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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28 강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제임스 낙스 목사님이 가르친 내용입니다. 저에게 많은 도전이 되었기에 여러분과 이 내용을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구절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꼽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를 제대로 알게되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바꿀 사람도 많이 있을 겁니다. 이 구절은 꼭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많이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구절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알거니와”라는 부분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믿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분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1. 알거니와

다시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을 사랑하고 모토로 삼는 많은 사람들이 문맥과 상관없이 이 구절만 띄어다가 멋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위안을 삼는 것은 슬픈일입니다.

 

먼저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봄으로 이 구절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더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창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썩음의 속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2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전체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제는 “전체 창조물이…신음하며 고통 중에”있고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23절도 보시겠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답니다.

 

26절도 보세요.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문맥의 분위기를 보시면 뭔가 이 세상에서 번창하고 잘되어 가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로마서 8장의 본문은 구원받은 형제와 구원받은 자매가 이 세상에서 어떤 상태로 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땅은 저주 아래있고, 우리가 속한 사회도 저주 아래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가 입고 있는 우리의 몸도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성경은 온 세상이 악함 속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미혹이 더욱 많아 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확실한 뉴스를 한가지 전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누가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선을 이루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도 선을 이루고 있지 않아요.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도 선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의 기록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도 잘못되었고 저기도 잘못되었고 여기도 문제고 저기도 문제고 모든 것이 선을 이루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두통과 아픔과 모든 종류의 고통이 산재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음이 있고 저기에는 산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로마서의 기록자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로마서의 기자는 신음과 고통과 산고와 썩음을 이야기 하다가 왜 우리가 알고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헛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헛된 욕망에 차서 신기루를 쫓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르기 때문에 쾌락을 찾고 있는 겁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이 생에서의 삶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죄짓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몸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몸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일까요? 아무런 차이도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도 나이들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나이들어요. 구원받은 사람의 몸도 연약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몸도 연약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직장 생활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직장 생황에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사람도 직장 상사에게 깨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직장 상사에게 깨집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불쾌한 날을 보낼 때가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불쾌한 날을 보낼 때가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도 직장에서 짤릴 수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직장에서 짤릴 수 있어요. 도대체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차이점은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아무리 직장에서 짤리고 병들고 나쁜 일이 닦쳐와도 이 모든 일들이 지나면 선을 이루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남편과 아내가 죽은 아기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받은 남편과 아내가 죽은 아기의 장례식을 치른다고 생각해 보구요. 둘 다 신음하고 있고 마음이 무겁고 상처를 입었어요.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한쪽 가정은 소망이 있고 다른 쪽 가정은 소망이 없습니다. 한쪽 가정에는 위로가 있고 다른 쪽 가정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둘 다 신음하고 있고 마음이 무겁고 상처를 입었어요. 이들의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한쪽은 소망이 있고 다른 쪽은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차이점입니다.

 

로마서 8:28은 “이제 모든 일이 다 잘될거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서 8:28은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이 변할 새로운 때가 올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칠흙같이 어둡지만 새벽이 되면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27-30 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내가 가서 너희를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에 속한 믿음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함께 싸우며 어떤 일에서도 너희의 대적들로 인해 무서워하지 아니한다 하는 것을 내가 들을 수 있으리라. 그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명백한 증표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표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증표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분을 대신해서 너희에게 주셨나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보았고 또 지금도 내 안에 있다고 듣고 있는 그 동일한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 봅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빌립보 성도들, 여러분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고난이 닦치고 어려움이 몰려오고 실패하게 되면 옅은 미소를 띄며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하, 너 하나님을 믿는다며? 걸핏하면 주님 어쩌고 하면서 기도하는거 같더니 뭐 제대로 안되나 보네? 난 네가 하나님을 잘 믿는 줄 알았지. 항상 성경이 어쩌고 하더니 꼴이 말이 아니구나. 나는 네가 전능자를 믿는다고 해서 뭐 좀 잘 될 줄 알았는데 별거 없구나.’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여러분을 조롱할 겁니다.”

 

이러한 때에 “대적들로 인해서 무서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들 앞에서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실패와 고난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어떠한 고난도 없을 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어떠한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보는 대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어려움을 확신을 가지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처럼 낙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모든 고난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내는 모습을 통해서 보다는 고난을 이겨내는 간증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가고 있을 때에는 누구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눈부시게 비출 때에는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길이 형통할 때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간증도 없습니다.

 

, 빌립보서 4:8에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런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이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실하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의롭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더러운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사랑스런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미움으로 가득찬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세요. 선한 것들을 곰곰히 생각하세요.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 이제 다시 로마서 8:28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뒤에는 선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의롭고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평판이 좋은 것들을 따라가면 결국 선한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각 단계를 지날 때에는 그러한 약속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각 단계를 지날 때에는 고통과 어려움과 낙심과 조롱당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창세기 3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몰랐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선과 악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창 2:17)는 말씀은 들었지만 아직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바른 것과 잘못된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악은 잘못 행하는 것의 결과입니다. 악과 잘못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은 잘못된 행위의 결과입니다. 선은 바른 행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28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바르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행위의 결과와 열매로 선한 것이 올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바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르게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들이 아주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에도,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바른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상태로 남아 있다면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에도 결과와 열매는 선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또 어떤 사람이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5:40). 다른 사람들은 잘못 행하고 세상은 잘못 행해도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되는지 아십니까? 결과는 6:33에 있어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5:39도 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사람들이 당신을 악하게 대하고 이 세상이 당신을 악하게 대해도 여러분은 바르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가 바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반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신사답게 대해주고 선의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의 앞에 펼쳐진 인생길이 장미빛일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인생길은 결코 장미빛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고 어떤 어려움이 닦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바르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바른 행위의 결과는 반드시 선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이제 두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3구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가사를 담은 찬양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40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40은 첫번째 체크 포인트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존귀를 받지 아니하노라. 다만 내가 너희를 알거니와 너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희 속에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계속해서 보세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그를 받아들이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거절하거나 부인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신 것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들의 결과는 지옥인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선이 아닙니다.

 

이제 두번째 체크 포인트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일서 4:19-21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나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우리가 그분께 받았느니라.”

 

복음서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주님께 첫째가는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마 22:37-38) 그리고 그 사람이 돌아서서 가기 전에 주님께서 덧붙이셨죠.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마 22:39)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장면을 자세히 보시면 이 사람은 주님께 큰 명령이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 하나만 했습니다(마 22:36).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 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의 문맥은 바로 마태복음 22장의 문맥과 정확히 같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나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교회에도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와도 교제를 나누지 않고 예배가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쁜 사람도 있어요. 다른 형제와 아무런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교회에도 가지 않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지도 않는다면 그게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만일 혼자만 신앙 생활을 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로마서 8:28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다른 구원받은 사람과 형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형제와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다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교제를 나누지 않고 그 형제를 향해 쓴 뿌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22장과 요한일서 4장을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이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 하기는 너무나도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과 아무런 교제도 나누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입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리가 거짓말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겁니다.

 

다른 형제가 나에게 상처를 줘서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형제가 너무 육신적이어서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너무 따분해서 교회에 오기 싫은게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어서 교회에 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제는 성령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주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교회에 오기 싫은 것이고 다른 형제와 교제를 나누기 싫은 것이고 다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번째 부분인 사랑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혀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가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다른 형제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가 사랑이 없고, 예배가 지루해도 성령님께서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면 그러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다 나쁜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들이고, 다른 형제들이 다 나쁜 사람들이라도, 성령님께서 나를 주관하신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주위의 환경이 아무리 악하고 열악하고 나빠도 성령 충만하여 바르게 행한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다른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제 세번째 체크 포인트를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5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해야할 것이 많이 있나요? 어휴 그런 것들을 힘들어서 어떻게 하나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맞보지 못한 사람은 “어휴 저것도 해야 하나요?”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맞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주님을 위해서 저것을 해도 됩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맞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늘 교회에 가야하나?”하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고 하나님의 사람들고 교제를 나누고 싶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싶어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요한일서 5:1-3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도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 아나니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뿐만 아니라 기쁨과 자원함으로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게 됩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서 주님을 위해서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명령들이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강제로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분의 아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며, 자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이제 다시 로마서 8:28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앞으로 가야할 인생의 길은 항상 좋지 만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이 엉망일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엉망 진창이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고난과 고통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요? 본문에는 “그분의 목적에 따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의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계신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처한 이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갖고 계신지 전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현재 직면한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도대체 내 삶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성경에서 그 목적을 찾아 보겠습니다.

