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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식(所在識)

by 이우진 posted Feb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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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식(所在識)

 

일본의 유명한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생, 사, 신비체험(生, 死, 神秘體驗)"이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소재식(所在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소재식은 의학용어로 병원에서 환자가 의식을 잃고 있을 때, 그의 의식 수준을 판단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검사입니다. 이 검사는 몇 가지 단순한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실시할 때는 환자에게 "여기가 어디입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지금은 언제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하면 의식이 정상인 것으로 판명됩니다.

여기는 어디 입니까?
일반적으로 "여기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은 공간감을 묻는 것으로 병원의 명칭을 답하면 정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보통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 맞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또한 "지금은 언제 입니까?"라는 질문은 시간감각을 묻는 것으로 날짜와 시간을 대면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사실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이 질문들은 지난 수 천년동안 무수한 철학자들이 풀려고 했던 것이지만 풀지 못했던 것이고 얻으려고 했지만 그 해답을 결코 찾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난 6000천년간의 역사는 인간이 이러한 질문들의 해답을 해 아래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후에 이 세상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이 곳은 영원한 곳이 아니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있는 곳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을 피할 수가 없으며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눈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당신은 누구입니까?
사실 정확한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대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름은 어떤 것을 가르키는 것일 뿐, 그 본질을 말해주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 확실성을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생각(의식)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었고,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그런 의식(자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존재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까지 찾아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별로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살아있으되 참된 생명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는 참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나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의미까지도 얻게 되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요일 3:1).

지금은 언제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 지금은 구원받을 만한 때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지금"이 지나면 주님을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내려지기 전인 폭풍의 전야와도 같은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먹고 마시며 놀고 춤추며 싸우고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렇게 "지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지금 영원을 준비합니다. "지금"을 팔아 "영원"을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잠시 잠깐 후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참으시고 그 귀한 피를 흘리신 분이 온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지금" 현명한 판단을 내려서 "영원"이 시작되기 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