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3 00:59:49 (*.197.1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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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을 전서도 아닌 일부만을 구해다 좀 읽으려고 해도, 필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을 기다리고 인건비도 지금 우리 시세로 수십만원을 줘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가 박해 받는 곳에서는 마을 사람 전체가 목숨을 걸고 한데 모여 한 권뿐인 성경책을 읽으며 영적 생활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풍요 그 자체이다. 널린 게 성경책이고, 인터넷으로 위치만 입력하면 몇 초만에 원하는 성구를 바로 볼 수 있고, 단어 검색도 되고, 그것도 모자라 열몇 종류의 역본들을 줄줄이 꿰어서 한 눈에 볼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이 그렇게 바뀌었을진대, 지금은 성경을 두고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영적 싸움의 양상도 180도 변했다.

 

그렇다. 마귀는 과거에는 성경을 보는 대로 몰수하고 불태우는 식으로 공격했으나, 성경을 무식하게 없애 버리는 게 불가능해진 지금은, 숫제 가짜 짝퉁 성경들을 마구 만들어 내서 진짜 성경을 매장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는 역정보 유포라는 대단한 첩보 전략이다.

 

본인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나온 역본들이 내용과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돈의 창시자가 아니며, 따라서 이런 여러 성경을 모두 인정하실 리는 전무하다. 이는 기독교의 보안과 근간, 정체성이 걸린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크리스천이 자신이 읽는 성경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후, 가짜 성경을 단호하게 버리고 진짜 성경을 손에 쥐어야만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다음은 그 몇 가지 예이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없음’ 처리되어 삭제된 구절이 없다. (마 18:11, 마 23:14, 행 8:37 등)
  •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탄 마귀의 옛 이름이 루시퍼(사 14:12)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 이름인 갈보리(눅 23:33)를 찾을 수 있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티로스, 유니콘, 용 등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에 대한 조명을 얻을 수 있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구약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천국, 하늘은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유독 지옥만은 음부, 무덤, 스올, 하데스 따위로 정체를 가리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진짜 성경만이 판권이 없으며, 판권을 따내기 위해 다른 역본들과는 다른 어렵고 장황한 단어와 표현을 일부러 찾아 애쓴 흔적이 없다. 이렇듯, 진짜 성경의 특성만 열거해도 책을 한 권 쓸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이유들 중 좀 색다르고 어찌 보면 매우 심각한 주제를 두고 진짜 성경과 가짜 성경을 판단하고자 한다. 이제 여러분은 ‘킹 제임스 성경보다 읽기도 편하고 뜻도 정확하다는’ 소위 현대 역본(영어 성경) 번역자들이 기를 쓰고서 조장하는 표현, 그리고 한편으로는 필사적으로 혐오· 기피· 거부하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비양심적인 태도와 현 시국의 심각성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의 지성과 양심을 자극하는 명확한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증거의 열매는 당신의 결단과 행동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2.

성경은 인간의 끔찍하고 추악한 죄, 그리고 인간의 가장 은밀한 면모에 대해 다룰 때, 이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상상과 자극도 일으키지 않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언급하나 모른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창 4:1), “교접의 씨” (레 15:16), “여인들의 관례.” (창 18:11) 음란한 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성 교육 시간에 다 배울 법한 단어조차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을 만드신 분이다. 그래서 성경이 성인물처럼 취급되지 않게끔,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 가미되지 않고 지극히 ‘순수하다’(시 12:6, 시 119:140)고 성경이 스스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이에 대해서까지 성경의 접근성을 고려하신 것이 틀림없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눅 18:16 중간)

 

그렇다. 하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모름지기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고(딤후 3:15) 영적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쉽고 간결한 성경이며, 어린이를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성경이다. 폭력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작 예수님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대인 어린이가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그리스도의 수난> 같은 영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성경들에서는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를 찾을 수 없다. 앞에서 예를 든 세 구절만 해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은 그렇게 기록돼 있지 않다.

  • 하나님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에게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라고 영감을 주셨지, “이브와 동침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 “여인의 관례에 따른 것을 멈추매”라고 말하셨지 “폐경기가 지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 “짐승과 함께 눕는 자”라고 했지 “짐승과 성관계를 갖는 자”라고 안 했다.
  •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와 즐겁게 논다”(창 26:8 sport)고만 했지, 서로 껴안고 있었다고 표현 안 했다.
  • “자기 쾌락에 빠져 바람을 맡으며 킁킁대는 암나귀”(렘 2:24)라고 말씀하셨지 “발정 나서 헐떡대는 암나귀”라고 하신 적은 없다!

이래도 성경이 뜻만 통하면 괜찮은 책인가? 성경 번역에서 동적 일치 기법이 얼마나 사탄적인 생각인지 부디 경각심을 가지기 바란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라는 바이블은, 통계에 따르면 ‘주 lord’라는 단어가 71번밖에 안 나오고(킹 제임스는 8000여 번), 마치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한 번도 주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저질이다. 그런데 sex라는 단어는 199번이나 나온다. 특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행음에다 비유한 예레미아, 호세아서를 이 역본으로 보면 가히 섹스 성경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나라를 포함, 전세계적으로 읽기 쉽고 잘 와 닿는다고 격찬을 받고 있는 <메시지> 바이블의 정체이다. (☞ 관련 링크)

 

NIV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알다(know)’, 개역성경도 ‘상관하다’라고 옮긴 단어를 ‘have sex with’ (창 19:5, 삿 19:22)라고 친절하게 진짜 의미를 알려 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성령님의 가르침과 조명을 받으며 경건하게 묵상해야 할 성경에 이 무슨 난장판인가? 하나님이 정녕 성경을 그렇게 기록하셨단 말인가?

