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과 문자적 성경 해석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4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우리는 지난 번에 성경이 세상의 책들과는 다른 점을 살펴봤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입니다. 고전을 읽기 위해서 영적으로 올바르던지 도덕적으로 정당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영적인 자격을 요구하는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독자로 하여금 영적인 자격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이고 영적인 요구조건을 갖춰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우리가 두번째로 살펴본 것은 성경은 초자연적인 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은 기적과 표적 등이 포함된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다른 역사적인 부분과 함께 기록되어 그 사실성을 입증받고 있습니다.
3. 성경은 또한 혁명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이전에 세상에서 정의했던 것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개념들, 즉 믿음, 사랑, 긍휼, 구속, 구원, 하늘, 심판 등의 개념들을 이전 시대가 사용하던 의미와는 다르게 새로운 정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자동차, 음식 등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 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4. 세상에서는 자동차 사고로부터 구출되던지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훨씬 깊고 위대한 의미로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혼은 지옥으로 가기로 정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베풀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단어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로 인도해 줍니다.
5. 성경은 다른 철학서적이나 심리학서적, 심지어 종교서적이 요구하는 않는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합니다. 성경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먼저 믿음과 신뢰와 거룩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책을 읽을 때 그 책의 저자에게 진리로 인도해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저자의 인도를 구하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서적이나 논문을 읽을 때 그들이 범한 음행, 간음, 도둑질, 술취함, 거짓말 등의 죄로 인해서 자신들이 읽은 것을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보게 김박사, 지구온난화에 대한 이 논을 읽어 본 적이 있나?” “아니, 읽어보게 이리 건네주게.” “자네 기도는 했나? 혹시 요즘 죄를 지은 것은 없는가?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지구온난화에 대한 진실을 결코 알 수 없을 걸세.” 이러한 대화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6. 이 세상에는 그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거룩함과 의로움을 갖출 필요가 있는 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책, 성경은 다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이 바르지 않고 우리의 행함이 바르지 않다면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이해할 것이고 잘못 해석할 것이고 결국 저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마음대로 해석해 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성경 같은 책은 없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믿지 않고 읽는다면 더 깊은 진리로 인도받을 수 없습니다. 신문은 믿는 마음으로 읽지 않아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면 단 두 장을 읽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고 읽으면 읽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야기해 줄 수도 없습니다.
7. 성경은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오류나 미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적인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어서 현대인들이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비판적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접근하는 방식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접근하는 방법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카톨릭 신자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나서도 계속해서 처녀로 지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비판적으로 성경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나서 대여섯명의 아이들을 더 나은 여자가 처녀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비평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 하나씩 생각해 보고 확인해 보지 않는 것입니다.
8.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는 자세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누군가 무엇을 가르치면 그것을 성경으로 확인합니다. 성경으로 확인한 후에 확증합니다. 우리는 목사들과 성경 교사들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보는 눈먼 추종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언들을 연구하고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찾아보고 비교해 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먼 추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자신이 하는 말을 다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탐구하라, 찾아보라(요 5:3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자신들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펴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했습니다.
9. 누간가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거나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러한 말을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요구하고 찾아봐야 합니다. 누군가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에서 근거를 대고 보여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경 구절을 보여준다고 만족해서는 않됩니다. 문맥을 찾아보고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가 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비평적으로 본다는 것은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목사나 종교 지도자나 교회나 교단이 하는 말을 아무런 저항없이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고자 할 때에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성경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10. 세속 작가들의 책은 아무런 비평적인 태도없이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평하는 생각으로 읽어야 왜곡된 생각에 오염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사람들이 성경으로 그 교회를 비평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으로 비교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가 저에게 제 설교가 자신의 불면증을 치료했다면서 고맙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도 3명의 성도가 같은 목적으로 제 설교를 듣는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서 하는 말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면서 설교를 듣는다면 설교가 수면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11.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읽고 연구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설교의 본문을 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이 바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과 감정과 믿고 싶은 것과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만일 주님께서 제가 가진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임을 보여주신다면 저는 이것들을 더욱 굳게 붙잡을 것이고, 만일 일치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신다면 저는 이것들을 버리겠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서 올바르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사용해서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나 자신이 정당해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12. 성경 연구의 목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연구의 목적은 지식을 쌓는데 있지 않고 세워주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지식을 올바로 적용하기 위함입니다. 성경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도 않됩니다.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뭔가가 뒤바뀐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치 아버지와 말씀과 킹제임스성경이라고 대답할 기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이 구원자는 아닙니다.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이 인도자는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인도자이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13. 성경은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 119:11)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지식을 배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알고 암기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목적은 배우고 암송한 그 말씀을 적용해서 주님 앞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함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이것은 진리입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구절이 끝나지 않아요.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끼?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의 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14.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종교나 심리학책과는 다르게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적용하여 바로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지식을 쌓아가면서도 여러분으로부터 어떠한 성경적인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맥을 따라 한 절씩, 한 단어씩 설명하는 강해설교가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인 이유입니다.
15. 어떤 목사가 은퇴를 하면서 후임 목사를 선택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항상 성경의 한 절만 딱 떼어서 설교 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가 얼마나 능력있는 설교자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경우에 그의 강력함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회중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언변이 아닙니다. 회중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그것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16. 성경은 모든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은유적으로 기록된 유일한 부분은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성경에는 유형과 모형과 그림자가 나오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성경에서 비유라고 명백하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때에는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원칙입니다.
17. “문자적”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자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번역할 때, 암소, 빵, 막대기 등의 단어는 그대로 언어를 바꿔서 번역하지, 암소가 호수가 되거나 빵이 불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암소는 항상 암소이며 발은 항상 발이고 막대기는 항상 막대기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이고 무엇인가를 기록한다고 해도 전혀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단순한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18. 성경이 주님께서 흰 말을 타고 오신다고 하는데도 이것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흰 말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찬란한 태양 빛이 아침 이슬을 가르고 비추면 당신은 맑은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아직 살아 계심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귀여운 허풍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흰 말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말을 타고 오시는데 그 말의 색깔이 흰색이라는 것입니다.
19. 성경에서 걷고 일하고 먹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빠르고 느리고 작고 크고 아름답고 강하고 의롭고 불의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전제로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성경 뿐만 아니라 어떤 책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누구나 어떤 글을 가지고도 자신이 원하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20.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한 언어 이해 능력”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읽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고 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감추어진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몇 군데에서 신비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 그 신비가 무엇인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8:1을 보겠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마리아 막달라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갔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이제 새로운 아침이 밝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슬픔에 가득찬 두 여인에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무덤 앞에 선 두 여인은 새로운 희망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아름답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바르게 해석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21.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한 단어 한 단어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1절을 보세요. 성경에서 안식일이라고 하면 항상 토요일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명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안식일이라고 하면서 다른 날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안식일이 끝날무렵 주의 첫날이 밝아올 때 두 유대인 여인이 무덤에 온 것입니다. 본문은 새로운 희망이나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같은 것은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안식일이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다는 시간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뿐입니다. 본문은 이것 외에 다른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들 두 유대인 여인은 무덤을 보려고 왔습니다. 여인들은 어떤 희망을 품고 오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22. 2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큰 지진이 났더라.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입구에서 돌을 뒤로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더라.” 성경은 지진이 났다고 말씀하고 있지 삶의 희망이 무너져 마음이 두 갈래로 찢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시 발생한 사건은 지진이고 이것을 바라보는 여인의 심리 상태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진이라는 단어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진은 언제나 지진을 의미할 뿐입니다. 말 할 줄 아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지진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모두 동일한 대답을 해 줄 겁니다. 지진은 항상 지진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다른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본문이 다르게 정의하고 있지 않는 이상 지진은 항상 보통 사회에서 의미하는 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입구에서 돌을 뒤로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더라.” 어떤 강한 남자가 와서 돌을 치워준 것이 아닙니다. 힘이 센 남자가 불쌍한 두 여인에게 너무나도 친절해서 그들을 천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죠? 그 이유를 아세요? 여러분이 성경을 믿는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천사를 천사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천사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놓은 것입니다. 지진이 나서 돌이 굴러간게 아니라 천사가 굴린겁니다. 천사가 돌을 굴린 이유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 놓은 이유는 사람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돌이나 나무나 상관없이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24. 3절도 보겠습니다. “그의 용모는 번개와 같고 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거늘” 이것은 천사의 옷이 눈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덤 근처에 눈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천사의 옷은 무슨 색이었을까요? 흰색이었습니다. 얼마나 하얀 색이었나요? 본문은 눈과 같이 희다고 합니다. 천사의 옷의 색깔을 설명하는 부분에서야 비로서 비유법이 나옵니다. 이렇게 비유법이 나와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이라는 표현을 볼 때 모두 흰 색을 연상합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모두 똑 같은 것을 연상합니다. 왜냐하면 눈은 전세계적으로 밝게 빛나는 흰색이기 때문입니다.
25. 4절도 보겠습니다. “지키던 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었더라.” 다시 비유가 등장합니다. 지키던 자들이 떨었습니까? 떨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떨었다는 것입니다. 숨어있는 다른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같이(as)”라는 표현을 보시면 이것은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오는 길에 죽은 사람을 봤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실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가만히 있게 됩니다. 본문의 비유가 문자적이기 때문에 해석도 문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26. 계속해서 5-6절을 보겠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분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셨으므로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 제가 성경을 비평적으로 읽는다고 한 말을 기억해 보세요. 무덤에 찾아간 여인은 두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은 돌 무덤이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도 굴러갔습니다. 또 지진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한 말이 모두 문자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표현그대로 사실이라면 부활도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본문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27. 사람들은 성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신문이나 책이나 뉴스나 연설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오직 성경을 읽을 때는 기록된 의미 뒤에 무엇인가 비밀스런 것이 있을 것이고 비유적으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신뢰합니다. 저는 예전에 저의 사역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형제님의 설교와 성경공부에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왜 형제님은 천사가 날개가 없다고 가르치시나요? 저는 날개가 있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 말이예요.”
28. 자신의 경험을 성경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제가 경험한 것과 성경이 말씀하시는게 서로 다르면 저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겠습니다. 제가 날개가 달린 천사를 실제로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천사는 날개가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천사는 날개가 없다고 믿겠습니다. 제가 본 것과 성경이 말씀하시는게 서로 다르면 저는 항상 성경을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본 것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29. 본문의 모든 2차적인 의미는 모두 선행한 구절의 문자적인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상징, 은유, 모형 등은 모두 비유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문자적 해석을 떠나서는 비유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8:5에서 “씨 뿌리는 자가 자기 씨를 뿌리러 나가서”라고 말할 때, 씨뿌리는 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해석에 의하면 씨뿌리는 자는 인간의 아들인 예수님 본인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30. 100마리 중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사람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양은 무엇의 비유입니까? 선한 목자는 누구를 비유로 보여주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는 비유적인 문맥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이 정의하고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해석은 비유라 할지라도 이미 다른 부분에서 해석한 문자적인 해석에 기초해서 풀어간다는 것이지 비유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31.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경에서 “상상(imagination)”을 찾아보면 44번 나오는데 모두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10:5에서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상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32. 어떤 여자분이 저에게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이 정말 바람을 폈는지 어떻게 확실히 알게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거나 걱정하거나 공상하거나 혹은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작은 목소리가 “네 남편이 바람피고 있어”라고 속삭여 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같으면 바로 성경으로 달려가서 나에게 말하는 자가 누군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33. 제가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목사의 자격에 대해서 상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부부에 대한 것이었는데 부부가 모두 저희 교회에 다녔었는데 남편이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아내가 바람을 피고 다른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이혼을 하고 목회를 그만두고 그냥 교회 생활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새로운 자매를 만나서 결혼을 했고 교회는 다시 그에게 목사의 직분을 맡겼습니다. 저와 상담하던 사람은 이 얘기를 하면서 목사는 일평생 단 한명의 아내하고만 살아야 하는데 아내가 죽을 경우는 예외가 발생하고 이 부부의 경우 자매가 바람을 피우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서 남자는 아내가 죽었으므로 재혼을 해도 살아있는 아내는 한 사람이므로 괞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상상대로라면 동네에서 전부인을 만나면 유령을 본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겠지요.
34. 우리는 모두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의 생각과 상상이 성경 해석에 침범할 수 없게 됩니다. 문자적 성경 해석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상상과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지켜줍니다. 성경은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 17: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어떠한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마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거짓되고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마음과 머리에서 떠오르는 모든 상상과 생각을 잡아서 성경에서 실제로 하시는 말씀과 비교해 보고 그것에 복종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5. 저는 다른 사람의 설교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자가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성경을 찾아보니 그것이 사실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을 성경과 비교해 봄으로 성경을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얘기하지만 전혀 엉뚱하게 인용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우가 가장 심한 경우일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상상을 더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6. 저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를 담고 있는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바르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사실이지 비유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실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을 비유라고 가정 하고 다시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성경은 항상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여 이르시되”(눅 12:16)라는 식으로 기록합니다.
37. 누가복음 16:19을 보세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말한 그대로예요. 이 사람은 부자였고 좋은 옷을 입었고 매일 호화롭게 지냈습니다. 계속해서 2-3절도 보겠습니다. “또 나사로라 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더라. 또한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도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어떤 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는게 아니라 실존했던 사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거지였고 몸에 상처가 있었고 받은 의료 혜택이라고는 개한테서 받은게 전부이고 유일한 희망은 부자가 먹다 남기고 버리는 것이 많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풍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빈곤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록된 그대로 실제로 살았던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8. 22절도 계속 보겠습니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둘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었다고 해석해야지 다른 무엇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시기 위해서 죽지 않은 것을 죽었다고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면 묻히게 되었다는 기록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39. 계속해서 23절도 보겠습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여기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남자였고 부자였으며 좋은 옷을 입었었고 좋은 집에 살았었고 좋은 음식을 먹었었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제 그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서는 이것이 비유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에서는 선행한 구절이 문자적으로 사실일때에는 뒤에오는 구절도 문자적으로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고통 중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안식하고 있습니다.
