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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과 분명한 구절 중심의 해석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6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거의 사라진 시대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청중들도 거기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성경적인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저는 수년에 걸쳐서 청중들이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게 된 것과 설교자들이 성경을 더 이상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 중 무엇이 먼저였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두 가지 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결과 오늘날 평범한 지역 교회는 더 이상 성경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이전 과에서 계속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게 아니라 성경을 정확히 연구하고 이해해서 오늘날 휩쓸고 있고 배교에 무기력하게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채 단지 주님을 사랑하고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신도들도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열성을 갖고 있기에 그렇게 종교적인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정이나 헌신 외에 바른 성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도 오류에 빠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오류로 인도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문자적 해석이 바른 해석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부분도 나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입니다. 이러한 경우 성경은 그분께서 비유로 많은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3:3a)라고 기록함으로 이것이 문자적이 아닌 비유적인 말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4. 그러나 이렇게 영적인 진리들을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경우에도 그 비유의 해석은 반드시 문자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영적인 진리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3b)라는 말씀도 비유이기는 하지만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비유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상황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 속에 등장한 씨를 뿌리는 자는 실제로 씨를 뿌리는 것이지 어떤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5. 우리가 살펴본 성경의 해석 방법 중 문화적 해석이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병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는 2000년 대의 자동차 경주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된 당시의 청중이 이애할 수 없는 말이라면 지금의 청중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기록될 당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된 것이며 그 의미를 넘어서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확대해석해서 2천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지금의 상황에 끼워맞추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6. 에스겔 선지자가 곡과 마곡에 대해서 기록할 때 그는 소련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소련을 염두에 두고 예언을 했다면 그러한 예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도 없을뿐더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곡은 미국이 아니고 마곡도 유럽의 경제적 부를 상징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힘을 가지고 있는 모든 그룹을 곡과 마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해석하는 사람의 시대에 따라서 곡과 마곡의 해석이 계속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곡은 곡이고 마곡은 마곡입니다. 미삭은 미삭이고 투발은 투발입니다. 이것을 현재의 상황에 끼워 맞춰서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지도를 보세요. 지도는 항상 변합니다. 성경 기록이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의미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7. 점진적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기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계시해 주셔서 전대의 사람들보다 후대의 사람들이 더 많은 계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전도서의 경우 그 이후에 기록된 다른 신약 성경을 통해서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은 신약 성경을 전도서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며 바른 해석 방법이 아닙니다.

 

8. 우리는 역사적 해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는 책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올바른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여러분이 초등학교때 사용한 과학 교과서를 여러분의 자녀들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단 한 장(chapter)도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유일하게 올바른 과학 교과서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올바른 역사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지나간 세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책과 과학책은 매 시대마다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으로 이러한 책들을 판단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9. 그리고 우리는 해석과 적용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은 여러 가지로 적용할 수 있지만 그 적용이 해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처녀의 비유를 예로 들면, 다섯은 현명하고 다섯은 어리석습니다. 다섯은 준비가 되어 있고 다섯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과 관련해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0. 오늘날은 성경의 적용은 많지만 해석은 없는 시대입니다. 특히 우리 주위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들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에는 본문의 바른 해석은 없고 적용만 있습니다. 어떤 흥미있는 이야기를 조금 한 후에 성경 본문을 읽고 거기서 청중들에게 긍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뽑아서 적용할 뿐입니다. 이러한 설교로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11. 이제는 귀납법(The Principle of Induction)”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철학이나 심리학 등 논리를 다루는 학문에서는 귀납적인 논증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본문의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성경 교사는 성경 본문에 의견을 더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서 의견을 끄집어 내는 사람이다.”