 

그 중 단연 압권인 예를 보이겠으니 놀라지 마시라. NIV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신약 시대가 됐는데도 아직도 할례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너희를 혼동시키고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런 문제아들은 아예 자기 X을 짤라 버렸으면(emasculate) 좋겠다.” (갈 5:12)

 

정말이다. 직접 책이나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시길.

emascul.jpg

기가 차지도 않는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킹 제임스 이외의 모든 성경들은 결국 저런 뜻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신약 역사상 성령으로 가장 충만했을 거라고 회자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성경에 음담패설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다. 저게 도무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부패한 대화는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엡 4:27, 29)고 권면한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지껄일 소리인가?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아들이 제발 교회에서 끊어지고(be cut off)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걸, 불온사상을 지닌 성경 번역자들이 cut을 능동으로 변개한 것이다. 이 정도면 성경 번역자가 아니라 성경 “반역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3.

성에 탐닉하고 있는 현대 역본들의 추태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그야말로 맛만 좀 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예를 든 것보다 더욱 치명적인 독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만큼 성 범죄, 성 문란,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엄금하고 정죄하는 책은 없다. 결혼한 남녀의 1:1 부부 관계 외의 모든 성적 접촉은 음행이고, 성 정체성이 문란해 지는 것도 중죄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경은, 그런 죄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그런 죄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을 혐오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정죄하고 있는 성 범죄에 대한 언급은 표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이다. 아무리 인간이 의학, 심리학으로 동성애를 합리화하려고 한들 소용없다. 하나님이 그건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롬 1:24-27) 못을 박아 버렸다면 그런 것이다. 그게 정말 맞는지는 동성애자 본인이 잘 알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성애자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동성애자’라고 중립적으로 불러 주기에도 너무나 가증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꼭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자’라고 길고도 적나라하게 일컬으셨다. 영어로는 죄악의 온상 소돔의 이름을 딴 sodomite.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한 왕들은 부임할 때마다 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했지만 이런 자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그런데 구약 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 sodomite가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사라졌다. 미동(꽃미남 같은 남자), 내시, 남창 등으로 바꿔서 그냥 선천적으로 나긋나긋하고 남자 구실 못 하는 남자, 또 성매매를 하긴 해도 그렇게 변태 같은 느낌은 안 드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까와 같은 과감하던 문체는 어디로 사라졌나?

 

가나안 이방 종교에는 남창· 내시가 있었다고 아무리 신학자, 고고학자들이 변명하더라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동성연애자라고 말씀하셨다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동성연애자, 아니 남색하는 자가 맞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1장과 더불어 성 문란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구절은 단연 고전 6:9이다. 그런데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가 언급되는 이 구절이 킹 제임스 성경만치 확실하고 단호하게 번역되어 있는 성경 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너무나 명백해서 동성애자 이외의 핑계가 틈탈 여지가 도저히 없으니, 변개된 성경들도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뜻하는 단어로 번역을 했다. 하지만 abuser 같은 단어도 빼고 마지못해, 아주 중립적이고 그다지 도덕적인 느낌이 없는 단어인 homosexual을 삽입한 것에 그쳤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은 아주 직설적이고 민망하기까지 한 토박이말로 성과 관련된 죄를 폭로하셨는데, 잘 와 닿지 않고 좀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한자어로 바꿨다는 뜻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지옥에 간 부자를 다루는 눅 16:23은 상황이 너무 명백하니까 어쩔 수 없이 hell을 인정했지만, “지옥의 문”들이 교회를 능히 이기지 못할 거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응당 음부, 하데스라는 뿌연 말로 바꿔 버린 고약한 센스이다. 지옥의 입구에는 문이 있고, 주님께서는 그 열쇠(계 1:18)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음부 권세”(마 16:18. 개역)는 도대체 뭘 뜻하는가?

 

그나마 NIV는 그 동성연애자에다가도 “homosexual offenders”이라고 단어를 또 바꾸어, 모든 동성애가 다 나쁘지는 않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얼마나 치떨리고 교묘한 변개인가!

고전 6:9에 역시 존재하는 effeminate, 즉, 하리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천성을 버리고 여자가 되어 버린 남자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남아나지를 못해 있다. 전부 구약의 sodomite와 마찬가지로 남창으로 단어를 변개했다.

 

끝으로, fornication(음행)이라는 직설적인 단어도 요즘 성경에서는 좀체 찾을 수 없다. fornication은 주님께서 인정하신 이혼 사유 중의 하나이다. (마 5:32, 19:9) 이 단어도 구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창녀짓으로 바뀌었다. (대하 21:11, 사 23:17, 겔 16:29) 창녀짓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따로 언급되어 있다. (겔 16:15) 즉, 다른 의미이다. 그런데 왜 기를 쓰고 음행이란 단어를 안 쓰려는 것일까?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성적 부도덕함(sexual immorality)으로 바뀌었고, 어떤 데서는 그냥 sexual이라는 단어까지 빼서 의미를 훨씬 약화시켰다. 음행을 책망하는 고린도전서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이다. 그리고 롬 1:29와 갈 5:19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목록 가운데 간음(adultery)만 남기고 음행은 아예 삭제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음행에 대한 정죄가 희석되고 약화된 성경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 그리고 바른 믿음의 선조들이 손에 쥐었던 그 성경이 결코 아니다!

