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Terry Watkins

http://www.av1611.org/resur.html 을 번역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거나, 아니면 가장 황당한 사기극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가?

하버드 대학의 Royal Professor인 그린리프 박사는 법학계에서 최고의 석학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의 유명한 저서 A Treatise on the Law of Evidence는 많은 이들이 최고의 법학 고전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린리프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허구라고 믿었으며, 그래서 그 ‘허구성’을 단판승부로 완전히 폭로해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꼼꼼히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예상과는 정반대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An Examination of the Testimony of the Four Evangelists by the Rules of Evidence Administered in the Courts of Justice (법정에서 준용되는 증거 규범에 의한, 사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에 관한 검토)라는 책을 썼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지 않았다면, 사도들은 자신들이 진술한 사실을 그렇게 확고하게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Simon Greenleaf, An Examination of the Testimony of the Four Evangelists by the Rules of Evidence Administered in the Courts of Justice, p.29)

그린리프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법적 증거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상 증거가 가장 확실한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이 넘쳐나는 증거들에 매료된 나머지, 그린리프 박사 자신도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렸다고 한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꿔 놓았는가? 어떤 증거가 그린리프 박사의 심정을 정반대로 돌렸을까? 그는 이성적으로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는 어떤 사실을 발견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약 2천 년 전에 있었던 장면을 되살펴 보기로 하자. 그 으스스하던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흉악한 폭도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했다. 그분은 빌라도의 앞에 선 채 공개 석상에서 침 뱉음과 저주, 비웃음을 당했다. 그분은 신성 모독자로 낙인 찍혀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갈 3:13)

 

예수 그리스도는 저주가 된 채 죄인의 신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공개적인 치욕과 수치를 당하며 죽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철저한 치욕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희망은 오로지 그분이었다. 여기 있는 11명의 사나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분을 3년간 믿었다. 당시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던가? 우린 그분이 물 위를 걷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분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분이 사나운 폭풍을 잠재우는 모습도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그 날 밤에는 좌절과 혼란에 빠진 11명의 사나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이제 그분이 죽으신 것처럼 죽는 일만 남았다. 얻어맞고 모욕당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신성 모독자로. 그리고 치욕이란 치욕은 다 당하면서!

 

마가복음 14:50은 이렇게 진술한다. “그들이 다 그분을 버리고 도망하니라.”

 

사도 베드로는 불과 며칠 전에 이렇게 으스댔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리이다.” (마 26:35) 그 날 밤, 그는 군중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좌절과 혼동을 겪었고 상처를 입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분은 신성 모독자로 몰려 십자가형을 당하셨다! 여인 중 하나가 베드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들과 한 패라.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막 14:71)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였고 끝내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다.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들은 모두 그분을 버린 채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수치심과 공포에 잔뜩 질렸던 이 사람들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이 채 경과하기 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죽음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하게 선포를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말을 들어 보라.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이적들과 표적들을 통하여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정받은 사람으로 삼으신 나사렛 예수를 ... 너희가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셨느니라. 우리가 다 그 일에 증인이로다.

두려움과 혼동으로 가득했던 이 사람들을 사납고 담대한 사자로 돌변시킨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을 불러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니라.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눈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너희가 판단하라.” (행 4:18-19)

그리고 20절을 보자.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노라.”

 

이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이들은 무엇을 들었는가?

 

구타, 위협, 투옥, 고문, 심지어 죽음조차 입다물게 하지 못한 이 사건은 대체 무엇인가? 사도행전 5장을 보면 그들은 감옥에 갇히고 두들겨 맞았다. 4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

 

12명의 사나이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훗날 참혹한 죽음까지 감수하였던 것일까?
여러분들이여, 이런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온 우주의 역사상 딱 한 사건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제자들이 부활을 꾸며냈다는 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해 시체가 남아 있다면 로마 정부는 그 시체를 천지에 공개하고 다녔을 것이다. 기독교는 당시 불길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으며, 그 열기를 꺼뜨리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극을 꾸며냈다고 주장하는 글이 영국 Royal College of Physicians의 저명한 저널에 실렸다. 이 글은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사건들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 . 십자가에서 일찍 끌어내려질 수 있게끔 죽은 척 연기도 했다.”

 

그런데 이 주장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11명의 사나이들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기억하는가? 이 사람들은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본 증인들이다!

“처음부터 목격자(EYEWITNESS) 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전해 준 그대로 ...” (눅 1:2)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 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요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나니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벧후 1:16)

그들은 자신들의 증언을 자신들의 피로 봉인하기까지 했다. 순교자로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거짓 증언을 위해? 그것도 거짓인 줄 본인이 뻔히 알면서?
12명의 사나이들이 하나같이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고 있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단순히 거짓말을 퍼뜨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증언이 거짓임을 자신들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는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들 역시 거짓임을 알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11명이나 되는 사람이 동일한 거짓말을 전하기 위해 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기까지 한 사례는 결코 찾을 수 없다. 더구나 자기도 부지중에 속고 있는 게 아니라 거짓말인 줄을 뻔히 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노팅검에 있는 세인트 존 대학의 학장인 마이클 그린은 사도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하고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로 하여금 그분이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신을 부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린리프 박사의 글을 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지 않았다면, 사도들은 자신들이 진술한 사실을 그렇게 확고하게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소 출신의 사울(Saul of Tarsus)라는 사람이 또 있다.