 

12. 믿을 것을 먼저 정해 놓고 나서 성경을 연구하면 접하는 본문이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이 되도록 해석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적절한 성경 연구 방법이 아니고 따라서 주제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결론을 끌어낼 수 없게 됩니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칼빈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중심에 놓고 출발합니다. 칼빈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인데 왜냐하면 칼빈은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제롬에게로부터 전수받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인데 이들은 칼빈이 카톨릭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믿는 사상을 카톨릭을 떠나지 않은 제롬의 이름을 붙여 이야기 하기 보다는 칼빈의 이름을 붙여 이야기 하기를 원합니다.

 

13. 칼빈이 믿었던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단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고 지옥에 가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아이들과 아내와 친척 중 일부는 구원받기로 예정되었다고 믿습니다. 어떠한 칼빈주의자도 자신의 아이가 예정되지 않았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칼빈주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게되면 성경이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주권적인 은혜라고 읽게 됩니다. “선택(택함받음)”이라는 말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택함받음)”이 아닌 개인적인 예정으로서의 택함받음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라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14. 이에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은 칼빈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유지하는데 행위가 필요하며 따라서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 앞에서 바른 행위가 없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습니다.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에서 누군가가 실족하거나 배교하거나 타락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성경 연구 시작부터 알미니안주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15. 어떤 사람들은 제가 칼빈주의자인지, 혹은 알미니안주의자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그 무엇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칼빈이 맞는 곳에서는 칼빈이 맞는 것이고 알미니우스가 맞는 곳에서는 알미니우스가 맞는 것이고 둘 다 틀린 곳에서는 오직 성경만이 맞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려면 신학적인 틀(Theological frame)”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틀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나서 무엇을 믿을지 결정해야지 미리 결정하고 나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16. 이단들과 논쟁하는 것은 대부분 시간 낭비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지옥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을 모두 찾아서 두 번씩 보여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리 정해놓은 교리로 성경 구절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교리 체계와 맞지 않는 구절은 다른 설명을 곁들여서라도 그 교리 체계와 맞춰 버리는 것입니다.

 

17. 여호와의 증인들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실화가 아닌 비유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지 단순한 비유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번 가정해 보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여기 뜨거운 고통의 장소에서 물 한 방울 달라고 호소하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것이 지옥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게헨나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게헨나는 뭐하는 곳입니까? 그들은 게헨나가 도시의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이 사람은 그곳에서 고통받고 있으면서 물 한 방울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18. 우리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4) 예루살렘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은 예루살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그런 쓰레기 처리장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거짓말쟁이든지 예수님이 거짓말쟁이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대한 이런 구절도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지옥은 없다는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9.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지옥에 대한 100구절을 보여주고 또 다시 60구절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기로 마음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면 성경의 제단에 올려 놓고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안전한 길입니다.

 

20. 우리 중 아무도 성경을 처음 읽을 때,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자세로 성경 연구에 접근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성경 연구의 가장 초석이 되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 생각과 다를 지라도 다 믿겠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어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그러한 것은 더 이상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성경이 그러한 것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가르침을 지지 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도 더 이상 그것을 붙들지 않는 것이지요. 먼저 결론을 내리고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결론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귀납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21.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가장 확실한 해석을 선택하라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머리를 돌아버리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1:3을 보세요.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만일 여러분이 머리가 좋은 교수라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쉽고 분명하게 학생들에게 제시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주제이든지 간에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22. 성경을 70세 노인에게 가르칠 수 있다면 7살 짜리 어린아이에게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단순하게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이 혼란 스러원 한다면 배우는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어렵게 가르친다면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르치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교회의 목사는 항상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목사는 매우 훌륭한 성경 교사일 것입니다. 너무나도 쉽게 설명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치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특정한 주제를 연구할 때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1:5-6을 보세요. 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함이니 이 소망은 너희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있는 것 같이 너희에게 이르렀으며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열매를 맺는도다.” 여기서는 복음이 온 세상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 세상이라고 한 것은 말 그대로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24. 이제 로마서 10:18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참으로 들었은즉, 그것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의 문맥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6절에서부터 보면 이것에 무엇에 대한 말씀인지 분명해 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에 순종하지는 아니하였나니 이사야가 이르기를,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느니라.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메시야께서 죗값을 갚아 주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당시 온 세상에 있던 사람들이 전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소식이 어디까지 이르렀다고 하고 있습니까?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25.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세상 끝이 로마 제국의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러한 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바울이 선교 여행을 다닌 지역의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말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관련 구절 하나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9:104a을 보세요.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말도 없고 언어도 없으며 그것들의 음성도 들리지 아니하나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아가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해가 떠서 어디까지 지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해가 24 동안 지구를 비출 때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여기서 말하는 세상 끝이 로마 제국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나요? 여기서 말하는 세상 끝이 바울이 선교 여행을 다녀온 지역의 끝이라고 이해하는 분이 계신가요?