40. 여호와의 증인 주석가들은 부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 아닌 비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해 보세요.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 7:23)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모두 지워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3:5, 13:8, 17:8, 20:15 참조-역주). 성령님께서 누가복음 16장을 기록하실 때 부자의 이름을 기록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을 이미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셨기 때문에 생명책을 들춰봐도 그의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왜 생명책에 없는지는 참조 구절들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만이 항상 안전하고 확실한 해석방법입니다.
41. 문자적 해석을 할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문화적 측면입니다. 문화적 측면을 보기 위해서는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측면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 시대에 중동의 문화는 사람들이 넓은 다락방에서 모여 교제를 나눴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생각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 오늘날 우리가 사는 곳처럼 수도시설이 잘 건설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많은 단지(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굉장히 지저분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시대의 환경을 경험하게 된다면 2천년 전에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음에 감사할 것입니다.
42. 동물의 배설물이나 풀로 아궁이에 불을 때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눅 12:28)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덤가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무덤과 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덤은 많이 다릅니다. 당시의 무덤은 주로 한적한 살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덤 근처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발을 씻겨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도 문화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 우리교회에서는 발을 씻어 주지 않는 건가요? 우리는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발은 대체로 깨끗합니다. 그러나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흙먼지가 일어나는 곳에서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발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43. 성경은 “거룩한 입맞춤”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우리는 비누가 있고 손을 자주 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지저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시대에 살았다면 사람을 만났을 때 결코 악수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을 잡고 악수하지 않고 입맞춤으로 대신했던 것입니다. (갈 2:9에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은 교제의 의미이지 악수를 의미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역주) 이런 식으로 성경에 나오는 많은 것들이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44.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면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훈을 주는 좋은 설교일 수 있지만 관련 구절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주셨고 계속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과 헤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설교이지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설교는 아닙니다. 성령님은 결코 성경과 모순되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순적인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어떠한 사실을 기록해 놓으시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45.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바른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바른 상태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경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된 삶을 산다고 해서 저절로 성경을 알게 되는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고 경건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모두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도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거짓을 가르치게 됩니다.
46. 우리는 모두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매우 제한적이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의 목사라면 그리고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청중의 절반이 여러분을 쫒아내려고 모의하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의 타락한 본성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반역에 대한 본문을 찾아서 여러분의 대적을 정죄하는 설교를 준비하게 잘못 인도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특정한 때에 특정한 본문을 읽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인도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본문을 성경에서 찾아서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47. 문자적 성경 해석은 우리를 우리의 부패한 마음과 상상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적절하지 못한 방법으로 성경을 이용해서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지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설교자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라는 것입니다.


제3과 성경 연구를 위한 21가지 열쇠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3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성경 연구 방법 셋째 시간입니다. 모든 성경 연구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의 열쇠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절대적인 열쇠입니다. 만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서 읽지 않는다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진리로 인도해 주시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을 그냥 교양 서적을 읽듯이 일어서는 결코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교과서 읽듯이 읽거나 과학서적 읽듯이 읽거나 역사책 읽듯이 읽는다면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믿는 자들을 진리로 인도해 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1:25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셨사오니 감사하나이다.” 사람이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셔야만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큰 복이 아닙니까? 같은 장 27절도 보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사오니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나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낸다는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시고 아들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십니다.
3. 고린도전서 2:9-10을 보세요.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느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시고 아들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십니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는 여러분은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머리가 좋건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건 간에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시기 기뻐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해 주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감추어진 비밀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면 주님께서는 주님의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고 싶어 하신다해도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결코 진리를 계시해 주실 수 없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까요? 요한복음 14:25-26을 보세요.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여러분은 성경을 연구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이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압니까? 이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거나 느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공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6. 여러분이 기도할 때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없다면 여러분은 결국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하지만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머리에는 하나님이 있으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할 때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이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와 성경 연구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이유이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7. 요한복음 15:26-27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리라.” 성경 연구는 기도와만 짝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져야 할 것이 바로 말씀 증거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이 배운 성경을 기억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마음으로 느끼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경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른 것을 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8. 예전에 누군가 저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하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 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님이 매일 기도를 하고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매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섬기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하룻동안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꾸준하게 이런 생활을 한다면 우리가 사는 지역은 변화될 것입니다.
9. 요한복음 16:13-14을 보세요.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서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라.”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지 아닌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항상 성령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항상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성령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10.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세요. 잘 보세요.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그저 진리 가운데로 밀어 넣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을 진리 가운데로 강제로 집어 넣는 분도 아니세요. 만일 여러분이 진리를 알기 원하시면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데 성령님께서 강제로 여러분을 진리 가운데로 밀어넣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게끔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11. 병거를 타고 가던 이디오피아 내시를 생각해보세요. 사도행전 8:30-31을 보세요. “빌립이 거기로 내시에게로 달려가 그가 대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이르되, 그대가 읽는 것을 깨닫느냐? 하매 내시가 이르되, 누가 나를 지도해 주지 않으면 어찌 내가 깨달을 수 있으리요? 하고 빌립이 올라와 자기와 같이 앉을 것을 청하니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내시는 왜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내시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빌립은 어떻게 내시를 진리를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을 진리로 인도할 수 없어요. 그런데 빌립은 어떻게 이디오피아 내시를 진리를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빌립의 안에는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립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내시를 진리를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12. 빌립이 성령님의 인도로 내시를 진리로 인도할 때, 빌립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도 않았어요. 자기가 얼마나 능력이 많고 은사가 많고 성령충만한 사람인지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빌립은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빌립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성령님께서는 빌립을 진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빌립은 내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고 내시는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령님의 인도 없이는 결코 성경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고 여러분이 원해야만 성령님께서는 인도해 주실 겁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을 어디까지 인도하시는지 아세요?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해 주시고 결국에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인도해 주실 겁니다. 빌립을 보세요. 성령님은 빌립을 진리로 인도하셨고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내시에게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14. 성경을 연구하는 열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는 21가지 열쇠입니다. 첫째는, 읽은 것을 믿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읽은 것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15. 둘째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찰 때까지 읽고 읽고 반복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이 생각나고 서로 연결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다면 결코 그것을 생각하고 떠올릴 수 없습니다. 처음이나 두번째 성경을 읽을때에는 잘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성경에 익숙해 질수록 관련 구절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은 성경 구절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시고 관련 구절들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생각할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다면 성령님께서 진리를 인도해 주실 수 없습니다.
16. 셋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알게 된 것도 이 방법을 통해서 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여러분이 성경의 어떤 부분을 연구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던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 그 질문을 기억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결국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여러분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는 부분에서 질문을 해 올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혼을 구원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17. 제가 구원받은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두 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구원받은지 오래 되지 않아 저는 대학생이 되었는데 교회 건물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와 교회는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저는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학교로 가서 근처에 있던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시간 동안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에 들어갔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저녁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다른 형제와 함께 복음을 증거하고 나서 함께 집에 돌아와 복음 증거를 할 때 답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도 답을 알지 못할때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한 번은 답하지 못할수도 있지만 다시 동일한 질문을 누가 한다면 그때는 답할 수 있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던진 질문은 성경 연구의 좋은 동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러 나갈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복음을 전하러 나가면 그 자체로 훈련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성경은 두꺼운 책이라서 어디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보세요. 그러면 어디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지 알게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막힌 질문이야 말로 성경 연구의 좋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18. 넷째는, 결코 추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라면 함부로 추측하지 말고 모든 관련 구절을 찾아보세요. 모든 관련 구절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대부분의 경우 여러분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를 근거로 함부로 추측하지 마세요.
19. 다섯째는, 여러분 스스로 먼저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책들과 주석들과 자료들을 찾아보세요. 어떤 사람은 자신은 성경 외에 다른 책은 전혀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른 책은 전혀 볼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감옥에 있을 때 책들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에서 가보에게 맡겨 놓은 겉옷을 가져오고 또 책들을 가져오되 특별히 양피지들을 가져오라.”(딤후 4:13) 사도 바울도 성겨 외에 다른 책들을 읽었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책들은 읽을 필요가 없다면 교회에서 설교는 왜 듣는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을 선포하라(preach the word)”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 4:2). 그리고 서로를 세워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를 세우라.”(살전 5:11) 설교를 그대로 글로 기록하면 책이 된는 것이지요.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다른 지체를 세워 줄 수 있는 것처럼 책을 통해서도 말씀을 선포하고 세워줄 수 있습니다.
20. 여섯째는, 단 한 시간도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1976년 12월 17일에 구원받은 이후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단 하나의 히브리어 단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공부할 필요를 못느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리스어를 알았으면 성경을 더 잘 알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 그리스어를 배워야 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했던 적은 있었습니다. 어떤 여호와의 증인이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가지고 와서 저와 논쟁할 때였습니다. 그 여호와의 증인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펼쳐가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거꾸로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가지고 다니던 그 자신도 그리스어 자체를 하나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때 이후로 저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21.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로 완벽한 성경을 주셨다면(여기서 저자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말하고 있음-역주) 우리에게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같은 원어 성경이 필요없습니다. 완벽한 성경이 있다면 왜 다시 원어를 확인해야 합니까? 원어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완벽한 성경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완벽한 성경이 있다면 그것을 믿으면 됩니다.
22. 이제 우리는 성경의 문맥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앉아서 성경의 일정한 부분을 읽을 때 여러분은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 해 봐야 합니다. 일곱째는, 읽고 있는 부분이 신약이나 구약 중 어디에 속하는가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꽤나 기본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읽고 있는 부분이 위치적으로 구약이나 신약에 속했는지만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 자체가 신약에 위치해 있더라도 구약에 속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본문을 읽을 때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구약의 진리인지 신약의 진리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디에 속하는지는 교리에 있어서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23. 구약의 경우 율법이나 예언에 속하는 경우가 많고 신약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나 신약 교회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형, 그림자, 모형, 그림, 예언, 약속 등의 형태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일어나셨으며 승천하여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지금은 교회의 머리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문맥이 구약에 속하였느냐 신약에 속하였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24. 여덟째는, 읽고 있는 책의 문맥은 어떠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 책은 누구를 향해서 기록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서로 다른 독자를 대상으로 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역대기와 매우 다릅니다. 역대기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왕들의 행적을 담은 역사서인 반면에 에베소서는 신약 교회에 보내시는 성령님의 편지입니다. 각자 다른 목적과 독자를 향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25.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서는 거듭해서 “해 아래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전도서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관점으로 인생을 평가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골로새서는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느니라.”(골 3:3) 이미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의 관점과 해 아래에 있는 사람의 관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특정한 책에 속한 문맥을 익을 때 이 책은 누구를 향해 기록되었으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무엇이고, 이 책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과 신약 시대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은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26. 성경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의 있습니다(계 16:2, 19:20).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말씀은 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짐승의 표를 받게 되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천막을 치고 7일을 거하면서 주님의 명절을 지키라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이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각 책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이러한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7. 아홉째는, 읽고 있는 본문의 문맥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의 한 장에서 특정한 구절을 뽑아서 앞 뒤 구절과 상관없는 해석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앞 뒤 구절과 연결되어 있고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유다가…스스로 목을 매니라.”(마 27:5)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기뻐하니라.”(눅 13:17)는 말씀도 있습니다. 서로 전혀 상관없는 이 네 구절을 한 데 모으면 어떠한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네 구절은 각각의 문맥에 상관없이 떼어 내서 한 데 모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절을 인용할 때 문맥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28. 열째는, 읽고 있는 본문의 장과 절의 문맥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신약인지 구약인지, 또 어떤 책인지, 책의 어느 부분인지, 어느 장인지, 어느 구절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왜곡하는 모든 이단들은 성경을 인용하며 거짓을 진리인양 포장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구절의 절반만 인용하던지 혹은 한 절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문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로 인용합니다. 우리는 치유가 보혈의 능력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치유(회복)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죽을 때 모든 질병으로부터 놓임받는 사실도 믿습니다.
29. 은사주의자들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 53:5)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거짓 신유가 성경적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죽어야만 했습니까? 돌팔매질을 당해도 고침을 받으면 살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만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모두 고침을 받을 수 있다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살전 4:16)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의 육신에 적용시킨다면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병약한 채로 사역을 해야만 했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거짓 은사를 증명하기 위해 인용하시는 구절은 절반만을 가져온 것이거나 문맥과는 상관없는 구절을 가져온 것에 불과 합니다.
30.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요 11:35) 이것은 명백하게 성경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께서 울고 계시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게 되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인간으로서 어린시절을 보내셨고 성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금도 성장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목밖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할 때 문맥을 봐야 합니다.
31. 열한번째는,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성경은 사탄의 말도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인 사탄의 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욥 2:4)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이 말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 말은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이 말은 마귀가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선한 사람을 위해 감히 죽고자 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 5: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교회사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기 2:4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고 마귀가 실제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말의 내용이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혹은 자신이 믿는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32. 열두번째는,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십 일 동안 누워있으라는 말씀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채우거든 다시 네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사십 일 동안 유다의 집의 불법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각 날을 일 년으로 정하였느니라.”(겔 4:6)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 것이고 또한 말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지낼 것을 명령하는 구절도 찾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며 이집트와 이디오피아에 대하여 표적과 이적이 되었느니라.”(사 20:3) 여기서도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의 대상은 주님의 종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저를 책망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33. 또 성경에는 창녀를 아내로 삼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호세아로 말미암은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 주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가서 행음하는 아내를 취하고 행음으로 인한 자식들을 취하라. 그 땅이 주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느니라, 하시니라.”(호 1:2) 이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의 대상도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든 종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님이 명백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명령이 많이 나오지만 주님께서 하신 명령이 모든 명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 개개의 모든 말씀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을 재건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명령을 주신 사람들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고 그 말을 듣는 이가 누구인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34. 열세번째는, 말하여진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 구절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데 상대방이 “제 생각에는 그 구절이 의미하는게 이런거 같은데요.”라고 하면서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구절의 의미를 알기 전에 먼저 그 구절이 말한 그대로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매우 일부이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말하는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35. 성경은 사람이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 3:3). 이것은 단순히 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목적물(육이 아닌 영)이 다를뿐 말씀하신 그대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니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6. 열네번째는, 왜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왜 그런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왜 그 말씀이 중요한 말씀인가요? 왜 내가 그 말씀을 알아야 할까요? 솔직히 얘기해서 성경은 매우 이상한 책입니다. 역대기상 앞의 9장은 왜 성경에 기록된 것일까요? 이것은 한번쯤 떠올려볼 수 있는 의문이 아닐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신학적인 어떤 내용보다 사람들을 더 생각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름을 그렇게 기록하신 것이 아닐까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도 그 부분을 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저는 거기에 기록된 사람들과 상관도 없고 그들의 이름을 읽는 것에 흥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고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읽을 때 지겨워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적은 사람들만이 관심을 가져 줄 지 모릅니다. 어쩌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37. 우리는 성경에 왜 그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그렇고 또 특정한 숫자들의 언급이 그렇습니다. 153(요 21:11)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요 3:7)고 말씀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 16:15)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고 말씀하셨을까요?
