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진부한 비유입니다만,

옛날옛적에 노예로 태어나서 그것도 고약한 주인 밑에서 정말 비참하게 살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집안 경제가 망해서 노예로 팔렸는지, 나라가 전쟁에서 져서 망했는지, 태생이 상놈 가문이었는지, 뭐 이유는 상상에 맡김)

한 마디로 인간 취급을 못 받았죠. 글도 읽을 줄 모르고, 자유가 없고 맨날 허드렛일만 하다 성질 드러운 주인한테 맞거나 욕 얻어먹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눈치 백 단이 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살다 그냥 죽었을 터인데
그러던 어느 날, 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서 이 여자를 엄청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서 이 노예를 옛 주인에게서 사 버리고 자유의 몸을 만들어 줬습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그 왕자와 결혼하여 조만간 왕비가 될 처지가 됐습니다. 하루아침에 완전 인생 역전.

그런데, 그런데..

이 여자,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 365일 내내 앵무새처럼 “왕자님, 평생 노예로 살 수밖에 없던 저한테 이런 자비를.. 흑흑 너무너무 고마워서 어쩌죠? ㅠㅠ”밖에 할 줄 모릅니다. 다른 거 하는 게 없습니다.

왕자님이 정말로 고맙다면, 이제 정말로 왕자가 원하는 대로 말투와 행동도 고급스럽게 바꾸고, 글도 배우고, 왕궁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각종 매너와 인사법도 배우고 왕족이 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궁전에서까지 노비 시절처럼 막 남 눈치 살피면서 불안하게 지내고, 식사 때는 남이 먹다 떨어뜨린 찌꺼기도 손으로 허겁지겁 주워 먹습니다.
왕비가 될 여자가 아무 앞에서나 무릎 꿇고 앉는 노예 근성이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만 끝나면 다행인데,

어떨 때는 숫제 ‘왕자님이 나 정말 사랑하는 게 맞을까? 이렇게 실컷 살다가 내가 뭐 하나 실수라도 하면 도로 쫓겨나지는 않을지? 전주인에게로 송환이라도 되면 어떡하지?’ 이런 의심스런 걱정을 하는가 하면,

‘왕궁 생활, 너무 껄끄럽고 가식적이고 거추장스러워! 차라리 조금 험악하게 살긴 했어도,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 하면 먹여 주고 재워는 주던 옛날 시절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다’
‘왕자님보다는 차라리 그 주인집에 총각(또는 다른 동료 남자 노예)이 더 남성스럽고 멋있어 보이던데!’

숫제 저런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노예 딱지를 뗀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저러고 있는 약혼녀를 보는 왕자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기도 안 차겠죠?

그런데 불행히도 구원받고 나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저렇게 살면서 성령님의 안구에 쓰나미가 쏟아지게 만드는 크리스천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유형도 별별 부류가 다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면서 영적 성장 내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단장하는 교육이 없이,
오로지 24시간 내내 하는 게 구원, 복음밖에 없는 교회. 지옥 안 가는 게 지상 최대의 목적인 교회. -_-;;
아는 거라고는 탕자의 비유 같은 은혜의 말씀밖에 없고, 갓 구원만 달랑 받아서 온통 baby뿐이라, 영적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는 교회.

구원받고 나서도 성경은 오로지 종교 경전으로서의 최종 권위일 뿐이지 일상 생활에서 사고방식이 불신자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신자들.

‘난 성경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이러다 구원 잃으면 어떡하지? 휴거 못 되고 대환란 겪게 되면 그 뒤로 어떻게 해야 최대한 고통 없이 순교할 수 있지?’ 에 맨날 불안 초조해하느라 진 다 빼고 전전긍긍하는 신자들.
이런 식으로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의 형들의 불신과 악한 추측은 요셉을 울게 만들었습니다. (창 50:17) “형님들 아직도 저를 못 믿으시겠습니까? ㅜㅜ”

끝으로,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조금 불편하고 손해를 감수하다 보니 차라리 옛날 시절이 나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초짜 신자들. 기껏 자유를 얻고 나서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하던 출애굽 유대인들의 후예입니다.

나의 신앙 생활을 돌이켜 봅시다. 이 글은 본인도 스스로 적용하면서 반성해 봅니다.

p.s.
왕자가 주인으로부터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노예를 풀어 주려고 했을 때,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A: 호의는 고맙지만 괜찮아요. 여기서 열심히 일하고 주인 마음에 들면 아마 주인님이 저를 풀어 줄 거예요.
혹은
B: 왕자님 돈 엄청 드셨을 텐데, 여기 적지만 제가 가진 패물도 좀 거기에 보탤게요.

