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09.11.30 01:22

칼빈주의-제3장 제한된 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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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W. 낙스의 칼빈주의 강의

3장 제한된 속죄

 

이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강의 Calvinism Part 3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한 것입니다. 음성 파일을 듣고 번역한 것이라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Kjv74@hanmail.net

 

1. 우리는 칼빈주의라는 신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라 제롬주의입니다. 또한 제롬주의는 제롬주의가 아니라 운명주의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미리 정해졌다는 사상입니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사람은 특정한 행위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설계해 놓으시고 입력하신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행해진 모든 행위는 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하나님은 “비열한”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과 타락과 사악함의 원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는 것이라”(요일 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히 7:26)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2.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은 “TULIP”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전적 타락”의 교리는 비성경적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 또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공부할 칼빈주의의 셋째 강령은 “제한된 속죄”입니다. “속죄”의 성경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값으로 치르신 대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사람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정되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다고 가르칩니다. 버림받기로 정해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피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그저 예정된 대로 지옥에 들어가고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3. 이것은 매우 이상한 교리입니다.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피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아무런 저항이나 의사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지옥에 들어가고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제가 불못에 던져지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주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제한된 속죄”에 대해서 에드윈 팔머가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해서 쓴 책을 다시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팔머는 이 책에서 칼빈주의를 설명하면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죽으시려고 의도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죗값을 지불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지옥에 가셨는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주신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과 의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만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는가? 오랫동안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 질문에 두 가지 방식으로 답변해 왔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답했고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답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알미니안주의자나, 칼빈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5. 계속 팔머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자들, 심지어 가룟 유다를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다고 말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은 가룟 유다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은 가룟 유다 만큼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성경은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약 2:10)? 성경은 모두가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갈 3:22)? 모든 사람이 똑같은 죄인 아닙니까? 그런데 왜 칼빈주의자들은 유다를 지목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자기들의 아내를 지목하지는 않을까요? 왜 팔머씨는 “그리스도께서 심지어 나의 아내를 위해서도 죽으셨다고?”라고 반문하지는 않는 것일까요? 왜 하필 유다를 지목할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유다라고? 유다는 정말 나쁜 사람이잖아. 예수님은 그렇게까지 사악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을 거야.” 유다가 그렇게 사악한 사람인가요? 우리 중에 사악하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칼빈주의의 뒤에는 자아중심적인 생각,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6.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았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자신이 지옥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칼빈주의자는 만나보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들의 아이들은 언약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믿는 칼빈주의자는 만나보지 못했을 겁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라고 믿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가기로 예정되기는 했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7. 계속 팔머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들은(알미니안주의자들)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은 자들의 죗값까지도 갚아 주셨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속죄란 보편적인(우주적인) 봉투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봉투가 마련되어 있지만 어떤 사람들만 봉투를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피를 흘리신 것만 아니라 흘려버리신 것이 된다.” 미국의 칼빈주의자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우리의 죄보다 큰 은혜(Grace greater than our sin)”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과는 다르게 주님의 은혜는 죄보다 더 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다면 그것은 헛되이 흘린 피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믿음과 다른 찬송을 부르면서도 그들은 “아멘”이라고 외칩니다. 강단에서 하는 말에는 무조건 아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8. 팔머의 말을 좀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들(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의도하셨지만 오직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는 낭비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자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자들이 “제한된 속죄”를 이야기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9. 이제 우리는 성경 구절을 몇 개 살펴보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 오르실 때 아담을 만들기 전에 계획하신대로, 구원하기로 생각하신 자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으면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만일 선택된 자들이 창세 전에 이미 구원 받은 것이라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선택한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러 오셨는데 선택된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음에도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10. 요한일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보세요.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여기서 ‘우리’가 누구지요? 1절에서 말한 어린 자녀들을 포함한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요일 2:1-2) 자, 여기서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에 근거해서 답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믿는 사람들인 우리의 죄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온 세상의 죄들도 위한 것입니까? 물론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함이었습니다.