 

일단 바로 다음 절인 29절을 보세요.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의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친히 고난 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히 5:8)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 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주님은 사람들에게 쫓겨나셨고 오해를 받으셨으며 거절당하셨고 비평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바르게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바르게 사셨지만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에 직면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통과하시고 이겨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도 주님과 같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33년 반 동안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주님은 피곤함과 배고픔을 느끼셨고 사람들에게 얼굴도 맞으셨고 친족들로부터 조롱도 당하셨으며 결국 죽음의 고통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고난을 온전히 담당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으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주님을 닮기 원하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위한 대사가 되기 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바람은 바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바람대로 우리도 주님과 같이 되게 해 주실 겁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처럼 온전해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행위와 갈망을 포함한 우리의 전 인격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과 같아지길 원하시며 그렇게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세요? 예수님께서 걸었던 그 길을 우리도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그런 거친 사람들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경험하셨던 그런 고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세요. 이 모든 것들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시면 7절에서 우리는 그분의 피를 통해 죄들의 용서를 받습니다. 9절에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신비를 우리가 알도록 하셨습니다.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자신의 크신 기쁨을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뜻과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때(이것은 영원을 의미합니다)의 경륜 안에서 친히 모든 것 즉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분 안에서 다 함께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세요. 하나님은 오늘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지금 이 순간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큰 그림입니다.

 

우리는 “오 지금 나에게는 너무 큰 문제가 있어.”라고 할지 모르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하니까요.

 

“이것은 충만한 때의 경륜 안에서 친히 모든 것 즉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분 안에서 다 함께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또한 그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이라.”(엡 1:10-12)

 

저에게는 앞으로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되겠지요. 주님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 간다면 상급과 왕관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천사들과 그룹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구원으로 인해서 주님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감사드리는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의 어느날 제가 천년왕국의 백성들 앞에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천년왕국의 백성들에게 저를 소개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마 저의 어깨를 끌어안으시며 천년왕국의 백성들에게 이런식으로 소개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리 오너라 아들아, 내 백성들에게 너를 소개 시켜주마. 백성들이여 들으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인데, 한때는 잃어버린 바 된 자였으나 구원을 받았고 죄가운데 있었으나 구속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저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주님 이번에는 제가 주님을 소개 하겠습니다. 천년왕국 백성들이여 들으라. 여기 계신 이분께서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고 나를 구원해 주신 분이며 모든 위험과 고난과 인생의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내신 분이시다.” 그러면 그곳에 모인 천년왕국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숙여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며 저의 인생에 주님이 해주신 일로 인하여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은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성경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영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영원이 시작된지 수십만년이 지난 어느날 여전히 은혜로 저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영원에서의 그 놀라운 주님의 계획으로 인해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생에서 어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시계를 보시는 것도 아니고 달력을 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보시고 계십니다. 나의 시간표에 의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엄청나게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계산하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면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볼 수 있는 안목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세번째 목적을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을 보세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만약 제가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요한일서 3:5-8을 보세요.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로우며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8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저의 간증을 망치려고 일을 벌일 때마다 제가 주님께 저 자신을 내어드려 마귀를 물리친다면 그것은 마귀의 일들을 멸한 것입니다. 마귀가 저를 죄에 빠지게 하려고 일을 벌일때마다 제가 주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면서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간에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려 나는 바르게 행할것이고 주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한다면 마귀의 일들을 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제 다시 로마서 8:28로 돌아가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단순히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모든 것들이 이 생에서의 안락과 편안함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이 합력하여 선(이것은 결과이고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을 이루느니라.”

 

이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면 내 인생에 닦칠 일들로 인해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큰 고난이 닦치던지 간에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으며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바로잡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느라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네가 처한 상황과 어려움을 바로잡으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여기 내 앞으로 와서 무릎꿇고 성경을 펴라. 그리고 너의 마음을 바로 잡아 온전히 나를 향하게 하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혹시 로마서 8:28을 아직도 가장 좋아하시는 분 있나요? 좋아하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적용은 정확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바르게 적용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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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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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이적, 그리고 기적

2장 고린도전서에 나온 방언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Signs, Wonders And Miracles의 Chapter2: The Corinthian Use of Tongues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성경에 의하면 악을 행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ungodly)”“sinner(죄인)”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부유하고 능력있고 사회적인 위치가 있는 자들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반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악한 세상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을 미혹하며 지옥으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이에 반해 “죄인들”은 보다 단순한 사람들로 삶에 대해 복잡한 계산없이 그저 다수가 가는 대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특별히 하나님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다수의 죄인들과 소수의 경건치 아니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 비해서 죄인들이 가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 비해서 보다 쉽게 주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인도하는 것보다 수월합니다. 반면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강하고 고귀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3. 교회 시대의 마지막 시대인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의 교회와 고린도 교회간에는 유사점이 매우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통해 라오디게아 시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4. 신약성경 구원의 교리가 계시된 로마서를 따라 고린도전서가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의 교리에 맞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온 일들을 흉내낸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5. 고린도전서 1:12에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너희가 각각 이르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 하는도다.” 이 교회는 분열의 영으로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음행이 있었고 세상 법정에 형제를 고소하는 일이 있었으며 우상을 섬기고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주의 만찬에 술취한 채로 나타났으며 여자들은 세상적이었고 이혼이 실행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6. 고린도 교회 내에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권위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문제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제대로된 교제가 있을 수 없었고 혼동 그 자체였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 교회 내에서는 하나님의 권위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7. 우리가 온전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는 이방인들로서 이끌림을 받는 대로 이 말 못하는 우상들에게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깨닫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 이제 선물은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무는 다르나 주는 같으며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되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1-7) 이 말씀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4절에서 같은 성령, 5절에서 같은 주님, 6절에서 같은 하나님. 여기서는 은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1) 모든 사람이 지혜의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지식의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모두 동일한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방언(언어)의 은사도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9.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 12:12-13) 이 말씀에 의하면 다음의 사실이 명백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수술(작용)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인간의 몸의 지체들이 그러함과 같이 서로 다른 기능과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침례를 받고 들어가게 되면 그러한 사실은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4)    이러한 드러남은 각자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사람과 사람마다 서로 다릅니다.

(5)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성령님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 교리입니다.

 

10.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골 2:9)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님도 영접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 5:7)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인격이 하나인 하나님이며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접했지만 성령님은 영접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11. 고린도전서 12:14-27에서는 한 몸의 지체로서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는데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대언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선물들과 돕는 것들과 다스리는 것들과 여러 가지 타언어들이니라.”(고전 12:28) 이것은 교회 내의 다양한 은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사들은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방언(언어)이 가장 나중에 나왔지만 오순절에서 가장 먼저 발휘된 은사는 방언이였습니다. 여기에 나온 은사는 신약교회의 설립과 관련하여 그 중요성의 순서대로 나열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사에는 중요성, 즉 일종의 등급이 있습니다. “오직 가장 좋은 선물들을 간절히 사모하라.”(31절)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면 모든 은사가 다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은 은사(선물)가 존재합니다.

 

12.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1)    방언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았다, 혹은…

(2)    그들은 구원은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성령님(Holy Ghost)이 없다.

(3)    그들은 구원 받고 성령님(Holy Spirit)은 소유하고 있을지 몰라고 성령님(Holy Ghost)은 없다.

(4)  그들은 구원 받고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전혀 능력이 없다.

(5)    그들은 구원 받고 성령님(Holy Ghost)을 소유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님(Holy Ghost)을 잃어버릴 수도 있거나 자신들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같은 주장 중 그 어느 것도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13. “내가 사람들의 언어들과 천사들의 언어들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내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느니라.”(고전 13:1-3) 은사주의자들은 본문에서 말하는 천사들의 언어가 바로 자신들이 하는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늘에서 대화를 나눌 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며 그것은 명백히 히브리어입니다.

