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과 비문자적 본문의 해석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8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이번 과에서는 타입(type), 상징(symbol), 비유(parable), 풍유(allegory) 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기법으로 기록된 부분은 문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비문자적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비문자적 본문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9가지 원칙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연구할 때 가장 먼저 할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핵심사항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타입이나 상징이 가르치고자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2. 첫째 원칙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타입이나 상징의 기법으로 교훈을 줄 때에는 가르치고자 하는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입이나 상징의 기법이 사용된 문맥을 볼 때에는 이러한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그 한 가지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특정한 교훈은 대부분 문맥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상징적인 방법으로 서술된 본문의 모든 부분은 특정한 한 가지 진리나 교훈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문은 모두 드러내고자 하는 한 가지 진리나 교훈에 맞춰서 해석해야 합니다.
3. 예를 들면, 씨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가 뿌린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온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12개의 구절이 한 가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한 데 모인 것입니다. 2개의 구절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씨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나머지 10개의 구절은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본문이 한 가지 진리를 여러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둘째 원칙은, 분명하고 평이하게 말씀하시는 본문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반대되는 교리를 타입, 상징, 비유, 풍유 등의 기법으로 기록된 본문을 근거로 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사역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문자적으로 그대로 기록한 본문이 있다면 비유나 상징을 통해서 이것과 반대되는 교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에 있어서는 비유나 상징적으로 기록된 본문이 평이한 문자적인 본문보다 우세할 수 없습니다. 비유나 상징은 문자적인 본문의 부차적인 것입니다.
5. 예를 들면, 성막에서 지성소의 등잔불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등잔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문자적인 본문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은 부분을 지성소의 등잔불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성소의 등잔불은 꺼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은 성막과 지성소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예루살렘에서 친히 빛이 되실 것이며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6. 또 다른 예를 들면, 씨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릴 때, 어떤 씨가 땅에 떨어졌는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습니다. 여기서 공중의 새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의하면 그들은 마귀들이며 사탄을 따르는 더러운 영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을 확장해서 공중의 새가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먹는 것처럼 마귀가 성경을 먹었기 때문에 성경이 마귀의 위 속에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본문의 문맥과 상관없이 그 비유에서 한 부분만 떼어다가 거기서 어떤 사실을 끄집어 내어 성경 그 어디서도 가르치지 않는 특정한 교리를 만들어 가르쳐서는 않됩니다.
7. 이것과 관련하여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 많은 진리가 드러납니다. 이러한 비교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특징이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노아는 방주로 인해서 홍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홍수가 지나고 나자 그에게는 더 이상 방주가 필요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구원받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8. 이와 같이 상징과 모형만을 가지고 교리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상징과 모형은 문자적으로 기록된 분명한 본문의 범위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징과 모형은 이미 문자적으로 기록된 본문이 가르치는 진리를 지지하고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지 독단적으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상징과 모형에만 근거해서 교리를 세우면 추측에 근거한 불안정한 교리가 탄생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원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9. 셋째 원칙은, 어떤 특정한 교리에 있어서 모형과 상징이 유일한 성경적 근거일 때에는 그 교리는 바른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징이나 모형은 평이한 본문을 입증하는 하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이한 본문이 상징이나 모형의 예는 아닙니다. 즉 상징이나 모형이 평이한 본문을 지지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평이한 본문에서 나온 교리를 먼저 공부하고 나서 모형과 상징으로 나아가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10.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마치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되어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평이한 구절을 근거로 교리를 세우고 구약 성경의 모형을 그 일례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구약 성경으로 가서 먼저 교리를 세우면 비성경적인 교리나 나올 수 있습니다.
11. 예를 들어 출애굽 때에는 각 가정마다 양을 잡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한 마리의 특정한 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가정 마다 서로 다른 양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도 저 마다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모두 동일한 한 분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것이지 각 가정마다, 개인마다 서로 다른 구원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평이한 구절을 통해서 교리를 세우고 모형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12. 구원에 관한 바른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다양한 예수와 다양한 구원자가 존재하여 그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가 유일하다는 교리는 성경의 평이 본문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모형이나 상징도 이것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평이한 본문에서 나온 교리가 지지하지 않는이상 모형이나 싱징만을 통해서 교리를 세우면 거짓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13. 성경의 교리는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된 본문 위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나서 상징이나 모형을 통해 그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징이나 모형은 평이한 문장에 근거해서 세운 교리의 예화일 뿐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는 모두 평이한 문장에 근거하여 확정된 것이지 모형이나 상징에 근거하여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14. 비문자적 본문을 해석하는 넷째 원칙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것 이상의 상징이나 모형을 확대 해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눅 10:25-37).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신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진리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반쯤 죽게 된 어떤 사람이 나옵니다(30절). 이러한 사실을 보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는 조화를 이루는 해석입니다.
15. 레위인과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두고 그들이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면에서는 율법과 종교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해석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둘 다 성경의 다른 부분과 충돌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16. 그런데 이런 식의 해석을 계속 해 가다보면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던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즙을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눅 10:33-34) 본문에서 언급된 “기름과 포도주”를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이 “죄사함과 성화”라고 합니다. 또 다른 주석가는 이것이 “구원과 성령”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17.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 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눅 10:35) 어떤 주석가는 본문에서 말하는 “이 데나리온”이 두 가지 예식, 즉 침례와 주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침례와 주의 만찬이 무엇에 대한 지출인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저의 모든 죗값은 치러졌습니다. 저의 죗값을 치르기 위헤서 무엇인가를 더 지불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나 주의 만찬이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18. 어떤 사람은 선한 사라미아인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여관 주인이 성령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관 주인이 성령님이라는 주장은 성령님의 보호아래 있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측면만 빼고고 얼추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해석은 말도 않되는 것이라는 의미임-역자주).
19. 이런 식으로 비유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비유를 통해 많은 새로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면 이 비유 하나만 가지고 “새로운 진리”를 “발굴”해 내어서는 안됩니다. 비유를 통해서 성경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독특한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20. 다섯째 원칙을 살펴보면서 동시에 넷째 원칙에도 해당되는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섯째 원칙은 비유이든 상징이든 평이한 구절이든 간에 단 한 번 언급된 것을 근거로 해서 교리를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1을 보세요. “그때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으리라.” “마치(be likened)”라는 표현에 주목하세요. 이것은 유일하게 이 본문에서만 증거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말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라는 표현은 다른 무엇과 연관해서 설명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21. 계속해서 나머지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들 중의 다섯은 지혜롭고 다섯은 어리석더니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등불을 가져가되 기름을 함께 가져가지 아니하였고 지혜로운 자들은 자기 등불과 함께 자기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더라. 신랑이 더디 오므로 그들이 다 졸다가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오는도다. 너희는 그를 맞으러 나오라, 하니라.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자기 등불을 손질할 때에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졌으니 우리에게 너희 기름을 나누어 주라, 하거늘 지혜로운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그리할 수 없노라. 우리와 너희가 함께 쓰기에 부족할까 염려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된 자들은 그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니라.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나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느니라.”(마 25:2-13)
22. 주님께서 이 비유 전체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실지 알 수 없으니 깨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며 이 비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 나오는 다른 모든 설명들은 “깨어 준비하라”는 한 가지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설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위반한다면 이 해석을 통해 새로운 교리를 창작하게 됩니다.
23.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해석 원칙을 위반해서 각 구절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그들 중의 다섯은 지혜롭고 다섯은 어리석더니”(2절) 이것은 구원받는 전체 사람들 중의 50%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고 나머지 50%는 준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해석이 맞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역자주). 그런데 이런 식의 해석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 중 절반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절반은 준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구절은 없다는 것입니다.
24. 이렇게 2절을 잘못 해석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첫째는 비유가 가르치는 것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13절).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 중 절반이 깨어 있다고 해석해 버리면 비유의 목적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된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있는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 중 절반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과 관련해서 %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2절을 잘못 해석함으로 두 가지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5. 이 비유의 해석과 관련한 일반적인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구원받기 이전에 이 비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비유를 가르치던 사람은 이 비유에 나오는 기름이 성령님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이런 식의 해석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성령님으로 비유하시지 않고 항상 생수를 성령님으로 비유하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순수한 물, 살아 있는 물, 흐르는 물이 항상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26. 이제 기름이 성령님의 상징이라고 가정하고 본문을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자기 등불과 함께 자기 그릇에 성령을 가져갔더라. 신랑이 더디 오므로 그들이 다 졸다가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오는도다. 너희는 그를 맞으러 나오라, 하니라.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자기 등불을 손질할 때에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졌으니 우리에게 너희 성령을 나누어 주라, 하거늘”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그릇은 우리의 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몸(그릇) 안에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다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즉 잘못된 해석은 시작부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27. 계속해서 잘못된 해석방식으로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오는도다.”(6절) 신랑이 언제 온다고 하고 있습니까? “한밤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밤중”은 몇 시일까요? 확실한 사실은 주님의 재림은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임하게 되는데 그러면 전세계가 동시에 한밤중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주님이 오실때를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밤중에 오신다고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 이 비유를 통한 가르침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밤중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주님께서 오실 때 플로리다가 한밤중이라면 호주는 대낮이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밤중에 오신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 해석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28. 계속해서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졌으니 우리에게 너희 성령을 나누어 주라, 하거늘” 만일 이 비유에서 기름이 성령님이라면 다섯 처녀는 성령님을 다 써버린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성령님을 구해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현명한 다섯 처녀도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나눠 “쓰기”에는 부족한 것이 됩니다.
29. “지혜로운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그리할 수 없노라. 우리와 너희가 함께 쓰기에 부족할까 염려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매”(9절) 만일 여러분이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고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누군가가 자신들도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비하고 싶으니 성령님을 소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럴 수 없노라”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구원받았나요?” “예” “저도 구원받고 싶어요. 그래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싶어요. 제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겠어요?” “아니요, 그럴 수 없는데요. 저의 구원자를 당신에게 나눠주면 저와 당신 모두 구원자가 모자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구원자를 나눠줄 수 없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함께 쓰기에 부족할까 염려하노니…”(9절b)
30.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매”(9절c) 기름을 성령님으로 해석하면 성령님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시몬이 이러한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31. 열 처녀의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오실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르치고 있는 한 가지 진리 외의 모든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 나온 것들은 모두 한 가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보충 설명은 여러 가지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32. 누가복음 15:1-2을 보세요. “그때에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그분께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 하더라.” 2절은 “And”로 시작합니다(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생략되어 1절과 2절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두 구절이 별도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2절이 “And”로 시작합니다.-역자주). 2절은 1절과 관련한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죄인들을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33. 이제 3절도 “And”로 시작하면서 비유를 말씀합니다. 즉 3절에서 말씀하시는 비유는 1,2절과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신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 전체를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가 그 중의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가 그것을 찾은즉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눅 15:3-7)
34. 이 비유는 “백명 중에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보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99명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몇 명입니까? 한 명입니다. 그러나 성겨 어디에서도 단 1%의 사람만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전체 인류중 몇 %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면 기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 매우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이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35. 이 비유와 관련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아흔아홉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7절).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아서 의인이 된 사람들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죄인들은 1절과 2절에서 나온 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비유에 나온 회개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일까요?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비유의 해석은 대꾸를 이루지 않습니다. 이 해석에 나온 하나 하나의 부분들을 해석하다보면 이상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36. 계속해서 이어지는 비유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개가 있는데 그녀가 한 개를 잃어버리면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녀가 그것을 찾은즉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불러 이르되,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한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5:8-10)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기쁨으로 받아주시며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37. 이 비유에는 열 개의 동전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한 개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인류 중 90%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일 이렇게 해석을 하면 첫째 비유와 맞지 않게됩니다. 첫째 비유에서는 단 1%만일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이번 비유에서는 10%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몇 %의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혹은 구원받지 못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러한 부분을 해석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38.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동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처음에는 동전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죄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찾지 못하시는 것일까요? 첫째 비유의 목자는 자신의 양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아 헤맸습니다. 둘째 비유의 여인도 자신의 동전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았 헤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즉 해석과 사실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39. 비유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에서 어느 한 부분만 끌어다가 그것을 확장하여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식으로 교리를 만들면 그 교리가 나온 비유와도 맞지 않고 나머지 성경 전체와도 맞지 않는 교리가 나올 뿐입니다.