 

사울은 예수가 거짓 메시야요 신성 모독적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독교를 원천 박멸하는 것이 그의 최고의 열망이 되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사울로 말하건대 그가 교회를 크게 파괴하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끌어다가 감옥에 넘겨주더라.” (행 8:3)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치려고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행 9:1)

사울은 기독교의 가장 맹렬한 박해자였다. 어느 날 그는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어 다마스커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문서를 소지 중이었고, 그들을 향한 적개심은 한층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사울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들을 둘러 비추더라.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 (행 9:3-5)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목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심이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악랄한 원수였던 사울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인 사도 바울로 변한 것이다!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돌변시켜 그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완전히 헌신하도록 만들었을까? 훗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주후 67년, 로마에서 참수까지 당한다.

 

이에 대해서도 가능한 설명은 단 하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인 Gilbert West와 Lord Lyttleton은 기독교는 말도 안 되는 허구 설화일 뿐이라고 믿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반박하기로 결심했다. Lyttleton은 사울의 회심 사건에 대한 반박을 맡고, West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반박하기로 했다. 그들은 증거들을 신중하게 합리적으로 조사만 하다 보면 기독교 신앙을 아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증거를 조사한 후 그들은 제각기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Lyttleton은 다소의 사울이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사도 바울이 된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Gilbert West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확고부동한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West는 Observations on the History and Evidences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와 증거에 관한 관찰)라는 책까지 썼다.

 

전직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 주임 교수이며 여러 유명한 책의 저자인 토머스 아놀드 교수는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는 일에 능숙한 석학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여러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고 이에 관해 글을 남긴 사람들이 제시한 증거의 무게(신빙성)를 가늠하는 일에 다년간 몸담아 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표적,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더 탁월하고 완벽한 증거로 입증되는 사실을 나는 인류 역사상 단 하나도 알고 있지 않다.”

 

영국의 전직 재판장인 Darling 경은 부활의 증거들을 조사해 본 후 이렇게 말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실이든 부수적이든, 부활의 증거는 압도적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니, 최소한의 지성을 갖춘 곳이라면 세상의 그 어느 법정이라도 부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려면 당신은 압도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모조리 눈 딱 감고 외면해야만 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실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께서 ‘죽음 후에 있을 일’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옥이라고 불리는 장소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하셨다. 그분은 하늘보다 지옥을 여덟 배나 더 자주 언급하셨다! 누가복음 16:23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은 어떤 사람에 대해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은 지옥에 있었다고!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 예수님은 계속해서 24절에서 묘사하셨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예수님은 불과 고통으로 가득한 장소인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신 것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맞다면?

이제 당신에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는가?

교회 출석, 종교 행위, 침(세)례, 선행, 성사 등을 아무리 행하더라도 소용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주로 먼저 믿지 않았다면 당신의 1년, 1개월, 한 시간, 1분, 혹은 심지어 1초 후의 미래가 불바다 행이 될 수가 있다. 그것도 영원토록!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지더라.” (계 20:15)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지옥에 가길 원하지 않으신다. 벧후 3:9 “주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예수님은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죄값을 갚고자 험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오로지 당신이 지옥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 (계 1:5)

 

친구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이 페이지를 나가지 말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최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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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프로그래머
홈페이지 http://moogi.new21.org (블로그 http://moogi.new21.org/tc )

2010.01.11 22:56:47 (*.143.235.52)
469

영적성장4단계.jpg

 

영적 성장 4단계

1. 확실한 기초(고전3:10,11)

2. 성장을 위한 첫 걸음(벧전2:1,2)

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갈6:14)

4. 성령의 열매(롬 7:4)

 

자신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셨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출생(거듭남)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죽은 후 지옥이 아닌 하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구원과 휴거(혹은 죽음)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인 갓난 아이(new born babe)에서 어린 자녀(little child)로, 어린 자녀에서 다시 청년(young man)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버지(father)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기를 원하고 계시며 이를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진리침례교회 성도들이 체험해 가고 있는 이 신앙의 여정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 네 권의 책이 출생에서 성숙에 이르는 길라잡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진리침례교회 회중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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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2009.12.12 07:28:39 (*.34.52.166)
535

제임스 W. 낙스의 칼빈주의 강의

5장 성도의 견인

 

이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강의에 포함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의 이해를 위해 역자가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1. 제임스 낙스 형제의 칼빈주의 강의에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부분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성도의 견인”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그나마 “덜”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것도 잘못된 교리입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한 답으로서의 결과는 맞지만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2.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는 결과적으로 답은 맞습니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답을 도출하는 풀이 과정이 잘못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노력으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3.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인해서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면 처음에 구원을 행위로 받은 것이여야 논리적으로 맞게 됩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4.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해 주셨습니다(요 19:30).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요 1:12).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도 다 해 주시는 것입니다(요 10:29).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상급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행위가 필요합니다(고전 3:13-15). 그러나 구원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행위는 필요없습니다.

 

5. 구원을 받고 구원을 유지하고 구원을 완성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고 이루시고 있는 일이며 이루실 일입니다. 구원의 전 과정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은 출생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한 번 받은 구원은 어떠한 이유로든 간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롬 8:38-39).

