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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2010년 봄학기 과목 안내

 

3월 6일 개강

6월 5일 종강

매주 토요일 수업

 

1교시 - 14:00~15:30(90분) – 천사론과 마귀론 - 라영석 목사

 식 - 15:30~15:45 - 15분간

2교시 - 15:45~17:15(90분) – 성경연구방법 - 이우진 형제

 식 - 17:15~17:45 - 간단한 저녁식사

3교시 – 17:45~19:15(90분) – 신약개론 – 김영균 목사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는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머리로만 안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지 못하면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여 자신을 의의 도구로 내어 드려야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거듭난 주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자라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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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2010.02.17 23:05:02 (*.197.162.56)
633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형태였습니까?

 

유관순, 전태일 같은 열사형? 전혀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라!” “우리 유대인에게 독립을 달라!” 열사라고 부르기에는 예수님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조용히 침묵을 지켰으며,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흥분한 군중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제자들까지 맥빠지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신 것입니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는지 저라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순교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상 숭배하던 동족을 책망하다 죽어간 그런 대언자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와는 정반대로 제 딴에는 ‘신성모독’이라는 구실로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정말 말이 안 되죠. 예수님을 따라 훗날 이루 셀 수 없는 크리스천들의 순교 행렬이 이어졌지만, 예수님 자신이 무슨 이념이나 신앙을 위해 순교한 것은 아닙니다.

 

흔히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모습을 두고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이 좀 있다 체포되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대못이 박힐 게 무서워서, 그게 두려워서 그렇게 괴로워한 거라고 믿는다면, 심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형은 전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고통스럽고 잔학한 사형 방법으로 손꼽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만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십자가형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비참하게 죽은 순교자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한 이유는 그런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서로 사랑하며 기쁨만을 주고받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가 오로지 인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잠시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차원을 넘어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분이 죄 덩어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만 하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저주가 되고 진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늘 아버지라고만 부르다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나온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인간의 감정으로 쉽사리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 22:42, 44)

그래도 결국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순종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탈진과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기에 앞서 스스로 자기가 목숨을 내어 줬습니다. (요 10:15)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보다 유난히 빨리 숨을 거두었지만, 장사된 후 부활하셨고,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창시자가 되고 우리의 구원자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은 주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낱 고문과 사형 집행이 두려워서 예수님이 저렇게 기도한 거라고 아는 건 정말...

그나저나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형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적인 원칙대로라면 인간의 죄를 사하려면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일단 독극물 주사나 교수대, 화형 등은 아닙니다. 유혈 공법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능지처참 정도로 오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인데 예수님이 그런 사유로 죽으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미 예수님은 몇 차례 돌로 맞을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는 오히려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럼 참수는? 참수의 신약 성경적 의미는 믿음을 지킨 의인의 억울한 죽음에 가깝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죽음이나 계시록에 기록된 환란 성도들의 죽음 등. 이것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죽음과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이거야말로 예수님 자신보다는 그 이후의 순교자적 죽음이란 의미로 남겨 둬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반면 십자가형은 채찍질부터 시작해서 충분히 유혈 공법임과 동시에 나무에 매달린 자라는 수치와 저주의 의미(신 21:23, 갈 3:13)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높게 쳐든 불뱀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의미를 넣어 둔 것도 정말 절묘한 일치입니다. (요 3:14)

 

십자가형은 그 자체가 죄수의 목숨을 끊는 방법이 아닙니다. 죄수를 극도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상태로 만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는 방법이란 점에서 더욱 잔인하고 비인간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갑자기 숨을 거두신 것 역시 십자가형 자체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은 것'이라는 논리가 틈탈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집행 방법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명절은 사형 집행은커녕 오히려 죄수를 한 명 풀어 주는 날이었고 오히려 악한 무리들부터가 명절에는 예수님을 안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 가룟 유다의 동조 덕분에 기적적으로 명절 바로 직전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부적절한 시기에 완전히 졸속으로 전시용으로 사형이 집행된 바람에, 옆의 두 들러리 강도는 십자가에 잠깐 폼으로 매달려 있다가 나중에 다리까지 꺾인 채 더욱 비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사형에 처하기에는 좀 뭔가 허했나 보죠?) 십자가형 집행으로 사형수가 죽기까지는 원래 며칠 정도 걸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형 집행을 계속할 수 없는 바로 전날 집행을 강행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의미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악한 무리들의 음모들조차도 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성경 예언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8)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예수님 명령에 즉시 살아난 것처럼, 온 몸이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으신 예수님도 문자 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서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몸은 나사로와는 달리 썩지도 않았겠죠. 시체에서 갑자기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게다가 옷까지 짠하고 다시 생겼을 것입니다. (수의는 곱게 개어 놓고 나가셨으므로 옷이 이미 그때부터 별도로 있었음!) 인간의 힘으로 절대 밀어낼 수 없다던 돌문은 그냥 통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문 개방은 예수님의 무덤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명하는 전시용으로 하신 거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가시면류관을 쓴 얼굴의 상처와 다른 채찍을 맞은 상처들은 다 사라졌지만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 20:27) 이 역시 참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그분이 당한 상처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영원히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찬송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크리스천이 두고두고 묵상하고 감동 받고 영적으로 도전 받아야 할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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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주님을 “말싸움”으로 “이긴” 사람

