠했는지도 가르쳐 준다. 거기에는 사람들도 있고, 뱃사람, 상인, 바다의 통치자, , 고대인들도 다 있었다.

에스겔서 28장과 이사야서 14장은 모두 사탄의 타락을 다룬다. 다만 에스겔서는 타락 이전의 상태에 더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사야서는 타락 그 자체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둘은 관점만 그렇게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진실되며 일관성 있는 진술이다. 한편으로 예레미야서 4장은 심판이 끝난 후 피조물들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다음 일련의 성구들을 보라.

“네 마음이 높아졌으므로 네가 말하기를, 나는 한 하나님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한가운데 앉아 있다, 하였도다. 네가 네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같이 정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니라.”( 28:2)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 14:13-14)

“그들이 너를 구덩이로 끌어내리리니 네가 바다 한가운데서 죽임 당한 자들이 죽는 것같이 죽으리라.”( 28:8)

“네가 타국인들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못한 자가 죽는 것같이 하리니 이는 내가 이것을 말하였음이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28:10)

“네 영화(榮華)가 무덤으로 내려갔으며 네 비올라 소리도 그러하도다. 벌레가 네 밑에 널리 퍼져 있고 벌레들이 너를 덮었도다.”( 14:11)

“그러나 너는 끌려가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으로 내려가리로다.”( 14:15)

“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묻히는 일에서 그들과 함께 합쳐지지 못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는 결코 명성을 얻지 못하리라.”( 14:20)

이 구절들이 일관되게 진술하는 것은 바로 사탄의 말로이다. 그는 지옥에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사탄은 심판을 자초했으며, 사탄이 왜 심판 받게 되었는지도 성경은 말해 준다.

필자는 이제 이 성구들을 하나씩 뜯어 보고자 한다. 필자는 논리를 펴는 과정에서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원문을 들먹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 연구 결과나 화석 같은 것도 절대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오로지 영어 킹제임스성경에 기록된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진리의 원천으로 삼을 것이다. 과학을 통해 발견한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견해일 뿐이다. 성경은 “~하더라식의 낭설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이다. 당신이 믿든지 안 믿든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 그럼 에스겔서 28장으로 가 본다. 2절에서 루시퍼는 마음이 자랑으로 교만해졌다. 이는 이사야서 14:13-14의 상황과 일치한다.

3절에서 하나님은 루시퍼의 지혜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 보라,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사람들이 네게 숨길 수 있는 은밀한 일이 없나니.”

4절에서 하나님은 루시퍼가 그의 지혜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신다. 네가 네 지혜와 네 명철로 재물을 얻었고 금과 은을 얻어 네 곳간에 넣었으며.”

5절에서 우리는, 루시퍼를 그토록 교만하게 만든 것은 그의 물질적 부유임을 알게 된다. 네가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불렸고 네 마음이 네 재물로 인하여 높아졌도다.”

6절은 루시퍼의 교만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바로 그 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심판하시게 만든 것임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네가 네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같이 정하였으니…”

7절은 구체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다. 이로 말미암아 루시퍼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다가 짐승으로 형체가 변하고 말았다( 41:1, 27:1, 12:9, 74:14 참고).

“그러므로, 보라, 내가 타국인들 곧 민족들 중에서 무서운 자들을 데려다가 네 위에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움을 치며 네 광채를 더럽히고.”

여기서타국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마도 시편 144:7에서낯선 자손이라고 언급된 아담 이전의 어떤 피조물로 육체가 없는 존재인 듯하다. 물론 본문에 이런 사실이 나와 있지는 않다. 정체야 어떻든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는 덮는 그룹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다.

8절에 따르면 루시퍼는 바다 한가운데서 죽임 당한 자들이 죽는 것과 같이 죽게 될 것이다. 구덩이란 바다 한가운데서 죽임 당한 자들이 가는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물들이 나뉜 것을 보았다. “깊음과 일반 바다들은궁창에 의해 갈라졌다. 따라서 창세기 1:6보다 이후 시점인 현재의 눈으로 보자면 궁창이 있는 곳이야말로바다 한가운데라고 표현하기 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 1:1의 시점에서도 성립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자는, 바다 한가운데서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이 어마어마한 홍수에 의한 전우주의 파멸을 전반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사실 당신이 바닷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면, 그 일이 정확히 어느 장소에서 일어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다.