40. 셋째 비유도 살펴보겠습니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작은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소서, 하니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매 그 뒤 며칠이 안 되어 작은아들이 전부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더니 그가 다 탕진한 뒤에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니라. 그가 가서 그 나라의 국민 중 하나에게 연합하니 그 사람이 그를 자기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니라.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자기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이제 그의 큰아들은 들에 있더라. 그가 오면서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들 중의 하나를 불러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니 종이 그에게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당신의 아버지가 그를 무사히 건강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매 그가 노하여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간청하매 그가 응답하여 자기 아버지께 이르되, 보소서, 이 여러 해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기며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거늘 아버지께서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 즉시 아버지께서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하니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네 것이니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눅 15:11-32)
41. 다시 누가복음 15장의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슈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셔서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러한 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슈였습니다. 이 셋째 비유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데 누군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42. 수많은 주석가들이 이 비유가 첫째 아들은 유대인이며 둘째 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비유는 분명히 유대인들의 구원과 관련하여 많은 부분이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해야 할 점은 이 비유는 그대로 비유로 나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확장해서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확대 해석을 하는 것이며 자칫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다 창녀와 더불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이 생에서 모든 재산을 다 잃게 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는 재산 관리를 잘 했던 사람도 있고 방탕하지 않고 건전하게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확대 해석하여 둘째 아들의 상태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으로 해석한다면 문제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43. 보통 주석가들은 첫째 아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해석합니다. 29절을 보면 첫째 아들이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어느 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는 첫째 아들에 대해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이 실제 이스라엘 민족이나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구절은 없습니다.
44. 저도 타입, 모형, 그림자, 비유, 상징 등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예화로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분명한 구절을 통해서 제시된 진리를 넘어서는 것을 상징이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교사들이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자칫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상상과 추측에 기반한 것을 가르칠 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45. 마지막으로 한 가지 비유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6:1-12을 보세요. “또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는데 바로 그가 자기의 재산을 허비했다는 비난의 말이 부자에게 들리니라. 부자가 그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에 대해 이 말을 듣는 것이 어찌된 일이냐? 네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라. 네가 더 이상 청지기가 되지 못하리라, 하매 이에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내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지도 못하겠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이것은 꼭 목회직을 그만둔 목사들의 말 같기도 합니다.
46.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지 결심하였으니 그러면 내가 청지기 직분을 빼앗길 때에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리라, 하고 이에 그가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다 불러 첫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하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증서를 가져다가 빨리 앉아 오십이라 적으라, 하고 그 뒤에 그가 다른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을 졌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하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증서를 가져다가 팔십이라 적으라, 하였더라. 주인이 (여기서 주인은 영어로는 lord임에 유의할 하세요.) 그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으므로 그를 칭찬하였으니 이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세대에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신데 이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47. “불의한 맘몬으로 너희를 위해 친구들을 사귀라. 그리하면 너희가 숨이 멎을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존하는 거처로 받아들이리라. 가장 적은 것에 신실한 자는 또한 많은 것에 신실하고 가장 적은 것에 불의한 자는 또한 많은 것에 불의하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불의한 맘몬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한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9절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48.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 가능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언젠가는 그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장부를 위조해서 주인에게 빚진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불의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과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결코 복음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49. 그렇다면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는 직장 상사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회사의 채무자들의 부채를 50% 삭감해 주자는 의견을 제출하면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말 것입니다. 직장 상사를 속여서 회사에 손해를 입히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한 짓을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배가 없다면 다리를 불태우지 마십시오. 다시 강을 건너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50. 여러분 중에는 처음 믿고 나서, 혹은 진리를 알고 나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가 나중에 그들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느라 몇 배의 노력을 들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성경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면서 심지어 그들을 저주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 일주일 내로 휴거가 일어난다면 그렇게 모든 관계를 정리해 버려도 상관없을 겁니다. 일주일 안에 휴거가 있어난다면 다른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살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주일 내로 오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관계를 끊었던 그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혹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으라는 것입니다.
51. 이제 여섯째 원칙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자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앞선 과에서 일반적인 원칙들을 살펴보면서 이 부분을 다룬바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어떤 말을 했다면 반드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 중 의도 없이 행해진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하면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며 우리도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말(기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발설된 말은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고 말한 사람의 의도를 의미합니다.
52. 예언서에 나온 하늘을 나는 메뚜기 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헬리콥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기록한 기록자는 헬리콥터라고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헬리콥터라고 기록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50년을 제외하면 누구도 헬리콥터가 무엇인지 개념자체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3. 병거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캐딜락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창은 창이지 바추카포가 아닙니다. 예언적 문장을 비유나 풍유로 만들어 놓고 해석해서는 않됩니다. 주님께서 곡과 마곡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곡과 마곡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마세요. 예언에 대해서 책을 쓰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려고 합니다. 예언을 그 시대와 맞춰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시대를 해석해야지 시대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곡은 곡이고 마곡은 마곡입니다. 어떤 사람은 곡과 마곡 중에 하나가 나찌라고 했지만 나찌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소련이라고 했지만 소련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듯 역사에 성경을 맞추려고 하면 틀린 해석을 하게 됩니다.
54. 리비아는 성경에 그대로 리비아입니다. 성경에 나온 이집트는 그대로 이집트입니다. 레바논도 그대로 레바논입니다. 그리스와 로마도 그대로 그리스와 로마입니다. 투발도 그대로 투발입니다. 바빌론도 그대로 바빌론입니다. 유엔이 바빌론은 아닙니다. 유럽연합이나 로마가 바빌론도 아닙니다. 바빌론은 바빌론입니다. 때가 되면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을 해석하기 위해서 억지로 다른 것을 가져다 붙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55. 일곱째 원칙은, 성경의 기록자들이나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때로는 사람들과 논쟁하시면서 진실이 아닌 것을 말씀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8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너희는 이제 배부르고 이제 부유하며 우리 없이 왕처럼 군림하였도다. 너희가 군림하는 것을 내가 하나님께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도 너희와 함께 군림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들이 진짜로 왕처럼 통치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실이 아닌 것을 고린도 성도들의 입장에서 사실인 것처럼 가정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한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일 수 있습니다.
56.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야기 할 때,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경우를 가정하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 사람의 이해를 위해서 그러한 가정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를 할 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가정하는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이러한 경우가 나올 때 그 구절을 가지고 교리를 만들면 안된다는 점입니다.
57. 여덞째 원칙은, 비유를 말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눅 18:9) 이것은 “바리새인과 새리의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이며 비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유를 듣는 사람들의 상태는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는 재림이나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이나 그 어떤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58.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꼭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래도 자기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지요.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2) 바리새인은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이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59.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이것은 비유였습니다. 실제로 세리나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는 소리내서 말하면서 기도하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기도에 다른 사람을 언급하면 않된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죄하거나 의롭다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마음의 상태와 그것을 평가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0. 아홉째 원칙은, 주님의 비유중 어떤 것은들은 예언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겨자씨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것이 큰 나무가 된 것은 복음이 많이 전해져서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 위에 있게 되는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공중의 새들은 더러운 영들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한 것이라면 거기에 더러운 영들이 함께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예언적이기는 하지만 그 비유 하나만으로는 어떤 교리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 비유는 다른 평이한 문장에 근거해서 세운 교리의 지지를 받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61. 예언적 성격을 갖는 비유라 할지라도 그 비유 하나만으로 특정한 교리를 만들 수는 없으며 반드시 다른 평이한 구절에 근거한 교리와 일치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들은 더러운 영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과는 관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의와 관련된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왕국과는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왕국은 폭력과 관련이 있는 물질적인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유를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온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긍정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서는 않되고 반대로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비유를 해석하게 해야지 비유가 성경을 해석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62. “귀를 기울이라. 보라,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에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공중의 날짐승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즉시 싹을 내나 해가 돋은 뒤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시들어 버렸고 더러는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지매 가시나무가 자라서 그것을 숨 막히게 하므로 열매를 내지 못하였고 다른 것은 좋은 땅에 떨어지매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 얼마는 삼십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백 배를 내었느니라, 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그분께서 홀로 계실 때에 그분 주위에 있던 자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에 대하여 그분께 여쭈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비유로 행하여졌나니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사 언제라도 그들이 회심하여 자기 죄들을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하느냐? 그러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느니라. 길가에 있는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이 뿌려질 때에 듣지만 즉시 다가오는 사탄에게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겨 버리는 자들이니라.”(막 4:3-15)
63.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마귀의 방해가 없어도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씨는 좋지 않은 땅에도 뿌져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좋은 땅에만 전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낭비하지 않고 우리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자는 좋은 땅이건 나쁜 땅이건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64. 계속해서 이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그와 같이 돌밭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나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만 견디다가 후에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즉시 실족하는 자들이요,”(막 4:16-17)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거짓으로 믿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들었고 관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가 싫어하거나 직장 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끝내 구원받기를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복음에 잠깐 관심을 갖고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금방 시들해 지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65.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좋은 땅뿐만 아니라 나쁜 땅에도 씨를 뿌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주말 내내 2천부의 전도지를 사람들에게 건내주었는데, 그들이 모두 전도지를 읽지도 않고 쓰레기 통에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가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전도지를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해서 우리가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이 잘못된 일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땅에만 골라서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땅이든 나쁜 땅이든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66.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정욕이 들어와 말씀을 숨 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니라.”(막 4:18-19)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주님을 섬기기 보다는 돈을 버는 것이 시간을 제대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오락을 하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 보다는 다른 취미 생활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주님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고 더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숨 막히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67. 구원받고 신앙 생활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부류의 신자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투쟁과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직장이나 가족의 문제, 혹은 그 무슨 형태로 나타나든지 간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면 세상이냐를 놓고 갈등을 하고 마음 속에서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 중에도 결국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일부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면 항상 모든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처럼 좋은 결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한 사람들이 세상으로 가버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섬기고 주님의 농장에서 수고해야 합니다.