4.

독자들이여, 이 모든 예가 결국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현대 역본 번역자들은 독자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음란한 생각을 조장하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추하고 역겹고 죄스러운 성 범죄의 실체를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어떠할까? 문자적으로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만치 동성애나 음행을 혐오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사람이 당신이 읽는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말을 굉장히 돌려서 번역하거나, 아예 변개· 삭제까지 한 것이다.

 

이것은 마귀의 세력의 음모이다! 어떻게 성경을 만드는 일에 마귀가 개입하겠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라. 성경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응당 돈이 되는 책장사이다. 지금이 성경을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 이상, 성경으로 이익 챙기고, 덩달아 성경을 부패시키고 그 속에 독약을 타려는 음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AND와 OR의 차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선은 오로지 AND이다. 지극히 작은 말씀 하나만 부패시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하고 순수함은 깨져 버린다. 마귀는 성경의 무오성과 일관성을 깨뜨리고 성경에 대한 자그마한 의심을 심으려고 노력 중일 뿐이지, 성경에 “너는 사탄을 숭배할지니라”란 멍청한 구절을 넣으려고 투쟁 중인 게 결코 아니다.

 

근래에 영어권에서는 성별·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특정 계층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용어만을 공식 석상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죄까지 덮어 주는 제도로 오래 전부터 변질되었다. 오늘날이 얼마나 죄로 넘쳐나는 음란한 세상인가? sodomite가 gay가 되고, drunkard가 alcoholic이 되고, fornication이 free love나 pre-mature sex로 미화되는 것 말이다. 성경은 악을 악이라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자에게 화를 선포하고(사 5:20), 이런 거짓된 입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한다(잠 17:4). 그런데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경 자체가 죄를 미화하는 단어로 물갈이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런 저질 성경을 읽고서 참 성경의 저자인 성령님의 조명을 어떻게 받겠으며, 제정신 박힌 크리스천이 어떻게 양성되겠는가? “읽기 쉬운 우리 시대 길거리 말투”라는 광고 문구는 그 자체가 저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란 성구로 유혹을 이겨라.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는 한낱 인간의 고대 영어가 아니라, 지극히 절제되고 연단된 하나님의 언어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언어라서 처음에 좀 생소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은 고어일 수는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은 어중이떠중이가 다 자기 권리 따지고 외치는 말세의 라오디케아 교회 기간 대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에 탄생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카톨릭을 대적하던 올곧은 왕, 그것도 리처드, 찰스 같은 이름도 아니요 성경의 인물과 이름이 일치하는 제임스라는 왕의 명령에 의해 질서 있게 번역되었다. 왕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저작권, 돈 같은 문제가 개입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번역자들은 TV, 인터넷처럼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매체가 없던 보수적이고 건전한 시절에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원어 성경을 술술 외우고 성경의 원어는 물론 인접 국가들의 고대 언어들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수재였다. 덕과 지식을 고루 갖추었으며, 더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임을 진심으로 믿고 두려워한 신앙의 위인이었다. 소설 쓰듯이 제멋대로 번역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원어와 문자적 일치가 이루어지게끔 하나님의 의도를 살려 번역하였고, 심지어 부득이하게 원어와 대응이 안 되는 단어를 추가할 때는 두려워서 이탤릭체 처리를 하는 정직함까지 보였다. 한 마디로 사상이 건전하고 올발랐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쓰셔서 신구약 성경을 걸출한 영어 합본으로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미디어(책, 신문기사, 영화, TV, 게임, 인터넷 등)를 영적으로 시험하고(prove), 저자나 번역자가 무슨 믿음과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이것을 만들었는지 따져 보자. 성경도 예외가 아니며, 성경이라고 다 받아들이지 말자. 개역성경, NIV를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과, 올바른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인 사람은 서로 사상이 다르고, 믿는 영이 다르다.

 

지구와 온 우주가 불로 소멸된 뒤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셋째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때 하늘에 적혀 있을 말씀은 도대체 어느 역본 말씀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 하듯이,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음란한 성경으로부터 보호하자!

profile

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2010.01.17 22:43:33 (*.197.1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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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느 영에서 유래되었냐에 따라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네가 누구에게 말을 하였느냐? 누구의 영이 네게서 나왔느냐? (욥 26:4)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눅 9:55.. KJV에만 제대로 적혀 있음)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계 20:12)

A. 악한 행위 (마귀의 영)

 

남이 잘 되는 걸 시샘하고 잘못 되는 걸 고소해하는 것,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것, 어떤 형태로든 살인자와 간음자의 성품, ‘나 하나쯤이야’ 하는 심보, 내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고 착취하고 싶어하는 심보, 배신, 변절 등...

 

정상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나쁜 짓이라고 알 수 있는 일체의 행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쁜 짓은 전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할 줄 안다. 쇳덩어리가 제아무리 노력해도 물에 뜰 수 없듯, 사람이 원래 이런 근성이 있는 걸 어찌하겠는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B. 겉보기로 악하지는 않으나, 죽은 행위 (인간의 영)

 

그런데 사람은 타락해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죄가 죄라는 것과 죄의 결과가 나쁘다는 걸 인지조차 못 할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살인이나 불효가 나쁘다는 것 정도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안다. 사람이 너무 타락해서 죄에 대한 책임을 질 능력조차 없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고 지옥에 보낼 수가 없으며, 실제로 선과 악을 스스로 분간을 못 하는 어린아이는 죽어서 지옥이 아닌 하늘로 무조건 간다.