표현이야 어떻든,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존재들에 대한 언급은 바다 가운데서 죽는 자 외에도 배타는 자들( 26:17), 옛적 사람들( 26:20), 네 백성들( 26:11), 우두머리민족들의 모든 왕( 14:9), 자기의 죄수들 ( 14:17), 민족들의 모든 왕들( 14:18), 죽임 당한 자들( 14:19), 그의 자손들( 14:21)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루도록 하고, 지금은 에스겔서 28장 진도를 계속 나가겠다.

2절에서 등장하는 두로의 통치자 12절의 두로의 왕과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이 둘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통치자는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직함을 가질 수 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의의 왕이요 평화의 통치자이다.

그러나 만약 이 둘이 같은 인물이 아니라면, 왕은 루시퍼이고 통치자는 그의 아들 또는 상속자일 것이다. , 멸망의 아들이요 성경에서 죄의 사람이라 언급된 적그리스도이다. 인류 역사상 그의 직분은 가룟 유다가 행했다. 이렇듯 동일 인물이든 아니든 대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진다.

12절은 루시퍼의 아름다움과 지혜에 대해 묘사한다. 모든 것을 봉인하는 자로다.” 그는 사실 하나님의 영적 피조물 중 단연 최고였다.

13절을 통해 우리는 그가 에덴의 정원에 있었으며, 온갖 보석들로 치장해 있었고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어느 한 날에 창조되었다.

14절에서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불린다. 그의 임무는 다섯째 그룹으로서 하나님의 왕좌를 덮는 것이었다. 그는 이사야서 6장에서 성전을 뒤덮는 옷자락의 일부였다. 그가 한가운데를 오르내린 불타는 돌들이란 이사야서 6:6에 나오는 불타는 숯으로, 이사야가 있던 곳을 연기로 온통 뒤덮게 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왕좌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다. 루시퍼는 누구라도 갖고 싶어하는 모든 부귀영화를 가졌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왕좌를 덮는 임무에서 월권하여 왕좌에 직접 앉으려는 욕심을 부렸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15절에 따르면 그는 완전한 존재로 어느 날에 창조되었고(날들이 있기 전의 일이다. 본서 앞부분의 해설을 참고할 것) 실제로 완전했다. 그러나 불법이 발견되고부터 그 완전함을 상실한다. 그의 타락은 곧 죄였음을 성경은 진술한다.[5]

16절에서 하나님은 루시퍼를 더러운 자로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그를 내쫓아 버리신다.

그리고 다음 17, 18절은 루시퍼의 죄의 원인에 대해 다시 지적한다. 네 광채로 인하여 네가 네 지혜를 부패시켰은즉.” 또 타락 후 루시퍼의 운명에 대해서도 진술한다. 내가 너를 땅에 던지고 왕들 앞에 두어 그들로 하여금 너를 바라보게 하리라.” 18절은 그 내용의 연속이다. 너를 바라보는 자들의 눈앞에서 너를 데려다가 땅 위의 재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19절은 만백성 가운데서 너를 아는 자들이 다 너로 인하여 놀라겠고 네가 두려움이 되리니 결코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두로가 영적인 도시요 항구 도시이고 섬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어쩌면 두로가 지구 자체를 대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깊음이라고 하는 물 위에 반쯤 둥둥 떠 있는 농구공 비유를 기억하라) 이 도시는 루시퍼의 타락 이전에 존재했으며 배타는 자들이 루시퍼의 타락 이전에 거기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그 도시의 파멸을 부른 심판이 바로 루시퍼의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파멸은 홍수를 통해 임했다는 사실을 아는데, 성경이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하게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 홍수는 땅을 통째로 파괴했다는 것을 아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땅의 기초가 드러났다고 진술하기 때문이다. 땅이 송두리째 물 속에 잠기고 말았음을 아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바다 한가운데서 그물을 치는 곳이라는 표현을 썼고 깊음을 가져다가 네 위에 오르게 하며 큰 물들이 너를 덮게 할 것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사야서 14장과 에스겔서 28장의 상호 유사성은 유별나다 못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니 성경을 믿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의 깊게 두 부분을 살펴보고 성령님께서 가르치는 단어와 단어를 대조하면서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비교해 보라. 어느 누구라도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바로, 루시퍼는 죄가 없던 본디의 완전한 상태(하나님의 왕좌를 위에서 덮는 역할을 하던 기름부음 받은 그룹)에서 타락한 존재이며, 창세기 1:2의 이전에 있었던 두로의 왕이요 통치자라는 사실이다.