68. “좋은 땅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얼마는 삼십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백 배의 열매를 내는 자들이니라, 하시니라.”(막 4:20)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수고는 언젠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결국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씨를 뿌리면 그 중에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씨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면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주님을 위해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69. 이제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 것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25%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지면 일어나는 4가지 반응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항상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70. 우리는 좋은 땅이든 나쁜 땅이든 가리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뿌리는 씨가 좋은 씨이기 때문입니다. 이 씨는 싹이 나고 자라서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씨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의 씨가 바람에 날려갈 수도 있고 시멘트 바닦에 떨어질 수도 있고 밟에 밟히고 자동차 바퀴에 짖눌리고 비에 젖을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영원을 바꾸는 놀라운 결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71. 우리가 뿌리는 모든 씨가 열매를 맺지는 못할 것이지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꾸준히 말씀의 씨를 뿌린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순종으로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7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한 가지 방법을 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예화도 성경에 나온 것을 사용한다면 두 배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메시지가 있고 예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비유가 바로 예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전할 때 필요한 예화를 성경 스스로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진리와 성경의 예화를 사용하면 청중은 진리를 두 배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73.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청중의 믿음이 여러분의 언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서게 하십시오.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말씀이 말씀을 증거하게 하십시오. 말씀에서 예화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청중의 삶이 말씀 위에 서게 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비유는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가르친 진리를 보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이러한 목적을 알고 그 목적대로 설교 중에 비유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가르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제8과 문맥을 이해하기 위한 4가지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8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는 성경 해석의 원칙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잠언 30:5-6을 보세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라.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터인즉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하노라.” 단 하나라도 불순물이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 깨끗하고 올바르며 진리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기록된 말씀을 바꾸지 않고 거기에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서 해석함으로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해서는 않됩니다.
2. 저는 구원받은지 오래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느낌을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하도록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주님의 “인도”로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낌이나 감정이나 생각을 따르지 말고 기록된 말씀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에 순종하세요.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언제나 온전하게 지키고 순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다면 그때가서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의 모든 말씀에 항상 순종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말씀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거룩한 언약” 따위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언약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지키지 않는데 왜 또 다른 언약이 필요한 것일까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다 순종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말씀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결코 새로운 것을 주시지 않을 겁니다. 교회 헌법이나 규칙 따위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4. 우리는 이번 과에서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해석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경 교사들이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가끔 라디오 설교를 듣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곤혹스런 일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수의 라디오 설교자들은 성경에서 한 두 구절 인용하고 나서 자신들이 가르치고 싶은 것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 교수는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개요를 먼저 짜고 나서 거기에 맞는 본문을 찾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면서 가끔가다가 자기가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5. 성경은 단순히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좋은 말이나 문장을 엮어 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꼼꼼하게 연구하면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서로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한 구절만 끄집에 내다보면 처음 기록된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문맥을 벗어난 해석은 청중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항상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하다는 사실입니다.
6. 단어의 올바른 정의는 문장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고, 문장의 올바른 해석은 문단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문단의 바른 해석은 장(chapter)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장의 올바른 해석은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연이나 구원이나 육신 같은 단어들은 매우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상황마다 뜻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7. 문맥을 바르게 이해하는 4가지 원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문화적인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기록하거나 그 기록의 일차적인 대상이 된 사람들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7년에 미국 필라델피아 올랜도에 살고 있는 사람의 문화와 관점이 아닌 타락 전에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재를 나누면서 에덴 동산에서 살던 사람의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인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8. 또 다른 예를 들면, 사사기를 읽을 때 신약 교회의 관점으로 판단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전제가 된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 중에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겪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원수들을 죽이면서 얻는 기쁨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의 뼈를 꺾으시고 이빨을 부러뜨리시며 그들을 지옥의 구덩이로 던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내용을 담은 시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들은 신약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릴 때 부르는 찬송으로 적절하지 않은 가사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읽은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과 비행기 사고로 죽은 사람들, 총맞아 죽은 사람들, 화재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주님께서는 원수들의 이빨을 꺾으시고 그들을 지옥 구덩이로 던져 넣으심에 기뻐하며 이러한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찬양을 부르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문맥의 배경이 된 문화적인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9.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에 올라가 있던 어떤 사람에게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실재했던 역사 속에서 실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던 실재하는 국가에 소속되어 살던 실재했던 사람들의 실재적인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이러한 점들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0. 둘째는 성경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영감받은 한 권의 책으로서 성경에 포함된 모든 책들은 그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각 책들은 죄의 역사, 인간의 역사, 구속의 역사 등에 각각 참여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인간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생기는가에 관해서 나에게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11. 자유주의 목사는 구원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중독으로부터의 치유”에 대해서 설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을 포괄하는 개념의 신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여신이나, 바람, 태양, 달 등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성경에서 한 단어를 인용해서 설교를 하면 그 단어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변질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12.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정의하는대로 가르쳐야지 이 세상이나 헐리우드에서 정의하는대로 가르쳐서는 않됩니다. 예전에 헐리우드에서 일하는 작가들이 파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배우들도 작가들의 파업에 동참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들이 계속해서 파업하고 복귀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줄 모릅니다. 파업이 계속되었다면 이 나라에 다시 부흥의 물결이 흘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들이 TV를 보거나 극장에 가도 영화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어서 볼 것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 까요. 사람들이 죄를 가장 쉽게 배우는 원천이 줄어드는 셈이니까요.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상이 죄를 정의하게 하지 마시고 성경이 정의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이 구원을 정의하게 하지 말고 성경이 정의하게 하세요. 세상이 선행을 정의하게 하지 말고 성경이 정의하게 하세요. 우리는 성경의 문맥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이며, 의는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4. 우리 교회에는 특별하게 정해진 드레스 코드가 없습니다(dress code, 드레스 코드란,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들에서 교회에 올 때에는 이런 옷차림으로 오라고 하는 복식 규정을 말한다.-역자주). 대부분의 교회들의 드레스 코드는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쇼핑센터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는 성경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교단의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대로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문맥에서 정의하는 대로 정의해야 합니다.
15. 셋째는 성경의 책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책이라는 것은 성경에 포함된 66권의 책 중에 하나를 가르키는 것입니다.-역자주) 우리가 연구하는 책이 구약에 속한 것인지 신약에 속한 것인지 또 문맥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이사야서 34장과 로마서 3-4장을 연구할 때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전도서 3장과 골로새서 3장은 서로 다른 전제와 배경 아래서 기록되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고 나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사복음서를 통해서 드러난 계시가 역사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에는 그 책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 책이 구체적으로 가르치려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6. 이제 넷째 원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다시 유대주의로 돌아갈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특정한 책에서 어렵고 혼란스러운 부분을 보면 그 책의 기록 목적에 근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특정한 문맥을 해석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 문맥이 속한 책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7. 로마서는 구속과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로마서는 이스라엘 국가를 어떻게 통치하는지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주의 날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책에는 주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주제의 빛에 비춰서 문맥을 해석해야 합니다.
18.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로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구절들을 떼어다가 그리스도인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주님을 위해서 어떠한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서는 않됩니다. 그러한 것은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문맥은 책의 주제의 빛으로 비춰서 해석해야 합니다.
19. 이 주제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문맥을 연구할 때 그 문맥에 선행하는 문맥은 무엇이었으며 뒤따르는 문맥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에서는 “법(law)”이라는 단어를 60번 이상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자연법”을 의미하기도 하고 “육신적인 법”이나 “영적인 법”을 의미할 때도 있고 “모세의 율법”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또 이 세상 정부의 법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법(law)”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 성경을 문화적인 배경에 근거해서 해석할 때에도 전후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러한 비유가 나오는 문맥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부분으로 시작합니다. 문맥의 시작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행위를 하신다고 정죄하는 부분으로 시작합니다.
21. 여러분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문맥의 앞 부분이 없이 비유 자체만 있다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잃어버린 재산을 끝까지 찾아내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리들 및 죄인들과 식사를 하고 계시고 바리세인들은 주님의 그러한 행위를 문제시하는 문맥임 감안할 때 이것은 주님께서 양이나 동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삼중적으로(세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으므로-역자주) 제시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맥을 보면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2. 이번 과가 시작되고 오랫동안 성경을 찾아 않아서 불만인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마태복음 16:28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23.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7:1-3을 보면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사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광 중에 계신 모습으로 변모하시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 땅 위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습을 직접 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8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맥의 전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8의 말씀은 17:1-3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24. 또 다른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51-52을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자기들끼리 다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살을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빵을 만들고 사제들이 그것을 떼어주면 그것이 내 살이 되리라.” 물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요 6:53-56)
25. 이 말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55절까지는 여기서 의미하는 주님의 살과 피를 문자적인 것으로 이해해도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이 본문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문제는 56절에서 생깁니다. 만일 본문이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냐는 것입니다. 벌써 주님을 먹고 마셨는데 어떻게 자신이 먹고 마신 주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생기는 문제입니다.
26. 요한복음 5:51-55까지는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6절에 와서는 대부분의 해석이 불가능해집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살을 먹고 나서 내가 먹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56절에 이르면 이 본문이 문자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 집니다.
27. 57절을 보면 본문이 의미하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이 구절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57절에서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는 단어가 바로 “같이(As)”입니다. “as”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28.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를 맺고 계신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살을 씹어 먹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믿음과 신뢰에 기반한 관계이기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51-57의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와 같은 관계를 우리가 주님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9.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빵이니라. 너희 조상들이 만나를 먹고도 죽은 것과 달리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시니라.” 문맥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58절에서는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빵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51절에서는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살아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자신의 살이 실제적인 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58절에서는 “이것은”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고 있는 자신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58절에서 말씀하시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57절의 내용 중에 있습니다.
30. 요한복음 6:51-57의 문맥은 “무엇인가를 먹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와 같은 관계를 우리가 주님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들은 그분께서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에 회당에서 말씀하신 것이더라.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들 중의 여럿이 이것을 듣고 이르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 하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이 그것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스스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그러면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려느냐?”(요 6:59-62)
31. 본문의 문맥 자체가 우리를 올바른 해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주님의말씀을 듣고 실족했을까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실족하자 주님께서는 적절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자적인 내 살을 먹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너희가 이해하고 있는데 만일 그러하다면 내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너희가 나의 살을 먹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려느냐?”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작은 빵을 만들어 그것을 주님의 살이라고 우기는 방법을 개발해 내기도 했습니다.
32.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의미는 더욱 분명해 집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63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온 실제적인 빵을 가지고 자신도 그와 같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예화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적인 빵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것 자체만 이야기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까 실제적인 빵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적인 빵을 먹고 실제적인 생명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결국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빵을 먹으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그 영적인 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3. 다시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부터 계속해서 거듭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살을 먹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거듭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정한 진리를 믿으면 영적인 출생을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34. 요한복음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레 3:17). 사도행전에서는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역시 그것은 주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행 15:20). 성경에 의하면 가나안의 이교도들은 피를 마시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의 문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짓인 실제적인 사람의 피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35. 예수님의 실제적인 살을 먹고 구원을 받는 다고 하는 거짓된 해석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를 가진 것을 봐도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문화와 성경의 문맥 모두 올바른 해석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 억의 천주교 신자들은 왜 거짓된 해석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종교에서 성경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종교에 있어서는 충실한 추종자가 되기 위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36. 성경을 읽지 않으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로마 카톨릭 신자만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침례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침례교인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카톨릭이나 침례교회나 차이가 없게 됩니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같은 시스템이 됩니다. 물론 교회를 꾸민 장식도 다르겠지만 그런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지요.
36. 골로새서 2:18-20을 보세요.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보지 아니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우쭐대며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머리로부터 온 몸이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 이것은 매우 이상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37.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질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골 2:21-22) 이것은 문맥을 잘 살펴보지 않는다면 오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런 원칙도 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경고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정죄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38.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더 이상 그런 육신적인 것들을 규제하는 원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육신을 제어할 수 있는 윈칙이 필요합니다. 문맥을 보지 못하면 성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39.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 2:23) 육체를 제어하고 육신을 만족시키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참된 생명 없이 그러한 규칙들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육신적인 일들을 제어하고 육신을 만족시키지 않는 규칙과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참된 생명도 없고,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입니다.