 

11. 요한복음 3:16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팔머의 말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이것에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의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선택된 자들이 구원받게 하신 것이다. 이 본문(요 3:16)에서 말하는 세상은 이 세상에 사는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을 것을 선택합니다. 만일 자신들이 믿는 것이 성경에 없으면 몰몬교도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면 그만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의 의미를 바꿔서 자신이 믿는 것에 맞추면 그만입니다.

 

12. 칼빈주의자들이 읽는 방식으로 요한일서 2:2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선택된 자들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 칼빈주의자들은 본문의 의미가 이렇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장 15절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의 선택된 자들이나 세상에 있는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의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의 선택된 자들에게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의 선택된 자들에서 나느니라. 세상의 선택된 자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 우리가 본문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칼빈주의자들은 여기서는 세상은 선택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미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맞으니까요. 그러나 2절의 “온 세상”은 말 그대로 “온 세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맞으니까요.

 

13. 잘 보세요. 성경은 우리들, 믿는 자들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로 드려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제한된 속죄”가 아니라 “보편적인 속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보세요. 14절부터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므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노라.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대속은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대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 16: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온 세상을 위해서 대속하신 것이 아니라면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의 교리가 맞다면 성령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정되어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그저 들어가시면 될 뿐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낭비해 가며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14. 요한복음 4장을 보세요. 39절 부터 보세요.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그분께서 내게 말하였다, 하고 증언하므로 그 도시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을 믿더라.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께 와서 그분께 간청하여 그분께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를 것을 구하니 그분께서 거기에 이틀을 머무르시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믿고 그 여자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요 4:39-42)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 요한일서 2장에서 말씀하시는 “세상”인가요? 아니면 “세상의 선택된 자들”인가요?

 

15. 누가복음 19장도 보세요. 10절을 보세요.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잃어버려진 자입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게 아닙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하겠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주님께서는 잃어버려진 자를 찾으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잃어버려진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16.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선택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도 보세요. 1절부터 보세요.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되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왕들이 다 구원받은 선택된 사람들인가요? 모든 왕들이 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님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권위를 가진 자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경찰관들과 교도관들이 다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모든 학교 선생님들이 구원받은 믿는 사람들입니까? 모든 정치인들이 선택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선택된 사람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가 이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1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사람”은 선택되고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17. 계속해서 디모데전서 2장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 이것은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모든 사람”이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4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도 선택된 사람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채 죽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죽은 것입니다.

 

18. 계속해서 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 디모데전서 2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일서 2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화해헌물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속입니다.

 

19.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살펴본 구절들을 인용하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세요. 우리가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가서 방에 있는 모든 만화책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아이는 모든 만화책을 가져왔습니다. “여기 모든 만화책을 가져왔어요.” “아니 얘야 파란색 책만 가져오지 그랬니.” “어머니께서 모든 만화책을 가져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모든’은 파란색을 의미한단다.” ‘모든’은 파란색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서 모든 양말을 가져오너라.” “어느 것을 가져 갈까요?” “모든 것을 가져오너라.” “어머니 모든 양말을 가져왔어요.” “아니 얘야, 흰 양말만 가져오라고.” “어머니께서 모든 양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모든’은 흰색을 의미한단다.” 아무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미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런식으로 말씀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데도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람”이란 자신들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언약으로 들어온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20.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침례교인이면서 칼빈주의자인 경우 입니다. 칼빈주의자면서 개신교인 일 수는 있지만 침례교인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믿는 자들이 신앙의 간증과 순종의 의미로 침례를 받는다고 하면서 물뿌림(세례)을 통해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겁니다.

 

21. 칼빈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위해서 죽으실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마 26:50). 유다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유다가 선택된 자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다를 선택하셨습니다. “날이 밝으매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부르사 그들 중의 열둘을 택하시고 또한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시니라.”(눅 6:13) 유다는 주님의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이쯤 되면 칼빈주의자들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성경은 그걸 의미하고 있지 않아요.”