 

예레미야서 4:23과 창세기 1:2

이제 타락 자체보다는 타락 후의 상태를 자세히 다루고 있는 예레미야서 4장으로 가자. 23절이다. 내가 땅을 본즉,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하늘들을 본즉 거기에는 빛이 없고.”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성령님은 빛의 부재를 말씀하셨다. 이는 빛의 부재 대신 어둠의 존재를 표현한 창세기 1:2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성경에 따르면 빛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지 않은가?

이 점만 빼면 예레미야서 4:23은 창세기 1:2와 거의 같다.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단어들을 대조해 보노라면, 우리는 두 구절이 말하는 시간과 장소가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음은 창세기 1:2이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셨느니라.”

그리고 다음은 예레미야서 4:23이다. 내가 땅을 본즉,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하늘들을 본즉 거기에는 빛이 없고.”

두 구절의 유일한 차이는 끝부분에서 발견된다. 앞에서 발견했듯이 창세기 구절은 어둠의 존재를 강조하고 예레미야서 구절은 빛의 부재를 강조한다. 이 구절들은 모두 단순히 현 상태가 어떠한지를 나타내며 어떤 동작을 취하는 서술이 없다. 두 구절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가 최초로 심판을 받은 땅이 그 직후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묘사한다. 두 구절 모두, 심판 후의 세 가지 양상을 공통으로 진술한다.

먼저 형태가 없었다. 땅은 형태가 없고( 1:2), 내가 땅을 본즉,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4:23) 형태란 어떤 물건에 적용한다면 그 물건의 모양과 구조 혹은 무엇의 본질에 해당된다. 그때 땅은 형태, 즉 모양과 구조가 파괴되어 있었다. 땅의 기초가 다 파헤쳐지고 드러났다.

그 다음으로 두 구절에서 우리는 비어 있었다는 표현을 보게 된다. 비어 있으며는 창세기와 예레미야서 구절에서 동일하게 등장한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 텅 비었다, 누군가에 의해 점령되어 있지 않다, 혹은 완성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때 땅은 철저하게 초토화되었다. 형태와 모양, 구조, 품위, 질서, 의미, 물질, 그리고 거주자들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반면 노아의 홍수는 이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었다. 그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증언했듯이 말이다. 그때 땅은 여전히 형태와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어둠

끝으로 우리가 창세기 1:2로부터 얻는 진술은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이다. 예레미야서 4:23에서는 하늘들을 본즉 거기에는 빛이 없고란 표현이 쓰였다. 영어 사전에 따르면 어둠이란 이렇게 정의된다. “1. 빛이 부족하거나 거의 없는 상태, 또는 그러한 장소. 2. 받은 빛을 극히 일부만 반사함. 3. 다른 곳보다 더 거무스름한 그늘. 4. 안색이 흐리고 가무잠잠한. 5. 암울하고 음산함. 6. 언짢음, 험악함. 7. 모호하고 알기 어려운. 8. 숨겨진, 신비로운, 비밀스러운. 9. 깨우침, 지식, 교양 따위가 부족한. 10. 악의 기운이 느껴지는, 불길한.”[6] 그렇다. dark 또는 darkness에 대한 영어 사전의 풀이는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 단어의 함축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주위가 어두우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빛이 필요하다. 어둡다는 말은 무언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뜻이다. 도둑은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두운 밤에 도둑질을 한다. 사전이 악의 기운이 느껴지는, 불길한이라는 풀이를 할 만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둠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문화적인 의미를 고찰했다. 하지만 아직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말고, 이제 성경에서 이 단어의 용법이 어떤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실천, 교리와 훈육이라는 모든 면에서 최종 권위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의문을 품거나 논쟁할 게 아니라 그대로 믿기만 해야 한다.