 

제목이 다소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아마 사람이 “말싸움”으로 주님을 “이긴” 경우는 이것이 유일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다름아닌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여자가 어떠한 논리로 승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2절에 보면 이 여자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나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마귀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는 구조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매정하신 분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때문입니다.

그때에 주님의 경륜은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24절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어 지지 아니하였노라.”

 

25절에서 여인은 다시 요청합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전히 거절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쯤되면 포기할 만도 합니다.

기도가 주님께 거절 당했고 거절하신 이유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보다 더 심한 모욕도 없습니다.

자기 민족이 아니라고 개라고 부르다니, 인권위원회에서 들으면 바로 시정명령을 내릴 것이고 형법상으로도 모욕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고소하는 대신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과 논쟁했던 사람들은 모두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그 어떤 자도 모두 논쟁에서 아무도 주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논쟁에 능한 논쟁의 달인이시기 때문입니다(사 1:8, 롬 3:4).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께 승리했습니다.

이 여자의 논리에 주님은 “항복” 선언을 하셨습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자가 한 “승리하는 기도”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이 여자의 기도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기도였습니다.

22절과 25절에서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가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마음은 없이 입술로만 부른 외침은 아니었습니다.

28절에 의하면 그녀는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었고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채로 입술만을 움직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위선적인 마음도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요일 3:22).

 

이 여인의 기도의 또다른 비결은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녀를 개라고 부르셨지만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주님 앞에서, 또 주위에 있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그렇게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죽은 개” 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죄를 짓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제대로 주제파악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바른 성경을 아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바른 교리를 아는 것 역시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이 모든 것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믿음과 겸손으로 주님께 나아가 간구한 여인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 주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시오, 아버지시오, 주님이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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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2010.02.06 14:53:22 (*.197.162.56)
471

성경의 난제를 대처하는 법

 

- 한 극단만 문자적으로 밀어붙인다.

-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포기한다.

- 전부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 말씀을 문맥에 따라 바르게 나누고 분간하여 종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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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웹진 이름이 괜히 "올바로 나누기"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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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2010.02.03 22:37:41 (*.197.162.56)
498

1.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행적은 언뜻 보기에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정말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 한 번에 일을 안 끝내고 꼭 10가지 재앙 다 내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
  • 천지창조도 일부러 6일만에.
  • 백부장의 종은 현장에 가지도 않고 원격으로 고쳤으면서 나사로는 일부러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애곡까지 하고 나서 살려 냄.

2.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고를 다 하시는 분이다.

  • 이스라엘 백성도 징계 받을 대로 다 받고, 그 기나긴 역사를 다 거친 후에야 회복
  • 수넴의 여인(great woman)에게 당사자가 기대도 안 하던 아들을 기껏 줬다가 병으로 죽게 해 놓고는 또 살려 줌. 헐!
  • 모든 게 어차피 하나님 것이지만, 사람에게 줬다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바치는 걸 또 기뻐 받으심.

3.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해서 로봇 컴퓨터 같은 분은 아니다.

  • 하나님은 기뻐도 하시고 진노도 하시고 repent, 뜻을 돌이키기도 하시고 심지어는 어떤 면모에서는 사람을 차별도 하심
  • 악인을 골탕먹이고 지옥에도 보내심
  • 선한 기도도 아직 때가 아니어서 거절하실 때가 있으며, 잘못된 기도에도 걸려 넘어지라고 응답하기도 하심. 매우 중요
  • 똑같이 성령 충만한 설교에 베드로는 3천여 혼을 얻었고 탈옥까지 했지만, 야고보와 스데반은 순교함

4. 이것은 불신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무척 의아해하는 면모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걸까?

  • 간단함. 효율적이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임
  • 부족한 거 아쉬운 게 없으니까 완전 하나님 마음대로

5. 그 비효율이야말로,

  •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이며
  •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사랑을 인지하고, 사람 역시 하나님과 사람끼리, 사람과 사람끼리 그 사랑을 주고받고 살길 원하신다는 증거임.