38. 말씀을 하신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요 3:7)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어떻게 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지 찾아 봐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왜 했는지, 즉 6하원칙을 떠올려야 합니다. 보시는 봐와 같이 이것은 읽기의 기본입니다.
39. 열다섯번째는, 말씀에 특정한 기한이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율법과 대언자들은 요한의 때까지요”(눅 16:16)라는 말씀이 있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요 1:17)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예를들면, 제사와 성전에 대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들이지만 기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이것은 주님께서 성전 제사 시스템을 끝내버리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히 10:11-18 참조 -역주).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명령에는 기한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때에는 그러한 기한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40. 성경을 연구할 때 그 말씀을 누가하는 것인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이 기한이 있는 것인지와 언제부터 이 말씀이 적용되는 것인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게서는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요 3:7)라고 말씀하셨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말씀은 실행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시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들림받고 나면 이 말씀의 기한은 끝나게 됩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거듭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특정한 말씀에는 기한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1. 열여섯번째는, 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각각의 단어를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봐야 합니다. “칭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화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속”, “거룩”, “성화”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바리새”, “미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희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금식”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이렇게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오며 이 단어들은 모두 하나씩 연구해야 합니다.
42. 열일곱번째는, 비슷한 진리가 성경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방금 읽은 곳에서 발견한 진리를 입증할 그것과 비슷한 진리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읽은 진리를 입증할 다른 구절이 성경에 또 있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43.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성경 해석의 전통적인 규칙입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진리를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휼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주님을 위해 훌륭히 일하는 길로 인도하는 성경 연구 방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43. 열여덟번째는, 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이것은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점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름이 있어도 그 기름을 자동차에 적용해서 주입하지 않는다면 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아무리 많이 배운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문맥에서 하시는 말씀 중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나의 매일의 삶에 적용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44. 열아홉번째는, 이 말씀은 나의 가족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를 섬기고 있고 섬겨야만 합니다. 자신은 목사나 집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나의 국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모여서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나의 국가와 이 세상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45. 스무번째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한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27을 보세요. “모세와(이것은 창세기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이것은 말라기까지 입니다)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떤 성경에 기록된 것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까? “모든 성경 기록들”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6. 요한복음 5:39도 보세요.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존재했던 성경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약 성경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약 성경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도 주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7. 계시록 19:10도 보세요. “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려 하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네 동료 종이요 예수님의 증언을 가진 네 형제들 가운데 속한 자니 너는 주의하여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님의 증언은 대언의 영이니라, 하더라.” “예수님의 증언은 대언의 영이니라”라고 하신 부분을 주목해 보세요. 여러분의 성경에 있는 모든 예언에 대한 말씀들은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모든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48. 성경을 연구할 때 스물한번째로 살펴봐야 하는 원칙은, 내가 내린 결론에 반하는 말씀이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제를 나누면서 “형제님, 제가 어제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부분인데 좀 보세요.”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 교제를 하는게 자동차나 쇼핑이나 운동경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관한 것보다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찌들었던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주님에 대해 교제를 나누며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49. 우리는 교제를 나누면서 자기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나 성경을 연구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영적으로 유익한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이 미쳐 깨닫지 못하거나 간과한 점을 다른 지체가 지적해 주면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보고 연구한 것이 모든 것인양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래 새심하게 공부해도 전부다 살펴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타이타닉의 선원이 봤던 빙산이 수면에 올라온 것이 전부였다면 타이타닉은 지금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면에 올라온 것이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인 것처럼 우리가 연구한 부분이 지극히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양 주장한다면 온전한 진리가 아닌 오류로 빠질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50. 저는 이 성경 안에는 제가 보고 깨달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는 여러분이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진리의 일부를 보게 되었을 때, 다른 지체가 아직 우리가 충분히 살펴본 것이 아니라고 하며 우리가 생각한 것과 반대되는 구절을 보여주었을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이 내린 결론에 반하는 것을 누군가가 지적한다면 그것을 숙고해보고 다시 전체적으로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51.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창세기 1장에 천사의 창조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창조 사역 중에 천사를 만들지 않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제가 이런 주장을 하니 누군가는 제가 진화론자라고 공격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진화론자가 아닙니다. 저는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창조 사역 전, 어느 시점에 천사들을 창조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주장을 못견딥니다. 그러나 어떤 단체의 주장과 다른 것을 믿는다고 해서 진화론자라느니 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52. 성경 해석의 원칙에 대해서 좀 더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특정한 부분을 읽을 때 그것이 문자적으로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기록된 것인지 살펴보고 확인해 봐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 말씀을 받은 당사자들이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신을 차리자(be sober)”(살전 5: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많은 미국인들은 “술취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성경에서는 여러분의 정신이나 감정이나 육체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분노건, 절망이건, 불신이건 간에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다면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러한 상태는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be sober”라고 말할 때 그것은 “술취하지 말라”는 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53. 문맥이 문자적으로 기록되었는지 상징적으로 기록되었는지 알 수 있는 둘째 방법은 그 문맥(혹은 구절이나 장)의 전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3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이제 이것을 로마서 3:2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지금 제가 비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찾은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한 곳에서는 그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두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문맥을 살펴보면 됩니다. 어떤 불신자는 문맥을 살펴보지도 않을채 이러한 구절들을 보고 “성경의 모순들”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54. 먼저 요한복음 9장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 문맥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문맥이 말하고 있는 것은 눈먼 채로 태어난 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로 인해서 눈이 먼 채로 태어났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문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와 그의 부모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들이 눈 먼 채로 태어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55.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계속해서 9장을 읽어보면 눈 먼 채로 태어났던 사람은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부모도 마찬가지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눈 먼 채로 태어나게 원인을 제공한 죄에 대한 이야기였고 주님께서는 그나 그의 부모나 그런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문맥을 살펴봄으로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6.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이신가요? 주님께서 다윗의 왕좌에 앉아서 통치하실 분이신가요? 주님의 정부가 끝도 없이 증가하게 될 것인가요? 주님께서 이 땅에서 천년동안 통치하실 것인가요? 주님께서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이신가요? 요한복음 18:36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 왕국이 여기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지금은”이라는 단어입니다.
57. 이제 누가복음 23:2-3을 보세요. “그분을 고소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우리가 보니 이자가 민족을 그릇되게 하고 카이사르에게 공세 내는 것을 금하며 스스로 그리스도 곧 왕이라 하더이다, 하매 빌라도가 그분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 하니 그분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그렇게 말하는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의 구절을 비교해 보면 주님께서는 한 쪽에서는 자신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고 다른 쪽에서는 이 세상에 속한 유대인들의 왕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두 말씀 다 문맥을 살펴본다면 서로 모순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8.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빌라도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너의 왕국을 이 세상에 세울 것이냐?”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지금은 아니니라.”일 것입니다. 이것은 문맥을 살펴본다면 전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문맥은 특정한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59. 몇 가지 예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33을 보세요. “곧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내가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유익을 구하면서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같이 하라.”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갈라디아서 1:10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 자, 어느 말씀을 따라야 합니까? 한쪽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맥을 살펴보면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0.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말하는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의 음행에 대해서 경고했을 때 그들이 모두 기뻐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회중 가운데 퍼진 음행의 죄를 경고하는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을까요? 형제를 고소하지 말라는 말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이었을까요?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이 여자들을 기쁘게 하는 말이었을까요? 머리 모양에 대해서 지적한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한 말은 그들을 기쁘게 하는 말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61. 계속해서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24입니다. “아무도 자기 것을 구하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구하라.” 27-33도 보겠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 중에서 누가 너희를 잔치에 초대하여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그러나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이르되, 이것은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이라, 하거든 그것을 알게 한 사람과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 땅과 거기의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니라. 내가 말하는 양심은 네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이니라. 어찌하여 내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은혜로 참여할진대 어찌하여 내가 감사드리는 것으로 인해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어떤 실족거리도 주지 말되 곧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내가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유익을 구하면서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같이 하라.”
62. 문맥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만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들 앞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얻기 위해서 그들을 기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선교사로 다른 대륙에 있는 먼 지역으로 가게된다면 저는 미국 사람이 아닌 그 지역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지으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건전한 교리를 버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은 여러분의 태도로 인해서 사람들이 여러분이 전하는 것을 듣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태도는 듣는 사람에게 적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미국의 침례교회들이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63. 갈라디아서 1장의 문맥을 보겠습니다. 6절을 보세요.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는 어떤 자들이 있어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도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
64. 갈라디아서 1장의 문맥은 이렇습니다. 제가 만일 여러분의 동네에 갔는데 거기서는 신발을 신지 않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면 저도 신발을 벗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는 동안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제가 여러분의 문화를 존중함을 보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으므로 저는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가 그렇게 함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받아들여질 것이고 여러분은 저의 말에 경청할 것이며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진리를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신발을 벗은채로 여러분과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여러분의 목사가 저에게 “우리 동네 주민들은 모두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저는 그 목사가 저를 좋아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 의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명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반해서 죄를 짓는다면 저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진리를 전하는 우리의 태도는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내용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0장과 갈라디아서 1장은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65.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26-28을 보세요.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포도주와 주님의 피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본문 어디에 “포도주”라는 단어가 있는지 찾아보세요. 본문을 보면 “포도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잔”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66. 왜 주님께서 “잔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신줄 아세요? 그것에 대해 논쟁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음료가 무엇인든 간에 그것은 주님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잔에 든 음료가 아닌 주님의 피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 나서야 잔에 든 음료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언급하십니다. 29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67. 문맥을 보시면 피에 대한 언급이 먼저고 그 다음에 잔에 실제로 든 음료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잔에 든 것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에 든 것이 주님의 피로 변했다고 말씀하지 않고 그대로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해 보세요. 주님께서는 잔이 상징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잔 안에 있는 음료가 무슨 특별한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잔”을 자신의 피로 상징해서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 절에서 잔 안에 있던 것이 주님의 피가 아닌 포도나무의 열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68.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에 있는 것을 다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그것을 마시라(Drink ye all of it)”(마 26:27) (영어 성경을 보면 “너희는 그것을 다 마시라”가 바른 우리말 번역임을 알 수 있음)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잔 안에 든 음료를 다 마셨습니다. 만일 잔 안에 든 것이 주님의 피라면, 제자들이 주님의 피를 다 마셔버렸기 때문에 주님께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흘리실 피가 더 이상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문맥을 살펴본다면 성경에는 결코 모순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2과 8가지 성경 연구 방법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2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디모데후서 2:15을 보세요. 만일 여러분에게 킹제임스성경이 없다면 우리가 살펴보려는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킹제임스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연구하라(study)”는 명령을 하는 유일한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도둑질을 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술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연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출 20:13)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연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출 20:16)는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연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나는 설교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어”, “나는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 “나는 모임을 인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어”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청중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3. 저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원합니다. 제가 하는 말과 행위가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해요. 그러나 제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하라고 하셨고 무엇을 행하라고 하셨는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말과 행위를 인정해 주실 겁니다.
4. 우리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믿고 행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자신이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을 연구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알아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가인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지만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5.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옳다고 느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나 사람들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마 25:21)라고 말씀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원합니다.
6. 요한복음 5:39을 보세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주장하거나 자신들만 예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바른 교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탐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탐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참된 진짜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7.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는 예수님을 위한 것이고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의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찾아보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찾아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찾아보면 내가 무슨 말을 했고 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8. 성경을 찾아보고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해야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출 20:12)고 말씀하신 동일한 주님께서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출 20:3)고 말씀하신 동일한 주님께서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과 정확히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우상숭배자가 아니예요. 저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경을 탐구하고 계신가요? 만일 여러분이 성경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우상숭배자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면서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9. 우리는 오늘 성경을 연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경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성경을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적지 않은 분량의 책입니다. 이 책은 암기하고 읽고 바르게 연구해야 하는 책입니다.
10. 성경은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첫째 방법은, 성경을 한 권씩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읽는 것은 전체를 읽되 연구는 한 권씩 하세요. 먼저 연구할 한 권을 선정하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음의 질문을 하세요.
(1) 이 책의 기록자는 누구인가?
(2) 이 책은 언제 기록되었는가?
(3) 이 책은 어디서 기록되었는가?
(4) 이 책은 누구에게(누구를 위해서) 기록된 것인가?