40. 두 가지 극단을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없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가르침이나, 교회에 올 때에는 정장을 입고 와야 되고 셔츠도 요란한 것을 입으면 않되고 머리 모양은 어떠해야 하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않되고 하는 가르침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두 가지 극단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41. 문맥의 앞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골 2:13-17) 한 쪽 편에서는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어떤 규칙이나 원칙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42. 이제 다른 쪽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3:1-4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느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나의 생명과 기쁨과 실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43. 이제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그것들은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음행” 이것은 규칙에 대한 것입니다. 여자에게 손을 대지 마십시오. 남자에게도 손을 대지 마십시오. 서로에게 손대지 말고 입술도 대지 마십시오. 눈도 조심하십시오. 만일 결혼하지 않았다면 결혼하기 전까지 혼자 사십시오. “부정함” 깨끗하지 않은 것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읽지도 말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5절의 말씀은 하지 말라는 금지의 말씀입니다. “무절제한 애정” 이것은 자신의 아내나 남편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대부분의 경우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여러분의 능력을 돈을 버는데에만 사용하십니까? 여러분의 능력을 왜 영적인 일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영적인 것보다는 돈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며, 왜 성경보다는 은행잔고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까?
44.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골로새서의 문맥에 의하면 저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어떤 규칙이나 원칙을 지킬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저의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인해서 저는 만지지 않고 맛보지 않고 손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원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문맥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지 않는다면 그곳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엄마나 목사님이 가지 말라고 해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45. 골로새서 3:5에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간증을 파멸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고 거듭나고 나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규칙도 필요없게 됩니다. 성경에서 아무런 경고의 말씀도 없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자리는 가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이라면 결코 하지 않게 됩니다.
46. 골로새서에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아무런 규칙이나 원칙도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떠한 규칙에도 억매일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골로새서는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남편을 사랑한다면 기쁨으로 남편을 섬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내를 사랑한다면 기쁨으로 섬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국가를 사랑한다면 기쁨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쁨과 자원함으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각 책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아도 기쁨가운데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47. 성경을 연구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는 방법은 문맥의 전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섬기는 입장에 있으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섬김을 받는 입장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쁨으로 받게 되고 그 어떤 것도 어렵거나 힘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짐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성경의 지침들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들입니다.
48. 우리는 잘 모르는 길을 찾아갈때 네비게이션을 이용합니다. 네비게이션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가야할 길을 안내해 줍니다. 아무도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속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지침들도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속박하려는 것들이 아닙니다. 네비게이션의 목적이 사용자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안내하는 것인 것처럼 성경의 목적도 그리스도인을 주님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로 안내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을 속박하려는게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도와주는 책이지 짐을 지우는 책이 아닙니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은 운전자가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지 불편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온 경고의 말씀들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49. 이제 “참조 구절(cross reference)”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한 부분과 비교함으로서 두 부분 모두 더욱 의미가 분명해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조 구절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적인(verbal)” 참조 구절입니다. 이것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구절에 나온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포함한 구절을 참조 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단어나 표현이 사용된 구절을 참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희생, 하나님의 왕국, 하늘의 왕국, 사십 일, 심판 등의 단어를 연구할 때 같은 단어나 표현이 사용된 성경의 다른 구절을 찾아서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50. 문자적인 참고 구절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명백한 문자적인 참조 구절(apparent verbal cross reference)”이 있고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real verbal cross reference)”이 있습니다. “명백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이라는 것은, 두 구절이 정확히 같은 형태의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구절의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희생”이라는 단어를 보면, 신약 성경에서는 입술의 열매를 의미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구약 성경에서는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에 있는 두 구절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heart”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심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51. 반면에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같은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두 구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Ark”라는 단어는 방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언약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구 사전에서 Ark라는 단어를 찾으면 “명백한 문자적인 참조 구절”과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이 뒤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막의 경우 출애굽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히브리서에서 언급하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두 곳에서 구절을 뽑아서 비교하면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조 구절”을 찾아본 것입니다. 성막을 공부할 때 출애굽기에서 시작해서 히브리서의 관련 구절을 찾아보고 다시 레위기로 갔다가 히브리서로 돌아와서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막의 영적 의미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참고 구절”은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52. 둘째는, “개념적인 참조 구절(conceptual cross reference)”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개의 본문이 서로 같은 개념과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입니다. 히브리서 2장과 빌립보서 2장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계시록 20장은 모두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개념적인 참조 구절입니다. 개념적인 참조 구절의 가장 큰 예가 바로 4복음서입니다.
53. 셋째는, “평행적인 참조 구절(parallel cross reference)”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의 생애는 사도행전에 많은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에서도 그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 살펴볼 때 사도행전과 빌립보서를 모두 살펴봐야 합니다(빌립보서의 경우 아마도 3장 앞부분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임-역자주). 이렇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연구할 때도 여러 본문을 살펴봐야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기와 역대기, 그리고 시편을 동시에 연구해야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정확히 같은 단어나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본문을 “평행적인 참조 구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54. 만일 어떤 구절이 참조 구절인지 확신할 수 없다면 보다 더 확실한 참조 구절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참조 구절로 빛을 비춰봤을 때 처음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구절이 연구하는 부분의 참조 구절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가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공부할 때 참조구절이 많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을 단 하나의 구절로만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55.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아이가 특이한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히 11:23) 여기서 말하는 왕은 누구이며 또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왜 모세를 숨겨야 했습니까? 히브리서 11:23은 출애굽기 2장이 있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 같이 하면서 견디어 냈느니라. 믿음을 통해 그는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으니 이것은 처음 난 것들을 파멸시킨 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히 11:27-28)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11:27-28이 전부라면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구절들에는 반드시 참조 구절이 필요합니다. 왜 모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 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해서 그는 왕과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려면 참조 구절을 찾아야 합니다.
5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 같이 하면서 견디어 냈느니라.” 이것은 흥미있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10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까요?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이지 아니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왜 피를 뿌렸으며 파멸시키는 자는 누구였는지 출애굽기가 없다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관련 구절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57.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히 11:32) 만일 주님께서 히브리서 기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면 그는 기드온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등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려고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서를 연구하면서 구약 성경에서 관련 구절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58. 히브리서 11장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구약 성경으로 돌아가서 삼손이나 입다의 생애를 찾아 본다면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삼손이나 입다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을까요? 다윗의 경우는 어떤가요? 그가 밧세바와 간음을 할 때 율법의 무슨 조항을 지킨 것인가요? 또 밧세바의 남편을 죽였을 때는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킨 것일까요? 저는 다윗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와 시편을 비교해 보면 다윗이 죄를 짓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그를 용서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59. “그들이 믿음을 통해 왕국들을 정복하기도 하며 의를 이루기도 하며 약속하신 것들을 얻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히 11:33) 우리는 사자들의 입을 막은 것이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것이 누구에 대한 말씀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따라서 참조 구절들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구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고 유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조 구절을 찾는 것은 성경의 한 부분으로 다른 부분을 비추는 것이며 서로 다른 두 부분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60. 성경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찾아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명령에 순종하면 성경의 기록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한 구절을 통해서 전체 그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찾아보고 비교해 봐야 비로서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은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연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한다면 모든 것이 더욱 분명하고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제7과 단어 연구 방법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7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이번과에서는 두가지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단어 연구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는 약속에 대한 말씀의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다른 저자들의 책을 참고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신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얘기하려고 합니다.
2. 제가 다녔던 성경학교에서 사용하던 교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단어를 연구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단어는 생각의 단위이다. 개념의 구조를 채우는 벽돌이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에 있어서 단어를 먼저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첫째 단어는 반드시 성구사전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어떻게 단어가 파생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원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단어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하데스(Hades)에 대한 개념없이 지옥(Hell)을 연구하는데…” 이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신학교에서 원어를 배워야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 교회의 회중도 원어가 없이는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이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원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결국 당신이 있어야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이것은 매우 단순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면서 그것을 읽고 연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역사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고 필사본들도 같은 것을 증언합니다. 성경 연구를 위해서 원어를 찾아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 연구를 위해서 스페인어나 독일어를 공부하지 않는 것처럼 원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어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4. 원어의 의미를 풀어놓은 성구사전 자체가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신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유주의화 된 대형 신학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지지할 영어 성경을 만들고 그 영어 성경을 가지고 다시 그리스어 성구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즉 그리스어 자체로 성구 사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영어 성경을 가지고 성구 사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리스어 성구 사전도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어 성경을 지지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구 사전을 자신들의 성경에 맞게 뜯어 고친 다음 그 성구 사전을 다시 증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짓을 하고도 밤에 잠은 편히 자겠지요.
5. 제가 예를 좀 들어 보겠습니다. “환란(tribulat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고통(distress)”, “괴로움(vexation)”, “재해(affiction)” 등을 의미합니다. 영어 tribulation은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온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라틴어 단어인 trivulum에서 온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채를 쳐서 곡식과 껍질을 분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가치있는 것과 가치없는 것을 분리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묘사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단어입니다.
6. 이 단어의 그리스어 단어를 안다고 할지라도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 단어를 때로는 개개인의 인생에게, 또 때로는 자신이 선택하신 한 민족에게 적용시키며 다양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실 때 그분의 목적은 개인이나 민족을 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좋지 않은 것들을 걸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유익하고 좋은 것들만이 개인의 인생과 민족 가운데 남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복된 진리입니까?
7. 단어의 의미가 여러가지일 경우에는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4:1을 보세요.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법규와 법도를 듣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것을 소유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은 구원받은 신약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혼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사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가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매우 분명합니다.
8. 계속해서 2절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14절도 보겠습니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법규와 법도를 가르치게 하셨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건너가 소유할 땅에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31절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네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곧 마지막 날들에 네가 주 네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면 (주 네 하나님은 긍휼이 많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께서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그들에 대한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9. 이제 다시 “환난”이라는 단어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단어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인생에서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통과 고난을 통과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민족 전체가 고통과 고난을 통과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문맥에 의하면 이 모든 경우가 다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30절에서 “네가(thou) 환난 중에 있을 때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네가(thou)”라는 대명사는 단수를 의미합니다. 킹제임스성경에서 thee, thou, thy라고 하면 단수이고 ye, you, your는 복수입니다. 현대 영어 역본들에는 이러한 구분이 없습니다.
10.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한 국가를 의미할 수도 있고(도시나 국가는 그 안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 지라도 단수로 받음-역자주), 한 개인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언약대로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환난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 마지막 날들에”라는 말씀을 넣으신 것은 이러한 일들은 계속 일어날 것인데 특히 마지막 때에 더욱 그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1. 이 말씀의 개인적인 적용을 예로 들면, 삼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 중에 있을 때 눈먼채로 맷돌을 돌릴때에 그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한 번 만 더 강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자식이 죽었을 때 그의 마음은 찢기고 상했습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그가 다시 주님께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새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그가 믿는 마음으로 주님을 불렀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12. 죄로 인해서 고난당하다가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자비롭게 대해 주시는 것은 민족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죄로 인해서 40년 간 노예생활을 ㅎ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또 다시 죄를 짓고 30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식의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주님의 말씀도 전혀 지키지 않자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70년간 포ㅏ다가 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느혜미야, 예레미야,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가 나와서 주님께 돌아가자고 선포합니다. 백성의 마음이 주님께로 돌아오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회복시켜 주십니다. 대환란도 이러한 역사와 큰 틀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 환란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습니까? 고통, 고난, 재앙 등으로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역사도 같은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란을 통해서 멸하거나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하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키질을 해서 곡식과 껍질을 나누는 것처럼 그렇게 나누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에서 사용한 환란이라는 단어는 문맥을 보면 한 국가나 개인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또 다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4을 보세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긍휼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위로 받을 때 얻는 위로를 힘입어 우리가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자들도 능히 위로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절이 스스로 단어를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보세요.