왕자님이 처음엔 반했다가도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겠습니까?

이 글의 일차적인 적용 대상은 일단 저런 부류에는 해당하지 않는, 구원은 확실히 받은 신자-_-입니다.
하지만 우리더러 하나님 앞에서 저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거짓 종교들도 허다합니다. ㄱ-

profile

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2010.01.31 23:31:34 (*.197.162.56)
332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한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에 매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 폭탄이 떨어져도 어떤 손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것에 대한 보안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이것은 먼지조차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공기의 습도와 온도 역시 철저하게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이것은 높이와 너비가 39.17밀리미터가 되는, 끝이 둥근 원형 유리관 속에 또 다른 작은 원형 유리관 여러 개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세상과 공기도 섞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120년 동안 이것이 저장실 밖으로 나온 것은 고작 3번뿐. 이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극소수로, 일반인은 그 누구도 이것에 접근할 수 없다.

* * * * *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이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의 어머니와 같다.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은 바로 이 원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질량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에 의해 정해진다. 정확하게 1킬로그램이란 게 얼마나 되는 거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인 것이다.
* * * * *

겨우 1킬로그램짜리 쇳덩어리가, 거의 반도체 공장 이상의 우주 철통 보안을 받으며 애지중지 보관되는 과학계의 최고 보물인 이유는,
이게 정확하게 1kg, 아니 1kg을 정의하는 "최종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질량은 비행기, 인터넷, 우주선을 만들어 낸 인류의 21세기 과학 지식으로도 아직 원시적인 인공 구조물에 의존하여 정의하고 있는 유일한 단위입니다.
옛날, 그러니까 18세기쯤에는 길이의 단위도 미터 원기가 최종 권위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절대불변인 기준으로, 가령 "빛이 진공에서 1/xxxxx 초 동안 진행한 거리"와 같은 식으로 수 차례 정의가 바뀌었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초의 정의도 "무슨 원자가 절대 온도 0도에서 xxxxx 번 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이런 식으로 절대불변이면서, 현대 과학 기술로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1/86400 이런 식으로 더 부정확했었습니다.
그러나 킬로그램의 정의만은 19세기에 제정된 정의를 아직까지도 업데이트하지 못했습니다.

질량은 시간, 길이와 더불어 시공간과 물질을 기술하는 한 축으로써, 과학에서 기본 중의 기본 개념입니다.
중력이라는 개념이 가미된 무게야 디지털 저울로도 측정하지만, 지구에서나 달에서나 동일한 절대 질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원시적인 양팔 저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kg 추 얹고, 1kg 추 얹고.. 마치 돈 내듯이.

* * * * *
그래서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표준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겐 일종의 수치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여전히 1킬로그램이 얼마인지는 전적으로 이 구닥다리 물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이 바로 질량이라는 건 과학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기에 딱 좋은 예다. 독일의 한 표준 과학자는 “킬로그램은 측정과학계에서 하얀 재킷에 묻어 있는 얼룩과도 같다”고 말했다.
* * * * *

세계 각국에는 이 킬로그램 원기를 정교하게 복제한 사본이 국가별로 표준 과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마다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어 복사본들의 질량을 서로 측정하여 오차가 생기지는 않았나 대조합니다.
이게 어긋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밀리그램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금이나 귀금속 거래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1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원기와 복사본, 또는 복사본과 복사본 사이의 오차가 점차 커지고 있고(물론 그래 봤자 마이크로그램 단위이긴 하지만) 그 원인 및 해결 방안을 과학계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 짬밥을 너무 오래 먹은 구닥다리 킬로그램 원기를 궁극적으로 퇴출시킬 목적으로, kg의 새로운 정의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이 애쓰고 있습니다.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는 정의를 만들어 낸 국가 내지 학교, 연구소는 돈과 명예를 한몸에 거머쥐는 스타가 되겠죠. 그 방법은 절대적으로 엄밀하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게 어디서나 재연이 가능해야 하는데, 아직 이렇다할 뾰족한 대안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히브리/그리스어가 쓰였고 큐빗, 므나, 바스, 드라크마 같은 길이, 화폐, 부피, 무게 등의 단위가 쓰였습니다.
그 반면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고 미터법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달러나 유로 같은 화폐가 꽤 널리 통용되는 편입니다. 세계의 공용 언어라든가 단위는, 국제 정세 및 영적 동향과도 무척 큰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단위의 최종 권위 관념은,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 권위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는 bible believer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생각됩니다. 세계 각국에 샘플로 전달되어 있는 킬로그램 원기의 복사본은 성경의 필사본하고 정확하게 같은 개념이지요!