11. 성경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중요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이집트의 왕에게 항복하고 그의 포로로 잡혀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아주 오래 전에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많이 배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저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저녁에 어떤 식당에서 밥을 먹자는 쪽지를 주었는데 누군가 그 내용을 읽어본다고 해서 제가 그 사람의 밥값을 계산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디서 저녁을 먹자는 쪽지를 쓴 대상은 저의 아내이지 그것을 읽게될 모든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주의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시기를 위해서 기록된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모든 책들은 특정한 시기와 대상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12. 성경이 어떠한 상황에서 기록되었는지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들면 욥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욥기를 보면 재가운데 앉아서 그릇 조각으로 피부병이 난 살갓을 긁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같은날 10명의 자식을 읽어버렸고 엄청난 재산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세 친구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그 친구들은 고난에 처한 그 사람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왜 그가 고난당해 마땅한지를 설명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13. 제가 욥기를 아무데나 펴서 읽는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맞지만 욥에 대해서는 틀린 기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했던 말은 옳은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욥에 대해서 한 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욥이 처한 상황과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면서 그 예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내가 아노니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욥 19:25) 저는 성경의 다른 부분을 통해서 욥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욥이 그분을 알기도 전부터,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욥의 구속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욥기의 다른 부분을 보면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욥 2:4)라는 구절도 나옵니다. 이것은 사탄이 한 말이고 사실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데반도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2:4은 성경에 기록되었있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어떤 상황에서 그 말씀이 기록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5. 예레미야가 기록한 것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도시가 파괴되고 이제 더 이상 좋은 날을 못보게 될 것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아침에 성경을 묵상하면서 예레미야애가를 읽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 왜 저에게 고난을 주시는 겁니까?”하고 울부짖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레미야에 기록된 고난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6. 1960년 대에 포크송 가수들은 전도서의 내용을 즐겨부르고 여호와의 증인들도 전도서를 좋아하며 자주인용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내용은 해 아래서 인간의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때에는 연구하는 그 부분의 말씀이 기록된 상황에 대해서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17. 성경의 한 책을 연구할 때 고려해야할 또 다른 점은 바로 그 책의 내용의 성격이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에 대한 것인지, 시인지, 역사인지, 예언에 대한 것인지, 교리에 대한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들면, 사사기는 기본적으로 역사서입니다. 물론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딤후 3:16)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성경학도라면 신약 교회의 교리를 에베소서에서 세우지 사사기에서 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사람을 조각으로 짤라서 상자에 담아 각 교회의 회원들에게 택배로 배송해야 할까요? 사사기를 보면 모임에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신약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실행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분들은 집에 가서 사사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결혼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신가요? 그러면 무도회장에 가서 춤추는 사람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잡아서 집으로 데려가세요. 이것이 바로 사사기에 나온 배우자를 얻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실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씀입니다.
18. 보시는 바와 같이 성경에는 역사서가 있고 교리서가 있습니다. 시편의 경우 시와 찬양과 하나님께 경배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아무 말씀이나 교리의 근거로 삼으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물론 시편에는 예언도 있고 교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들면, 시편에 나온 다윗의 시편 중에는 원수의 아이들까지 모두 죽이는 것이 기쁨이라는 내용을 담은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기도이기는 하지만 신약 교회의 교리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19.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 한 권의 책을 연구하는데 그 책의 주제와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요엘서는 기본적으로 예언서입니다. 요엘서에는 피와 연기와 표적과 기적에 대해서 말하면서 주님의 오심이 어떠할 것인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주님은 이미 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우리의 혼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 피와 연기와 표적과 기적은 없을 것입니다. 큰 나팔 소리가 나면서 우리는 각자의 이름을 듣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요엘서는 모두 사실이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적용되고 해당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의 한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의 일반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20. 성경에서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의 요지(keynote)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심입니다. 에베소서의 요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입니다. 누가복음의 요지는 인간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각각의 책마다 다 다른 요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책의 요지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21.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이 지적하고 있고 바로 잡고 있는 오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책들은 특정한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는 구원을 율법과 결부시키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천사숭배의 오류를 지적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골 2:18). 또한 골로새서는 인간의 철학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위에 두려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골로새서를 기록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휴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신약 서신서의 경우 교회들 사이에 퍼져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22.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이 주고 있는 실행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이 가리치는 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연구하고 있는 책이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문제에 대해서, 교회내에서 형제자매들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체들을 용서하고, 친절히 대하고, 관대하게 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날마다 실행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 연구하고 있는 특정한 책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23.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에 나와 있는 약속과 예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책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되었는지 아니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24.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에는 특정한 사람의 전기가 나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의 책들 중에는 등장인물의 전기가 기록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룻기, 에스더서, 욥기 등은 그 자체 한 사람의 전기를 온전히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책은 여러 사람의 전기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창세기의 경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기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 등은 다양한 여러 사람의 전기로 가득합니다. 그 책이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25. 성경에서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이 성경의 다른 책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의 경우 대략 20여 군데 이상에서 창세기와 연결되는 부분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는 일정한 부분에서는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26.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의 연대와 역사적인 위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 책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건의 순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포함된 66권의 책들은 기록연대나 순서에 따라서 정렬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역사적인 시간순서에 따라서 정리하려면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이사야서의 경우 여러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성취되는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했다가 대환란에 대한 예언을 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고난 받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27.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그 책은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알맞은 책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에스라와 느혜미야기는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쌓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내용임이 분명합니다. 이 책들은 당시의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 실제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신약 성도들의 실행과 관련된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을 재건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의 집을 짓는데에만 돈을 써버린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우리에게 영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을 위해서 얼마의 돈을 쓰고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얼마의 돈을 쓰는지 돌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솔로몬의 성전의 재건을 위해 돈을 쓰지 않은 것으로 인해 우리를 책망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28. 성경의 책들 중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빌립보서)’과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베소서)’, ‘로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서신(로마서)’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이에 반해서 성경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지 않는 책들도 있습니다.
29.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찾아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찾아봅니다. 오랫동안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느낀 것은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흥미있는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가랴, 호세아, 요엘, 계시록 등에 나오는 예언과 종말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때로는 출애굽기 이후에 언약궤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 하기도 하고 에스겔에 나온 여러가지 환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질을 죽이고 주님께 순종해야 함에 대해서는 별로 공부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지 얼마 않된 사람 중에는 재림시에 주님의 입에서 진짜 불이 나오는지 궁금해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불 같은 말을 절제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권을 연구할 때 그 책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며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30. 성경을 연구하는 둘째 방법은, 주제별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사랑(love)”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연구할 때, 사랑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디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는지, 사랑이 실패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비슷한 말인 ‘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성경에서는 누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등 사랑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립니다.
31. “거룩”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공부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처음 시작하는 창세기부터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지 않게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한 가족을 선택하시고 한 민족을 선택하여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제단과 거룩한 제사장직과 거룩한 의복과 거룩한 희생제물에 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거룩한 영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계시록에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완전히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거룩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32. 이 외에도 주제별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주제들은 많습니다. 믿음, 구원의 확신, 하늘나라 등 수없이 있습니다. 주제별로 성경을 연구할 때도 성경의 책 중 한 권씩 연구하는게 좋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거의 매 구절마다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에 대해서 연구할 때 요한복음을 가지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심에 대해서 연구할때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들을 보면 누군가가 회심할 때 무엇인가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는지, 그 사람의 관심사를 어떻게 복음과 연관시키는지 회심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고 회심의 결과는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되어 주님을 증거하고 싶다면 사복음서와 사도행전만큼 좋은 안내서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고 사도들은 어떻게 설교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거리설교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 두 배를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나온 설교를 보면 항상 죄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그 두 배 이상의 내용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해 주셨는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리설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33. 계시록에 보면 “일곱 가지의 주님의 복”과 “일곱 가지 승리”가 나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안다”는게 무엇인지 나옵니다. “우리가 아느니라”는 표현이 거듭해서 나옵니다. 주제별로 성경을 연구하되 한 번에 한 권씩 하는게 좋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일곱 가지 걸음(seven walks)”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에는 “다섯 가지 귀중한 것들”이 나옵니다. 잠언에는 “일곱 가지 마음”이 나옵니다. 흥미롭지 않으세요?
34. 성경에는 연구할 만한 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성경 연구는 많은 열매를 맺고 복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아무런 유익도 없이 무익하게 끝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성경을 열심히 찾다보면 성경의 금광에서 엄청난 금덩어리를 발견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성령님의 일곱 가지 사역”과 “기도의 일곱 가지 목적”과 “말하지 않아야 될 일곱 가지 것들”이 나옵니다. 또 에베소서에는 “be로 시작하는 18개의 구문”, “15개의 of God”, “11개의 of Christ”, “일곱 가지 일들”이 나옵니다.
35. 성경을 연구하는 셋째 방법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유사한데, 핵심 단어(key word)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단어는 주제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빛”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이 빛이 무엇이고 이 빛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이 많이 나옵니다. 그 명칭들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말씀”이나, “어린양”이라고 불리는지 살펴보고 구약 성경에서 어린양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서로 연관성을 지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캄캄한 어둠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을 지으신 장면도 요한복음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새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이 친히 빛이 되시는 모습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한 권의 책을 연구할 때 핵심 단어별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36.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단어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속”이나 “소망” 같은 단어는 물론이고 “그리고(and)” 같은 단어도 충분히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but)”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앞뒤 문장을 극적으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2:3에서 우리의 지난 상태를 묘사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진노하시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4절을 보면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 짐을 볼 수 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여기서 나온 단어가 “그리고”가 아니라 “그러나”임에 감사합니다. 진노의 자녀들에게 나타나신 분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영어 성경에서는 4절이 “but”으로 시작함).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나(but)”는 엄청난 단어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한 단어씩 연구하는 방법은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37. 성경을 연구하는 넷째 방법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의 생을 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 사람을 쓰셨고 그는 하나님과 어떠한 교제를 나눴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의 삶을 살펴보고 신약 성경에서는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도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의 믿음, 불순종, 실패, 승리, 그리고 그가 받은 믿음의 자녀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38. 성경을 연구하는 다섯째 방법은, 성경을 연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성경 읽기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성경을 연속적으로 읽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성경을 연속적으로 순서대로 읽으면서 연구하면 다음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나오고 출애굽기로 이어집니다. 출애굽기는 속박에 대해서 나오고 레위기로 이어집니다. 레위기와 신명기는 경배에 대해서 나오고 여호수아로 이어집니다. 여호수아에는 약속의 땅이 나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은 문에 바른 어린양의 피부터 시작합니다.
39. 이제 이것을 신약 성경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로마서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고린도전서는 죄가 가져온 속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에서는 하나님께 경배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록은 인간이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거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금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요약에는 모두 어린양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성경을 순서대로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순서로 성경을 한 데 엮으신 것이라면 성경을 순서대로 연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40.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창세기부터 사사기를 연결해서 보면, 타락과 율법을 주심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기부터 역대기까지 연결해 보면, 왕권 아래있는 정부의 설립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시가서에는 찬양과 경배와 지혜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법과 권위에 순종해야 주님께 진정한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41. 신약 성경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로마서에서 기본적인 교리를 배웁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실제적으로 섬기기까지는 배운 교리를 진정으로 알 수 없습니다. 다 배우고 나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먼저 섬기기 시작해야 참된 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보다 사도행전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김보다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바로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보다 사복음서가 먼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에 대한 교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알고(사복음서), 섬기고(사도행전), 교리를 배우고(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서신) 나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요한서신과 일반서신)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이키고 죄에 대해 승리하고 악한 자를 이기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주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치고나면 나팔 소리가 울리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하늘로 올라가게(계시록)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에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42. 에스라와 느혜미야기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위에는 여전히 그들을 박해하는 있습니다. 에스더에서는 한 사람의 악인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전체 유대인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밉니다. 욥기는 42장(42개월!)을 통해서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고 마귀에게 박해받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다 마침내 욥기 42장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을 회복하시고 그의 건강과 재물을 모두 돌려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편 2편에서는 왕들이 모여 주님을 대적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버리시며 비웃으시는 것이 나옵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들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것은 성경의 순서와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순서대로 연구하면 성경에 기록된 진리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한 일종의 상징적인 진리까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43. 킹제임스성경은 히브리어 성경과 다른 순서로 엮여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도 외경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둘 다 39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지습니다. 말라기 4:4-6을 보세요.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모세의 율법을 법규와 법도와 함께 기억하라.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아니하게 하리라.” 킹제임스성경의 구약은 경고로 끝나고 있지만 경고만이 아닌 복도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44. 이제 히브리어 성경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것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들의 유업도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약속된 메시야를 거부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밖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으므로 전세계로 흩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역대기하 36:23을 보세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 곧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을 내게 주시고 또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 누가 그분의 백성이냐?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
45. 유대인들은 지금 주님께 불순종함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습니다. 전세계 어디에 있건 간에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마직막으로 보게 되는 구절은 역대기하 36:23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인들의 성경 마지막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한다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흥미롭지 않으세요? 우리가 믿는 킹제임스성경의 구약과 유대인들의 성경은 정확히 같은 것을 담고 있지만 순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서로 다른 것도 주님의 의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순서대로 연구해야 하고 그렇게 순서대로 연구함으로 인해 놀라운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46. 성경을 연구하는 여섯째 방법은, 연대기순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엮은 순서대로가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서대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기를 읽으며 다윗이 밧세바로 인해 죄은 후에 나단이 다윗에게 들어오는 부분을 볼 때, 시편 51으로 가서 다윗이 주님께 회개하는 것이 기록된 부분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사무엘기로 돌아와서 나단이 다윗에게 주님께서 그의 죄를 치워 버리셨으므로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에 연결되는 부분은 시편 32편으로 가서 다윗이 “자기 범죄를 용서받고 자기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영 안에 간사함이 없고 주께서 불법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 32:1-2)라고 노래하는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대기적으로 연구하면 또 다른 각도에서 진리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다른 각도에서 계시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매우 큰 복입니다.
47. 이것은 제가 오래 전에 사용하던 매우 쉬운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런식으로 하면 성경을 주제별로, 핵심단어별로, 한 사람씩, 연대기적으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공책을 준비해서 맨 윗 부분에 “휴거”라고 적으세요. 다른 페이지 맨 위에 “적그리스도”라고 적습니다. 또 다른 페이지 맨 위에는 “대환란”이라고 적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페이지 맨 위에 “영원”이라고 적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적으면 됩니다. 이렇게 관련된 핵심 단어를 적으면 대략 25페이지에서 30페이지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이제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휴거와 관련된 것이 나오면 첫 페이지로 가서 기록합니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나 대환란에 대한 것이 나오면 해당 페이지로 가서 관련된 것을 기록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 종말론에 대한 성경의 관련 기록을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48. 성경의 진리들은 성경책 위에 그냥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왜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요 5:39)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신실하지 않은 성경학도나 열심이 없는 성경학도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덩이가 아무렇게나 길에 굴러다닌다면 금덩이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 금덩이를 발견하면 매우 흥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금덩이가 아무데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주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한 진리를 여기에 조금 기록해 놓으시고 저기에 조금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진리를 한 군데에 모아두지 않으신지 아세요? 그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진리를 사모하는지 알기 위함입니다.