 

6.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몸이 변화될 것입니다(고전 15:35-49). 그러면 우리의 몸의 구속도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몸도 변화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영적인 몸을 입게 되는 몸의 구원도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어도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몸이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몸도 변화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입니다.

 

7.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을 끝까지 인도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이 주님의 선택을 거절해도 저항할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성도의 견인”은 답은 맞지만 풀이 과정이 잘못되었습니다. “성도의 견인”이 잘못된 교리이기는 하나 앞의 다른 네 강령처럼 “심각하게” 잘못된 것은 아니기에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고,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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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제임스 W. 낙스의 칼빈주의 강의

4장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이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강의 Calvinism Part 4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한 것입니다. 음성 파일을 듣고 번역한 것이라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Kjv74@hanmail.net

 

1. 우리는 칼빈주의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TULIP”의 “I”에 해당하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라는 칼빈이 주장한 교리를 공부할 차례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는 복음의 말씀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으로,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상을 반대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는 않겠지요.

 

2. 우리는 그동안 에드윈 팔머의 “갈빈주의 5대 강령”이라는 책을 인용했습니다. 66면에1) 보면 팔머는 다음의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성적인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성령님께 달려 있으므로 ‘구원받기 위해서 믿을 필요가 없다.’든지 혹은 ‘성령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든지 하는 논의는 하지 말자.” 팔머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할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팔머가 왜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지 아세요?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팔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에 대해서 아무런 주저함 없이 진실을 말하자면, 성경은 우리가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이성적인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믿을 때까지 성령님께서 움직여 주시도록 기다리자’라고 논의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60쪽에 걸쳐서 성령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이제 와서는 성령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실 때까지 믿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4. 계속 팔머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기다리지 말고 믿으라. 그러면 그 믿음은 당신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을 필요조차 없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진짜 이렇게 믿는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 봐야 합니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교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은혜로 구원하실지 창세 전에 선택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당신은 결코 그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당신은 반드시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구원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은혜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를 인간이 수 세기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 왔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비교해 볼 것입니다.

 

6. 사도행전 7장을 보세요.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51절부터 보세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 스데반이 지적하는 사실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비춰보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유대인들은 항상 성령님의 뜻에 저항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시대에도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나 혹은 수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설교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령님의 뜻에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7. 마태복음 23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거역합니다. 34절부터 보세요.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대언자들과 지혜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리니 너희가 그들 중의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들 중의 더러는 너희 회당들에서 채찍질하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며 그들을 핍박하리라.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기까지 하시며 보여주신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모으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4-37)

 

8.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뜻은 너희를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모이지 않았다. 너희는 내가 부를 때 응답하여 오지 않았다. 너희는 내 뜻에 반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한 것입니다. 37절을 다시 보세요.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죠?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려는 안전과 보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38절을 보세요. “보라, 너희 집이 버림받아 너희에게 황폐하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을 모아서 보호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의 인생에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했습니다.

 

9. 요한복음 6장과 12장을 보시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여러분과 논쟁할 때 인용하기 가장 좋하하는 구절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믿을 것도 미리 정해져 있으니 따라서 어떻게 되든 구원받게 되고 반대로 버림받게 되어 있으면 무엇을 해도 결과적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러한 논쟁도 필요없을 것입니다. 이것도 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고 따라서 어떤 강력한 논증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논증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10. 요한복음 6:44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 이 구절은 아마 칼빈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일 겁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 구절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와서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 선택된 사람들이다.” 정말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생각과 같을까요?

 

11. 요한복음 12:32을 보세요.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나 곧 내가 땅에서 들리면 (주님께서 땅에서 들리셨나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아버지의 이끌림을 받지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몇 명의 사람이나 자신에게로 이끌것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모든 사람” 입니다.

 

12.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6:44의 논리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과 구원받은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이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이끌림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면,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이끌림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누군가는 그 부르심에 저항해서 오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를 생각해보세요. 주님께서는 잔치를 마련하시고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탁자마다 풍성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자리가 지정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잔치의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 오지 않자 손님 명단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기입하여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초청하셨습니다.

 

13. 칼빈주의자들은 항상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기 전에는 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가서 1:4을 보세요. “나를 이끄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리이다. 왕께서 나를 자신의 방들로 데려가셨으니 우리가 당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즙보다 더 많이 기억하리니 곧바른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버지의 이끄심이 필요하다면 왜 아가서에서처럼 이끌어 달라고 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이끄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이끌어 달라고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할 겁니다. “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이끌어 주실 때까지 이끌어 달라고 구할 수 없어요.”

 

14.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분명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백화점에 갑니다. 백화점에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 가면 됩니다. 백화점에는 갈 수 있으면서 하나님께는 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1에서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지만 그 다음 절에서는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걷고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억지로 따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락한 마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서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세상으로는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끄심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 이끌어 달라고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해 주실지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그리고 주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보세요.

 

15. 히브리서 12:25을 보세요. 우리는 지금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말라.” 여기서 먼저 질문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할 기회조차 없다면 왜 말씀에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계속해서 히브리서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땅에서 말한 자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분에게서 돌아선다면 더더욱 피하지 못하리로다.” 본문은 누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24절에 의하면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16.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게로 오라”(마 11:28)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계 22:17)고 하시지만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와서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던 것처럼 이제 복음의 말씀을 거절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구원자를 거절했던 것처럼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서 거절할 수 없다면 이러한 구절이 성경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타락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 왔습니다.