 

모든 사람들이 A처럼 살았다간 인류는 자멸할 게 뻔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나름대로 죄를 억제하고 ‘제어’하는 여러 장치들을 고안해 냈다. 세상 정부와 법률, 군대, 교육 제도 같은 시스템을 만들고 각종 사상, 철학, 도덕, 교양, 인격, 예절, 명예 같은 개념을 생각해 냈다. 시스템 중에는 하나님도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의 입장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것도 있다.

 

이것을 가장 강조하는 조직 중 하나는 군대이다. 국가가 공인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인 만큼 군기와 규율, 명예를 목숨처럼 강조함으로써 그 잠재적 야만성을 감추고 포장한다.
B는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만큼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 정도는 알고 있다. B만으로도 언뜻 보기에 대쪽 같은 지조와 절개가 나올 수 있고 애국자, 열녀, 열사, 성인군자, 사상가, 독지가, 심지어 순교자가 나올 수 있다. B는 자부심과 자기 의를 강조하며 지극히 긍정적이다. 내게 돈만 있으면, 좋은 환경과 여건만 갖춰진다면 내 힘으로 의로워지고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내 개똥철학에 따라 내 소신껏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B는 선행에 대한 진짜 동기를 장담할 수 없다. 나중에는 십중팔구 가식과 위선으로 빠진다. 예를 들어, 이게 진짜 겸손인지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황금률은 ‘어차피 난 더 잃을 게 없는데 이판사판이다’(안 주고 안 받기)란 사고방식이 왜 잘못됐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며, ‘긴 병 앞에 효자 없다’ 같은 한계도 드러낸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판별하지 못한다.

 

또한 죄를 제어한답시고 인간이 만든 모든 시스템은 결국 또다른 허점을 만들어 낼 뿐이다. 가령, ‘종교가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적당하게 하나 있는 게 사람 인성에 좋다’고 무심코 내뱉기에는 종교 때문에 벌어지는 폐해, 부작용도 얼마나 큰가?
제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아무리 산업화가 진행되고 아무리 정치 제도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더라도, 그나마 B라도 있어서 A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람을 독려하셨다. 남들보다 B의 비중이 월등히 더 높은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위인으로 떠받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B는 하나님의 앞에서 죽은 불완전한 행위일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없다. 그저 A와 B 비율만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성경은 우리의 죄악이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조차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말하며(사 64:6), 최선의 상태에서라도 헛될 뿐이라고 말한다(시 39:5).

 

C. 바른 믿음에서 나온 진짜 선한 행위 (하나님의 영)

 

C는 B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더러 애써 지키라고 주어지기에 앞서, 우리 깜냥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으라고..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라고 주어졌다는 것을 인지한다. 나에 대해서 긍정적인 게 아니라 지극히 부정적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음을 믿는다. 천지에 그분의 이름 외에 구원의 통로가 없음을 믿고, 내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행동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선을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이루도록 한다.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고 나는 그분의 선을 유통하는 사람일 뿐이다. 위선이고 가식이고가 있을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살았다간 눈 뜨고 코 베인다. 바보 병신 신세 되고 사회 생활 제대로 할 수가 없어진다’고 주위에서 막 빈정거리지만... 그런 빈정거림에 성질을 내던 내 옛사람은 어차피 죽었으니 거기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 진짜로 사회 생활 제대로 못 하는지, 굶어죽는지는 그건 생산자인 하나님이 책임질 일이고, 난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자발적으로 잘 행하면 된다. 게다가 이 세상은 어차피 내 진짜 집이 아니며, 잠시 머물러 가는 곳일 뿐이다. 진짜 좋고 영원한 집은 하늘에 따로 있다!

 

그러니 남이 알아주든 말든, 내가 손해를 보든 말든, 심지어 다른 동료 성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성경만 있으면 세상 트렌드가 어떻든 제아무리 똑똑한 지성인이 코멘트를 하든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분은 뚜렷하다. 사도들 중에 누구는 순교하고 누구는 탈옥한 게 하나님 마음대로였듯이. 그리고 환경과 여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북한에 살든 남한에 살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보상도 못 챙길 정도로 너무 열악한 환경이란 없다.

 

당연히 예수쟁이라 해도 로봇이나 좀비가 아니며, 자유 의지와 감정이 있고 육신이 있다. 늘 저런 모드로 사는 게 아니다. 육신이 자꾸 살아난다. 제일 수준이 낮은 A의 영향을 받을 일이야 잘 없겠지만(전혀 없다는 건 아님), 겉보기로 그럴싸하고 번드르한 B와 그렇지 못한 C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려는 유혹이 늘 찾아온다. 그럴 때 실수로 육신에게 기회를 또 줘 버리면(롬 13:14) 앗차 실수하는 것이며,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하면 이기고 내공과 경험치가 상승하며, 예수님의 형상으로 좀더 다가가게 된다. 정신 건강에 이로운 건 부수적인 소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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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허락한 이 악한 세상 하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의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경영 방식에 순응하여 믿음으로 한 선행만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훗날 놀라운 보상으로 되갚아 주실 진짜 선행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C의 양만을 평가하신다. C만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금은보화로 드러난다(고전 3:12). 믿으려면 이런 걸 믿어야 한다. ‘주여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면 그분께서 믿음을 북돋워 주신다. (막 9:24)

 

세상에서 직싸게 고생하고 노력해서 B를 잔뜩 축적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허사가 될 것이다. 차라리 히틀러처럼 나쁜 짓 깽판 실컷 부리고 나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면 모를까, 저건 선행 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서 이거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B는 어차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미 좋은 평판으로 보상을 받아 버린 경우가 많기 때문에(마 6:1-2 같은. 눅 16:15, 요 12:43도 참고), 하나님이 참작하셔야 할 이유가 더욱 없다.