 

26. 이렇게 성경의 분명한 해석에 의하면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든 상관하지 말고 성경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관하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관련 구절이 증거하고 있는 것도 무엇인지 보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근본주의 신학교의 교수가 저에게 성경을 정말 문자적으로 믿느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세상 끝까지 복음의 소식이 이르렀다고 한 것을 정말 문자 그대로 믿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저는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는 그 당시에 복음이 실제적으로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골로새서와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고 증언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는 그것을 그렇게 믿으면 않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럼 무엇을 믿느냐고 했더니 그는 가방에서 NASV을 꺼내더니 자신의 성경에는 다르게 나와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 편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듯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것이 성경에 나오면 어떻게 하면 되는줄 아세요? 원하지 않는 것이 나오지 않는 새로운 성경을 구입하면 됩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네요. 그 교수는 성경의 분명하고 확실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니 결국 성경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꿔 버리고 말았습니다.

 

27. 어떻게 세상 끝까지 복음이 증거될 수 있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2:41을 보세요. 그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매 바로 그 날에 삼천 혼 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지니라.” 47절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니라.” 이들 구원받은 3천명은 어디서 나타난 사람들이었을까요? 또 날마다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진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사도행전 2:5을 보세요. 독실한 자들 곧 유대인들이 하늘 아래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아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는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모든 민족으로부터 사람들이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8. 하나님은 현명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놀랍도록 현명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매우 지적인 분이십니다. 12사도가 세상 끝까지 가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모든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열두 사도에게 나아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열 두 사람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모든 민족들에서 나온 사람들이 열 두 사람에게 복음을 듣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현명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기록된 그대로 믿으세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지 마세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록된 그대로 두고 그대로 믿으세요. 고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29.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브를 무엇으로 만드셨는지를 놓고 논쟁을 합니다. 이브를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는지, 반쪽(side)으로 만드셨는지를 놓고 논쟁을 합니다. 아담의 반쪽으로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절반은 남자이고 절반은 여자인 채로 만드셨다가 여자인 부분을 떼어냈다고 주장합니다. 여자인 부분은 이브가 되었고 남아있던 남자인 부분이 아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뼈다귀 하나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께서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2:22). 분명한 말씀을 왜곡해서 다른 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비뼈로 여자를 만든 것을 믿지 못한다면 흙으로 남자를 만든 것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나머지 모든 기적과 초과학적인 일들은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흙으로 남자를 만드신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신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머지도 모두 믿을 수 있습니다.

 

30. 성경 연구는 항상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항상 분명한 부분의 빛에 비춰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흔하지는 않지만 정말 이상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는 구절도 있습니다. 저는 그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구절도 본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 구절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설명하는 사람은 봤지만 성경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그 구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의 의미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31. 고린도전서 15:29을 보세요.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죽은 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할진대 그들이 어찌하여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느냐?” 제가 이 구절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구절은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그것으로 무슨 유익을 얻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제가 이 구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는 이 구절에 기록된 대로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32. 그러나 우리는 침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구절은 침례의 의미를 믿는 자가 신앙을 고백하고 순종의 의미로 물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3:21). 침례는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고 다시 일어난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또한 성령님께서 믿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 넣으시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줍니다.