그 약점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딱히 대안이 없어서 너무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우리나라 교계에다 비유하자면 개역성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변개, 삭제에 대해서도 모르고 관심이 없는 신자는,
마치 과학자라고 하면서 킬로그램 원기가 어긋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새로운 정의의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과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_-)

과학자들은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에 견주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측량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절대무오한 말씀"에 맞춰 나의 마음과 행실을 교정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성경 자필 원본이나 KJV 1611년판 원본을 교황청 도서관 지하의 반도체 제조실 같은 벙커에다 kg 원기처럼 고이 짱박아 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눈으로 본 당사자의 체험보다도 더 확실하고(벧후 1:19) kg 원기보다 더 정확하고 무오한 최종 권위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KJV 1611), 그 말씀의 순수성과 절대불변 보존에 대한 약속까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기독교가 존재 가능하지 않겠나요?
profile

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레벨:8]김용묵
2010.01.29 09:16:01 (*.13.116.215)
620
듣자하니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긴 하는데,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그 율법주의자들의 후예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명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하는데 십계명 중에 왜 안식일만 빼느냐..
예수님도 율법을 다 성취하러 오시지 않았느냐,
그 법은 네 가까이에 있고 네가 능히 지킬 수 있다고 신명기에 명시돼 있는데 왜 자꾸 불가능하다는 쪽으로만 가느냐..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율법 조항이 "겉보기로 보기에" 얼마나 고차원적이고 좋은 법인지 그쪽으로만 접근하면 영락없이 율법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제대하고 민간인 된 지가 언젠데 그렇게도 군인 행세하고 싶으면, 혼자 그렇게 살면 됩니다.
민간인이라도 군대식으로 살면 육신의 건강에 좋으면 좋지 나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아주 규칙적으로 살면서 심신 단련하고.. 생필품도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치약 하나만 있으면 청소 다 하고.. ^^ 누가 부르면 관등성명 "병장 ○○○!"까지 해 주고..
 
그런다고 해서 국가에서 군인으로 알아 주는 건 아닌 게 문제일 뿐이죠.
국가에서 현역 시절처럼 총기라도 지급해 주는 것도 아니고, 집 근처에 무슨 초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제 총까지 만들어서?? -_-)
 
더구나 남한테 이런 소리는 더욱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민간인 된 뒤라도 군기 빼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 민간인 신분이 유지되지, 어영부영 굴었다간 다시 군대로 끌려간다거나..
민간인이라도 아주 심한 중죄를 지으면 경찰이 아닌 헌병이 와서 잡아간다거나.. 군사 재판에 회부된다거나..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죽을 병을 고쳐 준 의사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환자 시절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부과됐던 행동상의 각종 제약--이것저것 먹지 말고, 매일 무슨 약 반드시 먹고, 무슨 행동 하지 말고...--과 주의사항들을 앞으로도 모두 이행하면서 살겠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와는 또 반대로, 그런 것들을 이제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앞으로 술 담배에 쩔어서 살아도 되고 진짜 내 마음대로 건강 따윈 내팽개치고 살아도 된다" 와 동급으로 알아듣는 것도 말귀를 못 알아들은 멍청한 짓이지요.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도 바로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바람직하냐 안 하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신분의 차이이고 위상의 차이입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니라 아예 율법을 근본적으로 초월한 법 아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덧..
이 글을 쓰고 나서 느끼는 건데,
율법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자기 의'는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갖고 있는 '자기 의'하고 아주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요즘 군대가 군대냐? 애들이 다 군기가 빠졌어. 내 때는 말이야.." 이런 식.. ㅡ,.ㅡ;;
profile

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오늘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영접한 거듭난 그리스도인 중에 확고한 교리 기반이 서지 못해, 잘못된 교리의 바람에 흔들려 밀려다니는(엡 4:14)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지체들이 적지 않습니다.
  
종말론이 그런 분야 중 하나이며 그 안에서도 대환란이 대표적인 걸림돌입니다.
예수님의 전천년 재림을 믿긴 하는데, 그 전에 신약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대환란을 겪는 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교회 환란 통과 내지 환란 후 휴거 교리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날만 바라며 지내도 시원찮을 판에, 그보다 먼저 적그리스도를 만날 날부터 대비한답시고 벌벌 떨고 불안해하며 ‘저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적그리스도로부터 고문을 견딜 자신은 도저히 없으니, 제발 단칼에 목숨이 끊어지게 도와주십시오’ 같은 기도나 한다면, 과연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하겠습니까?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생겨난 오류입니다.
 