그리고 C 게이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보상은 고사하고 구원도 못 받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인간 중에 악한 성품인 A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A를 벗어나고자 끈질기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A의 대안으로 일컬어지는 B의 한계에 맨날 좌절하곤 한다. 그럴 때 신을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이 현실을 참 하나님을 찾는 기회로 삼아라. 하나님이 어설프고 불완전한 B라는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정말 놀랍도록 의롭고 공정한 C라는 잣대를 누구에게나 제시하셨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이 사실은 아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으로의 초대가 될 것이고, 이미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동기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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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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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 나는 내가 왜 태어났고 왜 이런 세상을 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 죽는 그 과정과 고통은 인간적으로 두려울지 모르나, 죽음 그 자체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생겼습니다.
  • 죄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비관/좌절/피해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교육 제도, 정치인, 재벌, 강대국 등)
  • 이 세상이 무슨 운석 충돌이나 지구 온난화 따위로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일제도 북한도 무너뜨리지 못한 이 나라 역시 결국 죄와 욕심과 불의 때문에 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 문제의 본질인 죄를 볼 줄 알기 때문에, 겨우 죄가 초래한 최말단의 그 나쁜 ‘결과’만 어떻게든 척결하려 애쓰고 우왕좌왕하는 인본주의적인 사회/정치 단체, 각종 모임 등에 별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 특히, 죄를 근절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필요악’이 나쁘다고 없애자고 드는 정말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결코 동조하지 않게 됐습니다. (체벌, 사형 제도, 군 복무, 공권력 등)
  • 귀신, 초능력, 불가사의, 이상한 공상 과학 내지 음모론 쪽 얘기를 들어도 현혹될 일이 없어졌으며, 온갖 미신적인 관행들에 관심이 싹 사라졌습니다.
  • 남이 안 알아 주고, 남처럼 안 했다간 나만 바보 되고 손해 보는 상황에서도 선행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이걸 알면, 예수만 안 믿고 착하게 산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됨)
  • 우리를 창조한 절대자의 성품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그냥 기독교 경전이니까 상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구가 아니라 진짜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 예수님이 겨우 입에 발린 탁상공론으로 종교놀이나 하러 이 땅에 오신 게 절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 이런 식으로 쓸 거리는 얼마든지 더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이 가치관이 딱 잡힘으로써 제가 얻은 영적, 물질적 복과 정신 건강상의 이득,
    그리고 그 덕분에 다른 쓸데없는 이상한 이념이나 사상, 집단, 이단 종파, 혹은 연예/오락 쪽에 심취하지 않고 사고 안 쳐서 절약된 돈과 시간은 제겐 정말 추정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매주 꼬박꼬박 교회 가는 데 드는 돈과 시간만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정말 바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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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22:05:01 (*.197.162.56)
589

어느 부자가 롤스로이스를 몰고 사막을 횡단하는 모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막 한가운데서 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고장 나 버려 완전히 못 움직이게 되었다.

 

부자는 어쩔 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챙겨둔 무전기로 롤스로이스 측에 고장 신고를 했다. 그러자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대형 헬기가 나타나더니 그에게 번쩍번쩍한 다른 롤스로이스 신차를 내려 준 후, 고장 난 차를 싣고 떠나 버렸다.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 엄청난 대응 속도와 일 처리에 감탄한 그는 그대로 무사히 사막 횡단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롤스로이스 측에서 아무런 연락이나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았다. 새 차를 헬기로 보내 준 만큼 분명히 적지 않은 돈이 청구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심스럽게 생각한 그는 롤스로이스 측에 찾아가 물어 보았지만, 담당자는 그런 서비스는 들어 본 적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황당했던 그는 “아니 분명히, 내가 사막에서 여행할 때 차가 고장 나서...”라고 말했지만, 그 순간 담당자는 그의 말을 끊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객님, 저희 롤스로이스는 고장 나지 않습니다.”

영국의 롤스로이스(Rolls-Royce)는 어떤 차인가?

세계 최강의 명예와 자존심을 자랑하는 최고급 초호화 수제 자동차이다. 전세계적으로 연간 6천여 대만 생산해서 1천여 대밖에 팔지 않는다. 컨베이어 같은 양산 시스템의 도움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기술자의 수작업으로 만든다. 차 한 대 만드는 데 꼭 사람처럼 10개월이 걸린다.

 

그러니 자동차 값부터도 수십억을 호가하는 비싼 가격이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구매자의 신분이 자격 미달이면 팔지 않는다. 구매자의 유동 자산이 최소한 3천만 달러 이상이 되어야 하고, 그에 합당한 명예와 인격,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지위를 갖춰야 한다.

 

이 롤스로이스는 세계에서 가장 우아하게 달리는 자동차로 알려져 있다. 시속 125km로 달려도 차 안에서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밖에 들리지 않고 커피 잔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괜히 명품이 아니다. 롤스로이스를 한 대 사면 이 차를 만들고 검사하는 모든 과정이 기록된 역사책이 한 권 동봉된다고 한다. 한번 고객에게 판매된 차는 폐차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회사가 그렇게 자기네 명예를 걸고 끝까지 책임진다.