49. 여러분이 진심으로 진리를 알고 싶어한다면 여러분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리에 굶주려 있다면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훌륭한 광부라면 찾고자 하는 광물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하루이틀 정도 땅을 파보고 나서 “에이, 아무것도 없네 뭐. 나는 금덩이를 찾을 수 없을 거야.”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결국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찾아보고, 탐구하고, 깊이 파보고, 낱낱이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결국 성경의 보물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성경의 금덩이를 발견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경을 연대기순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50. 성경을 연구하는 일곱째 방법은, 체계적으로(조직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주제에 대한 모든 관련 구절을 한데 모아서 면밀히 비교하고 조사한 후에 성경의 다른 부분과 모순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정녀 탄생에 대한 교리를 연구할 때 성경에 나온 모든 관련 구절을 찾아보지 않고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교리를 정리할 때는 한두 문맥만 살펴보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구절을 살펴보고 검토한 후에 교리로 정리해야 합니다.
51. 제가 구원받은 직후 성경 연구에 있어서 어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형제교회에 속한 형제들에게 성경을 배웠는데 그들이 가르쳤던 것 중에는 성경의 모든 관련 구절을 찾아보지 않고 결론을 내리고 교리로 만들어 가르친 것이 있었습니다. 후에 저는 그들이 가르친 주제와 연관된 구절 중 그들이 검토하지 않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명백한 구절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발견한 구절을 관련 구절로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어떤 선교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좀 극단적인 이야기일지 모르나 형제교회의 형제들은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을 믿지는 않고, 침례교회의 형제들은 성경을 믿기는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침례교인 중에는 “저는 킹제임스성경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침례교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연구한다면 그렇게 “목사의 권위”만을 강조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52. 성경의 교리를 연구할 때에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관련구절을 찾아봐야 합니다. 휴거에 대해서 연구할 때에는 모든 관련 구절과 더불어 성경에 기록된 하늘로 들림받아 올라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개인적으로 하늘로 들림받아 올라가는 사람들이 나오고 신약 성경에는 좀 더 여러 번에 걸쳐 단체로 들림받아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AD 33년에 주님의 부활 후에 들림받아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의 무리(구약 성도들)가 있고 대환란 전에 들림받아 올라가는 사람들(신약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의하면 환란때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다 목베임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들림받는 장면이 나옵니다(환란 증인들과 성도들).
53. 저는 휴거에 대한 이러한 것들을 공부하고 교회의 목사님께 휴거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일어나서 사람있는 사람과 함께 들림받아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성경에는 세번의 휴거가 있는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장로들에게로 불려가 휴거는 오직 한번 뿐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무덤이 열리고 주님과 함께 올라간 사람들은 무엇이냐고 묻자 장로들은 그저 “그것은 휴거가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체계적으로(조직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저는 그 가르침대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신학체계가 성경의 진리보다 위에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예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저에게는 매우 놀라우면서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54. 성경을 체계적으로(조직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모든 관련 구절들을 면밀히 살펴본다는 것이지 전체 관련 구절들 중 일부분이나 혹은 한 구절의 일부분만을 취하여 검토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관련 구절을 살펴보는 중에 자신이 생각했던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나오면 그때는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구절, 내가 믿던 것과 다른 구절이 나오면 나의 교리와 나의 입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성경 연구에 있어서 이것만이 유일한 안전한 길입니다.
55.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버렸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펴서 보여줘도 자신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교리는 무조건 거부려고 합니다. 그러한 자세라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30~40년 한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목사도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니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십년을 교회에 다녀도 성경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56. 마지막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여덞째 방법은, 하나의 본문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15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은 하나의 본문이고 하나의 구절입니다. 본문에서 “내가(I)”는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할 때 보고 계셨고 그들에게 가죽 코트를 입히셨으며 그들을 동산에게 쫒아내셨습니다. 주님은 빛을 만드시고 어둠도 만드셨으며 하늘도 만드시고 땅도 만드신 분입니다. 화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찾아봐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57. “할 것이요(will)”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시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항상 성취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심에 대한 것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 원하시고(벧후 3:9) 또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살전 4:3).
58. “적개심을 두리니” 성경은 평화만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평화의 하나님이 아니시면 항상 사랑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데 모아 잘 살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 가운데 적의를 두십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서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큰 적개심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적개심일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거듭난 사람들 사이에도 적개심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과 바른 것 사이에, 진리와 오류 사이에 적개심이 있습니다.
59. “네 씨” 지금 주님께서는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까? 14절에서 주님께서는 뱀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고 15절에서도 “여자의 씨”라는 표현이 나오는 걸로 봐서 계속 뱀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뱀은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뱀과는 다른 뱀이 분명합니다. 이 뱀은 마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마귀도 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마귀가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고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60. “여자의 씨” 여자는 타락해서 남자에게 선악과를 주어 먹게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저주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의 가장 큰 약속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얼마나 놀라운 긍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여자에게 진노하셔서 단순하게 여자를 쫒아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여자를 책망하시거나 인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을 망쳐버린 여자를 원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여자야, 내가 너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겠느니라. 너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한 사람이 네가 망쳐놓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긍휼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브를 없애버리시고 새로운 여자를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망가진 바로 그 상황에서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여자에게 큰 소망의 약속을 주시고 그 결과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을 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61. “여자의 씨”라는 표현은 연구해볼 만한 말입니다. 본래 “씨”는 남자에게 속한 것이지 여자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15의 말씀 안에는 “남자의 씨” 없이 태어나게 될 한 사람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우리를 베들레헴을 거쳐 갈보리를 지나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
62.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주님께서 누구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입니까? 이 자는 머리가 있고 씨도 있으며 여자의 씨와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의 씨는 갈보리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했고 아마겟돈에서 다시 한번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마직막으로는 불호수에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는 말씀은 큰 상처를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머리에 상처를 입으면 가장 큰 타격을 입습니다.
63.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뱀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여자의 씨로 가면 마귀를 상하게 할 것이고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과정에서 나도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 53:5)
64. 이와 같이 창세기 3:15 하나로 성경의 여러 주제를 가르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 전체를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 하나의 구절을 몇 달 동안 연구하면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교회가 왜 영적으로 죽어있는지 아십니까? 설교자와 성도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설교가 생명력은 전혀 없이 무미건조한지 아세요? 몇 년 전에, 어떤 경우는 수십년 전에 신학교에서 배운걸 말만 조금 바꿔서 그대로 재탕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녁에 연구한 싱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배부르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보고가 있어요. 그걸 캐내서 성도들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65. 성경의 한 부분을 연구하세요. 요한복음 3:16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어 성경은 “For”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앞에 구절에 대한 설명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는 누구시며 무엇을 하시는지, “하나님”이라는 이 단어 하나를 공부하려면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66. “사랑하사”(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먼저 나옴) 여기서 시제를 보면 과거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loved).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고 그것을 입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입증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사랑을 입증하신 방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매우(so)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so”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겁니다.
67. “세상을”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특정한 어떤 세상(the world)”입니다. “주셨으니” 사랑은 그저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무엇인가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동기를 제공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68. “주셨으니” 주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아담에게는 가죽 코트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대신해 바칠 제물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장자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어린양의 피를 주셨습니다. 광야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만나와 물을 주셨습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언가 주신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물론 사람들도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것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이것은 마치 수천만원짜리 자동차를 선물받고 나서 작은 카드에 고맙다고 써서 주는 것과 같습니다.
69. “자신의 독생자를” 이것만으로도 한달 내내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께는 아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아들은 많은 아들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아들입니다. “유일한(only)”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독생(begotten)”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들(Son)”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무엇일까요?
70. “누구든지”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시지만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쳐다보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기에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71. “그를 믿는 자는” 모든 거짓 종교가 여기서 걸려 넘어집니다. 침례나 세례를 받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회원 등록하는 것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하는 것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72. “그를” 예수님에 대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조나 신앙고백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를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믿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단순히 사람들이 믿지 않는게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것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3. “멸망하지 않고” 성경에서 말하는 멸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옥에 가고 불호수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얻게(have) 하려” 예수님을 믿으면 언젠가 구원받게 되는 것인가요? 언젠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인가요? 성경은 주님을 믿으면 현재 시제로 영생을 가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순간 동시에 영생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성경은 영생을 가진다고 할 때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74. 가장 좋은 부분은 바로 “영존하는 생명”입니다. 영존하는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이 죽지않고 영원히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생명을 만드셨고 유지시키십니다. 또 육체의 생명이 있고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75. 우리가 잠깐 살펴본 것처럼 만일 성경을 열심히 참고 탐구한다면 요한복음 3:16은 연구할 부분이 엄청 많은 구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세히 연구한다면 요한복음 3:16, 한 구절을 6개월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 한구절을 체계적으로(조직적으로), 연대기순에 따라, 연속적으로, 한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핵심 단어를 찾아가며, 주제별로 가르친다면 6개월간 가르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76. 물론 이 구절을 왜곡해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방문한 어떤 교회에서 그 교회의 목사가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십일조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이런식으로 십일조와 관련 지어서 설교했습니다.
77. 똑 같은 거리를 자동차를 타고 순식간에 지나가면 적은 것만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같은 거리라도 천천히 걸으면서 간다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빠른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면 끝없이 넓은 파란 물결만이 보일뿐입니다. 그러나 산소통을 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셀 수 없이 많은 생물들을 보게 되고 그 경이로움에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빨리 읽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속 300킬로미터로 성경을 지나갑니다. 그렇게 하면 얻는게 너무 적습니다. 이제 속도를 늦추고 차에서 내려 천천히 성경의 길을 걸으면 놀라운 것을 발견하면서 “하나님 저에게 성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성경의 바다로 뛰어들어 하나님의 태평양에 얼마나 많은 진리가 있는지 직접 눈으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바다 속에 들어갈 때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놀랄때가 있습니다. 바다 속에서는 전에 보았던 것도 빛이 다른 각도에서 비취면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쓸 수 있는한 많은 시간을 들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보면 주님께서 놀라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여러 가지 성경 연구 방법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과 성경 읽기에 관한 9가지 원칙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이 과의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How to study and teach the Bible Part 1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 것입니다.
1. 들어가는 말
1. 먼저 시편 33:4을 보시겠습니다.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분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도다.”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여러분이 반드시 암기하고 있어야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주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제임스 낙스는 옳으며 그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도다.”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 어떠한 신학자나 목사라도 “주의 말씀”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자리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교회나 단체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침례교회는 옳으며 침례 교회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도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분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도다.”라는 말씀에서 “주의 말씀”을 대신 할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2.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어떤 목사나 설교자의 말에 두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에 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기초이고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번 과목의 기초와 뼈대를 모두 주님의 말씀에 두고 그 위에 하나씩 쌓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기초를 쌓아가다보면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부분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아주 쉬운 부분부터 시작해서 점차 어려운 부분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3.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 가장 먼저 깔아야 할 기초는 바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공부의 가장 첫째가는 기초는 매우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에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어.”라고 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주에 성경을 충분히 읽으셨나요? 오늘 성경을 충분히 읽으셨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충분히 묵상했나요?
4.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재미있고 육신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미없고 즐겁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는 모두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입니다. 따라서 서로 각기 다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체로서 모두 똑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요. 모두가 입이나, 귀나, 눈이나, 손이나 발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자신이 하기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 해서는 않됩니다.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 설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5.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명령하셨는데 그 명령에 즐기면서 순종할 수 있다면 그것을 쉽게 할 수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별로 즐겁지 않고 또 능숙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6.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바로 성경 읽기입니다. 성경을 읽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영적인 삶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행동도 성경적인 행동이 아닐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지침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여러분이 걷는 인생도 성경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인도해 주시려고 해도 성경을 모르면 여전히 육신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은 것이지 여러분이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은 주님의 말씀과 반대의 경우에 있거나 전혀 상관없는 방향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7. 여러분은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 읽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을 읽으라(read)고 말씀하십니다. 또 성경은 성경을 연구하고(study) 찾아보라(search)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은 읽을 수는 있지만 연구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는데에서 멈추지 말고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8.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이 읽고 연구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타고난 성품이 순종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옳게 행하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적 의미의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순종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9. 순종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찬양입니다. 성경은 찬양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정의합니다. 여러분은 읽을 성경을 가지고 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읽은 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계시해 주신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해서 찾은 놀라운 보화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하신 적이 있습니까? 순종할 주님이 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시고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께 감사하고 있나요?
10. 우리는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풍족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역사상 우리보다 더 풍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풍요속에서 살아갑니다. 미국사람들을 예로들면 80%이상의 사람들이 케이블 TV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98%의 미국인들은 전기가 들어오는 집에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부요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난 수천년과 비교해 본다면 이것은 분명한 풍요입니다. 여러분이 300년 전에 전기가 들어오고 TV가 있는 집에 살았다면 여러분은 엄청난 부자인 것입니다. 아마 주위 사람들은 여러분이 외계에서 왔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전 시대와 비교해 보면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받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풍요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복이 어떠한 것인지 생각하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드리는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복을 위해 섬기는 겁니다.
11.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성경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여러분은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성경을 읽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인간 중재자 없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12.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찾아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순종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는 성경을 읽고 사람들은 우리를 읽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알기 원하면 성경을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의 말 보다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판단합니다. 우리가 개인의 삶과 가정 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간증을 지키고 균형을 잡는 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13. 이제 성경의 특징에 대해서 몇가지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항상 업데이트 되어 있으며 현재의 필요에 부응합니다. 어떤 시대나 어떤 문화나 어떤 인종이나 어떤 문명이든 간에 성경이 뒤떨어졌다든지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이건 어디에 있건 간에 상관없이 성경을 읽는 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14. 기본적으로 성경은 너무나 평이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적당합니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어느 누구에게도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시대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15. 성경은 유대인들이 기록했지만 이방인들이 사랑한 책입니다. 성경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책입니다. 이러한 책을 세상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은 동양에서 기록되었지만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은 문화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게 하기도 하고 사랑하게 하기도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이 세상에 성경과 같은 책은 없습니다.