 

33. 성경에는 침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이 20개가 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고린도전서 15:29 하나를 해석하기 위해서 나머지 20개의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침례에 대한 20개의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하고 분명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29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침례에 대한 유일한 구절입니다. 하나의 구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20개의 구절을 바꿀 필요도 없고 20개의 구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의 구절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의미를 잘 모르는 구절은 그대로 놔두고 의미를 잘 아는 20개의 구절을 믿고 실행하면 됩니다.

 

34. 죽은 자를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죠셉 스미스도 모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다시 일어나시기 전에 죽은 자들은, 그들이 만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채로 죽었다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을 것인데, 주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나오실 때까지는 그곳을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이 죽은 자들은 모두 지옥에 갔습니다. 이제 갈보리 이후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죽어서 지옥에 갔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셋째 하늘에 계신 주님께로 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35. 죽어서 셋째 하늘에 갔건, 지옥에 갔건 상관없이 침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미 지옥에 간 사람을 셋째 하늘로 보낼 수도 없고 셋째 하늘에 간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 이미 죽은 누군가를 위해서 침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 죽은 사람의 상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29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죽은 사람이 가있는 장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36. 성경에서 비슷한 주제의 본문이 두 개있는데 하나는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면 언제나 분명한 쪽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이나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성경 연구를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에스겔에서는 그룹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에스겔에 나온 그룹을 묘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서로 다 다르게 묘사합니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않은 대로 두고 넘어가야지 그것을 억지로 풀 필요도 없고 또 그러한 곳에서 성경 연구를 시작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스겔을 가지고 신약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구원받고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에스겔이나 다른 선지서로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37. 항상 분명하고 평이한 부분부터 연구하고 이것으로 불확실한 부분을 비춰야 합니다. 요한복음 3:3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흥미있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거듭나고 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왕국은 가시적인 것일까요? 이 구절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모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38. 계속해서 4절을 보겠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매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거듭남이 일종의 환생이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39. 5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에서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2천년 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침례를 의미하는지,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종교적인 정결례를 행함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말씀의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종교인들은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한복음에는 18개 장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 침례나 어떤 물로 씻음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0.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 3:5에서 말씀하시는 물에서 난다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더라도 요한복음의 수많은 구절들을 통해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물침례(혹은 물세례)로는 어떤 사람도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매우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람들은 구원받고 나서 침례를 받았지 구원받기 위해 침례를 받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구원받기 위해 침례를 받는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침례의 의미도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옆에서 십자가 위에 달렸던 강도는 침례를 받지 못했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물침례가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분명한 구절을 통해서 분명하지 않은 구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41. 어떤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절을 가지고 와서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3:7)는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성경의 구석진 곳에 있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어려운 구절은 잘도 찾아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주의 만찬이 구약과 신약 중 어디에 나오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하시야가 통치할 때 나이가 42세였는지, 22세였는지 어느게 맞냐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그걸 알게되었을까요? 성경에서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구절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소위 모순이라고 알려진 구절은 잘도 알고 있는 겁니까?

 