첫째,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아서입니다. 특히 교회와 유대인을 구분하지 않고 성경을 잘못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계 4:1의 ‘이리로 올라오라’, 렘 30:7의 ‘야곱의 고난’, 마 24:13의 ‘끝까지 견디는 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환란 성도의 부활과 휴거에 대해서도 언급은 하고 있으나 그들은 신약 교회 성도가 아닙니다.
 
둘째,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믿지 않아서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짐승의 표를 받았다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지옥불로 떨어지니 이걸 받지 않기 위해서는 교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는 논리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저주받을 행위 구원 교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셋째, 기초 영어 지식에 무지해서입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특정 교리를 교묘하게 지지하는 뉘앙스가 들어갈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그런 예를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종말론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많은 예는 계 3:10의 ‘keep from’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각 단어를 모아서 해석하든 따로 해석하든 환란의 시각 ‘그 자체를 맞닥뜨리지 않도록’ 지켜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from은 out of도 아니고 since도, during도 아닙니다.
 
끝으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상생활에서 겪는 박해(딤후 3:12)나 환란(행 14:22)을, 하나님의 진노인 그 전후무후한 대환란과 분간을 못 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대환란을 거쳐서 정화된 후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식의 교리까지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원래 지기로 돼 있는 십자가가 뭔지를 모르니까 남이 지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겠다는 발상과 다를 게 없습니다.
환란 전 휴거는 그리스도인이 환란과 시험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환란 통과론자들이 제일 잘못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현 세상 정부와 공권력이 아무리 악하다고 한들, 최소한 성육신한 사탄 마귀 적그리스도의 직통 정부는 아니기 때문에 로마서에서도 크리스천 역시 가능한 한 순종하고 따르고, 특히 군대 징집에도 순종하라고 명령이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환란은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하고 연단하기 위해 있는 기간이 아닙니다! 이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대환란 때 순교하겠다고 버틸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나 사회생활 착실히 잘 하고, 술자리 같은 것 단호히 거부하고 특히 이 어려운 저출산 시대에 애도 셋 이상 듬뿍 낳아서 키우라고 하세요. (대환란은 우리 주님도 출산과 육아가 재앙이라고 인정하신 때임)
 
세상 경륜을 나누시고, 구원 받은 성도들을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앞으로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제정신으로 못 살겠고 주변에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나 교리가 나돌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진노를 집행하기에 앞서, 구원 받은 우리를 남김없이 안전하게 데려 가십니다. 아멘!
우리는 지하 벙커나 비상식량 따위는 전혀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그 마지막 순간까지 각자 사회의 자기 위치에서 성실하게 믿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이런 든든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profile

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교회는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

- 환란전 휴거의 성경적 증거들 -

James W. Knox 지음 / 김영균 옮김

 

현재 사탄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전에(계 6:2)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살후 2:6-7). 이 위대한 사실(휴거)을 지지해 주는 성경 기록들을 통해 그 증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의 문들이 그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마 16:18). 계시록 13:7에서 사탄은 성도들을 이기고 이 세상을 통치한다. 주님께서는 거짓말하실 수 없으므로, 이때 교회는 분명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2. 계시록 2, 3장에서 우리는 지역교회들의 활동에 관해 읽게 된다. 계시록 4장은 “이리로 올라오라”(4:1)라는 외침과 함께 시작된다. 이 부름의 소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 나오는 주님의 부르심과 교회의 떠남에 대한 자세한 약속과 잘 맞아 떨어진다.

 

3. 이 부르심에 이어 요한은 자신이 즉시로 하늘에 있는 왕좌 앞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부터 계시록에서는 지상에 있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4.“대환란에 대한 정의”라는 앞선 과에서 이미 주목한 바와 같이(자세한 내용은 도서출판 킹제임스에서 발행한“성경적 종말론”참고) “이리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은 야곱의 고난(렘 30:7, 단 9:24-27) 이전에 있다.

 

5. 대환란은 진노의 때이다(계 6:16-17, 습 1:15).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진노가 아닌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실로 위대하고 보배로운 약속이 주어졌다(살전 1:10, 5:9). 교회는 사람들의 진노로부터는 분명코 자유롭지 못하나 하나님의 진노의 경우 결코 교회에 해당될 수 없다. 교회는 용서함을 받아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완전하게 된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해당이 된다.

