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and Rightly Dividing The Word Reconsidered
세대주의 재고찰
James W. Knox 지음 / 조동훈 옮김
제5장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세상의 죄들을 위해 죽으시고(딤전
충만한 때가 이르러(갈
다음 구절은 그분이 하늘로 돌아가심을 묘사하고 있다. “그분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더라. 그분께서 그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위로 올려져서 하늘로 들어가시니라. 그들이 그분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니라. 아멘.”(눅
사도행전
올리브산 위에 서 계셨던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로 들려 올려지셨다. 그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 모습은 생생히 보여졌으며 훗날에는 반대로 주님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한 모습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술이다. 성경은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고 단순히 말하지 않고 “본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오심은 주님의 가심과 같을 것이다. 주님의 돌아오심은 주님의 떠남과 같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다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는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첫 번째 오셨던 것과는 다르게 재림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어머니를 통해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비유적으로 오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회적 운동이나 혁명 혹은 부흥의 지도자로 오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 안에 거하는 형태로 오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 계셨을 때 입고 있던 그 육신의 모습 그대로 문자적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우리가 자주 살펴보지 않는 스가랴서를 통해서 이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슥
주님의 승천을 말하고 있는 세 개의 성경구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행전
따라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님은 걸어서 동굴 속에 숨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승천했다는 사실을 믿도록 환상을 통해 현혹한 것도 아니다.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몰래 가신 것도 아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쳐다봤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계셨던 것이다.
히브리서
골로새서
다음은 디도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온 오순절 성령님의 임하심으로 성취되었다고 믿는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
요한복음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신 이유와 천사들도 “이 동일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행
첫째, 오심의 방법이 다르다. 오순절에 오신 것은 성령님이지 육신이 아니다.
둘째, 성령님이 오셨고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의 육신 안으로 거하셨다. 그것은 올리브 산 위에 서 계셨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셋째,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을 통해 성경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수 없이 언급했고 이것은 항상 미래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신약성경을 기록한 그 누구도 오순절 사건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넷째,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예언한 그 어떤 사건들도 그 날을 오순절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들을 살펴보면 이 사건들의 그 어떤 것들도 사도행전 2장에서 묘사된 오순절 날에 발생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살펴보면 그 어떤 사건들도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 않았고 오순절 이후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빌립보서
“그 날들의 환난 뒤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자기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마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계
명백히 이것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눈이 주님을 보지 못했으며 해와 달이 어두워지지 않았다. 이 땅의 모든 지파가 주님으로 인해 슬퍼하고 애곡하지도 않았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의 강림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유주의 집단과 장로교 교단에서 가르치는 또 다른 주장은 죄인의 회심이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주장 뒤에는 몇 가지 논리가 존재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전이 되는 신자들의 몸 안으로 들어와 거주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과의 소망이시니라.”(골
우리는 이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한 부분을 다른 진리를 부정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죄인의 회심은 주님의 오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가 사실이다. 첫째, 회개는 예수님이 죄인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예수님께 오는 것이다.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구원은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오시는 게 아니라 죄인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3]
이러한 허무맹랑한 이론에 반대하는 둘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반박했던 논리와 동일하다.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된 사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죄인이 거듭났을 경우에 일어난 것은 없다. 한 사람이 거듭난 순간에 영광스런 몸을 입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 구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구원받는 순간 주님을 만나러 공중으로 들려 올라간다면 어느 누구도 간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혼이 구원받을 때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고 상상해 보자.
죄인의 회심을 주님의 재림과 관련 짓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발생할 것이라는 사건들에 대한 모든 주장을 무시하거나 반대로 설명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을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한 두 개의 성경구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의 무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잘못된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주님의 재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성경적인 가스펠송과 설교 중에 이런 오류를 은연중에 전파하는 자들이 있다.