 

17. 디모데후서 3장을 보세요. 이것은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6절부터 보세요.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이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니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딤후 3:6-8) 요한복음 14:6에 의하면 진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디모데후서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모세를 대적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택한 단어를 보세요. 바로 “resist”2)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resist)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왜 하필 “저항할 수 없는(irresistible) 은혜”라고 부르는 걸까요? “거절할 수 없는”이나 “대체할 수 없는”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요? 왜 하필 진리에 저항(resist)하고 있다는 말씀이 명백하게 존재하는데 불구하고 “저항할 수 없는(irresistible) 은혜”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참으로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네요.

 

18. 어떤 사람들은 “칼빈주의자들이 이러한 것을 모른다고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되묻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산 지 얼마나 되셨나요?” 자신들의 입장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성경을 다섯 구절 이상 인용하는 것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나요?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제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갈빈주의자와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요한복음 6장의 구절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저는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다시 그와 만나서 그의 주장이 잘못된 것을 입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25년 전에는 서로 다른 교리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성경을 펴 가며 그런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누구도 성경을 가지고 그런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흥미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마음은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흥미 없는 주제라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맥도날드에서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성경을 펴고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과 성경을 가지고 논쟁을 하면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25년 동안 이 나라가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19. 예전에 우리가 뉴서머나 지역에서 집집마다 방문하며 복음을 전할 때, 다른 교파나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저를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오게 해서 30~40분 동안 논쟁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밝혔고 제가 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 봤으며 성경을 가지고 한 시간 가까이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일을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20. 이사야 63:10을 보세요.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셔서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 만일 아무도 성령님께 저항하지 않았다면 왜 성령님께서는 괴로워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성령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성령님께서 괴로우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행한다면 성령님께서 근심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이시나요? 성령님께서는 인격을3) 가지고 계시므로 괴로워하고 계신 겁니다.

 

21. 창세기 6:3을 보세요.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그의 날들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자신의 뜻을 완전히 굽히고 들어오는 상대방과 다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뜻에 거역해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사람과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는 “옳게 행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싫은데요.”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명령하는 대로 하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우리도 우리 계획이 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싸우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겁니다.

 

22. 아마 여러분은 성경을 믿기 때문에 이곳에 왔을 겁니다. 아마 제가 하는 말에 동의를 하시기 때문에 이곳에 앉아 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이 정말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도 분명하지 않나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지요.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에 비춰보면 매우 명백합니다.

 

23. 잠언 1장을 보세요. 22절부터 보세요. “단순한 자들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단순함을 사랑하겠느냐? 비웃는 자들이 어느 때까지 자기들의 비웃는 것을 기뻐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지식을 미워하겠느냐?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도다. 내가 내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도 중시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권고를 무시하고 내 책망을 전혀 원치 아니하였은즉(잠 1:22-25) 이 말씀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교리가 양립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귀를 막고 듣기 싫다고 외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항할 수 있는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24. 이제 마지막으로 로마서 10장에서 한 구절 찾아보고 웨슬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웨슬리가 알미니안주의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그의 글을 대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의 글과 설교를 읽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웨슬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웨슬리의 글들을 읽어보면서 웨슬리가 그런 말을 했는지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웨슬리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한 게 아니라 “당신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당신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칼빈주의의 다섯째 강령과 일치하는 가르침입니다.

 

25. 로마서 10:21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가 종일토록 내 손을 내밀어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하게 하였노라, 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가? 주님께서는 아침 8시에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전 11시에도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오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오후 5시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저녁 9시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밤 11시 반에도 “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팔을 활짝 벌리셨고 손을 땅끝까지 뻗으셨습니다. 말씀을 전파하셨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26. 존 웨슬리는 수백만 킬로미터를 말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말의 등 위에서 책을 읽었고 글을 썼습니다. 그의 형제인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 중에 “Oh Horrorble Decree”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15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 끔찍한 교리여4)

(찰스 웨슬리)

 

! 친절하고 은혜로운 비둘기여,

죄인들이 주님의 사랑을 거절함이

저에게는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거절하면서 말합니다.

“그것은 공짜가 아니야.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게 아니야.

주께서 버리기로 하신 사람들에게는

열매 맺을 수 없는 부르심일 뿐이야.”

 

그들은 주께서 신실하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하여 말합니다.

“주께서는 죄인의 근처에만 오셨을 뿐,

죄인들의 죄악과 그들이 받은 저주를 옮겨 주시려 하며

하늘나라를 보이시고 ‘들어가라’ 하시지만

여지없이 그들을 지옥으로 던지시네.”

 

오 끔찍한 교리여!

그것이 어디서 왔건 간에

그들의 지옥 같은 모독을 용서하소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늘에 있는 자신의 왕좌를 떠나

인간의 친구요 구원자가 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신

어린 양께 누가 책임을 돌릴 수 있으랴!

 

오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

저는 주님의 마음을 느낌니다.

복음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느끼시는 그 감정을 저도 공유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죄를 대속하신 벌레가 되신 것을,

주님의 피를 짓밟는 그들을 보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는지!

 

그들은 감히 주님을 제한하려 하고,

주님의 얼굴을 모독하여,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부인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모두 자신들만 취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주님의 의를 빼앗아

효과 없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죄인들은 복음 듣기를 싫어하여 말합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말씀하신 그대로 의도하신 것은 아니었어.