15. 제가 4절을 다시 읽어볼 테니 잘 들어 보세요.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위로 받을 때 얻는 위로를 힘입어 우리가 어떤 환난 중에 있는 자들도 능히 위로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원래의 구절에서 한 단어를 바꿨지만 뜻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난”이라는 단어를 “환난”이라고 읽었지만 구절의 의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어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같은 구절 내에 동의어를 넣어두신 것입니다.
16. “환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파멸”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환난은 “망치는 것”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시는 대환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1에서는 “큰 환난”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을 예레미야 30:7에서는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환난은 고난이고 고난은 환난입니다.
17. 그러면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고린도후서 1:3을 보세요. “긍휼”과 “위로”라는 단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환난은 끝이 아닙니다. 형벌은 끝입니다. 사람이 큰 흰 왕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죄로 인해서 유죄 선고를 받고 불 호수로 던져지게 됩니다. 불 호수로 던져지는 것이 바로 형벌입니다. 성경적 의미로 본다면 이것은 고난은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 중 고난을 격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 호수에 있는 사람들 중 고난을 격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8. 제가 환난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벌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고난 중에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제 인생 가운데 어려움을 주셔서 제 인생의 결과가 껍질이 아닌 알곡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환난은 고난이며 고통이고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형벌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련(refindment)입니다. 곡식을 추수했다고 해서 바로 식탁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추수한 곡식은 키질을 해서 알곡과 껍질을 분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환난입니다. 환난의 끝은 불속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는 우리가 특정한 목적이 있는 일시적인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9. 이렇게 성경에서는 단어를 스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게 아닌 것처럼 환난 가운데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4:21을 보세요.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여기서 환난을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이 세상의 끝은 결코 아닙니다. 29-31절을 보세요. “그 날들의 환난 뒤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자기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선택 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함께 모으리라.”
20. 대환난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열매맺지 못하는 상태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환난이 끝나면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모든 이방 국가들의 머리 국가가 되며 메시야께서 친히 왕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은 환난을 통하여 모든 더러운 죄를 씻어버리고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할때에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환난의 목적은 파멸이나 망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와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견뎌내고 정금같이 나오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도 같은 결과를 위한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21. 내가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벌주시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어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달콤한 향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과 환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곡식을 구매하실 때 껍질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하늘 나라로 불러올리실 때 우리의 인생에 좋지 않은 것이 가득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고난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22. 곡식이 들판에서 자라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 자란 곡식을 추수해서 창고에 들이는 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 좋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 그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삶 가운데 더러운 죄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삶 가운데 짓는 죄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고난과 환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23. 하나님께서는 화가 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는 모두 용서받았고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느니라.”(히 8:12)
24.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 그것이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여러분의 과거로 인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징계가 아니라 정련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이 악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도 고난 중에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간에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25. 로마서 5:1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과의 화평은 우리의 것입니다.
26. 계속해서 2절을 보겠습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믿는 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7. 3절을 보세요.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안에 서 있으면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삶에서 환난이나 고난이나 고통이 없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징계하시고 괴롭하기 위해서 내 삶 가운데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소유를 환난과 고난 가운데 통과하게 하심으로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28.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우리는 주님께 인내를 달라고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라는 것은 언제나 환난과 짝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인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참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내가 있으려면 무엇인가를 참아내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 무엇인가”는 언제나 고난과 환난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제가 뉴 스머나 지역의 어떤 교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인데 한 젊은 형제가 자신의 기도제목이라면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인내를 주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70세인 형제가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God Forbid)”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이 많은 형제는 젊은 형제가 자신이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9. 로마서 5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를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인내는 좋은 것일까요? 인내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인내의 뒤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30. 더욱 영적이고, 더욱 사랑이 풍성해 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풍성한 사랑과 영적 성숙함은 체험을 통해서 옵니다. 어떤 체험일까요? 그것은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을 통과한 체험입니다. 그러한 체험으로 인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운 고난과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주님의 방법으로 이겨내고 나면 인내와 체험과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갖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 중에 있는 다른 형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시는게 아닌가 의심하면서 주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 형제를 미워해서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해서 주신 것임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형제를 미워해서 환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시려고 환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그런식의 주님의 도움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꼭 필요한 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십니다.
31. 자, 이제 다른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3:15을 베드로전서 4:16, 시편 50:2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스스로 정의하고 있는지 보세요. 먼저 히브리서 13:15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여러분은 찬양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세요? 성경에 의하면 찬양은 주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입니다. 히브리서 13:15은 찬양의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찬양이란, 성경에 의하면 춤을 추거나 팔을 흔들거나 방방 뛰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사용해서 주님께 감사함을 표할 때 여러분은 찬양의 희생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2.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50:23을 보겠습니다. “찬양을 드리는 자는 다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자기 행실을 바르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로다.” 히브리서 13:15에 의하면 찬양은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50:23에 의하면 우리가 주님께 감사를 드릴 때 그것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에 의하면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33. 여러분은 동성연애와 성도착과 도둑질과 거짓말과 살인 등의 죄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마서 1장에 의하면 사람을 이러한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죄가 사람을 다른 모든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롬 1:21).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4.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 제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여러분의 눈이 죄를 지는 것에서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제가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여러분의 귀가 범죄치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릴때 자신이 향유하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망각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한다면 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35. 이제 베드로전서 4:16을 보세요.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그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만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다른 구절이 없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이 구절을 살펴본다 할지라도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는대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3장과 시편 50편에 의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6.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번 과에서 배운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이번 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셨나요?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단어를 공부한다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혼의 양식은 성구 사전이나 원어 사전에 나온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어의 정의를 아는 것은 원어 사전과 관련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정의하고 있으며 우리는 성경에 나온 그런 정의를 찾으므로 단어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정의하는 책입니다. 성경에 나온 단어를 성경에 나온 다른 단어와 비교해 봄으로 우리의 눈은 열리게 되고 진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스트롱 성구 사전의 단어 번호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스트롱 성구 사전에서는 성경에 나온 모든 단어에 고유 번호를 부여하고 있으면 사전의 뒷부분에서 그 고유 번호에 따라 해당 원어를 제시하며 단어를 정의하고 있다-역자주).
37. 제가 다니던 교회 중에는 성경을 연구하기는 하지만 믿지 않던 교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떠나서 독립 침례교회로 갔습니다. 거기서는 성경을 믿기는 했지만 성경을 연구하거나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오늘날 많은 독릭 침례교회의 목사들이 성경을 가르치기 보다는 성경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데 전력하고 있다.-역자주). 저에게 이런 식으로 성경을 가르쳤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이렇게 하세요. 먼저 구절을 읽고 그 다음에는 그 구절에 나온 모든 단어를 종이에 쓰세요. 그리고 스트롱 성구 사전을 펴서 그 단어의 원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잘못 번역된 단어들을 찾아서 표시하세요.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고친 후에 당신이 수정한 구절을 토대로 성경을 연구하세요.” 그들은 저에게 세대주의와 처녀탄생, 구속, 휴거, 재림 등 건전한 교리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에게 성경을 믿는 법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그곳으로부터 나오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38. 이제 남은 한 가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51:10을 보세요.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깨끗한 마음”과 “올바른 영”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1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a broken spirit)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올바른 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상한 영입니다. 이것은 모든 자존심과 자아가 사라진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꺾으셨기(broken)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39.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깨끗한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더러운 영화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더러운 말을 한 번도 안한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바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을 비교해 보면 성경이 스스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0. 다윗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권위와 선하심과 율법과 주님이 백성이 누구인지와 주님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모든 제사와 희생물과 절기와 명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위대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꺽으셔서 상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시자 그의 마음은 깨끗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상하게 하시자 그의 영은 올바른 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성경을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41. 이제 성경의 약속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온 몇 개의 약속만이 전 세계적인 적용이 가능합니다. 성경의 약속들에 대해서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 약속의 규모는 전 세계적인 적인가, 아니면 제한되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2:17). 이 약속은 전 세계적인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42. 둘째는, “이 약속이 개인적인 것인가와 기한이 설정되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8:9-10을 보세요. “그때에 주께서 밤에 환상으로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공격하여 해치지 못하리니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라, 하시더라.” 이것은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지고는 감옥에 있는 수많은 선교사들과 순교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약속은 누구에게나 주신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전생애에 걸쳐서 주어진 약속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여러 번 매를 맞았습니다. 그는 돌팔매를 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 단 하나의 도시에서 단 한 번 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다른 도시와 다른 때에는 적용되지 않는 약속이었습니다.
43. 셋째는, “이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약속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16:31).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44. 성경의 약속에는 대부분의 경우 조건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5의 경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가 조건이고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가 약속입니다. 야고보서 4:8의 경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가 조건이고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가 약속입니다. 모두 위대한 약속이지만 조건적입니다.
45.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성경의 약속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7을 보세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것은 정말 위대한 약속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구절에서 읽지 않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구절의 가장 앞에 있는 “그리하면(And)”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하면”은 접속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구절과 문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6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기도로 주님께 요청해야 7절의 약속이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6절의 조건없이 7절의 약속만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46. 19절을 보세요.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이러한 약속의 말씀도 조건이 있습니다.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나눈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 본문에 의하면 “나누는 것(communication)”은 “주고 받는 일(giving and receiving)”입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그리고 또 다시 내 필요를 위해 보내었느니라.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를 바라노라.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
47. 바울이 하고 있는 말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희생적이고 지속적으로 교회의 선교사역을 돕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9절의 약속은 14-18절의 조건이 있었기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선교 사역에 대한 희생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지원을 한 자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19절의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있는 약속이며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48. 넷째는, “이 약속을 나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 이상한 일들을 합니다. 그들은 동물의 뼈나 곡식을 가지고 점을 치기도 합니다. 또 추수감사절에 동물의 뼈를 부러뜨리면서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에 이러한 것을 하며 소원을 빈다.-역자주). 이 밖에도 이상한 행위를 하며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펴고는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서 그 구절이 약속하는 것이 자신에게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이상한 행위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49. 하나님의 뜻과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 저 구름을 통해서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오랫동안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어느날 구름의 모양이 마치 영어 알파벳 P와 S의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아내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전하라(Preach Salvation)’고 말씀하셨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남자는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아무도 그의 교회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남자는 죽어서 하늘에 갔고 거기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설교자로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라고 하시고서는 아무도 보내주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내가 너에게 PS라고 한 것은 ‘Plow Straight(곧게 파라)’라는 의미였느니라.”
