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2012.02.06 09:38

이교도들은 어떻게 되는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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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What About The Heathen?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성경적 답변

James W. Knox 지음 / 우진 옮김

 

Part 1/2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얻는 큰 기쁨 중 하나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질문하는 것에 답을 해 주는 것이다. 매주 우리에게 오는 수백 통의 편지를 정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하는 수많은 질문 중 가장 빈도수가 높은 것은 다음과 같은 류의 것이다.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다른 나라에 사는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교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트집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라면 이것은 좋은 질문이고 성경도 좋은 답을 준다.

 

그러나 좋은 질문을 잘못된 동기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진리를 배우려는 동기가 없이 위와 같은 질문을 한다든지 혹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정말로 염려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하나님을 비난하고 트집잡기 위해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조명을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와 같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가 무엇이냐?”( 18:38) 그리고 그냥 방을 나가 버렸다. 그는 진리를 원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말했을 뿐 진리를 알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충분한 답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1979년에 신학교를 그만뒀다. 나는 2~3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학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졸업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없네. 자네는 최근에 입학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만, 만일 제가 지난 삼 주간 배운 것과 같은 것을 사 년간 배운다면 더 이상 학교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졸업시험을 보고 졸업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동생이 형에게 부탁하듯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성경 교리를 배우는 것이 형제 사랑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졸업시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계속 학장에게 졸랐다. 그래서 결국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 “졸업시험은 목사들과 교수들 앞에서 구술로 하게 되네. 그들은 자네의 성경 지식을 구두로 시험할 걸세.” “좋습니다. 해볼만한 거 같습니다.”

 

결국 학장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 성경 공부를 하고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며 얻은 지식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1]

 

결국 입학한지 삼 주 만에 나는 졸업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졸업시험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나는 두 문제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그 문제들을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문제는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에 대해 설명하라.”였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용어를 알아듣지 못해 대답할 수 없었다.

 

둘째 질문은 오늘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교수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교도는 어디로 가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백화점에 가더군요.” 그는 내 대답을 좋아하지 않았다. 교수들 중 한 사람만이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바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한번도 본 적이 없고 만난 적도 없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걱정해야 합니까?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걱정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2]

 

이후에 나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가 바로 <확실한 기초(A Sure Foundation)>이다. 주님께서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창조자가 어떤 분인지 가르쳐 주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나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에 대해서도 성경을 연구했다.

 

나는 호주의 오지에 살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원주민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그들 중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었다. 나는 밀림에 사는 부족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싶어하는 사람 수백 명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그 중에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기 위해 헌신했다.

 

만일 정말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교도들이 걱정되거든 그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어려운 질문을 했던 것처럼 단순히 난해한 질문만을 즐기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동기를 점검해 보는 게 필요하다. “나는 왜 이것을 알려고 하는가?” 만일 동기가 순수하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일 당신의 동기도 순수한 것이라면 내가 성경을 통해 당신에게 만족할만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자 하는 동기가 순수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가 수많은 성경 구절을 찾아봐도 소용없을 것이다. 한 가지 문제에 답을 주면 다른 말로 꼬투리를 잡을 것이다. “, 그런데 이런 경우는…” 라든가, “, 그런데 만일이라고 가정하면…” 등과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일년 동안 성경을 찾아가며 보여줘도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 회의론자를 만족시킬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기초는 믿음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질문에 어떤 답도 주지 않으실 것이다.

 

먼저 창세기 18:23-25부터 시작해 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성도착자들의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가서 아뢰되, 주께서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18:23) 이것은 좋은 질문이다. 혹시 그 도시 안에 쉰 명의 의로운 자들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안에 있는 쉰 명의 의로운 자들로 인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주께서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처럼 여기시는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나이다. 온 땅의 심판자께서 의롭게 행하여야 하지 아니하리이까? 하매( 18:24-25)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설득하는지 보자. 그는 하나님께서 온 땅의 심판자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간구의 근거였다. 아브라함의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저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행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것을 저에게 설명해 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의롭다는 것을 아는데 하시려는 일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주시기 원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에서 즉 그 도시 안에서 쉰 명의 의로운 자들을 찾으면 그들로 인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18:26)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직 악인들에게만 벌을 줄 것이다. 의인들은 벌을 받지 않고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심판하는 방법이니라.”