16. 성경은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미움으로부터 살아남은 책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어려움과 죽음의 순간에 환영받는 책입니다. 마크 트웨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임종의 순간에 “톰 소여의 모험”을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 때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책은 성경입니다.
17. 성경은 죽음 이후에 대해서 계시해 주는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을 제외한 다른 모든 책들은 인간의 추측과 상상과 미신에 불과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죽음 이후에 대한 유일하게 정확한 계시입니다.
18. 오직 성경만이 역사학자들, 고고학자들, 언어학자들, 발명가들 그 밖에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의 비평을 견뎌낸 유일한 책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단 한 구절이라도 잘못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떤 돌맹이나 진흙 덩어리나 뼈다귀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매우 정확한 책입니다. 지난 수백년간 중동을 탐험했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지명과 역사가 사실이었음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몬몰경에 기록된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단 하나도 밝견된 적이 없습니다. 몰몬경을 입증하는 단 하나의 도시도, 마을도, 경계표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지도를 만들고 이 세상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 성경은 참된 과학과 일치합니다. 화학, 지질학, 천문학, 수학, 생물학 및 모든 종류의 예술과 과학과 일치합니다. 어떠한 천문학자도 성경과 반대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어떠한 과학자도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것을 태평양에서 끄집어내지 못했습니다. 현미경으로 아무리 들여다 봐도 성경과 모순되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참된 과학이 있는 곳에는 항상 성경이 있습니다.
20.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매우 부정직한 세상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세상입니다. 뉴욕타임즈에 나온 베스트 셀러 리스트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라가기 위해서 몇 권의 책이 판매되어야 하는지 아세요? 5만권이면 됩니다. 별거 아니지요? 5만 권이면 베스트 셀러가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일반 독자가 아무도 책을 사지 않아도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5만권의 책을 누가 구입하는지 아세요? 서점에서 구입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쓴 책을 아무도 읽지 않아도 대형 서점에서 구매해 주면 그 주의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공립도서관에서 대형 출판사의 책들을 매년 일정량 구매해 줍니다. 만일 여러분이 쓴 책이 공립도서관의 비치 도서로 선정이 되면 그 책은 수만권이 팔리게 됩니다. 그러면 도서관의 서가에 꼳혀 아무도 읽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겁니다. 빌 클린턴이나 힐러리 클린턴의 책이 이런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쓴 책은 아무도 읽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됩니다. 공립도서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누구나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21. 주간, 월간, 년간 베스트 셀러 리스트의 1위가 되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베스트 셀러 리스트 1위를 차지할 만큼 아직도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 실제로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빠지는지 아세요? 그 이유를 아세요? 리스트를 작성하는 사람이 성경을 픽션과 논픽션 중 어느 리스트에 넣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예 빼 버린 것입니다. 만일 성경을 픽션 리스트에 넣으면 성경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항의할 것입니다. 논픽션 리스트에 넣으면 성경을 않믿는 불신자들이 항의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성경은 리스트에서 빼버리고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고 아무도 구매하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 책인양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매일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입니다. 반지의 제왕이 한때 인기있었다가 시들해 졌습니다. 해리포터가 그 뒤를 이었다가 시들해 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습니다. 확실히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임에 틀림없습니다.
2. 성경 읽기에 대한 9가지 원칙
22. 오늘 우리는 성경을 읽기의 9가지 원칙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째 원칙을 보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2:13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할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성경은 영적인 책입니다. “성경이 영적인 책이다”라는 말은 성경에는 여러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이 세상의 다른 책들에는 없는 영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23. 여러분은 책을 읽으면서 졸지만 않는다면 셰익스피어가 쓴 모든 책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테니슨이나 킷츠나 콜리지(우리나라로 치면 윤동주, 김유정, 이상의 글을 읽으면서)의 글을 읽으면서 그 안에 있는 참된 진리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의 글에는 어떤 영적인 진리가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기록된 그 자체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포츠 신문을 읽으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성령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리더스다이제스트를 읽기 전에 그것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진리가 숨겨져 있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특별한 것이 있어서 여러분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저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분을 믿어야만 합니다.
24. 어떤 책을 읽을 때 그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저자와 만나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해도 그 책을 이해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의 저자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분만이 독자를 진리로 인도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물론 성경의 내용이 무슨 비밀이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25. 다시 고린도전서 2장으로 가서 1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여러분과 저는 인간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밀한 개라 할지라도 인간과 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개는 서로 다른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인간과 개 사이에는 의사소통의 한계가 있습니다.
26. 계속해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알던 것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기 계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분의 말씀을 알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일 아닌가요?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아주 친밀한 교제를 맺은 관계로 보이지는 않아요. 구약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께서 옳다고 말씀하신 것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다 기록하고 나서 자신들이 기록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 설명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설명해 주실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은 너희들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구나. 나중에 설명해 주도록 하겠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 말씀을 받은 인간은 성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27. 이제 신약시대의 우리들은 어떤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만일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추고 계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성경은 모두 여러분에게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책일 뿐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이 온전히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성경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언어학 박사학위가 있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자신 안에 성령님이 내주해 계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성경과 같은 책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성경처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님이 내주하실 것을 요구하는 책은 없습니다.
28. 13절에서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느니라.” 인간은 본성적으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속하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관점과 기준으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여기저기서 증거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증거가 조화를 이뤄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어 매우 명백해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로 성경의 저자가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9. 고린도후서 3:12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우리에게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가 매우 분명한 말을 사용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 같이 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졌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 이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베일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지리라.”(고후 3:12-16)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베일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의 시력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눈과 성경은 모두 멀쩡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과 성경 사이에 어떤 베일이 있어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베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불신입니다. 믿을때 하나님께서는 그 베일을 벗기시는 것입니다. 같은 눈으로 같은 책을 보는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이 영적인 시각을 가렸었기 때문입니다. 해리포터는 언제든지 읽기만 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책들에는 영적인 계시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30. 둘째 원칙은, 우리는 성경 그 자체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지않고 성경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강해한 책도 있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설교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를 읽어야 합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 자체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일을 벗겨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원한다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1. 이사야 34:16을 보시겠습니다. 위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주님께서는 단순히 성경을 구매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읽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7:11도 보세요. 여러분은 읽고 읽고 읽고 읽어야 합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지요. 설교자가 전하는 내용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아세요? 바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어보면 그 설교가 성경과 부합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고 그 설교를 성경과 비교해 보고 성경과 일치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읽고 읽고 읽어야 합니다.
32. 디모데전서 4:13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에 마음을 쏟으라.” 이것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목사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설교자는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 준비하고 성경 공부 준비도 하고 심방도 해야 하고 복음도 전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요. 그러나 읽는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공부 인도를 준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33. 세째 원칙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비평하면서 읽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순종할 생각도 없이 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역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 말씀이 또한 믿는 너희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
34. 만일 여러분이 믿기만 한다면 이 말씀은 효력있게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일년을 다니건 삼년을 다니건 삼십년을 다니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지 않는다면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어떠한 주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면 성경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혼과 생각과 마음과 삶이 변화하는 것은 모두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는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35. 여러분이 읽은 것에 여러분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루종일 락음악을 들으면 거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음행과 간음을 조장하는 영화를 하루종일 보면 도덕적 기준이 낮아지게 마련입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기록하신 거룩한 성경을 읽으며 거룩한 영의 인도를 받으면 거룩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3:3-4을 보세요.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무효로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이로써 주께서 주의 말씀하신 것에서 의롭게 되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리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6. 대통령이 말한 것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서로 다르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것입니다. 훌륭한 목사가 말한 것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서로 다르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서로 다르면 그때는 동전을 던지세요. 아닙니다. 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나님만이 참되시고 그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거짓된 것입니다. 오직 한가지 안전지대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기를 원하실꺼야 하는 생각도 잘못된 것일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입니다. 가장 훌륭한 인간이 지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전혀 무익할 수 있고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여러분을 잘못 인도하거나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37. 네째 원칙은,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보여 주시고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수학책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과학 교과서를 보면서 그런 기도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어 수업에 들어가면서 “주님 이 수업으로 인해서 저를 변화시켜 주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우리는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거짓 종교도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훌륭하고 선한 사람들도 잘못을 범하고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때는 진리를 전하던 건전한 교회가 오류에 빠져 이단적인 교회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저자이신 주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저는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현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이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38. 시편 119:18을 보세요. 여기에 나온 기도를 잘 보세요. “주께서 내 눈을 여사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내가 보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반복된 기도를 금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헛된 반복입니다. 여러분은 똑 같은 기도를 수백번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때마다 시편 119:18에 있는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아무런 의미없이 이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는 다면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시편 119:18의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으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것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39. 요한복음 14:26을 보세요.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2-15도 보세요.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서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라.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내게서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하였노라.”
40.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끄시고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어떤 책을 읽는데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여러분 옆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저자에게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주님께 요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읽으면서 기도로 성경의 저자이신 주님께 질문을 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41. 다섯째 원칙은, 성경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마음은 진리를 이해하는 문을 닫아버립니다. 우리가 오늘 읽고 이해한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내일 더 깊은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보여주신 것에 순종하지 않으면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더 이상 자라갈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지식 안에서 계속 성장하다 더 이상 성장이 멈춰버린 경우 그 원인을 찾아보면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거나 하지 말라고 하신 것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말씀하셔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학교는 자동으로 진급하는 학교가 아닙니다. 주님의 학교에서는 1학년 과정을 마쳤어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1학년이 됩니다. 교회에 다닌 연수가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3학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42. 성경은 반드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욥기 34:32을 보시겠습니다. 욥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욥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세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불법을 행하였을지라도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욥은 단순히 자신의 머리를 성경 지식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자신을 성경지식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기도한 것은 “주님 저에게 알려 주세요. 그러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알려주시면 당장 그것을 고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단순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주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주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43.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열쇠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을 그대로 행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주님께서는 계속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알려주신 것이 있습니까?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해 보세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더 놀라운 진리를 여러분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자동차를 고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해도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르칠 수 없습니다. 가르쳐 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한눈을 판다면 결코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마음을 쏟지 않는 사람에게 왜 성령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배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진리는 머리만 채우는 진리가 아니라 온 마음과 삶을 채우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순종없이는 배울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마음을 주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44. 요한복음 7:17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 가르침(doctrine)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혹은 내가 스스로 말하는지 알리라.” 이 구절을 보면 가르침(교리)이라는 말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의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주님의 가르침(교리)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곁길로 가버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교회에 다니거나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45. “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는지 아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알려주면 그대로 순종해서 행할 의지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연약해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연약한지 강한지 물으신게 아니라 주님을 뜻을 행할 의지가 있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물으신게 아니라 하고자 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하게 하시고 방법을 알려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방법이나 능력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언제든지 가르쳐 주시고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46. 우리는 주님께서 방법을 알려주시고 능력을 충분히 공급해 주시면 그때가서 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기 전에 먼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적고 능력도 적지만 주님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47. 여섯째 원칙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내어 주어 계속 해서 읽고 읽고 읽고 읽으십시오. 성경은 여러분이 반복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읽을수록 더 모르는 부분이 많아지는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은 점점 작아지고 성경은 더욱 커집니다. 지금까지 제가 두번 읽은 책은 5권 정도 되고 세번 읽은 책은 3권 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책들은 한번 읽으면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48. 성경은 이상한 책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부분이 많아지지만 또 서로 연결이 되는 관련 구절도 많아 집니다. 또한 읽으면 읽을수록 흐릿했던 부분이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경을 거듭해서 읽을수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킹제임스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읽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6개월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도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읽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쓸데없는 것들은 읽으면서 성경은 읽지 않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구원받고 나서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한번 다 읽어보지도 못한채 하늘나라에 간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49. 하나님께서 책을 쓰셨다면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 한 권의 책에 기록해 두셨는데 우리는 고작 이 책을 한 번 만 읽는다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겠습니까? 두번만 읽었다는 것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정말로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단순히 한 두번만 읽을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반복해서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진진해 집니다. 성경을 알아갈수록 성경 읽기가 지루해 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나무와 같습니다. 처음 성경을 읽으면 그냥 큰 갈색 기둥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계속 반복해서 읽다보면 큰 가지와 작은 가지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나중에는 잎사귀 하나 하나까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50. 이 세상에 성경과 같은 책은 없습니다.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부분이 드러나게 되고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부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 그런 책은 없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들었더니 나중에는 그 노래에 완전히 질려버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들은 최고의 노래라 할지라도 계속 반복해서 들으면 나중에는 완전히 질려버리게 됩니다. 한때는 너무나 좋아해서 최고의 노래라고 생각했던 것도 몇 달 지나지 않아 다른 또 다른 노래에 빠져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을 다섯 번 읽었다면 제가 장담하건데 여섯 번 읽으면 더 성경을 좋아하게 될 겁니다. 성경을 60번 읽었다면 70번 읽으면 더 좋아하게 될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20살부터 시작해서 80세까지 성경을 가르친 분이 있습니다. 그 형제님은 60년 이상 성경을 꾸준히 읽고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성경을 읽으면 새롭답고 합니다. 60년을 읽고 가르쳤는데도 새롭게 느껴지는 책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그런 책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반복해서 계속 읽어야 합니다.
51. 일곱째 원칙은, 성경을 순서대로(연속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66권의 책을 한권의 책으로 모으셨다는 것도 맞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왜 성경을 순서대로 읽지 않는 것인가요? 어떤 사람은 성경을 계시록부터 읽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순서대로 엮어 두셨다면 우리는 그 순서에 따라 성경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24:25-27을 보세요.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시고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알려주시는 방법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성경의 앞부분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야 합니다.