50. 일차대전 당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성경을 통해서 알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도하고나서 바로 성경을 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6:19이었는데 거기에는 “바다”와 “배”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해군에 입대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미해군에 입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5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자신과 상관없는 구절을 가지고 자기에게 적용시키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찾은 구절이 좋은 약속을 하고 있는 경우에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약속들은 모두 그것이 누구에게 해당하는 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52. 마지막으로 두 구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창세기13장과 골로새서 3장입니다. 먼저 창세기 13:14-15를 보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나 갈라선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제 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주리라.” 이것은 위대한 약속입니다. 이제 골로새서 3:1-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53. 우리가 방금 살펴본 창세기 13장과 골로새서 3장은 모두 위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두 약속은 서로 다른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이고 이 땅에 속한 약속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약속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둘 중에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한 영적인 약속이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모든 “삼박자 축복” 같은 것들입니다.
54.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약속된 승리는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이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오 주여, 일어나소서.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광대뼈를 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이를 부러뜨리셨나이다.”(시 3:7) “네가 모든 백성들보다 더 많이 복을 받아 너희 가운데 남자와 여자와 너희 가축의 수컷과 암컷 중에 수태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또 주께서 모든 병을 네게서 제거하사 네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어떤 악한 질병도 네게 두지 아니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그것들을 두시리라.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넘겨줄 모든 백성들을 소멸시키되 네 눈이 그들을 불쌍히 보지 말라. 너는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 7:14-16) 가끔 이러한 말씀이 신약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기를 바랄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말씀은 분명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55. 고린도후서 10:4을 보세요.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여기서는 구약 성경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물질적인 것이고 우리의 전쟁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은 문맥을 살펴보고 그것이 전 세계적인 것인지, 기한이 있는 것인지, 조건이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제6과 분명한 구절 중심의 해석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6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거의 사라진 시대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청중들도 거기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성경적인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저는 수년에 걸쳐서 청중들이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게 된 것과 설교자들이 성경을 더 이상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 중 무엇이 먼저였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두 가지 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결과 오늘날 평범한 지역 교회는 더 이상 성경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이전 과에서 계속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게 아니라 성경을 정확히 연구하고 이해해서 오늘날 휩쓸고 있고 배교에 무기력하게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채 단지 주님을 사랑하고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신도들도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열성을 갖고 있기에 그렇게 종교적인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정이나 헌신 외에 바른 성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도 오류에 빠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오류로 인도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문자적 해석이 바른 해석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부분도 나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입니다. 이러한 경우 성경은 “그분께서 비유로 많은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마
4. 그러나 이렇게 영적인 진리들을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경우에도 그 비유의 해석은 반드시 문자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영적인 진리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5. 우리가 살펴본 성경의 해석 방법 중 문화적 해석이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병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는 2000년 대의 자동차 경주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된 당시의 청중이 이애할 수 없는 말이라면 지금의 청중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기록될 당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된 것이며 그 의미를 넘어서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확대해석해서 2천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지금의 상황에 끼워맞추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6. 에스겔 선지자가 곡과 마곡에 대해서 기록할 때 그는 소련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소련을 염두에 두고 예언을 했다면 그러한 예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도 없을뿐더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곡은 미국이 아니고 마곡도 유럽의 경제적 부를 상징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힘을 가지고 있는 모든 그룹을 곡과 마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해석하는 사람의 시대에 따라서 곡과 마곡의 해석이 계속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곡은 곡이고 마곡은 마곡입니다. 미삭은 미삭이고 투발은 투발입니다. 이것을 현재의 상황에 끼워 맞춰서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지도를 보세요. 지도는 항상 변합니다. 성경 기록이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의미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7. 점진적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기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계시해 주셔서 전대의 사람들보다 후대의 사람들이 더 많은 계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전도서의 경우 그 이후에 기록된 다른 신약 성경을 통해서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은 신약 성경을 전도서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며 바른 해석 방법이 아닙니다.
8. 우리는 역사적 해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는 책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올바른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여러분이 초등학교때 사용한 과학 교과서를 여러분의 자녀들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단 한 장(chapter)도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유일하게 올바른 과학 교과서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올바른 역사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지나간 세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책과 과학책은 매 시대마다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으로 이러한 책들을 판단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9. 그리고 우리는 해석과 적용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은 여러 가지로 적용할 수 있지만 그 적용이 해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처녀의 비유를 예로 들면, 다섯은 현명하고 다섯은 어리석습니다. 다섯은 준비가 되어 있고 다섯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과 관련해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0. 오늘날은 성경의 적용은 많지만 해석은 없는 시대입니다. 특히 우리 주위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들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에는 본문의 바른 해석은 없고 적용만 있습니다. 어떤 흥미있는 이야기를 조금 한 후에 성경 본문을 읽고 거기서 청중들에게 긍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뽑아서 적용할 뿐입니다. 이러한 설교로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11. 이제는 “귀납법(The Principle of Induction)”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철학이나 심리학 등 논리를 다루는 학문에서는 귀납적인 논증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본문의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성경 교사는 성경 본문에 의견을 더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서 의견을 끄집어 내는 사람이다.”
12. 믿을 것을 먼저 정해 놓고 나서 성경을 연구하면 접하는 본문이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이 되도록 해석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적절한 성경 연구 방법이 아니고 따라서 주제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결론을 끌어낼 수 없게 됩니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칼빈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중심에 놓고 출발합니다. 칼빈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인데 왜냐하면 칼빈은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제롬에게로부터 전수받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인데 이들은 칼빈이 카톨릭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믿는 사상을 카톨릭을 떠나지 않은 제롬의 이름을 붙여 이야기 하기 보다는 칼빈의 이름을 붙여 이야기 하기를 원합니다.
13. 칼빈이 믿었던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단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고 지옥에 가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아이들과 아내와 친척 중 일부는 구원받기로 예정되었다고 믿습니다. 어떠한 칼빈주의자도 자신의 아이가 예정되지 않았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칼빈주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게되면 성경이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주권적인 은혜”라고 읽게 됩니다. “선택(택함받음)”이라는 말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택함받음)”이 아닌 “개인적인 예정으로서의 택함받음”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라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14. 이에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은 칼빈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유지하는데 행위가 필요하며 따라서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 앞에서 바른 행위가 없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습니다.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에서 누군가가 실족하거나 배교하거나 타락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성경 연구 시작부터 알미니안주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15. 어떤 사람들은 제가 칼빈주의자인지, 혹은 알미니안주의자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그 무엇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칼빈이 맞는 곳에서는 칼빈이 맞는 것이고 알미니우스가 맞는 곳에서는 알미니우스가 맞는 것이고 둘 다 틀린 곳에서는 오직 성경만이 맞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려면 “신학적인 틀(Theological frame)”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틀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나서 무엇을 믿을지 결정해야지 미리 결정하고 나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16. 이단들과 논쟁하는 것은 대부분 시간 낭비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지옥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을 모두 찾아서 두 번씩 보여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리 정해놓은 교리로 성경 구절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교리 체계와 맞지 않는 구절은 다른 설명을 곁들여서라도 그 교리 체계와 맞춰 버리는 것입니다.
17. 여호와의 증인들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실화가 아닌 비유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지 단순한 비유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번 가정해 보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 여기 뜨거운 고통의 장소에서 물 한 방울 달라고 호소하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것이 지옥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게헨나”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게헨나는 뭐하는 곳입니까? 그들은 게헨나가 도시의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이 사람은 그곳에서 고통받고 있으면서 물 한 방울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18. 우리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19.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지옥에 대한 100구절을 보여주고 또 다시 60구절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기로 마음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면 성경의 제단에 올려 놓고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안전한 길입니다.
20. 우리 중 아무도 성경을 처음 읽을 때,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자세로 성경 연구에 접근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성경 연구의 가장 초석이 되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 생각과 다를 지라도 다 믿겠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어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그러한 것은 더 이상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성경이 그러한 것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가르침을 지지 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도 더 이상 그것을 붙들지 않는 것이지요. 먼저 결론을 내리고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결론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귀납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21.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가장 확실한 해석을 선택”하라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머리를 돌아버리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1:3을 보세요.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만일 여러분이 머리가 좋은 교수라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쉽고 분명하게 학생들에게 제시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주제이든지 간에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22. 성경을 70세 노인에게 가르칠 수 있다면 7살 짜리 어린아이에게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단순하게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이 혼란 스러원 한다면 배우는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어렵게 가르친다면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르치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교회의 목사는 항상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목사는 매우 훌륭한 성경 교사일 것입니다. 너무나도 쉽게 설명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치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특정한 주제를 연구할 때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4. 이제 로마서 10:18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참으로 들었은즉, 그것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의 문맥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6절에서부터 보면 이것에 무엇에 대한 말씀인지 분명해 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에 순종하지는 아니하였나니 이사야가 이르기를,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느니라.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메시야께서 죗값을 갚아 주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당시 온 세상에 있던 사람들이 전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소식이 어디까지 이르렀다고 하고 있습니까?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25.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세상 끝”이 로마 제국의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러한 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바울이 선교 여행을 다닌 지역의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말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관련 구절 하나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9:104a을 보세요.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말도 없고 언어도 없으며 그것들의 음성도 들리지 아니하나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아가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해가 떠서 어디까지 지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해가
26. 이렇게 성경의 분명한 해석에 의하면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든 상관하지 말고 성경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관하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관련 구절이 증거하고 있는 것도 무엇인지 보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근본주의 신학교의 교수가 저에게 성경을 정말 문자적으로 믿느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세상 끝까지 복음의 소식이 이르렀다고 한 것을 정말 문자 그대로 믿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저는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는 그 당시에 복음이 실제적으로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골로새서와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고 증언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는 그것을 그렇게 믿으면 않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럼 무엇을 믿느냐고 했더니 그는 가방에서 NASV을 꺼내더니 자신의 성경에는 다르게 나와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 편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듯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것이 성경에 나오면 어떻게 하면 되는줄 아세요? 원하지 않는 것이 나오지 않는 새로운 성경을 구입하면 됩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네요. 그 교수는 성경의 분명하고 확실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니 결국 성경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꿔 버리고 말았습니다.
27. 어떻게 세상 끝까지 복음이 증거될 수 있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28. 하나님은 현명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놀랍도록 현명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매우 지적인 분이십니다. 12사도가 세상 끝까지 가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모든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열두 사도에게 나아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열 두 사람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모든 민족들에서 나온 사람들이 열 두 사람에게 복음을 듣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현명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기록된 그대로 믿으세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지 마세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록된 그대로 두고 그대로 믿으세요. 고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29.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브를 무엇으로 만드셨는지를 놓고 논쟁을 합니다. 이브를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는지, 반쪽(side)으로 만드셨는지를 놓고 논쟁을 합니다. 아담의 반쪽으로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절반은 남자이고 절반은 여자인 채로 만드셨다가 여자인 부분을 떼어냈다고 주장합니다. 여자인 부분은 이브가 되었고 남아있던 남자인 부분이 아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뼈다귀 하나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께서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창
30. 성경 연구는 항상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항상 분명한 부분의 빛에 비춰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흔하지는 않지만 정말 이상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는 구절도 있습니다. 저는 그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구절도 본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 구절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설명하는 사람은 봤지만 성경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그 구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의 의미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31. 고린도전서
32. 그러나 우리는 침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구절은 침례의 의미를 믿는 자가 신앙을 고백하고 순종의 의미로 물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33. 성경에는 침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이 20개가 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고린도전서 15:29 하나를 해석하기 위해서 나머지 20개의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침례에 대한 20개의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하고 분명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29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침례에 대한 유일한 구절입니다. 하나의 구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20개의 구절을 바꿀 필요도 없고 20개의 구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의 구절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의미를 잘 모르는 구절은 그대로 놔두고 의미를 잘 아는 20개의 구절을 믿고 실행하면 됩니다.