주님은 모두에게 은혜를 제공하시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지.”

 

죄인들은 주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조롱하며 주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의로운신 하나님께서는

태로부터 저주받은 그들을 위해,

타락해 버린 그들을 위해,

말씀을 믿지 않는 그들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

대부분을 그냥 지나치시고,

그들 중 몇 명의 불쌍한 사람들을 죽이시어

지옥으로 가도록 강요하셨네.

주님께서 그들을 죽게 하시어

결코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네.”

죄인들의 죽음의 책임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돌리는

악마의 궤변이여!

 

그들은 소리지르고 울며

만군의 주께 간청하며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수백만의 죽은 혼을 

희생 제물로 드리며 말합니다.

“이러한 것이 주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주님의 위대한 뜻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오 하나님이여, 얼마나 오랫동안

사탄이 분노하게 하십니까!

주께서 잘못 행한 자에게 복수하지 않으십니까!

뱀의 머리를 박살내지 않으시렵니까?

확실히 주님께서 그를 우리의 발밑에 두시리니

마귀와 그의 교리가

불타는 구덩이로 던져지리이다.

 

일어나소서, 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죽임 당할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주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유지하시고

피의 희생 제물을 굳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인해서,

주님의 은혜는 값없는 것이니,

주의 십자가를 높이 드시어

모든 사람을 주께로 이끄소서.

 

오 주님의 은혜의 정당함이여,

우리가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의 팔에 안겨 있음을

모든 혼들이 입증합니다.

순수한 복음의 말씀을 주시어

주의 설교자들이 넘쳐나게 하시고

모두 함께 동일한 주님을 고백하게 하시어

주를 위해 죽게 하소서.

 

나의 생명을 주께 바칩니다.

내 심장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도 주께 바찹니다.

이것들을 모두 바쳐서

죄악을 용서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께서 선하심을 입증하게 하소서.

주께서는 죄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 나의 말을 들어주시고

나를 주의 능력의 팔로 안으사,

주여, 저로 고난을 당하도록 부르시어

고통의 시간을 맡게 하소서.

죽음에서도 제가 선포할 것은,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라.

주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음이라.

 

찰스 웨슬리는 이 시에 자신의 서명을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 시를 설교했습니다. 오늘날 감리교회나 웨슬리안 교회는 어떻게 설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거친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27. 칼빈주의는 사람이 만든 신학체계일 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 칼빈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면 무조건 알미니안주의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칼빈주의를 반대한다고해서 알미니안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믿으면 되니까요. 칼빈주의에 대해서 논쟁 하다 보면 있어서 교부들(church fathers)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는 상황입니다. 29절부터 보세요.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사도행전 20:29-30) 갈라디아서 3:1도 보세요.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28. 계시록 2장과 3장을 보시면 여러 교회들이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에서 돌아서 진리로부터 떠나게 하였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의 상황이라면 왜 교부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저작들을 성경보다 더 신뢰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완성되기도 전에 성경에서는 교회가 건전한 교리와 순수한 진리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글에는 신뢰를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쓴 글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배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쓴 글이 성경과 다르다면 우리는 간단하게 “성경이 맞고 이 사람이 틀린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증오가 가득 찼다던가, 아니면 우리가 자아 중심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도 같은 방식으로 대합니다. 제가 쓴 글이나 하는 말이라도 성경과 다른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맞고 제임스 낙스는 틀리다.”고 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할 때 교부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바른 것이 무엇인지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과 사람들의 글이 서로 다르다면 성경이 항상 옳고 사람들이 항상 틀립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29. 칼빈주의 체계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도 못할 만큼 타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피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흘려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으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을 강제적으로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이 은혜를 선택된 사람은 저항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교리는 칼빈주의 체계 내에서는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일지는 몰라도 성경적으로는 잘못된 이단 교리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1) 이것은 원서의 면입니다. 원서의 제목은 “Five Points of Calvinism”입니다.-역주

2) “resist”라는 단어가 우리말 성경에서는 “거역”이라고 되어 있지만 칼빈주의자들은 보통 이 단어를 “저항”이라고 부릅니다.-역주

3) 인격은 영어로 “personality”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과 의지가 있고 감정을 느끼는 독립된 객체라는 것입니다.-역주

4) 이것은 찰스 웨슬리의 시 “Oh Horrorble Dcree”를 의역한 것입니다. 그대로 번역하기에는 고어체로 인한 어려움이 있어서 약간 요약하여 의역했습니다. 웨슬리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그대로 전해지게 하였습니다. 이 시의 좀 더 나은 번역을 알고 계신 분은 역자에게 연락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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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2009.11.30 01:22:12 (*.34.52.166)
481

제임스 W. 낙스의 칼빈주의 강의

3장 제한된 속죄

 

이 내용은 James W. Knox 형제의 강의 Calvinism Part 3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한 것입니다. 음성 파일을 듣고 번역한 것이라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Kjv74@hanmail.net

 