52.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순서대로 읽다보면 지루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 지루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살아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지루한 부분이 있는 것처럼 살아있는 책인 성경에도 지루한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의 특정 부분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아직 그부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부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이 지루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분이 올해에는 별다른 감흥없이 읽은 말씀이 내년에는 엄청난 깨달음을 주는 말씀으로 다가오게될 부분이 있습니다.
53. 여덞째 원칙은, 우리는 성경을 인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성경을 읽지 않은채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놀라운 일을 해 주시기를 구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능숙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방법일까요? 아무런 연습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주셔서 하루아침에 능숙한 피아니스트가 되는게 하나님의 방법일까요, 아니면 오랜 시간 피나는 연습을 해서 능숙한 피아니스트가 되는게 하나님의 방법일까요? 우리는 피아니스트에 대해서는 어떤게 하나님의 방법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숙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하는데 거기에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54.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단번에 모든 것을 알려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곳 신학원에서 3년간 성경을 배운다고 해서 성경을 모두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3년 만에 성경의 모든 것을 다 가르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3년 동안 가르치는 것은 여러분이 평생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학원 3년 과정을 수료했다고 해서 성경을 다 알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3년 동안 신학원에 다니고 나면 이제 어떻게 성경을 연구하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55. 여러분은 평생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가 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이곳 신학원에서 배운 것을 증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몇 년 전 신학원에서 배운 것을 증거하는게 아니라 바로 전날밤 홀로 성경을 연구할 때 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주님의 말씀을 연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만년이 지난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을 펼쳐 보여주시면서 “자녀들아, 너희는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를 깨닫은 적이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편을 펼쳐 보이시며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하고 물으실 때 우리가 “예, 제임스 낙스 형제는 그 구절이 말하는게…”라고 말하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런건 다 잊어버려라. 내가 이 구절의 참 뜻을 알려주겠노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하신 책을 몇 달 만에, 아니 몇 년만에 마스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성경을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56. 마지막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계시록 22장, 이사야 8장을 보겠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록 22장에서 성경을 끝마치실 때 성령님께서는 인간이라는 도구를 놓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실 모든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경을 통해서 모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경을 떠나서 더 이상 어떤 말씀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57. 히브리서 1:1-2을 보세요.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과거 시제임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것입니다. 꿈을 통한 계시도 끝났고 환상도 끝났고 선지자도 끝났고 표적도 끝났고 사도도 끝났고 말씀도 끝났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방법이 끝났습니다. 성경이 완성되고 나서는 더 이상 어떤 말씀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더 이상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58. 계시록 22:18-19을 보세요.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이사야 8:20을 보세요. “그들이 율법과 증언에게 구할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 여러분은 사람(자신도 포함해서)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음성을 신뢰해도 안됩니다. 여러분은 느낌을 신뢰해도 안됩니다. 여러분은 감정이나 인상을 신뢰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은 경험을 신뢰해서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버리고 오직 성경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59. 저는 어떤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겠다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 16:15). 이렇게 기록된 말씀과 느낌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느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저에게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좋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느낌을 따라서 기도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외에 다른 것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방대해서 우리의 전 인생을 걸어도 그것을 모두 연구하고 다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60. 조지 뮬러는 사역을 위해서 수백만 달러를 썼습니다. 그는 수천명의 고아들을 길렀고 그 외에도 많은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기도했습니다. 다음은 조지 뮬러가 한 말입니다. “나의 사역 초기에는 국내 사역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순서대로 꾸준히 읽는 일을 게을리 하였었다. 그 결과 나는 지식에 있어서는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게을렀기에 말씀에 무지했고 따라서 나의 영적인 성장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나는 혼을 지도해 주시는 유일한 분은 성령님이심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세 시간 동안 성경을 읽었다. 그 세 시간 동안 얻은 것이 지난 몇 년간 얻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성장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는 성경을 불규칙적으로 읽었다. 그때그때 읽고 싶은 곳을 읽었다. 그러다보니 매번 성경을 읽을때마다 비슷한 부분만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된 이후부터는 성경을 순서대로 읽었다. 순서대로 반복해서 성경을 읽은 결과 나는 어느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살아있는 성구사전이 된 것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꾸준히 읽다보니 거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역대기상 1-10장도 흥미있게 읽는 수준이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 부분은 소흘히 여겼지만 계속해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이름만 나열된 그 부분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게 읽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도 주의깊게 살펴보게 하셨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역대기상 1-10장도 시편이나 복음서 만큼이나 친숙하고 즐거운 부분이 되었다. 나는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읽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아침에는 구약성경을 읽고 저녁에는 신약성경을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일부분 만을 읽고 인기있는 부분만 살펴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성경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반복해서 읽는다면 모든 의문은 풀릴 것이다. 나는 성경을 백번가량 읽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걸려넘어진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 만족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주님이 사랑스러운 분이시며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가진 분이시고 얼마나 친절하고 은혜가 넘치시며 품위있는 분이신지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의 간증입니다. 조지 뮬러는 매일 세 시간씩 무릎을 꿇고 순서대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전임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운영했고 선교사들을 지원했고 수많은 사역을 했지만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충분히 읽고 계십니까? 성경 읽기는 성경 연구의 가장 기초가 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롬 10:17)


생명을 위하여 도피하라
이것은 2006년 9월 10일 진리침례교회 오후 예배시간에 한 설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0:1-9입니다. “또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의 손으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 도시들을 너희를 위해 지정하여 알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죽인 자가 거기로 도망하게 하라. 그 도피 도시들은 피의 원수를 갚는 자로부터 너희를 지켜 줄 피난처니라. 그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도망하는 자는 그 도시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도시 장로들의 귀에 자기 사정을 밝히 말할 것이요, 그들은 도시 안으로 자기들에게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처소를 주어 그가 자기들 가운데 거하게 하고 피의 원수를 갚는 자가 그를 추격한다 할지라도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넘겨주지 말지니 이는 그가 전에 자기 이웃을 미워하지 아니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이웃을 쳤기 때문이라.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혹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시에 거하다가 그 뒤에 자기의 본 도시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도시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그들이 납달리 산의 갈릴리의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의 세겜과 유다 산의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을 지정하고 또 요르단 저편 곧 동쪽으로 여리고 옆에는 르우벤 지파에서 평야 위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에서 길르앗의 라못과 므낫세 지파에서 바산의 골란을 지정하였더라. 이 도시들은 온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 가운데 머무는 타국인을 위하여 지정한 도시들이었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알지 못하고 어떤 사람을 죽였을 때에 거기로 도망하여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원수를 갚는 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었더라.”
오늘 설교는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구원받은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분들은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축복된 자리인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들은 도피 도시를 통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도피 도시에 대한 설명
우리는 오늘 도피 도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나서 자신들의 영토 안에 6개의 도피 도시, 즉 도피 도시라는 것을 만들게 됩니다. 도피 도시라는 것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피해서 달아날 수 있도록 만든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이 세상의 어떤 법보다도 위대합니다. 하나님의 법인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생각해 주시며 인간의 입장을 얼마나 고려해 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에 매우 큰 가치를 두십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율법에 의하면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논쟁이나 이론도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그 자신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어떠한 언변이나 궤변으로 자신의 죄를 위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에는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이 때에는 경우가 좀 다르게 됩니다. 아무런 고의도 없고 의도도 없고 원한도 없이 사람을 순전히 실수로 죽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법인 성경에 의하면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죄의 값은 언제나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고, 악의도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에도 사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면 이것은 공평한 일이 못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 하나님의 법인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에서 읽은 것처럼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살인자는 도피 도시로 도망가면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율법이 굉장히 엄격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율법은 엄격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율법에는 사람을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굉장히 존중해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살던 시대에 가나안인들이나 아시리아인들 혹은 이집트인들의 법에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러한 존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없는 곳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모세가 살던 시대에 이교도들은 갓난 아기들을 불로 태우면서 자신들의 신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모세가 살던 시대에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아기를 나일강의 악어들에게 먹이로 던지며 자신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존중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위대한 법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도피 도시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보호자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그 죽인 사람에 대해서 보복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은 자신의 생명도 내 놔야 합니다.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건 이 세상의 신에게 세뇌당해서 그런 겁니다. 사형제도를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범죄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형제도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형벌인가를요. 사형제도가 존재함으로 해서 많은 범죄가 좌절되기도 합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듯이 죽어야만 한다면 살인사건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사형제도에 대해서 지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피도 흘려져야지만 땅이 더럽혀 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 아시죠? 사람들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성경의 하나님은 잔인하다고 해요. “눈을 찌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해야지 왜 똑같이 보복하라고 하냐?” 하면서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해요. 그러나 그건 뭘 모르는 소리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을 “동해보복형”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받은대로 갚는 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러한 처벌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잔인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남에게 해를 입게 되면 남도 똑같이 해를 입기를 바라지 않아요.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자기가 입은 해보다 더 심하게 해를 입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면 상대방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야곱의 딸이 강간을 당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그 강간한 사람이 속한 부족을 전멸시켰잖아요. 왜 통일전망대 같은거 보면 북한에서도 그러잖아요. 자기들 건드리면 백배 천배 보복하겠다고.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자기가 당한 것 보다 훨씬 더 갚아주려고 하는게 인간의 마음이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네가 당한 만큼만 갚아주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사람이 보복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그에 따른 형벌을 가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도 신약시대의 하나님 만큼이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예요. 다만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2.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
이제 다시 도피 도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피 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도피 도시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실수로 사람을 죽인적이 없다고 하니깐 그럼 고의로 죽인적은 있다는 말 같네요. 아무튼 실수든 고의든 저는 사람을 죽인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실수로 사람을 죽인 적인 있는 분 없으시죠? 예, 없을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든 고의든 사람을 죽인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피 도시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실치사의 죄를 범한 자가 도피 도시로 들어가면 죄의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법이 없죠.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법을 넘어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많이 나옵니다. 모형이라는 것은 비유적인 이야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형은 실재로 존재했던 사람과 사건에 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더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생각해 보면 뭐가 있을까요?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이 놋뱀이 아닐까 합니다. 범죄해서 죽게될 자들이 쳐다보면 산다 하는 것이 바로 놋뱀아닙니까? 이 놋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도 들어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예요.
이 놋뱀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훌륭한 모형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도피 도시가 가장 훌륭한 모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도피 도시을 하나의 이야기로 꾸민다면 이렇습니다. 먼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피의 보복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도피 도시가 나오죠.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과 피의 보복자와 도피 도시가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먼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실수로 사람을 죽인자를 신약성경의 복음의 진리로 비춰보면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바로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실수로 죽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과 마찬가지의 위치에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죠.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을 여러 가지로 부릅니다. 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먼지와 같다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확한 위치와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사람을 왜 죄인이라고 부를까요? 성경은 3가지 이유로 사람을 죄인이라고 불러요. 먼저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아직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마치 인종과도 같은 것입니다.
흑인으로 태어나면 흑인이죠. 아직 흑인의 문화와 흑인의 말을 하지 않아도 흑인입니다. 백인으로 태어나면 백인이예요. 미국영어에는 여러가지 방언, 즉 사투리가 존재하는데요. 보통 도시에 사는 백인들이 하는 영어를 SAE라고 불러요. Standard American English라는 말입니다. 표준미국영어라는 말이죠. 보통의 경우 도시에 사는 미국 백인들이 쓰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AAE라는 것이 있어요. African American English라는 건데요.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어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흑인들이 쓰는 영어입니다. 백인들이 쓰는 말과 흑인들이 쓰는 말은 좀 달라요. 백인들은 누군가가 멋지다고 말할 때 He is nice라고 말해요. 반면에 흑인들은 그냥 He nice라고 be동사를 생략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약간씩 차이가 있어서 미국인들은 라디오에 나오는 목소리만 듣고도 말하는 사람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쉽게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뉴스를 진행하는 흑인들이나 교육을 많이 받은 흑인들은 흑인영어가 아닌 스탠다드 어메리칸 잉글리쉬, 즉 백인 영어를 씁니다. 여러분, 흑인이 아무리 백인처럼 말하고 행동해도 여전히 흑인이지요. 흑인의 모습과 민족적인 습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도 흑인으로 태어나면 여전히 흑인인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디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렘 13:23).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사람이 흑인으로 태어나고 백인으로 태어나고 아시아인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예요. 우리는 그냥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인 것이예요. 왜냐하면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니까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좀 더 있다가 살펴보고 일단 인간이 죄인인 두번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이 죄인인 두번째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실재로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혹시 나는 지금까지 전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다 하시는 분 있나요? 그런 분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세요. 없으세요? 미국에 1900년대 초에 샘 존스라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있었는데요. 한 번은 복음을 전하는 집회를 하면서 방금 제가 한 것처럼 청중에게 질문을 했데요. “여기에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니깐 한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더래요. 그러니까 샘 존스가 일어나 보라고 했데요. 아주머니가 약간 수줍게 일어나니까 샘 존스가 그랬데요. “여러분은 지금 이 마을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분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죄를 한 번도 안지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3:23).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인 세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아니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건 이해가 가지만 뭔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죄가 될 수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데 이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어디서 훔친 것도 아니고 단지 세금을 내지 않았을 뿐인데, 하지 않았을 뿐인데 왜 죄가 되나요? 억울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겠죠.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기가 굶어 죽겠죠. 그런데 아기를 굶어 죽인 어머니가 판사에게 “저는 아기를 죽이지 않았어요. 단지 젖을 주지 않고 내버려 뒀을 뿐이예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어머니는 아기에게 젖을 주고 아기가 생존에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할 법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이걸 “보증인적 지위”라고 불러요. 그래서 아기를 돌보지 않아서 아기가 죽게 되면 그 부모는 유기치사죄의 죄책을 지게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마땅히 하라고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요 6:28-29)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같이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나니”(행 17:3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에요.