34. 죽은 자를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죠셉 스미스도 모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다시 일어나시기 전에 죽은 자들은, 그들이 만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채로 죽었다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을 것인데, 주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나오실 때까지는 그곳을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이 죽은 자들은 모두 지옥에 갔습니다. 이제 갈보리 이후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죽어서 지옥에 갔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셋째 하늘에 계신 주님께로 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35. 죽어서 셋째 하늘에 갔건, 지옥에 갔건 상관없이 침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미 지옥에 간 사람을 셋째 하늘로 보낼 수도 없고 셋째 하늘에 간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 이미 죽은 누군가를 위해서 침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 죽은 사람의 상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29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죽은 사람이 가있는 장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36. 성경에서 비슷한 주제의 본문이 두 개있는데 하나는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면 언제나 분명한 쪽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이나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성경 연구를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에스겔에서는 그룹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에스겔에 나온 그룹을 묘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서로 다 다르게 묘사합니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않은 대로 두고 넘어가야지 그것을 억지로 풀 필요도 없고 또 그러한 곳에서 성경 연구를 시작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스겔을 가지고 신약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구원받고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에스겔이나 다른 선지서로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37. 항상 분명하고 평이한 부분부터 연구하고 이것으로 불확실한 부분을 비춰야 합니다. 요한복음
38. 계속해서 4절을 보겠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매”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거듭남이 일종의 환생이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39. 5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에서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2천년 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침례를 의미하는지,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종교적인 정결례를 행함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말씀의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종교인들은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한복음에는 18개 장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 침례나 어떤 물로 씻음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0.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
41. 어떤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절을 가지고 와서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요
42. 술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술을 마시면 갑자기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예수님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죄인인 점을 지적하면 성경에서 복음에 관한 구절은 아무것도 모르던 그가 갑자기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마
43. 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44. 이제 우리는 “의미의 통일성의 원칙(The Principle of Unity of Sens of Scripture)”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약속의 땅은 항상 약속의 땅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 본 한 단어의 의미를 다른 책에서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다시 재건하실 것이라고 역대기나 선지서에서 말씀하고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도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도시가 신약 성경에서는 의미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45.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받는 것이라면 항상 그런 것입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 믿음이라고 말하면 다른 책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의 책들이 믿음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는게 아닙니다. 성경 내에서는 믿음은 항상 믿음이고 은혜는 항상 은혜이며 사랑은 항상 사랑이고 행위는 항상 행위입니다. 왕좌는 항상 왕좌이고 왕국은 항상 왕국이지 책마다 의미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한 번 사용된 단어는 항상 일관되게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한 책에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가 다른 책에서는 바뀌어 버린다면 결코 성경을 제대로 연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46. 성경에서 어둠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무엇인가 잘못한 것에 대한 법적인 심판의 결과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엇인가 좋은 것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는 어둠이 나쁜 것이다가 다른 곳에서는 좋은 것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한 책에서 빛이 좋은 것으로 나오다가 다른 곳에서는 나쁜 것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번 정의한 것은 일관되게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47.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야와 약속의 땅에 대한 말씀을 처음으로 받았을 때 이해하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요단 강을 중심으로한 땅에서의 번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이 메시야에게 바라던 것은 바로 그들에게 약속한 땅을 회복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불태웠다고 해서 무천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회복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해서 무천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성경에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땅은 현재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임.-역주).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통치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실 것을 성경의 한 책에서 말씀하셨다면 성경이 끝날때까지 그러한 예언의 내용이 다른 것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48.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계획을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에 반해서 어느날 지옥을 없애버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신약 성경에서 모두 영적으로 대체해서 성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들은 나중에 문자적으로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지옥에 보내서 영원히 고통받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신약 성경에서도 같은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49. 성경은 일관적인 기조로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시거나 바보로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이 나오면 항상 그것은 말을 의미합니다. 병거는 병거고 강은 항상 강입니다. 성경에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할까요? 물론 사용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성경의 상징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상징이 의미의 통일성을 깨는 것은 아닙니다.
50. 성경의 상징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면, 속죄 염소가 있습니다.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언고 사람들의 죄가 염소에게 있음을 선언하며 죄를 전가합니다. 그리고 나서 염소를 광야에서 놓아줍니다. 이것을 통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죄가 있는 채로 죽으면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고 끊어지기 때문에 죄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지만 성경의 일관적인 의미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결코 구원받은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인 것이든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성경의 어디에서도 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지 않게될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속죄 염소에 대한 상징을 구원받지 않은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1. 이러한 원칙을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열처녀 비유를 사람들이 흔히 잘못 해석하는 방식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 처녀의 비유를 교회에 적용시켜 잘못된 해석을 합니다. “열 처녀가 있는데 그중에 다섯은 성령이 있고 다섯은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이 없는 다섯이 성령이 있는 다섯에게 가서 자신들에게 성령을 팔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섯 처녀는 자신들이 소유하기에 부족하니 성령을 팔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뭔가 이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분을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기름이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름은 기름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었을 때 성령님을 부어준 것은 아닙니다.
52. 성령님은 사거나 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기름은 성령님이라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성령님을 사고 파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러한 해석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때에는 항상 관련 구절을 찾아봐야 하며 다른 구절을 통해서 본문의 해석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한 책에서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정의하고 있는 것은 다른 책에서도 일관되게 그 의미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일관성을 무시한다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53. 여러분이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어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 시킬 때 많은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담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아세요? 연기와 재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은 많이 있지만 그것이 담배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은 아닙니다. 저는 성경에서 담배에 대한 구절을 찾을 수 없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일관되게 우리의 육신이 아닌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라는 말씀은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께 자신을 의의 도구로 내어 드려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일관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으로 담배에 대한 말씀은 충분한 것입니다.
54. 성경에서는 도박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전화해서 다급한 목소리로 복권에 대한 구절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도박이나 복권에 대한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슬롯머신에 가까이 가지 말지니라”는 말씀이나 “룰렛테이블 앞에 앉는 것은 가증하니라”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현명하게 돈을 사용해야지 돈박을 하면서 돈을 날려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특정해서 말씀하지 않아도 그 주제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됩니다.
55.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학교에 가서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결론을 내려 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같은 원어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저는 1976년에 구원받은 이후로 목회 사역이든, 복음 사역이든, 기도든, 성경 연구든 간에 원어를 알지 못해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무튼 로마 카톨릭은 제대로된 교육 기관에서 교육 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성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 연구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56. 이에 반해서 개신교는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 성령님께서 거주해 계시기 때문에 누구나 혼자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도 성경을 연구하고 알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단과 이단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극단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도 진리를 알 수 있지만 다른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내가 연구한 진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둘 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혼자 있으면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의 뜻을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있으면 상대방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증을 할 수 있습니다.
57. 저는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교단에서 저에게 교리를 정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연구해서 알게 된 진리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형제 자매들과 교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지체들과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내가 연구한 내용이 정말 진리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저도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잘못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제를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58.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른 교회와 좀 다른 것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저는 수 년에 걸쳐서 계속 그렇게 여러분에게 성경을 가르쳐왔습니다. 만일 제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 다른 사람의 성경 강의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 다른 사람의 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을 성경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아십니까? 저는 저의 서재에서 다시 한번 찾아볼 것이고 저의 자료들을 뒤져볼 것이고 다른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확인해 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곳에서도 그것을 찾지 못하였고 아무도 그러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래서 제가 찾은 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면, 저는 그것을 그냥 그 자리에 둘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5년이나 10년이 흐르고 나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어떤 형제가 자신이 성경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전에 제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 한다면 저는 아마 속으로 환호성을 지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발견한 진리를 확인받았기 때문입니다.
59. 모든 이단들과 거짓 종교들은 아무도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들고 나옵니다. 이단들은 성령님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자녀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확인받지 못한 것을 들고 나와서 자신들의 독특한 교리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이 있는데 왜 혼자만 그렇게 믿는 것일까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 사람 단 하나만 있는 것일까요? 어떠한 교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교리는 의심해 봐야 합니다.
60. 어떤 사람들은 요한일서
61.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께서 내주해 계십니다. 그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할 때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가르치는 것에 제한될 필요도 없고 침례교회가 가르치는 것에 제한될 필요도 없습니다. 교황이나 그 누구의 가르침에 제한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연구한 내용이 진리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죠셉 스미스 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그리스도인과 교제를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62. 제발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세요. 집에서 혼자 그 누구의 도움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성경을 열심히 읽으세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서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도 모르는 것을 찾아내세요. 그러나 반드시 여러분이 알아낸 내용이 성경의 다른 진리에 부합하는 것인지 확인해 보세요. 성경을 연구하는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보고 확인해 보세요. 다른 형제들이 내가 찾아낸 내용이 좀 이상한 거 같다고 하면 끝까지 그것을 고집해서 새로운 교리를 만들지 말고 일단 내려 놓으세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진리를 보여주실 수 있지만 다른 형제를 통해서 그것을 확증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처럼 다른 형제에게도 역사하실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연구에 있어서도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성경의 전부라면 앞으로 남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 것이겠습니까?
63. 우리는 지금까지 문자적 해석, 문화적 해석, 역사적 해석, 해석과 적용의 차이, 귀납법, 분명한 구절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 의미의 통일성의 원칙, 그리고 연구한 내용을 확인해야 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학원 기말 시험의 주제로 좋은 것들입니다(이 강의는 신학원 강의임.-역주). 저는 지금 예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이번 강의는 마치겠습니다.


제5과 점진적 계시의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5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경 해석의 원칙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은, 본문이 다른 특정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을 스스로 제안하고 있지 않은 이상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항상 바른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언제나 문자적인 해석을 해야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성경의 본문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문화적 해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무덤이나 발을 씻어주는 등의 행위가 문화적 해석의 대상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2. 이번 과에서는 성경을 바로 읽고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원칙은 성경의 진리는 “점진적 계시(Prograssive Revelation)”라는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점진적 계시의 원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점진적 계시란 무엇인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담에게 성경의 66권을 모두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말씀을 여러 사람들에게 주셨으며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계시해 주신 진리를 알 수 있었고 자신들의 시대에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진리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계시를 받은 사람은 처음에 계시를 받은 사람에 비해서 훨씬 많은 양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3.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전에 기록된 본문은 항상 최근에 기록된 본문의 빛을 비춰서 해석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성경에서 레위기를 읽을 때, 저는 죄를 지으면 어린양을 잡아다가 제사장에게로 가서 제물로 드려 저의 죄를 대속하게 해야함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메시야가 와서 죄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함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읽게되면, 그 메시야가 이미 오셨으며 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최근에 기록된 신약성경의 빛으로 예전에 기록된 구약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5. 갈라디아서
6. 제가 성경을 읽는데 율법에 대한 말씀과 은혜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종에 대한 말씀과 입양에 대한 말씀이 나오며, 속박에 대한 말씀과 자유에 대한 말씀이 나오면, 저는 이전의 계시를 최근의 계시의 빛으로 해석하겠습니다. 그 반대로 해석해서는 않됩니다. 설마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까 싶으신가요? 교황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나 안식교인들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켜야만이 구원이 유지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 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기본적인 해석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며 점진적인 계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는 계시록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고 모든 계시를 마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계시를 점진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점진적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약성경의 유아적인 신학에서 신약성경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인도하신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끼? 구원자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처녀탄생과 고난받는 메시야와 죗값의 지불에 대해서 잘못 이해했습니다. 구약성경만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복음서의 내용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누구시며, 왜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무엇을 하실 것이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8.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첫번째 유월절 밤에 문기둥과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던 부분을 읽을 때, 여러분은 그 부분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피로 인해 죄의 속받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는 것의 모형이 되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출애굽기만 있다면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신약의 진리가 계시되지 않았다면 출애굽기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만으로는 결코 출애굽 때의 어린양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신약의 진리가 있어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이 가지고 있지 않은 계시를 우리는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온 어린양의 피를 해석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9. 이러한 점진적 계시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어떤 물질이 실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말하면서 그 피를 여러분 집의 문에 바른다면, 여러분은 신약의 진리에 맞춰 구약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진리에 맞춰 신약을 해석한 것이 됩니다.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황소와 염소의 피나 구약성경의 제사나 희생, 그리고 축제나 명절은 모두 그림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림자가 있다면 실체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구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모든 모형의 실제가 되시는 겁니다.