 

14.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천사들의 언어들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문맥을 보면 이것은 어떤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산을 옮긴 적도 없고(2절),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 적도 없습니다(3절). 따라서 1절에서 “천사들의 언어들로 말할지라도”라고 한 것은 바울이 실제로 천사들의 언어로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15.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엄청난 일들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라는 동기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동기로 하지 않은 일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 중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나 소망보다 뛰어난 것입니다(13절). 그것은 다른 영적인 은사들 보다 뛰어난 것입니다(8절). 사랑은 우리의 지식보다 뛰어납니다(9-12절).

 

16.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고전 13:4-6) 이 말씀들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도록 하는 교리와 실행, 또 우리가 받은 은사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 보다 우리 자신이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교리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무익한 교리입니다.

 

1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언어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라.”(고전 13:7-8)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방언(타언어)이 언제 사라지는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8.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대언하나 완전한 것이 오면 그때에는 부분적인 것이 없어지리라.”(고전 13:9-10)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부분을 기록할 때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알고 대언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완성되고 나서는 “완전한 것”(신구약 성경 전체)이 있기 때문에 표적과 은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건전한 해석입니다.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이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19. 고린도전서 13:11은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이는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인간이지만 성인으로 성장해야만 합니다. 성장해서 성인의 모습을 갖추는 것을 성경에서는 “온전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에서는 “온전함”을 “죄없음”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12절은 우리의 이해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은혜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생은 부족한 점이 하나도 없는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전혀 부족한 점이 없는 온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구원받은 순간 이러한 점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성경을 알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비로서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게 됩니다.

 

20.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과 교회에 있어서 영적인 은사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은사는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영적인 은사들이 있지만 여전히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일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은사들을 받았습니다(고전 12장).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없으므로 이기적인 방법으로 은사를 사용해 버렸습니다.

 

21. “사랑을 따르고 영적 선물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너희는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라.”(고전 14:1)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한 은사보다 다른 은사를 더 사모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2절) 이것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은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단 한번도 이런식으로 방언의 은사가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 은사를 발휘해서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린도 교회의 성도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발휘함으로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께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없는 재잘거림과 같은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이 결코 아닙니다. 특히 “영 안에서”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영은 성령님이 아니라 인간의 영을 의미합니다.

 

22. “그러나 대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나니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고전 14:3-4) 은사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세워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은사를 발휘한다면 그것은 은사의 바른 사용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은사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세우고 파벌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23. “나는 너희가 다 타언어들로 말하기를 원하되 차라리 대언하기를 원하노니 타언어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가 세움을 받게 하지 아니하면 대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나으니라.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타언어들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대언이나 교리로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리요?”(고전 14:5-6)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방언(타언어)을 하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금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령의 은사를 육신적인 방법이나 자기 자신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지 말고 원래의 목적대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24. “피리나 하프같이 생명 없는 것들이 소리를 낼 때에 음의 구분을 주지 아니하면 피리나 하프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찌 알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요?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한 것을 어찌 알리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리라.”(고전 14:7-9)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하신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유익을 주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는 아무런 유익도 없고 소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25. 고린도전서 14:2에서 육신적인 고리도 교회 성도가 자신은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는 허공에 말하고 있는 것임을 보십시오. 이것은 은사를 바르게 사용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허공이 어떤 존재와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엡 2:2).

 

26.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소리가 있다 할지라도 그 중에 의미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이 되리라.”(고전 14:10-1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야만인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이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27.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 선물들에 열심이 있은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너희가 뛰어날 것을 구하라.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할지니”(고전 14:12-13)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방언을 반드시 통역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방언이 명백하게 언어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방언이 교회에 유익을 주는 유일한 방법은 통역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28. 사실이 이렇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성경을 잘 모르는 어린 그리스도인에게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언을 해야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결국 자신의 체험에만 의지하는, 성장이 원천 봉쇄된 영적 아기들만 만들어내게 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교회의 유익은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세워줄 은사를 구한다면 그 교회와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29.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이해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고전 14:14) 다시 2절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정의에 의하면 이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인간 자신의 영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면”이라고 하는 것도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논쟁을 위한 가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자신이 기도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일 자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닌 자기 자신의 영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0. 또한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은 기도하는 것이지만 이해는 못하여 열매는 맺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알지못하는 방언은 말하는 사람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방언이 자신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약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을 파멸시키고 맙니다. 음행도 기분은 좋지만 혼을 파괴시킵니다. 술도 기분은 좋지만 몸을 완전히 망쳐 버립니다. 기분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바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31. 우리가 앞의 과에서는 성경에 나온 방언을 하는 모든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경우에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이 있었으며, 신약성경 복음의 진리가 이전에는 한번도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말씀의 진리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린도 교회에 와서는 성도들이 야만인처럼 말하거나, 공중에다 대고 말하거나, 성령이 아닌 자신들의 영 안에서 말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32. “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과 함께 기도하고 또 이해하면서 기도하며 내가 영과 함께 노래하고 또 이해하면서 노래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배우지 못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어찌 네가 드리는 감사에, 아멘, 하리요? 너는 진실로 감사를 잘하되 다른 사람은 세워지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너희 모두보다 타언어들을 더 많이 말하므로 내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고전 14:15-19) 알지못하는 언어로 만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섯 마다가 더 낫다는 것이 방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3. 사랑은 스스로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교회의 유익을 구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현대 은사주의 운동이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므로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고전 14:20)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면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화를 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미리 어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34.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으니”(고전 14:21) 율법은 누구에게 주신 것입니까?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들의 민족이 주님 앞에서 번성하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외에 다른 민족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35.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전 14:22) 그러므로 마가복음 16장~사도행전2장, 사도행전 10장~19장, 고린도전서 12장~14장까지의 성경적 정의에 의하면 표적은 유대인 사도들에게 자신들이 증거하는 말씀을 확증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방언을 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모두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한번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지역교회에서 표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36. “그러므로 온 교회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모두 타언어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모두가 대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자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므로 그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또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고 전하리라.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 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그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니라. 대언자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계시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할지니 모든 사람이 배우고 위로 받게 하기 위하여 너희가 다 한 사람씩 대언해야 하느니라.”(고전 14:23-31) 고린도 성도들이 방언으로 말했을 때 아무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도 어떤 위로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해야 배우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보다 대언(예언)이 더 나은 은사인 이유입니다.

 

37.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고전 14:33) 오늘날은 건전한 성경 교리를 견디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찬 사람들은 귀를 간지럽혀줄 그럴듯한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38. “너희의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 만일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니라.”(고전 14:34-35) 성경문제, 방언문제 다음으로 기독교계에서 민감한 주제가 등장합니다. 바로 교회에서의 자매들(여자들)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39.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나왔느냐? 혹은 그것이 너희에게만 임하였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대언자나 영적인 자로 생각하거든 그는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주의 명령인 줄 인정할지니라.”(고전 14:36-37) 성경의 저자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입니다(살전 2:13). 자신이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성령에 의해 인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권고나 추천 사항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다음의 사항들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1)     만일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의미없는 재잘거림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이나 더러운 영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방언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뚜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 어딘 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였습니다.

(2)     만일 통역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방언을 하는 사람이 알려지지 않은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이나 더러운 영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어기는 죄는 결코 범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3)   만일 같은 시각에 한 명 이상의 사람이 방언을 하거나, 혹은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방언을 한다면 그들은 성령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이나 더러운 영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4)     만일 여자가 교회에서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이나 더러운 영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방언(언어)을 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망치려는 사탄의 계략과 관련해서 우리는 어리석거나 무지하지도 않습니다.

 

40. 이제 우리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동안 배운 것을 정리하겠습니다.

(1)  방언(언어)은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2)  방언은 표적을 구하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3)    방언의 표적은 항상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4)    방언은 명백한 언어입니다. 방언은 그것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의미없는 재잘거림이 결코 아닙니다.

(5)    방언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사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내용이 참되다는 것을 방언의 표적을 통해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6)    방언은 다른 성령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연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만일 집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려거든 절대로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방언을 해서는 안됩니다.

(8)    만일 집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려거든 반드시 통역해야 합니다.

(9)    만일 집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려거든 여자를 통해서 하면 안됩니다.