 

그러니, 오지에서 다른 자동차라면 몰라도 롤스로이스가 고장으로 뻗어 버린다는 것은 롤스로이스를 만든 회사의 경영 철학상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비록 차가 물리적으로 뻗었을지언정, 회사의 관점에서는 자기네 명예를 걸고라도 고장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걸 초월하여, 아예 애초에 고장이 나지도 않은 것처럼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저 부자의 일화가 실화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칭의 교리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는 예화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문제에 관한 한, 겨우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땜질 처방을 준비하시지 않았다.

 

구원은 죄사함 그 이상이다. 죄만 용서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걸 깨끗이 잊어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까지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 개개인을 롤스로이스보다 훨씬 더 귀중한 인격체로, 아예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드실 것이다. 이 너무나 놀랍지 않은가?

 

그 놀라운 계획을 안다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뻔히 알면서 왜 선악과나 만들었나?” 같은 불평은 절대 안 하게 된다. 평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던 감정, 교회의 같은 지체들 사이에서 불편하던 감정, 쓴 뿌리 같은 것도 100%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그냥 해소된다. 큰 숲을 보는 안목이 생기면, 작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아웅다웅 하는 다툼은 거의가 무익하고 의미 없다는 걸 깨우치기 때문이다.

 

“고객님, 저희 롤스로이스는 고장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는 애초에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롤스로이스 비유를 잊지 말자.

여기서 또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롤스로이스가 고장났으면, 저 부자처럼 롤스로이스를 만든 회사에다 문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픈 삼류 정비소에 맡겼다가 불량 부품으로 차를 더 망가뜨리게(세상 거짓 종교들) 해서는 안 된다.

 

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권능에 감격하여 우리 모두가 그분 앞에 왕관을 벗어 내놓는 날이 올 것이다. 할렐루야! 이걸 겨우 에덴 동산 아담 시절하고 비교를 한단 말인가?

 

끝으로, 하나님께서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만큼이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 죄인들도 그 때엔 하나님의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잊혀지고 버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겪을 고통은 단순히 뜨거운 불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나마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일말의 선과 악이 뭔지 일깨워 줬던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다는 것... 그리고 이게 누구 때문도 아니고 자기가 선택한 결과라는 자책감이 그들을 영원히 슬픔과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을 것이다.

 

우리가 받을 빛이 밝은 것만큼이나 그들에게 드리워질 어둠도 짙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답은 명확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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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용묵
2010.01.12 22:35:41 (*.197.162.56)
594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하늘의 반대말로 자주 언급되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장소입니다. 사탄 마귀가 인격체인 것만큼이나 지옥도 문자적이고 명확한 장소입니다.

 

성경은 지옥이 이 땅 아래에, 다시 말해 지구 내부에 있다고 아주 평이하게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어 ‘지옥’은 말씀, 하나님 같은 용어만큼이나 성경적인 개념이 담긴 무척 잘 만든 말입니다.

그들이 땅을 파고 지옥으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그들을 붙잡으리라.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리리라. (암 9:2)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시 139:8)

(킹 제임스 이외의 모든 성경들은 구약에 지옥이라는 단어가 사라졌습니다. 전부 무덤, 음부, 스올 등으로 변개! 이 치명적으로 중요한 영적 진리를 다 가려 버린 것만으로도 가짜 성경은 당장 쓰레기통으로 던져야 합니다.)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지구 내부에 빈 공간이 있는지는 현대 과학으로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저 지진파로 맨틀, 외핵, 내핵 같은 것만 파악하고서 지구 내부는 엄청나게 뜨겁다는 것 정도밖에 모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성경과 매우 일치하는 관측 결과이지요. 다만, 정말 땅껍데기(지각)만 벗겨내면 맨틀에서부터 지옥이 바로 나오는지, 아니면 외핵/내핵 정도는 돼야 하는지는 여러 문헌을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던 요나를 기억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이적을 요나에다가 비유했을 정도로 요나는 성경적 예표가 매우 큰 인물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단순히 기절해 있거나 말똥말똥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 죽었고 지옥까지 갔다가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 나왔습니다.

이르되,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내가 지옥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욘 2:2)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마 12:40)

구약성경에서 큰 물고기라고 나오던 녀석은 바로 고래였다고 예수님께서 보충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죽은 직후, 물고기 뱃속에 있던 자신의 혼이 점점 바다 깊숙한 곳으로 하강하고, 바닷물 밑바닥보다 더 가라앉다가 지표면을 뚫고 지옥에까지 이르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묘사가 요나서 2장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사흘 동안 지옥에 갔다 오셨다고 말하면, 우리나라 교회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행 2:27. 앞 구절의 주어, 문맥을 파악해 볼 것)

정체 불명의 이상한 신앙 고백인 사도신경에조차 영어 원문엔 그분이 지옥에 가셨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이 문장은 삭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시지 않고서야,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몇 번이고 반복하신 분이(요 4:14, 7:37 등), 십자가상에서 갑자기 왜 “내가 목마르다”(I thirst.)라고 갈증을 호소했겠습니까? (요 19:28)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뜨거운 불지옥에서 저주와 형벌을 감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예수님도 모두 죽었다가 지옥까지 갔다 온 후 살아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옥은 실질적인 고통의 장소입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 (눅 16:23-24)

우리는 유일하게 실존 인물의 실명까지 거론되는 부자와 나사로 얘기가 비유라고 믿지 않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물 찍어서 좀 적셔 달라는 애원과, “I thirst.”를 한번 오버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병원, 특히 치과에 가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스케일링할 때의 그 고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ㅜㅜ 제가 만약 불신자였고 누군가가 제게 “치과에 안 가는 것 이상으로 지옥엔 절대 안 가야 된다”고 말을 꺼내고 복음을 전한다면, 저는 최소한 동기 부여를 느끼고 뭔지 말을 들어 보기는 하겠습니다. 더구나 마취도 없이 수술을 해야 하고 과거 광견병에 걸린 부위를 불로 지지던 시절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런 처방은 안 받았겠습니다.