1. 우리는 칼빈주의라는 신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라 제롬주의입니다. 또한 제롬주의는 제롬주의가 아니라 운명주의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미리 정해졌다는 사상입니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사람은 특정한 행위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설계해 놓으시고 입력하신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행해진 모든 행위는 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하나님은 “비열한”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과 타락과 사악함의 원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는 것이라”(요일 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히 7:26)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2.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은 “TULIP”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전적 타락”의 교리는 비성경적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 또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공부할 칼빈주의의 셋째 강령은 “제한된 속죄”입니다. “속죄”의 성경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값으로 치르신 대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사람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정되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다고 가르칩니다. 버림받기로 정해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피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그저 예정된 대로 지옥에 들어가고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3. 이것은 매우 이상한 교리입니다.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피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아무런 저항이나 의사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지옥에 들어가고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제가 불못에 던져지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주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제한된 속죄”에 대해서 에드윈 팔머가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해서 쓴 책을 다시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팔머는 이 책에서 칼빈주의를 설명하면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죽으시려고 의도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죗값을 지불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지옥에 가셨는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주신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과 의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만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는가? 오랫동안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 질문에 두 가지 방식으로 답변해 왔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답했고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답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알미니안주의자나, 칼빈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5. 계속 팔머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자들, 심지어 가룟 유다를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다고 말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은 가룟 유다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은 가룟 유다 만큼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성경은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약 2:10)? 성경은 모두가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갈 3:22)? 모든 사람이 똑같은 죄인 아닙니까? 그런데 왜 칼빈주의자들은 유다를 지목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자기들의 아내를 지목하지는 않을까요? 왜 팔머씨는 “그리스도께서 심지어 나의 아내를 위해서도 죽으셨다고?”라고 반문하지는 않는 것일까요? 왜 하필 유다를 지목할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유다라고? 유다는 정말 나쁜 사람이잖아. 예수님은 그렇게까지 사악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을 거야.” 유다가 그렇게 사악한 사람인가요? 우리 중에 사악하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칼빈주의의 뒤에는 자아중심적인 생각,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6.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았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자신이 지옥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칼빈주의자는 만나보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들의 아이들은 언약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믿는 칼빈주의자는 만나보지 못했을 겁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라고 믿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가기로 예정되기는 했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7. 계속 팔머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들은(알미니안주의자들)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은 자들의 죗값까지도 갚아 주셨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속죄란 보편적인(우주적인) 봉투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봉투가 마련되어 있지만 어떤 사람들만 봉투를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피를 흘리신 것만 아니라 흘려버리신 것이 된다.” 미국의 칼빈주의자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우리의 죄보다 큰 은혜(Grace greater than our sin)”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과는 다르게 주님의 은혜는 죄보다 더 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다면 그것은 헛되이 흘린 피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믿음과 다른 찬송을 부르면서도 그들은 “아멘”이라고 외칩니다. 강단에서 하는 말에는 무조건 아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8. 팔머의 말을 좀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들(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의도하셨지만 오직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는 낭비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자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자들이 “제한된 속죄”를 이야기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9. 이제 우리는 성경 구절을 몇 개 살펴보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 오르실 때 아담을 만들기 전에 계획하신대로, 구원하기로 생각하신 자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으면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만일 선택된 자들이 창세 전에 이미 구원 받은 것이라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선택한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러 오셨는데 선택된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음에도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10. 요한일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보세요.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여기서 ‘우리’가 누구지요? 1절에서 말한 어린 자녀들을 포함한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요일 2:1-2) 자, 여기서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에 근거해서 답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믿는 사람들인 우리의 죄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온 세상의 죄들도 위한 것입니까? 물론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함이었습니다.

 

11. 요한복음 3:16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팔머의 말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이것에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의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선택된 자들이 구원받게 하신 것이다. 이 본문(요 3:16)에서 말하는 세상은 이 세상에 사는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을 것을 선택합니다. 만일 자신들이 믿는 것이 성경에 없으면 몰몬교도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면 그만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의 의미를 바꿔서 자신이 믿는 것에 맞추면 그만입니다.

 

12. 칼빈주의자들이 읽는 방식으로 요한일서 2:2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선택된 자들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 칼빈주의자들은 본문의 의미가 이렇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장 15절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의 선택된 자들이나 세상에 있는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의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의 선택된 자들에게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의 선택된 자들에서 나느니라. 세상의 선택된 자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 우리가 본문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칼빈주의자들은 여기서는 세상은 선택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미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맞으니까요. 그러나 2절의 “온 세상”은 말 그대로 “온 세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맞으니까요.

 

13. 잘 보세요. 성경은 우리들, 믿는 자들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로 드려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제한된 속죄”가 아니라 “보편적인 속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보세요. 14절부터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므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노라.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대속은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대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 16: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온 세상을 위해서 대속하신 것이 아니라면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의 교리가 맞다면 성령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정되어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그저 들어가시면 될 뿐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낭비해 가며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14. 요한복음 4장을 보세요. 39절 부터 보세요.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그분께서 내게 말하였다, 하고 증언하므로 그 도시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을 믿더라.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께 와서 그분께 간청하여 그분께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를 것을 구하니 그분께서 거기에 이틀을 머무르시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믿고 그 여자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요 4:39-42)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 요한일서 2장에서 말씀하시는 “세상”인가요? 아니면 “세상의 선택된 자들”인가요?