자,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죄인인 이유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고 실재로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 즉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야구에서도 쓰리아웃이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삼세판을 참 좋아합니다. 성경은 세 가지 이유로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앞에서 저는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아니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면, 그러면 그 책임은 나에게 없는게 아니냐?” 하시는 분이 있어요. “왜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심판하고 지옥에 보내냐, 그건 좀 억울한거 아니냐?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 그래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도 믿지 않겠네요.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책임을 당신에게 지우신다고 했습니까?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을 지옥에 보내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이러면서 계시록을 보여줍니다.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계 20:12)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각자 자기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또 보세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믿지 않는 자들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중에 만일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여러분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여러분이 스스로 지은 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말은 없어요. 일반 범죄도 그 행위가 위법하고 범죄의 구성요건에 맞고 죄를 지은 행위자가 책임이 있어야 처벌을 해요. 그래서 아무리 행위가 위법하고 범죄의 구성요건에 맞아도 행위자가 책임이 없으면 처벌을 받지는 않아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6살짜리 어린 아이가 사람을 죽였다면, 사람을 죽인 행위는 법에 어긋나잖아요, 그래서 위법하다고 해요. 또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한 처벌이 우리나라 형법에 명시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구성요건에도 맞다고 해요. 그러나 어린 아이는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벌을 받지 않는 거예요. 물론 6살짜리 아이가 사람을 죽이면 그 부모가 피해자 가족들에게 민사상 손해배상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 6살짜리 아이는 형사상의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책임이 없으면 처벌을 받지 않아요. 이것은 일반 법률뿐만 아니라 성경의 법에서도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책임이 없는 자에게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죄인으로 태어났어요. 하지만 만일 한 살에 죽었다면 죄를 지을 수가 없잖아요. 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죽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그건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인간에게 책임이 없는 일입니다. 오직 첫번째 사람이자 모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 그 책임이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는 않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 조건이라기 보다는 한 가지 조건과 그 해결책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해 주겠다고 그 해결책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 값을 다 치르셨다는 대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의 죄값을 스스로 치르러 지옥에 가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전혀 억울한 것이 없어요. 여러분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건 하나님 때문도 아니고 조상 때문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건 순전히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자, 저는 여러분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것이예요. 비록 실수긴 하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그 자신도 반듯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나 실수로 한 일에 대해서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그리 공평한 일이 못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살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방법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피 도시 안으로 피하는 일입니다. 도피 도시로 피하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일에 있어서는 용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6:23). 죄를 지으면 반듯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고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뉴스를 보면 가끔 아주 흉칙한 죄나 파렴치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게 되잖아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아 저 쳐죽일 놈들…그러잖아요. 우리는 죄에는 형벌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누구나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죄도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여러분, 모든 죄가 반드시 처벌 받아야 합니다.
제가 이전에 어떤 걸 보니깐 이런게 나오더라구요. 옛날 우리나라 조선시대가 배경인데, 어떤 죄인이 사또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어요. 그런데 그 죄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와 증인이 너무 명백한 거예요. 이런 경우에 왜 사극에 보면 그러잖아요.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러니깐 그 죄인이 사또 앞에서 싹싹 빌면서 그래요.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깐 사또가 형방한테 “저 놈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니 죽을 만큼 곤장을 쳐라”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깐 죄인이 기겁을 하면서 “죽지 않을 만큼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깐 사또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러면 저 놈을 죽지 않을 만큼만 곤장을 쳐라” 그러더라구요. 죽지 않을 만큼만 곤장을 맞는게 더 무서운거 아닙니까?
여러분, 모든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과 지옥입니다. 큰 죄도 있고 작은 죄도 있지요. 그러나 모든 죄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죽음과 지옥입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서 더 큰 고통을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어떤 사람들에게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자나요. 지옥에서도 더 큰 정죄가 있다는 것이예요. 지옥에서 더 큰 정죄가 있을 뿐이지 모든 죄에 대한 삯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죽음과 지옥입니다.
저는 우리가 죄인인 세 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고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삼중적으로 죄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짓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즉 죄성을 그 안에 소유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조상으로부터 죄성을 유전 받은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죄를 짓는 존재인 것이잖아요. 인간이 죄인이 이유가 삼중적으로 세 가지 이지만 결국 가장 근본이 되는 원인은 바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피할 길을 주신 거예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피할 길을 주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피 도시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실수로 죽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가 손에서 빠져서 옆 사람을 죽였다면 어쩔 수 없는 불의의 사고잖아요.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도피 도시로 피하면 죽지 않고 살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은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예요.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스스로 짓는 거지만 죄인으로 태어난 것은 내가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 태어난 것 때문에 지옥에 보내지는 않으시는 겁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 도시로 피하면 살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피 도시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죄값을 치러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3. 피의 보복자
자, 이제는 피의 보복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피의 보복자는 누굴까요? 성경에는 누가 피의 보복자의 역할을 하는 지가 명확하게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피의 보복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의 형제이거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형제가 형제를 대신하게 합니다. 형제가 없을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대신하게 합니다. 피의 보복자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형제나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서 피의 보복자가 그 살인자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살인자를 피해자의 형제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죽이므로 복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법에서는 이런 행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 법에서도 정당방위라는 것이 있기는 한데요. 이 정당방위는 현재의 침해에 대해서만 허용이 됩니다. 또 정당방위는 자기가 아닌 타인을 방위하기 위해서도 허용이 됩니다. 즉 정당방위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제 삼자가 나서서 살인하려는 사람을 공격해도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정당방위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정당방위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만 허용이 됩니다. 지난 번에 나 죽이려고 했지 하면서 공격하면 정당방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당방위가 허용되는 것은 정당방위가 “부정 대 정”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어쨋건 오늘 본문에 나온 피의 보복이라는 개념은 정당방위와는 다르고 우리 법에는 없는 개념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에 의하면 정당한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 피의 보복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피해자의 형제나 가장 가까운 친족에 의해서 가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같습니다.
정리를 하면, 한 사람이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면 피해자의 친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피의 보복자의 역할에 즉시 착수합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즉시 자신의 마을을 떠나서 도피 도시로 도망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해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를 위한 피의 보복자가 즉시 칼을 들고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따라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인 자가 아직 도피 도시에 들어가기 전이면 피의 보복자는 그를 죽여도 됩니다. 그러나 도피 도시으로 들어가고 나면 이제는 그를 죽이면 안됩니다. 도피 도시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장로가 그 살인자를 피의 보복자로부터 보호해 주게 됩니다.
여러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아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뒤에는 피의 보복자가 따르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도 피의 보복자가 그 등 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해진 때가 되면 그 피의 보복자는 자신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서 내리칠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뒤따르는 피의 보복자가 누군지 아세요? 피의 보복자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기록된바,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롬 12:19) 피의 원수를 갚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예요. 이것이 하나님 없는 인간의 불행입니다. 사람이 대적하고 싸우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원수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모릅니다. 또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사람들이 성경을 왜곡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건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고 성경의 증언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어요. 과거에 사랑하셨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3:16에서는 과거 어느 시점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2천년 전을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아느냐구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독생자를 주신게 2천년 전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말 들어보신적 있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이 말은 성경에 비춰보면 굉장히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미워하세요. 죄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는 거예요. “아니 그럼 하나님께서 죄인을 미워하시면 즉시 지옥에 보내지 왜 세상에 있는 수많은 죄인들을 다 바로 죽여서 지옥에 보내지 않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분 있나요? 하나님께서 왜 죄인들을 즉시 지옥에 보내지 않고 있는지 아세요?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 있죠? 그리고 매일 크고 작은 죄를 짓고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분 있죠?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즉시 죽여서 지옥에 보내지 않는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즉시 죽여서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는 거예요.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즉시 집행되지 않아요.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계신 것이죠.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는 사형제도 존치 국가일까요? 아니면 폐지 국가일까요? 우리나라 형법에는 사형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나라는 사형제도 존치국가에요. 그런데 이거 아세요? 지난 12년간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을 집행한 적이 없다는거. 사형이 마지막으로 집행된 게 김영삼 정권 말기였습니다. 다음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정권 말기에 사형을 집행했어요. 김대중 정권은 인권정권이라는 이미지를 위해서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도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고 현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사형은 선고가 있은지 6개월 만에 집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 정부가 법을 어기고 있는 거죠.
지금 우리나라에 사형수가 몇 명 있는지 아세요? 63명 있습니다(2006년 기준). 죄목은 다양한데 이들 전원이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수법도 모두 다 잔인하다고 해요. 범죄유형을 구분해 보면, 살인 28명, 강도살인 23명, 유괴살인 5명, 강간살인 3명, 존속살인 2명, 방화치사 2명이래요. 이중에는 공안사범이나 정치사범은 아무도 없어요. 모두 사람을 고의로 잔인하게 죽인 사람들입니다. 피해자수로 보면 50명은 2명 이상을 죽였고 이중 22명은 3명 이상을 죽였데요. 이중에는 유영철도 있는데 유영철은 40명 이상을 죽였어요. 전에 학교 다닐 때 법철학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그러더군요. 그 수업은 대략 40명 이상이 듣는 수업이었는데 유영철 얘기를 하시면서, 유영철이 여기있는 사람 전부만큼 죽인 거라고. 63명의 사형수 중에 13명은 1명만 죽였지만 반인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데요. 자수했는데도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재판 당시에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 사람도 거의 없었데요.
그런데 사형을 언제 집행하는지 아십니까? 사형은 보통 오전에 집행한데요. 그래서 사형수들은 오전에 면회왔다고 하면 벌벌떤데요. 면회왔다고 하면서 데리고 나가서 사형을 집행하거든요. 그래서 오전만 지나면 일단 오늘은 아니구나 하고 안심한데요. 그래서 전에 신문을 보니깐 사형수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뽑았더라구요. “생은 내일 아침까지만 보장된다” 오후나 저녁에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오전만 지나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살 수 있다는 거죠. 사형수는 아직 형벌을 받지 않은 죄수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는 미결수예요. 다른 징역형을 받는 죄수들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징역을 살면서 형벌을 받고 있잖아요. 그러나 사형수는 그 형벌이 사형이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형이 집행되지 않은 미결수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미결수입니다. 사형수와 같다는 거예요. 사형수는 다음날 아침까지 생이 보장될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보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의 보복자가 언제 보복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짓고 삽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또 설령 있다고 해도 자신들의 죄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관심이 많으세요. 인간들의 마음과 행위를 유심히 살펴보신다는 겁니다.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물마시듯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잖아요. 가장 두려운 사실은 여러분의 죄가 이미 하나님께 발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보시고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로 대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원수로 여기고 계세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에 그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 마다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요. 여러분,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다는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었구나 하고 알게 될 겁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게 뭔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저에게 진노하지 않을실 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저의 원수가 아니예요. 이것이 얼마나 저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지 아십니까? 저는 지금 죽어도 돌아갈 집이 있어요. 그곳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안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옵니다.
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미워하지 않으신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도피 도시으로 피하지 않은 사람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 나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위험천만한 상태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판단하시며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향하여 날마다 분노하시는도다. 그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자신의 칼을 가시리니 그분께서 이미 자신의 활을 당기시고 준비하셨도다. 또 그분께서 그를 위하여 죽이는 도구를 마련하셨나니 그분께서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자신의 화살들을 정하시는도다.”(시 7:11-13) 이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머리를 향해서 화살을 정 조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그 누군가가 바로 여러분 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하신 일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행해서 진노하고 계시고 여러분을 향해서 심판의 활을 당기고 계시다는 겁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조금 더 기다려 주시지만 언젠가는 그 활시위를 놓으실 날이 올것입니다.
4. 도피 도시
오늘 설교의 주인공은 셋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실수로 살인한 사람, 피의 보복자, 그리고 도피 도시, 이렇게요.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피의 보복자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이제 도피 도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도피 도시가 상징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도피 도시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실수로 살인죄를 지은 사람은 도피 도시으로 들어가면 죽지 않아도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죽지 않고 살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을 대신 맞아주셨어요.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이 죄인인 나에게 날아와서 내 심장을 관통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맞아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아세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가 만족을 얻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나에게 진노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참된 도피 도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시면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이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지금 저의 설교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여러분이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어요. 그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또 지옥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해결책이 없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피 도시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도피 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구원받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모님 때문에, 아니면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나오신 분이 있나요? 그러면서 속으로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내가 그래도 교회에 다니니깐 좀 이쁘게 봐주시겠지 하는 분 있나요? 그런 분이 있다면 제 말을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교회 건물 안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장로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예요. 침례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교회 안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받게 되고 안전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왜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계속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밤 잠자리에 들어서 내일 아침 이 세상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저는 도피 도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저는 안전하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 안에 들어오시고 또 저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 넣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제가 충고를 하나 해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도피 도시으로 피하세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시라구요. 저는 지금 종교를 권하는 것이나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예요. 구원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두 번 다시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어떤 교회는 자신들이 하는 방언을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해요. 그러나 성경에 그런 말은 없죠. 어떤 목사님은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이고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성경에 없어요. 반대파를 겁주기 위해서 자기가 지어낸 거지. 성경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이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성경을 읽으면서 공부해 보세요.
저는 이전에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면, 그렇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있는 것인가?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여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성경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더라구요.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제가 지금 잘못 말하는게 아닙니다. 어떠한 죄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다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용서와 죄사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있는 분 중에 구원은 받았지만 현재 죄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구원은 받았지만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있다면 제 말을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지은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어요. 단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세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고 말씀하시고 있잖아요. 작은 불의에서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죄든 큰 죄든 그 죄로 더러워진 것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용서를 구하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5. 결 론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어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고 반드시 구원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계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어도 안전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여러분은 침몰하는 배 안에 있어도 안전해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여러분은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 있어도 안전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여러분은 무너지는 건물 안에 있어도 안전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벼랑 끝에 있어도, 사자 굴에 던져져도,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가운데 있어도 안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들으신 분이 모두 이미 구원받으신 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여기에 계신 분 중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오늘 제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거부함으로 자기 자신을 헤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베푸시기 원하는 구원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언젠가 오늘의 결정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온 몸을 전율할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 나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니 기회가 많을꺼야”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나요? 예, 그 말처럼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가 많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분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들, 예수님을 영접해 본적이 전혀 없는 분들에게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생명을 위하여 도피하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서 참된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