 

지옥은 치과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장소이며, 인류 역사상 행해졌던 그 어느 잔인하고 처참한 고문이나 처형 방법보다 더 큰 고통을 1분, 1시간, 하루, 1년, 100년도 아닌 영원무궁토록 당해야 하는 곳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들의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로다. (중략) 누구든지 밤이나 낮이나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 (계 14:11)

그 날들에는 사람들이 죽음을 구하여도 찾지 못하겠고 죽기를 바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계 9:6. 이 구절은 물론 지옥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대환란 문맥이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가 않는 때가 있음을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이기 때문에 소개합니다.)

유대인 학살 독가스실, 일본군의 731 부대 생체 실험, 일본 여고생 시멘트 사건, 난징 대학살, 폭스의 순교사화에 기록된 중세 종교 재판 등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지옥에 대해서 가장 생생한 예표를 보여주시는 곳은 단연 화산입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불과 유황 그 자체이죠. 또한 포항제철 용광로(마 13:42) 같은 곳도 아주 좋은 비유입니다.

 

하지만 이런 걸 일반 사람이 현장으로 직접 보기는 쉽지 않으니, 다른 예를 들자면 영화 타워링이나 대연각 호텔 같은 처참한 화재 현장에 비유할 수도 있고(특히 밤에 발생한), 사우나에다가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온이 섭씨 90도~100도대인 사우나에만 가도 불과 몇 분 후 금세 땀이 나고 혀가 쑥 나오고 괴롭습니다. 바로 그게 지옥이라는 용액을 1000, 10000분의 1 이상으로 희석한 후 솜방망이에 묻혀서 정말 맛만 잠깐 본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불은 사람에게 공포감을 주고 사람을 통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고문하면서 살갗을 인두로 지지거나, 아니면 아예 화형에 처하거나. 화상은 다른 부상보다도 더욱 고통스럽고 흉측하기 그지없는 흉터를 남기며, 평생 절대 당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상처입니다. 더구나 안면 화상은 사람 인생 말 그대로 끝장 냅니다.

 

그리고 그 불의 최종 완전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4, 46, 48. 변개된 가짜 성경들은 지옥의 무서움을 3회나 반복하여 경고한 44, 46절을 삭제함.)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막 9:49)

그 반면 지옥이 아니라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간 주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든 능지처참을 당했든 그 어떤 방식으로 뼈도 못 추리게 처참하게 죽었더라도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내가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말씀은 정말 위대하고 어마어마하며, 인류 역사상 무수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참 생명을 선사한 엄청난 말씀입니다.

 

교리적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지구 아래에 있는 지옥은 훗날 불 호수(계 20:14-15)로 대체됩니다. 텅 비어 있던 지옥에 카인이나 비슷한 연배의 죄인이 지옥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후, 지옥은 아담 이래로 죄 가운데 죽은 수백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커져 왔습니다. 지구가 차츰 더워지고 있는 이유도 이산화탄소 온실효과 때문이 아니라 아래의 뜨거운 지옥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후략) (사 5:14)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 같이 사람의 눈도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느니라. (잠 27:20)

카인에 대해서는 유 11 참고. 신약 성경에서 부정적인 악인으로 언급된 구약 인물은 지옥에 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발람도 마찬가지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구약에서는 죄 짓고 사고 친 게 잔뜩 기록된 사람이라도, 신약에서 입 싹 씻고 의인이라고 좋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롯, 삼손, 다윗 등.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회 성도로서 신약 성경에서 부정적인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 인물은 지옥 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 데마 등.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교리도 있거니와, 이런 사람이 지옥에 갔다면 오늘날의 교인들 중에서도 구원받을 사람 별로 없습니다.

 

죄 가운데에 죽은 사람들은 지옥에서 이미 불에 절어서 시꺼멓게 타고 말 그대로 벌레처럼 오그라든 흉측한 모습으로, 온 세상이 끝난 후 백보좌 심판석에서 하나님 앞에서 최후 변론을 하게 됩니다. 사 66:24는 직접적인 그 문맥은 아니지만, 저 장면이 어떨지에 대한 좋은 힌트를 제공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몰라서 예수 안 믿었다”, “나는 평생 한 치도 죄 안 지었다. 다른 인간들도 그 상황에서 나만큼만 살라고 해 봐라!”, “내가 저 놈만 아니었으면 예수 믿었다” 등등 수많은 변론이 오고 가고, 이때는 구원받은 사람들도 참관하여, 살았을 때 예수쟁이 행세 똑바로 못 한 것, 그리고 자기 가족, 친구들이 최후 선고를 받고 영원히 불 호수로 이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펑펑 ‘울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울음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계 21:4)

 

하지만 그 변명이 통했으면 애초에 지옥에 가질 않았겠죠. “어허. 네가 그런 환경만 있었으면 정말로 죄 안 짓고 회개하고 구원도 받았을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불신과 죄가 하나님의 영적 디버깅을 통해 다 탄로나게 되면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도저히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죄인이 하늘로 가면 하늘이 하늘이 될 수가 없어집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여 2천여 년 전 육신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고 지옥에서 사흘 밤 낮 죄의 형벌까지 대신 받아 주었다. 그런데도 너는 선과 악을 분명히 판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을 사랑하며 살았고, 양심을 통해서, 또 주변의 모 형제나 모 사이트를 통해 n번이나 복음을 전해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고의로 거절했다.”