 

15. 누가복음 19장도 보세요. 10절을 보세요.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잃어버려진 자입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게 아닙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하겠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주님께서는 잃어버려진 자를 찾으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잃어버려진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16.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선택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도 보세요. 1절부터 보세요.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되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왕들이 다 구원받은 선택된 사람들인가요? 모든 왕들이 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님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권위를 가진 자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경찰관들과 교도관들이 다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모든 학교 선생님들이 구원받은 믿는 사람들입니까? 모든 정치인들이 선택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선택된 사람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가 이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1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사람”은 선택되고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17. 계속해서 디모데전서 2장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 이것은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모든 사람”이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4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도 선택된 사람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채 죽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죽은 것입니다.

 

18. 계속해서 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 디모데전서 2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일서 2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화해헌물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속입니다.

 

19.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살펴본 구절들을 인용하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세요. 우리가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가서 방에 있는 모든 만화책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아이는 모든 만화책을 가져왔습니다. “여기 모든 만화책을 가져왔어요.” “아니 얘야 파란색 책만 가져오지 그랬니.” “어머니께서 모든 만화책을 가져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모든’은 파란색을 의미한단다.” ‘모든’은 파란색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서 모든 양말을 가져오너라.” “어느 것을 가져 갈까요?” “모든 것을 가져오너라.” “어머니 모든 양말을 가져왔어요.” “아니 얘야, 흰 양말만 가져오라고.” “어머니께서 모든 양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모든’은 흰색을 의미한단다.” 아무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미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런식으로 말씀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데도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람”이란 자신들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언약으로 들어온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20.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침례교인이면서 칼빈주의자인 경우 입니다. 칼빈주의자면서 개신교인 일 수는 있지만 침례교인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믿는 자들이 신앙의 간증과 순종의 의미로 침례를 받는다고 하면서 물뿌림(세례)을 통해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겁니다.

 

21. 칼빈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위해서 죽으실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마 26:50). 유다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유다가 선택된 자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다를 선택하셨습니다. “날이 밝으매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부르사 그들 중의 열둘을 택하시고 또한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시니라.”(눅 6:13) 유다는 주님의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이쯤 되면 칼빈주의자들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성경은 그걸 의미하고 있지 않아요.”

 

22. 베드로후서 2장입니다. 1절부터 보세요. 잘 보세요.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이들은 선한 사람들일까요, 악한 사람들일까요?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이 거짓 교사들은 선한 사람들일까요, 악한 사람들일까요? 당연히 악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이건 정말 끔찍한 일 아닙니까?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저주받을 이단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악한 사람들인지 보이시나요? 계속해서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들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정죄는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과 저주 받을 이단 교리들이 있고 이들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 주님께서는 이단 교리를 가지고 교회를 망치면서 정죄를 받을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의 죄도 대속하셨고 자신의 피로 그들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사셨는데도 이들의 끝은 정죄입니다. 이것은 “제한된 속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씀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말이야?”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위해 죽으셨고, 본디오 빌라도를 위해 죽으셨고, 헤롯을 위해 죽으셨고, 히틀러를 위해 죽으셨고, 저를 위해 죽으셨고,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24. 어떤 죄인도 다른 죄인보다 나은 죄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도 필요없는 선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겠습니까? 여러분은 죄의 순위를 정할 수 없습니다. 죄인의 순위도 정할 수 없어요. “저 사람은 죄를 400개나 지었지만 나는 두 개밖에 짓지 않았지.”라고 할 수 없어요. 두 개 밖에 짓지 않았다해도 그것을 알고 지은 이상 죄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도 전에 자신은 선택받은 자이며 따라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을 성경으로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믿을 것을 정해 놓고 성경으로 그것을 입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25.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믿는 것에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고 가르치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예정해 놓으시고 우리가 이렇게 믿도록 입력해 놓으신 것이니까요. 히브리서 2장을 보세요. 9절을 보세요.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 구절이 “제한된 속죄”를 말하는 것일까요, “보편적인 속죄”를 말하는 것인까요?

 

26. 로마서 5장을 보세요.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몇 명이나 죄를 지었나요? 모든 사람이지요. 죄의 결과로 몇 명이나 죽게 되었나요? 역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칼빈주의자들에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나요? 그들은 “예”라고 답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나요? 역시 “예”로 답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게 되었나요? “예”로 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될 기회를 가지고 있나요? 칼빈주의자들은 이 질문에는 “아니요”로 답할 겁니다. 왜 아닌가요? 문맥에서 “모든 사람”은 계속 같은 대상을 의미하지 않나요? 어째서 처음 세 번의 “모든 사람”은 정말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맨 뒤의 “모든 사람”은 “선택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27.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이 다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주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저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결정”으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주님의 대속을 거부하고 구원자를 거부하고 칭의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대속과 구원자와 칭의 없이 죽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대속입니다.

 