6. 그래서 하나님은,

  • 지옥 자식 마귀 자식이 훨씬 더 많이 생길 줄 뻔히 알면서도 1%의 가능성을 두고 사람을 창조하고 자유 의지까지 주심.
  • 하고 싶은 실험도 골고루 해 보라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눠서 경륜을 허락하심.
  • 사람이 실패할 줄 뻔히 알면서도 선악과를 만듦
  • 죄가 잠시 세상에 들어오고 언뜻 보기에 의인이 잠시 고난 받는 걸 허락하심. 전부 ‘비효율’의 결과물임!

7. 사실 불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는 것처럼 의인이 전혀 고난 안 받고 가난한 사람, 고아,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죄만 지으면 즉결심판이 떨어지는 세상이라면,

  • 그건 애초에 믿음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임.
  • 그거야말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님.
    죄만 지으면 즉결심판 → 우린 이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다 지옥에 떨어짐. 불가능한 가정이며, 불신자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름.
  • 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선물을 주고 환경 여건을 조성하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불평 불만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불의한 것으로 보이게 만듦
  • 예수님은 인간에게 교육, 식량, 환경, 부동산, 교통 문제 따위를 해결하러 오신 게 아님. 죄 문제!

8. 무엇보다도 성경에 기록된 가장 큰 비효율 덩어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다.

  • 절대로 죽으실 수 없는 분, 남을 살리고 병 고치고 기적을 행하시던 분이 왜 죽어?
  • 더구나 온갖 율법을 다 어기면서 갖은 음모술수에 완전 일어날 수 없는 최악의 가능성만 골라서 터진 덕분에 가능했음
  • 원래 며칠은 걸리는 십자가형 집행이 안식일 바로 전날에 졸속으로 갑작스레 이뤄짐.
  • 예수님도 그냥은 체포될 수도 없으니, ‘나 잡아 가쇼’라고 놀아 준 거나 다름없는 행적.
  • 불신자들은 죽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설, 지혜 (고전 1:18, 2:8)

9. 비효율은 계속되는데...

  •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보다 예수 이름에 먹칠이나 하고 구원이라는 타이틀이 아까운 사람, 심지어 예수 이름 사칭하는 날파리 같은 이단들이 훨씬 더 많이 생길 것을 뻔히 알면서도,
  • 1% 안에서 또 1%의 가능성을 두고, 인간을 자신의 핏값으로 죄에서 구원하고 교회를 만드심.
  •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얼마든지 받아 주고, 일곱 번 넘어지면 또 일곱 번 일어서게 해 줌.
    “너같이 예수님 간증을 무너뜨린 녀석은, 대장부라면 부끄러운 줄 알고 곱게 할복해라” / “너같은 이단자는 예수님의 명예를 위해 죽어라” 이런 주문은 절대 안 함

10.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빚어 가는 훈련 과정도 그에 만만찮은 비효율과 역설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왕도가 없음
  • 매번 육신과 영을 드나들고, 넘어졌다가 또 회개하고 일어나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정을 기뻐하심
  •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로 인해 기뻐 노래를 부르실 정도인 명품이 그렇게 탄생됨 (습 3:17)

11. 이런 점에서 볼 때, ‘가만히 있기만 하면 중간은 가지’, ‘안 주고 안 받고’는 성경적으로 매우 무책임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사고방식이다.

  • 달란트와 므나 비유에서 돈을 현상 유지만 잘 시켰는데도 종이 주인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은 건 다 이유가 있어서임.
  • 인간의 영적 상태는 정체란 게 없다. 진보가 아니면 퇴보이며, 양극화로 치달음
  • 구원만 받았으면 됐지 또 귀찮게 뭐가 필요하냐는 반문은 제대로 구원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리임
  • 하나님은 신자의 양심을 자극하면서, 사람을 구원받은 직후의 어정쩡한 상태로 가만 놔두시지 않음.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개인 자유!

12. 본인은 처음에는 성경이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건전하고, 인간의 철학을 초월하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 온갖 미신, 잡다한 개똥철학, 유언비어, 피해의식 따위를 말끔히 없애 버리고, 이 세상 배후의 본질적인 영적 실태를 간파함
  • 세상이 진보라 말하는 새 길을 버리고, 건전한 보수, 성경이 말하는 옛 길 성향으로 바뀜
  • 살인, 간음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왜 예수 안 믿는 게 지옥 가는 죄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함

13. 하지만 이제는 성경 말씀에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역사가 내가 다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을 아는 지식의 결론이며, 내가 가야 할 길임을 알았으므로
  •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자체가 그런 식임을 알았으므로
  • 하나님이 지금까지 역사해 온 방식이 선했으므로 앞으로 역사할 방식도 선할 것이라 믿으므로.
  • 환경이 너무 나빠서 주님으로부터의 보상도 못 쌓을 정도로 나쁜 환경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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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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