 

41. 이 과를 마치기 전에 에베소서에서 몇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머리로 계신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사도행전과 같이 전환기적인 기간을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교회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표적, 이적, 기적 등이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계시된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고린도전서에 묘사된 사람들의 상태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엡 4:8-16 참조).

 

42. 에베소서 4:8-16을 다 살펴보려면 많은 얘기를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주제와 관련된 것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에베소서의 본문에는 영적 은사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영적 은사들의 목적은 성도들을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본 것을 기억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시는 “온전함”은 성도들 하나 하나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여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열거된 은사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이것들 중 어느 것도 표적이 아닙니다. 병고침이나 통역이나 방언이나 기적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43. 표적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확증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지역교회가 세워지면 필요한 것은 “온전하게 되는 것”, 즉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에 열거된 은사의 목적입니다. 에베소서에 표적으로서의 은사가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44.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은 항상 교리의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리고 거짓 교리에 쉽게 미혹됩니다. 방언의 은사는 거짓 교리와 미혹으로부터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방언을 한다고 해서 미혹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혹이 충만한 이 시대에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끼치려고 한다면 결코 거짓 교리에 미혹되어서는 않됩니다.

 

45. 이번 과를 끝내기 전에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방언인 재잘거림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롬 8:26-27) 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은 해석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알지 못할 때 아무런 의미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마 6:7) 성령님의 중보는 재잘거림이 아니라 오히려 말이 없는 기도요 신음입니다.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46.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그 일에 깨어 있고(엡 6:17-18) 만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이 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면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은 방언으로 걷는 것입니까?(갈 5:16)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에 예수님도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육신이 원하는대로 기도하지 말고 성령님께서 동의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음 과에서는 비야드 운동과 관련이 있는 “영 안에서의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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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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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이적, 그리고 기적

1장 사도들의 표적으로서의 방언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Signs, Wonders And Miracles의 Chapter1: The Apostolic Gift of Tongues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들어가는 말

1. 오늘날 성경에 기록된 특별한 은사를 강조하며 은사주의를 전파하는 책들이 기독교 서점에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책들에서 주장하는 것은 오직 저자들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바른 교리를 붙들고 있는 진영에서 은사주의를 비평하는 책들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책들의 논조는 은사주의자들을 훈계하고 비평하고 조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미 은사주의자들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습니다.

 

2. 우리의 목적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배우지 못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조롱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비방하거나 비판할 의도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서로 간에 증오마 키울 뿐이며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3.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는 은사의 사용이 아니라 은사의 오용이며 은사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말 가련하리만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건 구원받지 못했건 평균적인 기독교인들은 믿음과 실행의 문제에 있어서 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전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4.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 재료 중 하나로 사용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양무리에게 성경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믿는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제 교회는 그저 사람들이 모여서 적당히 좋은 얘기를 나누다가 적당히 즐기는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5. 교리문제와 관련해서 세가지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A그룹 자신들이 믿을 것을 이미 결정해 놓은 그룹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기로 결정해 놓은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고 특정한 구절을 선택하여 인용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의견(교리, 은사 등)을 더 사랑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6. B그룹은 A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성경을 밤낮으로 공부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찾고 인용하는 의도는 A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집에 이단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며 그들과 논쟁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들은 자신들과 조금만 달라도 성경을 펴서 상대방을 정죄하고 비판하려고 합니다.

 

7. C그룹은 이단들의 오류와 거짓 교리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배웁니다. 이들은 단순히 성경을 모르는 자들을 경멸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자신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줍니다.

 

2. 사도들의 표적으로서의 방언

1. 우리 나라 기독교에서는 방언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아무도 알아 을 수 없는 재잘거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방언은 말이며 언어입니다. 우리말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것을 언어라고 번역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강의에서는 편의를 위해서 방언이라는 단어와 언어라는 단어를 모두 사용할 것이지만 모두 같은 것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보시면됩니다. 성경에서는 “알지 못하는 언어”, “이상한 언어”, “다른 언어”, “여러가지 언어” 등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소위 방언의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의 신앙은 전부 이 방언에 기반을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앙생활을 방언에 기반을 두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러한 현상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은 모두 사탄의 역사라고 믿는 사람도 있는 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3. 방언의 문제는 아마도 오늘날 기독교에서 두번째로 논쟁적인 부분일 것입니다(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권위에 관한 것임).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모든 것, 즉 성경은 모두 온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같이 그 성경은 썩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믿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하게 보존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모든 이름보다 더 크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이 어떠한 오류도 없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원본이 사라진지 2천년가까이 지난 시대에 사셨지만 자신이 읽으신 성경이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시며 한번도 본문을 수정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4. 우리가 방언에 대해 공부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올바른 연구를 위한 초석을 놓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성경을 연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전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고전 2:12-13)

(2)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5. 이 두가지 전제조건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은 따로 떼어서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증명하려 해서는 않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특정한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성경 구절만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않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구절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6. 라오디케아 교회시대가 거짓 교리에 빠지게 된 원인은 다음의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성경의 사적인 해석 : 이것은 사람이 성경을 자기의 생각과 경험과 감정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2)    진리를 잘못 적용함 : 이것은 성경에 나온 교리를 그것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를 준비함으로 구원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빌립보 간수와 그의 가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방주를 준비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른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구원받기 위해서 방주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잘못 적용한 것이고 거짓 교리를 가르친 것입니다.

 

7. 마태복음 11:13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침례 요한 까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요한이 과도기적인 기간의 표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까지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사역 기간 중 구약성경의 율법을 강해해 주셨습니다. 예를들면, 율법은 간음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음란한 마음으로 여자를 쳐다보는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율법의 문자에만 국한 되어 있던 생각에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죄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의미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8.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율법과 선지자는 침례 요한 까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요한은 주님이 율법의 성취라고 지목하였습니다.

 

9. 사도행전의 처음 7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후에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더한 침례 요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8장 이전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통해서 어떤 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전파한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이디오피아 내시의 경우 7장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10. 구주께서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세상의 죗값을 지불해 주신다는 놀라운 복음의 메시지는 구약성경 곳곳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회심이전에는 이러한 놀라운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골 1:26)

 

11.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서 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율법과 선지서에 제시되어 있지만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계시해 주실 때까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자기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실 때에 그 영께서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는지 탐구하였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그것들을 수행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수행하였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었는데 그것들은 곧 복음을 선포한 자들이 하늘에서 보내신 성령님과 더불어 이제 너희에게 전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것이니라.”(벧전 1:10-12)

 

12.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기록하기 전까지는 신약성경은 존재할 수 없었고 믿는 자들은 오직 구약성경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약교회가 믿는 교리가 바른 것이라고 증명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사도들과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은 침례 요한이 마침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약성경이 전부였습니다. 동물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라고 2000년이 넘게 믿어온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도들의 입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은혜)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표적과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과도기적으로 그러한 기적과 표적행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14. 이러한 과도기적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방언에 대한 문제가 왜 그토록 혼란스럽고, 논쟁적이며, 위험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방언에 대한 언급은 모두 과도기적인 상황에서만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모두 완성되기 이전의 과도기적인 시기에 신약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방언이라는 은사가 사용된 것입니다. 방언을 비롯한 다른 표적으로서의 은사가 사용되던 시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과 같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신약성경이 아직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5. 방언을 비롯한 은사들은 아직 기록된 말씀으로 무엇을 확증할 수 없는 과도기적인 기간에 주어진 것입니다. 예를들면 방언이 사용된 성경의 문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가복음 16장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아직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임하지 않으셨던 시기.

(2)     사도행전 2장 : 성령님께서 믿는자들에게 임하신 이후에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절하기 이전의 시기(행 7장).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시기 이전의 시기(행 8-10장).

(3)     사도행전 10장 :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향하신 이후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의 시기.

(4)     사도행전 19장 : 침례 요한의 가르침만을 따르고 있는 자들과 관련해서.

 

16. 신약성경의 교리는 과도기적인 다리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과도기가 끝난 이후의 안전한 땅 위에 세워야 합니다.