42. 술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술을 마시면 갑자기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예수님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죄인인 점을 지적하면 성경에서 복음에 관한 구절은 아무것도 모르던 그가 갑자기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 7:1)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기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 16:31)는 말씀은 모르면서 다른 구절은 잘도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43. 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는 말씀은 모르면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은 알고 있는 걸까요? (주님께서 물로 알코올 성분이 있는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사실이 아님.-역주) 이것은 분명히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러한 일의 뒤에는 영적 존재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 뒤에는 마귀가 있어서 복음의 진리는 알지 못하게 하려고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44. 이제 우리는 의미의 통일성의 원칙(The Principle of Unity of Sens of Scripture)”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약속의 땅은 항상 약속의 땅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 본 한 단어의 의미를 다른 책에서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다시 재건하실 것이라고 역대기나 선지서에서 말씀하고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도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도시가 신약 성경에서는 의미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45.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받는 것이라면 항상 그런 것입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 믿음이라고 말하면 다른 책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의 책들이 믿음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는게 아닙니다. 성경 내에서는 믿음은 항상 믿음이고 은혜는 항상 은혜이며 사랑은 항상 사랑이고 행위는 항상 행위입니다. 왕좌는 항상 왕좌이고 왕국은 항상 왕국이지 책마다 의미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한 번 사용된 단어는 항상 일관되게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한 책에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가 다른 책에서는 바뀌어 버린다면 결코 성경을 제대로 연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46. 성경에서 어둠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무엇인가 잘못한 것에 대한 법적인 심판의 결과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엇인가 좋은 것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는 어둠이 나쁜 것이다가 다른 곳에서는 좋은 것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 빛이 좋은 것으로 나오다가 다른 곳에서는 나쁜 것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번 정의한 것은 일관되게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47.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야와 약속의 땅에 대한 말씀을 처음으로 받았을 때 이해하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요단 강을 중심으로한 땅에서의 번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이 메시야에게 바라던 것은 바로 그들에게 약속한 땅을 회복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불태웠다고 해서 무천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회복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해서 무천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성경에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땅은 현재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임.-역주).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통치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실 것을 성경의 한 책에서 말씀하셨다면 성경이 끝날때까지 그러한 예언의 내용이 다른 것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48.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계획을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에 반해서 어느날 지옥을 없애버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신약 성경에서 모두 영적으로 대체해서 성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들은 나중에 문자적으로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지옥에 보내서 영원히 고통받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신약 성경에서도 같은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49. 성경은 일관적인 기조로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시거나 바보로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이 나오면 항상 그것은 말을 의미합니다. 병거는 병거고 강은 항상 강입니다. 성경에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할까요? 물론 사용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성경의 상징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상징이 의미의 통일성을 깨는 것은 아닙니다.

 

50. 성경의 상징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면, 속죄 염소가 있습니다.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언고 사람들의 죄가 염소에게 있음을 선언하며 죄를 전가합니다. 그리고 나서 염소를 광야에서 놓아줍니다. 이것을 통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죄가 있는 채로 죽으면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고 끊어지기 때문에 죄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지만 성경의 일관적인 의미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결코 구원받은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인 것이든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성경의 어디에서도 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지 않게될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속죄 염소에 대한 상징을 구원받지 않은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1. 이러한 원칙을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열처녀 비유를 사람들이 흔히 잘못 해석하는 방식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 처녀의 비유를 교회에 적용시켜 잘못된 해석을 합니다. “열 처녀가 있는데 그중에 다섯은 성령이 있고 다섯은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이 없는 다섯이 성령이 있는 다섯에게 가서 자신들에게 성령을 팔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섯 처녀는 자신들이 소유하기에 부족하니 성령을 팔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뭔가 이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분을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기름이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름은 기름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었을 때 성령님을 부어준 것은 아닙니다.

 

52. 성령님은 사거나 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기름은 성령님이라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성령님을 사고 파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러한 해석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때에는 항상 관련 구절을 찾아봐야 하며 다른 구절을 통해서 본문의 해석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한 책에서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정의하고 있는 것은 다른 책에서도 일관되게 그 의미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일관성을 무시한다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53. 여러분이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어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 시킬 때 많은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담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아세요? 연기와 재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은 많이 있지만 그것이 담배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은 아닙니다. 저는 성경에서 담배에 대한 구절을 찾을 수 없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일관되게 우리의 육신이 아닌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라는 말씀은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께 자신을 의의 도구로 내어 드려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일관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으로 담배에 대한 말씀은 충분한 것입니다.