요한복음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가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내가 막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오신다.” 성경적 관점은 “내가 죽으려고 하는 순간에 나는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께서 계신 곳으로 간다.” 라는 의미이다. 죽음은 주님의 오심이 아니다. 믿는 신자가 그분을 만나러 가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디모데후서
고린도후서
살아서 남은 자들(살전 4장) 조차도 예수님이 오실 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만나기 위해 휴거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스데반이 “나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본다.”고 말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행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또 다른 주장은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시점을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추측한 것으로 보인다. 주님께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허물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재림을 의미하신 것이다. 이 사건들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A.D. 70년경에 부분적으로 일어나기는 했다.
예언되었던 것 중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예언의 성취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제자들이 혼돈스러웠던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여기서 사람들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여기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질문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2,000년에 걸쳐 이 질문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빛은 피로 물들며 별들은 사라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하늘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 모습은 A.D. 70년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3장과 22장을 살펴보자. 우리가 읽으려고 하는 단어들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20년이 지나서 감옥에 있던 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그 도시는 A.D. 70년에 파괴되었다. 요한은 A.D. 90년에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왕좌 앞에 계신 일곱 영과.”(계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계
“다만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붙잡으라.”(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더라.”(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계
“이것들을 증언하신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20년이 지나서 기록된 계시록에서 7번에 걸쳐 성령님께서 요한을 통해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이 파괴된 사건이 주님의 재림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거짓 주장은 기독교의 전파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를 잘못 해석한 사람들이 가르치는 교리이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통해 교회가 지상의 왕국을 확장하며,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왕국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에서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본주의적인 프로그램을 통해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왕국의 점진적인 전파를 가르치기보다는 주님께서 갑작스럽게 다시 오시는 순간 그분의 권능으로 자신의 왕국을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방금 계시록에서 읽은 구절은 다음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마태복음
주님의 다시 오심은 빠르고 실수가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질서를 갑작스럽게 그리고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이다. 20세기에 이 왕국을 이루려는 교회의 실패를 통해 우리는 이런 시각을 가진 대부분의 그룹들이 예정론을 수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계시록
이 모든 성경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교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확대가 왕국을 도래케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예수님의 오심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하러 오신다고 한다는 점에 있다.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완전히 아느니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 같이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에게 임하나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괴로움을 당하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의로운 일인즉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그들은 주의 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로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그분께서 오셔서 자신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믿는 모든 자들 가운데서 칭송을 받으시리니 (이는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너희 가운데서 믿었기 때문이라.)”(살후
이 날은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행복한 날이 아니다.
말라기
교회가 왕국을 도래케 한다는 주장은, 복음전파의 결과로 온 세상이 회심하고 나서야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 더해서 인류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1,000년 동안 복종하고 나서야 주님께서 재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정신 나간 주장이다. 성경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세상은 사악함이 절정에 이른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노아의 날과 같고 롯의 날과 같다. 누가복음
성경은 또한 이 세상 전체가 회심할 것이라는 그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다. 가라지와 누룩, 씨가 떨어진 세 가지의 나쁜 토양, 큰 나무 가지 위에 거하는 새들, 이 모든 것들은 실패를 의미하고 있다. 마태복음
로마서
우리는 로마서
고린도전서
계시록
[1] 현대어 성서에서는 “하늘 위로 올려진다” 라는 부분과 “그들이 예수님을 경배한다” 라는 부분을 누락시키고 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경배뿐만 아니라 아버지 오른편에 올라가셨다는 내용을 강탈하는 것이다. 이런 성서들(예를 들어 NIV 와 NASV)의 독자는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떠나셨을 때 어디로 가셨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기 바란다. “너는 네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분께 경배하라”는 구절을 삭제한 소위 성경이라 일컬어지는 책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중요한 문장을 제거한 것이다.
[2]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스가랴 주석>을 참고하라.
[3] 물론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는 죄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야 구원받을 수 있다.-역주
[4]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위해 서 계시며 스데반의 설교에 유대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렸다는 몇 몇 사람들의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다. 첫째, 이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나 암시가 전혀 없다. 둘째,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회심하려고 했다는 그 어떤 조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스테반을 죽이려고 했다. 셋째,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시대가 존재하지 않고 초림 후에 바로 유대인의 회심, 주님의 재림 그리고 왕국의 확립이 이루어졌다면 모든 왕국의 비유들은 거짓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