 

17.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 앞에 앉았을 때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과 마음이 강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그분께서 일어나신 뒤에 그분을 본 자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로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4-18) 본문의 문맥은 명확하게 이러한 기적과 표적이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니라.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을 확증해 주시니라. 아멘.”(막 16:19-20)

 

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복수형)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표적으로서의 은사는 단수, 즉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복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마귀들을 쫒아내는 능력

(2)    새로운 언어들로 말하는 능력

(3)    뱀들을 집어 올리는 능력

(4)    치명적인 것을 마시지만 해를 받지 않는 능력

(5)    병든자들 위에 손을 올리면 그들이 낫게 되는 능력

 

 

19. 주님께서 이러한 능력을 11제자들에게 주신 이유는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기 위함이었음을 명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의 은사는 다섯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은사를 가진 자는 다섯가지를 모두 행할 수 있습니다. 이중 하나라도 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도의 은사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20.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였을 때에 그들이 다 한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더라.”(행 2: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첨이후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행 1:8) 성령님을 기다렸고 주님의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 중 누구도 성령을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성령이 임할때까지 반복해서 찬송을 부르지 않았고 은사를 달라고 헛된 반복을 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해서 모여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21. 선물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받을 자격이 없어도 주는 것입니다. 달라고 조른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은 노동의 대가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도들은 모두 차분하게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달라고 조르거나 떼를 쓸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22.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나고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에 그것이 가득하며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행 2:2-3) 여기서 무엇인지 보일 수 있게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믿는 자들 위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위기가 뜨거웠다거나 더웠다는 표현이 아니라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실제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불의 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불이라는 표현이 나오므로 우리는 실제로 그 다락방에서의 광경을 이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락방에 불이 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3.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장면을 마태복음 3:11에서 말씀하시는 불침례의 성취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침례는 메시야를 거부하는 자들이 불못에 던져져서 그 속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24.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행 2:4)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것은 별개의 두 가지 일입니다. 다락방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동시에 일어났지만 이것은 서로 분리할 수 있는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 “독실한 자들 곧 유대인들이 하늘 아래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아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는데”(행 2: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다윗의 보좌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날을 선택하셔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각국으로 퍼져있던 유대인들을 한데 모아서 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전해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이것은 전할 메시지와 청중의 언어를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26. “이제 이 일이 널리 퍼지매 그 무리가 함께 와서 그들이 자기 자신의 말로 말하는 것을 각 사람이 들으므로 당황해하더라.”(행 2:6) 각 지역으로부터 모인 유대인들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방언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재잘거림을 듣고 놀란 것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란 것입니다. 사도들이 한 방언은 말하는 자신들, 즉 사도들에게 “알려지지(모르는)” 않은 언어였으나 그것을 듣는 청중들에게는 “알려진(아는)” 언어였습니다.

 

26.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기며 서로 이르되,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느냐?”(행 2:7-8) 오순절때 믿는 자들이 받은 방언이 지구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어떤 재잘거림과 같은 언어라고 믿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며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부근의 리비아의 여러 지방에 거하는 사람이고 또 로마에서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와 크레테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이라.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하고”(행 2:9-11)

 

28.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사도들이 한 방언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재잘거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성령님의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은 세번에 걸쳐서 사도들이 한 방언이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 분명한 언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9. 사도행전 2장의 분위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두명의 유대인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절기에, 유대인 청중들에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으로 오신 메시야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과 같은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행하고 있는 사도들에게 유대인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의 메시지입니다. 사도들은 누구도 방언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권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30. 말라기 이후에 기록된 신약성경의 계시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게된다는 교리도 모른채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는 침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와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와 복음서의 침례 요한은 모두 과도기적인 시기에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31. 정리하여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순절에 믿는 자들이 받았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은 말하는 자들 자신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는 청중들에게는 알려진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받은 것은 아니며 믿는 자들 중에는 믿는 순간 이러한 은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이디오피아 내시의 경우). 그러므로 아무도 모르는 재잘거림 같은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거짓 교리입니다.

 

32. 사도행전 2장에 나온 방언은 누군가 방언을 하는 예로는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경우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방언은 유대인 사도들이 자신들의 말을 청중에게 입증하는 표적으로서의 은사인 것입니다. 청중은 이러한 표적으로인해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고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증거하는 자들도 유대인들이고, 청중들도 유대인들이고, 회심한 자들도 역시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침례 요한이 가르친 것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더한 교리로 인해 회심하였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메시지는 과도기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으며 이 메시지가 참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바로 표적과 이적이었습니다.

 

33. 로마서 9-11장에 설명되어 있는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의 초점이 바뀌는 것은 스테반을 기준으로 합니다. 사도행전 8장부터 믿는 모든 이방인들이 이사야 53장에 근거한 주님의 대속에 관한 말씀을 듣고,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디오피아 내시는 아무런 행위도 없이 오직 말씀을 듣고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는 믿고 구원받았고 성령님을 받았지만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도 부활한 예수님을 살아있는 주님으로 부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믿고 나서 성령님을 받았지만 즉시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회심했을 때나 침례를 받을 때 방언을 했다는 기록은 성령 어디에도 없습니다.

 

34.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바뀌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알게 된 것은 신약성경의 구원은 율법에 근거한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은혜에 근거한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36. 사도행전 10:36-43에서 베드로가 고넬료 무리에게 말씀을 증거할 때에도 침례 요한의 가르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더한 내용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 청중들에게 전한 내용과 10장에서 이방인 청중들에게 전한 내용을 비교해 보면 비슷한 면이 있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2장에서는 “회개하고…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행 2:38)였지만 10장에서는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사면을 받으리라.”(행 10:43)였습니다. 성경이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이 과도기적인 책이며 사도행전 내에는 과도기적인 내용이 곳곳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국가에서 개인으로 구원의 초점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37.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7장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돌아서셨고, 8장에서는 이방인 개인이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고, 9장에서는 이방인들의 사도가 부르심을 받으며, 10장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 가정을 방문하게 됩니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대적인 메시지를 전함).

 

38. 사도행전 10:43-48의 내용은 놀라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이방인 가정에 방문했으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아직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것이 바른 일이라는 것, 즉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표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믿었을때와 동일한 일이 벌어짐으로 사도행전 10장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유대인인 베드로가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10:44-48). 사도행전 2장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청중들)을 위해서 표적이 필요했던 것처럼 사도행전 10장에서도 믿지 않는 유대인(설교자)을 위해서 표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완성된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구원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리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신약성경이 없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신약구원의 교리가 표적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믿는자들의 연합에 대한 계시를 받기 전에는 이방인이 유대인과 똑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유대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39.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친족들이 복음을 믿고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을때에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베드로 일행은 고넬료 일가의 방언을 이해할 수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이더라. 이에 베드로가 응답하되”(행 10:46) 사도행전 10:46의 방언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정확히 같은 것으로 듣는 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었겠느냐? 하더라.”(행 11:17) 여기서 말하는 선물은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40. 성경에서 두번째로 나온 방언을 하는 무리들을 살펴본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믿은 이방인 무리가 성령님을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고 유대인 사도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또 믿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로 인해서 매우 놀라게 됩니다.

 

41. 사도행전 19장은 알지못하는 방언을 하는 사람에 대한 성경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기록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이 위 지방들을 두루 다니고 에베소에 이르러 어떤 제자들을 만나”(행 19:1)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지역(예루살렘)에서 선포되었을 때 표적과 이적이 함께하여 복음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입증했습니다. 복음이 새로운 사람들(이방인들)에게 선포되었을 때 표적과 이적이 함께하여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임을 입증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방언의 은사는 신약성경이 없는 상황에서 복음의 진리를 듣는 청중들에게 증표로서 사용되었습니다.

 

4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노라, 하거늘 바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요한의 침례라, 하매”(행 19:2-3) 사도행전 19장의 무리는 아직 복음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상태는 사도행전 2장에서의 유대인들의 상태와 정확히 같았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지역과 거리로 인해서 아직도 사도행전 2장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43. 사도행전 19장의 사람들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보다 알고있는 것이 많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었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믿으라고 계시해 주신 것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 믿는 자들이었지만 신약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아니었기에 아직 구원받지 못했고 거듭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신약성경을 인용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이었으므로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이 맞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44. “이에 바울이 이르되,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여 그들이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하거늘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니라.(행 19:4-6)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있는 곳,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은 사도행전 2장의 상태, 즉 침례 요한의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구약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복음은 비록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서 온전히 계시되기 전에는 그것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입증할 표적과 이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45. 성경에서 방언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은 신약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확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사도행전 2, 10, 19장은 신약성경에 나온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1)    방언은 말하는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언어였다.