 

이 진리는 우주적인 진리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팔레스타인만의 심판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심판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미국인들만의 심판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이시다. 온 땅의 심판자이신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의롭게 심판할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의인들에게 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악인들에게는 벌을 줄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이제 시편 96편으로 가보자. 우리는 성경의 앞부분인 창세기 18장을 살펴보았다. 이제 성경의 중간 부분인 시편 96편을 살펴보자. 성경의 뒷부분인 계시록도 살펴볼 것이다. 시편 96:1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통치하심을 이교도들 가운데서 말할지어다. 세상도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리니 그분께서 백성들을 의롭게 심판하시리라. 이교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교도들에게 말하라.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다.

 

이제 계시록 19:11을 보자.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두 번째 오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성경의 앞부분인 창세기와 성경의 중간 부분인 시편과 성경의 끝부분인 계시록에서, 처음과 중간과 끝에서 성경은 두 가지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l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다.

l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충분한 답을 주고 있다. 밀림이나 북극이나 오지 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정당하게 그 사람을 대하실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의 기초 위에 성경적 답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첫째, 모든 사람들이 받게 되는 심판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로마서 14장과 계시록 20장을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로마서 14:11-12을 보자. 기록된바,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고 모든 혀가 하나님에게 자백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이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성경이 사실이라면 (물론 나는 성경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회계 보고를 해야 한다. 아마존 밀림에 사는 사람을 위해 내가 대신 회계 보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존 밀림에 사는 사람이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을 대신해서 회계 보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이 자이레에 사는 원주민을 대신해서 회계 보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을 만드신 창조자를 만나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창조자 앞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회계 보고를 해야 한다. 본문의 문맥을 보라. 회계 보고의 성격은 무엇인가? 기록된바,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고 모든 혀가 하나님에게 자백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

 

본문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여기서는 사람이 성경적 지식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말자. 모든 사람은 다음에 제시하는 세 가지 사실을 피할 수 없음을 뒤에서 보여주겠다.)

 

1. 본문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주가 말하노라.” 이 문제에 있어서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다. 선교사를 본적이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에서 태어났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지난 오백 년간 성경이라고는 보지도 못한 지역에서 태어났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요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 어디에 살고 있건 상관없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뒤에서 보여주겠다.

 

2.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큰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알고 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고주가 말하노라.”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칭호나 성품에 대해 논쟁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의 창조자 앞에서 겸손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데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그분은 나보다 크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나는 그분께 무릎을 꿇어야 한다.

 

3.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성경의 표현을 자세히 보라. 성경은 모든 혀가 하나님이 계심을 고백하리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리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왜 하나님께 자백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요구하실 것이다. 첫째, 너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는가? 둘째, 너는 그분이 너보다 큰 존재라는 것을 믿었는가? 셋째, 만일 이러한 사실을 믿었다면, 네가 지은 모든 죄와 불법과 불의한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적 기독교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3:5) 사람은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는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8-9) 세상의 모든 종교와는 다른 얼마나 독특한 메시지인가!

 

이러한 메시지는 첫 사람도 받은 것이며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아담, 이브, 가인,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아비멜렉, 그리고 욥은 의를 얻는 방법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계시는 다양했으나 앞에서 제시한 세가지 원칙은 동일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하시는 게 나온다. 네가 어디 있느냐?”( 3:9) 누가 네게 알려주었느냐?”( 3:11) 네가 먹었느냐?”( 3:11) 네 동생 아벨이 어디있느냐?”( 4: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물으시고 사람은 대답해야만 하는 게 보이는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를 했던 것이다.

 

창세기부터 인간은 자신의 죄를 숨기거나 덮어버리거나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대신 다른 것을 방법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이 마음속에 죄에 대한 찔림을 받을 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플로리다에서 찾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영국에서 찾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보르네오에서 찾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

 