필자가 전부터 여러 번 언급했듯이, 킹제임스성경에는 오류가 전혀 없다. 모순도 없다. 성경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이 들어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경이로움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대해야지, 하나님을 판단하기라도 하듯이 말씀을 교정한다는 마음을 지녀서는 안 된다. 부패한 역본은 사용하지도 말아야 하며, 말씀을 잘못 인용해서도 안 된다. 단지 기록된 그대로 믿기만 해야 한다. 성경이 단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대할 때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어둠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성경에서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일관되게 쓰였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에서 어둠은 언제나 나쁘고, 빛은 언제나 좋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이라.”는 성구를 기억하는가? 어둠은 언제나 심판이요 사악함의 처소요, 재앙의 출현이요 선의 부재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을 때, 이집트에 내려진 아홉째 재앙은 어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서 이집트 땅 위에 어둠이 있게 하되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어둠이 있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자기 손을 내밀매 캄캄한 어둠이 사흘 동안 온 이집트 땅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사흘 동안 서로를 보지 못하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아무도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재앙이 사흘 밤낮 동안 지속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지옥) 사흘 밤낮을 있었고, 사람의 아들이 땅의 중심부(지옥)에서 사흘 밤낮을 있었던 것처럼. 출애굽기 구절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이 어둠은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으로 죽음, 죄가 가져온 첫 결과를 예표한다.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가 지은 죄의 형벌을 예표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 모든 죄를 갚으셨다. 그때에도 3시간 동안 어둠이 지속되었다.

창세기 15:12에서 아브라함이 깊은 잠이 들자 큰 어둠이 그를 엄습했다. 이것은 공포였다. 해가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더니, 보라, 큰 어둠의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니라.”

신명기 28:28-29는 배교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문맥이다.

“주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머는 것과 마음의 놀라는 것으로 치시리니 눈먼 자가 어두운 데서 더듬는 것같이 네가 낮에도 더듬을 것이요, 네 길에서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학대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여호수아서 24:7은 문맥 상으로 창세기 1:2 이전의 심판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분명 어떤 패턴(유형)을 보여준다. 지구를 창세기 1:2이 묘사하는 상태와 같이 만들어 버린 심판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구절과 형태가 일치한다.

“너희 조상들이 주께 부르짖기에 그분께서 너희와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 어둠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이 내용은 루시퍼가 타락하기 전에 다스리던 도시인 두로가 맞이한 최후와 견줄 수 있다. 두로 역시 에스겔서 26:19에 나온 대로 바닷물에 뒤덮이고 말았다. 깊음을 가져다가 네 위에 오르게 하며 큰 물들이 너를 덮게 할 때에 그리고 땅이 그렇게 심판 받은 후 나머지 피조 세계였던 하늘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어둠으로 심판 받았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 4:28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땅이 애곡하고 위에 있는 하늘들이 검게 되리라. 내가 그것을 말하였고 그것을 작정하였으니 후회하지 아니하며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이것과 관련하여 사무엘기상 2:9를 보자.

“그분께서 자신의 성도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사악한 자들은 어둠 속에서 잠잠하게 되리니 이는 아무도 힘으로 이기지 못할 것임이로다.”

‘사악한 자어둠의 관계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주목하라.

사무엘기하 22:29를 보면 어둠이란 너무나 부정적인 개념이어서 하나님의 빛을 통해 우리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나온다. 오 주여, 주는 내 등불이시오니 주께서 내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욥은 자기에게 닥친 시련과 괴로움을 몇 번이고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라고 표현했다( 3:5). 다윗 역시 어둠을 같은 맥락으로 표현했다. 네가 밤에 임하는 두려움과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둠 속에서 퍼지는 역병과 한낮에 황폐하게 하는 멸망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로다.”( 91:5-6) 솔로몬도 생각이 일치했다.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 4:19) 이사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땅을 바라볼 것이로되, 보라, 근심과 어둠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라. 그들이 어둠으로 쫓겨나리라.” ( 8:22)

그뿐만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더욱 강렬하고도 부정적인 형용사를 여럿 동원하여 어둠이라는 심판을 묘사한다. 너희 하나님께서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에, 너희 발이 어두운 산들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너희가 빛을 찾을 때에 그분께서 그 빛을 사망의 그늘로 변하게 하사 짙은 어둠으로 만드시기 전에 너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13:16)

시편 107:10-11을 보라.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고난과 쇠사슬에 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계획을 멸시하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창세기 1:2에 등장하는 이전 세상의 심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어둠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어둠은 창조 세계의 유익(good)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7]

이런 예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성경에서어둠이 묘사되거나 어떤 특성으로 소개되었다면 그 심상은 어김없이 부정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느니라.”( 3:19)

 

예레미야서 4

그럼 지금부터는 예레미야서 4장을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24절에서는 산들이 떨며 움직였다. 25절에서는 사람이 없고 하늘의 모든 새들이 날아가 버리고 없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8:2를 보면, 하늘의 새들이란 사실 마귀들임을 보게 된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저 큰 바빌론이여,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의 요새가 되고 온갖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이 되었도다.”( 18:2)

그리고 창세기 18장과 요한계시록 21:17을 보면, 천사들이 사람이라 불리는 것을 보게 된다.