 

22. 베드로후서 2장입니다. 1절부터 보세요. 잘 보세요.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이들은 선한 사람들일까요, 악한 사람들일까요?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이 거짓 교사들은 선한 사람들일까요, 악한 사람들일까요? 당연히 악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이건 정말 끔찍한 일 아닙니까?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저주받을 이단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악한 사람들인지 보이시나요? 계속해서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들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정죄는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과 저주 받을 이단 교리들이 있고 이들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 주님께서는 이단 교리를 가지고 교회를 망치면서 정죄를 받을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의 죄도 대속하셨고 자신의 피로 그들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사셨는데도 이들의 끝은 정죄입니다. 이것은 “제한된 속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씀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말이야?”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위해 죽으셨고, 본디오 빌라도를 위해 죽으셨고, 헤롯을 위해 죽으셨고, 히틀러를 위해 죽으셨고, 저를 위해 죽으셨고,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24. 어떤 죄인도 다른 죄인보다 나은 죄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도 필요없는 선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겠습니까? 여러분은 죄의 순위를 정할 수 없습니다. 죄인의 순위도 정할 수 없어요. “저 사람은 죄를 400개나 지었지만 나는 두 개밖에 짓지 않았지.”라고 할 수 없어요. 두 개 밖에 짓지 않았다해도 그것을 알고 지은 이상 죄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도 전에 자신은 선택받은 자이며 따라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을 성경으로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믿을 것을 정해 놓고 성경으로 그것을 입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25.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믿는 것에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고 가르치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예정해 놓으시고 우리가 이렇게 믿도록 입력해 놓으신 것이니까요. 히브리서 2장을 보세요. 9절을 보세요.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 구절이 “제한된 속죄”를 말하는 것일까요, “보편적인 속죄”를 말하는 것인까요?

 

26. 로마서 5장을 보세요.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몇 명이나 죄를 지었나요? 모든 사람이지요. 죄의 결과로 몇 명이나 죽게 되었나요? 역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칼빈주의자들에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나요? 그들은 “예”라고 답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나요? 역시 “예”로 답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게 되었나요? “예”로 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될 기회를 가지고 있나요? 칼빈주의자들은 이 질문에는 “아니요”로 답할 겁니다. 왜 아닌가요? 문맥에서 “모든 사람”은 계속 같은 대상을 의미하지 않나요? 어째서 처음 세 번의 “모든 사람”은 정말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맨 뒤의 “모든 사람”은 “선택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27.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이 다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주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저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결정”으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주님의 대속을 거부하고 구원자를 거부하고 칭의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대속과 구원자와 칭의 없이 죽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대속입니다.

 

28.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합니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해석하고 계속해서 다른 주제로 논쟁을 전환합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논쟁에서 자신들의 근거를 성경으로 입증할 수 없으면 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갑니다. 거기서도 성경으로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면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립니다. 이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한 가지 주제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옥에 대해서 논쟁하다가 성경으로 입증하는게 마땅치 않으면 갑자기 천년왕국에 대한 것으로 넘어갑니다. 그들은 한 가지 주제에 머물러 논쟁을 끝내지 못합니다. 칼빈주의자들도 논쟁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독립 침례교회의 회원들도 비슷한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으로 상대를 완전히 논박하지 못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거나 이름을 들먹이며 욕을 합니다. 이건 유치원에서도 통하지 않는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기독교계에서는 통하나 봅니다. 다른 사람을 비아냥거리면서 이름을 부르고 욕을 하는 것은 논쟁에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29.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4절부터 보겠습니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문에 의하면 몇 명이나 길을 잘못 들었습니까? 모든 사람이지요. 주님께서는 몇 사람의 불법을 담당하셨습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성경은 “제한된 속죄”가 아닌 “보편적인 속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0. 우리가 칼빈주의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 칼빈주의자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마 18:11)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는 소유였던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양은 잃어버리기 전에는 원래 주님의 소유였던 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냥 비유일 뿐입니다. 성경은 잃어버린 양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동전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53장을 왜곡합니다. 양들이 길을 잃고 자기 길로 간 것을 주님이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원래부터 자신의 소유였던 것을 찾으러 오셨고 자신의 소유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31. 구원받은 자들이 잃어버린 양이었다는 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성경을 왜곡한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사야 53장에서도 중요한 단어 하나를 빠뜨렸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제대로 읽지 못한 부분을 한번 제대로 읽어보겠습니다. 6절을 보세요. 성경은 “우리가 다 양으로서 길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주님의 소유였던 양이 길을 잃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양 “같이” 길을 잃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들은 종종 길을 잃기 때문에 양들에 비유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양이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양 같이 길을 잃은 것입니다.