28.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합니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해석하고 계속해서 다른 주제로 논쟁을 전환합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논쟁에서 자신들의 근거를 성경으로 입증할 수 없으면 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갑니다. 거기서도 성경으로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면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립니다. 이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한 가지 주제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옥에 대해서 논쟁하다가 성경으로 입증하는게 마땅치 않으면 갑자기 천년왕국에 대한 것으로 넘어갑니다. 그들은 한 가지 주제에 머물러 논쟁을 끝내지 못합니다. 칼빈주의자들도 논쟁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독립 침례교회의 회원들도 비슷한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으로 상대를 완전히 논박하지 못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거나 이름을 들먹이며 욕을 합니다. 이건 유치원에서도 통하지 않는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기독교계에서는 통하나 봅니다. 다른 사람을 비아냥거리면서 이름을 부르고 욕을 하는 것은 논쟁에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29.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4절부터 보겠습니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문에 의하면 몇 명이나 길을 잘못 들었습니까? 모든 사람이지요. 주님께서는 몇 사람의 불법을 담당하셨습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성경은 “제한된 속죄”가 아닌 “보편적인 속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0. 우리가 칼빈주의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 칼빈주의자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마 18:11)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는 소유였던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양은 잃어버리기 전에는 원래 주님의 소유였던 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냥 비유일 뿐입니다. 성경은 잃어버린 양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동전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53장을 왜곡합니다. 양들이 길을 잃고 자기 길로 간 것을 주님이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원래부터 자신의 소유였던 것을 찾으러 오셨고 자신의 소유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31. 구원받은 자들이 잃어버린 양이었다는 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성경을 왜곡한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사야 53장에서도 중요한 단어 하나를 빠뜨렸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제대로 읽지 못한 부분을 한번 제대로 읽어보겠습니다. 6절을 보세요. 성경은 “우리가 다 양으로서 길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주님의 소유였던 양이 길을 잃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양 “같이” 길을 잃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들은 종종 길을 잃기 때문에 양들에 비유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양이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양 같이 길을 잃은 것입니다.

 

32. 칼빈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구원받지 않고 지옥에 갈 자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걸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의 대속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주님께서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익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값을 우리에게 치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내가 구원할 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그것들을” 행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29). 이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을 온 세상의 죄에 대한 희생 제물로 아버지께 바친 것입니다.

 

33. 주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시고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한 사람이 구원을 받든지 수 백만이 구원을 받든지 상관없이 주님의 피는 낭비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피는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처럼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최상의 동기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상급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는 낭비되거나 헛되이 흘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희생과 순종과 자기를 드리심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4. 이사야 53:10을 보세요.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사 그에게 고통을 두셨은즉”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다음의 표현을 보세요.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고 자기 날들을 길게 하며 또 주의 기뻐하시는 일이 그의 손에서 번영하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혼을 누구에게 드린 것일까요? 여러분에게 주신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아버지께 드린 겁니다.

 

35. 이제 디모데전서 4:10을 보세요. “이런 까닭에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당하나니 이는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요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구원자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라고 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구원자이시지요.”라고 말합니다. 예,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의 구원자도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자들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신데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요.

 

3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가 구원받기 전에도 저의 구원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도 여러분의 구원자였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를 원할 때, 바로 그 순간 구원자는 여러분 곁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는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구원자로 여러분 옆에 계셨던 겁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구원자로서 달려가기 위해 구원자로 계셨던 겁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지 전에도 예수님은 항상 여러분의 구원자였습니다. 여러분이 단지 그것을 믿지 않았을 뿐이지요. 여러분이 밖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자도 되십니다. 그들이 요청만 한다면 언제든지 구원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겁니다. 그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몇 사람의 구원자가 되시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자 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든 자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37. 디도서 2:11을 보세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사람들에게만,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38. 모세 때부터 예수님의 초림때까지 살았던 모든 유대인들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과거 예수님의 초림 전까지 살았던 모든 유대인들,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했던 모든 유대인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분 있나요? 아무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남침례교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모두 죽어서 하늘나라에 자동으로 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면 모두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교리를 들어 보신 분 계세요? 여러분은 이런말을 처음 들어봤을지 몰라도 요한복음 8장에는 그렇게 믿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니라,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위를 하고자 할 것이로되”(요 8:39) 주님께서 영원히 거하는 곳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임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은 당연히 하늘나라에 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쨌건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압니다. 단지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멉니다.

 

39. 갈라디아서 4장을 보세요. 4절부터 보세요.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주님께서는 누가 입양될 수 있게 하셨습니까?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지요. 이들은 모두 믿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3:10을 보세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저주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구속하셨습니다.

 

40. 히브리서 10장을 보세요. 28절부터 보세요.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히 10:28-29)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이 말씀은 성령을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아서 정죄를 받을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피가 이러한 자들을 거룩히 구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을 위해서도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셨다는 겁니다.

 

41. 저는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시고 놀라우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구원받을 기회조차도 주지 않고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리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로우심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지옥에서 고통받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들고 그것을 피할 길도 주지 않고 그저 고통의 장소로 보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리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이 충만한 분이신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을 볼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아, 이게 사랑이구나. 이게 바로 은혜구나. 이게 바로 자비로 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42. 이제 마지막으로 비교를 하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가도록 만드셨고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가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건 무엇을 믿건 상관없이 창세 전에 그렇게 예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43. 계시록 4장과 에스겔 33장을 보겠습니다. 계시록 4:11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존재합니다. 이제 에스겔 33:11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돌이켜 자기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돌이켜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떠나라.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하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쁨을 위해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자신의 악함 가운데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만드셨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도 아니고 원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44. 우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세번째인 “제한된 속죄”라는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주 다른 것이고 잘못된 교리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칼빈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은 칼빈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저 칼빈주의가 맞겠거니 옳은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이 잘못된, 비성경적인 거짓 교리라고 그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사상에 불과하며 성경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교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을 것을 우리가 결정하고 나서 성경이 우리의 결정을 지지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빚어내고 다듬고 지도해서 주님 앞에 올바른 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한된 속죄”에 대한 공부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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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신학원 강사 이우진 kjv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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