“또 그가 그 도시의 성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큐빗이니 이것은 사람의 치수 곧 그 천사의 치수에 따른 것이라.”( 21:17)

따라서 예레미야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천사들과 마귀들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26절로 돌아가 보면, 옛날에 그곳이 열매를 많이 내던 곳이었으며 도시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본즉, 보라, 열매를 많이 내던 곳이 광야가 되었으며 그곳의 모든 도시들이 주의 눈앞에서 그분의 맹렬한 분노에 무너졌으니

이 구절이 분명히 암시하는 것은 심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2에 드러나 있는 심판의 세 가지 결과와의 연관성을 주목하기 바란다. 또한 이 구절을 이사야서 14:4, 23, 26과 에스겔서 26:3과도 대조해 보라.

 

땅을 다시 채우라

하나님은 27절에서 세상의 재시작하려는 뜻을 선포하신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끝을 내지는 아니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다. 하늘들과 땅이 모두 재창조되고 다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9:1에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8] 홍수로 인해 인구가 멸절하다시피 한 상태이므로 지구는 다시 사람들로 채워져야만 한 것이다(replenish).

그리고 그와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완전히 같은 언어에(“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창세기 11:1) 단어 하나 안 틀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명령하셨다.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9] 지구에 살던 자가 없어지고(정확히 말하면 멸망 당함) 나니 새 땅 역시 거주자들로 다시 채워져야만 한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끝을 내지는 아니할 것이며.”

28절로 가면 우리는 어둠이 시작되는 계기에 대해 알게 된다. 28절이 가리키는 사건의 근거는 26절에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에 의해서이다.

이로 인하여 땅이 애곡하고 위에 있는 하늘들이 검게 되리라. 내가 그것을 말하였고 그것을 작정하였으니 후회하지 아니하며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화살들

위의 구절의 뒷부분을 이사야서 14:24, 26과 대조해 보라. 예레미야서 4:29에서는기마병궁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궁수라면 활을 가지고 있고, 그는 화살을 쏘는 일을 할 것이다.

이 사실이 맞는지 성경에서 확인해 보자. 성경에는 번개를 화살에다 시적으로 비유한 부분이 있다. 번개는 비와 관련이 있으며, 비는 홍수를 일으킨다(민수기 24:6-8, 신명기 32:17, 22-26, 특히 복수의 시작이 등장하는 42. 시편 7:12-15. 또한 구덩이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살펴보고 이를 에스겔서 26:20, 사무엘기하 22:15-16, 시편 18:14-16, 시편 45:5-16, 시편 144:5-7, 이사야서 5:28-30, 예레미야서 50:9, 14, 예레미야서 51:11, 예레미야애가 3:10-15, 에스겔서 5:16, 하박국 3:11-12과 비교해 볼 것)

이렇듯, 예레미야서 4:23-30은 우주가 창조되었다가 사탄의 타락 후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를 묘사한다. 그 상태란 바로 황폐함, 파멸, 형체 없음, 어둠이며, 모두들 부정적인 의미이다.

 

 


[1] 이 물은 우주 전체를 에워싸는 물일 수 있고, 그래서 궁창 아래의 물이라고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지구상의 물은 어떤 경우건 궁창 아래의 물에 포함된다.

[2] Scofield, C.I. Scofield Reference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Inc. New York. 1909, 1917, copyright renewed 1937, and 1945. (4)

[3] 이 햇수는 스코필드 주석성경에 나오는 어셔의 연대표에 따른 수치이다. 필자는 이것이 가장 정확한 자료라고 여긴다.

[4] Hyslop, Alexander, The Two Babylons, or The Papal Worship, published by: The Loizeaux Brothers, 1916, 1943, 1959, Neptune, New Jersey. 고대의 우상 숭배에 대해 성경적으로 파헤친 방대한 문헌이다.

[5] 이때가 루시퍼가 타락하여 죄를 지은 시점이기는 하나, 아직 그가 하늘에서 실제로 쫓겨나지는 않은 상태이다.

[6]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7] Ryrie, Charles. Basic Theology. Colorado Springs. CO: Chariot Victor Publishing, 1996. (184)

[8] 우리말 흠정역 성경에는 다시라는 말이 빠져 있으나 영어 replenish라는 단어는 다시 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역주

[9] 이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 replenish가 사용되었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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