 

6. 교회가 하늘에 있게 되는 또 다른 증거는 24장로들이다. 하나님의 왕좌 주위에서의 이들의 활동은 계시록 4:4~ 5:14에 묘사되어 있다. 장로라는 칭호는 천사들에게는 결코 주어진 적이 없다.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천사들이 왕좌에 앉아 있다든가 왕관을 쓰고 있는 장면을 접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천사들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왕관들이 약속으로 주어져 있다(벧전 5:2-4, 딤후 4:8 등). 사도와 동료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계 1:6)는 약속을 받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는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이라는 약속도(딤후 2:12)받았다. 이들 24장로들이 분명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았다는 사실(계5:9-10, 1:5) 하나만으로도 너무도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들의 왕관들은 지상에서의 왕관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왕관들은 하늘에 있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고후 5:10, 고전 3:11-15) 받은 것임이 틀림없다.

 

7. 우리는 이 무리가 또한 흰 옷을 입고 있음(계4:4)을 보게 된다. 이것은 제사장의 의복이다. 그러나 그 어떤 레위 지파의 제사장도 왕관을 쓰거나 왕좌 위에 앉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가 될 수 없다. 이들은 왕가의 제사장 직분(벧전2:9)을 지닌 자로 성령에 의해 중생한 자들이다(딛 3:5).

 

8. 성경의 관련 기록 중 대부분에서 장로란 한 민족, 지파, 가문 혹은도시의 대표로 나타난다. 구약 경륜 하에서는 24명의 제사장이 직분을 담당했었다(대상 24:1-19). 다윗은 24명의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들을 찾아내어 모든 제사장 직분의 대표로 삼았다. 새 예루살렘에는 12개의 기초석이 사도들에게 속한 반면, 12대문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을 따라 불리고 있다(계2 1:10-14). 이 사실과 더불어 다윗 시대의 제도도‘첫 열매들’이며, 이는 하늘로 데려가신 자들 또한 이 그룹에 속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9. 또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거듭난 성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진노의 날에 대한 예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이다. 요엘서 2:31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경고가 이렇게 나와 있다. “크고 두려운(terrible)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욜 2:31).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의 권능 하에 이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저 크고 주목할 만한(notable)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행 2:20)를 선포하도록 하셨다. 이 날은 대환란을 겪을 자들에게는 두려운(terrible) 날이 될 것이다. 환란을 피하게 될 자들에게는 주목할 만한(notable) 일일 뿐이다.

 

10. 교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하늘에 있기 때문에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환란을 통과하여 벌을 받기 위해 땅으로 되돌아 오지는 않을 것이다.

 

11. 골로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그분의 눈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골 1:22)로 드려질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그런데 이 거룩한 구별의 약속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 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져 있다(고전 1:2). “선한”(좋은) 그리스도인은 휴거되고“나쁜”(악한) 그리스도인은 환란 전체, 혹은 일부를 일종의 연옥 같은 것으로 통과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12. 우리는 화해를 이룬 대사들이며(고후 5:17-2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 어떤 국가도 적대적 행위가 외국 땅에서 발발했을 때 자기 나라의 대표를 포기할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다.

 

13. 교회의 예표인 에녹에게는 그가 동참하지 않을 두려운 일들이 계시되어 있다.

 

14. 죽어 있든 살아 있든 모든 성도들의 복된 소망은 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살전 4:13-18). 주님께서 이 땅으로 오실때까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려고 견디거나, 살아남고자 끝까지 견디는 것이 아니다.

 

15. 사람들은 환란 때 안식일과 관련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마 24:20). 그러나 안식일은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골 2:16).

 

16.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다가올 적그리스도와 그가 통치하게 될 위험한 때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2절에 따르면 이 내용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는 그 누구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 위험한 때에 살게 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17.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들의 삶에 대해 다루는 서신들에서 바울은 단 한 번도 대환란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징계에 대해서는(고전 11:32) 주목해야 하지만, 이 세상의 정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8. 롯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악한 자들과 함께 멸하지 않으실 것임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창 18:25). 사실 롯의 의로움 은 그 누구에게도 나타나 보인 적이 없었다(벧후 2:6-9, 창 19:14).

 

19. 대환란은 복된 소망이 아니다. 환란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의 표적을 기다리게 한다. 교회가 야곱의 고난의 전부, 혹은 일부를 겪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 하는 벽을 허물려고 시도하는 또 다른 이단일 뿐이다. (이와 더불어 교회의 휴거(사라짐)에 대한 20여 가지의 증거들을 계시록에서 더 찾을 수 있다.)

 

* 이 글은 전도지 형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하여 이 글이 필요한 분은 도서 신청 게시판에 신청하시면 무료로 보내드립니다. 신청하실때 필요한 부수를 적어주세요. (예: 10부, 20부 등)

 

profile
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my profile image
검색 검색

category

웹진 생명의 빵 (113)
2010.0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scent Posts

Rescent Reply
powered by zbX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