10. 한 번 가정해 보겠습니다. BC 1200년 어느날, 여러분이 어린양을 가지고 성전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와서 “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겠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여러분은 그 이웃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의미는 말이야, 처녀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모형으로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 그러나 2천년 전에는 이렇게 알고 있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우리처럼 알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았고 주어지지 않았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만한 때가 오기까지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1. 우리는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린양의 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죄 헌물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신 것임을 알고, 태우는 헌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2천년 전에는 그 누구도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2. 요한복음 3:14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이후 광야에서 유대인들이 불뱀에 물렸던 사실을 기억하실 겁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자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요한복음에서 모세가 그렇게 뱀을 든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우리를 대속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구원받아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렸다가 놋뱀을 보고 치유받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나중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나도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리가 아직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계시가 점진적으로 주어짐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들에 관해 주신 정보들을 가지고 있고 이것에 비추어 지나간 시대를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주제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계시에 비추어 이전의 것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13. 제가 여러분에게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라는 말씀을 인용한다면,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왜 이 말씀을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세요? 바로 사도행전 8장에서 이사야 53장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구체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믿고 유대교로 개종하여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두려워했던 내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도 그것이 누구에 대한 말씀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왜 내시가 이사야 53장이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는지 아세요? 그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수백년 전에 받은 예언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추가적인 예언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14. 그렇다면 우리는 이사야 53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단지 추측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아서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추가적인 성경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성경의 진리가 온전히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향상된 계시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계시의 패턴은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15.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범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더 깊고 높고 분명한 의미를 밝혀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에서는 “너는 살인하지 말라.”(출
16.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훈육 선생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준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러 그리스도께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대한 교리를 온전한 계시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철자(알파벳)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그 철자로 이루어진 단어와 문장을 가르쳐 주고 있고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7. 히브리서
18. 계속해서 2절을 보세요.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금씩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자신이 직접 무대에 등장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것을 보거라.”고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아느냐? 이것을 보거라.” “긍휼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것을 보거라.” 주님께서는 그렇게 3년 반 동안 아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와 가르침과 기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서신서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19. 점진적 계시의 시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 만으로 모든 진리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성경으로 구약 성경에 계시된 진리들을 풀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과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었다고 해서 그를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중에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고 있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500페이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계시해 주신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성경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받은 계시 내에서만 온전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20. 우리는 지금까지 “문자적 해석의 원칙”, “문화적 해석의 원칙”, 그리고 “점진적 계시의 원칙”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잠시 성경의 마지막 장인 계시록 22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계시록
21. 성령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17절에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 성령님께서 신부와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세요. 성령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거나, 성령 안에서 걷고 있거나,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거나,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하게되는지 아세요? 성령님께서 여러분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값없는 생명수를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루 종일 집에서 춤을 췄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22.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18-19절입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자신의 말씀에 추가하거나 삭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경이나 몰몬경이나 그 밖의 신흥 종교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말씀”이나 “예수님의 또 다른 언약” 등을 쓰거나 믿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재앙을 받거나 거기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23. 미국의 남부지역에는 독립침례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는 10분 거리에 다섯개의 독립침례교회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지역에 사는 어떤 형제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설교자로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라고 어젯밤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장소가 없으니 우리집 거실에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집 맞은 편에는 독립침례교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그렇게 말을 해야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대부분의 이단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큭별하게 하신 말씀이 있다고 주장합니다.몰몬교를 만든 죠셉 스미스는 자신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몰몬경을 주고 갔다고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리가 없으므로 우리는 죠셉 스미스에게 나타났던 천사는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1장의 천사이거나 빛의 천사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5.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원칙은 “역사적 해석의 원칙”입니다. 성경의 독자들은 계시를 처음 받은 그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반드시 그것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 계시가 주어질 때, 그 계시가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뛰어넘어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6. 여러분은 요한복음 6장을 읽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다락방에서의 최후의 만찬의 빛을 비춰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의 빛으로 비춰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아직 이러한 진리들이 계시로 주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무도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 빵과 잔을 나누기도 전이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기도 전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요한복음 6장의 관점에서 봤을때는 이후에 주어질 계시가 됩니다. 이후에 드러난 계시로 인해 제자들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진리를 그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말씀인 것처럼 해석해서는 않됩니다.
27. 예수님께서 회당에 서서 “교통신호를 어김으로 간증을 잃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요한복음 6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언제 하신 말씀인지 살펴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미사나 주의 만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미사나 주의 만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28. 침례인 요한이 요단 강가에 서서 자신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침례를 해 주었을 때, 침례를 받으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침례인 요한을 인용하면서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침례에 대한 그러한 의미를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29.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하신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0.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사람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문 기둥에 피를 바를 당시에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상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들어올리면서 보고 치유를 받으라고 했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서 죄들을 용서받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신약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구약 성경을 적용할 수는 있지만 구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 자체를 신약의 진리로 해석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은 처음에 말한 그대로의 일미가 일차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어떤 것을 처음 말씀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상의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일차적으로는 표면적으로 기록된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31. 주석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계시록 9장에서 말씀하시는 메뚜기가 헬리콥터라고 해석합니다. 주님께서 계시록 9장에서 처음 말씀하실 때 헬리콥터를 의미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헬리콥터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대부분의 경우 말씀하신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혜나 전지 하심을 제한하려는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은 주님께서 그 예언을 처음 하시는 그 당시에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나 단어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사
32.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말을 처음 했을 당시에 듣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만한 것을(예를 들면, 2천년 전에 헬리콥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역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말을 하는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낙타 열마리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성령님의 열가지 은사를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때까지 이 열가지 은사를 사용해서 상급을 쌓게 된다.” 이것은 흥미있는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전혀 진리가 아닙니다. 리브가는 낙타 열 마리를 보고 “이것은 성령의 열가지 은사를 상징하는 거구나!”하면서 감탄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나온 엘리에셀의 낙타 열 마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낙타 열 마리는 낙타 열 마리를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을 신약 성경의 진리를 근거로 여러분 마음대로 의미부여하여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여리고 성은 일곱번 그 주위를 돌고나서 무너졌을지 몰라도 우리가 어떤 건물을 일곱번 돈다고 헤서 그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33.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는 회의한 결과를 요약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4. 야고보는 여기서 아모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암
35. 우리가 다음으로 살펴볼 원칙은 “해석과 적용의 구별의 원칙”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서
36. 문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도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사랑과 목숨과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없고 오히려 주님을 악하게 대하던 사람들을 위해 주셨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 한 것은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적용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 읽을 때, 그것을 보고 “이것은 나에 대한 것이구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온 고난받는 메시야는 저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적용은 저에게 할 수 있지만 해석은 저에게 할 수는 없습니다.
37. 성경의 본문에는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있는데 영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본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8.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적용입니다. 이 부분을 가지고 문자적인 해석의 원칙과 점진적인 계시의 원칙을 한꺼번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로 돌아가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오고 나서 모두 홍해를 건넜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후에 침례를 받는 본보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적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출애굽기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실제로 홍해를 마른땅 같이 건넜습니다. 그 일은 실제로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39. 3절에서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광야를 방황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반석이 되시어 언제나 우리에게 물을 주시어 갈증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적용입니다. 그런데 이제 실제 출애굽기의 광야로 돌아가 봅시다. 물을 쏟아낸 바위가 실제로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 바위는 실제로 바위였습니다. 모세가 막대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실제로 입을 벌려 물을 쏟아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을 쏟아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실제 바위였습니다. 적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수이시며 목마른 모든 자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적용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신약 성경이라는 향상된 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향상된 계시와 적용으로 본문의 실제 그대로의 문자적인 해석을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40. 이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해석만 있고 적용이 없어서도 안되고 적용만 있고 해석이 없어서도 안됩니다. 요한복음
41. 그러나 이 구절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선두주자인 침례인 요한을 많은 백성들이 따랐습니다. 그에게는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독자적인 사역을 했고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자 요한을 따르던 백성들과 그의 제자들마저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제는 모든의 이의 관심이 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요한이 이러한 일들을 보고 한 말이 바로 요한복음
42. 이 구절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다이어트 클럽에서 이 구절의 일부를 벽에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I must decrease).” (이 구절을 이 부분만 떼어놓는다면 “나는 반드시 살이 빠져야 하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역자주) 요한복음 3장에서 침례인 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이 구절을 다이어트에 적용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런식으로 영적 적용을 해서는 안됩니다. 요한복음 3:30의 의미는 당시 청중이 들었던 그 의미 이상의 것을 뜻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는 감추어진 어떤 신비로운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나는 퇴장해야 한다.” “예수님의 날이 밝았으니 나의 날은 저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자신의 목적이 바로 이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역할을 주신 것을 보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로 영적 적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적용은 모두 해석한 것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은 아닙니다. 적용은 항상 해석의 범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43. 다른 예를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4. 물론 주님께서는 소아시아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다녀오신 후에 갈릴리로 가실 수도 있었겠지요. 주님께서는 여리고로 갔다가 아라비아 광야를 한바퀴 돌아보신 후에 갈릴리로 가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시간 낭비였을 것입니다. 만일 사마리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면 그것이 더 특이한 일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길로 가로질러 가는 것에서 무슨 굉장한 의미를 찾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코스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5. 주님은 그렇게 가장 빠른 길로 질러가시다가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어떤 칼빈주의의 가르침이나 예정이나 특별한 감추어진 의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6개월간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시다가 이 여인과 대화하시며 말문이 튼 것도 아닙니다.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어떤 교훈을 찾고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청중에게 그 구절의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 정확히 알려주고 나서 영적인 적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은 적용을 해석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적용은 경우에 따라서 수 백 가지가 될 수도 있지만 올바른 해석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46.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
47. 여러분은 50가지의 적용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적용으로 해석을 대체하거나 가려서는 않됩니다. 바른 성경 읽기와 바른 성경 연구와 바른 성경 강해는 항상 이 구절이 실제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바른 해석을 찾고 나서 영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적용은 항상 해석의 의미를 바꾸거나 변질시키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자적 해석, 문화적 해석, 점진적 계시의 원칙, 역사적 해석, 그리고 해석과 적용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