 

54. 성경에서는 도박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전화해서 다급한 목소리로 복권에 대한 구절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도박이나 복권에 대한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슬롯머신에 가까이 가지 말지니라는 말씀이나 룰렛테이블 앞에 앉는 것은 가증하니라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현명하게 돈을 사용해야지 돈박을 하면서 돈을 날려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특정해서 말씀하지 않아도 그 주제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됩니다.

 

55.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학교에 가서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결론을 내려 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같은 원어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저는 1976년에 구원받은 이후로 목회 사역이든, 복음 사역이든, 기도든, 성경 연구든 간에 원어를 알지 못해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무튼 로마 카톨릭은 제대로된 교육 기관에서 교육 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성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 연구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56. 이에 반해서 개신교는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 성령님께서 거주해 계시기 때문에 누구나 혼자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도 성경을 연구하고 알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단과 이단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극단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도 진리를 알 수 있지만 다른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내가 연구한 진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둘 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혼자 있으면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의 뜻을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있으면 상대방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증을 할 수 있습니다.

 

57. 저는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교단에서 저에게 교리를 정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연구해서 알게 된 진리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형제 자매들과 교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지체들과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내가 연구한 내용이 정말 진리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저도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잘못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제를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58.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른 교회와 좀 다른 것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저는 수 년에 걸쳐서 계속 그렇게 여러분에게 성경을 가르쳐왔습니다. 만일 제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 다른 사람의 성경 강의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 다른 사람의 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을 성경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아십니까? 저는 저의 서재에서 다시 한번 찾아볼 것이고 저의 자료들을 뒤져볼 것이고 다른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확인해 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곳에서도 그것을 찾지 못하였고 아무도 그러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래서 제가 찾은 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면, 저는 그것을 그냥 그 자리에 둘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5년이나 10년이 흐르고 나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어떤 형제가 자신이 성경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전에 제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 한다면 저는 아마 속으로 환호성을 지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발견한 진리를 확인받았기 때문입니다.

 

59. 모든 이단들과 거짓 종교들은 아무도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들고 나옵니다. 이단들은 성령님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자녀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확인받지 못한 것을 들고 나와서 자신들의 독특한 교리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이 있는데 왜 혼자만 그렇게 믿는 것일까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 사람 단 하나만 있는 것일까요? 어떠한 교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교리는 의심해 봐야 합니다.

 

60. 어떤 사람들은 요한일서 2:27을 인용하면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나 확인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속에 거하므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것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 이 말씀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은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주님께서는 왜 목사와 교사를 선물로 주신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고 성경 교사들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4:11-12). 이렇게 단 하나의 구절 만으로 결론을 내리면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61.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께서 내주해 계십니다. 그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할 때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가르치는 것에 제한될 필요도 없고 침례교회가 가르치는 것에 제한될 필요도 없습니다. 교황이나 그 누구의 가르침에 제한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연구한 내용이 진리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죠셉 스미스 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그리스도인과 교제를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62. 제발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세요. 집에서 혼자 그 누구의 도움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성경을 열심히 읽으세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서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도 모르는 것을 찾아내세요. 그러나 반드시 여러분이 알아낸 내용이 성경의 다른 진리에 부합하는 것인지 확인해 보세요. 성경을 연구하는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보고 확인해 보세요. 다른 형제들이 내가 찾아낸 내용이 좀 이상한 거 같다고 하면 끝까지 그것을 고집해서 새로운 교리를 만들지 말고 일단 내려 놓으세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진리를 보여주실 수 있지만 다른 형제를 통해서 그것을 확증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처럼 다른 형제에게도 역사하실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연구에 있어서도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성경의 전부라면 앞으로 남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 것이겠습니까?

 

63. 우리는 지금까지 문자적 해석, 문화적 해석, 역사적 해석, 해석과 적용의 차이, 귀납법, 분명한 구절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 의미의 통일성의 원칙, 그리고 연구한 내용을 확인해야 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학원 기말 시험의 주제로 좋은 것들입니다(이 강의는 신학원 강의임.-역주). 저는 지금 예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이번 강의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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