(2)    방언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믿는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3)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표적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주어졌다.

(4)    방언은 오직 사도들의 사역과 관계된 것이었다.

 

다음 과에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육신적인 교회로 꼽히는 고린도 교회에서 사용된 방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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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2009.09.23 22:18:02 (*.176.9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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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란 무엇인가?

글 이우진

 

1. “이단(HERESY)”의 정의

이단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이단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5번 나오며 이 5번의 경우를 살펴봄으로 이단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 “이단(HERESY)”의 사전적 정의

(1)    노아 웹스터 사전(Noah Webster’s Dictionary)의 정의 : “A fundamental error in religion, or an error of opinion respecting some fundamental doctrine of religion… In Scripture and primitive usage, heresy meant merely sect, part, or the doctrines of a sect, as we now use denomination or persuasion, implying no reproach.”[1] 이것을 정리하면, 신앙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오류나 신앙의 근본 교리에 있어서의 잘못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단이란, 종파나 파당 교파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국제표준성경사전(ISBE)의 정의 : “It was used not simply for a teaching or a course followed, but also for those devoting themselves to such pursuit, a sect, or assembly of those advocating a particular doctrine or mode of life.”[2] 이단이란, 단순히 어떤 가르침이나 과정이 아닌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교리를 신봉하여 모인 자들을 의미합니다.

(3)    콜린스 코빌드 영어사전의 정의 : “1. Heresy is a belief or action that most people think is wrong, because it disagrees with beliefs that are generally accepted. 2. Heresy is a belief or action which seriously disagrees with the principles of a particular religion.”[3] 이단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4)    에스라 성경사전의 정의 : 이단 파당(Heresy, 선택) – “삶이나 믿음의 선택된 길, 혹은 이런 길을 따르는 학파와 당파. 이에 상응하는 그리스말은 긍정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으며 단순히 부류나 파당을 나타냈다(행 5:17, 15:5, 26:4-5). 그러나 서신서에서 이 말은 나쁜 의미로 믿음과 실행에서 잘못 행하는 무리를 나타냈고(고전 11:19, 갈 5:20, 벧후 2:1) 현재도 잘못된 교리를 지닌 자들을 가리킨다.”[4]

(5)    동아 새국어사전의 정의 : 정통 학파나 종파에 벗어나는 설이나 파벌을 주장하는 일. 기독교에서, ‘정통적 교의나 교파 이외의 교의나 교파’를 이름.[5]

 

2. “이단(HERESY)”의 성경의 예시

(1)      성경에서 이단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부분은 바로 사도행전 24:14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와 교회사에서 단어가 어떻게 사용될지 암시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각하께 고백하오니 곧 나는 그들이 이단(heresy)이라 하는 그 길을 따라 내 조상들의 하나님께 그렇게 경배하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나이다.”(행 24:14) 교회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이라고 불렸습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교회사도 정치적인 권력을 잡은 승자의 기록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권력을 잡은 “교회”가 신약성경의 원칙(마 22:21)에 충실한 교회를 박해하면서 “교회”라는 이름은 자신들이 취하고 참된 교회에게는 “이단”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2)      이단은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정받는 자들이 너희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려면 너희 가운데 반드시 이단 파당(heresies)도 있어야 하느니라.”(고전 11:19) 우리 가운데에도 이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전한 교리를 믿는 교회에도 이단적인 교리를 믿는 사람도 존재합니다. 교회내에 이단적인 교리를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단 파당도 있어야 인정받는 자들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이단은 성경에 기록된 다른 죄들과 마찬가지로 죄이며 육신적인 것입니다(갈 6:19).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heresies)과”(갈 5:20) 이단과 반대되는 개념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갈 6:19-26).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이유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육신적인 방법(감정 등)을 동원한다면 이단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4)      이단적인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damnable heresies)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벧후 2:1) 대부분의 이단들은 유일신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왜곡합니다.

(5)      이단은 다툼을 불러옵니다. 그들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처럼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유익을 주기 보다는 무익하고 헛되며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들은 피하라. 그것들은 무익하고 헛되니라. 이단인 자(an heretic)는 한두 번 훈계한 뒤에 거절하라.”(딛 3:9-10)

 

3. “종파(SECT)”의 사전적 정의

(1)    노아 웹스터 사전(Noah Webster’s Dictionary)의 정의 : “A body or number of person united in tenets, chiefly in philosophy or religion, but constituting a distinct party by holding sentiments different from those of other men. Most sects have originated in a particular person, who taught and propagated some peculiar notions in philosophy or religion, and who is considered to have been its founder.”[6]  철학이나 종교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정서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2)    국제표준성경사전(ISBE)의 정의 : “The word is applied to schools of philosophy; to the Pharisees and Sadducees among the Jews who adhered to a common religious faith and worship; and to the Christians.”[7] 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처럼 공유하는 신앙상의 믿음이나 예배방식에 따라 무리 모임입니다.

(3)    콜린스 코빌드 영어사전의 정의 : “A sect is a group of people that has separated from a larger group and has a particular set of religious or political beliefs.”[8] 자신들의 신앙이나 특정한 믿음에 따라 보다 큰 무리로부터 분리되어 모인 모임입니다.

(4)    동아 새국어사진의 정의 : 저마다 내새운 교리를 좇아 세운 갈래를 이르는 말 / 교파 : 종교의 분파, 종파[9]

(5)    * 참고 : 킹제임스성경에는 cult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노아 웹스터 사전이나 국제표준성경사전에서도 cult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Cult(이교)에 대한 콜린스 코빌드 영어사전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 cult is fairly small religious group, especially one which is considered strange.”[10] Cult는 이상한 교리나 행위를 하는 작은 종교 모임입니다.

 

4. “종파(SECT)”의 성경의 예시

(1)     “이에 대제사장과 또 그와 함께 있던 자들 (곧 사두개인들의 분파(the sect of the Sdducees)가) 다 분노가 가득한 채 일어나”(행 5:17)

(2)     “그러나 바리새파(the sect of the Pharisees)에 속한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이르되,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니라.”(행 15:5)

(3)     “우리가 보매 이 사람은 몹쓸 전염병 같은 자요, 세상 곳곳의 모든 유대인들 가운데서 선동을 일삼는 자며 나사렛 종파(the sect of the Nazarenes)의 주모자인데”(행 24:5)

(4)     “그들이 처음부터 나를 알았으니 만일 그들이 증언하고자 한다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종파(the most straitest sect of our religion)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다 하리이다.”(행 26:5)

(5)     “그러나 우리는 너로부터 네가 생각하는 바를 듣고자 하노니 이는 이 종파(this sect)로 말하건대 그것이 어디에서나 비방을 받는 줄 우리가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행 28:22)

 

5. “잘못(ERR/ERROR)”의 사전적 정의

(1)    노아 웹스터 사전(Noah Webster’s Dictionary)의 ERR(동사)의 정의 : “1. To wander from the right way; to deviate from the true course or purpose. 2. To miss the right way, in morals or religion; to deviate from the path or line of duty; to stay by design or mistake. 3. To mistake; to commit error; to do wrong from ignorance or inattention.”[11] 잘못은 바른 길이나 목적으로부터 빗나가는 것입니다.