아마 흉악한 범죄자, 독재자뿐만 아니라 역대 교황, 이단 교주들, 세상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던 위인들까지 지옥에서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본디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반역하고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 녀석들을 집어넣으려고 만들어진 장소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마 25:41) 사람이 가라고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지구 내부를 열로 뜨겁게 달구고 영원한 지옥불을 켰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자기 의지로 제 발로 가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사탄 마귀와 그의 졸개들도 궁극적으로는 훗날 불못으로 던져질 정죄 받은 존재입니다. 성경은 지구 땅속에 초자연적인 이상한 괴물들이 있어서 훗날 대환란 때 하나님의 허락 하에 뛰쳐나올 거라고(계 9) 예고하고 있지만, 흔히 만화 전도지 같은 데에 그려진 것처럼 그들이 지옥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죄인들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소위 ‘저승사자’ 역할을 한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자기도 그런 곳에 앞으로 떨어져 영원히 형벌 받을 텐데 주객이 바뀐 노릇이죠. 또한 그런 걸 묘사하고 있는 요즘 소위 지옥을 보고 왔다는 간증(?)은 결코 성경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지옥이 없다면 크리스천들은 바보같이 매주 밖에 뛰쳐나와 거리 설교를 할 필요도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성가시게 굴 필요도 없으며, 아니 같이 아예 실컷 죄를 즐기면서 살다 하늘나라 가면 되지 이렇게 세상을 역행하면서 힘들게 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전산학으로 치면 P=NP임이 증명되고 NP를 P로 다항 시간만에 바꾸는 알고리즘이 발견된 것처럼 살면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이든 신약 시대이든, 북한이나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은 애든, 혹은 한국이나 미국에서 인터넷 쓰면서 지낸 사람들이든 똑같이 하나님이 제시한 믿음의 대상을 믿어서 의롭게 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 대상이 오늘날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어차피 살인자와 간음자의 성품을 지니고 불가항적으로 태어난 죄인인 우리를 불가항적인 이유로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인하고(자살도 포함) 간음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걸 지적으로 받아들일 능력조차 안 되는 아기, 저능아 등은 무조건 패스이고 죽으면 그냥 하늘나라 갑니다. 잘 교육 받고 교양과 학식을 갖추고서 착한 일 한 게 나쁜 일 한 것보다 더 많으면 구원 받는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어거지 잣대가 아닌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정녕 공평하고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한 번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고통의 장소 지옥은 참 생명이 있는 기독교만이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는 교리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증거하시지 않는 거짓 종교라면, 사람 겁 주고 기분 나쁘게 하는 이런 교리를 내세웠다가는 남아나질 못했겠죠.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예 혼의 멸절을 가르치고 천주교는 연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중간 장소를 내세워, 성경이 말하는 칼같이 명확한 내세의 개념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세를 앞두고 교회들조차, 생명력을 잃고 배도하고 타락하면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 중에서 문자적인 지옥을 부정하는 똑똑한 바보들이 점차 늘고, 불신자들은 자기 욕망을 잘 긁어 주는 그런 거짓 교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딤후 4:3-4).

 

세상은 어떻습니까? 지옥하고는 수준이 비교가 안 되는 곳에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비유해서 씁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damn, hell 같은 단어는 영어에서는 거의 욕설로 쓰이고 있습니다. 부모, 가족, 친구가 지옥에 가지 않고 구원 받길 눈물로 기도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는 마당에, 이는 지옥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영적 실상입니다. 심지어 요즘 미디어에서는 착한 사람들밖에 없는 단조롭고 따분한 하늘 대신, 지옥이 더 화끈하고 신나고 재미있다는 이미지까지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세의 지옥에 대한 관념이 무뎌질수록 현 세상이 갈수록 지옥처럼 변한다는 말은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옳은 말이며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아무리 죄인들이 기분 나쁜 지옥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해도 지옥은 엄연히 있습니다. 지옥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자유주의자들이 진정 당신의 혼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그나마 지금까지라도 유지되어 온 게 지옥이라는(심지어 불신자에게도 막연히)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저도 신이 기껏 창조해 놓은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는 개념이 별로 기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죄악을 보니 지옥이 없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을 절감하며, 나라도 지옥에 안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죄인이 지옥에 가는 것은 현 세상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가는 것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불신자 중에는 지옥을 무슨 공갈 협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옥이 없다고 믿으면 그냥 그렇게 거부하고 귀 막으면 되지, 그게 왜 공갈 협박으로까지 들릴까요? 그런 사람들일수록 이 악한 세상에 대한 불평과 신 원망은 꼭 제일 많이 하더군요. 지옥을 공갈 협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이 지경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눈물과 고통, 울부짖음이 가득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고통은 이를 훨씬 더 능가할 것입니다.

 

각종 종교, 인격 수양, 교육 따위는 사람을 결코 바꿔 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구원의 길을 받아들여서 이 시간에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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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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