 

32. 칼빈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구원받지 않고 지옥에 갈 자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걸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의 대속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주님께서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익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값을 우리에게 치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내가 구원할 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그것들을” 행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29). 이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을 온 세상의 죄에 대한 희생 제물로 아버지께 바친 것입니다.

 

33. 주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시고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한 사람이 구원을 받든지 수 백만이 구원을 받든지 상관없이 주님의 피는 낭비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피는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처럼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최상의 동기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상급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는 낭비되거나 헛되이 흘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희생과 순종과 자기를 드리심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4. 이사야 53:10을 보세요.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사 그에게 고통을 두셨은즉”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다음의 표현을 보세요.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고 자기 날들을 길게 하며 또 주의 기뻐하시는 일이 그의 손에서 번영하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혼을 누구에게 드린 것일까요? 여러분에게 주신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아버지께 드린 겁니다.

 

35. 이제 디모데전서 4:10을 보세요. “이런 까닭에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당하나니 이는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요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구원자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라고 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구원자이시지요.”라고 말합니다. 예,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의 구원자도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자들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신데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요.

 

3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가 구원받기 전에도 저의 구원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도 여러분의 구원자였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를 원할 때, 바로 그 순간 구원자는 여러분 곁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는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구원자로 여러분 옆에 계셨던 겁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구원자로서 달려가기 위해 구원자로 계셨던 겁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지 전에도 예수님은 항상 여러분의 구원자였습니다. 여러분이 단지 그것을 믿지 않았을 뿐이지요. 여러분이 밖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자도 되십니다. 그들이 요청만 한다면 언제든지 구원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겁니다. 그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몇 사람의 구원자가 되시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자 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든 자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37. 디도서 2:11을 보세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사람들에게만,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38. 모세 때부터 예수님의 초림때까지 살았던 모든 유대인들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과거 예수님의 초림 전까지 살았던 모든 유대인들,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했던 모든 유대인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분 있나요? 아무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남침례교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모두 죽어서 하늘나라에 자동으로 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면 모두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교리를 들어 보신 분 계세요? 여러분은 이런말을 처음 들어봤을지 몰라도 요한복음 8장에는 그렇게 믿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니라,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위를 하고자 할 것이로되”(요 8:39) 주님께서 영원히 거하는 곳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임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은 당연히 하늘나라에 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쨌건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압니다. 단지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멉니다.

 

39. 갈라디아서 4장을 보세요. 4절부터 보세요.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주님께서는 누가 입양될 수 있게 하셨습니까?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지요. 이들은 모두 믿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3:10을 보세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저주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구속하셨습니다.

 

40. 히브리서 10장을 보세요. 28절부터 보세요.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히 10:28-29)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이 말씀은 성령을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아서 정죄를 받을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피가 이러한 자들을 거룩히 구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을 위해서도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셨다는 겁니다.

 

41. 저는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시고 놀라우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구원받을 기회조차도 주지 않고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리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로우심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지옥에서 고통받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들고 그것을 피할 길도 주지 않고 그저 고통의 장소로 보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리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이 충만한 분이신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을 볼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아, 이게 사랑이구나. 이게 바로 은혜구나. 이게 바로 자비로 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42. 이제 마지막으로 비교를 하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가도록 만드셨고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가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건 무엇을 믿건 상관없이 창세 전에 그렇게 예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43. 계시록 4장과 에스겔 33장을 보겠습니다. 계시록 4:11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존재합니다. 이제 에스겔 33:11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돌이켜 자기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돌이켜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떠나라.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하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쁨을 위해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자신의 악함 가운데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만드셨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도 아니고 원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44. 우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세번째인 “제한된 속죄”라는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주 다른 것이고 잘못된 교리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칼빈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은 칼빈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저 칼빈주의가 맞겠거니 옳은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이 잘못된, 비성경적인 거짓 교리라고 그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사상에 불과하며 성경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교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을 것을 우리가 결정하고 나서 성경이 우리의 결정을 지지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빚어내고 다듬고 지도해서 주님 앞에 올바른 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한된 속죄”에 대한 공부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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