(2)    노아 웹스터 사전(Noah Webster’s Dictionary)의 ERROR(명사)의 정의 : “1. A wandering or deviation from the truth; a mistake in judgment, by which men assent to or believe what is not true. Error may be voluntary, or involuntary. 5. In scripture and theology, sin; iniquity; transgression.”[12]

 

6. “잘못(ERR/ERROR)”의 성경의 예시

(1)    성경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잘못되어 이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err)하느니라.”(마 22:29)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성경 기록들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err)하지 아니하느냐?”(막 12:24)

(2)    잘못 행하여 이단에 빠지면 육신적인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도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는 것을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 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error)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롬 1:27)

(3)    물질에 있어서 잘못 행하므로 이단적 교리에 빠질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erred)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 6:10)

(4)    잘못은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 그것을 내세우던 어떤 자들이 믿음에 관하여는 잘못(erred)하였느니라. 은혜가 너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0-21)

(5)    “잘못”은 진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정한 잘못은 특정한 교리(딤후 2:18에서는 부활에 관한 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잘못(erred)하였으니 곧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느니라.”(딤후 2:18)

(6)    잘못은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세대로 인해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항상 마음속으로 잘못(err)하며 내 길들을 알지 못하였도다, 하였노라.”(히 3:10)

(7)    잘못은 피와 관련이 있습니다. “둘째 성막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해마다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잘못(the errors of the people)으로 인해 자기가 드리는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니”(히 9:7)

(8)    성경은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권고(명령)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잘못(err)을 범하지 말라.”(약 1:16)

(9)    잘못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잘못하는 자들을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잘못(err)하는데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죄인을 그의 길의 잘못(error)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을 그가 알게 할지니라.”(약 5:19-20)

(10)         잘못은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헛된 것을 크게 부풀려 말하면서 잘못하며 사는 자들(who live in error)로부터 빠져나와 깨끗하게 된 자들을 육체의 정욕과 심한 방종을 통해 꾀어내느니라.”(벧후 2:18)

(11)         오류나 잘못은 사악한 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에 서있는 자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악한 자의 오류에 끌려 굳건함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들을 미리 알았은즉 저 사악한 자의 오류(the error of the wicked)에 이끌려 너희도 너희 자신의 굳건함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벧후 3:17)

(12)         잘못된 교리는 오류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은즉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이로써 우리가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the spirit of error)을 아느니라.”(요일 4:16)

(13)         특정한 유형의 잘못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이 가인의 길로 갔으며 대가를 바라고 발람의 잘못(error)을 따라 탐욕을 내며 달려갔고 고라의 반역 가운데서 멸망하였도다.”(유 11)

 

2. 이단이 아닌 경우

1. 믿음의 근본적인 사항을 인정하는 경우

(1)    “이단”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신약성경에서 등장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이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단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마치 “교회”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사전적 의미에서 구약시대에도 “교회(광야의 교회)”가 존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행 7:38).

(2)    “이단(이단 교리)”은 구약성경에서는 신비스러운 형태로 감춰져 있다가 신약성경에 계시된 교리(예언)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계시된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은혜로 얻는 구원, 교회에 대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것 등이 있습니다.

 

2. 아직 성장 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1)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방금 구원받은 사람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갓 태어난 아기와 같습니다(벧전 2:2). 아기는 “어린 아이(children)”로 성장하고 어린 아이는 “젊은이들(young men)”로 성장하고 젊은이들은 “아버지들(fathers)”로 성장해야 합니다(요일 2:12-14).

(2)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알아가게 됩니다. 영적인 성장의 단계는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히 5:12-14). 영적 성장의 단계가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지식의 차이는 믿음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믿음의 차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믿음의 방향이 다르다기 보다는 믿음의 깊이가 다름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믿습니다. 아는 것이 다르면 믿는 것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것을 믿는다기 보다는 믿는 정도가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3)    영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교리를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고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그 영적으로 어린 지체를 이단이라고 부를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3. 성경에서 명백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 경우

(1)    성경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 부분에 있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이 이단인 것은 아닙니다.

 

4. 성경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경우

(1)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믿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단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3. 이단이 생기는 원인

1. 모든 이단 교리의 뿌리는 바빌론이며 끝은 적그리스도입니다.

(1)    이 세상의 모든 사교와 이단들의 오류와 거짓된 교리는 그 뿌리를 모두 바빌론에 두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이마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2)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교와 이단들은 적그리스도가 오게되면 그에게 경배하고 그를 섬기며 그가 세상을 미혹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그들이 그 짐승에게 권능을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그와 전쟁을 하겠느냐? 하더라.”(계 13:4)

 

2. 마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1)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직접적으로 온 세상을 미혹하기 전까지 사탄은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진리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고후 11:14)

(2)    마귀는 이단 교리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기도 합니다.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 4:4)

 

2. 거짓 교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거짓 교사들은 이단 교리가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를 터인즉 그들로 인해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들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정죄는 잠자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3)

 

3. 잘못된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상수원이 깨끗해야 집에서 깨끗한 수도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바른 성경에서 바른 교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단적인 교리는 이단적인 성경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오늘날 특정한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수정하고 고치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4. 성경 이외의 것에 권위를 두기 때문입니다.

(1)    모든 이단은 자신들이 신뢰하는 교주나 그의 글을 신성시하며 절대시합니다. 성경이외의 다른 것이나 사람이 성경만큼, 혹은 성경보다 더 신뢰를 받는다면 반드시 이단적인 교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인간의 경험, 생각, 의견 등 그 무엇도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5. 성경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억지로 말씀을 풀면 성경을 왜곡하게 되고 이단 교리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해 그 안에서 말하였으되 그 안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므로 배우지 못하여 불안정한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들도 왜곡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6. 마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1)    강력한 미혹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이단 적인 교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 2:11)

(2)    하나님께서 강력한 미혹을 보내신 이유는 사람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 2:10) “나 또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택하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가져오리니 이는 내가 부를 때에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 눈앞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라.”(사 66:4)

(3)    사람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불의를 진리보다 더 기뻐하며 어둠을 빛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롬 1:32)

(4)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눈이 멀어진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안약을 사서 바른다면 이단적 교리와 오류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계 3:18)

 

4. 이단에 대처하는 방법            

1. 한 두번 훈계한 후에 거절함

(1)    이단인 사람과는 가능하면 길게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들은 피하라. 그것들은 무익하고 헛되니라. 이단인 자(an heretic) 는 한두 번 훈계한 뒤에 거절하라.”(딛 3:9-10)

(2)    그는 이미 마음이 이단 교리에 온전히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핵심적인 사항만 지적하고 바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2. 답변할 것을 항상 미리 준비함

(1)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들을 답변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 3:15)

(2)     항상 준비가 되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말씀에 능숙해 져야 합니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히 5:12-14)

 

3. 이 모든 것들은 온유와 사랑 가운데 행해져야 함

(1)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엡 4:15)

(2)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을 때에는 온유의 영으로 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 6:1)

(3)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상대방이 진리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딤후 2:25)

(4)    말다툼하지 말고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해야 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 3:2)

(5)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엡 6:12)

 

5.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1. 이단에 빠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    우리가 바른 성경을 알고 바른 교리를 아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은혜로 받은 것처럼 올바른 교리를 아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바른 교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2)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는다면 우리도 언제든지 잘못된 교리와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2.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1)    마귀는 온세상을 속이던 자입니다. 여기서 온 세상이라고 한 것은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속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작은 것을 속고 있을 뿐입니다. “그 큰 용 즉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가 내쫓기더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9)

(2)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오류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러한 작업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됩니다. 거울을 한번만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매일 봐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을 제거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1] Noah Webster, Noah Webster’s First Edition of an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Foundation for American Christian Education, 1989년, 907면

[2] James Orr,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 WM.B.Eerdmans Publishing Co., 1980년, 1377면

[3] Collins Cobuild English Dictionary, Harper Collins Publishers, 1999년, 790면

[4] 그리스도 예수안에, 에스라 성경사전, 그리스도 예수안에, 2006년, 336면

[5] 동아 새국어사전, 두산동아, 2002년, 1869면

[6] Noah Webster, 같은 책, 1546면

[7] James Orr, 같은 책, 2711면

[8] Collins Cobuild English Dictionary, 같은 책, 1498면

[9] 동아 새국어사전, 같은 책, 267,2134면

[10] Collins Cobuild English Dictionary, 같은 책, 398면

[11] Noah Webster, 같은 책, 704면

[12] Noah Webster, 같은 책, 7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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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2009.09.03 08:52:24 (*.176.9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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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성장의 세단계.JPG

 

영적 성장의 세 단계

글 이우진

 

본문 :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 그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벧후 3:18)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성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1. 서론

1. 영적인 생명

(1)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죽어있던 영이 다시 살아 나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가 생명이듯이 다시 살아난 영도 생명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은 기형아이며 비정상입니다.

(2)    성령은 은혜 안에서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2:8-9). 즉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거듭나게된 우리는 이제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3)    우리는 거듭나서 새로운 생명과 성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여전히 육신 안에 있지만 우리는 옛 본성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성품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두 성품에 관한 가장 정확한 그림이 바로 갈라디아서 4:28-29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아이들이니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하도다.”