계시록 20:11-15를 보자.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제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자. 성경은 잘못을 행한 자가 불 호수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불 호수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른 것을 통해 죄를 없애보려고 시도한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을 여시고 인간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보라, 너는 여기서도 법을 어겼고 저기서도 법을 어겼다.” 그러나 법을 어겼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다. 법을 어겼다고 해서 불 호수에 던져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사람을 불 호수에 던져 넣으시는 자신의 심판을 정당화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인간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당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영원한 불로 형벌을 받는 이유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흰 왕좌 심판석에서 하나님 앞에 펼쳐져 있던 책들의 목적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 호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정당한 것임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그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불 호수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불 호수에 던져지는 이유는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작은 자나 큰 자나, 훌륭한 사람이나 하찮은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했던 사람은 긍휼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죄를 받게 되고 불 호수로 추방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 호수는 한번도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목사님, 그렇지만 성경을 한번도 본적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다닐 교회도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보자. 로마서 2장과 야고보서 4장을 보자. 로마서 2:11-12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 율법 밖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또한 다 율법 밖에서 멸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다 율법으로 심판을 받으리니 사람이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율법은 사람을 불 호수에 던지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율법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로마서 2:14-15에서 율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보자.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는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느냐?”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너의 마을에 선교사가 온 적이 있느냐?”

아니오. 저희 마을에는 한번도 선교사가 온 적이 없습니다.”

너와 했던 약속을 어기고 너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을 만난 날을 기억하느냐? 너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그 사람이 얼마나 더러운 거짓말쟁이인지에 대해 얘기했었느니라. 왜냐하면 그 사람이 너에게 거짓말을 했고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는 그 일을 기억하느냐?”

, 하나님, 그 일을 기억합니다.”

그렇다. 너는 거짓말하는 게 잘못이라고 알고 있었느니라. 그렇지 않느냐?”

, 그런 것 같습니다.”

너는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느냐?”

그러면서 주님은 앞에 펼쳐져 있는 책들을 보신다. 그 책에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했던 모든 날짜와 시간과 장소와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모든 거짓말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거짓말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거짓말을 하고도 한번도 회개하지 않았다.”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게 무엇인지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도 기준이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이 위대하신 창조자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그분 앞에 나아와서 용서를 구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배교한 기독교가 복음을 전할 때 회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악하다고 하는 이유이다. 모든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이제 야고보서 4:17을 보자.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곧 그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느니라.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죄란 무엇인가? 한 사람에게는 죄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아닐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죄인 것이 나에게는 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죄라고 생각한 것을 범한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다. 당신의 죄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죄를 지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당신이 밀림 속에 살고 있든, 4층짜리 저택에 살고 있든 당신은 그 죄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당신은 죄문제를 해결했는가?

 

만일 당신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냥 덮으려고 한다면 당신도 아담이 동산에서 했던 것과 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한다면 당신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한 것이다.

 

“(율법이 올 때까지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 5:13-14)

 

당신은 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먹지는 않았다. 당신은 아담이 지은 죄와 같은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당신은 누군가를 죽인 적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죄라도 지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죽을 것이고, 그 죽음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당신은 회개한 채로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아니면 죄는 회개해 본 적도 없이 자기 의로 가득 찬 채로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제 요한복음 3:18-19을 보자. 이것은 약간 까다로운 본문이다. 문맥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계속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계신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요한복음 1:6-9과 비교해 보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더라. 바로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이것은 그 빛(the Light)에 대해 증언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그 빛(the Light)이 아니요 그 빛(the Light)에 대해 증언하도록 보내어진 자더라. 그 빛은 참 빛(true Light)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 대문자 “L”로 시작하는 빛(Light)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다시 요한복음 3:19-21을 보자.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기서 나오는 빛(light)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빛(light)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말하는 빛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어떠한 형태로든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진리의 빛(light)을 주셨을 때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염려하여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오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나오나니 이것은 자기 행위와 또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정죄는 하나님께서 주신 빛을 거부한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빛을 약간 비춰 주셨는데 그가 그 빛을 거부하면 그가 거부한 것이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대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조금 더 빛을 비춰 주셨는데 그가 그것도 거부하면 결국 그가 빛을 거부한 것을 통해 그의 마음 상태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해 주신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을 때, 그들은 빈 무덤을 보며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지만 또 다시 부활을 거부해 버렸다. 그들은 왜 거부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모든 계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정죄를 받았을까? 자신들의 마음속에 비추인 진리의 빛에 대한 자세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정죄를 받은 것이다. 그들이 성경을 얼마나 알든지 모르든지 하는 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능하신 분께서 주신 모든 계시를 멸시하고 거부했기 때문에 정죄를 받은 것이었다.

 


[1] 물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시간이 지나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두 가지 큰 교훈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 충실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둘째, 자신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해도 젊은 혈기를 누르고 인내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 나의 이런 답변에 그들은 자신들이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들 중 두 명은 은퇴한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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