(4)    이 말씀은 여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는 거듭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을 박해한 예는 교회사에서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좀 더 다른 방향으로 적용하면,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는 옛 사람을 의미할 수 있고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는 새 사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영적인 새 사람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방해합니다.

(5)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항상 새 사람이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 순간 이러한 승리는 이미 보장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입니다.

 

2. 영적 성장을 7단계로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

(1)     갓난 아이들(babes) :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고전 3:1)

(2)     어린 아이들(little children) :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요일 2:12)

(3)     아이들(children) : “그 목적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엡 4:14)

(4)     젊은이들(young men) :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요일 2:13)

(5)     아버지들(fathers) :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라.”(요일 2:13)

(6)     장로들(elders) :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7)     나이가 많은 자(the aged) : “도리어 사랑으로 인해 네게 간청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또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갇힌 자가 되어”(몬9)

 

2. 영적 성장의 3단계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라.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라.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라.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며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요일 2:12-14)

 

1. 영적인 출생

(1)    생명은 즉각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듭났을 때 영적인 면에 있어서 장성한 상태로 거듭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씨앗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출생했을 뿐입니다. 육신적인 출생도 아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영적인 출생도 영적인 아기로 출생하게 됩니다. 영적인 새 사람의 모든 기능이 다 드러나기 위해서는 성장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2)    영적인 성장은 사람마다 진행 속도와 성숙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이지만(요 21:16) 다른 사람은 어린양입니다(요 21:15). 영적으로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롬 15:1)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지만 다른 사람은 장성한 경우도 있습니다.

(3)    한 성도에게 있어서 영적인 성장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갓난 아기의 단계”와 “젊은이의 단계”와 “아버지의 단계”입니다.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획일적으로 판단하기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강하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약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지적으로는 무지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한쪽면으로는 아버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면으로는 청년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한쪽으로는 청년 같은 신앙이지만 다른 면으로는 갓난 아기 같을 수도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매번 동일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어떤 사람은 구원받자 마자 바로 쑥쑥 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더디게 성장하지만 계속 자라나서 나중에는 완숙한 단계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늦게 출생했지만 먼저 출생한 자들보다 더 빨리 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 20:16).

(5)    요한일서 2:12-13에 나온 “어린 자녀들”과 “젊은이들”과 “아버지들”은 육신의 나이나 그리스도인이 된 시간의 경과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에 따른 구분입니다.

 

2. 어린 아이들(little children) :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요일 2:12)

(1)    영적인 갓난 아기는 영적인 생명이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육신적인 모습 그대로 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고전 3:1)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그가 언제 구원받았건 상관없이 아직 하나도 성장하지 못한 영적 아기입니다.

(2)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영적인 것들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고전 14:20)

(3)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합니다.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니라.”(히 5:13)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체험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 말씀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면서도 자유롭게 인용할수도 있습니다.

(4)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거짓 교리에 미혹당합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엡 4:14)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5)    영적으로 성장해 나아갈수록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6)    사도 바울이 권면한 것과 같이 빨리 성장하여 영적인 어른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고전 14:20)

 

3. 젊은이들(young men) :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요일 2:13)

(1)     성경은 젊은이들을 힘과 연관짓고 있습니다. “젊은 자들의 영광은 그들의 힘이요”(잠 20:29)

(2)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아버지들처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처럼 의의 말씀에 미숙한 것도 아닙니다.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며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요일 2:14)

(3)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자라게 됩니다. 지식이 자라면 믿음도 자랍니다.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자라면 결국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나니 그것이 마땅함은 너희의 믿음이 심히 많이 자라고 너희 모두가 각각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넘치기 때문이라.”(살후 1:3)

(4)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자기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요 5:38). 하나님의 말씀이 거해야 믿음이 자라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4. 아버지들(fathers) :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라.”(요일 2:13)

(1)    아버지들은 장성한 자로서 주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려운 부분인 단단한 음싣도 소화시킵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히 5:14) 어린 아이들은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요 16:12).

(2)    영적인 아버지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부히 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 3:16)

(3)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리스도인이 된 시간이 오래 되었을수록 영적인 성품이 성숙해지고 은혜 안에서 성장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풍성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영적인 아기의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영적인 아기로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해서 영적으로 성장하여 영적인 청년기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꽤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아버지는 바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만 명의 스승이 있다 해도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낳았느니라.”(고전 4:15) 아이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스승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3. 영적 성장의 방법

1.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네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    곡식 :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과 같으니 그가 밤낮으로 자고 깨고 할 때에 그 씨가 돋아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니 처음에는 잎사귀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뒤에는 이삭 안의 알찬 곡식이라.”(막 4:26-28) 말씀의 씨가 심겨진 마음이 그 말씀에 반응하여 잎사귀가 나고 이삭이 열리고 알찬 곡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 성장으로 대응하면 잎사귀는 “어린 아이들”이고 이삭은 “젊은이들”이며 알찬 곡식은 “아버지들”입니다.

(2)    식물 :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좋은 흙과 태양과 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 3:17)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태양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해가 자기 날개들 안에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떠오르리니 너희가 나아가서 외양간의 송아지같이 자라리라.”(말 4:2) 태양의 빛을 받은 식물은 뿌리를 내릴 뿐만 아니라 태양이신 주님을 향해 세워져야 하며(골 2:7)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합니다(엡 4:15). 또한 식물은 물이 있어야 자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말씀의 물로 씻음받음을 통해 정결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 (엡 5:26)

(3)    어린 아이 : 거듭난 사람은 갓난 아기와 같습니다. 갖난 아기가 우유를 먹어야 하듯이 영적인 갖난 아기 역시 우유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영적인 갖난 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장하여 젊은이가 되고 결국 장성한 사람인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후술함.)

(4)    건물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하나의 건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꼭 맞게 함께 뼈대를 이루어 주 안에서 한 거룩한 전으로 자라가고”(엡 2:21) 전체 그리스도의 몸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건물을 이루는 하나의 벽돌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개인도 하나의 건물과 같습니다. 이 건물을 이루는 벽돌은 베드로후서 1:5-7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과 더불어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의 친절을, 형제의 친절에 사랑을 더하라.”

 

2. 그 안에서 성장해야 할 것들

(1)    은혜 안에서 :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벧후 3:18)

(2)    말씀 안에서 :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마 13:3-8) 돌밭에 뿌려졌다고 비유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 뿌리가 없으므로 시들어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뿌리가 내리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고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이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우유이고 음식이며 고기입니다.

(3)    주님 안에서 :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빌 3:14)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운전하시는 자동차에 탄 것과 같다. 주님의 자동차에 타고 나서도 여전히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의 차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짐을 내려놓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나의 모든 짐은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푯대를 향해 전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 4:1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4)    지식 안에서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서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지식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지식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행함이 없는 지식이 잘못된 것이지만 지식이 없는 행함도 잘못된 것입니다.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행할 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지식이 성장함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고”(골 1:10) 주님께 배워서 주님을 위한 지식을 쌓아야 주님의 멍에를 매고 일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마 11:29) 주님에 대한 지식안에서 성장해야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 3:19)

(5)    사랑 안에서 : 지식은 자칫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사랑안에 있을 때에만 사람을 세워 줄 수 있고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고전 8:1) 모든 지식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진리의 지식은 사랑 안에서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고가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엡 4:15)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1)    옛 사람을 벗어버림 :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교활함과 위선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2)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듣기를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의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연구하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성장을 막는 또 다른 것은 체험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이 아닌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감정은 짧은 순간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만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히 11:6) 또한 믿음은 우리의 감정이 엉망일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게 합니다.

(4)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적당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먼저 거듭난 자들이 갓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잘 달렸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7)

(5)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거짓된 교리를 배웠거나 성경을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벧후 2:1)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결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계속 영적인 어린 아이로 남아 있게 됩니다.

 

4. 권면 및 맺음말

(1)    어떤 사람이 아직 영적으로 어리다고 해서 그를 정죄하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단지 성장기를 거치고 있는 중일 수 있습니다.

(2)    우리가 영적 성장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좀 안다고 해서 우쭐 거리며 우리의 성경 지식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영적 아기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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